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자동 김정호씨]



, 어릴 때부터 유달리 친구를 좋아했다.

밖에서 친구들의 인기척만 나도, 숙제는 뒷전이었다.

친구를 가리지 않고 사귀니, 울 엄마의 걱정스런 역정도 따랐다.

 

지금 생각해보니 친구도 친구지만,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게 더 좋았던 것 같다.

세 살 적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처럼 성장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시골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친구를 모우기 위해 음악실을 차렸다.

문 닫은 정미소를 개조하여 3000여장의 LP판을 모아놓고,

퇴근 후에만 문을 여는 무료음악실을 열었는데, 주 고객은 시골학교 선생들이었다.

그러나 주말에는 부산에서 원정 오는 친구들이 더 많았다.

 

얼마나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했던지,

거짓 교통사고를 꾸며 직장에 땡땡이 칠 핑계까지 만들었겠는가?

멀쩡한 팔에 기브스하고, 몇 날을 고생했던 생각을 하면 절로 웃음이 난다.

울 엄마가 제일 경계하는 친구는 김해 살던 정남규였다.

돌아가실 무렵 남규만 멀리 했다면, 니 팔자가 이 꼴은 되지 않았을 텐데..“라는 말씀도 하셨다.


    

 


혼자서는 일을 벌이지 못하지만,

옆에서 도와주면 물불가리지 않는 성격을 알아 걱정한 것 같았다.

결국 울 엄마의 우려대로 직장에 사표 내던지고,

모두 잠든 틈을 이용해 정남규와 부산 에덴공원으로 야반도주한 것이다.

돈보다, 더 많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을 찾아 나섰다.

 

난초의 향기가 천리를 간다는 에덴공원 백원장의 설득을 거절하지 못해 이름 걸었던,

난향음악실로 시작하여 하늘목장에 이르기까지 부산의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아지트를 만들었다.

그러한 꿈같은 세월도 오래가지 않았다.

뒤늦게 내가 머문 곳을 알아낸 아버지께서 결혼을 서둘렀기 때문이다.

후두암에 걸려 수술 받고 오셨는데, 내가 속 섞여 병을 얻은 것 같아

마지막 효도한다는 심정으로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한 여인의 인생을 효도의 제물로 삼았다는 자체가 눈물의 씨앗이었다.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돈이라도 벌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남포동으로 진출해 국악주점 한마당

고전음악 학고방이란 술집을 차려두고, 다른 탈출구를 찾기 위해 만난 분이 최민식 선생이었다.

사진에 빠지니, 그 좋아하던 음악이나 술집은 관심 밖이었다.

해방시절의 분위기를 재현한 감격시대에서 피난시절을 담은

이별의 부산정거장을 마지막으로 또다시 서울로 야반도주하게 된 것이다.




 

월간사진에 일자리를 얻어 사진 할 때도, 친구 찾아 나서는 일은 계속되었다.

퇴근 시간만 되면 인사동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새로운 친구도 사겼다.

부산에서 상경한 화가 이존수, 최울가, 박광호를 만났고, 소설 쓰는 배평모, 땡초스님 적음,

노동자 시인 김신용과 김명성, 설치 미술하는 석파, 도자기 꿉는 묵객 신동여, 사진기자 김종구

사진 찍는 김영수, 별을 그리던 강용대, 전활철 등 많은 친구들과 어울려 날밤을 깠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났으면 인사동사람들이란 블로그까지 만들어 오래 기억하려 했을까?

 

그러나 뒤늦게 진정한 친구가 몇 명이나 되는지 꼽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물론 좋아하는 친구들이야 많지만, 마음을 송두리째 줄 수 있는 친구는 없었다.

뒤늦게 머리를 쳤다. “그래! 아니라 질이야, 이 등신아~”




 

평생을 가족보다 친구를 더 좋아했으나,

동자동에 들어 온 후부터 활동반경을 서서히 좁히며, 오래된 친구마저 거리를 두고 있다.

이제 철들었는지, 죽을 때가 되었는지 나도 모르겠다.

혼자 쭈그려 앉아 청승맞게 고독을 씹는다.

 

지난 주말 강릉단오제에 다녀 와 친구 아들놈 결혼식 간 것 외에는

이틀 동안 아는 사람은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사진을 찍으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카메라도 접었다.

동자동에 가지 않고, 발길 가는대로 돌아다니며 새로운 세상 대하듯 살폈다.

