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예술’ 발행인 이, 취임식이 있었던 지난 2일, 많은 사진가들을 만났다.
행사장인 코리아나호텔에서 한정식, 육명심, 전민조, 최경자선생과 같이 나왔으나
이내 뿔뿔이 헤어졌다.

육명심선생만 인사동까지 함께 하셨는데, "가까운 곳에서 차 한 잔 하자"며
박대조씨의 'Where do we go now'전이 열리는 ‘나우갤러리’로 올라 가셨다.

그 곳에는 행사장에서 만났던 이순심관장을 비롯하여 사진가 박하선, 박종우,
김현숙, 정면주 교수 등이 먼저 와 환담을 나누고 있었고, 나중에는 곽명우씨도 왔다.

때 만난, 육명심선생의 강의가 발동되었다.
내조를 잘 해주시는 사모님 이야기에서부터 근대사진사까지 거침없었다.
일전에 들었던 말씀이거나 아는 내용도 있었지만, 사진가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강의였다.

‘다큐멘터리사진은 무엇보다 설득력이 필요하다며 말씀을 끝내셨다.
사진가보다 사진교육자로서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사진,글 / 조문호

 

 

 

 

 

 

 

 

 



 

'연락 좀 하고 삽시다'

 

요즘 사진가들을 만나면 자주 듣는 말이다.

지난 번 두 차례나 전시회를 가졌지만, 연락처를 몰라 사우들에게 알리지 못했는데,

모두들 만나기만 하면 ‘왜 연락하지 않았냐’는 추궁을 받는다.

 

사실 10여년 동안 사진계와 담을 쌓고 지냈다.

연락처를 아는 분으로는 이명동, 한정식, 육명심선생, 그리고 엄상빈, 조성제, 김상현, 이수만,

곽명우씨 등 열 손가락 안 밖이다.

사진 찍느라 장에 쫓아다니기도 바빴지만, 틈만 나면 인사동 가느라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주소나 전화번호가 모두 바뀌었으니 전시안내를 받을 수도 없지만,

신문이나 잡지 한 권 사보지 않았으니 누가 어디에서 무슨 전시를 하는지 도통 모르고 지낸 것이다.

그러니 사우들의 연락처를 알아낸다 해도, 남의 전시는 가지 않으며 초대하기가 그래 생략했다.

그러나 장터작업을 마무리하고 나니, 앞만 보고 달린 게 후회스럽기도 하다.

그 오래된 인연들을 칼 같이 끊고 내 일에만 메 달렸으니, 이 또한 전형적인 개인주의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요즘은 사진전이나 사진 모임에 부지런히 다니며, 사진인들과 연락처 주고 받는게 일이다.
뒤늦게 사진잡지도 사보며 아는 분들의 전람회를 찾아다니는데, 모두들 죽은 사람 만난듯 반가워한다.

아! 이게 사는 재미 아닌가...

 

사진,글 / 조문호

 

 

 

 

 

 

 

 

 

 




1980년대 중반 이태원의 밤 문화를 기록한 사진가 김남진(58)씨의 “이태원의 밤” 사진집이 눈빛사진가선 12집으로 출간됐다.

사진집 출판을 기념하는 사진전은 4월 3일부터 14일까지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02-2269-2613)에서 열린다.


 

 

28년이란 시간을 간직한 빛바랜 사진들이 눈빛출판사의 열정어린 집념으로 세상에 공개되었다.

이 사진들은 87년도 ‘파인힐 화랑’에서 전시를 했지만, 그 이후 안타깝게도 필름을 몽땅 잃어버렸다고 한다.

사진집 “이태원의 밤“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87년 전시회 때 인화해 두었던 사진을 스캔해서 만든 것이란다.

이번 전시회에 내놓은 작품은 지구상에서 단 한 장뿐인 오리지널 프린트라 그 가치가 더욱 소중하다.

지난 3일 개최된 사진전 개막식에는 김남진씨를 비롯하여 윤주영, 주명덕, 구자호, 이규상, 이갑철, 엄상빈, 김보섭,

안미숙, 제이 안, 이규철, 남 준, 이광수, 곽윤섭, 곽명우, 박중하, 강재욱, 양시영, 나떠구, 윤은숙, 서지영, 박신흥,

안해룡, 이한구, 장 숙, 최재균씨 등 많은 사진인들이 참석해 전시를 축하했다.

