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가 홀랑 빠져버린 장터 할매가 국수 한 그릇을 맛있게 드신다.
국수 한 젓가락 잇몸에 걸쳐놓고, 졸졸 빨아 드신다.
젓가락으로 받치면 팔이 아파 천천히 드신단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는 말이 딱 맞다.

이리 먹으나, 저리 먹으나, 넘어가는 것은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시간은 걸렸지만, 국물 한 방울 안 남기고 깨끗하게 드셨다.
“살라고 묵는 기 아니라, 맛있어서 묵는데이!”
카메라 든 사내 눈길을 의식해 하시는 말씀이다.

호박 팔아 국수 사 드시면 남는 것도 없지만, 사람 만나는 재미다.
자식들은 편하게 살라지만, 혼자 감옥살이 하는 게 어디 편한 것이더냐?
이래도 한 평생 저래도 한 평생이라며, 마음 가는대로 사신다.
집에 가면 티브이를 친구삼지만, 그래도 자식 걱정은 있다.

사는 게 뭐 별 것 있겠나?
객지에서 며느리 눈치 보며 사는 노인네들 보다 백배 낫다.
다들 그놈의 욕심 때문에 전전긍긍하지만, 죽고 나면 말짱 도루묵이다.
빈손으로 가는 인생, 빨려 가는 국수발처럼 넘어가는 게 인생이 아니겠는가?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5일은 정영신씨 따라 포천 신읍장에 장보러 갔다.






포천장은 다리 밑에서 열리는 장으로 경기북부에서 가장 큰 장이다.
포천읍내에 있던 장터가 무질서한 교통문제로 지금의 다리 밑으로 옮겨졌단다.






다리 밑이라니 별난 생각이 많이 난다.
어릴 적엔 다리 밑에 내다 버린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다.
당시의 다리 밑이란 거지들이 몰려 사는 곳이기도 했지만,
나병환자들이 많아 공포의 대상이었다. 나중엔 다리 밑을 고향처럼 동경했지만... 




 


한 시간 남짓 달려 다리 밑에 당도하니, 장마당이 시끌벅적 했다.






“단감이 한보따리 오천원이여. 오천원! 이제 몇 개 안 남았어요.”


장꾼들 이야기는 숨 쉬는 소리 빼고는 다 거짓말이라 듯이, 한 보따리 라는 게 겨우 일곱 개 담긴 봉다리었다.
그리고 뒤편에 세워 둔 트럭에서 수시로 가져왔다.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하는 게 장사꾼이니, 어쩌겠는가?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는 게 장터 생리니, 아무도 탓하는 이는 없다.
그래도 사람냄새 물씬 나는 신읍 장터는 고향에 온 듯 정겹더라.






도착한 시간이 점심때라 장꾼들도 다들 밥 먹느라 바빴다. 
모두 먹고 살려고 하는 짓이니, 밥 먹는 모습도 빼 놓을 수 없는 정경이다.





뺏어 먹을까 혼자 숨어 까먹는 사람도 있고, 두 내외가 마주앉아 정겹게 먹는 사람도 있고,
장꾼들 여럿이 둘러 서서, 노닥거리며 먹는 등, 먹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심지어 중국집에 자장면을 배달시켜 먹기도 하고, 휴대용 버너에 라면을 끓이는 장꾼도 있었다.




 


손님들도 마찬가지다, 포장마차도 바글바글, 호떡집은 불난 호떡집처럼 장사진을 쳤다.






노리짝 하게 구운 호떡에 군침이 돌았으나, 동자동서 줄 서는데 질려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밥 먹는 것조차 귀찮은 놈은 살 자격도 없다. 그러나 죽는 것도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정영신씨는 사진 찍으랴 인터뷰하랴 바빴으나, 물건 사는 것도 빼 놓을 수 없는 일 중 하나다.
가평 잣 장사 구라에 못 이겨 잣도 한 봉지, 포천 단감도 한 봉지, 심지어 내 바지까지 사서 갈아 입어란다.






