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 가까워 오면 정영신씨 따라 대목장 보러 다닌 지도 꽤 오래되었다.

올해도 설날을 며칠 남겨두고 김포장을 비롯하여 칠곡 동명장 등 몇몇 장을 돌아다녔다.

삼년 째 이어지는 전염병에 주눅들어 수도권의 장을 제외한 면소지 장들은

장사꾼만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장보러 온 주민은 보이지도 않았다.

 

노인들만 지키는 시골 오일장들이 기능을 서서히 잃어간 지는 오래되었으나,

거리두기로 노인들 발길마저 끊기니, 문 닫기 직전에 있다.

 

어디 세상 이치 따라 바뀌지 않는 것이 있겠냐마는,

정겨운 시골오일장 풍정은 빛바랜 사진처럼 기억 속에서나 남아 있다.

 

사람 없는 장보다 인근 사찰이나 유적지를 돌아보았다.

김포장에서는 덕포진에 들리고, 선산에서는 도리사와 구미 문화마을을 돌아보고,

칠곡에서는 동화사를 돌아보는 등 한가로운 시간을 가졌다.

 

직지사 말사인 도리사는 아도화상이 창건한 신라 최초의 절로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8대 적멸보궁이다, 

가끔 선산에 오거나 이 지역을 경유할 때면 30년 전에 보았던 .도리사가 생각났는데,

절집의 구성이나 다른 것들은 기억나지 않는데, 도리사 석탑만 선명하게 떠올랐다.

 

모전석탑 처럼 돌을 쌓아 올린 탑의 조형이 특이해서일 것이다.

도리사 석탑은 우리나라 석탑 가운데 같은 유형을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식이다.

석탑의 높이는 4.5m인데, 얕은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장대석을 세워 기단을 만들었다.

판석으로 갑석을 덮고 갑석 위에 방형의 작은 석재를 3층으로 쌓아 탑신을 세웠다.

맨 위층 정상에는 노반이 있고 연꽃이 조각된 보주가 있다.

 

태조선원 맞은 편 나무에는 색색의 작은 등이 과일처럼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도리사에서 구미 일선리 문화재마을로 발길을 옮겼다.

이곳은 1987년 안동 임하댐 건설로 수몰지역에 들어갔던  전주 류씨 양반세거지인데,

이 곳 해평 일선리로 옮겨온 것이다.

 

본래 일선리는 태조산에서 뻗어 내려온 산줄기가 낙동강으로 너르게 퍼진 구릉 산지였다.

‘밤이면 흙을 던지며 사람을 해친다는 개골강지가 출몰하는 외지고 무서운 산골’이었다고 한다.

 

일선리에 안동 전주 류씨 양반세거지가 옮겨오며 약 80여개의 집이 반듯하게 들어서게 되었는데,

그중 70여 채가 유씨 양반의 가옥이란다.

그 중에는 문화재급 고택도 10여 채나 있어, 기왓장과 기둥 하나 빠트리지 않고 고스란히 옮겨왔다고 한다.

 

박실마을 전주 유씨를 이끌었던 수남위 종택과 용와종택, 침간정, 마령의 호고와 종택,

무실마을의 근암고택과 임하택, 그리고 만령초당, 삼간정, 동암정, 대야정 등의 누정들이 그것이다.

 

높다란 옹벽위에 기와를 얹은 흙돌담이 기다랗게 뻗어있다.

대개의 고택마을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 많으나 이 곳은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다.

 

다음 행선지는 칠곡의 동명장이었다.

오후라 그런지 좌판을 벌인 할머니 몇 분만 지키고 있었다.

 

텅빈 장터에는 ‘동명장터이야기’로 시작되는 벽화를 그려놓았다.

봇짐이나 등짐에서 손수레로 바뀌듯이 장터 풍정도 서서히 바뀌는 것이다.

 

머지않아 오래된 장터의 풍정은

정영신의 사진집 속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다.

 

칠곡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동화사를 찾아 나섰다.

조계종 제9교구의 본사인 동화사는 통일신라시대의 절로

금산사, 법주사 와 함께 법상종 3대 사찰의 하나이다.

 

임진왜란으로 동화사 전체가 불타버린 후 여러 차례의 중창을 거쳤는데,

조선 영조 때 중건된 대웅전과 극락전을 비롯하여 20여 채의 건물이 남아 있다.

