• “할아버지이~ 가까이 가서 한번 만져 보고 싶어.” 외할아버지 따라 장 구경 나온 신환(4세)이가 장 뒤쪽에 열린 가축 전으로 박경훈(61세) 씨의 손을 끌어당기고 있다. 병아리를 낳은 어미 닭을 비롯해 토종닭, 고양이, 개 등 갖가지 가축들이 좁은 우리 안에서 뒤뚱거리는 모습이 신기한지 쳐다보는 눈망울이 초롱초롱하다. 마치 작은 동물원 같은 풍경이다. 가축 전 끝머리에는 주인 따라온 장 닭 두 마리가 한낮인데도 하늘을 올려다보며 꼬~끼오 꼬~끼오를 연발하고 있었고, 그 옆에서 어미 품을 떠나온 백구형제가 우두커니 쳐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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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천장의 이분택(70세) 씨는 35년째 가축을 팔아 왔는데, 우리 토종닭이 점점 사라지고 있어 안타깝다고 한다. “내 얼굴이 장 닭 닮았다고 허대유.” 이 씨가 얼굴 가까이 장 닭을 갖다 대며 웃는 모습이 흑백사진 속 고향집 마당 같이 정겹다. 여름날이면 쑥으로 모깃불을 피워놓고, 평상에 앉아 닭이 닭장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추억은 지금도 서랍 속에 가지런히 앉아있는 풍경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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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년 9월 읍내리 장터거리에 개설된 진천장은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읍내리의 백곡천 주변과 시가지 동쪽 공터에 날짜 끝자릿수가 5일과 10일이 되면 들어선다. 장날이 되면 지역 상인들과 장돌뱅이는 물론 시골 할머니들이 산이나 들에서 수확해온 갖가지 농산물들을 고만고만하게 펼쳐놓아 향수 어린 진풍경을 자아낸다. 가을이 시작된 요즘 장터에는 제철인 밤과 호박, 콩, 고추, 무, 가지 등이 저마다의 색깔을 뽐내며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 가축 전 옆에는 20여 가지의 곡식 보따리가 정물화처럼 앉아있고, 장터 한쪽으로는 국밥집이 주욱 늘어서 있다. 장옥 없이 난장으로 길게 늘어선 진천장은 옛 장터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할머니들은 콩을 까면서도 옆 할머니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푹 빠져 있다. 가을 들판 소식을 콩속에 가득 담아 와 좌판을 펼친 김형언(77세) 할머니는 “병원 옴서 콩하고 도라지 갖고 왔어유. 내 손으로 농사 진 거라 팔리기만 하면 쏠쏠허구먼유”라며 가슴이 부풀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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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훈훈한 정이 좋아 5년째 진천장 나들이를 한다는 지암리의 공인식(72세) 할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진천 자랑 좀 해 달랬더니 소녀처럼 웃기만 하신다. 대신 옆에 있던 김 씨 할머니가 신이 난 듯 농다리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긴 돌다리구먼유. 지네가 기어가는 것처럼 보여 옛날에는 지네 다리라고 했지유.” 문백면 구곡리에 있는 돌다리 진천농교(鎭川籠橋)는 고려 때 만들어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8호다. 농다리라고도 불리는 이 농교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되고 긴 다리에 속한다. 천 년 세월 동안 전해 내려온 물과 관련된 오랜 이야기들이 지금도 마을 어르신들에 의해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2000년부터 천 년의 신비를 지닌 문화유산을 알리기 위해 매년 ‘농다리 축제’를 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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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장 무렵, 배낭에 밤을 가득 채워와 장바닥에 펼쳐놓은 이성명(69세) 할머니는 산에서 곧장 장으로 왔다고 한다.
      “가을볕이 좋아 산에 올라 갔구먼유. 요즘 산에 가면 밤이 지천에 떨어져 널렸어유.” 말하기에도 지친 듯 땅바닥에 주저앉아 주섬주섬 밤을 펼쳐놓는다. 이 씨 할머니는 “혼인날 폐백 때 시부모님이 치마폭에 던져준 밤을 먹어서인지 자식이 많아유.” 설핏 웃는 모습이 왠지 애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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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날이 기다려 지구먼유, 팔 게 없을 때는 산에 나가 팔릴만한 것을 만들어유. 차비만 벌면 되니께유.” 살아가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할머니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숭고하기까지 하다. 좌판에 펼쳐 놓은 물건은 몇천 원에 불과하지만 밤 한 톨도 허투루 하지 않고 귀하게 여긴다. 밤은 선조를 잊지 않는 나무라 하여 제사상에도 빠지지 않고, 폐백 올릴 때는 시부모가 아들을 많이 낳으라며 며느리 치마폭에 던져주는 풍습도 있다.

