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 리, 먼 전라도 길."
    이 시는 한하운의 ‘전라도 길’이다. 가도 가도 먼 전라도 천리 길로 들어서는 곳이 바로 나병환자들이 모여 사는 소록도 가는 길이다. 사슴처럼 맑은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산다는 소록도는 100여 년의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숱한 고통을 이겨내며 짓뭉개진 몸과 가슴으로 이룩한 외딴 섬 소록도에도, 2009년 3월부터 희망의 다리가 놓여 자유롭게 드나들게 되었다.
    소록도 ‘갱생원’. 약이 좋다는 입소문 때문에 약이 잘 팔린다는 소 씨(85세) 할머니는 "섬이나 육지나 다 사람 사는 이야기가 있는 법이제."라며 말끝을 흐린 채 먼 하늘만 바라본다.

     

  • "새벽밥 먹고 요것을 갖고 갈거나 말거나 고민을 솔짠이 했당께. 요렇게 폴릴 것 같았으면 쪼까 더 갖고 나올 것인디, 색이 참말로 이쁘제. 요것도 요령 있게 삶아야 색이 이뿌고, 연해야 무치면 제 맛이 나제이." 금산에서 고구마 순을 갖고 나와 파는 김 씨(76세) 할머니의 말이다. "금산에도 큰 마트가 생겨갖고 필요한 것은 다 있제. 장까지 나온 것은 사람들 얘기도 듣고, 바람 쐴라고 그라제." 한참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아들네 집은 잘 갔다 왔소?"라며 한 할머니가 인사를 하고 지나간다. 김 씨는 아들이 싫어해 아들 모르게 장사한다고 한다. "효자여! 내가 일헐깨비 걱정해쏴. 한 장 볼라면 이삼일은 꼬박 맹글어야 갖고 나오제. 내가 번 돈은 맘대로 써. 맛난 것도 사 묵고, 빙원에도 가지만. 자식들이 준 돈은 고상해서 번 돈 인줄 안게 모태 놨다가 손주들 오면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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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다도해를 품은 고흥은 백제시대부터 이어진 해상 교역로의 거점으로 긴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최근에는 우리나라 우주개발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디딤돌 ‘나로호’가 성공적으로 발사되면서 국내 최대 ‘항공우주도시’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매년 4월 중순경이 되면 ‘고흥우주항공축제’가 열린다. 또한 고흥의 자랑은 멋과 맛을 대표하는 ‘8품(品), 9미(味), 10경(景)’이 있다. 8품(品)은 해풍을 맞고 알차게 자란 해미(海味), 유자, 석류, 마늘, 참 다래, 꼬막, 미역, 한우다. 9미(味)는 참 장어와 낙지, 삼치, 전어, 서대, 생굴, 매생이, 유자향주, 양념 발라 구운 붕장어이고, 10경(景)은 옛 중국의 위왕이 세수를 하다가 대야에 비친 여덟 봉우리에 감탄하여 제를 올리고 이름 지었다는 팔영산, 소록도, 고흥만, 나로도의 해상경관, 비자나무숲, 승천의 꿈을 안은 영남 용바위, 금산 해안경관, 마복산 기암절경, 아침을 여는 해돋이의 명소 남열리 일출과 사라지는 뒷모습이 아름다운 중산 일몰이다.

 

  • "여그선 수입한 건 눈 씻고 봐도 없어. 내가 파는 바지락도 여서 캔 신선한 것이여." 여자만과 득량만에서 잡히는 피조개며 새조개, 꼬막, 바지락이 남도장을 주름잡는다며 입담 좋은 박 씨(75세) 할머니가 갯벌자랑에 열을 올린다.
    "온 나라가 개발이니 뭐니 하면서 여그만 쏙 빼놓는가 싶어 쪼까 서러웠는디 요새 와서 개발 안한 덕을 솔짠이 본당께, 그래서 여그 갯벌은 살아있제." 육지에서 계절마다 나오는 푸성귀가 다르듯이, 바다에도 철마다 다른 해조류가 나온다는 박 씨 할머니다.

