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일 오전 무렵, 오사까로 신혼여행 떠난 시나리오 작가 최건모씨로부터
신부 채연희씨와 녹번동으로 방문하겠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최건모씨는 코 구멍만한 집을 몇 차례 와 보았지만, 신부에게 보여주긴 민망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한편으론, 그들도 가난한 신혼살림을 차려야 하니, 어쩌면 위안이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일본에서 이름도 모르는 과자를 선물로 사왔는데, 얼마나 맛있는지 입에 살살 녹았다.
찾아 온 손님에게 접대할 것이 없어 밥이라도 한 끼 먹이고 싶어 
가까운 기사식당으로 데리고 갔는데, 밥 값마저 최근모씨가 내 버렸다.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할 가난한 사람들이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최건모씨는 늦복이 터졌는지, 시집 온 신부가 예쁘고 착하기도 하지만, 마음이 너무 따뜻했다.
대개의 젊은이들이 부모와 떨어져 따로 살려고 안간 힘을 쓰는 세태에,
시부모 사시는 집에 신혼살림을 차렸다고 했다.
40이 넘도록 장가들지 않고 버텨 온 보람은 있는 것 같았다.





신혼부부가 돌아간 후, 급한 일이 있어 인사동에 나갔다.
그런데, 인사동 거리는 바닥재 교체공사로 어수선했다.
그동안 인사동 길바닥 자재가 얼마나 자주 바뀌었는지 모른다.
멋지게 만들려고 기와처럼 구운 자재에서부터 별의 별 자재를 다 깔았으나,
머지않아 깨지거나 망가져 교체하기를 밥 먹듯 했다.





아무리 인사동에 사람이 많이 다닌다고 해도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차가 다니지 않는 길이라 고급 바닥재를 사용 했으나, 차가 다니지 않을 수 없다.
전시할 액자나 짐을 옮기는 차량에다 얌체족 차까지 있는데, 어찌 견뎌낼 수 있겠는가?





고육지책인지 모르지만, 이번엔 난생 처음 보는 바닥재가 깔리고 있었다.
성벽에나 사용될 듯한, 메주 덩어리보다 더 두터운 석재로 인사동 바닥을 바꾸고 있었다.

단단하기야 하겠지만, 넘어져 머리라도 찧는다면 예사 일이 아닐 것 같았다.

쉽게 깨지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돈이 남아 도는가?




 
돈 많아 계속 교체하는 것이야 누이 좋고 매부좋은 일인지 모르지만,
그냥 일반 도로처럼 아스팔트를 까는 것이 어떨까?

아스팔트를 오방색으로 페인팅하거나, 인사동을 사랑하는 화가들이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화판이 되었으면 좋겠다.






답답해 하는 소리지만, 이미 저질러졌으니 어쩌겠는가?

그 날 지켜 본 인사동 거리는 외국인들이 많아 그런지, 국제도시 같았다.

골목길도 가게 앞을 단장하느라 분주했으나, 정겨운 모습도 있었다.





30여 년 동안 인사동 행상을 해 온 권경선씨가 돌턱에 앉아 쉬고 있었다.

이미 관광객에 밀려났으나 인사동을 떠나지 못하는데, 그 날 모처럼 단골손님을 만난 것이다.

참기름 한 병과 참깨 약간을 팔았는데, 참깨 값은 받지 않겠다고 우기는 것이다.

서로를 배려하는 이러한 상거래가, 야박한 인사동에서 아직까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기적같았다.





그동안 인사동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는 소리를 입이 아프도록 외쳐왔으나,
쇠귀의 경 읽기에 다름없었는데, 현 상황에서라도 조금씩 개선 발전시켰으면 한다.
상인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는 큰길이야 어쩔 수 없겠으나,
인사동의 매력으로 꼽히는 갤러리와 골목이라도 좀 신경썼으면 좋겠다.






제발 국제적 관광지가 되어버린 인사동을 더 이상 웃음거리로 만들지 말자.



