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부쩍 기억이 분명하지 않거나 약속을 잊을 때가 많다.
지난 17일엔 동자동 주민 자치회의가 있었으나, 시간을 잘 못 알아 허탕 쳤다.
지하철에서도 내릴 역을 놓칠 때가 더러 있는데다,
아는 분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헤맬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늙으면 죽어야지’를 되 뇌이며 돌아오는데, 뒤에서 누가 ‘형님’하며 불렀다.
돌아보니 의리의 사나이 이준기였다.

술 한 잔 하자는 그의 권유에 끌려 구멍가게에 들어갔다.
비좁은 가게 안에서 못 마시게 되어 있으나, 눈을 껌뻑거렸다.
날씨는 춥지 않으나 사람들이 몰려와 오붓하게 마실 수 없다는 것이다.
바닥에 소주 한 병과 골뱅이 통조림 하나를 펼쳐 놓으니 술상이 되었다.





좀 있으니, 김진호씨가 들어와 하소연을 늘어놓는다.
어저께 돈이 없어 손가락에 낀 금반지를 맡기고 소주 한 병을 샀는데,
어느 가게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걱정이 태산이다.
자주 들리는 집에 찾아가, “무조건 반지 달라”하라며 준기가 재촉했다.

지금 갚을 돈이 없다기에, 주머니에서 만원을 꺼내 주었다.
좀 있으니 반지는 찾지 못하고, 외상값만 주었다며 빈손으로 돌아왔다.
반지는 맡긴 적이 없다는데, 정말 난감한 일이었다.

기초생활수급자들이 대부분의 돈을 담배와 술값으로 탕진하는데,
아픈 기억을 잊으려 술을 마셔대니, 술이 기억력을 앗아가는 것 같았다.
내가 사는 옆방에도 술만 취하면 세상에 무슨 불만이 그리 많은지
악을 쓰며 소리 지르는 이도 있다. 다들 치매 증세인지 모르겠다.

집으로 돌아오니 주민센터에서 보낸 치매예방 검진 안내서가 우편함에 꽂혀 있었다.
나이 들면 어쩔 수 없는 현상이겠지만, ‘필수검진대상’이라 적힌 글귀가 마음에 걸렸다.





지난 24일 오전 무렵, 검진장소인 주민센터 복지관으로 나갔더니,
검진 받으러 나오 신 분들이 제법 많았다.
문제는 실제 치매증세가 있는 분들은 자신은 절대 아니라며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저것 뺄셈을 반복시키며, 먼저 말해 놓은 사물 몇 가지를 다시 물어보는 등
여러가지 기억력을 테스트했는데, 딱 한 가지 답을 못한 게 있었다.
오늘 날짜가 몇 일 이냐는 질문에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사의 말에 안도했으나,
더러운 세상! 기억 못하는 것도 좋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나쁜 기억들만 잊어버리는 치매는 없을까?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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