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정선 만지산에 반가운 손님이 오셨다.
삼척 도계에 사시는 이재일씨와 윤정일씨로, 이재일씨는 16년 전부터 잘 아는 분이다.

 

 

 



 

그동안 소식이 끊겼다가 페이스북에서 만나 소식을 주고받아 왔던 터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으나, 나만 쭈그러진 영감쟁이로 변했지, 재일씨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더라.

 

 

 



 

진즉부터 도계에 한 번 놀러오라 했으나, 차일피일 미루다 못 갔더니,
옛 기억을 더듬어 만지산까지 직접 찾아온 것이다.

 

 

 



 

이재일씨를 보니 재일씨의 사촌동생 박남일씨가 생각났다.
그는 ‘일필선사’로 불린 옛 친구인데, 의료사고로 세상을 등진 불운의 사나이였다.
그는 우리나라 최고의 대마재배 전문가였고, 대마 애연가였다.

 

 

 

 

발길 닿지 않는 한지에 매년 서너 포기 키웠는데,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공을 들였으면,
아무도 그 향과 맛을 따르지 못했다.

 

 

 

 

수확 때만 되면 주변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는데, 그 맛은 과히 작품의 경지였다.
심지어 위스키에 담가 둔 대마주나 차로 우려내기까지 했는데, 정말 일품이었다.

 

 

 

 

그 재배법을 전수받지 못한 아쉬움이 너무 많다.

 

 

 

 

 

 

 

 

 

이제 전설이 되어버린 일필선사를 잊지 못하는 것은, 대마보다 그의 인간적인 면모에 더 매료되었을 것이다. 

 

 

 


 각설하고, 만지산을 찾은 손님들과 어울려 낯부터 고기를 구워 술판을 벌였다.
이가 신통찮은 것을 알고 부드러운 등심을 사오셨는데, 고기보다 술이 더 잘 넘어갔다.

 

 

 

마침, 옆집의 윤인숙, 한순식씨와 더불어 이웃마을 최재순씨가 산에서 돌아온 것이다.
버섯 따러 갔다 왔다는데, 올해는 날씨가 특이해 버섯 대풍이라고 했다.

 

 

 

생전 먹어보지 못한 계란버섯과 밤버섯을 안주로 내 왔는데, 고기 맛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다들 새로운 친구가 되어 훈훈한 정을 나누었다.

 

 

 

운전 때문에 술 마시지 못하는 이재일씨 때문에 술자리가 길지는 못했으나, 소주 여덟 병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술에 취하고 인정에 취한 정선 만지산의 하루였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7일 새벽 일찍 정선으로 떠났다.

피서를 겸해 좀 쉬었다 왔으면 좋으련만, 겨우 2박3일의 일정이었다.

특별한 일은 없지만, 느긋하게 있을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이다.





만지산에 당도하니, 옥수수 밭이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멧돼지가 쳐들어 와 난장판을 벌인 것이다.
알맹이라고는 한 알도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먹어 치워버렸다.






옥수수 챙겨주기로 한 약속들도 결국 헛소리가 되고만 것이다.

우리 밭만 전기 철조망을 설치하지 않았으니 한 해 걸러 당하는 일이지만,
전기 철조망까지 쳐가며 농사짓고 싶은 생각은 없다.




 


주렁주렁 열린 고추에는 옆집에서 시키지도 않은 농약을 쳤다고 한다.
한 집만 농약을 치지 않으면 모든 고추가 탄저병이 걸린다는 이유인데,
농약 없는 유기농 풋고추 먹으려는 노력 또한 공염불이 되고 말았다.
이리저리 망친 농사에 답답해 하는 중에 가족들이 찾아왔다.






동생 조창호, 큰누님 조영희, 김순화 형수, 조카 영란이가 찾아 와 산소에 올라갔다.
어머니 무덤에 절 올리며 나눈 대화는 햇님이 장가가는 이야기 뿐이었다.
다들 신부 얼굴을 보지 못해 궁금해 하니, 영란이가 핸드폰을 뒤져 신부 사진을 찾아냈다.
참 좋은 세상이다. 산 위에서 블로그 사진을 꺼내 볼 수 있다니...






