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게 만만찮다는 건 알지만, 목숨 내놓고 사는 장돌뱅이의 삶이 애처롭다.

인간으로 태어나 언젠가 한 번은 죽는 것이지만, 목숨 귀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돈에 목숨 걸어야 하는, 그 돈이 대관절 무엇 이길래?

 

사람 많이 몰리는 장만 찾아다니는 장돌뱅이에게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말은 남의 이야기였다.

한 사람이라도 더 불러 모우기 위해 고래고래 소리 질러야 하는 그들인들 어찌 전염병이 두렵지 않겠는가?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위험한 전쟁터에 나서야만 하는 삶의 전사들이다.

 

요즘은 대목장이라 틈만 나면 장에 돌아다니는데, 어제는 이천 읍내 ‘이천관고시장’에 들렸다.

시골에서 열리는 대목장은 사람이 없어 한산했으나 이천장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이러다 전염병 확진자라도 생기면 어쩔까 겁이 덜컹 났다.

장에 사람이 없어도 탈, 많아도 탈이니 뭐가 옳은지 모르겠다.

 

쌀과 도자기로 유명한 이천 지역은 낮은 구릉지가 많고, 여러 강이 흘러들면서 일찍부터 평야가 발달했다.

땅이 기름져 농사짓기에 좋을뿐더러 수도권과 가까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성시를 이루어 온 장터다.

 

이천 쌀은 왕실의 진상품에 오를 정도로 옛날부터 유명세에 탔다.

그래서 이천 쌀이 지역적 특성을 갖는 이천의 상징 농산물이 된 것이다.

 

이천 지역에 있는 장은 이천 관고장과 장호원장을 두 축으로 상권이 형성되어 있다.

지리적으로 북쪽의 이천읍과 남쪽의 장호원읍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장에 나오는 상품이나 시장 구조가 어느 장이나 대개 엇비슷한데,

이천장은 차량이 많아 주차할 곳을 찾아 시장을 두 바퀴나 돌아야했다.

수도권이지만 지하철이 연결되지 않은 교통사정에 기인한 것 같았다.

 

장 주위를 맴돌다 숨이 차면 마스크를 벗는데 비해, 정영신씨는 장바닥을 휘젓고 다녔다.

사진만 찍는 것이 아니라 장꾼들 인터뷰까지 해대니, 미쳐도 제대로 미친 것이다.

 

오후에는 지척에 있는 ‘설봉선원’을 찾아갔으나 문이 잠겨 있었다.

선원 외곽을 돌아 다니며 내부를 들여다 볼 수 밖에 없었는데,

관광객은 커녕 인적 없는 한가한 곳까지 문을 닫아야 하는 이유가 의문스러웠다.

 

‘설봉선원’은 서희, 이관의,· 김안국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564년 세워졌다.

1593년 지금의 이천읍 관고리로 이건하며, 최숙정을 추가하여 위패를 모시고 있다.

선현배향과 교육에 이바지해 온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그 다음에는 백송이 있는 이천 백사면 신대리로 옮겼다.

중국이 원산인 백송은 소나무과에 속한 바늘잎 상록수로서 끝이 뾰족하고 짧았다.

210여 년 전 조선시대 참판을 지낸 민달용의 묘소에 심은 기념수라는데,

전국을 통 털어 여덟그루 밖에 없는 희귀종이란다.

 

이천 모가면 소고리에 있는 마애여래좌상과 마애 삼존석불도 찾아보았다.

자연석면에 좌상의 형태로 새김 조각된 형식이 고려 전기에 제작된 불상으로 보는데,

참배자의 눈높이를 고려해 기형적인 불상을 조성하였다는 점이 특이했다.

 

그 아래 있는 마애삼존석불은 전체적으로 균형이 맞지 않고

일반적인 불상조성의 규범에서 벗어난, 고려 중기 이후 석불로 추정되고 있다.

 

하루 촬영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하루를 되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한데,

정영신씨의 장터 거리두기가 걱정스러워 말을 꺼냈다.

“사람들과 부대끼다 전염병이라도 걸리면 어쩔거냐?‘는 물음에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라는 충무공의 명언을 말했다.

 

이순신장군이 명량해전을 앞두고 부하들의 전투의지를 높이기 위해 사용했던 훈시를 인용했는데,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적을 물리쳐 살아남을 수 있으나, 적이 두려워 살고자 도망친다면

적에게 패배 당함은 물론 목숨도 잃게 된다는 말이 아니던가?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

부디 끝까지 살아남아 장터 기록의 과업을 완수하길...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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