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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복/ LEEMYOUNGBOK / 李明福 / painting 

2023_1108 2023_1120 / 화요일 휴관

이명복_광란의 기억3-여순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27×546cm_2022

 

이명복 페이스북_www.facebook.com/myoungbok.lee.54

초대일시 / 2023_1108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화요일 휴관

 

후원 / 제주특별자치도_한국미술협회 제주지부

 

제주갤러리

JEJU GALLERY in SEOUL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41-1 인사아트센터 B1

Tel.+82.(0)2.736.1020

@jejugallery_seoul

 

이명복-자연과 역사에 대한 서사 혹은 풍경 "그동안 우리는 왜곡된 역사를 진실인 양 배워왔다. 좌우 이념에 사로잡혀 왜곡된 역사를 교육받았던 것을 곰곰이 따져보며 진실을 바로 보는 작업을 지속하려고 한다. 이것은 한정된 지역만의 아픈 역사가 아닌 한반도 전체의 역사이다. 그래서 제주도에서 바라본 한반도를 그리려고 한다. 또한 우리의 상처, 치부를 감추는 것이 아닌 다시 열어 잘 봉합하여 공동체가 올바른 가치관을 갖고 미래로 향하며 인간답게 사는 세상 그리고 평화로운 세상이 되길 추구한다. 나의 그림이 시대를 넘어 좀 더 나은 세상, 올바르게 열리는 미래로 갈 수 있는 자그마한 원동력이 되길 바란다."(이명복)

 

이명복_사라진 꿈_장지에 아크릴채색_153×208cm_2023
이명복 _ 광란의 기억 4_ 장지에 아크릴채색 _183×249cm_2023

 인간적 삶의 풍경 한국현대사는 정권에 의한 폭력과 저항, 개발독재와 산업화, 그리고 이의 틈바구니에서 묵묵히 연명해 온 민초들의 삶이 뒤엉킨 수많은 사실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산재 되어 있다. 이 사실들은 가공할 권력에 의해 왜곡되거나 은폐되어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정의가 불의로 전도되거나 진실이 거짓으로 또는 그 역으로 서술되기도 한다. 한국 현대사의 질곡상을 단지 애처롭게만 볼 수 없는 화가 이명복은 이를 그림으로 기술해야 하는 소명을 스스로 선택하여 실천하고 있다. 타고난 이야기꾼으로 삶과 자연에 대한 애정과 역사적 진실탐색을 위한 그의 처절한 인문정신은 자연, 인간, 역사에 대한 반추라기보다는 '정의와 진실'을 탐색해 가는 숙명적 여정으로 읽혀진다. 주지하다시피 이명복의 주된 관심사는 '사람'이다. 화가는 젊은 시절부터 주변의 다양한 사람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관조하거나 혹은 비판적 촉수를 드리우며 그려왔다. 1980년대 작가는 미군병사의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면서 당시 한국사회의 현실을 냉철하게 적시했는가 하면, 90년대 노동자나 농민의 초상을 통하여 우리의 삶의 지평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하기도 하였다. 그것이 삶의 진실된 부분이든 부조리한 측면이든 간에 작가는 인간내면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심리적 욕망은 물론, 등짐 가득한 삶의 무게를 극복해 가는 민중들의 모습을 통하여 동시대 한국사회의 지층을 파헤친 것이다. 화가는 우리가 무심코 보았던 인간의 삶의 모습을 화면에 재현해 냄으로써 새로운 각성을 유도하는가 하면 삶의 철학적 부분을 일깨우는 다양한 접근방식을 통하여 우리가 처한 삶의 역사적·사회적 가치를 탐문해 왔던 것이다. 이는 그 시대 뜻을 같이한 일군의 미술가들과 함께 이룬 한국현대미술사의 중요한 실천적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근래에 이르러서 이명복은 강인한 삶을 살아가는 제주의 여성과 4.3 생존 수형인들을 찾아서 그들의 초상을 화폭에 담기도 하였다. 아울러 작가는 깊은 삶의 여운이 드러나는 제주 '할망'의 모습을 통해서 한 여인의 삶의 흔적을 반추하는가 하면 노동으로 익은 인간의 모습을 통하여 현실적 삶의 가치를 숭고의 영역으로 승화시키는 기지를 발휘한다. 작업 중에 잠시 휴식하거나 우리를 응시하는 인물들의 표정은 만만치 않은 삶의 굴곡을 극복한 시간의 흔적으로 고스란히 노정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초극한 삶의 본질을 일깨우게 하는 것이다. 이들의 포즈는 노동의 시련과 세월의 풍상에 대응해온 삶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으며 햇빛에 그을러 강한 굴곡을 보이는 얼굴표정은 만만치 않은 삶의 도전에 당당히 맞서 온 전사의 모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이명복 _ 뿌리 _ 장지에 아크릴채색 _212×148cm_2021
이명복 _ 남매 - 이재수와 이순옥 _ 장지에 아크릴채색 _202×142cm_2021
이명복 _ 불길 _ 장지에 아크릴채색 _162×130cm_2023

이명복의 '어멍'이 지닌 매력의 근원은 이 지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제주할망은 단순히 잘 그린 인물화이기 이전에 우리 어머님의 모습이자 한국적인 모성을 암암리에 드러내는데, 우리는 그 익명성 뒤에 아득하게 드러나는 제주 어멍의 형상에서 역사를 추론하고 삶을 반추하게 된다. 작가는 전체적으로 인물의 자태에 주안점을 두어 대상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방임하면서 인물의 거친 매력을 찾아내는데 탁월한 감각을 보인다. 일하는 어멍이든 잠시 쉬고 있는 할멍이든 간에 각자의 개성과 감정이 표정에 가득 배어 살아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통하여 존재의 존재가치와 그 역사에 대하여 되묻고 있다. 한편 필자는 이명복의 남매라는 작품에 주목한다. 이는 '1901년 신축 제주항쟁'의 주인공 이재수와 그의 누이동생 이순옥을 그린 것이다. 천주교를 등에 업은 외세와 탐관오리에 분연히 맞섰던 이재수의 모습은 자료가 없어 상상력으로 그린 것이고, 이순옥의 초상은 그녀가 만든 '야월의 한라산-이재수 실기'에 실린 사진을 바탕으로 그렸다고 한다. 관노의 신분으로 부당한 세력을 응징한 이재수의 기개가 얼굴표정과 포즈에 잘 나타나 있고, 평생 오라버니의 복권을 위해 노력한 순옥의 당찬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처럼 이명복의 인물은 그들의 정체성을 뚜렷이 드러내면서 특정한 존재를 지각할 수 있을 정도로 사진을 초극하는 사실성을 추구한다. 마치 조선시대 인물화가 전신사조(傳神寫照)를 지향한 바와 같이 작가는 인물의 형상 재현을 넘어 그 주인공의 삶과 정신까지 담아내고자 하는 인문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이명복 _ 수상한 오후 1_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_91×63cm_2023
이명복 _ 수상한 오후 2_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_91×63cm_2023

한국현대사의 풍경 이러한 이명복의 인물은 그의 역사 인식과 결부되면 강한 힘을 획득하게 된다. 복원·구축된 '역사적 풍경'이라고 일컬을 만한 그의 '한국현대사연작'은 해방정국의 혼란과 좌우익의 대립, 4.36.25, 뒤이은 정치적 혼란과 4·19혁명, 그리고 5.16 12.12 군사 정변 등, 그 격랑 속에서 자신을 지켜야 했던 우리 민족의 처지를 극적인 장면들을 수습하여 콜라주 한 장대한 서사시이다. 그가 그린 광란의 기억연작이나 사라진 꿈과 같은 회화적 실험은 그가 화가로서 '정의와 진실'이라는 가치를 정초하기 위한 건강한 역사탐색의 중요한 방법론이기도 하다. 이명복의 광란의 기억연작에는 해방전후사에서 우리 민족이 겪어야 할 온갖 부조리한 측면들이 시공의 차이 없이 서술되어있다. 당시 승전국과 패전국으로 재편된 중심과 주변에 관계된 권력적 요소들은 여러 층위로 존재했는데 그중 우리나라는 이 어떤 측에도 끼지 못한 분단된 신생 독립국에 불과했다. 넓은 범주로 보자면 특정한 정체성을 지닌 지역, 혹은 집단과 그 외부에 존재하는 권력의 역학관계를 통해서 민족의 운명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국내적인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이념적으로 분절된 각 집단의 권력적 형태와 개개인의 내면적 공간에서 허위와 진실, 중심과 주변의 문제를 살펴볼 수 있다. 작가는 이 과정에서 왜곡된 진실을 바로잡고 바른 미래로 나아가고자 권유하는 것이다.