점심식사를 한 후 가족들이 돌아가고 나니, 혼자 바빠졌다.
냉장고가 정전되어 모든 음식물이 썩어 있었는데,

손님 오면 대접하려고 아껴 둔 돼지고기까지 몽땅 버려야 했다.
어찌된 일인지, 밖에 노출된 배전함 스위치가 내려져 있었다.






뒤늦게 냉장고 청소하랴, 집 청소하랴, 똥 오줌 못 가릴 정도로 부산을 떨어댔다.

더위에 지친 사정을 알았던지, 옆집에서 술 한 잔하자는 기별이 왔다.
옆집의 윤인숙씨가 이웃 최재순, 한순식씨와 함께 염소 탕을 안주로 술판을 벌여 놓았단다.






술 자리에서 기가 막히는 이야기를 들었다.
키우던 강아지 두 마리가 누군가가 던져놓은 독약 묻은 고기를 먹고 즉사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우리 집 정전도 누군가의 해코지가 아닌지 의심되었다.
지하수 분쟁에 대한 화풀이라는 추측이 나왔으나, 아무런 물증은 없다.

이젠 산골짜기에도 씨씨티브이를 설치해야 할 형편이다.
어쩌다 순박한 산골 인심이 이 지경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마침, 아랫동네 최연규씨가 나타나 그의 구수한 옛이야기에 잠시나마 즐거울 수 있었다.

뗏꾼들이 즐겨 찾았던 '전산옥'의 살 냄새 풍기는 이야기에서 부터
‘정선아리랑시장’에서 떡메치기 훈수 두던 우스개로 좌중을 웃겼다.


“너무 많이 치면 아파요. 잘 안되면 물 좀 살살 발라 쳐요.”






술이 취해 방으로 돌아오니, 평소에는 정겹게만 보이던 벽의 사진이나
온돌 열기에 그을린 포스터까지 귀신 나올 집처럼 음산해 정나미 떨어졌다.
사실, 귀신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사람이 더 무서운데 말이다.






날이 밝아오니, 어제 일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마당 아래 핀 도라지꽃은 장관을 이루었고, 배나무엔 돌배가 주렁주렁 달렸다.





동강 댐이 무산되어 다들 배나무를 뽑아낼 때, 한 그루 옮겨 심어 놓았는데,
20여 년 동안 가꾸지 않고 버려두었더니, 자연스럽게 돌배가 된 것이다.
그것도 돌배 술을 만드니 호흡기 나쁜 나에게는 도랑치고 게 잡는 격으로,
최고의 약인 셈이다.






그 이튿날은 하루 종일 잡초와의 전쟁을 벌였는데,
잡초 더미 속에서 탐스러운 호박이 굴러 나오기도 했다.
이런 저런 생활에 정들어 어머니까지 모셨으나,

사람들이 자꾸 마음을 뜨게 만드네. 



 


어쩌면 피하지 못할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빼지도 박지도 못할 처지에 한 숨만 나온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22일, 한 달에 한번 가는 정선 집에 들렸다.
영월 사진축제 가느라 평소보다 일주일정도 앞 당겼다.
개막식에서 저녁 먹고 오니 자정이 가까웠다.
작물은 돌아볼 틈 없이 빈 집 청소만 하고 자리에 누웠다.
시간이 없어 군불 때지 않고 잤더니,
온 몸이 떨려 두시 무렵 잠이 깨 버렸다.

 

 

 



 

먼동 트기를 기다리기란 죽을 맛이다.
티브이도 컴퓨터도 핸드폰마저 없으니, 책 볼일 밖에 없다.
돋보기가 눈을 따르지 못해 30분만 보면 눈이 아프다.
영월에서 가져온 ‘동강사진축제’도록이나 뒤적이며 시간 죽인다.
드디어 동창이 밝아왔다.

 

 

 




밖에 나가 농작물부터 살펴보았다.
고추, 오이, 도마도, 옥수수 등 모든 작물의 성장이 멈춰있었다.
그 동안 한 두 차례 비 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이곳만 피해간 듯하다.
간밤에 걸린 감기로 코를 훌쩍여가며, 물 조리 춤을 추었더니,
어느 듯 따가운 햇살이 비치기 시작한다.