 

보물로 지정된 당간지주와 금당암3층석탑,·비로암3층석탑,·비로암석조비로자나불좌상,·

동화사입구마애불좌상,·석조부도군 등 가볼 곳이 한 두 곳이 아니었으나, 시간이 없었다.

 

해가 넘어가기 직전의 동화사 경내는 고요한 적막에 휩쌓여 있었다.

빵처럼 앙증맞게 생긴 꽃창살을 살펴보며 대웅전을 기웃거리는데,

저녁 불경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집으로 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성불하여 모든 중생을 구제하라는 저녁종성을 뒤로하며 발길 돌렸다.

 

사진, 글 / 조문호

 

어떤 책은 몇 개의 문장만으로도 큰 감동을 선사하고 알찬 정보를 제공합니다.

‘책 속 명문장’ 코너는 그러한 문장들을 위해 마련한 공간입니다.

[독서신문 전진호 기자]

내가 어릴 적에 장(場)이 열리는 날이면 온 마을 사람들은 잔칫날처럼 들썩거렸다. 안동 아재의 소달구지가 동구 밖에 이르면 깨순이 엄마 보따리가 제일 먼저 실렸다. 뒤이어 마을 사람들 보따리가 하나둘 올라가면 사방이 초록으로 덮인 신작로 길을 빠져나갈 때까지 뒤따라가다가 돌아왔다. 봄이면 들판에 앉아 있던 자연도 덩달아 장에 나와 그 지역만의 삶의 이야기를 초록빛으로 품어냈다. 후미진 장 골목에서는 갈퀴와 도리깨, 체와 쟁기를 만들었고, 정월 보름을 앞두고 농악놀이에 쓸 짚신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팔았다.

대장간 앞에는 날이 무뎌진 호미와 낫을 벼르려고 노부부가 앉아 있었고, 텃밭에서 뜯어온 채소와 농로에서 잡은 미꾸라지를 가지고 나온 박씨 아짐은 생산자이면서 판매자였다. 또한 장터 끝 골목에는 엄마 따라온 삼식이가 새끼 돼지가 도망갈까 봐 새끼줄을 붙들고 동그마니 앉아 있었고, 털북숭이 복숭아를 머리에 이고 온 순덕이, 소금물에 우린 감을 베어 먹던 주근깨투성이 깨순이도 있었다.

이렇게 장은 자연과 흙과 나무에서 흘러나온 푸르디푸른 이야기가 살아 있어 움직이는 박물관이 됐다. 지금 장은 예전과 많이 다르다. 그러나 땅과 더불어 살아가는 농민들이 지역 농산물로 만들어가는 농민 장터가 살아야 한다. 장은 단순히 뭔가를 사고파는 장소를 뛰어넘어 인간의 삶과 정이 생생히 살아 있는 공간으로 새롭게 해석돼야 한다. 장을 통해 소통하는 백성의 삶은 수천 년 전부터 이어져 왔으나 시대가 변하면서 오일장은 점점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34년째 장터를 돌아다니면서 장터를 장터답게 만들 계기는 무엇일까 숱하게 고민했다. 사진 한 컷 촬영하지 못하고 파장 무렵까지 장꾼들과 장에 나온 농민들과 이야기만 하다 돌아오기도 했다. 장터에서 만난 사람들도 자신이 사는 곳에 어떤 보물이 숨어 있는지 책이나 텔레비전에 소개된 것 말고는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했다. (중략)

이 책은 내가 이전 책들에서 다룬 적이 없었던 장터와 지역 문화재를 찾아다니며 작업한 결과물이다. 그러나 여기 소개한 장 말고도 지금 작업 중인 장이 열 곳이 넘는다. 30여년 전 흑백필름으로 작업했던 예전 장터 모습과 요즘 모습을 비교해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30년 세월이 많은 것을 바꿔놓았으나 장에 오는 사람들이나 장에서 파는 물건들은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다. 더 크게 말하자면 장에 오는 사람들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불과 55년 전인 1965년에는 버스비가 1원이었고, 쌀 한 말 값이 360원이었다. 우리 사회가 근대화 이후 엄청나게 발전했음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 나는 지금도 장터에 가면 고향 냄새와 맛, 소리와 감촉을 느끼고 싶어 구경하러 나온 사람처럼 장을 몇 바퀴나 돌며 헤집고 다닌다. 어떤 물건이 새로 나왔는지, 난전에서 무엇을 파는지 알고 싶다. 계절 따라 파는 물건이 다르기에 사계절 모두 장에 가봐야만 그 생리를 알 수 있다.

