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양강을 끼고 있는 귤암리의 가을은 다른 곳처럼 울긋불긋 화려하진 않지만,

정숙한 여인네 콧대처럼 은근히 아름답다.

언제나 그렇듯, 강변길만 들어서면 일단 마음부터 편해진다.



 


지난 14, 별 거둘 작물도 없는 가을걷이 차 만지산에 들렸다.

항상 만지산 집만 가면, 세상살이 지친 마음 감싸 듯 편하게 하지만,

팔자에 역마살이 끼었는지, 한 곳에 찐득하게 있지를 못한다



 

 


그런데, 귤암리에 평소 보지 못한 카페가 만들어져 있었다.

지붕위에 자전거가 올라 있는 것으로 보아 자전거 여행객들을 위한 쉼터 같았다.



 


윗만지산 오르는 길 옆의 김익수씨 고추는 병이 들었는지 말라가고 있었다.





집에 도착하니 맛도 없는 땡감이 날 잡아잡수하듯 반겼다.

거둘 작물이래야, 한 단도 안 되는 정구지와 간신히 살아남은 고추 조금이다.



 


오후에 어머니 산소에 들렸더니, 최연규씨네 들깨 밭에서 타작을 하고 있었다.

쌍놈 발 떡이라고, 참 먹는데 끼어 앉아 탁배기 한 잔 얻어 마셨다.



 


다들 만나면 한숨이 깊다.

고추농사를 망쳐, 죽도록 일만하고 빚만 더 짊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배운 게 농사 뿐인데, 그만 두지도 못한다.





내심 땅이라도 팔리길 바라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오나 가나, 사는 게 만만찮다.

 

사진, / 조문호





















 







정선아리랑제가 지난 2일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지난달 29일부터 나흘 동안 정선아라리공원 일대에서 아리랑 빛을 발하다주제로 열렸는데,

국내외 아리랑이 뒤섞인 전통과 현대 문화가 어우러진 한 판 축제였다.

 

입에 주워 담기도 어려운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즐거움을 주었지만,

무엇보다 의미 있는 것은 지역민들이 함께 어울리는 길놀이였다.

정선거리에서 펼쳐 진 '아라리길놀이'는 정선 9개 읍면 주민들의 신명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사실, 지방 축제마다 많은 의미들을 부여하고 있지만,

기실은 지역민들이 함께 어울리며 즐기는 자리라 생각한다.

나 역시 축제 때마다 무슨 볼거리를 찾는 게 아니라,

반가운 분들 만나기 위해 축제장 주변을 기웃거린다.

우연히 반가운 사람만나 대포 한 잔 하는 재미보다 더 좋은 게 무엇이겠는가?

 

29일부터 이틀 동안 정선아리랑제가 열리는 축제장을 돌아다니며

귤암리 사람들을 위시하여 반가운 분을 많이 만났으나,

술 한 잔 나눌 처지가 되지 못해 아쉬웠다.

 

나 역시, 산골짜기 살다보니 차를 끌고 갈 수밖에 없었지만,

대개가 운전을 해야 되기 때문이다. 차마 음주운전은 할 수 없잖아.

결국 축제도 내 집에서 벌이는 축제가 최고더라.

 

사진, / 조문호

 























































남원 '다담 콘서트'에 가다 시껍하고 돌아와서, 정영신씨와 살아 온 기념으로 또 한 잔 마셨다.

그러나 적당히 마시고 자야 하는데, 그게 참 마음대로 안 된다. 

술은 넘쳐야 하고 님은 품에 안겨야 한다는 말도 있지만, 술 병은 비워야 하지 않겠느냐?

내일 새벽 네시에 일어나 정선 가야 하는데, 자정이 넘어 자빠졌으니, 또 바쁠 수 밖에 없었다.


이젠 알람이란 놈의 성질머리를 알았으니, 더 이상 당하지 않고, 새벽 네시에 정확하게 일어났다.

지난 29일 오전 8시에 만지산에 들려 사진액자 두개 챙겨, 9시까지 화암면 그림바위 G갤러리에 전해 줘야 했다.

시간 맞추어 전해주고, 느긋하게 돌아 오는 귤암리 조양강변의 정취는 너무 포근했다.


만지산 살팔봉은 이미 익어버렸고, 조양강은 온천처럼 그 때까지 김이 무럭무럭 나더라.

아침 저녁으로 기온이 급변하고 있다는 평범한 자연의 이치를 말해주었다.





