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이 드라이브가자."하면 만사 제쳐놓고 따라 나선다는 고씨(72세)는 해안도로변 길 따라 장날마다 나온다. 경운기를 타고 장보러 가지만 장날만 되면 잔칫날 같이 즐겁다는 고씨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 "매일보는 바다지만 영감하고 바닷가로 달리니 촘말로 좋수다." 영감이 좋아하는 자리돔 젓갈을 담그기 위해 나왔다며 자리돔 자랑이 대단하다. 제주에서만 맛볼 수 있는 자리는 5월에서 8월까지 잡히는데, 6cm에서 10cm 정도의 크기로 횟감이나 구이는 물론 젓갈을 담기도 한다. 자신이 태어난 자리를 지키기 때문에 자리돔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데, 제주에서는 흔한 물고기라고 한다. "물이 좋수꽈?" "1㎏에 얼마우꽈?" 제주도 방언으로 흥정하는 모습이 정겹다.
장입구에는 제주답게 귤이 종류별로 나와 있고, 자두며 복숭아, 참외, 수박 등 색색의 과일들이 화려하기만하다. 제주산 망고와 여러 종류의 귤을 팔고 있는 최경수(35세) 씨는 귤 종류만 80가지라며 그 중 세미놀은 수확하자마자 찾는 사람들이 많아 육지까지 올라가지 못하고 제주에서만 팔린다고 한다. 세미놀은 늦은 봄이나 초여름에 수확하는 노지 감귤이다. 야생으로 자라기 때문에 못생겼지만 비타민C가 일반 귤보다 높다고 한다.

  • 바다로 둘러싸인 섬답게 어물전에는 자리돔, 옥돔, 우럭, 조기, 갈치 등 해산물이 풍부하다. 특히 갈치는 은빛을 뽐내며 좌판에 일렬로 누워있다. 고선아(44세) 씨는 15년 동안 제주갈치만 팔아 왔는데, 좋은 갈치를 내다 팔기 위해 밤낚시를 한단다. 특히 성산포갈치를 알아준다는 고씨는 밤바다에 낚싯줄을 드리우고 갈치가 잡히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다 보면 새벽녘이나 되어야 갈치가 걸려든다고 한다.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낚는 봄 갈치가 있는가 하면, 밤에만 낚는 가을 갈치도 있다며 "어둠을 뚫고 올라오는 은색갈치의 꿈틀거리는 모습이 바로 예술입니다"라고 덧붙였다. 옆에서 옥돔을 손질하던 박씨 할망이 "야야, 이제 갈치박사 다됐네"라고 거들자 여인네들의 웃음소리가 빗소리에 스며든다. 장마철이라 그런지 햇볕이 났다가, 구름이 몰려와 비가 내리는 변덕스런 날씨가 장터의 다양한 풍경들을 연출한다.

  • 천혜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는 제주의 한라산과 용암동굴은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됐다. 돌과 바람과 여자가 많다는 삼다도 제주는 키가 워낙 커서 한라산을 베개로 삼았다는 여신 설문대할망이 창조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치마에 흙을 담아 제주를 만들고, 한라산을 쌓기 위해 흙을 퍼서 나르다 치마가 터진 부분으로 새어나온 흙이 지금의 오름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제주에는 총 255개의 오름이 있는데 오름의 능선이 보이는 곡선미는 마치 엄마의 너른 품속 같다.
    이 밖에도 제주는 삼무(三無)의 섬으로 도둑과 거지와 대문이 없다고 했다. 집주인이 일하러 가면서 집 입구에 ‘정낭’이라는 나무를 걸쳐놓으면 집에 사람이 없다는 표시다. 그런데 지금은 주거시설이 현대화되면서 ‘정낭’은 민속촌에나 가야 볼 수 있다.
    1960년대 이후에는 관광지로 거듭나면서 삼려(三麗)와 삼보(三寶)가 생겨났다. 제주의 아름다운 문화와 자연, 민속과 언어와 식물 그리고 청정한 특산물이 주목받았기 때문이다. 섬으로 이루어진 제주에는 물질하는 해녀들도 많지만, 검은 현무암의 돌담을 두른 밭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어 자연의 모습이 아닌 설치미술을 보는 듯 경이롭다.

