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태백 철암장

 

시간 멈춘 검은도시, 열흘에 한번
화려했던 지난날, 추억하는 상인들…

주변 탄광들 문닫으며 쇠락의 길로
매달 10·20·30일 장 열려
중부내륙순환·백두대간협곡열차 영향
관광객들 많이 늘어

 


“하늘만 빼곤 온통 까만 동네였드래요. 물도, 땅도, 아이들 얼굴도요. 겨울에 눈이 오면 하얀 이불 같다며 좋아했던 아이들 모습이 눈에 아물거립니다.”

 철암장(강원 태백시 철암동)은 과거를 먹고 사는 사람들이 지키고 있다. 60년째 장사를 한다는 이준태 할아버지(80)는 철암장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산증인이다. 처음 장에 나왔을 때는 지붕이 없어 밀가루 포대로 비바람을 막았는데도 사람들로 넘쳐 지나가던 개도 만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닐 만큼 돈이 흔했다고 한다.

 생선을 다듬던 이씨 할아버지는 “저 앞에 보이는 삼방동 불빛이 나를 불렀어” 한다. 기차 타고 가다 삼방동 산비탈을 밝힌 불빛에 끌려 철암에 터전을 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광부가 되려고 탄광을 찾아갔으나 키가 작고 몸무게도 적게 나간다는 이유로 받아주지 않아 장삿길로 들어섰단다. 철암장 맞은편에 자리한 삼방동은 광부들이 모여 살던 마을로, 좁은 골목들이 얼기설기 이어져 집 하나 끼고 돌면 바로 골목이 나와 마치 미로 같은 동네다.

 태백 철암장은 여느 장과 달리 열흘 만에 장이 선다. 매달 10·20·30일이 장날이다. 시간이 멈춰 버린 검은 도시의 텅 빈 장옥에는 번창했던 과거만 무성하게 남아 있었다. 머지않아 5월이면 헐리게 될 장옥을 지키며 지난날을 추억할 뿐이었다. 검은 석탄으로 철암의 황금기를 만들었던 그 시절을 모두들 그리워하는 것이다.

 전국 석탄 생산량의 40%나 차지했던 철암의 탄광들은 대부분 사라졌다. 하지만 장터 뒤편의 ‘태백 철암역두 선탄시설(국가등록문화재 제21호)’에선 아직까지 탄가루를 재우느라 연신 물을 뿜어내며 석탄을 고르고 있었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무연탄 선탄(캐낸 석탄 가운데서 나쁜 것을 가려냄) 시설로, 근대산업의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던 곳이기도 하다.

 시장 안에서 40년째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는 진씨 아저씨(67)는 난로에 다리미를 달궈 다리미질하던 그 시절이 좋았다고 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흐뭇한 순간은 탄광에서 일하는 신랑이 결혼식에 입을 신사복을 빌리러 찾아올 때. 진씨는 그 젊은 광부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빌려주긴 했지만 얼마나 고생할까 싶어 늘 마음 한쪽이 아렸단다. 그래도 당시엔 공무원이나 상인보다 광부가 인기가 있어 광부증만 있으면 장가도 쉽게 갈 수 있었다. 광부 부인들은 막장에 들어가는 남편 운을 점치려고 무당집을 많이 찾았다는 게 진씨의 말이다.

 철암장이 상설시장으로 문전성시를 이루던 1970년대에는 시장 안에 무당집이 여러 군데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서울 남대문시장이나 동대문시장처럼 노점상도 많아 난전이 철암역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다는 것. 전국 각지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나 대부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떠났고, 12만명이던 태백 인구가 지금은 5만명도 안 된다.

 아버지가 광부였다는 화가 허강일씨(40)에게 철암장은 떡볶이로 기억된다. 허씨는 엄마 따라 장에 왔다가 떡볶이라도 먹게 되면 일부러 옷에 빨간 국물을 묻혀 친구들에게 자랑했다고 한다. 허씨는 삼방동 옛 우물 벽면에 엄마가 아들 등목을 시키는 모습을 강아지가 물끄러미 쳐다보는 그림을 그려놓았다. 삼방동에 폐가가 늘어나자 담벼락에 탄광촌의 추억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허씨는 최근 이 일대를 역사 속의 탄광마을로 재생시키는 ‘태백 철암탄광 역사촌’이 만들어져 다행이라며, 꼭 한번 들러보라는 당부까지 한다.