 

 

 

 

 

 

사실, 다른 야채농사야 지어도 원가도 나오지 않는다.
심을 때 모종 값만 칠 팔만원 들어가는데,
농약을 치지 않으니, 병충해 때문에 수확을 제대로 못한다.
차라리 고생 안하고, 그 돈으로 시장에서 사먹는 것이 훨씬 싸게 먹힌다.
그 걸 알면서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농사를 짓지 않으면 잘 와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틈틈이 수확하여 정영신씨께 상납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무공해 야채 받고 좋아하는 표정에 온 몸의 피로가 싹 풀려버린다.

 

 

 

 

라면을 끓여 허기를 메운 후, 제초작업에 들어간다.
비가 오지 않아 농작물은 다 그대로인데, 왼 놈의 잡초는 그리도 잘 자라는지...
허리가 아파 앉은뱅이 의자를 끌고 다니며 일하지만,
보는 사람이 없으니 발가벗고 한들 어떠리...
한낮이 되니 더워서 더 이상 일 할 수가 없었다.

 

 

 

 

시원한 냉수 한 바가지로 땀 좀 식히고
이 곳 저 곳 돌아다니며 사물을 살핀다.
일하느라 눈 맞추지 못한 사물들과 교감을 나눈다.
탁자 위에는 오디가 떨어져 새똥처럼 굳어버렸다.
봐주는 사람 없어 혼자 노는 장미가 반긴다.

 

 

 

 

화장실은 숲이 가려 잘 보이지도 않았다.
문 열고 일보기 딱 좋은데, 똥 누며 보는 자연의 맛을 알랑가 모르겠다.

 

 

 

 

그런데, 새소리가 귀가 막힌다.
무슨 새인지 모르나, 어느 악기도 흉내 낼 수 없는 소리다.
한 놈이 째째째째~ 긴 노래를 부르니, 다른 놈은 까르르르 받아친다.
가끔 뻐꾸기가 뻐꾹~ 뻐꾹~ 추임새까지 넣어준다.
이렇게 자연과 노니는 시간이 좋아 만지산에 눌러 앉았지만,
나이가 들어가니 외로워서 못살겠다.

 

 

 

 

 


요즘은 님마저 발길이 뜸하니, 오래 있고 싶은 생각이 없다.
서울에 숨겨놓은 것도 없는데, 뭐가 급한지 떠날 채비부터 한다.
동자동도 인사동도 기다리지 않는데, 혼자 짝사랑한다.

 

 

 



 

떠나기 전에 산소에 들려 술 한 잔 올리며 울 엄마께 하소연했다.
“아따! 햇님이 힘 좀 실어주라고 그래 부탁했는데, 아슬아슬하게 떠랐뿌요?”
“야 이놈아! 산꼭대기 누워있는 내가 무슨 힘이 있노?”
하나 마나인 소리 주고받으며 시름 달랜다.

 

 

 

 

 


따놓은 상추와 고추 잎을 차에 실고 서울로 줄행랑쳤다.
그날따라 어둠이 몰려오는 조양강 풍경이 낯설었다.
평창올림픽으로 생겨 난 교각인데, 그동안 무엇이 바빠 관심조차 없었다.
그렇게 하나 둘 세상은 변해 가고 있었다.

 

 

 

 


황규태선생의 '묵시록'처럼 사람은 없고 살풍경만 있었다.

사진,글 / 조문호

 

 

 

 

 

 





지난8일 정선에 야채 심으러 왔는데,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옆집 토끼가 탈출하여 심어놓은 야채를 다 망쳐버렸네.
상추야 다시 자라겠지만, 고추 순을 모조리 따 먹었구나.
부추와 옥수수는 물론, 땅을 뚫고 나온 대마초 순까지 다 먹어 치웠다.
이 죽일 놈의 토끼! 잡아 도리탕이나 끓여 먹을까보다.