청바지 뒤가 헤어져 팬티가 보인다는데, 팬티는 옷이 아니던가?
어떤 사람은 멀쩡한 청바지에 구멍 뚫어 입고 다니는데,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포천 신읍장은 시 소재지 장이지만, 시골 장 못 잖게 재미가 솔솔하다.
물이 밖으로 흘러 생긴 이름이 포천이라는데, 물이 밖으로 흐르면 몽정이 아니던가?

다리 밑 장터라 자연과 어울려 정답지만, 흉하게 지어놓은 장옥이 없어 더 좋다.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포천장에 장보러 가자.
밑져야 본전인 신읍장은 5, 10일에 들어서는 장이다.



사진, 글 / 조문호



































모처럼 사는 일 떨치고, 장에 따라 나섰다.
장터와 지역 문화 답사 가는 정영신씨 기사 노릇을 자청해 콧바람 씌러 간 것이다.






첫 날은 경상북도 점촌장에 들렸다.
점촌하면 왠지 점잖은 촌이라는 생각이 앞선다.
동내이름도 그렇지만, 야박한 다른 장 인심에 비해,
몇 년 전 받은 후덕한 인심이 그런 생각을 각인시킨 것 같았다.






점촌장은 급변하는 장터에 비해 아직 덜 망가진 시골장이다.
난전에 둘러앉아 한담 나누는 할머니의 모습도, 무뚝뚝한 사내들 사투리조차 정겹더라.





장에는 벌써 송이버섯이 나왔는데, 고추만한 버섯 여섯 개 놓고 팔 만원이라했다.
가난한 사람들 눈에는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그 돈이면 고기로 온 가족이 맛있게 먹을텐데...






장터를 기웃거리며 떠도는 여인도 만났다.
무슨 사연인지 모르지만, 장터에 이런 사람들이 간혹 있다.
세상이 미치도록 했겠으나, 어쩌면 그녀가 더 행복한지도 모르겠다.
단돈 천원에 싱글벙글 좋아했는데, 요즘은 어린애들도 천원을 우습게 여기는 세상 아니던가?
큰 욕심 없이 즐겁게 사니, 그게 바로 행복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장터에서 문경의 문화 활동가인 이선행씨를 만났다.
아마 정영신씨와 연락 닿아 나오신 것 같았다.
지난 겨울 정선 동계올림픽 얼음축제장에서 열린 정영신씨 장터사진전 때 한 번 뵌 적 있는 분이었다.
문경에서 정선까지 장터 전시 보러 온 지극정성에 놀랐었다.





정영신씨의 페친으로 장터문화를 좋아하는 분이라는데, 이번 문경 여행 안내를 맡아주셨다. 
점촌과 함창의 맛집에서 음식도 사 주셨는데, 너무 황송스러운 환대를 받았다.
그 중 함창의 버섯요리전문점 ‘테마촌’에서 먹은 버섯탕수육은 별미 중의 별미였다.
오디로 만든 달짝한 소스에 찍어 먹으니, 입에 살살 녹았다.






그 뿐 아니라,'문경새재도립공원'에 있는 ‘옛길박물관’을 비롯해 문경의 여러 곳을 안내해 주었다.

 ‘옛길박물관’에서 가장 관심을 끌었던 것은 조선시대의 오래된 장터 사진으로 처음 보는 사진이 많았다.





산북면 사불산에 둥지 튼 '대승사'로 향하니, 죽도록 고생한 이십사년 전으로 필름이 돌아갔다.
한국의 불교 유적을 찾아 전국 사찰을 돌아다닐 때인데, 새벽에 도착하기 위해 매번 한 밤중에 떠났다.






지금에야 길 안내 해주는 내비라도 있지만, 그 때는 사람조차 만날 수 없는 시골 밤길 헤매느라 곤욕을 치루었다.
그 뿐 아니라 졸음을 견디지 못해 창을 내려 운전하다보니, 왼쪽 귀가 들리지 않는 불구가 되어버린, 고난의 시절이었다.