 요즘은 중부내륙순환열차(O-트레인)와 백두대간협곡열차(V-트레인)가 운행되면서 철암장과 그 주변을 찾는 관광객들이 많이 늘었다. 장터 사람들에 따르면 관광객들이 가장 먼저 찾는 곳은 철암장과 연결된 까치발 건물. 철암에 사람이 몰리던 시절 증축에 증축을 거듭하느라 하천 바닥에 박은 건물 기둥 모양이 까치발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인데, 지금은 그 시절의 영화를 알려주는 명물이 됐다.

 따스한 봄날, 백두대간을 가로지르는 열차에 몸을 싣고 아득한 아날로그 여행을 떠나보자. 시간이 멈춰버린 검은 동네, 철암장이 그곳에 있다.

 철암장 외에 태백에서 열리는 장은 통리장(5·15·25일), 장성장(4·14·24일)이 있다. 모두 열흘에 한번씩 열린다.

 

 

 


지난 26일 오후3시부터 ‘아라아트’지하1층 커피숍에서 김명성씨 석방을 원하는 인사동 예술가들의 탄원서 서명 작업이 있었다. 그 자리에는 민 영, 무세중 선생님을 비롯하여 박인식, 최백호, 기국서, 김신용, 배평모, 조문호, 정영신씨가 직접 탄원서를 작성해 왔고, 강 민 선생님을 비롯하여 조경석, 이명희, 무나미, 정기범, 최혁배, 이행자, 강선화, 김상현, 김완기, 이경숙, 전인경, 허미자, 황예숙, 김희갑, 노광래, 편근희, 윤재문, 전인미씨 등 많은 사람들의 서명이 이어졌다.

서명하러 직접 인사동으로 나 온 분들도 많았지만, 카톡으로 알게 된 분들이 자신의 주민등록번호를 가르쳐 주어 위임 서명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시인 김가배씨와 ‘아리랑 명품관’ 유재만 대표는 서명하러 왔다 성금을 내 놓기도 했다.
서명 하루 만에 무려 240여명이 탄원서에 서명해, 빠른 시일 안에 담당 변호사에게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사동 사람들의 김명성씨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재확인할 수 있었던, 본 탄원서 서명에 동참해 주신 많은 분들께 거듭 감사 말씀드린다.

 

 

 

 

 

 

 

 

 

 

 






(30)부산 구포장


 

부산 최대 5일장, ‘구포국수’ ·가축시장 유명
만세운동·한국전쟁 추억 ‘오롯’

 





장터에서 봄소식을 전하는 것은 봄꽃이 아니라 봄나물이다. 겨우내 얼어있던 땅을 작디작은 새싹으로 비집고 나와 찬바람을 견뎌낸 것들이다. 달래와 냉이를 비롯한 온갖 봄나물이 난장에서 얼굴을 내밀며 웃고 있다.

 선산을 가꾸며 산나물과 약초를 캐는 박기성 할아버지(76)는 장에 나와 이것저것 파는 것도 좋지만 사람들 만나는 것이 더 좋다고 한다. “이기 사는 재미 아이가. 장에 나오마 살맛이 난다카이.” 박씨 할아버지는 “자연이 보물창고”라며 손수 캔 칡 한쪽을 내준다.

 우리 조상들은 봄이 오면 매운맛이 나는 갖가지 나물을 희고 검고 노랗고 붉고 파란 다섯 가지 색으로 맞춰 오신채(五辛菜·매운맛이 나는 다섯 가지 채소로 만든 생채 요리)를 해 먹었다고 한다. 봄을 맞은 구포장은 그 오신채를 통째로 차려놓은 듯 날것 그대로의 싱싱한 봄나물 냄새가 가득하다.

 1919년 3월29일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구포장(부산 북구 구포동)은 1972년부터 상설시장이 됐다. 하지만 지금도 오일장의 명성이 더 높아 3일과 8일로 끝나는 장날에는 계절 따라 나오는 온갖 농수산물과 이를 사고파는 사람들로 걸어 다니기도 힘들 정도다.