만지산 집으로 올라가니, 입구에서 코스모스가 너울너울 날 반기는데,

오래 전, 삼겹살 구워먹던 불판 가마솥까지 코스모스가 점령해 버렸더라.


"네 이놈~ 네 놈이 빨지산이냐? 계엄군이더냐?"

갑자기 고은시인의 시 구절이 생각나더라.

갈 때 못 본 불판, 돌아오니 화분으로 보이네.


예전엔, 친구 올 때 삼겹살 구워먹는 불 판이었는데, 

그 좋아하던 친구들을 일 하느라 멀리하였더니,

가마 솥 불판도 알아차려, 화분으로 둔갑해 버렸구나.

그래도 끝까지 지켜주어 고맙다. 힘없어 일 못하고 만지산에 돌아 올 때만 기다려다오.


그리운 친구 하나 하나 불러모아, 삼겹살 구워 소주 한 잔 마시게...

내가 그 때까지 살지도 모르지만, 친구들도 그때가지 살아있을지 모르겠다.


그 건 아무도 알 수 없고, 오직 만지산 신령님만 알 것이다.

난, 십년 전 '농심마니' 박인식씨 패거리를 만지산에 불러와 

산삼 심어드리며 알랑방구 뀌어났으니, 좀 봐줄 것 같다.





이튿 날, '정신아리랑제'에 정영신씨가 온 다는데,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술 한잔 먹여 잡아 먹으려고, 정선시장에서 전어 열 댓마리 사다놓고,

강기희 사단의 '문학콘서트' 차에 달라 붙어 오는 정영신씨를 찾아 아라리촌으로 갔다.


'문학콘서트'에서 많은 반가운 사람들 만났으나, 술은 차 때문에 딱 두 잔만 얻어 마셨다.

사진은 200장이 넘게 찍어두었으나, 일은 언제 할지 모르겠다.


정영신씨를 납치해 만지산으로 돌아 와, 가을전어 노리짝하게 구워놓고 술 잔을 들었다.

저 푸른 초원에서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님과 함께 살고싶은 꿈을 꾼게 아니라, 남진의 노래를 불렀다.

한 잔하니. 천하가 내 손에 있더라. 대마까지 한 분위기 잡아주네.


사진, 글 / 조문호





얼마 전, 미술감독 안애경씨가 핀란드 친구들을 데려와 만들어준 침대 덕에,
한 동안 편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용하다보니 탁자와 의자가 좀 불편했다.
장시간 일하다 보니 탁자에 물 컵 하나 놓을 자리도 없고,
의자는 등받이가 없어 온 몸에 주리가 틀렸다.
욕심 부리느라, 정선 집에 있는 탁자와 의자로 바꾸기로 했다.






지난 27일, 매월 한 번 씩 들리는 정선 집으로 떠났다.

궁상맞게 비까지 내려 모처럼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군불 지피며 했던 생각이 "죽으면 이 많은 짐을 어떻게 하며,
엄마 무덤은 어쩔까?" 쓸데없는 걱정도 해댔다.

2박 3일이 금세 지났는데, 할 일도 많았다.
말벌에게 두방이나 맞아 어깨는 묵직한데, 정영신은 봉숭아 꽃잎 따오라지,
구름은 왔다 갔다 하며 놀자고 약올리지,
창수엄마는 조씨네 집으로 술 마시러 오라지...






그런데, 이튿 날 서울 갈 짐을 차에 실어려니, 탁자가 실리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차 지붕에 올려놓고 끈으로 칭칭 묶었는데, 꼴이 가관이다.
끈을 고정시킬 수 없어, 빽밀러에도 묶었는데,
타고 내릴 때는 차창으로 끈을 풀고 내려야 했다.

우려와 달리, 서울 동자동까지 잘 도착했다.
탁자는 물론 설합장까지 들여놓으니, 쪽방이 가득 찼다.
보따리에 싸 두었던 옷가지도 챙겨넣고,
집기들도 한 곳에 모아 놓으니, 훨씬 지내기가 편할 것 같았다.




 


그런데, 왠지 아늑한 정감이 없다.
마치 사람 사는 방 같지 않고, 무슨 사무실 같다.
더 마음에 걸리는 것은 옆 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영신씨를 데려와, 어떤지 한 번 봐달라고 했다.
한 마디로, 희망이 있는 방과 없는 방의 차이 같다며,
마치 쪽방 사람들을 관리하는 사무실 같다는 것이다.



