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기억하려고…” 전문 작가에 전시회도

“무지개다리를 건넌 우리 아이를 그려주세요.” 고객이 보낸 알 듯 말 듯 한 메시지가 반려동물 그림작가 이수진씨(26)의 스마트폰 메신저에 도착했다. ‘무지개다리를 건넜다’는 말은 반려동물이 세상을 떠났음을 뜻한다.

이씨는 지난해 10월부터 반려동물과 가족들의 초상화를 그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고 있다. 죽은 반려동물을 그리워하거나, 현재 모습을 남기려는 이들이 이씨에게 그림을 의뢰한다. 이씨는 “요즘은 하루에 한 개꼴로 주문이 들어온다”며 “반려동물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어 그림을 그려달라는 분이 많다”고 말했다.

 

 

                                       이수진씨가 그린 고양이 초상화.

 


반려동물 문화가 예술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반려동물을 담은 회화나 사진작품이 대중적 인기를 얻는가 하면, 상업미술계에선 초상화, 피규어 등이 각광을 받고 있다.

김지윤씨(30)는 반려동물 전문 회화로 인기를 얻은 경우다. 지난 18~25일 서울 인사동에서 열린 김씨의 전시회는 주말마다 관객들로 성황을 이뤘다. 미술치료를 전공한 김씨는 유학생활 중 우연히 반려동물을 그린 후 ‘치유가 된다’는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접하고 동물 전문 작가가 됐다.

반려동물을 소재로 한 사진전과 사진작가(펫토그래퍼)도 등장했다. 사진작가 금혜원씨(35)는 지난해 반려동물의 죽음을 주제로 한 사진전을 열었다. 그는 한국과 일본, 미국을 오가며 반려동물의 장례식장과 화장터, 묘지, 납골당 등을 촬영해 화제를 모았다. ‘옵틱핸즈’씨(34·필명)는 반려동물과 인간의 교감을 주제로 한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반려동물을 실제 모습에 가까운 조각모형(피규어)으로 만드는 업체도 지난해 국내에 들어왔다. ‘샌디캐스트’는 1000여종의 원본틀을 바탕으로 조각모형을 제작하고 있다. 샌디캐스트 관계자는 “반려동물을 떠나보내고 닮은 견종을 모형으로 보고 위로받는 분도 있었다”며 “반려동물 조각모형을 예술품으로 인식하는 분들이 늘면서 구매자들이 증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윤정 동물행동심리연구소 폴랑폴랑 대표는 “모든 영역에서 일어나는 컨버전스가 반려동물의 영역에서도 확인된 것”이라며 “동물의 일방적인 희생을 통해 행복을 얻는 게 아니라 동물과 인간의 행복이 이어져 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경향신문 / 박용하·김원진 기자 ]

 

올해는 동강할미꽃이 예년보다 일찍 꽃망울을 터트렸다.
지난 22일 서울 전시를 마무리하고 정선으로 돌아 오다보니,
동강 벼랑으로 사진인들이 몰려들어 마치 촬영대회를 방불케 했다.

이맘때면 해마다 겪는 일이기는 하나 우리나라에 야생화를 찍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낀다.
아니면 사돈 따라 장에 가듯이, 남이 찍으니까 따라 찍는 것일까?

목적도 목적이지만, 예쁜 꽃을 보면 누구나 찍고 싶은 마음은 일기마련이다.
그런데 꽃이 좋으면 꽃만 찍지, 왜 상식에 벗어 난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
위험한 벼랑에 무리하게 기어올라, 꽃 주변에 있는 마른 풀을 뜯어내거나,
심지어는 아침이슬 효과를 노려 스프레이로 꽃망울에 물을 뿌리기도 한다.

곳곳에 물먹은 동강할미꽃들이 누렇게 변색되어 말라 죽고 있었다,
물론 모든 사진인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일부 몰지각한 사진인들의 추태가 전체 사진인들을 욕 먹이게 하는 것이다.
야생화 자체를 찍는 것이 아니라, 공모전이나 노리는 초보들 짓이 틀림없을게다.

야생화를 찍으려면 자연환경을 다치지 않게, 있는 그대로 찍어야 한다.
꽃도 좋지만, 꽃의 습성이나 주변여건을 함께 담아야 되기 때문이다.
꽃의 아름다움만 추구한다면 굳이 여비 들여 귤암리까지 올 필요도 없고,
화원이나 스튜디오에서 마음대로 연출해 찍으면 될 일이다.