겨울철 구례 산동장에 가면 산수유 열매로 장 안이 온통 새빨갛다. 이처럼 장터는 그 지역의 삶이 그대로 펼쳐진 한 폭의 풍속도다. 치열한 삶의 현장이면서도 인정 넘치는 백성의 문화 공간이다. 내게 남은 숙제는 지역마다 서로 다른 장의 특색을 잘 살려낼 고유한 문화를 찾아내는 일이다. 우리네 시골장은 선조들의 역사이고 우리의 현재이자 아이들의 미래다. <5~7쪽>

『장에 가자』

정영신 지음│이숲 펴냄│248쪽│18,000원

출처 : 독서신문(http://www.readersnews.com)

정영신 작가의 철칙은 장터에서 절대 카메라를 안 꺼내고, 항상 반나절은 할머니들과 이야기 나누고 사귀는 데 공들인다는 것이다. 사투리를 써서 외지사람이 아닌 것처럼 다가가는 것이 그 비법이라고 했다. 할머니가 바닥에 앉아 있으면 자신도 바닥에 앉아 눈높이를 맞추고 할머니 말씀을 귀담아 들어 배우러 온 아랫사람임을 온몸으로 표현한다고 했다. 그렇게 다가가니 할머니들은 하나만 물어봐도 아주 상세하게 알려준다고 했다.

 

 

오일장 600곳 농촌여성의 삶 사진에 담다

어르신 우울증·치매 예방하는 장터의 순기능

고령사회, 귀농귀촌인과 농촌공동체 되살려야

 

정영신

농촌 할머니 희로애락 카메라에 담다

1958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난 정영신 작가는 어려서부터 소설가를 꿈꿨다. 신춘문예에 도전했지만 고배를 마시면서, 많은 사람을 관찰할 수 있고 토속적인 말을 들을 수 있는 우리나라의 600여 개 오일장을 찾아다녔다.

“카메라가방에 사탕과 담배만 넣어 다녔어요. 사탕과 담배만 있으면 장터 사람 모두와 친구가 됐죠. 장터에서 무슨 물건 팔고, 어디 구역 사람이 담배를 좋아하는지 사탕을 좋아하는지 알게 됐죠.”

정영신씨는 장터에 가면 할머니들에게 살갑게 다가가 말을 걸고, 점심을 먹고 있으면 음식을 같이 먹으면서 인연을 만들어나간다고 했다. 할머니들과 친해지면 농장과 집에 놀러가면서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다양한 정보를 수집한다고 했다.

“할머니 얼굴에는 희로애락이 다 담겨 있어요. 대화해보면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살아온 이야기를 하고 자식자랑, 동네자랑을 해주시죠. 삶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들어있는 말속에는 할머니들의 지혜가 들어있습니다.”

장터사람들을 사귀어 놓고 나중에서야 카메라로 사진을 촬영하니 정영신씨의 사진들은 하나 같이 인물의 표정과 행동이 자연스럽다. 지난 9월 정영신씨는 장터에서의 기록을 모아 ‘어머니의 땅’ 사진전을 개최하고 동명의 사진집을 냈다.

그러면서 정영신씨는 청년들이 도서관에서 공부만 하지 말고 동네 시장에 가서 할머니 손을 잡고 말을 붙여보는 것을 시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문학을 하기 위해 많은 할머니와 대화해본 결과, 책보다 더 많은 것을 할머니에게서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또 할머니들도 자신을 아는 척 하고, 모르는 사람이어도 다가와 관심 가져주면 참 좋아하더라고 정영신씨는 말했다.

장터는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장소

1980년대 장터는 물건을 사러 오는 사람보다 구경 오는 사람이 더 많았다고 한다.

“장 중에 장인 난장을 많이 찾아다녔어요, 마을에서 농사짓는 할머니가 하루 팔아서 재밌을 양 만큼만, 버스 타고 이동할 수 있는 무게만큼만 보따리에 갖고 온답니다. 욕심 없이 장에 오니까 한 번에 많이 파는 것도 싫어해요. 사람이 그리워 장에 나왔는데 좌판에 아무것도 없이 어떻게 앉아 있냐고 그래요. 뭐라도 펴놔야 사람들이 구경하고 당신도 사람 구경하지 않겠냐 하십니다.”

할머니들은 집에만 있으면 다른 생각 들고, 텔레비전만 보게 되면 병나겠어서 적은 돈을 벌어도 장터에서 물건 파는 것을 굉장히 좋아한다고 한다.