  • 옛 장옥 맞은편에 있는 텃밭에서 콩을 파종하던 송씨(60세)가 "어디에서 와시냐?"고 묻는다. 서울에서 왔다는 얘기에 "그럼 제주 4.3사건을 다룬 영화를 보았느냐?"며 짓는 할망의 한숨이 호미끝자락에 묻혀 흙속으로 들어간다. 마치 땅도 자기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 같다. 제주 4.3사건은 우리 현대사에 가장 비참했던 소요사태로 제주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안겨 주었다. <지슬>은 제주도 학살을 배경으로, 제주사람이 제주토박이말로 만든 1948년부터 한라산 통행금지령이 풀린 1954년 9월까지 7년 7개월간의 이야기로 만든 독립영화다.
    제주에서는 감자를 지슬이라고 한다. 제주도 어느 장터에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풍경은 할머니들이 장보따리를 끈으로 묶어 구덕처럼 짊어지고 다닌다는 것이다. 대나무로 만든 구덕은 그릇이 귀한 제주도에서 그릇대용으로 쓰였다고 한다. 아이를 재울 때도 ‘애기구덕’이라는 제주식 요람에 눕혔고, 해녀들이 물질할 때도 구덕을 가지고 물에 들어갔다.
    한켠에 짊어진 보따리를 내려놓고 쉬고 있는 송당리에서 온 이씨(75세)에게 다가가 올해 농사는 잘되었냐고 묻자 "태풍만 없으면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한다. 초파일날 등불이 고요하면 참깨 농사가 잘된다는 등, 제주여인들은 날씨변화로 한 해 농사를 점친다. 이씨 할머니는 "여기서 나는 당근이 맛있다고 소문났어."라며 당근을 들어 보인다. 구좌읍의 화산회토에서 재배하는 구좌당근은 전국물량의 70%를 생산하고 있다. 당근자랑이 열심인 이씨 할머니에게 제주도에 논이 보이지 않던데 벼농사는 짓지 않느냐고 물어보았다. "논둑으로 막아놓은 돌담이 현무암이라 물이 저절로 빠져나가 논농사는 할 수 없어. 여기서는 ‘산듸’를 심어 제사도 지내고 잔치할 때도 쓰지. 산듸는 부지런하지 않으면 지을 수도 없어."라며 대답한다. 제주도에서 ‘산듸’란 밭에 씨를 뿌려 키우는 찰벼 품종인 밭벼를 말한다.

  • 요즘 장터에 가보면 시장 체험활동을 나온 어린이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핑크색 양말로 주세요! 엄마한테 선물할거예요." 무리지어 장터에 나온 어린이들이 양말 파는 가게에 우르르 몰려가 양말 사는 ‘시장체험’을 하고 있었다. 엄마한테 선물할 양말을 고르는 모습이 진지하기만 하다.
    곧 무너질 것만 같은 옛 장옥에서 2년 전 고성장에서 만났던 김옥순(82세) 할머니를 만났다. 야채와 과일을 팔고 있었으나 그 당시에는 장터 안에서 점도 봐주었다. 제주도에 있는 무당은 영력을 중시하지만 자기 집에 신당을 차리지는 않는다. 직접적인 강신영매가 없이 매개물인 무점구(巫占具)를 통해서만 신의 뜻을 물어 점을 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염주 알을 돌리고, 쌀을 뿌리고, 작은 종지를 뿌리면서 다른 사람의 인생을 예시하고 있었다. 일곱 살에 언문을 깨우쳐 이치를 터득했다는 할머니는 장사하다가 말문이 트여 점을 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50년 넘게 훔쳐본 셈이다. 지금은 점치는 일을 그만두었다는데 "지난 겨울 여기서 잘 아는 할망이 이것저것 묻기에 점괘 따라 말해주었더니, 그 이후로 할망 얼굴이 보이질 않아,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무서워지기 시작해 그만뒀어." 제주장, 함덕장, 고성장, 세화장을 본다는 할머니는 어렸을 적부터 장사를 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몸은 꼬챙이처럼 말랐어도 힘은 웬만한 남정네 보다 세니 걱정 말라며, 여태껏 제주 땅을 한 번도 벗어 난적이 없다고 이야기했다.
    할머니를 보며 제주 섬은 ‘여신의 섬’임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219년 전 전 재산을 내놓아 제주도 백성을 먹여 살린 김만덕도 제주 여성이었다. 제주 여인네들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헤쳐 나가고자 하는 의지가 남다르다. 자신에게 불리한 공간마저도 생산적인 공간으로 바꾸어 놓는 저력이 있으며, 위기의 순간에 더욱 강해진다고 한다. 여인들의 삶이 꿈틀대는 세화장터는 생활문화를 꽃 피우는 창이었다.

    당근, 양파, 마늘의 주산지인 세화장(제주시 구좌읍 세화리)은 5일과 10일이 들어간 날에 장이 선다. 세화장 외에 제주에서 열리는 장은 감귤, 채소, 원예의 주산지인 함덕장(1, 6일), 성산포 은갈치, 성산 월동무, 전복, 광어, 감자, 활소라로 유명한 성산장(1, 6일), 대정 암반수 마늘로 유명한 모슬포장(1, 6일) 할머니장터가 있는 제주장(2, 7일)과 성읍민속마을, 제주민속촌과 파프리카, 은갈치가 나오는 표선장(2, 7일) 옥돔, 갈치, 고등어가 많은 중문장(3, 8일), 열매를 먹으면 백 살까지 산다는 백년초 군락지인 한림장(4, 9일), 제주의 대표축제인 들불축제와 노천탕이 있는 고성장(4, 9일), 자리돔 축제가 열리는 서귀포장(4, 9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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