사진, 글 / 조문호














































결혼식장에 세워진 웨딩사진을 찍었다. [촬영자 미상]



시나리오 작가이며 다큐 감독인 최건모씨가 지난 4월14일 노량진 ‘베라카채플’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나이 40이 넘도록 작업에 미쳐 연애 걸 시간조차 없었는데, 몇 달 전 결혼 할 사람이라며 한 여인을 소개했다.

예쁜 여인이 첫 인상도 너무 착해 보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알아 본 정영신씨가 너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채연희씨는 전라도 해남 처녀인데, 두 사람의 궁합이 너무 잘 맞았다.

속 궁합이야 잘 모르지만, 서로의 생각이 같고 지향점이 같다는 것보다 더 좋을 수는 있겠는가?

연인의 관계에 앞서, 친구처럼 친밀하게 지내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

서로가 하는 일에 큰 에너지가 되어 줄 좋은 배필임이 틀림없었다.




최건모씨를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2-3년 전 나의 다큐를 찍겠다고 찾아 와 처음 만났는데,

인연이 깊게 된 것은, 그가 찍은 빈민들의 영상을 보게 되며서다.

찍힌 현장의 조악함도 그렇지만, 동자동 빈민들의 삶이 너무나 가슴 아팠다.

평생 사람을 찍어 온 나는 그동안 무엇했냐는 자책감이 들 정도였다.




오랫동안 인사동을 기록해 왔으나, 더 이상 한계를 느껴 고민한 것도 사실이다.

인사동을 사랑했던 많은 예술인들이 하나 둘 떠나가는데다,

점차 정체성을 잃어 관광지로 변해가는 인사동을 지켜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현역에서 물러나야 할 나이에,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작업을 시작하는 것이 무리인 것 같았으나,

다 버리고 도전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스스로를 용서받는 의미에서 마지막 인생을 이곳에 바쳐야겠다는 각오를 다진 것이다.




그런데, 그 작업은 오가며 할 작업이 아니라, 똑같은 처지가 되어야 찍을 수 있었다.

그래서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하게 되었는데,

최건모씨는 자기 때문에 가정이 해체된다고 생각했으니, 그의 마음인들 얼마나 아팠겠는가?


우여곡절을 거쳤으나, 2년이란 세월이 지나면서 동자동의 생활도 어렵사리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사회의 규범에 불과한 법적인 절차보다 실리적으로 사는 것을 원해 왔다.

이혼은 했지만, 변함없는 동지애를 유지하며, 서로 도와주고 소통하는 모습에

최건모씨도 다소 안도하는 것 같았다.



이토록 예사롭지 않은 인연을 가진 최건모씨의 결혼 소식에 내가 장가 가듯 들떴다.

정영신씨와 결혼 선물 하나 만들어 달려갔는데, 예식장을 잘 못 찾아 좀 늦어버렸다.

목사님의 주례사가 시작되고 있었는데, 나란히 서있는 한 쌍의 모습이 너무 잘 어울렸다.




신부의 고향인 해남에서 버스를 대절해 온 친지와 이웃들도 많아 예식장은 만원이었다.

그 날 주례사에서도 말씀 하셨지만, 항상 자신보다 상대를 먼저 배려하고,

친구처럼 서로 의지하는 아름다운 삶을 이어가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날, 조준영시인도 예식장에 왔다고 했으나, 길이 엇갈려 서로 만나보지 못했다.


피로연 자리에 찾아 온 신랑의 입이 찢어질 듯 싱글벙글했는데, 함께 온 신부인들 얼마나 좋았겠는가?

신혼여행지로 일본 ‘오사까’라 했는데, 멋지고 좋은 추억 많이 만들고,

부디 행복하게 잘 살기를 축원한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2일 저녁 무렵, ‘동자동 사랑방’ 손님들이 병문안을 왔다.
시나리오작가 최건모씨도 다녀 갔고, 동자동에선 선동수간사와 김정호, 김창현씨가 왔는데,
우건일조합장 잠적 의혹이 불거질 때 입원하여, 여러 가지 궁금했던 터라 더 반가웠다.






‘최원호병원’ 맞은편에 있는 ‘도야지 포차’로 안내하여 삼겹살을 안주로 소주 한 잔 대접했다.
이 집은 일인당 구천원이면 돼지고기를 무제한 먹을 수 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다들 기분 좋게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헤어졌다. 