그러한 어려움 속에 전국 명찰 문화재를 모두 촬영해 출판사에 원고를 넘겼으나,

일곱 권의'한국불교미술대전' 도록을 만들다 경영난에 허덕인 출판사의 부도로 원고료조차 받지 못했다.
유일하게 돈 되는 일 하나 맡았다고 생각했으나, 되는 일이 없었다.
그 덕에 사진이라도 남았지만, '대승사'를 보니 갑자기 힘들었던 그 때가 떠올랐다.






이어 이선행씨는 전통도예가 천한봉 명장의 도천도자미술관으로 안내했다.

도천 천한봉선생과 선생의 따님 천경희 도예가를 소개해 주었는데,

같은 듯 다른 두 작가의 도자를 감상하며 우리 고유의 멋에 빠지는 시간을 가졌다.







천한봉 선생께서는 일본을 자주 가신다고 하셨는데,

일본의 사진가 구와바라 시세이선생과 가까운 사이라고 하셨다.

구와바라 시세이선생께서 반세기 동안 천선생의 가마터를 오가며 기록했던

흑백 사진앨범 두 권을 보여주었는데, 한국전쟁 직후의 희귀한 사진도 있었다.





그런데, 구와바라 시세이 선생께서 치매에 걸렸다는 뜻밖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삼년 전 귀국하셨을 때만 해도 건강하셨는데, 한 번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아무쪼록, 별 탈 없기만을 빌 뿐이다.





그리고 점촌장에서 사주신 머루포도는 먹을 때마다

이선생의 고마움이 새록새록 나는 감칠 맛이었다.






"이선생, 고마웠습니다.

서울 오시면 맛있는 것 사드릴께요."



사진, 글 / 조문호























“야야~ 이거 가져가서 반찬 해 무라.”
“괜찮심더. 그냥 놔놓고 파이소”

지난여름 의성 봉양장에서 만난 정겨운 모습이다.

장바닥에 좌판을 벌인 할머니가 잘 아는 아낙을 만나
팔던 농산물을 챙겨주려 실랑이 하고 있었다.
그냥 못이기는 척 받아 가면 좋으련만, 아낙의 마음은 달랐다.
힘들게 농사지었으면 한 푼이라도 더 팔았으면 하는 배려였다.

그러나 할머니의 고집도 만만찮았다.
뿌리치는 손을 부여잡고 기어이 손에 쥐어주고 만 것이다.
아낙은 무거운 짐 진 듯 미안한 표정으로 돌아섰지만,
전해 준 할머니의 얼굴은 환해 보였다.

콩 한 쪽이라도 나누어 먹어야 마음이 편한 것을 어쩌랴!
자기밖에 모르는 도시인들이 한 번 곱씹어 볼 일이다.
시골에서나 만날 수 있는 가슴 따뜻한 인정병이
방방곡곡에 전염되었으면 좋겠다.

남에게 베푸는 것보다, 더 진한 쾌감은 없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2일, 오류고등학교에서 열린 문화예술인 강연회에 정영신씨가 초청되었다.
오류고등학교의 미술교사인 화가 이운구선생의 요청에 의한 강의였는데,
매년 한 차례씩 문화예술인 초청 강연회를 개최한다고 했다.




그날 강의는 정영신씨가 초청되었지만, 마음은 동자동에 사는 내가 더 바빴다.
여학생을 대상으로 한 자리는 처음이라 그렇겠지만,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당시 까까머리 남학생의 입장으로서는 여고가 선망의 궁전이 아니었던가.




오류고등학교에 도착하여 이운구선생의 안내로 교장실에 들려 차 한 잔할 기회가 만들어졌다.
임국택 교장선생님을 비롯하여 박인옥 교감, 박찬희 행정실장 등 몇몇 선생님과 인사 나누며 이야기를 들었는데,
소탈한 인상처럼, 후덕한 교장선생님의 소박한 꿈에 존경감이 일었다

.