아무튼 사진인의 자세가 되어있지 않고, 사진의 기본을 모르는 사람들 때문에
동강변으로 카메라를 가져 가기도 싫고, 사진한다는 말을 꺼내기가 민망스럽다.

동강할미꽃을 찍으러 정선 귤암리를 찾는 사진인들이여!
제발 사진에 앞서 자연을 먼저 생각하기 바란다.
부디, 사진하는 사람으로 부끄럽지 않게 처신해 주길 간곡히 부탁드린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8일은 일기예보대로 인사동에도 봄비가 내렸다.

촉촉하게 젖은 거리는 우산 행렬로 알록달록 정겨웠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발길 사이로 반가운 화상이 보인다.

분단의 아픔을 노래 해 온, 강화의 박진화화백이 아닌가.

 

비는 핑게고, 갈 길이 바빠 이야기도 못 나누고 헤어졌다.

 

인사동을 돌다 가장 기분 좋은 일이, 이런 우연찮은 만남이다.

인사동 유목민을 만나야 인사동 실체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오늘은 점심 때 먹은 반주로 몸도 마음도 봄비에 젖었다.

 

 

사진,글 / 조문호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고귀하다.

우리는 때로 사회적으로 서로를 나누며 서열과 가치를 매기곤 한다.
사진작가 조문호는 그 서열의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소외된 사람들에 렌즈를 돌린다.
강원도 두메산골 사람들을 찍거나 인사동 풍류객들을 조명하며 잘 알려지지 않은 세상을 살핀다.

작가 조문호가 지난 21일 출간한 책 '청량리 588'도 우리 사회의 주류에서
한 발짝 떨어져 나온 이들의 이야기다.

老작가를 만나다

'청량리 588'은 출간과 함께 지난 25일부터 10일까지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전시가 열렸다.

인터뷰를 위해 전시장에서 만난 조문호 작가는 진한 녹색의 외투와 갈색 모자,
그리고 보라색 스카프를 걸치고 있었다.

길게 삐져나온 머리카락과 입술 위 정리되지 않은 수염이 그의 자유로운 삶을 대변했다.

스스로를 70세에 가까운 노인이라고 지칭했지만 인터뷰 내내 눈을 지그시 마주하고,
가끔은 이야기 중 상념에 빠지거나 이를 드러내고 천진하게 웃는 모습이 어린 소년 같았다.

'청량리 588'은 1984년부터 89년까지 5년간 윤락녀들의 생활을 담은 사진들이다.
인터뷰는 사진을 찍으면서 겪었던 일들과 사진에 대한 생각, 그리고 철학을 담았다.

[ 작가와의 대화는 경어체였으나, 편의상 평어체로 작성되었습니다.]

 

 

80년대 홍등가 '청량리 588'

- 왜 많은 직업군 중 '윤락녀'를 촬영하게 됐는지?

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다. 다른 부분(직업군)은 다른 사진가들이 다 손을 댔다.

그런데 윤락가는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다.

자칫하면 이 부분은 묻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 83년도인가 동아미술제에서 사진부분 공모를 발표했다. 그 주제가 '직업인'이었다.

나도 그들을 직업인으로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기회에 한 번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같은 주제로 30년 전 전시회를 열었다가 금방 닫고, 올해 다시 전시를 가진 것으로 들었다.

시대상과도 관련이 있는가, 혹은 개인적인 이유인가?

그 전 전시는 사실 실패다.
전시를 하게 된 동기도 그들(윤락녀)의 목소리를 전하고 싶었고,

사람대접 받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오프닝 때도 그녀들이 참석하기로 했다. 자축하자고 했다.

그런데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하면서 선정적인 보도가 느니까 주눅 들었는지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실패라 생각하고 거들떠보지도 않고 처박아뒀다.

중간에 출판사에서 책을 만들자는 제의가 들어왔는데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다 30년이 지나니까 이것도 우리 사회의 기록이고 자료라는 생각이 들어 이번에 책을 내게 됐다.

그 때 그녀들을 보고 싶기도 하고...

- 30년 전 전시와 지금 전시 분위기가 다른가?