  


평소 늦게 자는 버릇으로 두시 무렵에야 간신히 잠들었는데, 눈을 떠 보니 벌써 조반이 나와 있었다. 

점심 한 끼에 저녁은 빵 한개로 해결해 왔는데, 요즘은 하루에 세끼나 먹어 너무 포식하는 것 같다.
두 차례 물리치료 받는 일 외에는 간간히 병원 옥상에서 바람이나 씌며 한가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병원비 정산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다.





부지런히 치료받아 빨리 동자동으로 돌아가야겠다.   

오라는 곳은 없으나, 할 일이 널려있어 마음은 늘 바쁘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5일 저녁 무렵, 동자동 골목에 두 노인이 나와 계셨다.
이홍렬(78), 김원호(73)씨 였는데, 두 분 다 당뇨로 고생하는 분들이다.
막걸리 한 병을 보약처럼 아끼며, 한 모금 한 모금 천천히 드시며 말을 꺼냈다.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 몸을 팔았지만, 배우기 위해서도 몸을 팔았어." 
이홍렬씨는 ‘네가 청량리 사창가를 찍었지만, 이런 것은 모를 것’이란 투의 말씀이셨다.






이 분은 황해도에서 피난 오신 분인데, 자유당 말기의 청년 시절을 아현동 모 여대 부근에서 사셨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양동 등 도심의 음침한 뒷골목을 휘저으며 살아 일반인들이 모르는 것을 많이 보고 살았는데,

그 당시 등록금 마련을 위해 몸을 팔았던 여대생들 이야기를 했다.

돈이 필요한 여대생을 남자들과 연결시켜주는 뚜쟁이들의 벌이도 좋았다고 한다.





하기야, 그 당시는 어려운 고학생들이 많았던 시절이라, 여대생들 일자리 얻기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지난한 매춘의 역사를 아무도 탓할 수 없겠으나, 아마 인간이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본다.

이젠 역전 부근에 밀집된 사창가는 사라졌지만, 도처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일들이라, 별의 별 일이 다 있을 것이다,

크게 보면 돈보고 결혼하는 자체도 몸 파는 것에 다름 아니겠는가?





이 날은 ‘식도락’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한 시간 후에 세월호 리본을 만들기로 되어 있었다.
허구한 날 자는데도 졸음이 와, 한 시간만 잘 생각이었는데 일어나보니 오후3시였다.

하는 수 없어 컴퓨터를 열어 세상돌아가는 이야기나 기웃거렸는데, 저녁거리가 없었다.

아침 겸 점심은 밥을 먹고, 저녁은 빵으로 때우는데, 지난 토요일 늦잠으로 빵 배급을 못 받은 것이다.

서울역에 있는 마트에서 일주일 분량의 빵을 사러 일어서려는데, 시나리오작가 최건모씨로 부터 전화가 왔다.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는 전화였으나, 술 생각이 간절했던 터라 반갑게 맞았다.






동자동 ‘태향반점’에서 탕수육을 안주로 소주 한 잔 했다.
이 친구는 가끔 만나지만, 내 블로그를 샅샅이 보아 동자동 근황을 잘 알고 있었다.

힘이 미치는 한 도와주려 무던히도 애쓰는 고마운 친구다.

하는 일은 시나리오 작가지만,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어 사회기록과 관련되어 내가 모델이 되기도 했다.





노총각으로 힘겹게 살지만, 제 하고 싶은 일 열심히 하는 것 보니 참 보기 좋았다.

어쩌면 내가 동자동으로 들어오게 된 계기도 그가 만들어 준 것이나 다름없다.

그가 찍은 처참한 동자동 기록을 본 후 마음을 굳혔기 때문이다.






모처럼 만나 ‘인사동은 왜 나가지 않느냐?’, ‘여기서 언제까지 작업할 것이냐?’는 등 여러 가지 물어보았으나,

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에 더 집중하기 위해 못갈 뿐이고, 여기가 마지막 자리 같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소주 한 병으로는 좀 아쉬웠지만, 담배를 피울 수가 없어 일어나야 했다.