얼마 후 정년퇴임하면 양평 방면에 거처를 두고 변두리 시골장터에서 장사 할 계획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래서 유명 예술인을 제쳐 두고, 정영신씨의 ‘전국5일 장터이야기, 그들의 삶과 애환’이란 주제의 강연회를 받아들인 것 같았다.
사실상, 기계처럼 인성이 메말라가는 학생들에게 아주 적절한 강의로 여겨졌다.




시간이 되어 강의 장소인 오류고등학교 체육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영신씨는 여러 차례 강연에 다닌 경험이 있어 별 다른 걱정은 안 했으나,
그 많은 장터이야기중 무엇을 들려줄지 궁금했는데, 정해진 시간이 너무 짧을 것 같았다.




강의실에는 2-3백여명의 여학생들이 모여있었는데, 부산하기 짝이 없었다.
다들 무슨 이야기가 그리 많은지 끼리끼리 나누는 웅성거림이 마치 난장 같았다.
마침, 그 날이 대학 시험 발표 날이라는데,
오류고 재학생 중에 서울대학교에 세 명의 학생이 합격해, 모두들 마음이 들떠 있는 것 같았다.




강의가 시작되었으나 웅성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학생들에게 낯 선 장터이야기는 관심 밖이었다.
요즘의 교육현장을 처음 지켜보는 터라 참담함이 일었다.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에 빠진 청소년들의 현실을 지켜보며, 일선에서 일하는 선생들의 고충이 느껴졌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앞 서 보낸 PDF의 한글 자막이 알 수없는 기호로 나타났다.
잘 아는 사안이라 강의는 진행할 수 있었으나, 학생들의 시선이 집중되지 않아 강사가 버벅댔다.
강의하는 정영신씨도 난처했지만, 나 역시 좌불안석이었다.




학생들의 관심을 모우기 위해 여러 가지 질문으로 유도했으나, 잘 먹히지 않았다.
질문하는 학생들에게 줄 장터사진집까지 챙겼으나, 다들 빨리 끝날 시간만 기다리는 것 같았다.
어렵사리 강의는 마쳤지만, 얼마나 마음 조려 지켜보았는지, 기록사진 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했다.
강의하는 사진은 한 장 찍었으나, 그마저 초점이 빗나가 있었다.





강의가 끝난 후, 이운구 선생으로부터 힘든 교육현실을 들었는데, 오늘은 그중 양호한 편이란다.
관심을 가지고 진지하게 듣는 학생들도 많았으나, 일부 학생들의 수군거림에 파묻힌 것 같았다.
뒤늦게 정영신씨의 ‘한국의 장터’ 블로그에 올라 온 유익한 시간이었다는 학생들의 댓글에 위안은 가졌으나,
학생을 제대로 통솔하지 못한 강사의 책임도 따를 수밖에 없다.
학생들의 마음을 휘어잡을 수 있는 강한 리드 쉽을 사전에 익히지 못한 것을 뒤늦게 후회했지만 무엇하랴!
명강사가 되려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 같았다.

 사진, 글 / 조문호






 

 

▲ 조문호 사진가

우리 고유의 장터문화가 현대화의 물결에 휩싸여 순식간에 사라지고 있다. 몇 일전 경주 건천장에 갔더니, 그 멋진 장옥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이미 건천장 뿐 아니라 성주장은 물론, 전라도에 있는 나산장까지도 장옥이 없어졌다. 들창이 달린 7-80년 된 장옥들이 몇몇 남아있었으나, 2008년부터 시작한 문화관광형시장에 밀려 하나하나 사라지더니, 이제 전멸 상태다.