     

     

     

  • 한쪽에서는 구절초가 굴비처럼 엮어져 가을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다. 약재상을 운영하는 박 씨(58세)는 “요즘 들어 여자들이 부인병에 좋다고 사러오기도 하고 향이 좋아 베갯속에 넣는다며 사가는 사람도 있네유”라며, 마디가 아홉이라는 구절초는 꽃과 줄기, 잎과 뿌리를 음력 9월 9일에 채취해야 약효가 가장 좋다고 한다. 장날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나온다는 권점선(82세) 할머니가 옆에서 듣고 있다 끼어든다. “냉장고가 없는 옛날에는 떡 시지 말라고 구절초 잎을 얹어 며칠씩 먹기도 했지유. 말려서 좀이 슬지 않도록 옷장에 넣어두기도 하고….” 상처가 났을 때 구절초 잎을 찧어 붙이면 곪지도 않았다고 한다. 약이 귀했던 옛날에는 산에서 나는 약초의 쓰임새가 컸을 것이다. 요즘 시골 장터에는 웰빙이라는 이름으로 검증되지 않은 잡초가 약초로 팔려나가 안타깝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흔한 풀이었는데, 올여름부터 약초로 팔리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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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씨 할머니는 장날마다 나오기에 장사하는 할머니들을 거의 알고 있었다. 흰 저고리와 까만 치마에다 꽃고무신이며 목걸이, 귀걸이까지 온갖 멋을 잔뜩 부렸는데, 허리가 기역으로 굽어 손수레 없이는 걷기가 힘들다고 한다. 좌판에 들러 쉬면서 말참견으로 싸우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목소리로 이긴다는 권 씨 할머니가 지난 장날 열린 ‘생거진천문화축제’ 이야기를 꺼내자 초청된 가수 노래가 좋았느니 안좋았느니 할머니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중심이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 이야기가 나오는 TV 드라마에 열을 올리는 경우가 많다. 

  • ‘생거진천문화축제’는 진천군 대표 축제다. ‘전통과 현대의 어울림! 소통하는 생거진천’을 주제로 백곡천 둔치에서 열린다. 생거진천(生居鎭川)은 천혜의 자연환경과 비옥한 농토, 후덕한 인심에서 붙여진 것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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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곡천이 끝나는 길목에서 호박과 마늘을 갖고 나온 도리원의 신천호(78세) 할아버지와 장복순(75세) 할머니를 만났다. 노부부가 농사지어 가져온 것들을 사람 왕래가 뜸한 곳에 펼쳐 놓아 파장이 돼가는데도 마수도 못했다며 울상이다. 경운기에 싣고 나온 물건을 다시 주섬주섬 담는 모습을 차마 지켜볼 수 없어 발길을 돌렸다. 외국에서 가이드 하다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찾아 장돌뱅이로 나섰다는 성기원(38세) 씨는 여주 말린 것을 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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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의보감, 약초본까지 들먹이며 여주가 당뇨에 좋다는 설명을 늘어놓지만 물어만 보고 가버리기에 지칠 때도 있단다. 그러나 할머니들의 풋풋한 인심과 인정에 끌려 장이 서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갈 것이라고 한다. 처음 장에 왔을 때 느낌이 어땠느냐는 물음에 “할머니들 삶이 굉장히 치열하면서도 인정이 넘쳤어요. 그리고 농촌경제가 장에서 이루어진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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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8년도 진천장에서 만난 등에 북을 맨 아저씨의 난전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기억이 난다. 북쟁이 아저씨의 구수한 입담에 웃으며 박수들을 치는 바람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유행가를 한 가락 뽑아 가며, 배꼽을 거머쥐는 그의 입담에 사람들이 자리를 뜨지 못했다. “이불 하나에 단돈 만 원”하고 구성진 노래를 부르다가도, 호주머니를 뒤적이는 사람만 눈에 띄면 재빨리 이불을 보여주었다. 

    • 장이라는 공간은 사람과 사람의 다리가 되어, 윗마을 친구를 만나기도 하고, 잊어버렸던 친척을 만나기도 한다. 홍시감 몇 개 갖고 나온 박 씨(81세) 할머니는 홍시만 한 붉은 무게로 앉아 “사람들 보고 싶어 나왔구먼유.”라고 말한다. 사람들 사이로 정(情)도 붉게 익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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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천장 외에 열리는 장은 거봉포도, 돌실사과, 꿀수박, 생거진천쌀, 진천장미, 그리고 덕산약주로 불리기도 하는 천년주가 나오는 덕산장(4일, 9일), 쌀, 이월장미, 이월관상어, 시설채소가 특산물로 나오는 이월장(1일, 6일), 관상어와 장미가 많은 광혜원장(3일, 8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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