 

이명복 _ 무죄 - 김평국 _ 장지에 아크릴채색 _249×183cm_2022
이명복 _ 춘자삼촌 _ 장지에 아크릴채색 _208×152cm_2022

사라진 꿈의 배경은 DMZ 안에 후삼국시대 궁예가 세운 태봉국의 흔적이 남아있는 철원평야다. 이중 상단의 인물들은 얄타회담에서의 루즈벨트, 처칠, 스탈린. 그리고 기차와 비행기 등등의 6.25의 흔적, 끌려가는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의 희생자들, 미국의 대통령들이 공간을 가르는 다양한 시각적 참조물들과 엉켜있다. 작가는 우리의 운명을 열강의 수뇌부에게 결정지울 수 밖에 없던 암울한 처지와 그 이후의 비극을 생각하면서 담담하게 그림을 그리고 있다. 작가는 새로운 층위에 존재하는 중심과 주변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힘의 방향과 그에 따른 결과를 안타까워하면서 승전국이라는 전후 또 다른 형태로 등장한 괴물들의 패권주의가 만들어낸 폭력성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편승한 당시의 권력자들에 의해 기만과 허위는 진실이 되고 정의를 가장한 폭력이 난무하는 가운데 정작 정의에 투신한 사람들은 권력의 서슬퍼런 총구에 스러져 갔다. 이 사실이 작가는 너무 가슴 아픈 것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당시의 무도한 권력은 지금까지도 살아남아 민족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내면서 정의를 억누르고 진실을 호도하고 있다. ● 「뿌리는 이승만 대통령을 정점에 두고 맥락적으로 서술된 대작이다. 마찬가지로 여기에는 한국현대사의 질곡상과 연관된 장면들이 장편 서사시로 표현되어 있다. 시인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에서 착상한 이 작품은 이승만 정부 말기 4.19 혁명과 5.16 정변의 주역인 박정희와 주변 인물과 이들의 계승자인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이명박, 박근혜 등 익숙한 도상들이 핏기를 잃은 채 화석같은 모습으로 도열해 있다. 격랑의 한국현대사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들이 뒤섞여 아비규환을 이루고 화면 하단에는 시인 김수영이 어두운 시대의 위대한 증인으로 자리 하고 있다. 이 모든 형상들은 극적이고 암울하다. 그간 우리가 간과했던 역사적 진실들, 질곡과 폭력으로 얼룩진 한국현대사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피를 흘리고 스러져간 선조들의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핍박과 저항으로 점철된 민초들의 삶이 녹아있는 그의 그림에는 스치는 피냄새와 그 피의 대가를 받지 못하고 스러져간 이름모를 영혼들이 뒤엉켜 있다. 그리고 무자비한 폭력의 가해자들은 여전히 당당하게 화면의 주인공으로 자리하고 있다. 언제 우리는 왜곡된 역사인식을 극복하고 현실역사의 참된 가치를 일깨울 수 있게 될 것인가? 이를 증언하고 극복하기에 예술의 힘은 여전히 미미할 뿐이다.

 

이명복_엄마의 바다_장지에 아크릴채색_127×194cm_2022
이명복 _ 절정 _ 장지에 아크릴채색 _162×130cm_2022
이명복 _ 절정 2_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_91×65cm_2023

땅의 역사와 풍경 이명복은 아울러 제주의 자연을 그린다. 작가는 "제주의 풍광으로 특히 곶자왈을 사회적으로 해석한, 즉 역사와 인간을 중심에 놓고 풍경을 해석"한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단색조로 표현한 그의 숲 그림은 강한 빛의 여운이 초목 곳곳에 스며들어 형태를 지지하고, 숲은 원시적 향취를 풍기며 고고한 역사적 자태를 보여주고 있다. 빈 곳을 허락하지 않는 검소한 공간의식은 화면 전체를 마치 올오버페인팅을 연상시키는 추상적 기조로 가득 채우나, 이 균질적 양상들에서 초목이 생동하는가 하면 이들은 다시 긴 여운을 드러내며 화면에 몰입되곤 한다. 이명복의 곶자왈 풍경에서 우리는 숲 본래의 우거짐뿐 아니라 나무의 굴곡진 형상과 이를 휘감고 빛을 향해가는 잡목들에서 거친 풍파를 이겨내고 존재를 드러내는 기개를 본다. 곶자왈은 제주사람의 희로애락과 생로병사를 지근에서 지켜보며 이들의 삶과 땅의 역사를 증언해왔다. 화면의 곳곳에 거칠게 자리잡은 교목들은 오름을 굽어보며 제주의 역사를 환기시키는가 하면, 주변의 잡풀들은 제주사람의 삶과 애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 하다. 색채는 빛의 독주를 제어하는 정도로만 사용되고 각각의 형태들은 존재의 실상을 전달하는 정도로 절제된다. 큰 그림임에도 기념비적이거나 과장된 구성은 되도록 자제하면서 곶자왈의 모습을 특징적으로 포착하고 원경은 실루엣으로 처리함으로써 화면의 뉘앙스는 어떤 역사적인 차원을 제외하면 정적이다. 이 모든 것들은 제주라는 땅의 역사와 그 곳을 스쳐간 제주사람이라는 현실과 존재 사이의 시공간적 카오스에 대한 작가적 사유와 인문적 감성의 산물이다. 재현의 관점은 마치 하나의 소실점을 가진 원근법적 회화가 화면상의 모든 사물을 희미한 빛이라는 유일한 중심으로 집중시키고 조련하는 것에 비견된다. 제주의 땅과 역사라는 일관된 관점으로 우리의 사유를 집중시키고 조직하는 것처럼, 진실()이라는 유일한 관점으로 우리의 사유를 환기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작가는 한라산 자락에서 서로 보듬고 살아가는 초목들을 통하여 다시금 땅의 역사와 삶을 사유하고 있다. 이렇게 환기된 삶과 역사는 자연의 수레바퀴 속에서 순환을 거듭하나, 그의 작품 속에서 유형·무형의 형태로 존재하며 형언할 수 없는 가치를 머금은 채 신비로운 빛을 발하고 있다.  이경모

 

이명복_곶자왈_장지에 아크릴채색_152×208cm_2022
이명복 _4 월의 숲 _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_164×260cm_2020