 

사진,글 / 조문호

 

 

 

 

 

 

 

 

 

 

 

 

 

 

 

 

 

 

 

 

 

 

 

 

 

 

 

 

 

 

 

 

 

 

 

 

 

 

 

 

 

 

 

 

 

 

 

 

 

 




 

 

1980년대 중반 서울 용산구 이태원의 밤 문화를 기록한 사진가 김남진(58)씨가 『이태원의 밤』(눈빛출판사)이란 제목의 사진집을 출간했다.

당시 27세였던 김씨는 서울 최고의 유흥가였던 이태원을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지금의 이태원은 누구나 즐겨 찾는 ‘핫 플레이스’지만 80년대의 이태원은 평범한 젊은이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니었다. 외국인과 혼혈인, 성 소수자들의 놀이터였고 나이트·디스코클럽, 게이바가 즐비했던 유흥가였다. 서울사람조차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야 했던 낯선 공간이자, 우리 땅이면서 미국 땅 같은, 그야말로 ‘포토제닉’한 공간이었다.

김씨는 84년부터 86년까지 일주일에 2~3번씩 이태원의 길거리와 업소를 찾아다녔다. 처음에는 이곳 이미지에 휩쓸려 환락의 거리를 찍었다. 뱀쇼·봉쇼·스트립쇼부터 번쩍이는 불빛 아래 춤추는 무희들, 술에 취한 여장남자, 불나방 같은 하룻밤의 쾌락을 카메라에 담았다.

하지만 이내 “이곳 역시 평범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업소에서 ‘영계’라 불리는 젊은 여자들과 웨이터들은 대부분 가난을 물리치고자 시골에서 상경한 사람들이었고 이들에게 이태원은 단지 치열한 일터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또 “잠시나마 지루한 일상에서 일탈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눈요기와 말초신경을 위한 감정의 해방구일 수 있지만 이곳 사람들에게는 새로움에 대한 기대도 격양된 흥분도 찾기 힘든 황폐한 땅이었다”고 고백했다. 이곳 사람들은 어느덧 익숙해진 김씨와 그의 카메라에 경계심과 거부감을 풀고 자연스러운 모습을 드러냈다.

함부로 카메라를 꺼낼 수 없는 곳에서 용기 내 찍었던 이 사진들은 당시엔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쉽게 발표할 수 없었다. 일부 사진들이 87년 4월에 열린 전시에서 빛을 봤지만 이후 안타깝게도 김씨는 필름을 몽땅 잃어버렸다. 사진집『이태원의 밤』은 전시를 위해 인화했던 사진을 스캔해서 만든 것이다. 28년의 시간을 간직한 빛바랜 사진들은 3일부터 열리는 출판기념전을 통해 소개된다. [사진 김남진]


◇김남진 사진전 ‘이태원의 밤’. 4월 3일부터 4월 14일까지.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 B1. 02-2269-2613



중앙일보 / 한영혜 기자 han.younghye@joongang.co.kr

 

다큐사진가 이갑철씨 '제주 1980’

한국인의 역동적인 신명과 삶의 기운을 포착해온 다큐사진가 이갑철(56)씨가 1980년대초 찍었던 제주 작업을 처음 대중 앞에 내놓았다. 서울 강남의 사진대안공간 스페이 22에서 1일 막을 올린 <바람의 풍경, 제주 천구백팔십>이란 제목의 개인전이다.

84년 첫 개인전 <거리의 양키들>로 데뷔하기 전인 79~84년 그가 제주에서 찍은 사진 48장을 선보인다. 뭍의 관광객들이 막 몰려들던 그 시절 제주의 여러 빛바랜 풍광들이 눈에 감기는 작품들이다. 작가는 섬의 풍광과 사람들 틈새로 스며드는 바람의 흔적들까지 포착했다. 언덕에 서서 수평선을 향해 옷을 휘날리며 기원하는 중년 남자의 모습과 잔디밭을 걷는 아녀자의 너풀거리는 옷자락 등이 바람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2002년 사진계를 뒤흔든 전시 <충돌과 반동> 이래 작가의 등록상표가 된 흔들리는 화면과 기울어진 사선 구도, 초점 없이 흩어지는 대상 등의 특징이 초창기 사진 속에 이미 엿보인다는 점도 흥미롭다.


이씨는 “제주에서 마음을 강하게 끌었던 게 바람”이라며 작가노트에 썼다. “바람은 끌고 당기는 힘의 역항을 이루며 제주섬 어디에나 내재되어 있었다. 그 긴장감이 좋았다…이 사진들은 삼십여년 전 내가 바라본 바람의 풍경들이다.”