사진 선정부터 달랐다. 그 때는 주로 얼굴위주였다.

이번에는 책을 만들다보니 전체적 그림을 보여주는 사진을 선택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예술지상주의다. 나는 예술보다는 사람들의 삶을 더 좋아한다.

 

 

 

 

- 촬영 허가는 어떻게 받을 수 있었나?

직업여성이고 건달이고 마음 주면 안 통할 게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도 진정성이 보일 때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 아니겠나?


- 꽤 긴 시간동안 같이 생활을 했겠다.

거기를 찍기는 5년을 찍었어도, 살기는 5달 밖에 못 살았다. 왜냐면 방세가 비싸니까.

지금도 빈털터리지만 그 때도 돈이 없으니까. 다큐멘터리 작가는 가난하다.

그나마 5달도 있을 수 있었던 게 동아미술전에 작품을 출품했는데 대상을 받았다.

상금을 100만원 받았고, 동아일보에서 작품 산 돈도 받았다.

그 돈으로 방을 얻고 그 친구들에게 다 썼다.

결국 돈 더 쓰고, 그 집에서 나와 왔다 갔다 하면서 찍었다.

 

 

- 손님은 어떻게 촬영한 것인지?

손님들은 찍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걔들이 카메라 안보이게 제 몸으로 손님 눈을 가려줘서 찍을 수 있었다.

- 사진을 찍을 때 사진전과 책에 대한 계획이 있었나?

이런 다큐멘터리 사진들로 그녀들이 당당하게 나설 수 있었으면 했다.

그래서 그녀들도 동의했고. 그랬는데 막상 문을 여니 그렇지 않았다.

내가 왜 이 짓을 하나 싶었다. 불태워버릴까 했는데, 그냥 처박아두길 천만 다행이다(웃음)

- '청량리 588' 전시와 책을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그들을 불쌍하게 보지도 말고, 천하게 보지도 말아라. 그냥 같은 사람으로 대해준다면 좋겠다.

그리고 우려되는 점이 요즘은 SNS에 사진을 가볍게 올린다.

하지만, 그 진위가 왜곡되면 (성노동자에 대한) 모욕이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몸을 팔고 있는 것 아니겠나. 방법이 다를 뿐이지.

 

 

 

청량리 588'의 여인들

- 그녀들에 관해 시대의 희생양이라고 했는데?

그렇다. 단지 부모를 잘 못 만난 죄 뿐이다. 거기에 가고 싶어 간 사람이 누가 있겠나?

- 지금 연락되는 분은 없는지?

아무도 없다. 요즘처럼 핸드폰이 있고 하면 어떻게 해서든 다 연락이 됐을 텐데....

-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는가?

정숙이. 걔가 도움을 많이 주었다.

어느 날 정숙이와 다투어 방에 가보니, 촛불을 켜놓고, 몇 시간 동안 말을 안 하고 앉아있더라.

참! 힘든 고문이었다. 걔는 시간이 돈인데, 손님을 안 받고 있으면, 그 부담을 고스란히 자기가 물어야해

생활은 더 어려워지니까.


 

 

 

 

 

- 힘들었던 만큼 애착이 가겠다.

그렇다. 어제는 매체에서 기자들이 와서 현장에 한 번 가보자고 했다.

가보니까 서너 집만 남은 줄 알았는데, 더 많은 것 같더라고...

물론 낮이니까 영업 안하는 집도 있겠지만, 낮에도 몇 사람 나와 있고 그랬다.

심지어 60이나 먹은 노인도 오고 20대 총각도 오고 다양한 사람이 왔다 갔다 했다.

그런데, 지구상에 인간이 있는 한 (윤락행위는) 없을 수 없다.

 

어제 갔을 때도 가슴이 먹먹했다.

30년이 지나도 하나도 바뀐 것이 없다 싶었다. 사회적 시선이나 그네들 삶이나...

사람을 찍는다,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조문호

- 사진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사진 할 생각 없었다. 부산에서 음악주점을 하고 있었는데 우리 집 단골로 사진작가 최민식 선생이 있었다.

어느 날 선물로 '휴먼 1집'이라는 개인사진집을 주더라. 보니까 이거 '백 마디 말보다 한 장의 사진이 더 강하다'는

것을 말하더다. 그래서 사진을 시작하게 됐다. 사진이라는 게 돈이 안 된다. 다큐멘터리 사진은 더하다.