 Myoung bok Lee-Landscapes or Narratives about nature and history "Until now, we have been taught distorted history as if it were the truth. I plan to continue my work of seeing the truth by reflecting on the distorted history that I was taught by being caught up in left-right ideology. This is not the painful history of only a specific region, but the history of the entire Korean Peninsula. So, I am going to draw the Korean Peninsula as seen from Jeju Island. In addition, I seek to create a world where our wounds and grievances are not hidden, but reopened and sutured well, so that our community can move toward the future with the right philosophy, live like human beings, and become a peaceful world. I hope that my paintings will become a small driving force that can move beyond this era to a better world and a future that opens properly."(Myoung bok Lee)

landscapes of human life In modern Korean history, there are countless facts intertwined with the violence by the regime and resistance by the people, development dictatorship and industrialization, and the lives of the common people who have quietly survived in the midst of this situation. These facts have been distorted or concealed by formidable powers, and despite its short history, justice has been turned into injustice, or the truth has been described as lies, or vice versa. Artist Lee Myoung bok, who could not simply look at the fetters of modern Korean history in a pitiful way, chose and lived out his calling to describe them through paintings. As a natural storyteller, his love for life and nature and his desperate humanistic spirit to search for historical truth are read as a fateful journey to search for 'justice and truth' rather than a rumination on nature, humans, and history. As is well known, Myoung bok Lee's main interest is 'people.' Since his youth, the artist has been painting various people around him, either with an affectionate gaze or with a critical gaze. In the 1980s, Lee Myoung-bok looked at us through the eyes of a U.S. soldier and took a cool-headed look at the reality of Korean society at the time. This artist also reconstructed the horizon of our lives three-dimensionally through portraits of workers and farmers in the 1990s. Whether it is the true part of life or the absurd aspect, the artist has dug into the strata of contemporary Korean society through the psychological desires deep within humans as well as the people overcoming the weight of life full of burdens. The artist has induced new awakenings by reproducing aspects of human life that we have seen inadvertently, and has investigated the historical and social values of our lives through various approaches that awaken the philosophical aspects of life. This is evaluated as an important practical achievement in the history of Korean contemporary art achieved together with a group of realist artists who shared the same ideas of the time. In recent years, Myoung-bok Lee has been searching for Jeju women and survivors of the April 3 Incident, who are living strong lives, and capturing their portraits on canvas. The artist reflects on the traces of a woman's life through the image of a Jeju 'grandmother' who reveals the deep lingering effects of life. In addition, he demonstrates his wit to sublimate the value of realistic life into the realm of the sublime through the image of a human being who has become accustomed to labor. The expressions on the faces of the characters who take a break from work or stare at us clearly show the traces of time spent overcoming the formidable ups and downs of life. Nevertheless, they remind us of the essence of life that transcends reality. Their poses clearly show the history of life in response to the hardships of labor and the trends of time. The facial expression, showing strong curves tanned by the sun, still retains the appearance of a warrior who confidently faced the formidable challenges of life. The source of the charm of Lee Myoung-bok's 'Eomeong' can be found at this point. This 'beautiful' Jeju grandmother is more than just a well-drawn portrait, she is the image of our mother and implicitly reveals Korean motherhood. We infer history from the image of the Jeju female diver, who appears distantly behind her anonymity, and reflect on her life. The artist focuses on the overall appearance of the person and shows excellent talent in finding the rough charm of the person while ensuring the subject's natural movement. The artist questions the value of existence and its history by depicting living mothers, whether they are working mothers or grandmothers taking a break, with their individual personalities and emotions reflected in their expressions. Meanwhile, I pay attention to Lee Myoung bok's work called Brothers and Sisters. This work depicts Lee Jae-su, the leader of the 'Shinchuk Jeju Uprising of 1901', and his sister Lee Sun-ok. It is said that image of Lee Jae-su, who resolutely stood up to foreign powers and corrupt officials backed by the Catholic Church, was drawn from imagination because there was no data, and Lee Soon-ok's portrait was drawn based on a photo included in her book Halla Mountain in the night moon- Lee Jae-su's Practical Story. Lee Jae-su's spirit of punishing unjust forces as a government slave is clearly visible in his facial expressions and poses, and Sun-ok's steadfastness in working hard for her brother's reinstatement throughout her life is impressive. In this way, Lee Myung-bok's portraits clearly reveal the identity of the subject and pursue a realism that surpasses photography to the point where a specific being can be perceived. Just as the portrait paintings of the Joseon Dynasty aimed to follow the spirit of the whole world, the artist shows a humanistic spirit that seeks to capture the life and spirit of the protagonist beyond just reproducing the shape of the character.

Landscapes of modern Korean history Lee Myoung bok's portraits gain strong power when combined with his historical awareness. His 'Korean Modern History Series', which can be called a restored and constructed 'historical landscape', depicts the chaos of the liberation from Japanese colonial rule and the confrontation between the left and right, the 4.3 and 6.25, the subsequent political chaos and 4.19 Revolution, the 5.16 and 12.12 military coups. It is a magnificent epic that collaged with dramatic scenes of the situation of our people who had to protect themselves in these turbulent times. His pictorial experiments, such as his Frantic Memoriesseries and Lost Dreams, are also an important methodology for healthy historical exploration to establish the values of 'justice and truth' as an artist. In Lee Myoung bok's Frantic Memoriesseries, all the absurd aspects that our people have to experience in the 'Era of before and after liberation,' are described without any difference in time and space. At that time, the power elements related to the center and periphery, which were reorganized into victorious and defeated countries, existed at various levels. Among them, our country was just a newly divided independent country that could not join any of the sides. In a broad sense, the fate of the nation was determined through countries and groups with specific ideologies and the power dynamics that existed outside the country. If we look at it from a domestic perspective, we can look at the issues of falsehood and truth, center and periphery, in the form of power of each ideologically divided group and in each individual's internal worldview. In this process, the artist recommends correcting the distorted truth and moving toward a better future. The background of the work Lost Dreamsis the Cheorwon Plain, where traces of Taebongguk, founded by Gung Ye during the Later Three Kingdoms period, remain within the DMZ. Among them, the figures at the top are Roosevelt, Churchill, and Stalin at the Yalta Conference. And the traces of the Korean War, such as trains and planes, the victims of the 'Bodo Union' massacre incident being dragged away, and the presidents of the United States are intertwined with various visual references floating in space. The artist calmly paints a picture while thinking about the bleak situation in which we had no choice but to decide our fate at the hands of the leaders of the great powers, and the tragedy that followed. The painter laments the direction of power and its results in the process of forming the center and periphery that exist in a new dynamic relationship. And it is criticizing the violence created by the hegemony of monsters that emerged in another form after the war, the victorious nation. By the powerful people of our country who took advantage of this, deception and falsehood became the truth, and violence disguised as justice was rampant, and those who had devoted themselves to justice were killed by the cruel gun of power. This fact is so heartbreaking to the artist. And unfortunately, the ruthless power of that time survives to this day, suppressing justice and misleading the truth while causing deep wounds to national pride. The work Rootsis a masterpiece written in context with President Syngman Rhee at its peak. Likewise, scenes related to the fetters of modern Korean history are expressed like a full-length epic. This work, which was conceived from poet Kim Soo-young's Giant Roots, expresses the righteous people of the April 19 Revolution at the end of the Rhee Syngman administration, Park Chung-hee, the protagonist of the May 16 coup, and surrounding figures of his successors Chun Doo-hwan, Roh Tae-woo, Kim Young-sam, Lee Myung-bak, and Park Geun-hye. These familiar icons have lost their blood and are lined up like fossil-like figures. In the turbulent modern history of Korea, at the bottom of the canvas screen, where perpetrators and victims are mixed together and in chaos, poet Kim Soo-young stands as a great witness of a dark era All these images are dramatic and grim. This is because it reminds us of the historical truths that we have overlooked and the images of our ancestors who shed blood and died without being able to survive in modern Korean history marred by bondage and violence. In his paintings, which depict the lives of the common people full of persecution and resistance, the scent of passing blood and nameless souls who passed away without receiving compensation for that blood are intertwined. And the perpetrators of merciless violence still proudly stand as the protagonists of the picture. When will we be able to overcome our distorted perception of history and awaken to the true value of real history? The power of art to testify and overcome this is still weak.