옆집 아줌마와 여럿명이 토끼 몰이에 나섰는데, 역시 빠르긴 빠르더라.
다리가 아파 더 이상 쫓지도 못할 지경이 되어서야,
지 놈도 힘들었는지, 제 집으로 기어들어 간신히 막을 내렸네.
토끼 체포 기념주로 한 잔했으나, 올 해 대마초 맛보기는 날새 버렸다.

젠장 일이 풀리지 않으려니, 토끼까지 속 썩이네.



늘 메고 다니던 카메라 가방이 사라졌다.

요즘 날이 갈수록 깜빡 깜빡 잊는 일이 잦아 졌다.
아는 분을 만나도 잘 기억나지 않는 경우가 있어, 난처하기 짝이 없다.




나이가 들수록 귀가 어둡고 말이 어눌한 것은
쓸데없는 일에 나서지 말라는 뜻일 테고,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은 세상사 하나하나 잊으라는 것이겠지만,
문제가 생기니 문제인 것이다.




지난 19일 급히 정선 만지산집에 다녀 올 일이 있었다.
도봉산 이벤트 벌일 날이 닥아 와, 옛날식 뷰카메라를 챙겨와 개조해야 했다.
정선까지 가서 카메라만 챙겨 오기엔 억울한 감도 있었다.




지천에 늘린 나물은 차지하고라도 두릅이라도 좀 따 가고 싶었다.
조금만 딴다고 시작했지만, 욕심이란 게 끝이 없다.
마침 시기도 적절하여, 한 시간이 금세 지나 버렸다.
서둘러 돌아왔으나, 서울오니 오후 아홉시가 되었다.




사는 게 뭐가 그리 급한지, 서너 시간을 차 한번 세우지 않고 달린 것이다.
차 때문에 녹번동에 갔더니, 정영신씨는 화순 운주사에서 열릴
한정식선생 전시 오프닝에 갈 것이라며 짐을 챙기고 있었다.
두릅을 전해주고 동자동에 가려는데, 내 가방이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항상 몸에 메고 다녔는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 가방에 돈은 몇 푼 없지만, 각종 신분증이나 교통카드가 든 지갑도 있고,
동자동 쪽방 열쇠에서부터 사진자료를 담은 유에스비까지 들어 있었다.
더 중요한 것은 어렵게 장만한 카메라가 있지 않은가?




두릅 따러가며 방에 두고 갔을까? 아니면 밖에 있는 탁자에 놓았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5월 초순경 야채 심으러 갈 때 찾아오면 되겠으나,
방안에 두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었다.
밖에 있다면 누가 가져갈지도 모르지만, 비가와도 큰일이다.
그보다 가방이 없으니,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어 자리에 누웠으나,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이리 저리 뒤척이다, 날 밝기 무섭게 정선으로 달려간 것이다.
도착하니, 오전 여덟시 쯤 되었는데, 진입하는 조양강변이 너무 아름다웠다.
습관적으로 카메라를 찾았는데, 찾지도 않은 카메라가 있을 수 없었다.
한심스러운 생각이 더니, 쓴 웃음이 절로 나왔다.




집에 도착해 찾아보니, 카메라는 방에도 밖에도 아무데도 없었다.
온 집안을 샅샅이 살피다보니, 평소 지나치던 사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10년 전 ‘만지산 서낭당 축제’ 때, 전시한 봉화 신동여씨의 도예작품도 보였고,
눈에 익은 작물도 싹을 튀 우고 있었다.




더 이상 간 곳이라고는 두릅 따러 간, 산 비탈뿐이었다.
어제 갔던 길을 따라가며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갑자기 눈이 번쩍 띄었다.
난데없는 두릅나무 가지에 그 가방이 걸려 있지 않은가.
두릅 따다 글리 적 그리니, 가방을 거기다 걸어 놓은 것 같았다.




이런 바보가 어디 있을까? 보호자 없인 꼼짝 못하는 어린애나 뭐가 다른가.
씁쓸하긴 했지만, 가는 세월을 어쩔 것인가?
가방을 찾아 기분은 좋았으나, 긴장감이 풀리며 피로감이 몰려왔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카메라였는데, 나무에 걸린 가방에서부터
눈여겨 본 사물들을 찍으며 내려 온 것이다.




차에 있는 빵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되돌아보니, 잠간의 건망증으로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낸 것 같다.