남은 탕수육을 내일 먹으려고 싸 달랬는데, 방으로 가져 갈 겨를이 없었다.
커피 한 잔 마시려 매점으로 갔는데, 매점 앞에 이홍렬, 김원호씨가 앉아 있었고,
맞은편에는 김규수씨가 있었다. 안주를 펼쳐놓으니, 최건모씨가 막걸리를 사왔다.





덕분에 이홍렬씨의 몸 팔아 공부한 여대생들 이야기도 들었고, 김원호씨 사는 이야기도 들었다.

김원호씨는 젊은 시절 사고를 자주 쳐 교도소를 들락거려, 교회전도사가 사람 만들려고 그에게 시집왔다고 한다.

요즘은 서울근교의 기도소에서 사시는데, 한 달에 한 번씩 들린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김규수씨가 만나면 밤일도 하냐고 물었는데,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떡이셨다.

그 몸으로 어려울 것 같았는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거시기는 몇 센티냐? 어떻게 하느냐?‘등 원초적인 질문의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이 날은 처음부터 몸 파는 이야기가 나와서인지, 몸이 비비 꼬이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다.

다들 독거로 외롭게 사니, 그리울 수밖에...






김규수씨는 힘든 일하다 다쳤다며, 큼직한 파스를 붙여 놓은 허리를 보여주었는데,

아마 밤일을 과격하게 치루어 다친 영광의 상처가 아닌지, 그렇다면 상대가 누군지도 궁금했다.

자기의 거시기는 가늘고 길어 여자 배꼽으로 나온 다는 우스게 소리도 했다.

지금은 마티아라는 세례명으로 착하게 살며 ‘식도락’의 설거지도 돕지만,

이자도 한 때는 교도소를 제집처럼 들락거린 별이 일곱 개나 되는 장군이다.






김용만, 홍홍임, 박희봉씨 등 여러 명이 애로영화의 액스트라 처럼 등장하였다가는 사라졌지만,

스토리가 음란비디오보다 훨씬 진해, 방으로 도망쳐야 했다.
“주여~ 더 이상 휴지에 말라죽는 자손들이 없도록 하소서”

사진, 글 / 조문호




















이주용교수가 보내 준 EPSON L220인데, 이 기종에 대해 잘 아시는 분께 자문 좀 구하고 싶다.



지난 17일 시나리오작가 최건모씨와 신찬비씨가 동자동을 방문했다.


일전에 주민들을 촬영한 영정사진이나 기념사진을 돌려 드릴 수 있는
프린트 협찬업체를 한 번 알아봐 달라고 최건모씨에게 부탁한 적이 있는데,
동료작가가 프린트기가 있다며 함께 찾아 온 것이다.



신찬비씨가 전해 준 프린트기



그 프린트기는 5x7인치 전용이라 주민들의 기념사진 뽑아드리기는
안성맞춤이지만, 영정사진으로 사용하려면 8x10인치는 되어야 했다.
고마운 뜻을 받아들여 프린트기를 우건일 조합장께 전해드렸다.

그리고 복합기 EPSON L220 기종에 대해 잘 아는 분이 있으면 자문 좀 구하고 싶다.
몇 달 전 이주용 교수께서 사주신 프린트기인데, 도무지 작동이 안 된다.
아는 분의 도움도 받아보았으나 그 분도 결국 해결하지 못했다.


사용하는 컴퓨터에는 호환이 맞지 않는지 작동이 안 되고,
다른 컴퓨터에 연결하니 사진이 복사용지 나오듯 주룩 주룩 나와 해상도가 엉망이다.
이 문제만 해결되면 걱정할 필요가 없는데, 좌우지간 일이 계속 꼬인다.

뻔뻔스럽기는 하지만, 정영신씨 한데 한 번 부탁해 보는 수밖에 없겠다,
어버이날 전해 드리기로 약속 했으니,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남을 돕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 놈의 돈은 다 어디 갔는지...