그래도 나는 가치 있다고 생각하니까 (계속 한다).

- 다큐멘터리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가 있다면?

최민식씨 사진의 초점이 사람들이었다. 보통 사진가들을 보면 주변의 기록을 너무 우습게 안다. 

가족은 물론, 사진 행사에도 카메라 가지고 오는 작가가 별로 없다.

그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데 그건 아니다. 그 또한 세월이 지나면 중요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나는 인사동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술을 마셔도, 아무리 취해도 카메라를 떨어트리지 않는다.

카메라가 막걸리에 얼룩져 그렇지, 항상 내 손에 잡혀있다.

 

 

 

 

-사진작가가 되지 않았다면 무엇을 하고 있을지??


정처 없지 뭐. 지금 아내 만나기 전엔 실패도(이혼)했다.

지금은 같은 다큐멘터리 사진가를 만났다. 생각이 같으니까 너무 좋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오늘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마누라는 장터만 30년 찍었다. 돈 떨어지면 인사동에서 개기고(웃음)

가난하면 아내가 힘들지만, (많은 사진들이 있으니까) 나는 항상 부자라고 생각한다

 

 

 

 

- 조문호에게 카메라는 어떤 의미인가?

카메라는 기계일 뿐이다. 화가로 치면 붓이랑 마찬가지다. 자기 이야기를 담아낼 뿐이다.

그래서 무슨 렌즈고 그런 거 아무 필요 없다. 자기 손에서 편하게 찍을 수 있는 카메라면 좋다.

- 다음 작품으로 준비 하고 있는 것은 있나?

지금 하는 것도 마무리 못하고 있는데 무엇을 찾고 있겠나(웃음).

인사동과 장터도 계속 찍어야 하지만, 청량리 588도 철거할 때까지 기록해야  한다.

- 꿈이 있다면?

개인적인 꿈은 없다. 나는 행복하니까. 큰 꿈이 있다면 다들 잘 산다면 좋겠다.

돈이 많다고 잘 사는 건 아니다. 주변에 돈 많은 친구들은 나보다 걱정이 더 많다.

돈 때문에 머리를 싸맨다. 그런 거 보면 다행이다 싶을 때도 있다.

 

일단 집안이 편하고, 자기 하고 싶은 거 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 못 하는 게 제일 불행하다.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살겠나. 죽고 나면 아무 소용없다.

주위 친구들 죽는 거 보면, 그렇게 아웅다웅하며 살다 죽을 때, 뭘 가져가나 싶다.

가족들끼리 원망하고... 그래서 옛 노래 말에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가 참 솔직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제발! 자유롭게 열심히 일하고, 재밌게 놀아라.

 


작가의 눈은 깊었다. 정숙이를 이야기할 때나 꿈을 이야기할 때 그의 눈은 청년처럼 반짝였다.

'직업을 불문하고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다'고 일흔의 노작가는 말했다.

'붉은색 조명 아래 그녀들은 언제쯤 세상의 차가운 시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http://www.youtube.com/watch?v=Pau-zvFYzio

 

[MBC 인터뷰 내용 중 어휘가 잘 못되거나 내용이 충실하지 못한 것은 일부 수정했다 /사진가 조문호 ]

 

날씨는 봄인데, 나들이객들의 옷차림은 아직 한 겨울이다.
어저께만도 추워 싸매고 다녔는데, 곧 바로 여름으로 접어드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

지난 16일 오후6시 무렵, 카메라를 메고 사냥꾼의 심정으로 인사동을 돌아 다녔다.
약속시간이 좀 이른 것 같아, '툇마루‘ 앞 벤취에 앉아 담배 한 대 피워 무는데,
카메라 화인더에 반가운 분들이 등장했다.

강선화씨와 김구, 임경일씨가 골목에 접어들며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힌 것이다.
반가워 ‘툇마루’에서 막걸리 한 잔 했는데,

임경일씨는 ‘청량리588’ 책에 사인해 준 내용을 핸드폰으로 찍어 보여주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들여다보니 “마누라 열심히 꾹꾹 눌러주세요”라고 적혀 있었는데, 취중에 쓴 글이라 기억도 없었다.