길에 뿌린 기름 값도 기름 값이지만,
운전하느라 시달린 장장 일곱 시간은 어쩔거냐?

한 곳에서 편하게 살지, 왜 이리 먼 정선을 오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서울 쪽방은 본가이고, 정선 움막은 별장이라 변명해 왔는데,
오래전 ‘통인가게’ 관우선생께서, 한 말이 생각났다.
“제일 관리하기 힘든 것이 첩과 별장”이라고...





그런데, 돌아오는 운전 길은 긴장이 풀려 그런지 졸음이 쏟아져 죽을 지경이었다.
평소의 마구초까지 약발이 받지 않아, 열 번 넘게 차를 세워 원숭이 체조를 해야 했다.
그래도 차에 받혀 죽기는 싫어서...


왜 사는지 모르겠다.

사진, 글 / 조문호



























 

무너진 돌계단 주위에 진달래가 피어있다.

이 화창한 봄날, 왜 그리 슬퍼 보이는지..

도망치려는 내 마음을 눈치 챈 걸까?

아니야! 아니야!” 다독였으나,

내 마음 나도 모르겠다.





지난 3월 29일부터 만지산에서 나흘간 머물었다.

'동강할미꽃축제' 사진전이 날 붙잡은 것이다.

전시장은 정영신 동지에게 맡겨두고,

잠시 만지산 집으로 들어 왔다.





'통도사' 수안스님은 꿈꾸는 집이라 이름 주셨지만,

꿈만 꾸어 그런지, 힘들어 못 살겠다.

이제 영정사진으로 사용하려는 알 몸까지 지쳐버렸다. 



 


지난번 바쁘게 떠나며 챙기지 못한 것도 거두고,

방 청소를 하려니 물 부터 받아야 했다.

지하수 분쟁의 연결점인 우리 집 땅속 밸브는 늘 잠겨있다.


밸브를 열면 물이 새니, 마음대로 쓸 수가 없다.

조금만 받으려고 밸브를 살그머니 열었는데,

호스 연결점에서 물이 삐쳐 올라 물을 뒤집어 써야 했다.



 


제기랄!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수도정 사준지가 오래건만, 옆집 때문에 고치질 않는다.

더 이상 다른 집은 물 주지 않는다는 내용의

연판장에 서명하지 않았으니, 미운털도 박혔을 것이다.


수시로 열리는 지하수 회의에 참석 할 수 없어

위임장에 도장 찍어 준지 몇년이 되었다.

얼마 전, 처음으로 본 정관에 어이 없는 항목도 있었다.

헌집을 새집으로 개조해도 이 백 만원 내야 한다는

우리 집을 겨냥한 내용도 있었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물싸움을 남의 집 불구경하듯 지켜본 죄다.

얼마 전 정선 군수 중재로 물주겠다는 약속을 했다지만,

아직 마음의 빗장은 열지 않은 것이다.


한 집은 연결되었다지만, 고장 난 우리 쪽 라인을 고치려면

수도관이 지나는 밭 주인의 동의서를 받아야 한다는 거다.

그 밭 주인이 누구더냐?

여지 것 물 분쟁을 주도한 사람이 동의서를 쓰 주겠는가?





이제 더 이상 쪽팔리게 하지 말고. 제발 끝내라.

자기중심의 정선 산골사람들 근성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돈 때문에 변해버린 사람들 모습이 싫어졌다.

아무리 살기 좋은 곳도 사람이 싫어지면 못 산다.

 

저 많은 짐들은 어쩌며, 울 엄마는 어쩔거냐?

아직은 미련이란 게 남았으니, 버리지도 못한다.

울 엄마 계신 산소 올라가, 술 한 잔 올리며 하소연 했다.



 


와, 지난번엔 차 쳐 박아 못가도록 용심 부렸소?

산소 왔다 발목 잡힌 지난 이야기부터 꺼냈.

~ 이놈아! 자식 못되게 하는 애미 봤냐?

그 날 가면 다치니까 잡은 거지

그 말을 믿어야지 어쩌겠나?

 

이제 영정이 새겨진 무덤 앞의 목판 사진도 지워지고 있었다.