‘문화관광형시장’은 전통시장에 고유문화를 더해 관광명소로 육성하려는 취지로 ‘중소기업청’과 ‘시장경영진흥원’에 의해 추진되었지만, 그기에 쏟아 부은 국고나 노력에 비해 실패작이나 마찬가지다. ‘정선아리랑시장’ 같이 성공한 장도 간혹 있으나, 대부분 돈만 날렸다. 특히 그 지역만이 보여줄 수 있는 시장의 특성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문화관광형시장’ 상인들의 대체적인 불만은 쓸데없는 곳에 돈을 낭비했다는 거다.

그리고 더 심각한 문제는 역사적 가치가 있는 오래된 장옥들을 깡그리 없앴다는 점이다. 일단 토목공사부터 벌여야 가시적인 효과도 있지만, 업자들에게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을 것 아닌가? 역사를 우습게 아는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일을 제대로 하겠는가?

강원도 정선군에서 올해 처음으로 ‘전국 오일장 박람회’를 열었다.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5만 여명의 관광객이 방문하여 오일장 박람회의 성장 가능성을 확인시켰다. 지난 달 22일부터 25일까지 진행된 이번 박람회에는 전국 각 지역 대표 전통시장 87곳이 참여하였고, 각종 문화공연과 향수어린 오일장 사진전, 토속음식 체험행사 등이 다채롭게 펼쳐졌으나 앞으로 보완할 문제도 여럿 보였다.

시장상품의 전국 평준화로 지역을 대변할 특산물이 다양하지 않은 것도 문제지만, 매장의 상품들이 대개 비슷비슷했다. 강경 젓갈시장과 성주 참외시장, 고창 복분자시장 등 특산물을 판매하는 매장도 있었으나, 그 지역 특산품과 관련 없는 일상적인 품목들을 판매하는 곳이 더 많았다. 그리고 오일장의 향수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조선시대 저잣거리 재현이나 다양한 설치와 전시 이벤트도 절실했다.

일단, '전국 오일장박람회‘는 맛있는 음식 먹고 재미있게 놀며, 상품을 구입하는 잔치마당으로서는 자리 잡았으나, 정선아리랑시장을 아시아 글로벌시장으로 만들기 위한 목적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번 박람회를 기획했던 첫 제안처럼 전통 장옥을 재현하는 것도 고려되어야 했다.

그 실행되지 못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관광객들의 오일장에 대한 향수 충족은 물론이거니와 문화적 가치에서 오는 여러 가지 이득은 예산의 부담을 감내하고도 남는 장사다. 지역 행사 때 마다 임시 텐트를 설치하는 것보다, 기존의 만들어진 장옥을 활용하는 것은 물론 평소에도 그 장옥을 상용하여 대표 오일장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또 하나 이해되지 않는 것은 우리나라에 다양한 박물관이 있는데, 오일 장터 박물관은 왜 없는지 모르겠다. 장터는 우리민족의 삶의 근거지다. 시장은 단순히 물건이 오고가는 장소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나 소식을 전하고 전해 듣는 소통의 장이기도 하고, 다양한 생활 문화를 접하는 없어서는 안 될 공간이었다.

역사적으로 삼국시대에도 장이 있었다. 그러나 장시가 본격적으로 발달한 것은 조선 후기였는데, 그 때는 장시의 수가 크게 늘어나 전국 곳곳에서 열렸다. 농민들은 자신이 먹을 곡식 외에 장시에 내다 팔기 위한 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했고, 수공업의 확산으로 여러 가지 공산품이 만들어졌다. 화폐가 널리 쓰이면서 물건을 사고팔기 쉬워졌기 때문이다. 19세기 초에는 전국적으로 1,000개가 넘은 장시가 섰다고 한다.

지금은 대형마트에 밀려나긴 했으나, 도회지의 상설시장을 제외한 전국에 600여개의 오일장이 남아있다. 그리고 특수한 장도 더러 있다. 약령시장과 우시장, 어시장, 화문석시장, 죽물시장 등인데, 화문석시장을 비롯한 공예시장들은 이미 서서히 사라지거나 사라지기 직전에 있다.