“장터는 농촌여성들이 왕이에요. 남자들은 차 안에만 들어가 있죠. 그래서 할머니들이 장에 나오는 걸 더 좋아하는 것 아닐까요? 집에만 있으면 남편 군소리만 듣는데, 장터에 나오면 내 세상이 되니까요.”

'어머니의 땅' 사진집 표지/ 눈빛출판사/ 가격35,000원

 

농촌여성 이름 알려 성평등 의식 높여야

할머니들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서비스 마인드도 남성에 비해 어렵지 않게 표현한다. 손님들에게는 남성보다는 아직 여성에게 친절을 기대하고, 물건을 사고 싶은 심리가 깔려있다는 것이다. 장터에서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사람도 여성이고, 농촌에서도 농사일을 연결해주는 사람은 여성인데 어째서 여성의 지위는 남성과 공평하지 않은지 정영신씨는 의문을 품었다.

농촌 현실이 바뀌려면 정영신씨는 농사일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농촌여성들이 당당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주체적으로 행동하고, 자신의 물건을 자신 있게 판매할 때 구매하는 손님도 즐겁다고 했다.

“장터에 직접 도토리묵을 쒀서 판매하는 자매 할머니를 만났어요. 가져오자마자 순식간에 동이 나더라고요. 도토리묵 이름은 뭐냐고 물었더니 그냥 우리가 만들었다 말하고 끝이었어요. 맛이 좋으니까 인기리에 팔리는 건데, 두 사람의 이름 붙여서 도토리묵으로 팔면 손님들도 호칭 생겨서 더 애정을 가질 거라고 말했어요. 농사에 가치를 높이려면 자신만의 브랜드가 있어야 진정한 자신의 상품이 되는 거니까요.”

정영신씨는 장터에서 농산물 팔 때도 지역명, 농장이름 붙이지 말고, 꼭 자신의 이름을 붙여야 더 즐겁게 동력을 얻을 수 있다고 방법을 소개했다.

귀농귀촌인과 소통해 농촌 고령화 극복해야

정영신씨는 앞으로는 과학이 농업에 접목되면서 농사짓는 사람이 최고인 세상이 될 거라고 봤다.

“귀농하는 사람들은 더 여유 있게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농촌으로 옵니다. 귀농인들은 농사지으면서도 사람들 불러서 팜파티 열고 세미나 갖고 시낭송을 해요. 기존 농사짓던 원주민들은 바깥사람들과 자유롭게 소통하는 농촌의 변화를 버거워 해요. 여러 이유가 갈등이 돼 귀농귀촌인을 배척합니다.”

자연 속에 살면서 농산물을 가꾸는 농업인들이 왜 행복하다는 말 대신 농사가 힘들고 사는 게 어렵다는 말을 많이 하는지, 행복하다고 말하는 농업인은 없고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농업인의 목소리가 장터에서 자주 들려온다고 했다.

“옛날에는 너나 할 것 없이 농장에 가서 일손 보태며 두레로, 품앗이로 농사지으면서 시름을 잊었죠. 요즘은 할머니들이 혼자 농사짓고 혼자 논다고 말하세요. 농촌이 단절돼 갈수록 남편만 찾고, 자녀들에게 볼멘소리를 하게 되는 환경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정영신씨는 농촌이 고령화 되면서 전통시장이 위기라고 했다. 읍면에서 열리는 장터에 가면 할머니들이 “우리 죽으면 장도 없어질 것”이라고 걱정한다고 했다.

대형마트 확산에 전통시장 지키려면…

농촌의 문제는 산적해있지만 그럼에도 전통시장은 계속 이어져야한다고 정영신씨는 말했다.

“사람들은 편리하다는 이유로 대형마트만 이용해서 장터에 갈 때마다 할머니들은 마트가 생겨서 우리 같은 사람들은 장사를 못한다고 하소연하세요.”

1만 원 어치만 사도 배송을 해주는데 할머니들은 물건을 어떻게 팔아야 되나 고민이 많다고 했다.

“그럼에도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이뤄지는 거래를 장터는 끝까지 지키려고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1000원짜리 머리빗을 사도 장터에 단골집만 찾는 손님을 맞이할 때, 하나를 사더라도 찾아오는 손님이 있는데 할머니들은 어떻게 장을 안 나오겠냐며 말하세요. 자본주의 사회여도 장터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정이 흐르는 장소로, 물건만 바뀔 뿐 장터를 이용하는 마음은 변치 않을 겁니다.”

