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 정영신의 장터순례(17)전북 고창장

                              “황토밭서 해풍 맞고 질군게 수박이 맛나제”

                                                             위풍당당 고창수박 시선 한몸에
                                                             효소 담그는 각종 들풀들 풍성
                                                             상설시장이나 3·8일에 오일장
 
고향이 시골인 사람들이라면 여름철에 원두막에 올라앉아 동네 사람들과 함께 쪼개 먹던 수박 맛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밤잠을 설치며 원두막을 지키던 동네 어르신 몰래 살금살금 기어가선 잘 익은 수박을 찾아 손가락으로 통통 두드리며 서리해 먹던 시절은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 있다.

 전북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의 고창장 입구에선 금딱지를 자랑스럽게 붙인 고창수박이 사람들 시선을 온몸으로 받고 있었다. 대산면에서는 6~7월쯤 당도가 높고 색깔이 선명한 수박이 출하된다. 수박은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재배하지만 우리나라 수박이 가장 맛이 좋다고 한다.

 고창장은 상설시장이지만 3일과 8일이 든 날이면 더욱 많은 사람이 몰린다.

 팥칼국수도 먹을 겸 장도 구경할 겸 나왔다가 잠시 쉬고 있던 최씨 할머니(93)로부터 고창수박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여가 시뻘건 황토 땅이 많은 건 알제? 황토밭에서 질구는(키우는) 데다 해풍이 불어싼게 맛이 나제.” 최씨 할머니가 연신 땀방울을 닦으며 수박 자랑을 하자 고무줄을 길옆에 길게 펼쳐놓은 노점상 김씨(53)가 끼어든다. “오메, 할매요. 어째 수박 이야기만 허요. 요강이 뒤집어진다는 복분자 자랑도 좀 헛시오. 어째 할매도 쪼까 거시기헌갑네.” 말해놓고 멋쩍어 웃는 김씨 얼굴에도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린다. 고창은 밭이 많아 보리·수박·메밀·고구마·양파·땅콩 등을 주로 심었는데 요즘은 복분자밭이 늘어나고 있다.

 소나기 한줄기가 왔다 갔는데도 여전히 바람 한점 없이 푹푹 찌는 날씨다. 땀을 뚝뚝 흘리며 고구마순을 다듬고 있는 김진순씨(61)는 들판에 난 풀을 뜯어와 벌여놓았다. 김씨 아주머니가 갖고 나온 비단풀과 외꽃·나팔꽃·수세미·쇠비름 등은 주로 효소를 담그려는 사람들이 사 간다고 한다.

 “요즘은 땅에 나는 것이 모두 약초라고 헙디다. 이 쇠비름은 오행초라고도 허는디 다섯가지 병이 낫는다고 허요. 옛날에는 뜯어다 돼지 먹였던 풀인디 요새 사람들은 너무 많이 알아 탈이여.”

 오행초(五行草)라는 이름은 쇠비름이 우주 만물의 기운을 그대로 품었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또한 쇠비름을 오래 먹으면 장수한다 하여 장명채(長命菜)라고도 한단다. 요즘은 건강에 좋다는 이야기만 나오면 잡초건 독초건 너도나도 장에 갖고 나온다. 한편으로는 정확한 처방도 모르고 검증되지도 않은 풀들이 약초라는 이름으로 장터에 유행처럼 퍼져 걱정스럽기도 하다.

 600여년 동안 고창군민과 함께해온 모양성(고창읍성)에선 군민의 날이 있는 가을이면 ‘고창모양성제’가 열린다. ‘한바퀴 돌면 다리 병이 낫고, 두바퀴 돌면 무병장수하고, 세바퀴 돌면 극락을 간다’는 전설이 있어 지금도 여인네들이 머리에 돌을 이고 성벽을 따라 도는 풍습이 남아 있다.

 어느 장터에서나 역마살이 끼어 전국을 떠돌아다닌다는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선천적으로 돌아다니기를 좋아한다는 박씨 할아버지(86)는 계절에 맞는 물건을 골라 갖고 다닌다. 여름이라 부채를 팔러 나왔다는데, 운동 삼아 다니는 것이라 차비만 벌면 된다고 한다. 온종일 장터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 고향 사람이라도 만나게 되어 막걸리 한잔 나누며 옛날이야기 할 때가 가장 즐겁다는 박씨 할아버지다.

 대장간에서 낫을 고르던 이씨 아저씨(68)는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걱정스레 올려다보며 넋두리를 한다. “글줄이나 배운 놈들은 다 빠져나가고 우리 같은 반송장만 남아서 농사진디 하늘이라도 도와줘야제. 날씨 땜시 나락이 큰일 났당께.” 부인이 좋아하는 고등어자반과 밭농사 ‘일꾼’인 낫을 사 들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는 초로의 농부 뒷모습에서 땅 냄새가 물씬 풍겨 나온다.

 고창 땅에서는 고창장 외에도 여러 장이 열린다. 해리염전에서 생산되는 소금이 특산물인 해리장(4·9일), 수박으로 유명해 여름철이면 수박축제가 열리는 대산장(2·7일), 쌀·보리·고추·고구마가 많이 나오는 흥덕장(4·9일), 복분자술·작설차·풍천장어·대추나무나침반이 나오는 상하장(1·6일), 어물전이 풍성한 무장장(5·10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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