 장에 들어서면 가축 골목을 시작으로 채소·과일 골목, 수산물 골목, 의류 골목, 약재 골목, 먹거리 골목이 있을 뿐 아니라 주택을 낀 골목에는 농산물 보따리를 갖고 나온 할머니들이 난전을 펼쳐놓아 과거와 현재가 마주 서 있는 것 같다. 구포가 낙동강 입구의 요지에 자리해 예부터 각종 물산의 집산지였기에, 지금도 장날이면 김해·양산·밀양·창원뿐 아니라 경북·전남 지역에서도 숱한 장돌뱅이들이 몰려온다.

 구포장은 조선 시대에는 이 일대 물류의 중심지였다. 장이 처음 들어선 17세기에는 곡물이나 가축, 소금, 수공업품 등을 물물교환으로 거래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는 피란민들이 장터에서 싼값에 먹을 수 있었던 ‘구포국수’가 유명해졌다. 구포국수는 그 시절 추억이 가미된 맛이라고 한다. 하기야 어떤 이는 ‘맛의 절반은 추억’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주택가 골목길에 선 난전으로 들어서자 양산시 물금읍에서 온 최해식 할아버지(84)가 직접 농사지은 연근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팔고 있었다.

 “이거 무마(먹으면) 치매도 안 걸리고 머리도 조아집니더. 연근 좀 사 가이소.”

최씨 할아버지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연근 자랑에 열을 올린다. 젊었을 때는 아는 사람 만날까 봐 숨고 싶을 때가 많았다는 최씨 할아버지. 지금은 천원짜리 하나를 팔더라도 진심을 다한다며, 그런 마음으로 정직하게 장사하다 보니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며 웃는다. 그러면서 연근을 사 가는 강씨 할머니(76) 봉지에 잘생긴 놈을 하나 골라 덤이라며 넣어준다. 요즘 제철인 연근은 비타민C와 비타민B가 많아 피부미용과 해독에 좋단다.

 구포장은 부산에서 가장 큰 장이다. 매년 10월 말이면 ‘정이 있는 구포시장 장터축제’도 열린다. 주택가 골목에서 신문지 한 장 깔고 난전을 펼치고 있는 할머니들 앞은 봄을 사고파는 사람들로 북적거려, 사람 사는 냄새와 더불어 따뜻한 정이 장터에 가득하다. 가장 유명한 가축전에서는 삶과 죽음이 한자리에 놓여있는 것도 더러 볼 수 있다. 연신 죽어가는 가축의 속내야 어찌 알까마는 삶의 무상이 느껴지는, 조금은 스산한 풍경이다.

 42년째 떡을 팔고 있는 주씨 할머니(81) 쟁반 위에는 ‘천원’이라는 굵은 글씨가 떡과 함께 얌전히 앉아 있다. 떡을 참 잘 썬다는 말에 할머니는 “한석봉 엄마가 살아 와도 내보다는 못할 끼다”라며 옛날에 장바닥에서 불렀던 노래를 들려준다.

 “낙동강 칠백리에 배다리 놓아놓고 물결 따라 흐르는 행력진 돛단배에 봄바람 살랑살랑 휘날리는 옷자락 구포장 선창가에 갈매기도 춤추네.”

 구포장 외에 부산에서 열리는 오일장은 오시게장·하단장·월내장(2·7일), 사덕장·녹산장(1·6일), 덕두장·좌천장(4·9일), 송정장(5·10일) 등이 있다.

 

                                         구한말 동래읍내장이 사람들로 가득찬 모습. 부산박물관 제공


- 1682년 조선정부 '감동창' 설립
- 세곡 보관해 물류 집산지 되고
- 육해로 수송 유리 조건 힘입어
- 상인과 배 몰려오며 시장 발달

- 배고픈 각설이들도 기웃기웃
- 타령으로 흥겨움 만들면
- 상인들 곡물 한 움큼 주거나
- 구포국수 한 그릇 말아줘

- 1932년 강변서 現 장소 이전
- 야시장 개설로 큰 장터 발전
- 이윤 안따지고 주는 덤 등
- 훈훈한 인심 아직도 남아

■전통과 현대가 조화된 구포시장

부산에는 시장이 '천지삐까리'다. 비릿한 내음이 물씬한 자갈치시장부터 새로운 밤의 명소로 떠오른 부평시장까지 부산은 시장의 바다다. 요새 화두가 전통시장이다. 거대 자본으로 무장한 대형마트에 맞서 전통시장을 살리자는 운동이 부산에서도 한창이다.