‘화신포차’에서 빨리 오라는 전화가 득달같아 오래 머물 시간은 없었다.
약속장소에는 장경호씨와 배성일씨가 먼저 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장경호씨의 모습이 확 달라졌다. 취기가 올라 홍조 뛴 얼굴에 부티가 났다.
이야기인 즉 선, 없었던 치아를 복구해 제 모습을 찾았다는데, 참 부러웠다.
나도 썩어 문드러진 이빨 다 뽑아버리고, 틀이라도 해 넣으면 좀 나아질까?

뒤이어 장 춘씨가 합류해 ‘무다헌’으로 자리를 옮겼다.
무반주로 노래까지 한 곡씩 불렀으나, 오래 버틸 수가 없었다.
전시기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술을 마셔서 그런지, 요즘 조금만 취해도 맥을 못 춘다.
늦게까지 마셔야하는 장경호씨가 마음에 걸렸으나, 장 춘씨와 먼저 일어났다.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들려는데, ‘인사동사람들’로 옮겼다는 장경호씨의 기별을 받았다.

사진, 글 / 조문호

 

 

 

 

 

 

 

 

 

 

 

 

 

 

 

 

 

 

 

 

 

 






[시사저널 NO 1326,  2015.3.17-3.24]

 


사물의 자세 : 마치•단지
난다展 / Nanda / 卵多 / photography

2015_0311 ▶ 2015_0324

 

난다_사물의 자세 4_잉크젯 프린트_100×125cm_2015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20512g | 난다展으로 갑니다.

난다 홈페이지_nandachoo.com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3월 24일은 12:00pm 까지 관람가능

 

갤러리 나우GALLERY NOW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39(관훈동 192-13번지) 성지빌딩 3층

Tel. +82.2.725.2930

www.gallery-now.com

 

 

『사물의 자세: 마치•.단지』작업은 형상과 실제의 분리될 수 없는 관계, 사진행위와 대상에 관한 성찰이며 인간이 사물로 취급되는 세태에 대한 비감의 표현이다. 개별성의 환상 ●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 공원의 언덕은 어김없이 아이의 성장을 기록하는 부모와 결혼을 앞둔 연인의 무대가 된다. 개별성의 환상을 위해 고용된 사진사들이 역광과 아웃포커스를 이용해 의뢰자가 제대로 주인공이 되는 사진을 얻을 수 있는 이 시간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개별성의 절박한 행위-사진은 고용된 사진사들의 포트폴리오나 의뢰자의 SNS게시판을 통해 한결같음을 양산한다. 개별성은 실패한다. 애초에 그러한 사진행위는 시류에 편승하여 소외되지 않으려는 동일성을 목적했는지도.

 

난다_사물의 자세 6_잉크젯 프린트_100×80cm_2015

난다_사물의 자세 7_잉크젯 프린트_100×80cm_2015

 

난다_사물의 자세 8_잉크젯 프린트_100×80cm_2015
 

시선과 자세 ● 인간을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로 인식하는 근대성은 사진기계에 의해 극대화 되었다. 사진을 찍을수록 시간의 구조를 정복할 수 있다는, 대상을 분석할 수 있다는 사진의 자만에 혐오감과 죄책감을 느낀다. 시선의 대상이 되는 상황은 언제나 불편하다. 내가 나 자신임을 증명하기 위해 자세를 취하는 찰나의 순간조차도 고정된 자세의 틀에 몸을 맞추려는 시도는 시선의 주인이 만족할 때까지 반복된다. 대상이 시선을 의식하지 못한 채 기록된 사진 또한 마찬가지다. 방어의 기회를 주지 않은 공격은 반칙이다. 대상이 그 형상과 분리될 수 없기에 어떤 대상이든 형상화하는 것, 되는 것에 조심스럽다.