정영신사진


같은 생각이었지만, 이제 와서 어쩌랴?
몸과 마음을 더 내려놓는 수밖에...

사진, 글 / 조문호















요즘 마음이 바쁘다.
빨리 퇴원하여 동자동에도 가야하고, 정선에도 가야 해서다.
그래서 부지런히 물리치료실 들락거리며 몸을 추슬린다.

한 시간 가량 물리치료 받고 병실로 들어서니, 반가운 사람이 왔었다.
다리도 불편한 사진가 이정환씨가 막걸리를 세병이나 들고 서 있었다.
세상에~ 여지 것 병문안을 그렇게 많이 가고, 받았지만, 막걸리는 처음이었다.

몇일 전 사진가 강제욱씨가 병문안 오며 텃밭의 상추 뜯어 오듯이,
형편에 맞는 선물이 더 좋다. 먹지 않는 음료수 사들고 오는 것보다 백배 천배다.
그리고 퇴원 할 무렵에 동자동으로 막걸리 한 박스를 보내줄 테니,
동네사람들과 술판 한 번 벌이잖다. 그 것도 천하별미 다랭이 막걸리를...

요즘 새로 나가는 강남 사업장 일이나 건강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21일부터 열리는 정선오일장 박람회 가는 교통수단을 들려주기도 했다.

그가 떠난 후, 저녁상 물리기가 바쁘게 녹번동 정영신씨 집으로 달려갔다.
아리미 막걸리를 비워줘야, 갖고 온 놈이나 빠는 놈이나 다 좋은 것 아니겠는가?
정영신씨와 막걸리 마시며 정선 사진전 작전회의도 하고, 나쁜 놈들 욕도 막 했다.
욕을 추임세로 빠니 막걸리 병에 구멍이 뚫렸는지 술술 다 세어버렸다.

병원 문 내리기 직전에 극적으로 입성했는데, 김문호선생 말처럼 난 영락없는 나이롱환자로 찍혀버렸다,
내 주제에 청문회 나갈 일도 없으니, 나이롱이면 어떻고, 카시미롱이면 어떻겠는가?
술김에 몇 자 두드렸으니, 말이 삐딱하더라도 널리 양지하시길,,

사진, 글 / 조문호










모처럼 시간 내어 정선 만지산으로 떠났다.
농사일 마무리하고 천천히 돌아올 작정이었으니, 마치 휴가 떠나는 기분이었다.
귤암리로 접어더니, 잔잔한 동강의 물결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으나,
텃밭의 붉은 복사꽃이 그만 들뜨게 만들었다.





장모님이 좋아하는 살구나무를 몇 년 전 심었는데, 살구가 아니고 복숭아였다.
묘목장사가 속였는지, 얼치기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복숭도 먹지 못하는 탱자 같은 게 열렸다.

그러나 꽃의 미색 하나는 천하의 양귀비가 따르지 못할 정도로 귀가 막혔다.
얼마나 강렬한 정염을 토하는지, 온 몸이 부르르 떨린다.
만약 그 꽃이 여인네였다면, 사내들 상사병 여럿 났을 것이다.
비록 열매는 맛보지 못하지만, 봄마다 나를 들뜨게 하는 꽃 중에 꽃이다.






올해는 너무 늦어 만나지 못할 줄 알았는데, 나를 기다린 듯 시들지 않았다.
또 하나 기다리다 시들어가는 꽃은 조팝꽃이었다.
심을 때는 어떤 꽃인지도 모르고 이름이 좋아 심었는데, 이 꽃도 한 미색하는 꽃이다.
해 마다 윗만지골 최종대씨가 씨를 받아 갔으나 번번히 실패하여 마음 태운 꽃이기도 하다. 


지난달 몽우리 졌던 목련은 할머니 살결 같은 꽃잎만 흩뿌려 놓았고,
벚꽃도 진달래도 다 쓸쓸하게 작별을 고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꽃 타령에 날 셀 일이 아니다.
옥수수 심을 밭떼기 파 뒤집을 일 생각하니 아득했다.
옛날엔 소가 쟁기 끌어 뒤집었고, 요즘엔 대개가 포크레인으로 뒤집는데,
늙은이가 곡갱이로 파 뒤집어야 했으니, 그 꼴이야 보나 마다다.
한 고랑도 못 파고 헉헉거리며 퍼져 않아야 했다.