그런데 전통시장은 단지 상품과 화폐가 교환되는 경제적 장소가 아니었다. 사람과 사람이 교류하는 사회적 장소이자 놀이와 예술이 펼쳐지는 문화적 장터였다. 이는 전통시장이 거대 자본의 밀림을 헤쳐나가기 위해 반드시 되새김해야 할 교훈이다. 아울러 소비자를 위해 전통시장의 현대적 변용과 젊은 감각을 갖추는 일도 필요하지 않을까. 상설시장과 오일장을 겸하는 구포시장은 현대와 전통이 잘 어우러져 본보기가 될 만한 장터이다.

■각설이 장타령에 실린 구포장



상설시장과 오일장을 겸하는 구포시장은 현대와 전통이 잘 어우러진 장터다.
오랫동안 구포에서는 오일장이 열렸다. 닷새에 한 번씩, 즉 3일과 8일에 열리는 구포장을 찾는 사람은 장돌뱅이뿐만이 아니었다. 남루한 옷차림에 바가지와 숟가락을 들고 구포장에 온 그들은 바로 부산의 각설이다. 각설이는 '거지' 혹은 '동냥아치'라 부르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대신 예인으로서 자부심이 있다. 그들은 동냥하면서도 각설이 타령을 불러 시장을 흥겹게 할 수 있었다. '각설이 떼에서는 장타령밖에 나올 것이 없다'는 속담은 각설이를 하찮은 존재로 보면서도 각설이의 정체성이 장타령에 있음을 일러준다.

장타령은 "얼씨구나 잘한다, 품바나 잘한다"로 시작하는 각설이 타령 중의 일부이다. 이 장타령에는 내로라하는 부산의 전통시장이 등장한다. 각설이가 부른 장타령에는 부산 오일장의 특징이 잘 담겨있다.

"샛바람 반지 하단장 엉덩이가 시러버서 못 보고, 골목골목 부산장 길 못 찾아 못 보고, 꾸벅꾸벅 구포장 허리가 아파 못 오고, 고개 넘어 동래장 다리가 아파 못 보고…."

부산의 여러 시장 중에서 구포장이 최고였는지 끝은 이렇게 맺는다.

"이장 저장 못 보고 장타령만 하는구나, 품 품 각설아 이장저장 다 다녀도, 우리 구포장이 제일일세."

■부산의 오일장을 떠도는 각설이들

시장에 못 오고 못 본다는 각설이의 타령은 믿을 게 못 되는 역설이다. 언제나 오일장과 잔칫집을 기웃거리는 게 그들의 생리이기 때문이다.

장타령에는 부산 각설이들이 찾아가는 시장의 노정이 잘 드러나 있다. 그들은 엉덩이가 시리도록 바람 찬 하단장을 거쳐, 행상과 좌판으로 뒤범벅된 복잡한 부산장을 통과했다. 부산장에서 구포까지 제법 먼 길이므로 꾸벅꾸벅 졸음이 오고, 짐 때문에 허리도 아팠지만, 구포장을 놓칠 수 없었다. 다시 만덕고개를 넘어 동래장에 가는 노정은 험하디험한 길로 팍팍한 발병쯤은 견뎌야 했다.

이처럼 각설이들이 유명한 시장을 돌아다니는 이유는 오일장 체계가 구축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전기만 하더라도 지방의 향시(鄕市)가 오일 간격으로 서지 않았다. 중기 이후로 장시가 많이 늘어나면서 서로 개시 일자가 겹치지 않도록 오일 주기를 갖게 되었고, 서로 30~40리 정도의 거리를 두게 되었다. 17세기 이후에는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과 인구의 증가로 시장이 1000곳까지 늘었으며, 우리나라 전역에 오일장 체계가 잡혔다.

부산 지역에서는 동래 읍내장을 비롯해 부산장, 구포장, 하단장, 좌수영장, 독지장 등이 대표적 오일장으로 자리 잡았다. 오일장을 따라 움직이는 보부상들의 상업 관행과 각설이들의 걸립 풍속도 이렇게 생겨났다.