 

농촌여성신문 / 민동주기자

 

'코리안 타임스' '어머니의 땅' 인터뷰 기사

[출처] 인터뷰 – 정영신 사진작가 “장터는 사람과 정이 흐르는 삶의 현장”|작성자 인사동 이야기

지난 달 상주장 가는 길에 ‘옥동서원’을 들렸다.

‘옥동서원’은 영동과 경계를 이루는 백화산 물줄기 아래 자리잡은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에 있다.

백화산 자락에 고즈넉하게 수줍은 듯 웅크린 ‘옥동서원’에서 선조들의 여유와 멋을 체감했다.

 

옥동서원은 명재상 황희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는 서원이다.

황희는 조선 초 유학의 기반을 마련하고 유교 숭상 정책을 주도한 인물로

태종과 세종 대에 걸쳐 육조 판서 등을 두루 지냈고

20여 년 동안 의정부 최고 관직인 영의정 부사로 왕을 보좌했다.

학문이 깊고 성품이 어질며 청렴하기 까지 했다.

 

이 서원은 1518년 창건하여, 1580년 영당 지어 향사를 지내면서 지금의 모습을 지켜왔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살아남은 전국 47개 서원 가운데 한 곳이다.

경내는 사당인 경덕사와 강당인 온휘당이 있다.

그리고 청월루의 진밀료와 윤택료가 작게나마 동재와 서재 역할을 한다.

 

그동안 이곳저곳 서원을 다녀보았지만, 옥동서원 외삼문은 좀 특이한 구조다.

누각을 지탱해 주는 기둥과 벽 사이에 일정한 공간을 두었는데,

이는 동재와 서재 역할 하는 방에 군불 지필 때 아궁이의 열기를 피하기 위한 것 같았다.

아궁이 또한 쪼그리고 앉아서 불을 지피는 형태가 아니라 서서 장작을 집어넣도록 만들어 놓았다.

 

신발을 벗고 누각에 올라 가 보았다.

대청마루의 삐걱대는 소리조차 정겹더라. 누각 가운데에는 ‘청월루’ 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

문제는 어느 서원이나 책을 보관하는 문고가 없다는 점이다.

 

 

서원 중 도산서원과 옥산서원, 병산서원의 문고보존이 그나마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열람이나 이용은 거의 불가능하고,

종손이나 서원관계 후손 집에 분산되어 있다고 한다.

서원의 서적보존과 체계적인 관리가 절실하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답답한 즈음, 서원의 고고한 자태에 둘러싸여

선인들의 선비 정신을 되세기며, 여유로운 풍류에 젖어 보심이 어떨지...

 

사진, 글 / 조문호

 

그리고 2일 7일에 맞추어 간다면 상주장에 들리는 것도 좋다.

따뜻한 햇살받은 할머니들 봄나물 다듬는 모습들이 정겹다

봄 향내 속에 무뚝뚝한 보리문둥이들의 인정 맛보는 것도 빼 놓을 수 없는 재미

 

아래는 2일 7일 같은 날 장이 서는 선산장 풍경이다.

.

 

 

 

지난 20일은 포천에 있는 신읍장을 찾아갔다.

지난주에는 포천에 있는 유적 찾아 갔는데, 이번에는 신읍장 간다네.

장날을 찍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역병에 문 닫은 장터를 찍으러 간다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듯, 장터 닫기는커녕 대목장이 섰다.

이달 말까지 민속장을 잠정 개장한다는 현수막이 걸린 걸 보니, 갑자기 열린 것 같았다.

사람이 많이 모여 불안하기는 했으나, 대목장이라도 찍을 수밖에 없었다.

 

포천은 물이 밖으로 흘러 생긴 이름이라는데,

포천 시내를 가로지르는 구읍천 따라 펼쳐지는 포천장은 경기 북부에서 가장 큰 장이다.

성남의 모란시장과 일산시장, 김포시장과 함께 경기도 4대 전통시장으로 꼽히는 장이다..

정기적으로 끝자리 5,10일에 열리는 신읍장은 포천시청과 포천경찰서 중간의 뚝방에서 열려

마치 난민촌을 연상시키는 재미있는 장터다.