더 늦기 전에 오일장에서 사용되었던 세월의 더께가 뭍은 집기들을 비롯하여, 장에서 만들어 진 오래된 공산품까지 수집해야한다. 그리고 오래된 장옥도 몇 채 찾아 와 장터의 역사를 한 눈에 돌아볼 수 있는 ‘오일 장터 박물관’을 건립해야 한다.

이번 ‘전국 오일장 박람회’에 불을 지핀 정선군에서 ‘오일장 장터박물관’까지 만들기를 제안한다. 전국 오일장을 대변하는 정선군이 아니고 어느 지자체에다 맡길 수 있겠는가? 정선의 ‘전국 오일장 박람회’에서 장터의 역사까지 한 눈에 돌아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삼년 전, 의성 옥산장에서 만난 김치욱씨(79세)다.
할멈이 쓰던 모자를 내가 쓴다며, 먼저 떠난 할멈을 그리워했다.
갈 날만 기다린다는 그의 말처럼, 세상에 대한 아무 미련도 없어 보였다.
담배를 꺼내 무는 그의 표정에서 삶의 허무가 느껴졌다.

아직 살아 계실까? 그이의 안위가 궁금해진다.




'용산도서관'에서 마련한 ‘길 위의 인문학’ 충남 예산장 탐방이 지난 20일 있었다.
강사로 참여한 아내 정영신씨 덕분에 보람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장터를 기록하려는 사진가로서 보다 인문학적으로 살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산장은 세 번째 걸음이지만, 장터에서 만나는 한 사람 사람들의 개인적인 삶에 더 관심이 많았 던 적은 여지 것 없었다.
소통 없는 개인주의를 나무라지만, 나 역시 그 문제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예산가는 버스 안에서 아내 정영신의 강의를 들으며, 그렇게 마음 졸인 적도 없었다.
아내가 ‘장터에서 만나는 인문학’이라는 인터넷 강좌는 하고 있으나,
탐방 팀들을 직접 인솔한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흔들리는 차안에서 말한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그러나 기우였다. 조금만 더 정리, 보충한다면 전문 약장사들 뺨 칠 정도는 되겠다.

수강생들의 마음은 얼마나 잡았는지 그것이 궁금했다.

장터를 돌며, 그들을 유심히 살폈는데, 어떤 분은 좌판에 깔린 탱자를 보며 어린 시절의 추억을 말하기도 했고,

어떤 분은 난전을 벌인 할머니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도 여기 저기 보였다.

나는 삼년 전에 만난, 국수 뽑는 김성근씨와 시계 고치는 이희천씨도 만났다.
정말 열심히 사는 이름 없는 장인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이 나라를 지탱하는 힘이란 생각도 들었다.

사람들을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금방 지나버렸다.
만나기로 약속한 두시가 되어 버스로 갔더니, 모두들 물건을 봉지봉지 들고 나타났다.

그걸 보니 ‘오는 정 가는 정’이란 옛말이 생각났다. 아! 지역경제에도 이바지하겠구나.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는 역사문화체험강사인 이미옥씨의 도움말도 있었다.
장터가 형성되었던 옛날이야기들로 한국의 시장사를 들었다.
남산의 용산도서관에 도착해서는 강의실에 모여 탐방후기를 쓰는 간담회도 가졌다.
어린 시절 시장에서 장사했던 부모를 돕던 추억에서부터, 다양한 소감을 들을 수 있었다.
어떤 분은 사전에 시장조합에 연락해, 자신들의 저서를 한 부씩 기증하자는 제안도 나왔다.


'용산도서관'에서 실시한 장터에서 만나는 희망인문학 프로젝트는 성공적이었다.
개인주의로 치 닿는 현실의 대안으로, 서로 소통하고 나눌 수 있는 소중한 인문산책이었다.

사진, 글 / 조문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