■구포는 포구다

구포는 배가 드나드는 포구였다. 구포 나루터에는 물건을 선적한 상인들의 배들이 모여들었다. 그 시절, 보부상들이 불렀다는 '구포 선창노래'가 돛단배에 실려 구포 나루터까지 흘러왔다.

"낙동강 칠백리 배다리 놓아 놓고, 봄바람 살랑살랑 휘날리는 옷자락, 물결따라 흐르는 행렬 진 돛단배에, 구포장 선창가엔 갈매기만 춤추네."

조선시대 구포는 물류의 중심지였다. 1682년 조선 정부가 세곡을 보관하고 수송하기 위한 창고를 구포에 세우자 이곳은 곧 물류를 집산하는 근거지가 됐다. 이 창고를 '감동창(甘東倉)' 혹은 '남창(南倉)'이라 했다. 혹은 전세(田稅), 대동미, 군포 등 세 가지 조세를 징수하는 곳이라 하여 '삼세조창'이라 불렀다. 조선의 재정과 군정에 관한 책인 '만기요람(萬機要覽)'에서는 "감동창은 양산에 있으니 본래 통영과 수영, 각 진포(鎭浦)의 사포량(射砲糧)을 위하여 설치한 것"이라고 했다. 사포량은 수군 진영에서 근무하는 사수와 포수에게 나눠주는 식량이다. 감동창에 모인 세곡은 경상도 해안가의 수군에게 지급되는 봉급으로 주로 쓰였다.


낙동강 하류에 위치한 구포는 양산과 동래, 김해에 이르는 교통의 결절점이자 남해로 쉽게 다다를 수 있는 수운의 시발점이었다. 이런 지리적 조건으로 구포에 감동창을 세웠다. 창고가 들어서고 뱃길이 열리자 구포에는 상인과 배들이 몰려들었으며, 시장이 크게 발달할 수 있었다.

■구포장터, 구시장에서 신시장으로

조선시대 구포장터는 바로 남창 주변 강변에서 시작돼 안쪽 동네의 큰 마당과 골목까지 이어졌다. 강변에는 생선전과 젓갈전이 있었고, 안쪽에는 짚신전, 포목전, 잡화전을 비롯해 우시장이 있었다. 이 장터에서는 3·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1932년 구포장터는 현재 덕천역 건너편으로 옮겨왔다. 당시 구포 면장이던 장익원이 저습지를 매립한 뒤 공설시장 만드는 일을 주도했다. 장터의 이전으로 명암이 엇갈렸다. 구시장 부근 상권은 몰락했고, 평당 20원씩 하던 땅값이 1원 밑으로 폭락했다. 신시장 일대 땅값은 수십 배 폭등했다. 구포 신시장 상인들은 시장번영회를 조직하고 시장 발전을 모색했다. 이때 신시장 홍보 이벤트가 야시장 개장이다. 1934년 구포 신시장 상인들은 경부선 선로 부근에서 장터까지 70여 개 전기등을 설치하고 야시장을 개설해 손님을 끌어모았다. 구포 신시장은 일대에서 가장 큰 시장으로 발전했다.

40여 년이 지난 1972년, 구포시장 상인들은 상설시장을 개설하고 콘크리트 건물을 세웠다. 당시에는 생선을 취급하는 선어구와 곡물을 취급하는 곡물구 등 2개 구역으로 나뉘었으며 점포 수는 100여 개였다.

현재 구포시장은 750여 개 점포가 있으며, 오일 장날에는 1500여 개로 늘어난다. 하루 5만여 명의 손님이 찾는다.

■삶의 희망을 주는 구포장터




어려운 일에 부딪혀 절망할 때면 장날에 맞춰 구포시장에 가보라. 구포시장에는 없는 것이 없다. 많은 물건 속에서 삶의 희망도 행복도 찾을 수 있다. 구포시장은 잡화, 야채, 과일, 생선을 파는 구포시장길 외에도 약초거리, 야채거리, 패션거리, 묵자거리, 가축거리 등 10개의 거리로 나뉘어 있다. 이 거리마다 취급하는 상품이 다르다.

