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변화 워크숍 참관기]

 

정선아리랑시장  '감성변화 워크숍'이 지난 25일 정선신협 회의실에서 개최되었다. 사진촬영을 위해 참가했으나

강의 내용에 끌려 주객이 전도되고 말았다. 카메라는 내려놓았지만 대신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나는 십여 년 동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왔다.
오래전에도 이런 저런 사진작업들을 해왔지만 이토록 죽자 살자 일에만 매달리지 않았다. 더구나 사람 사귀기를 좋아해 친구들 연락이라면 자다가도 달려갔기에 가족들에게는 빵점짜리 가장이었다.  어느 누가 친가족보다 주변 친구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겠느냐 마는 항상 가족은 남이 아니라는 인식에서 뒷전으로 밀려났으니, 요즘 세상에 그러고도 맞아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이 용타싶다.  사진작업 또한 눈앞에 부딪혀야만 몰입하는 스타일이니 다른 사람들에게는 허구한 날 노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었을 게다.  멀리 있는 소재보다 가까운 주변의 기록을 더 중요시했기에, 자연스럽게 정선의 '두메산골 사람들'과 서울의 '인사동 사람들' 촬영에 한 세월을 보낼 수가 있었다.  

 

십이 년 전, 지금의 아내를 만나고 부터 상황이 완전 바뀌었다. 아내는 이십여 년을 장터 사진에만 메달려 왔지만, 장터를 전부 기록하기보다 중요한 장터만 찾아다녔다. 다큐사진가라면 전국 장터 기록이 우선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 방대한 작업량에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할 뿐이다. "그래, 늦었지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를 이 작업에 한번 올인하자"는 생각으로 아내와 함께 장터를 떠돌아 다녔다. 그 결과 많은 빚은 졌지만 전국 540여 곳의 장터를 기록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그대신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해 왔던 주변 사람들을 대부분 잃어버린 것이다. 들려오는 소문에는 "정영신이 때문에 조문호가 변했어!"라며 아내를 나무라고 있었다. 일 때문에 소홀한 건 맞지만, 나이가 들면 변 할 수도 있는 것을 아내 때문이라는 이야기에 뿔따구가 났다. 아내는 여태껏 내가 하는 일에 너무 간섭을 하지않아 오히려 섭섭할 정도인데, 나 때문에 욕먹는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시간 날 때마다 카페에 이런 저런 글을 올리며 진위를 알리려다 서로 갈등을 빚어왔고, 마침내는 주변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시선이 아니라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며 스스로 괴로워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감성변화를 시도해 스스로의 평안을 찾아보기로 작정한 것이다.
사진작업에 끝이란 있을 수 없지만 장터 작업도 어느정도 윤곽이 잡혔으니, 이제부터라도 일보다 자신의 삶을 즐기며 살아가기로 마음을 고쳐 먹었다. 그리고 모든 코드를 부정에서 긍정으로 바꾸기로 했다. 오충걸선생의 강의처럼 무관심에서 관심으로 바꾸고, 오해에서 이해로, 불만에서 만족으로 개념 자체를 바꾸려는 것이다. 벌써 그런 생각을 하는 자체부터 마음이 편안해지고 즐거워진다.
삼일동안 계속된 정선아리랑시장의 혁신 리더상인 감성변화 워크숍'은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변화시킨 소중한 자리가 되었다.

 

사진,글 / 조문호  

추석을 이틀 앞둔 정선시장은 단대목이라 그런지 친숙한 정선 사람들이 더 많았다.  

제수용품을 구하기도 하고, 아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 나누는 모습들이 정겨워 보였다.  

장터를 돌아다니다 반가운 우리동네 주민들도 많이 만났다.  

혼잡했던 정선시장이 오랜만에 고향 골목에 들어선 것처럼 포근하고 정겨웠다. 

 

정선군청 직원들도 "추석제수용품은 전통시장에서 구입하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었다.  

최승준 정선군수도 상인들과 인사를 나누며 나물 등 갖가지 제수용품을 사기도 하고,  

옷가게에 들어가 어머니들과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정선 역전에 사는 김지성(57세)씨는 장에서 술 한 잔 걸쳤는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술마실 돈이 부족했던지, 원님 소매 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한 푼만 줍쇼~" 

참 세상 많이 좋아졌다. 옛날 같으면 곤장을 쳤을텐데... 