농사지어 돈 벌기는 커녕, 옥수수 나누어 먹는 게 고작이지만,
땅을 놀려서는 안 된다는 농부의 마음으로 생고생을 하는 것이다.
이건 휴가가 아니라 중노동이었지만,
모처럼 쪽방에서 벗어나 자연과 어울리기에 휴가로 치부한 것이다.






날씨조차 가물어 애를 태워야 했다.
한 달 전에 뿌려놓은 씨앗은 이제 겨우 움을 튀우고, 부추와 잔파는 성장을 멈추고 있었다.
물 퍼 나르느라 똥줄 타게 오르내려야 했는데, 지하수라도 있으니 가능했다.

몇 해 전만해도 슬피 우는 소쩍새 소리에 넋 놓고 쉬기도 했으나,
언제부터인가 소쩍새도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사람들이 뿌리는 농약 냄새가 싫어 떠났는지, 내가 싫어 떠났는지는 모르지만,
가끔은 그 울음이 그리워진다.

땅 파고 물주며 파종하는 일만이 아니라,
고사리도 꺾어야 하고 산에 돌아다니며 두릅도 따야 했다.
쌉쓰름한 두릅 안주로 소주 한 잔하는 맛도 일품이지만,
두릅 좋아하는 정영신씨가 신신당부한터라 각별히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혼자 쓸쓸히 지내시는 이명동선생께 문안인사도 드려야 하고,
동자동 사랑방 식구들도 맛보이려면 많이 따야 했다,


높은 가지 꼭대기에 핀 순이라 따기도 만만치 않지만,
자칫하면 가시에 사정없이 찔리기도 한다.
결국은 량이 모자라 최종대씨가 따 놓은 두릅까지 얻어 와야 했다.






그러나 만지산에 어둠이 몰려오면 한결 여유로워진다.
낮에는 땀을 흘렸으나, 밤이 되면 추워 군불을 지펴야 한다.
타닥타닥 타 들어가는 불길을 지켜보며,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드는 맛도 괜찮다.
고상한 명상에 빠져드는 것보다, 천박한 공상이 더 재밋다.
아무도 없는 산중에 처녀귀신이 느닷없이 나타나 수작 부리는 따위의...

일을 마치고 방에 들어가 늦은 저녁을 먹었지만,
아무리 시장이 반찬이라지만, 목구멍에 도통 넘어가질 않았다.
올 때 사온 일회용 곰탕을 끓였는데, 김치가 없으니 니 맛도 내 맛도 아니었다.

 
동자동처럼 빵으로 해결할 생각도 했으나, 힘쓰려면 밥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밑반찬도 없이 카레나 짜장 등 인스턴트 식품을 골고루 사왔는데,
끼니 때마다 곤욕을 치룰 수밖에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어머니 산소 갈 때 가져가는,
한 잔 밖에 나오지 않는 샘플용 소주 두병을 꺼내와 곰탕을 안주로 먹어야 했다.






서울생활이 디지털 삶이라면, 만지산은 아날로그 삶이다.
인터넷도 연결 되지 않지만, 핸드폰까지 꺼 버렸으니 세상과는 완전히 단절된 시간이다.


돌아오며 두릅 얻으러 찿아 간 최종대씨 내외를 만난 것 외에는
몇 일 동안 사람 한사람 보지 못했다,
사람을 만날 수 없으니 사진 찍을 일도 없지만,
습관적으로 일기장에 보탤 동강풍경과 사물사진만 몇 장 찍었다.


마치 무인도에 귀양 온 듯, 인적 없는 산중이지만,
어쩌면 저승이나 천국이 이러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모든 근심 걱정을 접어버리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을 만들었다.
지난 가을에 동자동으로 왔지만, 한 가지 버리지 못한 것이 바로 사진이었다.
진솔한 사진을 담고 싶은 성취욕이 마음 한 구석에  똬리 틀고 있어,
그 욕심까지 과감하게 버리기로 작정했다.


동자동 사람들과 어울려 마지막 황혼을 즐기다, 조용히 돌아가고 싶다.


사진, 글 / 조문호





















정선 만지산 골짜기에 사는 이선녀씨의 인생은 드라마 보다 더 극적이다.
이제 나이 육십에 불과하지만 한 세기 전에 살았던 것처럼 살아 온 이야기가 전설 같다. 옛날 영화에 ‘여자의 일생’이란 제목도 있었지만, 마치 이선녀씨를 일컫는 말 같다. 남자 만나기에 따라 여자의 운명이 바뀐다는 이야기겠으나, 요즘 세상은 ‘남자의 일생’으로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도 생각된다.