 

신읍장은 농민들의 농산물보다 장돌뱅이들이 실고 온 상품이 주를 이루는데,

포천하면 이동갈비를 떠 올리듯, 장터에도 갈비 굽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장터 나온 사람들은 다들 마스크를 쓰고 왔으나,

음식점에서는 벗을 수밖에 없는데, 거리두기는 공염불이었다.

나 역시 숨쉬기가 힘들어 잠시 마스크를 벗었더니, 겁이 덜컥 났다.

시장상인들의 생계도 외면할 수 없으나, 이러다 문제 생기면 어쩔가?

 

난, 이년 전부터 폐 기능에 문제가 생겨 심한 호흡장애를 겪고 있다.

죽을 때까지 약과 흡입기를 달고 살아야 하는 나로서는 코로나가 더 징그러울 수밖에 없다.

마스크를 쓰면 숨 쉬기가 힘들어 대중교통은 물론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피해 다녀야 하니,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다.

 

시장을 순찰하듯 휭 돌고는 차에 돌아와 마스크를 벗어버렸다.

차에서 한 참을 쉬고 있으니, 정영신씨는 사진을 찍고 바리바리 사들고 왔다.

사진도 찍고 대목장도 보는 셈인데, 도랑치고 게 잡는 격이다.

 

정선 산골의 좋은 공기에 마스크 벗고 살면 좋으련만,

무슨 놈의 역마살이 끼었는지 사흘이 멀다 하고 나온다.

 

빨리 역병이 물러갔으면 좋겠다.

 

사진, 글 / 조문호

 




예천군하면 외국 연수 도중 가이드를 폭행해 말썽을 일으킨 박종철 군의원부터 생각난다.

정치판 똥물 튄 촌놈이 실수한 것을 언론이 스타로 만들었는데. 점잖은 반촌 동네를 개망신 시켰다.




지난 2일 이른 새벽 예천장으로 떠났는데, 예천장도 다른 장터처럼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상설시장을 중심으로 인도 변을 따라 300m에 걸쳐 노점상들이 들어서 있었다.

어물, 채소, 과일을 비롯해서 곡물, 약초, 의류, 잡화 등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전형적인 오일장이었다.





특히 봄철에는 봄 냄새 풍기는 냉이, 달래, , 돌나물과

산에서 직접 따온 각종 버섯으로 시골 정취가 물씬 느껴지는 장터였다.

그러나 5년 전에 본 장터와는 달라져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제 상설시장이 되었지만, 오일장날도 문이 잠긴 가게가 많은 것으로 보아 그 만큼 장사가 안 된다는 말이다.

전국의 장터를 기록해 온 정영신씨의 실망감도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오래 전부터 생각해 온, 시골 농민의 삶을 추적해 장으로 연결시키는 작업을 곧 바로 실행하겠단다.

그 날도 예천장 사진 찍는 일은 뒷전이고, 사과 팔러 나온 할머니 붙들고 사는 이야기 듣느라 시간을 보냈고,

시장에서 월남국수 가게 차린 여인네 취재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오후에는 예천군에 있는 유적지를 두루 돌아보았다.

감천면 천향리에 있는 천년기념물 '석송령'부터 찾았는데, 수령이 600년으로 추정되었다.





이 나무에 전해지는 이야기도 별났다.

1927년, 이 마을에 살던 이수목씨가 영험 있는 나무라는 뜻으로 석송령이라 이름 지은 후,

자기 땅 5,259를 상속 등기해 주어, 수목으로서는 유일하게 토지를 가진 부자나무라고 한다.



 



두 번째 들린 선몽대 일원은 약 450여년의 역사를 가진 유서 깊은 곳이었다.

선몽대 주변의 소나무 숲과 그 앞으로 흐르는 내성천에 펼쳐진 넓은 백사장이 어우러져

한국의 전통적 산수미를 보여주는 대표적 경승지 중 하나였다.





선몽대는 퇴계 이황의 종손이며 문하생인 우암 이열도 공이 1563년 창건한 정자로서

선몽대의 제호 세 글자는 퇴계 선생의 친필이라고 한다.

 선인들의 유교적 전통공간으로서 역사적 의미가 큰 곳이다.



 


큰 바위 위에 걸쳐 지은 건축물 구조가 독특했는데, 계단도 돌을 깎아 만들었고,

방에 군불을 지피는 아궁이도 높게 만들어져 있었다.





놀라운 것은 선몽대의 방문을 도둑들이 뜯어 가, 다시 만들었다는 것이다.

본래의 현판은 다른 곳에 보관하고 사본을 붙여 놓았기에 망정이지, 자칫했으면 현판도 잃을 뻔 했다. 