 

난다_사물의 자세 5_잉크젯 프린트_80×100cm_2015

 

난다_사물의 자세 2_잉크젯 프린트_125×100cm_2015

난다_사물의 자세_잉크젯 프린트_125×100cm_2015

 

사물화 ● 사진기피는 사회기피로 확대되어 일상을 변화시켰고 전과는 다른 방식의 작업 작업을 모색하게 되었다. 나와 닮았다고 생각되는 5살의 조카를 모델로 만든 구체관절인형은 (마치) 나의 분신처럼 보일 수 있으며 이제 막 기관에서 사회적 훈련을 시작한 5살 조카일 수도 있고 누구도 아닌 점토덩어리일수도 있다. 인형은 사물화 된 인간을 표현한다. 이 작업이 (단지) 사물의 구성으로만 보이지 않고 변태적이고 폭력적이어서 불편하다면, 형상이라는 실제의 대체물이 실제와 분리될 수 없음을 증명한 셈이다. ■ 난다

 

난다_셀카붕붕_잉크젯 프린트_120×160cm_2014

 

난다_다이어트를 위한 장보기_잉크젯 프린트_100×80cm_2014

난다_무대 뒤_잉크젯 프린트_100×80cm_2014

 

2014년 제6회 갤러리 나우 작가상은 난다(Nanda)와 막스 드 에스테반(Max de Esteban)이 선정되었다. 총 67명의 국내외 작가들이 포트폴리오를 제출하였으며, 1차 심사에서 18명, 2차 심사에서 5명으로 압축되어, 3차 최종 본심에 오른 5명의 작가 중에서 국내작가로서 난다, 해외작가로서 막스 드 에스테반이 최종적으로 선정되었다. ● 국내작가상 수상자 난다의 작품 「기념일(The day)」은 이미 오래전 「모던 걸」로 한국사진에서 검증이 끝난 작가답게 작품성이 뛰어났다. 한국의 현대적 삶에서 투영되는 국적불명의 기념일의 의미와 기념사진의 의미를 통시적으로 투사한 콘셉트도 좋았고 그것들을 구현해내는 창의적인 무대구성과 연출능력도 나무랄 데 없이 좋았다. 특히 현대인들이 만든 온갖 기념일들이 그들의 심층에 자리한 욕망의 병리적 실체를 반영한다는 주제의식은 시의성이 있었다. 기념에 대한 연극적 요소를 극대화시키는 구성력, 실천력 여기에 개성적인 표현성까지 검증된 국제적인 수준의 작가라는 것이 높이 평가되었다. ■ 진동선

 

 

Vol.20150313d | 난다展 / Nanda / 卵多 / photography

 

 


[인터뷰] 1980년대 홍등가 풍경 찍은 사진작가 조문호

 

 

송화선기자 spring@donga.com

 

 

1983년, 사내는 서른여섯 살이었다. 뒤늦게 시작한 사진 작업에 빠져 부산살림을 정리하고 서울에 온 지 1년쯤 된 참이었다. ‘월간사진’ 편집장을 맡으며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가족의 이해는 얻지 못했다. 지독한 가난과 남편의 무심함에 지친 아내는 아이를 데리고 부산으로 떠나버렸다.

 

“생각해보면 삶의 나락이었죠. 그때 여기서 위로와 안식을 얻었어요.”

 

어느새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된 사내와 바로 그곳,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 588번지(답십리로 11길) 근처 한 카페에서 마주 앉았다. 당시 서울 제일의 홍등가로 손꼽히던 곳, 3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젊은 여인들이 색색의 등불아래 서서 오가는 사내들을 불러들이고 있는 이른바 '588'이다.

 

조문호 작가(사진)는 젊은 날 그 거리에서 자신의 소매를 붙드는 여인들과 인연을 맺었다. 신세타령 듣고 속내를 나누다 몸과 마음까지 주고 받았다. 그렇게 1년여간 부대낀 기록을 동아미술제에 출품해 1985년 사진 부문 대상을 받았다. 조 작가를 만난 건 당시 기록들을 모아 지금 서울 인사동에서 사진전 '청량리 588'을 열고 있기 때문이다. 눈빛출판사에서 같은 제목의 사진집도 펴냈다.