그녀가 귤암리 윗만지산 골짜기까지 시집오게 된 사연만 풀어도 한 페이지가 넘는 분량이라 ‘나무꾼과 선녀’로만 요약해야겠다. 삼대를 만지산에서 살아 온 최종대씨와 결혼하여 슬하에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이만평 가까이 되는 산비탈 농지를 두 내외가 다 일군다. 힘쓰는 일이야 남편이 하겠지만 왠만한 일은 모두 이선녀씨 몫이다. 날만 새면 밭에 나가 살았으니, 지금 성장한 자식 셋 모두가 밭에서 일하다 낳았다. 시아버지가 며느리 치맛자락에 아이를 받아 툇 줄도 자르지 못한 채, 방으로 뛰어가는 장면을 한 번 상상해보라. 산후조리란 말은 사치에 불과하고, 애기를 낳아서도 광주리에 담아 밭에서 키웠다.


한 번은 둘째아들 용순이가 심하게 아파 13킬로미터가 넘는 정선 읍내까지 약을 사러 나간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갈 때와 달리 갑작스런 폭우가 쏟아져 강물이 범람해 돌아 올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자식을 살려야겠다는 모정은 약을 비닐로 머리에 동여매고 노도처럼 밀리는 강물에 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6킬로미터의 험난한 물길을 헤칠 땐 주변사람들이 하나같이 살아날 수 없다고 발을 굴렀지만, 귤암리 근처에 도달하여 나무뿌리를 잡고 기어 나오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는데, 정말 ‘지성이면 감천’이 아닐 수 없다.

40여년이 넘도록 외지 나들이 한 번 하지 못한 채, 죽도록 일만 하고 살았으나, 아직까지 그 지긋지긋한 일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얼마나 고생스러운 삶을 살았던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늙어 버린 것이다. 갈퀴손과 주름진 얼굴이 그의 한 많은 삶을 고스란히 증명해 주었다. 그 힘든 삶을 버틸 수 있게 한 것은 바로 술의 힘이었다. 시아버지로부터 배운 술은 고달픔을 잊게 하는 유일한 벗이 되어주었다. 소주를 한 홉들이 잔으로 들이키는 그의 주량은 아무도 따르지 못한다. 그리고 몸 빠르게 일하는 것처럼 노는 신바람도 보통이 아니다. 10여 년 전 이선녀씨의 여동생이 찾아와 함께 술을 마신 적이 있는데, 얼마나 신명이 넘쳤던지, 천정에 구멍이 뻥뻥 뚫려나갔다. 무슨 놈의 춤이 손가락으로 천정을 찌르는 요상한 춤을 추었는데, “멀리 기적이 우네~”라며 천정을 뚫어댔다.


밤늦게 이웃 동네에서 술이 취해 돌아오다 정신을 잃은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란다. 말이 이웃동네이지 산을 넘어야 하는 먼 거리인데, 한 번은 어두운 산길을 걷다 구덩이에 빠져 그만 잠들어 버렸다고 한다. 마치 어머니 품속처럼 포근했다는데, 잠결에 손님 이제 문 닫아야 하니 일어나 가시야지요란 말이 들렸다고 한다. 눈을 떠보니 새벽녘이고 자기가 빠진 곳은 장례를 치루기 위해 파 놓은 무덤이었다고 했다.

 

놀 때는 화끈하게 놀고, 일 할 때는 몸 아끼지 않는 스타일이지만, 그의 사려 깊은 인정 또한 따를 자가 없다.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무언가를 못 먹여 안달이고 못주어 안달이다. 이웃에 경조사가 생겨도 손 걷어 부치는 성미라 일이 일사천리다.

 

작년에는 이웃에 살던 노성수씨가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은 일도 있었다. 한 밤중에 두 내외가 술이 취해 집으로 들어갔는데, 방문이 열리지 않아 유리창을 깨어 손을 집어넣었다고 한다. 문고리를 연 것 까지는 좋았는데, 손을 빼다 그만 유리에 동맥이 끊기는 어이없는 사고를 당한 것이다. 다른 방으로 들어간 아내를 아무리 불렀지만, 술 취해 잠든 아내가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새벽 무렵에서야 현장을 목격한 아내가 이선녀씨에게 다급하게 전화했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다고 한다. 겉옷 입을 틈도 없이 득달같이 달려갔으나 이미 피를 모두 쏟은 상태라 손을 쓸 여지가 없었다. 갑자기 남편을 잃은 부인을 다독이며 모든 뒷바라지를 이선녀씨가 다 했다. 얼마나 많은 피를 분수처럼 쏟아 부었던지, 천정에서부터 온 방은 피로 굳어 있었다. 그 응고된 피가 비료 포대에 몇 자루나 나왔다고 한다. 피로 얼룩진 방을 다 닦아내는 청소에서부터 모든 일을 그가 도맡아 했다.