     

  • 햇볕이 잘 드는 양지바르고 물길 좋은 곳에서 자라는 유자는 1980년경 고흥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했다. 자식들을 대학까지 보낼 수 있었던 대학나무이자 효자나무였던 셈이다. 육지에서 유자가 나오면 외나로도는 삼치가 제철이라는 권안덕(67세) 씨가 풍양양조장에서 만든 유자향주 맛이 일품이라며 자랑한다. "고흥 유자로 맹근 향주가 세계명품이라고 헙디다. 여그서 나는 쌀과 유자청이 들어간 한약재로 3년 동안 발효시킨 전통준디, 맛이 징허게 조아라우. 고흥 와야 맛 보제 서울서는 안 폰다고 하드만…." 유자향주는 2012년 여수세계박람회 성공개최 다짐대회 오찬에서 공식건배주로 선정되기도 했었다. 삶은 옥수수를 팔던 권 씨는 "녹동까지 왔승께 옥수수맛은 봐야제." 라며 옥수수 같이 하얀 이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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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장 넘어 녹동항으로 가면 바닷가로 생선 파는 가게가 줄지어 있다. 녹동항에서 잡힌 생선만 취급한다는 손춘애(55세) 씨가 갯장어를 다듬고 있어 "생선 다루는 솜씨가 예술이네요?"라고 말을 건네자 수줍게 웃는 그녀의 모습이 소라를 닮아 보인다. 여름이 제철인 갯장어는 잘 물어대는 습성 때문에 ‘하모’로도 불린단다. 어찌나 성질이 사나운지 뭍에 올려놓았는데도 달려드는 바람에 손 씨는 병원신세까지 진일도 있다고 한다. 자연산 갯장어는 야행성이라 낮에는 바위틈이나 진흙 속에 있다가 밤이 되어야 먹이를 잡기 위해 나온다. 일본 강점기 때는 우리나라에서 잡히는 갯장어를 모두 일본으로 빼돌렸을 만큼 일본인들이 좋아한다고 한다. 샤브샤브로 먹는 갯장어 맛이 일품이라고 한다. 손씨는 "아무리 속상혀도 바다만 보면 속이 풀린 게 여그를 못 떠나요. 처음에는 부끄러워 말이 목구녁에서 쏙 들어가 불더니 지금은 내 것 사라는 소리가 착착 나온 당께. 장터에 나 같은 여자 없어봐 김빠진 맥주제." 주위에 모여 있던 여인네들의 웃음소리가 바다로 흘러넘친다. 

  • 생선 색이 변하는 여름철의 뜨거운 날씨에는 문 닫은 집들이 많았다. "아직 마수도 못했지만 여그 보이는 바다가 내 친구여…"라는 장 씨(77세) 할머니의 말속에 헛헛함이 배여있다. 서대를 비롯한 양태, 장어가 하얀 속살을 드러낸 채 수직으로 엎드려있다. "하루하루 나오는 것이 밑지는 일인디 습관처럼 나와 있당께. 한 개라도 폴아야 쓴디 손님은 안 오고 날 파리만 몰리네." 말린 생선에 달라붙는 파리를 쫓던 장 씨 할머니의 하소연이다. 날파리만 쫓는 여름보다는 추운 겨울이 훨씬 좋다는 할머니는 옷 장사, 고무신 장사, 비단 장사, 양잿물 장사 등 양은다라에 이고 다니며 안 해 본 게 없다고 한다. 그러다 녹동 사는 남편을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고 한다. "늙은 할매 소원이 뭐겠어 새끼들 잘 되는 거 말고…." 마수도 못한 할머니 얼굴이 자식 이야기가 나오자 금세 바다 빛처럼 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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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흥 녹동장(전남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은 1947년에 개설된 정기시장이지만 오일장인 3일과 8일이 되면 거금도에서 갖고 나오는 해산물과 농가에서 가져 온 농산물로 장터가 풍성해 진다. 옥수수를 비롯해 깻잎, 고구마순, 호박잎, 풋고추, 가지, 오이, 호박 등 푸성귀 밭이 장터로 옮겨 온듯 널려 있다. 도로변에서 난장을 펼쳐놓은 몇몇 할머니들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어 같이 퍼질러 앉았다. "여름인게 이렇게 앉아서 폴고 그라제 겨울에는 장에 나올 시간 없서, 유자농장에 가 일하면 얼매나 뜻뜻하고 좋은디…." 내 발로 걸어서 장에 다닐 수 있는 것이 큰 행복이라는 할머니들의 느리디 느린 삶이 오늘따라 유달리 값져 보인다.

       

    • 고흥 녹동장 외의 인근 장으로는 참다래, 석류, 유자, 고구마, 마늘, 벌꿀을 비롯해 생선을 즉석에서 구워파는 고흥장(4, 9일), 참다래, 미역, 마늘, 김이 많이 나오고, 충무사와 거북바위가 있는 도화장(3, 8일), 동강민속체험관이 있고 한우, 방울토마토, 오이, 참다래가 많은 동강장(1, 6일), 나로우주센터가 있고 유자, 삼치, 바지락이 많이 나오는 봉래장(2, 7일), 유자, 꼬막, 마늘, 쌀로 유명한 과역장(5, 10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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