구포장터에서는 흥정과 덤도 볼 수 있다. 상인과 손님이 흥정하는 한편으로 이윤을 따지지 않고 모른 척 얹어주는 덤도 있다. 장터의 훈훈한 인심은 팍팍하고 어려운 삶까지 따뜻하게 해준다. 배고픈 각설이들이 구포시장을 비롯해 부산의 오일장을 떠도는 이유이다. '일자나 한자나 들구나 보니' 하고 각설이 타령을 부르면 곡물 한 움큼을 주는 싸전 상인도, 구포국수 한 그릇을 말아주는 국숫집 주인도 있었다. 이 뜨거운 정은 부산의 장터를 다시 찾게 하는 희망이 아니었을까.

유승훈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

박상희씨가 이태원에 쥬얼리 가게인 '카르페디엄'을 개업했다.
지난 22일 오후7시부터 시작된 개업 축하파티에는 조준영, 김상현, 정영신, 황지인씨 등
가까운 지인들이 참석하여 신장개업을 축하했다.
상호처럼 현재를 즐기며 장사하다 보면 크게 성공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김상현씨와 황지인양의 축하공연도 좋았지만, 박상희씨 어머니께서 만든 개업떡이 너무 맛있었다.

 

 

 

 

 

 

 

 

장터순례(29)전북 익산 북부장


“황토밭서 큰 것들은 뭐시든 맛있제이~”

전국 두번째로 큰 재래시장
전주·김제·군산·완주에 둘러싸여
교통 편리하고
채소·수산물 가격 싸
언제나 문전성시


▲▲장터로 들어가는 주택가 골목에는 직접 거둔 농산물만 팔 수 있는 할머니 난전이 선다.

▲익산 북부장은 성남 모란장 다음으로 큰 재래시장이다. 이웃한 전주·김제·군산·완주 등에서 찾는 사람들로 늘 붐빈다.
 

 

“배 속에 들어간 건 절대 돈 받지 않는다”는 마이크 소리를 따라 장 안으로 들어서자 과자 파는 강성구씨(30)가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6년째 장사한다는 강씨는 배 속에 들어간 것은 무조건 공짜이니 많이 먹으란다.

 젊은 장꾼의 너스레에 끌려 맛보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더러는 사 가는 사람도 있었다. 한참을 지켜보다 밑지지 않느냐고 걱정스레 물었더니 “할매들 장 한 바퀴 돌고 다시 찾아오는 것 보믄 아직은 정이 살아 있당께요” 한다. 과자 한 뭉치 산 허씨 할머니(76)도 한마디 한다. “얻어먹기만 하고 안 사면 쓰간디. 정은 주고받는 것이여.”

 장터로 들어가는 주택가 골목에는 지역 주민들이 직접 거둔 농산물만 팔 수 있는 할머니 난전이 서 있다. 할머니들 앞에는 찹쌀·콩·고구마·땅콩·냉이와 말린 나물 등이 펼쳐져 있어 가을걷이가 끝난 시골 마당 한 귀퉁이가 이사 온 것 같다.

 고구마와 말린 나물을 펼쳐 놓은 소씨 할머니(82)는 전북 익산시 황등면에서 왔다. 할머니는 고구마 자랑이 한창이다.

 “황토밭에서 큰 것들은 뭐시든 맛있제이. 땅이 너무 질어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동네서 캔 것들이여. 이 고구마 맛 한번 보면 내 말 알 것이구만.”

 할머니 앞에는 고구마들이 등을 포개고 나란히 누워 햇빛과 노닐고 있다.

 1975년에 개설된 익산 북부장(익산시 남중동)은 전국에서 경기 성남 모란장 다음으로 큰 재래시장으로, 끝자리가 4·9인 날이면 오일장이 선다. 전주·김제·군산·완주가 둘러싼 지역의 중심에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이들 지역에선 어디서든 20~30분이면 올 수 있다.

 북부장은 익산 황토밭에서 자란 채소와 과일, 군산에서 나오는 각종 수산물을 싼 가격에 살 수 있어 언제나 문전성시를 이룬다. 특히 전국에서 고구마가 세번째로 많이 나는 지역이기도 하다. 자색고구마를 이용해 만든 <자주빛 고운님>은 이 지역에서 나는 천연 생막걸리다. 자수정처럼 고운 보석 빛깔을 품고 있어 익산의 자랑거리로 자리 잡는 중이다.