   

그래서 그의 이름처럼 만지산 선녀로 통한다.

한번은 농기구 빌리려 그녀 집에 들린 적이 있었는데, 그만 못 볼 장면을 보고 말았다. 이곳은 외 딴 산이라 사람들이 오가지 않으니, 아무데서나 소변을 보기도 하고 더우면 찬물을 뒤집어쓰기도 하는데, 무더운 날씨라 혼자 목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를 보고 깜짝 놀란 그녀가 부엌으로 뛰어 들어갔는데, 얼핏 본 모습은 한 마리 백조가 날개를 퍼덕이며 갑자기 비상하는 바로 그런 자태였다.

 

, 이선녀씨를 생각할 때마다 선녀와 나무꾼이란 설화가 먼저 떠오른다,

목욕하러 지상에 내려 온 이선녀를 나무꾼 최종대씨가 옷을 숨겨 사는 것은 아닐까?

 

사진, / 조문호











지난 식목일을 맞아 모처럼 정선 만지산에 들렸다.
어머니의 헤진 무덤에 잔디도 메워야 하고 텃밭의 땅도 파 뒤집어야 했다.

마침 '정선군청' 직원과 약속이 있었던 정영신씨도 동행했다.


몇 개월 만에 들린 정선 집은 폐가나 다름없었다.

주소를 동자동으로 옮겼으니 우편물은 그다지 많지 않았으나, 집 기둥을 떠받히는 축대가 무너져 내렸다.

작년 가을 추수 때는 얼마나 급히 도망쳤던지, 밭 때기에 고추 대와 옥수수 대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붉은 진달래나 몽우리 진 목련 꽃이 반갑게 맞아주며, 변치 않는 자연의 이치를 자랑했다.

7일 있는 동자동 주민자치회의로 정선에 오래 머물 형편이 못되어 서둘러야 했다.
비가 내려 질퍽한 땅을 파 뒤집었더니, 죽을 맛이었다. 건강이 나빠졌는지 몇 차례의 괭이질에도 숨이 헐떡거렸다.

오래 비워 둔 집이라 정영신씨는 몇 시간동안 군불을 지피고 청소를 해야 했다.


매번 그랬지만, 저녁시간은 즐겁다. 만지산 꼭대기 사는 최종대씨 집에 올라가 술 한 잔한 것이다.

신바람 난 이선녀씨의 기막힌 춤에다 맞불을 질러댔다.






이틀 날은 ‘정선군청’ 문화관광과 전상현씨 만나러 읍내로 나갔다.
오찬 장소에 갔더니, 지역경제과에 근무하는 유홍균 팀장과 정선아리랑시장 사업단장 허승영씨를 소개해 주었다.

오는 6월22일부터 25일까지 정선에서 열릴 ‘전국 오일장 박람회’에 정영신씨의 장터사진전을 유치하기 위해서였다.

유홍균씨는 별도의 전시 부스를 만들어 준다지만,

전시장보다는 외곽을 전통시장사진으로 장식하는 대형 현수막전이 더 효과적이라는 제안도 했다.


박람회가 열리기 전에 구체적인 협의가 되어야겠지만, 담당자의 전통시장에 관한 관심이 보통은 아니었다.

눈에 보이는 당장의 실익보다 장기적인 발전을 위해 애쓰고 있었다.

이제 시장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다 되었지만, 승진이 예상되는 내년부터 타 부서로 이동해야 한다며 아쉬워했다.

한 자리에서 승진해 하던 일을 이어가야 하는데,

전문가를 양성하지 못하게 하는 현 공무원 직제 체계의 모순을 바로잡는 일도 시급했다.






이틀간에 걸친 일정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 왔으나 뒤가 개운치 않았다.

옥수수 밭은 손도 대지 못했고, 호박 심을 구덩이를 파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자동차가 없어 올 해는 자주 올 수 없으니, 손이 많이 가는 야채보다 저 혼자 잘 자라는 작물로 바꿀까보다.

한 달 후에, 고구마를 심을까? 유실수를 심을까? 아니면 내 마음 담을 꽃씨나 뿌릴까?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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