landscapes of the land history Lee Myoung bok also depicts Jeju's nature. The artist is creating a work that "socially interprets the scenery of Jeju, especially Gotjawal, that is, interpreting the scenery with history and humans at the center." In his forest paintings expressed in monochromatic tones, strong lingering light seeps into various parts of the vegetation and supports the form, and the forest exudes a primitive scent and represents a archaic historical appearance. The frugal sense of space that does not allow for empty spaces fills the entire canvas with an abstract tone reminiscent of all-over painting. However, while the vegetation is vibrant in these homogeneous aspects, they often reveal a long lingering effect and become immersed in the picture. In Lee Myoung bok's Gotjawal landscape, we see not only the original lushness of the forest, but also the mettle that overcomes rough weather and reveals its existence in the curved shape of the trees and the undergrowth that wraps around them and heads towards the light. Gotjawal has closely witnessed 'the joy, anger, sorrow, and pleasure', also 'births, aging, illness, and death' of Jeju people and has testified to their lives and the history of the land. Trees roughly placed in various parts of the canvas screen overlook the Oreum(volcanic cone) and evoke Jeju's history, while the surrounding weeds seem to symbolically show the lives and joys and sorrows of Jeju people. Colors are used only to the extent of controlling the intensity of light, and each form is restrained to the extent of expressing the reality of existence. Although it is a large painting, the artist characteristically captures the appearance of Gotjawal while refraining from using monumental or exaggerated compositions, and treats the distant landscape as a silhouette. As a result, the nuance of the screen is static except for a certain historical dimension. All of these are the product of the artist's thoughts and humanistic sensibilities about the spatial and temporal chaos between the history of the Jeju territory and the reality and existence of Jeju people who passed by. The point of representation is comparable to a perspective painting with a single vanishing point that focuses and manipulates all objects on the screen into a single center called faint light. Just as we focus and organize our thoughts with a consistent perspective of Jeju's land and history, we evoke our thoughts with a unique perspective called truth (light). In this way, the artist is once again thinking about the history and life of Jeju land by painting the bushes and trees that live in support of each other on Halla Mountain. The life and history evoked in this way continue to cycle in the wheel of nature, but in his works, they exist in tangible and intangible forms and emit a mysterious light with indescribable value.  Lee Kyeongmo

 

 

이 사진들은 페이스북 Designersparty 사진첩에 올라 온 사료들을 스크랩했다.

이경모선생이 기록한 사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라이프지 기자들이 촬영한사진이다.

 

여순사건은 19481019일부터 1027일까지 전남 여수시에 주둔하던 14연대의 군인 2,000여 명이 중위 김지회, 상사 지창수 등 남로당 계열 군인을 중심으로 제주 4·3 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무장 반란을 일으켜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전남 동부 지역의 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으로 반란군에 의해 경찰 74명을 포함해 약 150 명의 민간인이 살해 당했고, 정부측 진압 군경에 의해 2,500여 명의 민간인이 살해당했다. 이승만 정부 수립 2개월 만에 일어난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은 철권 통치와 반공주의 노선을 강화했다.

 

여수중학교 교감 송욱 때문에 많은 어린 학생들이 좌익화 되었다. 골수 좌익화된 여학생이 시내에 진입한 국군들을 유혹해서 허벅지에 숨겨둔 총신을 짧게 자른 칼빈소총으로 사살했었다. 이 사실이 알려진 뒤에 많은 어린 여학생들이 용서 없는 죽임을 당했다.
광양 1948년 10월. 경찰은 반란군에 쫓겨 후퇴하면서 가둬두고 있던 좌익 사상범 용의자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갔다. 서울대 법대를 다니다 고향에 내려와 은신하고 있던 김영배(당시 21세)도 그런 희생자들 중 하나였다. 그의 가족들이 광양과 순천의 경계에 있는 덕내리 골짜기에서 아들의 시신을 찾아내 거두고 있다. / 이경모사진
1948년 10월 여순사건 사진. 반군과의 교전에서 희생된 경찰공무원 남편의 시신을 찾아 나선 아낙네. / 이경모사진
반군에 의하여 살해된 양민의 시신 앞에서 애통하는 부녀자들.

 

여수시내 수색중 저항하다가 체포된 어린 여학생들.
1949년 1월, 벌교 주민들이 호남지구 반도귀순촉진위원회 벌교지부가 게시한 귀순 촉구 공고문을 읽고 있다
포로가 된 반군 동조 부녀자들.
진압군에 저항할 의사가 없음을 양손을 들어 보여주고 있는 주민들.
여수순천반란 진압과 좌익숙군의 핵심인물들 - 악질 친일파 백선엽, 이후락, 김창룡등
머리의 흰 띠는 반란군과의 구별을 위해서 표시한 것이나 일부 국군 토벌대 [광주주둔 4연대-14연대의 모체]가 반란군과 합류해서 아무런 구별의 의미가 없어졌다.

 

지휘관 잘못만나는 바람에 얼떨결에 공비화된 전 14연대 소속 국군들.
미군 고문관에게 호소하고 있는 부녀자들.
국군이 처형한 좌익들, 웃옷을 벗기고 총살했다.
여수 시내수색에서 체포된 통비분자들- 김지회가 지휘하는 일천여명의 주력은 이미 여수를 빠져나가 지리산으로 도주했다.
작전수행중 주먹밥으로 한끼를 때우는 국군병사.
왼쪽 등을 보이는 자는 토벌여단의 지휘관 송호성,. 앞은 경찰서장 [또는 도경정보과장,] 그 오른쪽은 군산에서 내려온 12연대 백인엽 소령.
국군이 작전을 펼치는 동안 불안한 주민들...쫓기는 자 가운데 내 식구와 친지가 있다..
국군이 여수를 탈환한 후 원인모를 큰 불이 났다. 경계근무중인 국군.
재판장으로 향하는 반군 동조자들과 그 가족들.
질의응답식으로 진행되고 있는 반란군으로 의심되는 좌익분자색출 작업중.
여순사건 희생자 주검 앞에서 아낙네가 가족을 찾고 있다.
1951년 12월. 전남 담양에서 생포된 빨치산 / 이경모사진

빨치산이 생겨난 배경

일제에 빼앗긴 주권을 되찾고자 다양한 독립운동 세력들이 나타났는데,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항일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공산주의를 받아들였다. 1917년 러시아에서 레닌의 볼세비키 혁명이 성공한 후 러시아 공산당은 세계 식민지 민족 해방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25년 박헌영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 나라를 이끌어갈 뚜렷한 조직이 없는 상태에서 조선공산당이 재건되었고, 북조선에는 북조선분국을 두게 되었다. 이들은 노동자, 농민, 도시 일반 근로자들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이익을 옹호하고 서민생활을 급진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투쟁한다고 선동하였다. 당시 우리나라 국민들 78%가 공산주의 사상을 선호하고 있을 정도로 공산주의는 해방 이후 나라의 주도권을 선점하였다.

한편 한반도는 일제의 패망과 함께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에 따라 남과 북이 갈라져 서로 다른 이념과 사상을 가진 정권이 탄생하였고, 극심한 혼란과 대립의 격랑을 겪게 된다.

빨치산의 시발점

194512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안이 가결되었다. 남한의 우익세력은 반탁을, 박헌영을 중심한 좌익 세력은 찬탁을 외쳤고, 이후로 남한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좌우의 이념대립이 시작되었다.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은 19467, ‘테러는 테러로, 피는 피로써 갚자.’는 폭력전술, 이른바 신전술을 채택하면서 각종 반정부활동을 전개해나갔다.

1946923일 공산당은 흉흉한 민심을 선동하여 부산을 시작으로 전국 철도노조의 총파업을 일으켰고,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약칭 : 전평)의 주도하에 대구 10.1 폭동을 일으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삽시간에 서울을 비롯한 남한 전체에 미군정에 반대하는 시위가 퍼져나갔다.

미군과 경찰이 주동자들을 체포하고 수배하자, 이들은 태백산과 소백산으로 숨어들어 우리나라 빨치산의 시작인 야산대(野山隊)’를 만들었다. 뒤에 이들은 ()빨치산이라 불렀다.