 익산은 금강과 만경강을 품은 천혜의 곡창지대로, 백제 시대에는 왕궁이 있던 ‘서동요의 고장’이다. 또 이웃한 군산·강경과 함께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화강암의 원산지로 오래전부터 석공업이 활발했던 곳이다.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이나 왕궁리 5층석탑(국보 제289호) 같은 석조 문화재들이 많아 근대 문명의 박물관으로 불리지만, 일제의 아픔이 공존하는 곳이기도 하다.

 익산은 또한 102년의 철도 역사가 있는 교통 도시이자, 우리나라의 유일한 보석박물관인 ‘주얼팰리스’도 있다. 주얼팰리스는 프랑스 루브르박물관과 유사한 모양으로 설계되었는데, 이곳에선 ‘나만의 보석 만들기 체험’도 가능해 목걸이나 휴대전화 고리 정도는 직접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집에만 있으려니 답답해 콩과 마늘을 갖고 나왔다는 구씨 할머니(85)는 오랜만에 나와 시세를 잘 모르겠다며 말을 이어간다.

 “오늘 사람 구경 많이 했응께 남는 장사 했제. 옛날에 장사허는 사람들은 농사 안 지응께 필요한 것끼리 모다 바꾸고 그랬어. ‘아짐, 오늘은 뭐 갖고 나왔소?’ 함서 아는 체하고들 그랬는디, 시방은 모다 남이나 마찬가지여. 옛날 생각하믄 안 되는디 그때가 생각나서 한번씩 나오믄 사람 말을 안 믿고 ‘중국 것 아니냐?’ ‘농사진 것 맞냐?’고 자꾸 물어싸….”

 큰길가에서 김을 파는 염씨(46)는 방학을 맞은 아들과 함께 장사를 하고 있었다. 아이엠에프(IMF) 때 장돌뱅이 길에 들어섰다는 염씨는 막막하던 그 시절을 장바닥에서 흘려보냈다. 인근의 익산장과 군산 대야장, 완주 봉동장·삼례장을 도는데 사철 파는 물건이 다르다고 한다. “장터 흐름을 읽을 줄 알면 장삿길도 편하다”는 염씨는 장터에서 세상살이를 배워간다.

 익산에서 열리는 장은 이 밖에도 천년고도 마한백제가 살아 있는 금마장(2·7일), 함열장(2·7일), 여산장(1·6일), 조선 시대부터 장이 열렸다는 황등장(5·10일)이 있다.

 

 

 

 

 

강원도 태백에 정영신씨만 나타나면 어김없이 폭설이 쏟아 졌다.

지난 5일, 태백 통리장을 촬영하려는 삼척MBC 황지웅PD와의 약속으로 정선에 갔으나, 또 눈이 내리고 있었다.
2월 중순부터 시작된 일정이 눈 때문에 무려 세 차례나 헛걸음을 해 이번에 못 찍으면 그만 둘 작정이었다.

그러나 '걱정도 팔자'였다.
못 찍는 것은 나중 문제고, 일단은 백설이 휘날리는 만지산 설경에 푹 빠질 수 있어 좋았다.
얼마나 많이 쏟아지는지, 눈송이에 가려 카메라 화인더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 무렵 황PD가 도착해 “작가님은 눈을 몰고 다닙니까?”라고 물었다.

 

예정된 통리장은 다른 장터와 달리 10일만에 서는 장이라 더 이상 지체할 수도 없었다.
한 시간을 달려 도착한 통리장에 할머니들은 나오지도 않았고,

장돌뱅이 몇 사람 나와 눈보라 휘날리는 난장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것 저 것 사진도 찍고 인터뷰는 했으나 아무래도 이야기가 안 될 것 같았다. 

 

아침 겸 점심 먹으러 간 장터국밥집에서 황PD가 말을 꺼냈다.
“작가님 강원도에 찍지 않은 장터는 없습니까?”
“태백 철암장, 딱 한 곳 남았다”라고 했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출연료를 2회분으로 주겠다며

오는 10일, 한 번만 걸음을 더해 달라는 것이었다.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 '한국의 장터'

책 소개나 제대로 해달라며 다시 일정을 짜야 했다.

 

"할 일은 많은데, 왜 일이 자꾸 꼬이는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리며

돌아오는 길은 언제 눈이 왔느냐는 듯 따스한 햇살이 내려 비치고 있었다.
중간 중간 차에서 내려 눈 내린 산세를 감상하는 것으로 위안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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