 

588의 직업인 

 

30년 전 그가 남겨둔 기록의 더께를 열었다. 그 안에 담긴 건 누구나 볼 수 있는 뻔한 뒷골목 풍경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그늘 중에서도 가장 음습한 곳., '집창촌'이라 불리는 그 거리에서 먹고 자고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만져질 듯 생생히 담겨 있다.  조 작가는 " 그 해 동아미술제 사진 주제가 '직업인'이었다. 나는 588 여인들'이야말로 이 주제에 적합한 피사체라고 여겼고,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꾸밈없이 찍고자 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의 카메라 앞에 선 여인들은 열심히 '일'하고, 대가로 받은 돈으로 생계를 꾸리며, 남는 것은 알뜰히 모아 고향 어머니에게 부치던 이들이었다. 한 여인은 그의 작업에 대한 얘기를 듣고 "직업인이라는 주제가 마음에 든다"며 여기서 일하는 게 다른 건 다 괜찮은데 나를 구더기처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견디기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이들의 도움 덕에 조 작가는 여인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화장을 고치고 '직업적 노동'을 수행하는 순간의 모습가지 렌즈에 담았고, 그중 6점을 동아미술제에 출품했다. 1985년 3월 19일자 '동아일보'는 조 작가의 동아미술제 대상 수상 소식을 전하며 '홍등가'는 감히 어느사진가가 손대기 어려운 상황 하의  직업인을 심층적으로 깊이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진이었다'고 평했다.

 

그동안 어느 누구도 촬영하지 못한 뒷골목 사람들의 삶을 낱낱이 기록한 건 분명히 작업의 장점이었을 것이다. 그중 몇몇 작품은 센세이셔널하기도 하다. 그러나 많은 사진 중에서 가장 눈에 띈 건 오히려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차분히 앉은 채 정면으로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는,  마치 렌즈 너머 작가를 응시하는 듯 보이는 한 여인의 표정이었다. 조 작가는 그 사진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 아이가 바로 정숙이"라고 했다.  처음 그의 작업에 공감을 표했고, 친구들을 소개하며 적극적으로 응원해 준, 조 작가가 지금도 잊지 못하는 한 여인의 이름이다. 조 작가는 최근 펴낸 사진집 서문에 '정숙아! 혜련아! 당신들의 모습이 담긴 이 사진집을 혹시 보게 되면 내게 연락 한 번 주렴, 내 비록 거지 처지일지라도 소주 한 잔 살게'라는 편지를 남겼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고 함께 청량리 거리를 걸으면서도 '혹시 정숙이가 여기서 뭐라도 하며 살고 있는 건 아닌가 몰라요"하며 주위를 휘휘 둘러보곤 했다.

 

한국 현대사의 뒷골목

 

"우리는 그 시절, 이 작업을 통해 588에서 일하는 여인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없앨 수 있기를 바랐어요. 하지만 현실의 벽이 높았죠. 1990년 프랑스문화원에서 '전농동 588번지 기록전'이라는 사진전을 열면서 이 여인들을 초대한다고 하자 언론의 관심이 온통 여인들에게만 집중됐어요. 결국 아무도 전시회에 오지 못했고, 제 시도가 실패했다는 걸 인정해야 했습니다.

 

그날 이후 조 작가는 588에 가지 않았다고 했다. '정숙이'도 만나지 못했다. 자신의 의도가 세상 안에서 왜곡돼 그들에게 상처로 남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 기억 때문에 그동안 촬영한 사진과 필름도 꺼내 보지 않았다. 최근 588을 다시 떠올리게 된건, 곧 그 공간이 영영 사라진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조문호사진작가의 사진 속에는 1980년대 '588'에서 살아가던 이들의 민낯이 생생히 담겨 있다.

 

 

2012년 12월, 서울시는 전농동 588번지일대 재정비 계획을 세웠다. 예정대로라면 2017년에는 그 자리에 60층 높이의 초고층 건물이 들어서고, 주상복합 마천루들이 주위를 두르게 된다. 마침 출판사로 부터 사진집 출간 제의를 받은 조 작가는 이번엔 거절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한국 현대사의 한순간을 담은 기록으로 이 작업을 세상에 꺼내 보이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야, 자신만큼이나 노인이 됐을 그 시절 여인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본다고 했다.

 

10년 전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정영신씨와 결혼해 가정을 꾸린 그는 요즘 평생에서 가장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인생의 굴곡을 함께 건넜던 이들도 부디 행복했으면 하는 게 조 작가의 바람이다. 그리고 사진작가로서, 588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 다시 한 번 뒷골목 풍경을 기록해두고 싶다는 꿈도 갖고 있다. 이제는 30여 년 전 그 시절처럼 그들 안에 들어가 부대끼며 살아갈 수는 없겠지만, 기록자로서의 구실은 다하고 싶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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