저 사진이 지워지면 엄마도 지워질 것이라고 말한 그 때가 생각났다.

엄마도 이제 육신이 허물었겠네요. 그만 화장할까요?“라며 슬쩍 떠 보았다.





태우던 버리던 거기 무슨 소용이고!

니 마음 다 안다,

그냥 순리대로 살아라. 모든 건 때가 있다



 


정녕, 만지산의 봄은 오려나?

 

사진, / 조문호





















 

 

 

 


열길 벼랑에 처량하게 핀 동강할미꽃이 슬프다.

2018년 04월 06일 (금) 01:33:23 정영신 기자 press@sctoday.co.kr

정선의 동강할미꽃이 피어나야 강원도의 봄은 시작된다.

정선읍 귤암리의 ‘동강할미꽃 보존연구회’가 마련한 제 12회 ‘동강할미꽃축제’가

지난 3월30일부터 4월1일까지 3일간의 일정으로 ‘동강생태체험전시관’일원에서 열려, 봄나들이 한 상춘객들을 맞이했다.



▲ 귤암리 벼랑에 피어있는 동강할미꽃 Ⓒ정영신


‘동강할미꽃’은 아우라지를 사이에 둔 애틋한 연인의 연모가 조양강 뼝대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이야기도 있고.

동강할멈과 할아범에 대한 그리움이 동강할미꽃으로 피어난다는 소문도 있으나 아무런 근거는 없다.

꽃이 알려진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근거 없는 이야기들이 전설이란 이름을 달고 등장해, 자칫 역사를 왜곡시킬 수 있기에 경계해야 한다.



▲ ‘동강할미꽃보존회’최완순 회장 Ⓒ정영신


동강물줄기를 굽어보는 척박한 환경에서 자라는 동강할미꽃은 머리카락 같은 미세한 뿌리가 바위틈에 들어가 자생하는 꽃으로,

마치 강원도 산골 사람들의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주는 것 같아 더 애착이 간다.

산소에 피어나는 고개 숙인 할미꽃과는 다르게 하늘을 향해 꽃을 피우는 동강할미꽃에서 신비로운 자연의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



▲ 내빈축사하는 신주호 정선부군수 Ⓒ정영신


동강할미꽃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1988년 야생화 사진가 이석필씨가 최초로 촬영할 당시에는 강을 건널 땐 다리가 없어 헤엄을 쳐서 건너갔다고 했다.

이석필씨는 그 당시 들꽃이 살아가는 환경 차원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그 후에 사진가 조문호씨가 이끌어온 '환경사진가회' 일원으로 활동하며

최초에 찍은 할미꽃 사진을 환경사진집에 발표한 것이다.

그 이후 1997년 김정명씨가 동강할미꽃을 찍은 꽃 달력 사진을 본 한국식물연구원 이영노박사가

2000년 ‘동강할미꽃’이란 이름을 달아 세계 유일종으로 발표하며,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 1988년 4월 야생화사진가 이석필씨가 최초로 찍은 동강할미꽃

(1999년 발행된 '동강' 환경사진집에서 스크랩)



한국특산종인 보랏빛 나는 ‘동강할미꽃’은 정선, 영월, 삼척, 태백 등, 석회암지대에서만 서식하는데,

그 중 굽이굽이 절벽으로 이어진 정선 귤암리의 아름다운 경관 속에 피어나는 꽃이 가장 아름답다.

그 이후 귤암리 주민들이 협력하여 ‘동강할미꽃 보존연구회’가 만들어지며, 2008년 정선군 군화로 지정된 것이다.

또한 동강할미꽃은 2,000년 동강댐 건설 백지화 결정에도 크게 기여한 식물이다. 당시 고 김대중 대통령은

세계 최초의 신종으로 추정되는 7종의 동식물과 20여종의 멸종위기동식물 보호 및 생태계 보전을 위해 동강 댐 설치를 막은 것이다.





▲ ‘아리랑예술단’의 아리랑공연 Ⓒ정영신


구구한 세월동안 석회암 절벽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며 살아 온 이름 없는 야생화가 세상에 알려지며,

사진인들이 몰려드는 등 오히려 수난을 당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또한 꽃이 피는 4월이 되면 야생화를 사진에 담으려고 무분별하게 자연을 파괴하는 사진인 들이 많이 생겨난다.