사진, 글 / 조문호











우리나라는 어딜 가나 둘로 나누어진다.
마지막 분단국가의 한이 곳곳에 뿌리박혀 있다.
진보, 보수로 나뉘는 정치적 대립은 물론, 종교적 갈등도 마찬가지다.
색깔이야 다를 수 있겠으나, 문제는 다르면 상종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 역시 광신도적인 종교적 성향을 가졌거나,
박사모 같은 보수꼴통의 친구들은 잘 만나지 않는다.
더구나 인터넷 매체에 노골적으로 박근혜를 씹어대니,
그들도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 살며 마음 주고 받으면 그만인데,
몰지각한 정치꾼이나 맹신도들의 놀음에 왜 우리가 휘둘리는지 모르겠다.





빈민들이 모여 사는 동자동도 마찬가지다.
일단 주민들을 돕는 조직부터 둘로 나뉘어져 있다.
주민들이 스스로 꾸려가는 ‘동자동사랑방’과
관변 조직 ‘서울역쪽방상담소’가 있는데, 서로 반목한다.

싶게 말해 애들처럼 사탕가지고 장난치지 말라는 것이다.
가시적인 지원행사는 빈민들의 자립심만 잃게 한다는 말이다.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이곳도 정치적 성향으로 갈려있다.
몇일 전 진보성향의 ‘동자동사랑방’ 정기총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축사 하는 분이 지금 인양되고 있는 세월호의 아픔을 잠깐 언급하자
한 분이 대뜸 일어나 총회에서 정치적인 이야기 하지 말라는 것이다.
세월호의 아픔이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자체가 슬픈 일이다.






지난 30일 시나리오작가 최건모씨가 내가 사는 쪽방을 방문했다.
‘동자동사랑방’ 박정아씨를 만날 일이 있다고 했다.
‘식도락’에서 점심식사를 한 후, 박정아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건모씨에게 닥아오는 어버이날, 주민들 사진 돌려줄 수 있도록
사진 프린트 지원업체를 한 번 알아봐 달라는 부탁도 했다.






‘동자동사랑방’사무실 주변에는 여러 명이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김정호씨는 사랑방 입구에 걸린 간판을 자기가 새로 만들었다며 자랑 했다.
최건모씨가 돌아간 후 ‘새꿈공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공원 입구에 버틴 목련 꽃송이는 터질듯 부풀어 있었다.
그 아래 정재헌씨가 이른 시간부터 낮술에 젖어 있었다.
목련꽃 몽울진 봄바람에 취했는지, 지난날을 그리워하며 허무를 달래고 있었다.
옆에 있던 김장수씨는 기계체조 선수 시절의 추억을 씹었다.






‘동자동사랑방’ 주변에는 낮에 술 취한 사람이 전혀 없지만,
공원주변에는 낮에 취한 사람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술을 좋아하고 안 좋아하는 차이가 아니라
희망을 가진 사람과 희망이 없는 사람으로 나눌 수도 있겠다.
한 가닥 희망마저 포기했기에 죽음 제촉하는 독주를 대낮부터 퍼 마셔대는 것이다.





돌아서니 최남선씨가 나를 불렀다.
영정사진을 한 장 찍어 달라고 했다. 요즘은 사진 찍어달라는 부탁을 하면 반갑다.
가진 재주가 그 뿐이니, 주변에 세워 두 컷을 찍었다.
슬며시 내 손에 전해주는 베지밀 병의 온기가 따뜻하게 전해졌다.
정치논리에 휘둘리지 말고, 이처럼 따뜻한 온기를 나누었으면 좋겠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8일 동자동 쪽방촌 사람들이 광화문광장에 모였다.
‘빈곤사회연대’가 주최한 시국선언 기자회견에 함께하기 위해서다.

동자동에서는 우건일씨를 비롯하여 박정아, 선동수, 김정오, 임수만, 지연숙, 조인형, 조성삼,

정인철, 허미라, 박소영, 박성일, 김원오, 오유란씨 등 20여명이 모여 박권혜 정권 퇴진을 외쳤다.

사진 찍는 빈민운동가 최인기씨와 최건모, 문성식씨도 그 자리에서 만났다.