세상에는 나쁜 놈들이 너무 많다. 어떻게 유적지 방문까지 뜯어갈 수 있을까?

하기야! 무덤까지 파가는 도굴꾼이 인사동 주위에도 있으니,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세 번째는 양반촌의 상징인 용문면 금당실 마을을 찾았다.

우리나라 최고 명당으로 손 꼽히는 마을 뒤쪽에는 오미봉을 비롯한 산들이 이어지고,

앞쪽으로는 금곡천이 휘감고 흘러, 옛 부터 십 승지로 알려진 곳이다.





이 마을은 조선의 선비 정신을 지켜온 반가(班家)로도 유명한데,

감천문씨 문호검이 15세기 초에 금당실 일대를 개척한 이래 함양박씨, 원주변씨 등이 500년을 이어왔다.





마을 안에는 함양 박씨 3인을 모신 금곡서원, 함양박씨 입향조 박종린을 숭모해 재향을 올리는 추원재와 사당,

원주 변씨 변응녕을 기리는 사괴당 고택, 양주대감 이유인의 99칸 고택 터,

조선 숙종 때 도승지를 지낸 김빈을 추모하는 반송재 고택 등 오래된 가옥 12채가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 밖에 흙 돌담길과 800m의 소나무 숲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마지막으로 회룡포를 들려 삼강주막으로 갔는데, 5년 전에 본 삼강주막은 아니었다.

지난 2006유옥연 주모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대로 방치된 집을

200715천만 원의 예산으로 복원하여 새로운 주모를 선정해 다시 손님을 맞았는데,

이젠 삼강문화마을로 바뀌어져 있었다.





2015년부터 총공사비 942억을 들여 삼강문화마을을 조성했다는데, 그럴 필요까지 있나 싶었다.

삼강주막의 원형을 잘 보존하여, 관광객들이 쉬어 갈수 있는 주막과 객사만 있으면 될 텐데,

자기 돈 아니라고 마음대로 쏟아 부었더라. 일단 판을 크게 벌여야 떡고물이 많이 떨어지니까...





사람이라고는 한 두 사람뿐인 관광안내소와 문화해설사집도 따로 지어 놓았는데, 마치 놀부 집 같았다.

한 채라도, 자동차 운전하며 온 관광객들이 술 한 잔 마시며 묶을 수 있는 객사로 바꾸었으면 좋겠다.



 


삼강주막은 경상북도 예천군에 있는 우리나라의 마지막 주막으로,

3개의 강인 낙동강과 내성천, 금천이 합류하는 지점이라 수로 교통의 요충지였다.

그리고 주막 건물 뒤에는 수령이 500년이나 된 거대한 회화나무가 서 있어서 옛 정취를 더해준다





삼강주막은 삼강나루를 오가는 나그네들에게 허기를 면하게 해주고, 보부상의 숙식처로 이용된 집이다.

1900년경에 지은 이 주막은 규모는 작지만 그 기능에 충실한 집약적 특징을 보여주어 희소가치가 클 뿐만 아니라

옛 시대상을 읽을 수 있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적 의의를 간직하고 있다.






한 부엌 벽에 그려져 있는 유옥연 할머니의 외상장부도 인상적이다.

생전에 글을 알지 못했던 할머니께서 만든 빗금 외상장부인데,

술 한 잔은 짧은 금, 한 주전자는 긴 금, 세로 줄은 '외상값을 갚았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장부를 지우지 않은 금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할머니가 돈보다 사람을 더 좋아했던 것 같았다.





엄청난 예산을 쏟아 부은 삼강문화마을 조성에는 박종철 군의원이 개입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는 옛말이 생각난다.


 

 사진, / 조문호
















































 


 





지난21일은 정영신씨 가방모찌로 전북 순창에 따라갔다.
순창장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통시장의 분위기를 제대로 지닌 몇 안 되는 장터였다.
시골 장의 정취를 모락모락 풍기며 장바닥에 웃음이 번지던 정겨운 장이었다.

좋은 장터를 추천해 달라고 부탁하는 분에게 소개해주는 열 손가락에 꼽힐 정도의 장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옛이야기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세월의 때가 묻은 장옥은 돈벼락에 날아가고, 찾는 이 없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썰렁한 장터풍경이었다.

가는 날이 일요일이라 그런지 없는 사람이 더 없었다.