자연환경을 다치지 않도록 있는 그대로의 꽃의 습성이나 주변여건까지 함께 담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꽃만 부각시키기 위해 꽃을 보호하는 주변의 마른 풀을 다 뜯어내고,

심지어 꽃잎에 물을 뿌리는 일들이 종종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 '제12회 동강할미꽃 축제'에 참석한 내빈들모습 Ⓒ정영신


이를 막기 위해 주민들의 모임인 ‘동강할미꽃보존회’에서 생태계를 보호하려 공을 들이고 있다.

야생화가 있는 모습 그대로 자랄 수 있도록 둬야함에도 불구하고, 지역축제로 인해 자연생태환경이 몸살을 앓아 온 것도 사실이다.

야생에서 자라는 식물은 인간의 숨소리와 입김마저도 치명적인 독이 된다는 것을 진정 모르고 있는 것일까.



▲ 귤암리부녀회에서 음식을 장만하는 모습 Ⓒ정영신


강원도 문화관광해설사인 서덕웅씨는 “사진을 예쁘게 찍으려고 잎을 뜯어내는 과정에서 손을 타기 때문에 수정되지 않는다.

분별한 사람들의 행동이 자연을 죽이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서덕웅씨는 지역자산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지금까지 동강할미꽃 보존을 위해 애쓰고 있다.



▲ 동강할미꽃지킴이 서덕웅님 Ⓒ정영신


이날 열린 ‘제 12회 동강할미꽃축제‘ 개막식은 정선 군립 ‘아리랑예술단’의 아리랑공연으로 시작되었다.

‘동강할미꽃보존회’ 최완순 회장의 개막선언과 신주호 정선부군수 등 내빈의 축사가 이어진 후,

다양한 공연과 전통놀이 마당, 동강할미꽃 심기 등의 많은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축제장을 찾은 관광객들과 함께 즐기는 축제의 마당이 되었다.



▲ 동강할미꽃 심기 Ⓒ정영신


축제가 펼쳐진 생태공원에는 수필가 우애자씨가 준비한 한복체험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교복과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는데,

어느 지역을 가보아도 똑같은 행사를 진행해 지역적인 특색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아름다운 자연을 즐길 줄 모르고, 타지의 가수를 초청해 흥을 즐기는데,

차라리 정선주민들의 삶의 애환을 노래한 정선아리랑을 관광객과 함께 배우는 시간이 마련되면 좋지 않을까 싶다.



▲ 떡매치기 하는 관광객 Ⓒ정영신


이번 축제엔 필자의 ‘장터 사람들’과 조문호씨의 ‘산골 사람들’ 사진전이 열려 멀리서 지인들이 찾아왔는데 다들 불편하고 불쾌감을 호소했다.

축제장으로 올 수 있는 교통편의가 마련되어 있지 않고, 손님을 맞을 기본이 되어있지 않다고 불만을 터트렸다.

정선터미널에서 축제장까지 셔틀버스를 운행해야하고, 물을 마실 수 있는 식수대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 '산골사람들'사진전시에서 만난 사진의주인공 이선녀씨와 사진가조문호 Ⓒ정영신



요즘은 지자체에서 마련하는 축제의 전성기다.

그러나 지역적인 특색은 사라지고 천편일률적인 행사로 관광객들을 식상하게 한다.

지역축제는 그 지역에 가야만 볼 수 있는 것들을 보여주는 소중한 체험을 통해 지역문화를 함께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











  




올 해로 열 두 번째 맞는 동강할미꽃 축제가 지난 30일부터 4월1일까지

정선 귤암리 ‘동강생태체험전시관’에서 열렸다.
사실, 이 축제가 열린지는 오래되었지만, 주민들의 축제에 대한 몰이해로
상춘객을 끌어 들일 수 있는 좋은 여건에도 불구하고 제구실을 못하고 있다.