서울 청량리 588 사창가의 80년대 풍경과 삶을 담은 조문호씨, 84~86년 찍었던 이태원 유흥가 작업을 풀어낸 김남진씨의 전시에 이은 80년대 재조명 흐름의 하나다. 이씨는 지난달부터 부산 고은사진미술관에서 1년간의 부산 작업을 모은 <침묵과 낭만> 전시도 하고 있다. 열화당에서 이번 전시와 같은 제목의 사진집(80쪽)도 나왔다. 전시는 24일까지. (02)3469-0822.

[한겨레]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지난 4월2일 정오무렵, 월간 '사진예술' 발행인 이, 취임식이 코리아나호텔 7층에서 열렸다.

 

 '사진예술'은 1989년 5월, 원로사진가 이명동선생께서 창간한 전통 있는 사진 잡지다.
지난 2001년 후배 사진가 김녕만씨에게 물려주어 올해로 26년(통권312호)째 발행되어왔다.

그동안 사진예술'을 운영해 온 김녕만씨가 매너리즘에 빠진 잡지를 새롭게 발전시키기 위해

후배 사진가인 이기명씨에게 다시 넘겨줌으로서, 아름다운 대물림이 이어지는 의미 있는 자리가 만들어 진 것이다.

사진가 이기명씨는 '유로크레온'과 '한국매그넘에이전트'를 운영하며 굵직한 전람회를

여러차례 기획해 사진도 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능력 있는 기획전문가다.

'오래된 것은 새롭다'라는 의미 있는 캐치프레이드를 내 걸며 펴낸 '사진예술' 4월호에는

그동안 '사진예술'에 게재되었던 중요 내용들을 특집으로 요약했는데,

그것은 한국사진의 흐름과 변화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사진사였다.

봄기운이 물씬 느껴지는 녹색 넥타이로 단장한 창간인 이명동선생께서 제일 먼저 단상에 오르셨다.

올 해로 아흔 여섯을 맞은 연세지만, 아직 짱짱하시다. 아름다운 인연에 대한 말씀도 주셨고,

평소 주장과 배치되어 마음에 없던 '사진예술'이란 제호를 붙였던 그 뒷이야기도 들려주셨다.

이. 취임을 축하하는 원로사진인 한정식선생과 이재구교수의 축사도 이어졌다.

2대 편집인 김녕만씨는 “물려주신 분, 물려받으신 분 모두 귀한 인연이라 나는 참 복 많은 사람”이라고 자랑하기도 했고,

이기명 신임 편집인은 “두 분의 뜻을 받들어 지역 간 편차를 줄이는 전국적인 잡지, 세계 사진문화 교류에 앞장서는 잡지,

사진계의 건전한 비판과 소통에 힘쓰는 잡지로 만들겠다”며 야심찬 다짐을 했다.

소리꾼 장사익씨는 “사진예술’을 이끌어온 김녕만씨의 아내 윤세영씨의 고운 마음에 바친다”며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를 불러 박수갈채를 받았고, 그의 애창곡 '봄날은 간다'를 간드러지게 부르기도 했다.  

 

사진가 윤주영선생의 건배사로 시작된 오찬 분위기는 봄날처럼 따사로웠다.

이 날 이, 취임식에는 창간인 이명동선생을 비롯하여 김녕만, 이기명, 윤세영, 윤주영, 한정식, 육명심, 황규태, 전민조, 장사익, 김달진, 예진수, 정재숙, 김정은, 최경자, 제이 안, 양성철, 구자호, 엄상빈, 최광호, 김승곤, 이갑철, 이주용, 양재문, 이순심, 이규상, 안미숙, 임향자, 심상만, 양재헌, 손영자, 김영수, 양종훈, 박종우, 박하선, 곽명우씨 등 200여명이 참석해 이,취임식을 축하하며 '사진예술'의 발전을 기원했다.