 

 

 

 

 

 

 

 

 

 

 

 

 

 

 

 

 

 

 

 

 

 

 

 

 

 

 

 

 

 

 

 

 

 

 

 

 

 

 

 

 

 

 







 

 

 

 

 

 











 

 

 

 


 

 






 

 

 














 


 

 

 


 

 



정선은 과거와 만나는 곳이다. 그 오랜 향수를 맛볼 수 있는 날이 2일과 7일에 서는 오일장이다.
두메산골에서 자란 산더덕,·곤드레를 비롯한 갖가지 산채도 구경하고 덤으로 구성진 정선아리랑도 들을 수 있다.
오일장이 서는 장날이면 흥겨운 잔치마당도 열려 관광객들의 신명을 끌어낸다.

정선 장에 가면 꼭 맛봐야 할 향토음식도 많다.
메밀전병과 수수부꾸미, 이름도 재미있는 콧등치기국수와 올챙이국수가 그것이다.
콧등치기국수는 메밀을 껍질째 갈아 거뭇머뭇한 가루를 물에 넣어 손으로 치대어 칼로 썰어 내놓는 메밀국수다.
굵기는 거짓말 좀 보태 손가락만 한데, 옛날에 뗏목을 타던 떼꾼들이 주막에 들려 장국에 말아먹었다고 한다.
굵은 면발을 후루룩 먹으면 면발이 콧등을 쳐서 콧등치기국수라고 불린다.
이에 비해 올챙이국수는 옥수수를 묵으로 쑤어서 구멍 뚫린 틀에 내리면 큰 물그릇에 떨어지는 국수가락이
올챙이가 헤엄치는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콧등치기나 올챙이 국수를 처음 먹는 사람들은 그 진맛을 잘 모르지만 먹을수록 당기는 음식이다.

메밀전병에다 황기막걸리를 한 병마셨지만 곤드레밥을 먹지 않고 어찌 그냥 떠날 수 있겠는가.
이름만 들어도 입맛을 돋우는 곤드레 나물밥. 된장을 넣어서 비벼도 좋고, 양념장으로 비벼 먹어도 되지만
그 각 각의 맛이 다르니 골고루 먹을 수 밖에 없다. 그 맛에 끌려 곤드레 만드레가 될지라도...

정선아리랑시장에서는 토요일을 맞는 9월28일부터 네차례에 걸쳐 장아찌와 효소 담는 법도 가르쳐 준다고 한다.
모든 것이 공짜인데, 자기가 담근 장아찌까지 준다니 귀가 솔깃해진다. 잘 배워두웠다가 아내에게 점수 좀 따야지...
그리고 10월2일부터 나흘동안 '대한민국 아리랑대축제'가 정선에서 열리지 않는가.
님도 보고 뽕도 딸 겸, 올 가을엔 정선에서 지낼 작정을 했다.

떠나오는 발길 뒤로 들리는 밥집 아낙의 인사도 정겹더라.
"담에 또 오시드래요"

 사진,글 / 조문호









이 사람-            

 

정선의 문화게릴라 강기희씨

"이 시대의 마지막 빨치산 숙암골로 숨어들다."

 

 

 

강기희씨 하면 진보적인 성향의 소설가, 또는 '동강에는 쉬리가 있다'를 쓴 작가로 대개 기억한다.
그래서 그의 구체적인 이력을 한번 들여다보았다.

 

그는 정선토박이로 강원대학교 무역학과를 졸업하였고, 1998년 ‘문학21’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장편소설로 ‘아담과 아담 이브와 이브’, ‘동강에는 쉬리가 있다’, ‘은옥이 1, 2’, ‘개같은 인생들’, ‘연산’ 등이 있으며

한국최초 전자책 전문업체인 ‘바로북 닷컴’이 주최한 오천만원 고료 ‘제1회 디지털문학대상을 수상하였고,

그리고 2005년 한국문화에술위원회의 문예창작기금을 수혜하기도 했다.

지금은 한국문학평화포럼이사로 한국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한다는 등의 이력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이력보다 더 중요한 그 만의 남 다른 면모가 많다.

순정의 절규를 외치기도 하지만 때로는 날카롭게 현실을 꿰뚫어 보는 문제의식을 가진 작가이다.

그동안 ‘오마이 뉴스’ 객원기자로 일하며 현실을 비판했던 탓인지 가끔 색깔론을 재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정선을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애써 왔다는 사실이다.

가진 것이 없어 망정이지 만약 경제적 능력만 있었다면 쉴 틈 없이 판을 벌일 그런 사람이다.