 

194827, 남한만의 단독선거 5.10 선거를 반대하기 위해 남로당은 당원 30만명을 동원하여 전국적으로 전쟁을 방불케 하는 폭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남로당은 경찰이 빠르게 진압한 것에 놀라 앞으로의 5.10 선거 반대투쟁은 육지에서 떨어져 진압이 어려운 제주도에서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1948,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여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수립함을 목적으로 제주 4.3 사건을 일으킨다. 1947년 가을부터 무장폭동을 준비하고 있던 인민유격대는 전면적인 무력투쟁을 펼쳤다. 육군본부에서는 제주 폭동 진압을 위해 여수 14연대에 진압 출동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을 받은 14연대 인사계 지창수 상사와 김지회 중위, 홍순석 중위의 주도로 남로당 50여명이 반란을 일으킨다. 반란군들은 여수 시내에 있던 6백여 명의 좌익 세력과 합류하여 여수 시내의 양민들을 학살하고,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였다.

이에 군 좌익 세력뿐 아니라 지방 좌익 세력과 동조자들이 가담함으로써 그 세력은 여수에서 순천까지 확대되었다. 사건 발생 8일 만에 국군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일부 반란군은 백운산을 경유, 지리산 일대로 도주하여 빨치산 부대를 형성하게 된다.

이들은 산을 타고 북한과 연락하면서 수년동안 정부에 계속 저항했다. 입산 이후 전술을 장기 항전으로 결정하고, 월동을 위하여 흩어져 지내기로 하였다. 반란군은 근거지를 전전하면서 구례, 곡성, 광양, 무주, 장수, 남원, 거창, 산청, 함양, 진주, 하동에 출몰하여 관공서 습격, 방화, 약탈, 살해, 납치 등의 만행을 자행하였다. 이 지역의 민간인들은 낮에는 대한민국 치하에 살고, 밤에는 반란군의 치하에서 생활해야 하는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빨치산의 재조직

1950 6.25전쟁이 일어나고 국군은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그러나 1950 9, 낙동강 방어선에서 국군의 반격이 시작되고,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단행된 한국국과 유엔군의 총반격 작전에 의해 전선이 급속하게 북으로 이동하였다. 이에 따라 퇴로가 막혀 미처 후퇴하지 못한 북한군 낙오부대와 패잔병들의 상당수가 각 지역의 산악 지대로 잠적하여 그 곳에서 지방 빨치산 부대들과 합세하였다.

이들은 새로운 비정규전을 위하여 조직을 개편하고, 국군과 유엔군의 후방지역 교란 활동을 계속하였다. 비정규전 부대의 규모는 38도선 이북 지역에 약 10,000, 38도선 이남 지역에 약 15,000명 정도였다. 지리산은 빨치산의 왕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 세력과 규모가 대단했으며,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은 빨치산들에게는 전설적인 영웅이었다.

빨치산의 최후

빨치산으로 인한 피해가 계속되자, 195010월 빨치산 소탕을 위해 11사단을 창설하였다. 19513월에는 3개 사령부를 신설하였고 1126일에는 백야전사령부를 설치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전개하였다.

이 작전을 거친 후 빨치산은 대폭 감소하였다. 이때 빨치산은 큰 타격을 받아 대부분 사라지거나,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하산하여 자수하는 자가 많았다. 당시 빨치산 중에는 수많은 양민이 섞여 있었는데, 그들은 이념에 동조한 것이 아니라 강제로 끌려갔거나 가족을 만나기 위해 그들과 행동을 같이 한 것이었다.

19537월 휴전 이후 빨치산은 이현상을 탄핵, 사살했으며 그의 사후 지리산의 빨치산은 완전히 와해의 길로 접어들었다. 빨치산들은 지리산과 덕유산 등을 떠돌며 산짐승 같은 생활을 하다가 총에 맞아 죽고, 병으로 죽고, 얼어 죽고, 굶어 죽어갔다. 매년 겨울을 보내고 나면 그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19631112일 새벽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의 체포로 지리산의 빨치산은 모두 사라졌다.

학교 창고에서 반란군의 사격으로 집단 총살된 시체가 쓰러져 있다. 창고벽에 무수히 나 있는 총탄 자국이 당시의 상황을 말해준다 여순반란 사건 첫날 400여명의 우익인사와 가족이 학살당했으며, 이틀 동안 여수 경찰서에서만 경찰관 59명, 경찰관 가족 40명이 학살당했다
인적 끊어진 시가지에 쓰러진 우익인사. 며칠이 지났건만 좌익들 눈이 무서워 아무도 치우지 못했다.
1948년 10월 전남 여수와 순천에서 벌어진 여순 반란사건 진압을 위해 광주 토벌사령부에 내려간 박정희(왼쪽) 소령이 송호성 사령관(담배 문 이)과 협의를 하고 있다. 박 소령은 서울 복귀 뒤 남로당 군사책의 혐의로 숙군작업에 걸려들어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극적으로 살아났다.

194810월 숙군 작업이 펼쳐지기 직전 박정희의 모습이다

 

여순사건 발발 이후 이승만 정부는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추어 사회를 변화시켰다. 하나는 반공주의를 강화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분법적 사회구조이다. 반공주의는 누구나 쉽게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분법적 사회구조는 무엇일까. 모든 것을 옳거나 그름으로 판단했다. 옳음의 기준은 이승만이었다. 이승만 정부를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세력은 모두 이 되었다. 그런 개연성이 있는 사람마저 으로 간주했다.

으로 간주한 국민은 타도의 대상이었다. 여기에는 모든 국가 권력이 동원되었다. 그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국가보안법이 탄생하였다. 대한민국 헌법 제11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조문에 어울리지 않는 사회 변화에 국민들도 빠져들었다. 이승만 정부의 왜곡된 세뇌는 여순사건 자체를 거부하거나 관심을 갖지 않게 했다. 여순사건을 말하는 것은 용공주의자이며 빨갱이이며 이었다.

 

이러한 사회 변화는 오롯이 이승만 정부에만 있었던 것일까. 아니다. 박정희 군사정권에서 더 고착화되었다. 세간에 박정희가 여순사건과 관련되어 있다는 말은 사실이다. 이를 감추기 위해 박정희는 빨갱이탄압에 더 열을 올렸다고 한다. 그중 여수에서 풍문으로 전해지는 것은 박정희와 이우헌의 관계다.

이우헌은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된 인물이다. 1963년에 있었던 제6대 국회의원 선거는 박정희가 5.16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이후 처음 실시한 국회의원 총선거이다. 부연설명하자면, 당시 여수지역구에는 유경식(1911년생)과 이우헌(1902년생)이 민주공화당 공천을 신청했다. 유경식은 여수에서 유명했던 제중의원 원장으로 의사였다. 지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유경식이 공천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뜻밖에 이우헌이 공천을 받았고,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때부터 박정희와 이우헌의 관계가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지역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를 옮겨보면, “1948년 여순사건 발발 당시 박정희가 14연대 대위였으며, ‘반란의 주모자로 쫓기던 중 이우헌이 집에 숨겨주어 살아났다. 그리고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보은차원에서 이우헌을 공천했으며, 국회의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지역 전체에 퍼져 있는 풍문이다.

박정희가 여순사건 진압작전에 참여하여 언론에 노출된 것은 평화일보가 유일하다. 그리고 호남지구 작전참모로서 작전회의를 하는 사진도 남아 있다. 그런데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이 기자회견이 보도된 다음 날인 1111일 박정희가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서울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다. 박정희가 사형을 언도받고 백선엽 등의 구명운동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다시 풀려났다는 사실은 잘 알려졌다.