이맘 때면 동강할미꽃 찍으러 전국에서 몰려오는 사진인들 숫자 또한 적지 않아
그들을 염두에 둔 축제 기획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고 있다.
어린이 사생대회나 할미꽃사진전 등 간단한 행사들만 반복되는 

축제라기보다 동네잔치에 가까운 수준이다.




초창기에는 강변과 산길로 이어지는 동강할미 상여 길 연출, 섶 다리 재현,
조문호의 ‘신명’ 설치전 등 여러 가지 볼거리로 야심차게 추진하기도 했으나,
번거롭다는 주민들의 반대로 중단되고 말았다.



그 이후부터 개인 사진전이나 부탁하면 걸어 주었지만, 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지만 주민들과 읍내 있는 분들까지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가능하면 축제 개막식은 봄나들이 겸 꼭 참석했다.




그러나 세월에 알려지며, 주말 상춘객이 늘어나자 그만 돈벌이에 맛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손님의 지갑을 열게 하는 것이라야 동네에서 만들어 파는 음식이나
재배한 동강할미꽃 화분 파는 게 고작인데,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그런데, 오랜만에 봄나들이 한 상춘객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다른 식당에서는 그냥 주는 좌판기 커피를 천원에 팔거나 음식이 비싼 거야
안 사먹으면 되지만, 목마르면 물은 마셔야 할 것 아닌가?



축제장 어디에도 생수대나 물 마실 곳을 마련해 두지 않은 채,
작은 생수 한 병을 천원에 판매한 것이다.
돈보다 손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며 군청에 민원을 제기하겠다는 분들이 여럿 있었다.




장사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기본적인 물이나 커피를 비싸게 팔면 모든 음식이 바가지란 인상부터 주게 된다.
돈만 알지 장사의 기본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이 동네 터줏대감 이야기로는 장사해 남은 돈으로 일한 사람들 바닷가 회 먹으러 가는 것이 고작이란다.
'정선군청'이나 '강원랜드'에서 후원하는 금액만도 충분한데, 그 지원금은 다 어디에 쓰는지 모르겠다.




축제가 열리는 귤암리가 어떤 곳인가?


산 높고 물 깊은 두메산골 귤암리가 인심 좋은 동네로 소문났으나,
동강 댐 백지화로 생활환경이 바뀌며 변하기 시작했다,
다들 새집 짓고, 집집마다 티브이 안테나가 들어서며 눈을 뜨기 시작했는데,
이제 인심 좋기는커녕, 야박하기 짝이 없는 동네가 되고 말았다.



귤암리 만지골의 지하수 분쟁은 이년 넘도록 이어지고 있다.
주민들을 ‘신판 봉이 김선달’이란 소리까지 듣게 하는 이 분쟁 역시
이주민에 대한 원주민의 갑 질에 다름 아니다.
‘고래 싸움에 세우 등 터진다’는 말처럼 나까지 물 사용에 지장을 받고 있다.




옛날에는 낯선 사람이 귤암리를 찾으면 뭘 먹이지 못해 안달이었다.
없는 살림이지만 옥수수나 감자를 삶아 대접하는 등 인심 좋기로 소문난 동네였다.
깊은 산골이라 사람 만나기가 힘들 때라 반가워 그랬는지 모르지만,
아직까지 마을 어귀에는 ‘인심 좋은 귤암리’란 표석이 세워져 있다.




내년 부터는 동강할미꽃축제가 새롭게 태어나길 간절히 바란다.


축제기획 자체를 재정비하고, 최소한의 방문객 편의는 제공되어야 한다.
제일 먼저 해결할 것은, 이곳은 버스가 하루에 네 번밖에 다니지 않는 산골이라,
축제기간 동안 정선터미널에서 축제장까지 매 시간마다 출발하는 셔틀버스를 운행하라.
둘째, 축제장 서너 곳에 물을 마실 수 있는 음료대를 설치하라.
셋째, 동전 넣고 커피나 음료를 뽑을 수 있는 좌판기를 비치하라.




이런 기본적인 문제가 개선되지 않는 한, 동강할미꽃 축제의 미래는 없다,
그렇지 않으면 도시락 싸들고 다니며 못 오게 막을 작정이다.

아래 사진은 축제기간 동안 있었던 이런 저런 모습이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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