정선 집에는 서울에서 활동하는 문객들이 수시로 들락거리고, 필자도 정선보다 인사동에서 그를 만날 때가 많았다.

지역적 소외감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 만큼 문화예술에 대한 갈증을 많이 느낀다는 반증이다.

몇 년 전 누전에 의한 화재로 자신의 집을 몽땅 불태워 버린적이 있었다.

집뿐 아니라 책이며 옷이며 살림 전부를 불 태워 숟가락 하나 건지지 못한 빈털터리가 되었다.

다행히 남의 집이긴 하지만 숙암리의 아름다운 저택에 입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한 때 박성범, 신은경 커플이 별장으로 사용했던 꿈의 궁전임에도 불구하고 

오래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던 탓에 그가 아지트로 빌려 쓰게되었다는 것이다.

그 곳에서 얼마 전 출간된 ‘연산’을 음모하기도 했고, 지금은 또 다른 일을 저지르기 위해 음모 중이다.

올 시월달에 열릴 정선아리랑제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기에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그는 분명 정선이 내 세울 수 있는 자랑스러운 작가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가 성장한 배경에는 정선시장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빠트릴 수가 없다,

그의 어머니이신 이춘옥(81세)씨가 한 평생을 정선장에서 벌어 그 돈으로 자식들을 키웠다는데.

 아직까지 가게도 없는 노점에서 장사하는 어머니를 늘 안스럽게 지켜보는 그다.

그래서인지 정선아리랑시장에 문화의 옷을 입히는데도 많은 고심을 해왔다.

얼마 전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곳에다 돈 안 되는 ‘골목도서관’을 차려 언론의 조명을 받기도 했는데,

지금은 모자가 함께 장터에서 일하고 있는 셈이다.


자랑스러운 장꾼의 아들! 강기희씨의 또 다른 문화적 음모를 기대한다. 

 

 

 

 

 

 

 



 

 

 

장터의 “양반전” 마지막 공연이 지난 8월 31일 오후3시30분부터 정선아리랑시장에서 열렸다.

 

2주전 ‘아라리 촌’에서 '양반전'사진은 찍었으나 시장 바닥에서 공연하는 모습이 더 마당극 다울 거라는 생각과

신들린 듯 연기하는 최진실씨의 모습이 눈에 밟혀, 하던 일을 미룬 채 정선으로 향했다.
피서철이 끝 난 직후라 그런지 관객들은 예상보다 적었지만 출연진들의 연기는 물이 올라 한 껏 신명을 풀어내고 있었다.

최진실씨는 마치 ‘양반전’의 배역을 맡기 위해 태어난 배우같다는 생각을 잠시했다.

소리와 춤, 연기의 삼박자가 딱 들어맞는데다, 그 광대적 끼가 여간 아니었다.
특히 영감을 붙들고 우는 대목에서는 그 배역에 몰입되어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2분 가까이 대성통곡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려 카메라 화인더를 적셨다.
아! 이게 진짜 감동 아닌가?

 

집으로 돌아와 그의 상세 이력을 조회해 보았더니 이미 세상을 떠난 영화배우 최진실씨 이야기로 도배되어 있었다.

유명세에 질려 이력은 무슨 이력이냐며 컴퓨터를 접었지만 ‘양반전’의 최진실은 진짜 진실했다.
머지않아 정선을 대표하는 배우가 아니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최고 광대로 거듭 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 이 사람

 
                                              "상처를 안고 장터로 들어온 이숙란씨" 

 



 꽃샘추위가 극성을 부린 봄날 걸음마를 막 시작한 아들을 등에 업고 꼬물꼬물 여린 잎을 밀어내는 여리디 여린 초록과 조우한다. 그녀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바라봐 주는 자연과의 대화를 즐겼다. 얼굴을 들이밀어도 외면하지 않는 나무들과 만나는 것이 유일한 취미가 되어 버린 그녀 앞에 늘 넓은 들판이 펼쳐져있었다. 어쩌면 새봄이 주는 갖가지 재미와 푸르런 자연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했는지도 모른다. 따뜻한 햇볕에 불려나가 호젓하게 비를 맞아가면서도 냉이와 달래를 바구니 가득 캐왔다는 그녀다. 

 13년전 바람이 몹시 부는 날 냉이와 달래를 정선장에 갖고 나와 후미진 골목길에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사람들이 가격을 물어도 고개 숙인 채 얼굴을 들지 못했다는 그녀였지만 지금은 당당하게 사람들을 바라보며 얘기도 하고 거기에 미소까지 담아낸다.