 

육군참모총장 송호성 장군과 Col. Hurley B. Puller 여수-순천 상대역

송호성 장군은 함경도 함주에서 출생했다. 함경도 흥남에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고 1913년에 보성전문학교를 중퇴하고 중국으로 건너가서 중화민국 국적을 취득했다. 보정군관학교(保定軍官學校)[2]를 졸업하고 중국군에서 기병대대장, 연대장, 사단장 등을 역임했다.

함경도 함흥에서 성장한 그는 대한독립군에도 투신한 적이 있으며 1942년 한국광복군에 들어가 제5지대장을 지냈다. 광복군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무력이었던 만큼, 해방 이후 김구계열로 분류되었다.

대한독립군 시절 홍범도, 김원봉 등과는 대립하는 등 독립운동 역사의 비극을 겪기도 한 있는 그는 광복군 훈련처장을 거쳐 광복군 지대장을 역임하였다.

194612월 대한민국 육군의 전신인 조선경비대 초대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가, 정부 수립후 조선경비대가 대한민국 국군으로 확대·개편되면서 육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대한민국 육군 창군 주역의 한 사람이다.

1946년에 귀국하여 광복군 출신으로는 드물게 유동열이 미군정의 통위부장에 임명된 후 국방경비대에 들어갔고, 19461213일부터 만주군 출신이었던 원용덕의 뒤를 이어 국방경비대 육군총사령관을 지냈다.

1948615일부턴 국방경비대 총사령관을 겸직하기도 했으며 정부수립 후 초대 육군총사령관을 역임했다. 그러나 사령관이 된 후 보여준 군사적인 능력은 그 평가가 매우 좋지 않다 .

광복군에서 참모장으로 송호성과 함께 복무한 이범석은 반공적이지 못한 인물이라고 여겨 엄청 싫어했다. 사실 이범석과는 광복군 시절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고 정적이었다는 연구가 있다.

송호성의 배경은 유동열이었으며 이범석은 기존 임정 세력과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이범석은 광복군 시절에도 총사령관 지청천과 사이가 좋지 않아 참모장에서 지대장으로 보직을 바꿨었고 광복 이후에는 김구 보다는 이승만과 더 가까웠다.

그러나 최근들어 그 평가에 대해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는데, 이는 아래 여순반란사건을 참조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국군의 광복군계의 송호성의 등용은 광복군계 중용을 통한 군의 정통성 확립과 광복군의 중국군 계를 끌어안기 위함이었다.

19481210, 이응준·채병덕·김홍일·손원일과 함께 국군 최초의 준장이 되었다.

반란에 대한 책임으로 토벌사령관에 임명된 송호성은 광복군 출신으로 평소 군내에서 비주류였다. 반군에 대한 만주군 출신 지휘관들의 강경 진압방침과 달리 송호성은 온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당시 강경한 진압작전을 주장하고 실행한 인물들은 이승만-채병덕-김백일, 백선엽, 백인엽, 송석하로 이어지는 세력이었다. 초기 진압작전의 주도권은 이미 송호성에서 김백일, 백선엽으로 넘어갔다. 훗날 송호성이 부정적으로 평가된 것은 이 같은 태도와 그의 납북사실 때문이었다.

 

이범석은 송호성이 아닌 지휘체계상의 지휘를 받는 군인들과 직접 협의하였다. 반군토벌전투사령부는 육군본부 작전참모 부장 정일권 대령, 정보국장 백선엽 중령, 정보과장 김점곤 소령 등이 참모로서 사령관을 보좌하면서 진압작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들은 국방부 장관 이범석과 직접협의하며 진압작전을 실질적으로 지휘하였다.

 

국방경비대를 기른 아버지 송호성 등은 가능하면 희생을 작게 하며 은밀하게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다. 송호성은 확성기를 가지고 반란군의 총탄이 쏟아지는 최전선에 나가 "나의 사랑하는 조국의 청년애국장병들이여! 총을 버려라! 국방군끼리 싸울 때는 아니다. 지금이라도 늦지않았다! 나의 생명을 걸고 제군의 죄는 묻지 않겠다!"라고 울면서 반란장병들에게 호소했다.

 

송호성은 진격하는 도중 여수 북방 약 8km 지점의 미평리 근처에서, 매복 중이던 반란의 주역 지창수 부대의 집중 사격을 받는다. 이때 송호성은 반란군의 기습에 고막이 터진다.

 

육군 총사령관 직위에서 밀려난 이후에는, 통위부 차장(19486), 19493월 호국군 사령관, 육군 제5사단장(1949512), 1949712일을 기하여 육군 제2사단장(육군 태백산지구 전투사령관 겸임),
19502월 참모학교를 수료하고, 1950512일을 기하여 대한민국 육군 준장으로 예편, 이후 1950610일 청년방위대 고문단장을 역임하였다.

김구의 측근으로, 김구의 암살과 함께 권력에서 밀려나며 1950512일을 기하여 대한민국 육군 준장으로 강제 예편되었다. 한국 전쟁 발발 직후, 한강 인도교 폭파로 인해 남하하지 못하고, 납북되었다.

1953년 인민군 해방전사 여단장을 지냈고, 1956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을 지냈다. 19565월 중순 송호성은 재북인사로서 내각청사에서 김일성주석의 접견했으며 또 195710년에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으로 활동하뎐 중 김일성주석을 다시 만나 조국통일에 앞장서 달라는 당부를 받았다.

그는  1954년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혀 1958년 평남 양덕으로 유배되었고, 1959년 뇌출혈로 사망했다.
김일성 주석은 그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치르도록 하였고, 조국의 평화적통일을 위한 애국의 길을 걸은 그를 기려 조국해방 45돐이 되는 때에 조국통일상을 수여하였다

 

 

광양 백운산 1948년 11월 공비가 됐다가 다시 붙들려 온 과거의 동료 전우들을 진압군이 감시하고 있다.
1948년 10월 여수서국민학교 교정. 사태진압에 나선 국군들이 반란폭도와 양민을 가려내기 위해 주민들을 한곳에 모아 놓았다. 오른쪽 대열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부역혐의자로서 이들중 89명이 11월 1일 처형되었다. / 이경모사진
이경모 사진
이경모 사진
이경모 사진
이경모사진
이경모 사진

 

194827

남조선노동당과 민주주의민족전선이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이른바 '2·7 구국투쟁'을 전개.

/ 1948226

유엔 임시총회에서 미국측의 '가능지역 총선거안'이 가결, 남한은 제헌국회를 구성하기 위해 510일 단독 총선거를 치르기로 결정.

/ 194843

제주 4·3사건 발생. 미군이 진압 개시.

/ 194854

현지 모집 인원과 광주4연대에서 차출된 병력 800여 명으로 여수 14연대가 창설.

/ 1948101

여수14연대 연대장 오동기 소령이 혁명의용군 사건으로 구속.

/ 19481019

여수14연대 중 1개 대대가 제주 4·3사건 진압을 위해 여수항에 집결. 남조선노동당 일원 지창수가 병기고와 탄약고를 장악하고 반대자 3명을 사살하며 부대를 장악.

/ 19481020

지창수를 중심으로 한 반란군이 여수 읍내로 진격해 관공서와 주요기관 장악하고 이어서 순천을 점령.

/ 19481021

반란군이 남원·구례·보성을 장악. 친일파를 처단하고 인민재판을 열어 경찰과 우익인사들을 처형.

정부, 광주에 반란토벌사령부 설치.

/ 19481022

반란군이 여수·순천·고흥·보성·광양·구례·곡성 지역 전체를 장악.

정부군, 여수·순천 지구에 계엄령을 선포. 순천으로 진격하여 저녁 무렵 전역을 탈환.

/ 19481024

정부군, 여수 전역 탈환.

/ 194812

이승만 정부, 국가보안법 제정.

/ 19492

여수·순천 지구 계엄령 해제.

/ 19494

여수 반란군 주도급 인물 모두 사살.

/ 19499

이승만 정부, 대통령령으로 '대한민국 학도호국단 규정'을 공포. 중고등학교에 학도호국단 창설.