모든 원인은 장터 살린다며 쏟아 부은 돈 때문인데, 살리는 것이 아니라 장터를 죽이는 것이었다.

돈 빼먹기 좋은 것이 토목공사니, 오래된 장옥부터 철거하는 것이 제일 먼저였다.

없는 사람이 장옥 바꾼다고 올 리 없는데, 옛 정취마저 사라진 썰렁한 장터는 파리만 날렸다.






오전 10시 무렵에 키가 장승같이 큰 조호순씨가 나타났다.
정영신씨와 연락되어 나오신 분이었는데, 내 이름과 두자나 같아 친근하게 느껴지는데다 친절하기까지 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SBS 피디로 일하다 십여 년 전 시골로 귀농하였단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은 너무 다르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한다.
가난하게 사는 현실보다 복지부동주의에 빠진 공무원들의 자세가 더 슬프다는 것이다.
순창장에도 많은 애착을 가져 여러 가지 제안을 했지만 도무지 먹히지 않았단다.






장터에 관한 자료는 10년만 지나면 모조리 폐기해 버려 10년 전의 장터사진조차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터넷을 뒤지다 정영신씨의 30년 전 순창장터 사진을 보고 연락하게 되었다고 한다.






순창장에서 국밥을 대접받은 후, 그의 안내를 받아 순창 유적지를 돌아보았다.
순창객사를 비롯하여 순창여인들의 길로 정해진 홀어머니 산성과 산동리 남근석,
강천산의 구장군폭포와 강천사 등 여러 곳을 돌아보며 순창 여인네들의 애환을 느꼈다.






그 날 밤은 보성 벌교에 여장을 풀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 듯’ 그날따라 보성에 전국체전이 열려 여관마다 만원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비싼 방에 머물렀는데, 모처럼 사먹은 꼬막 정식 값까지 더해 다음 날 움직일 비용이 걱정이었다.






그 이틀 날은 보성장부터 찾았는데, 장에 사람은 붐볐으나 후덕한 옛 인심은 오간데 없었다.
하기야! 옛말에 ‘장꾼들 말은 숨 쉬는 것 빼고는 모두 거짓말’이라는 말도 있듯이 돈이 오가는 장터라 야박할 수밖에 없고,

속이고 속이는 것이 장꾼들의 생리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농사지어 내다파는 순박한 농민조차 예전의 순박함을 모두 잃었다는 것이다.





그 날 우연히 엿들은 두 할머니가 나누는 이야기가 오늘의 현실을 대변했다.
난전에 농산물을 펼쳐 놓은 한 할머니가 ‘양심에 저려 거짓말을 못하겠다‘는 하소연을 하시자,

옆에 앉은 할머니가 “장에 오면 양심은 전당포에 잡히고 와야 하는거야”고 대꾸하셨다.

대개가 싼 수입농산물을 넘겨받아 농사지은 것이라며 파는데, 가격이 서울보다 훨씬 비싸다.





그런데도 장에 나온 정영신씨는 사라는 할머니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없는 돈에 바리바리 산다.

오일장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해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려는 생각 때문인데,

알면서도 속아줄 때는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장터에서 벗어나 보성 팽나무숲과 반석리 석불좌상, 보성판소리 성지 등의 인근 유적들을 돌아보았는데,

판소리성지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근사하게 지은 한옥들이 도처에 늘려 있었지만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었다,

이 놀부집 같은 대궐에 소리 좋아하는 노인들을 살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경노당에서 세월만 보내는 노인들을 선발한다면 일거양득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좋은 집도 사람이 살지 않으면 흉가에 다름 아니다.






바람직한 일인 줄 알면서도 행여 잘못되어 다칠까 겁먹는 무사안일주의의 공무원들 처신 좀 바꿀 수는 없을까?

뼈 빠진 세금을 버러지들 사육비로 사용되어서야 되겠는가.   


사진, 글 / 조문호







































추운 겨울 날의 노점상은 안스럽기 그지없다. 
그 자리에 얼어 붙어 미라 될까 걱정된다.

한 할머니는 추위를 못 견디어 은행을 무단 점거했다. 
녹번동 '신한은행' 현금지급기 수위를 자청한 것이다.

다 팔아야 만원도 되지 않는 변변찮은 야채를 펼쳐놓고,

늦으막에 돌아 올 지하철 손님을 기다렸다.


자리 지키기가 껄끄럽지만,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리.

팔아서 손주 용돈 주는 재미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겠나.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별 것 있더냐?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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