 겨우내 땡땡 얼어붙었던 땅이 녹아내리듯, 사시사철 살아 숨 쉬는 자연의 밭에서 돈을 얻는 재미에 빠져 장날이면 읍내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는 그녀다. 신월리에서 읍내까지야 20~30분이면 갈수 있는 거리지만 그녀에게는 기나긴 여행이었을 것이다.

꿈 많은 12살 단발머리 소녀시절 홍역을 앓다 부모의 무지로 희귀병을 얻었다고 한다. 열이 심하게 나는 홍역으로 갑갑해하던 어린소녀가 물속에 수시로 몸을 담갔었는데, 그 때문에 다발성신경종이라는 희귀병으로 진행되지 않았나 추측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당시 부모님이 병원에 한번이라도 데려가 치료받게 했다면 그녀 모습이 지금처럼 되었을까? 

   고개를 숙인 채 더덕껍질을 벗기고 있는 그녀를 본게 10년 전인 듯싶다. 그 이후부터 정선장에만 가면 제일먼저 하는 일이 그녀를 눈으로 찾는 일이었다. 나름대로 그녀를 존중해준다는 이유로 사진은 일절 찍지 않았다. 그러나 필요한 것이 있으면 꼭 그녀 노점에서 샀다. 그녀가 장날마다 벗겨내는 더덕이며 나물을 사며 사람들과의 대면을 기피하지 않고 생업에 몰두하는 그녀의 용기와 자긍심에 박수를 보냈다. 때로는 웃으며 건네주는 산나물과 거스름돈을 받을땐그녀의 손을 꼭 잡아보기도 했다. 

   어느 장날 용기를 내어 더덕껍질을 벗기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수줍은 듯 함박웃음을 건네주는 얼굴을 처음으로 똑바로 쳐다보았다. “사진 찍어도 괜찮나요?” 쑥스러워 하는 그녀 표정을 화면가득 채우고 인터뷰를 했다. 여기에 그녀가 살아온 힘든 인생살이를 다 풀어놓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콩나물시루를 등에 메고, 아이는 앞으로 업고 장에 나왔다는 어미의 애틋한 마음과 세상을 헤쳐가는 그의 용기를 전하고 싶다. 해가 떨어지기 시작해야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는 그녀에게 정선장터는 삶의 터전이었다. “요란스레 눈에 띄지 않아도 올 사람은 다 알아서 온다.”며 장날마다 묵묵히 더덕껍질을 벗기는 이숙란(49세)씨는 열심히 사는 것만이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일이라고 한다. 함께 업고 다니며 장사 했던 아들이 벌써 고등학교 2학년이라고 자랑하는 그녀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방법을 정선장에서 배운다고 한다. 그녀에게 정선장은 아들의 꿈을 키워주는 작은 세상이다. 몸이 허락하는 한 장에 나올 것이라는 이숙란씨와 같은 정선사람들의 힘이 모여 오늘의 정선장이 있지 않나 싶다. 

 

                                                                                                                                                                                                         사진. 글 / 정영신

 

 

 

 

 

 

 

 

 

 

 

 

 

 

 

 

 

 

 

 

 

 


 

 

 

정선읍 귤암리에 거주하는 최성월(74세)씨는 정선아리랑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평생을 일하며 불러 온 그의 아라리는 꾀꼬리처럼 부르는 기능보유자들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만의 질박하고 구수한 정선아라리 노래 속에는 민초들의 애환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씨의 독특한 춤사위도 일품인데, 타계한 공옥진여사의 문둥이 춤을 연상케한다. 

이 춤을 추게 된 사연도 재미있다. 수십 년 전 제주도에 관광여행을 떠난 적이 있는데,

머무는 숙소 지하의 시끄러운 음악소리에 끌려 나이트클럽으로 내려갔단다.

거기서 젊은이들이 추는 춤을 보고 연습한 결과 지금의 춤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앞으로 손을 뻗었다 굽히는 등의 독특한 그의 춤사위도 이채롭지만,

시종일관 무표정한 모습으로 춤을 추는 그를 지켜보면 웃음이 절로 터져 나온다.

 

춤과 마찬가지로 구성지게 부르는 아라리 노래 가사들도 대부분이 그의 삶에서 비롯된 내용으로 직접 붙이는데,

모든 것을 자기만의 것으로 만들어 내는 독창성과 광대적 기질이 남다른 분이다. 

 

   글.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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