오는 20일까지, '스페이스22'에서 사진책 450여권 선보여

2018년 11월 11일 (일) 23:32:30정영신기자 press@sctoday.co.kr

우리시대의 꾸밈없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어두운 사회 현실을 다루는 사진들은 누가 보느냐에 따라 사장되기도 빛을 보기도 한다. 고통 받는 현실을 기록하며, 한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 해결을 위해 이 순간에도 그 누군가는 사진으로 시대를 증명하고 있다.


30년 동안 오롯이 한국의 근현대사 기록사진을 출판해온 ‘눈빛’이 지난 7일 대안공간 ‘스페이스22’(지하철 강남역 1번출구)에서 창립3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와 북페어, 강연을 개최했다.


이번 전시에선 눈빛출판사가 출간한 사진책전종과 사진가들의 원판사진, 눈빛아카이브가 수집한 사진, 구와바라 시세이, 정태원, 권주훈, 엄상빈, 전민조, 장숙, 변순철씨등 20명의 ‘눈빛’사진집 표지로 쓰인 사진과 미 군정기 외국인이 찍은 코닥크롬 컬러사진 10점도 전시 되었다.




▲ 눈빛출판사대표 이규상, 편집장 안미숙 Ⓒ정영신


그리고 혼신의 힘으로 한길을 걸어온 눈빛출판사 대표 이규상씨가 한국사진의 개요를 정리한

‘지금까지의 사진 – 한국사진의 작은 역사 1945~2018)’도 출간했다.

이 책은 현대사진의 경향과 흐름, 역사적 맥락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으로 80여명의 사진가 작품과 작가소개 등의 리뷰를 정리했다.


▲ '눈빛,한국사진의작은역사 1988-2018'이규상엮음 책표지 (사진제공:눈빛)


1988년 사진전문출판사로 시작한 ‘눈빛’은 지금까지 700여종의 책을 출판했다.

눈빛출판사는 미술평론가 정진국선생의 제의로 이규상씨가 편집장, 이영준 계원예술대 교수가 사장 겸 편집인,

영화 <너에게 나를 보낸다>로 유명한 여균동 감독이 주간을 맡아 1988년 설립했다고 한다.

처음으로 발간한 책은 프랑스 사진가 크리스 마커가 1958년 북한사회를 기록한 <북녘 사람들> 사진집이다.

30년이 지난 지금은 이규상 대표와 부인인 안미숙 편집장, 그의 딸 이솔과 성윤미씨가 직원의 전부다.



▲ 눈빛출판사 자료모음중에서 Ⓒ정영신   


▲ 눈빛출판사 자료모음 Ⓒ정영신


수지타산을 따지지 않고 새로운 사진과 숨은 사진가를 쉬지 않고 발굴해 온 ‘눈빛출판사’는 가난한 사진가들의 든든한 언덕이나 마찬가지다.

그는 이미 검증된 사진가의 책을 내기보다는 이름 없이 묻혀 작업하는 사진가들의 사진을 찾아내 책을 만들어왔다.

이름 없는 사람들의 역사를 바탕으로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초심으로, 한권 팔아 다음 책을 준비하는 어려운 여건을 견뎌내고 있는 것이다.



▲ 눈빛출판사 연대기 1988-2018 (사진제공:눈빛)


눈빛출판사 안미숙 편집장은 “사진집은 사진가의 의도를 집약해 보여줄 수 있는 사진출판의 꽃이다”고 말하며 “이미지로 읽은 책이 사진집인데, 우리나라는 활자위주의 교육에 치우쳐, 이미지를 해석하거나 읽어내는 훈련이 부족해 안타깝다”고 말했다.



▲ 눈빛출판사 연대기 1988-2018 (사진제공:눈빛)


눈빛이 지금까지 만들어 온 700권의 책은 80%이상이 사진 관련이고, 나머지는 미술이나 문화 관련 책들이다.

안미숙 편집장이 추천한 책은 8.15해방부터 여수. 순천사건, 6.25전쟁까지 역사적인 순간을 담은 사진집으로,

외세와 남북한 냉전으로 이어진 해방직후의 역사적 민족사를 기록한 이경모선생의 <격동기의 현장>이다.

그리고 골목에서 만난 사람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겼던 김기찬선생의 <골목안 풍경>과

한 평생 서민들의 모습을 담아 온 최민식선생의 <휴먼 선집>도 꼽았다.

지금은 세 분 다 고인이 되셨는데, 작가와의 인간적인 교류 속에 책을 만들어 행복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 눈빛출판사 연대기 1988-2018 (사진제공:눈빛)


‘눈빛출판사’ 대표 이규상씨는 사진기술서가 전부였던 사진출판 분야에 현대사진의 이론을 소개하고,

30년 동안 역량 있는 새로운 작가를 배출하여 다큐멘터리 사진의 부흥을 일으킨 장 본인이다.

작가주의로 치닫는 사진가의 권위나 형식주의 사진에 선을 그으며, 기록으로서의 사진을 선별해왔다.

열악한 환경에서 평균 한 달에 두 권의 사진 책을 펴내며, 지속적으로 숨은 사진을 찾아낸 것이다



▲ 눈빛출판사 연대기 1988-2018 (사진제공:눈빛)


특히 눈빛출판사가 시리즈로 선보인 ‘눈빛사진가選’은 잃어버린 풍경을 기록한 사진을 중점적으로 출간하고 있다.

지금까지 59권을 펴낸 ‘눈빛사진가선選’은 한국사진의 대표시리즈로 발돋움시킬 야심찬 계획이다.

시대적 역사를 사진으로 기록한다는 책임감이 큰데, 언젠가 좋은 책은 독자가 알아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 ‘눈빛사진가선善’사진책전시 Ⓒ정영신   


▲ 눈빛출판사 연대기 1988-2018 (사진제공:눈빛)


‘사진으로 보는 대한민국 100년사 1919-2019’ 자료수집에 몰두하고 있는 이규상대표는

“사진 책으로 멋진 사옥을 짓는 꿈은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다며,

‘눈빛출판사’가 걸어온 지난 30년을 디딤돌 삼아 앞으로 30년, 300년이 번창할 수 있기를 소망 한다”고 말했다.



▲ 눈빛출판사 연대기 1988-2018 (사진제공:눈빛)


눈빛출판사 창립30주년 기념전은 강남역 1번 출구 미진프라자빌딩 22층 대안공간 스페이스22에서 오는 20일까지 열린다.

한국현대사를 읽을 수 있는 소중한 사진집을 모두 만날 수 있는데, 전시 기간에는 최고50%에서 20%까지 활인 판매 한다고 한다.



▲ 눈빛출판사 연대기 1988-2018 (사진제공:눈빛)


그리고 아래는 전시기간 중 대안미술 공간 ‘스페이스22’에서 열리는 강연 일정이다.


11월 10일(토)

오후 2시- 3시 30분 / '대항매체로서의 다큐멘터리 사진' / 김성민 경주대 교수

오후 4시- 5시 30분 / 내가 바라본 격동한국 반세기 / 일본 사진가 구와바라 시세이

11월 13일(화)

오후 4시- 4시 50분 / 나와 아바이 마을 30년 / 사진가 엄상빈

오후 5시- 5시 50분 / 세계 속의 한국 사진 / 사진평론가 최연하

11월 15일(목)

오후 4시- 4시 20분 / 전AP통신 사진기자 김천길선생 추모행사

오후 4시 30분- 5시 20분 / 역사의 현장에 선 사진가 / 사진가 정태원

오후 5시 30분- 6시 20분 / 오늘의 기념사진 / 사진가 전민조

11월 17일(토)

오후 2시- 3시 30분 / 눈빛과 한국현대사진 30년 / 사진평론가 진동선

오후 4시- 5시 30분 / 인문학으로서의 한국사진의 지평 / 사진평론가 이광수


전시문의 : 대안공간 스페이스22 (02-3469-0822)


▲ 사진과 책이 전시된 모습 (사진제공:곽명우)








지난15일 오후6시, 인사동 ‘갤러리 라 메르’에서 김진두씨 개인전 열림식이 있었다,
'미협' 소속으론 몇 안 되게 친분있는 화가인데, 장경호씨 연락으로 찾아 나섰다.