동자동 대표로 나선 김정오씨는 "박근혜 대통령의 '비정상의 정상화'는 복지를 넓히기보다

부정수급자를 색출해야 한다는 명목 아래 복지의 장벽을 더 공고히 쌓았다"며

“부정축재하려고 부정수급이란 말 만들었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가난은 폭력이다. 이는 생존을 위협하는 고통이 되어 사람을 죽여가고 있으며,

당장 목숨을 빼앗지 않더라도 불안정한 생활은 질병과 부채의 고통에서 허덕이게 한다.

이미 빈민들은 부족한 복지에 허덕이며, 불법추심, 명의도용, 노예노동의 범죄행위에 유린당하고 있다.

“가족이 있다는 이유로 가난한 이들이 복지제도를 이용조차 할 수 없었고,

거리 노숙인이라는 이유로 불심검문을 당하고 벌금폭탄을 맞았다.

노점상의 생계보다 거리미화를 우선하며 지자체는 노점상 때려잡기에만 혈안 되었고,

세입자의 기본권보다 임대인의 이윤이 우선인 세상에서 사람들은 매일같이 쫓겨나고 있다.

세상은 언제나 가진 것이 없는 사람에게 더 잔인했다.’며 울분을 토했다.


모두들 레드카드를 청와대 쪽으로 들어 보이며, 박근혜정권의 퇴진을 요구하기도 했다.

   

또한 옆 자리에서는 음악인들도 시국선언을 발표하며 "민주공화국은 박근혜 최순실 세력에 의해

철저히 유린당했으며 그 실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비판했다.

 

광화문광장에는 예술인들의 투쟁 터인 캠핑촌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요즘 하야해노래가 화제의 신곡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온 종일 곳곳에서 박근혜 퇴진하라는 목소리가 이어졌고,

밤늦게는 인사동으로 촛불시위대가 지나치며 박근혜 탄핵을 외쳤다.

박근혜 탄핵이란 말을 온 종일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자리에 누웠는데도 환청으로 들렸다.

 

그러나 박근혜는 귀 구멍이 막혔는지, 제정신이 아닌지, 마이동풍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제 광화문에서 피어오른 촛불은 들불로 번지고 있다.

귀먹고 미친 정권은 몽둥이로 때려잡는 수밖에 없다. 오는 12일이 시한이다.

그 날 모두 거리로 나와 끝장 내 버리자.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8일 늦은 시간, 소설가 배평모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쪽방촌 사람들과 어울려 일찍부터 술이 취해, 아내에 대한 변명 아닌 변명을 또닥거리고 있는데,

인사동 ‘유목민’으로 나오라는 전화가 빗발쳤다.

택시비를 줄 테니 빨리 오라 성화지만, 난 일을 마무리하지 않으면 뒤가 걸려 안 된다.


결국 페북에 올리고 나갔는데, 취기에 걸러지지 않은 이야기로 난리가 났다.

정영신에 의해 급히 내려지긴 했으나, 부산에서 이광수교수로부터 전화가 걸려오기까지 했다.

작업이 끝나면 꼬리 내리고 집에 들어갈 것을 자기 교수직을 걸고 장담한다는 것이다.

‘유목민’에 도착하니 배평모씨는 김수길씨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반갑기는 하지만, 참 징그러운 친구다.

30여년 전 인사동 ‘레떼’에서 처음 만나 이틀 동안 자리를 옮기지 않고 술을 마셨던 그런 친구다.

그도 나처럼 아내와 헤어져 풍기에서 소설만 쓰는데다, 기초생활수급자인지라 더욱 더 동료의식을 느낀 모양이다.

지금은 해방된 45년부터 지금까지의 한국근대사를 쓰고 있는데, 장장 열권이 넘는 대하소설인지라 잘 팔릴까 걱정스럽다.

김수길씨는 나에게 술 한 병을 선물했는데, 그 자리에서 까 버렸다.

뒤늦게 김명성씨와 서길헌, 최건모씨가 합석했으나 술이 취해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기억조차 없다.

단지 김명성에게 좋은 일이 생겼다는 희소식만 머리에서 윙윙거릴 뿐이다.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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