지치면, 지방 떠나 비어있는 정영신의 집에 쓰러져 자고, 또 다시 돌아다녔다.



 


극장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 훌쩍거리기도 했고, 시장에서 빠진 이 사이로 떡뽁기를 끼워 낄낄거리기도 했다.

친구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려 별짓을 다했으나, 도무지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그 많은 친구가 있었지만, 내 마음에 머무는 친구가 없어 너무 슬펐기 때문이다.

 

단 한사람 있다면 저승으로 떠난 정남규 뿐이었다.

, 권력, 지, 같은 거추장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없는 잡놈일 뿐이지만, 조가 너무 잘 맞았다.

음악이면 음악, 술이면 술, 대마초면 대마초, 여자면 여자, 모든 게 내 생각과 같았다.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양보하지 않아도 내게는 많은 걸 양보했다. 무슨 일만 터지면 그는 만능해결사였다.



[고 정남규씨]

 


그러나 서울로 상경한 후론 그를 자주 만날 수 없었다.

지방 촬영 길에 창원이나 울산에서 간간히 만났지만, 가끔 술 취해 걸려오는 전화가 전부다.

문호야 잘 있나? 나 소주 한잔해서 기분 좋다.” 통화도 간단했다

그러더니 삼년 전 느닷없이 죽었다는 부음이 날아왔다.


정선에서 부랴부랴 김해로 달려 갔는데, 김의권, 황성근이도 와 있었다.

오랜만에 옛 친구들을 만났으나, 정남규만 볼 수 없었다.

그것도 자기 집 마당의 감나무에 목메어 자살했다는 것이다.

암으로 투병 중이었는데, 고통이 너무 심해서 죽었을까?


가족들이 외부의 입방아가 두려워 쉬쉬했으니,

가족을 생각한다면 자살 하지 않았을 것이다.

추측키로 내가 겪는 것처럼 심한 상실감이 아닐까 생각한다.

죽어야만 했던 기구한 사정은 저승에서 만나 물어볼 작정이다.



  [동자동 송범섭씨] 


지방에서 돌아 온 정영신과 와인 한 잔 마시며, 이틀간의 방임을 마무리했다.

친구란 아무리 좋은 친구라도, 가까이 있는 사람이 좋은 친구라는 결론도 내렸다.

다시 동자동으로 복귀했다. 돌아오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는데, 전화가 빗발쳤다.

끊긴 전화를 다시 연결하였더니 김정호씨의 전화였다.

작가님 식도락으로 빨리 밥 먹으러 오이소

먹는 것보다 더 자고 싶었으나, 일어나야 했다.

 

집에서도 아내의 밥 먹으라는 소리 뭉게다 타박도 많이 받지 않았던가?

오랜만에 들어보는 밥 먹으라는 소리에 정신이 버쩍 들었다.

입맛은 없었지만 살기위해 먹어야 했다.

그런데 이 친구가 내 밥값까지 내고는 쌀까지 가져가란다.


밥해 먹는 것이 귀찮아 있는 쌀도 이웃 주었는데, 기어이 밥을 해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전에 술 마시며 했던 그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좌우지간  밥을 해 무야 삽니다.”

피로가 덜 풀렸는지 잠이 들 깼는지 빌빌거렸더니, 그가 4층 방까지 올려 주었다.

 이렇게 고마운 친구가 어디 있겠는가.

동자동에서 나를 걱정해 주는 몇 안 되는 친구 중의 하나다.






그가 떠나니, ‘디딤돌하우스에 사는 송범섭씨가 찾아왔다.

예전에 내방에서 살았다며, 지금 사는 자기 쪽방 자랑을 해댔다.

어떻게 꾸며 놓았는지 궁금해 따라갔더니, 마치 신방처럼 꾸며놓았더라.

나비를 만들어 창틀에다 촘촘히 붙여 놓았는데, 계속 만들어 붙일 것이라고 했다.

방을 꾸미는 새로운 즐거움에 빠진 그는, 나비처럼 훨훨 날수 있는 희망을 찾은 듯 했다.

 

그런데, 난 분명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새 방보다 오래된 지저분한 방이 더 좋고

희망이 보이는 정리된 방보다, 술병이 딩구는 절망에 찌든 방이 더 정겹다.

내 몸에 악마의 피가 끓는 걸까? 아니면 패배주의의 발로일까?

절망이나 희망이나 글자 한 자 차이라고 위안하지만, 그 의문은 결코 풀리지 않았다.

 

사진, / 조문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