전시장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주인공 김진두씨와 장경호씨 뿐이었다.
뒤늦게 전시 서문을 쓴 미술평론가 이경모씨와 유근오씨가 왔지만,
대부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동안 잘 보이지 않더니, 그림을 많이 그렸더라.
적절한 색의 대비와 조화로 이루어진 나비형상이 마치 박제된 그림처럼
겹치거나 색을 달리해 걸려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시력 검사할 때 보았던 도판처럼, 환시현상을 일으킬 것 같았다.

그러나 작업에 대한 정보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손바닥만 한 팜프렛에서 “프시케에 대한 사고”란 제목만 보았을 뿐,
이경모씨의 발문조차 깨알 같은 영문으로 쓰 놓아 알아볼 수 없었다.

작가의 인사말이나 내빈들의 인사조차 구체적인 언급이 없었다.
대단한 작품이라는 찬사는 있었으나, 어떤 면에서 대단한지는 이야기가 없었다.
단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시케’를 내세웠으니, 환상과 연관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너무 불친절한 전시였다.
네 눈높이에서 보라는 뜻인지 모르겠으나, 평자의 글까지 영문으로 표기한 건 이해되지 않았다.
전시장에 외국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는데, 마치 외국 사람을 위한 전시 같았다.
한글로 적힌 것이라고는 작가의 약력이 유일했다.

뒤풀이가 있는 ‘원당 감자탕’집으로 서둘러 내려왔다.
장경호씨는 몸이 좋지 않은지, 그 좋아하는 막걸리를 마다한 채 우유만 홀짝이고 있었다.
다들 술에 골병들어 몸을 생각해야 했다.


뒤늦게 작가와 마주 앉게 되어, “와 팜프렛에 영어만 쓰 났노?라고 물었더니,
‘한 번 더 써 물라고요.’란다.
술이 취했더라면 싸질렀겠지만, 술이 덜 취해 속으로 뇌까렸다.
“마이 써 무라.”



사진, 글 / 조문호






























가마를 탄 신부와 조랑말을 탄 신랑이 신부집 혼례를 마치고 신랑 집으로 가고 있습니다.

전날 밤에는 신방 들기 전에 꺼꾸로 매달려 혼줄 났겠지요.

옛 결혼 풍습이 그리워지는 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난리 통에 결혼식을 올리는 모양인데, 아마 신랑이 군인인 듯합니다,
차에다 개통식이라 쓰 놓았는데, 무슨 고속도로 개통합니까?
잘 못하면 과부 만들지도 모르는데, 엔간히 급했던 모양입니다.

이경모선생의 사진으로 처음 사진은 1948년 전남광양에서 찍었고,
두 번째는 1951년 6월 부산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한 ’격동의 현장‘사진집에서 옮겼습니다.

전남순천 1948,10


무슨 철천지 원수졌다고, 같은 민족을 이토록 처참하게 죽일 수 있었을까?
공산주의가 뭐고 자본주의가 뭔지도 모르는 무지한 백성들이

무슨 이유로 죽이고, 죽임을 당해야만 했단 말인가.

주도권을 잡으려고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이승만이 나쁜 놈이지만,

이를 조종하는 미국과 소련놈들은 더 나쁜 놈들이다.

긴 세월동안 중국과 일본 놈께 당한 것만도 서러운데,

끈임 없이 외세에 시달려야하는 우리민족의 이 기구한 원한을 어찌 달랠꼬?

이 여수, 순천반란사건은 한반도가 남북으로 갈라지며 생긴 일이다.
이른바  “2,7 구국투쟁”을 선두로 제주도 4,3사건, “5,10 단선반대 투쟁”,

10월의 “여수, 순천 반란사건”, “대구 6연대 반란사건” 등 끈질긴 싸움들은,

결국 동족상잔의 비극인 처참한 한국전쟁으로 이어진 것이다.

1948년 4월, 제주도에서 일어 난  무장유격투쟁이 시발점이었다.

제주도가 소요에 빠져 있을 때, 여수에서 제주도 토벌을 위해 정부군 제14연대를 보내려했으나

그 사병들이 출동을 거부하며 벌어진 사건이었다.

48년 10월 19일에 일어 난 이 반란은 약 1주일간 여수와 순천, 광양, 곡성, 구례, 보성 지역을 휩쓸었다.

2,000여명의 사병들이 “일제 경찰타도, 제주도 출동거부, 남북통일 등의 구호를 내걸며

여수시내로 진입하며 불이 붙은 것이다. 


이승만 정권은 여수, 순천지역에 계엄령을 내리고, 반란군 토벌을 위한 전투사령부를 설치했지만,

토벌대의 일부가 반란군에 투항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 반란은  장갑차, 경비행기, 군함 등이 동원되고, 여수가 불바다가 된 후에야 진정되었다.

토벌군과  반란군 모두  2,000여명이나 죽는 이 엄청난 사태는 이승만의 욕심에 희생된 재물이었다.

토벌군에 밀려 난 일천여명의 반란군이 김지희, 홍순석의 지휘아래 지리산과 백운산으로 도피해

일단의 막은 내렸지만, 산발적인 싸움은 지루하게 이어졌다.

결국 남과 북이 갈라지는 분단의 고착화로 귀결되고 말았지만, 갈수록 그 냉전체제는 심화되고 있다.
문제는 그 지루한 싸움이 아직까지 끝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정말 우리는 슬픈 민족이다.


글 / 조문호


사진은 1948년 이경모선생께서 찍은 사진으로, '눈빛출판사'의 '격동기의 현장' 이경모사진집에서 옮겼다.


전남 순천근교 1948,10


전남 순천 1948,10 / 한 여인이 남편의 시신을 찾고있다.


전남 순천근교 1948,10


전남 담양 1951,2 / 부역혐의자들이 면사무소 창고에 수용돼 있다.

이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연좌제에 걸려 제대로 사회생활을 해 나갈 수 없었다.





“국제시장”이란 영화가 뜨면서 한 때 국제시장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영화에 나온 세트장도 비슷하긴 했지만, 당시의 실제 모습은 이랬다.

나 역시 그 당시엔 가보지 못했으나 70년대 부산 남포동 살 때, 자주 다녔다.
잘하는 보신탕집이나 잡화상이 쭉 들어선 시장 길이 생각나지만,

방향감각의 착오인지 영화에서는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 피난시절에 찍은 이경모선생의 사진을 보니 실감난 것이다.
다시 한 번 사진의 힘을 보았고, 사진의 역사적 가치를 확인한 것이다.

아래사진은 그 무렵의 자갈치시장인데, 참 정겹고 그리운 풍경이다.
1951년 6월에 찍은 사진으로,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한 이경모사진집 ‘격동기의 현장’에서 옮겼다.









‘A Rare Look at North Korea’


경직된 북한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진이다.
꿈 많은 어린소녀들이 무슨 죄로 전사로 내 몰려야 했을까?
핵실험으로 세계를 긴장시키는 북한의 상황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1974년 ‘내셔널 지오그래픽’기자로 북한을 취재했던 김희중씨는
박정희 정권의 ‘새마을 운동’을 취재한 적도 있었다.

1948년 전남 광양에서 찍은, 죽창을 든 소녀들의 모습도 섬뜩하다.


위는 김희중씨의 사진으로 ‘한국사진역사전’도록에서,

아래 이경모선생 사진은 '눈빛출판사' 격동기의 현장'에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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