사진,글 / 조문호


 

 

 

 

 

 

 

 

 

 

 

 

 

 

 

 

 

 

 

 

 

 

 

 

 

 

 

 

 

 

 

 

 

 

 

 

 

 

 

 

 

 

 

 

 

 

 

 

 

 


 

F.OUND ISSUE > #56 April, 2015   by F.OUND / 2015.04.15
에디터 > 최인희   포토 > 정재호 사진 제공 > 조문호  

 

 

그래도 사람
CHO, MUNHO

 
역사의 시작과 끝에는 조문호 작가가 있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홍등가 청량리 588번지와 87민주항쟁을 비롯하여 ‘동강백성들’, ‘태풍 루사가 남긴 상처’, ‘두메산골 사람들’, ‘인사동 그 기억 풍경전’ 사진전 등을 열었고, 그 외에도 천상병 시인과 전국의 500여 개가 넘는 장터를 기록하기도 했다. 조문호 작가를 만나기 전, 친한 선배에게 그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진심으로 돌아오길 바란다. 그때 그 사람들도 보고 싶고, 그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도 듣고 싶다. 이제 더 이상 죄의식을 가지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지금도 가난하지만, 그 시절 연인과 동생들이 오면 소주 한 잔 받아주고 싶다.” 이 글귀는 전시회장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사진을 보고 있을 무렵 한 신사가 다가와서 막대사탕을 건넸다고 한다. “이거 먹으면서 봐요” 따뜻한 미소에 달달한 사탕까지 ‘청량리 588’ 전시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을 법했지만, 이내 그녀 또한 사진에서 따뜻한 시선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끝내 막대사탕을 건넨 신사가 작가님이라는 것을 알고 아쉬웠다고 감상을 전했다.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막대사탕 맛이 궁금해 전시회장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동대문구 전농동 588번지]

 

가난이 지겨워 무작정 상경한 서울에서 그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돈을 벌고자 곳곳을 떠돌았지만, 결국 떠밀리듯 사창가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급격한 산업화로 인해 빈부 격차는 날로 심해졌고, 없는 집에서 자란 죄 없는 여성들은 빚을 갚기 위해 몸을 팔았다. 전농동 588번지는 대표적인 홍등가이기도 하지만, 시대의 민낯이 투영된 곳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의 암흑기였던 군사독재 시절 그들은 정화되어야 할 1순위의 인간들이었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그녀들의 꿈은 빨간빛에 으스러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지난달 25일부터 3월 10일까지 아라아트센터에서 ‘청량리 588’ 전시가 열렸다. 이는 1990년 프랑스 문화원에서 초대전을 연 후, 조문호 작가의 두 번째 전시다. 당시 매춘에만 관심을 가지는 언론의 행태에 화가 난 작가는 다시는 이 필름을 꺼내지 말자고 다짐했다. 자극적인 소재로 소비돼 그녀들의 삶이 왜곡되는 게 싫어서였다. 그는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냈지만, 그것 또한 반드시 넘어서야 할 우리 시대의 민낯이라고 말했다.

 

 

 

필름을 영영 공개하지 않으려고 하셨다구요. 
불태워 버리려고 했어요. 안 태우길 천만다행이지. 

공개하길 잘한 거 같으세요? 
예, 언젠가는 발표되어야 할 사진이었어요. 

전시회를 지켜보면서 무슨 생각이 드셨어요? 
이번 전시는 처음 전시보다 좀 달랐다는 걸 느꼈어요. 기성세대의 편견 가득한 시선은 바꿀 수 없었지만, 오히려 젊은 친구들이 긍정적으로 보더라구요. 성노동자 모임이나 그 분야에서 종사하는 사람들도 많이 왔어요. 와서 성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만든 책을 주면서 자기 이야기도 하고. 그런 걸 보면서 정말 세상이 많이 바뀌었구나 싶었어요. 아쉽긴 하지. 자기도 서먹서먹하고, 나도 서먹서먹해서 책 받고 기념사진 찍어주고 끝나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았을걸. 

작가님 말씀을 들으니 세상이 좀 변한 것 같은데요. 사실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는 이전보다 더 보수적으로 변했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막는다고 될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보면 우리나라처럼 폐쇄적인 나라도 없어요. 지구 상에 인간이 있는 한은 존재할 수밖에 없는 문제거든요. 의도적으로 막는다고 될 일도 아니고, 일하는 사람들을 범죄자처럼 취급하는 시선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날로 소재주의가 심해지고 있잖아요. ‘성노동자’라는 타이틀만 보고 외설적으로 보는 시선이 생기기도 해요. 
그 당시에도 그랬어요. 너무 소재주의 아니냐고. “맞다, 이게 소재주의라서 안되면 누가 기록 할 거냐?” 그랬죠.

누가 기록했으면 모르겠는데, 아무도 안 하잖아요. 


사진을 찍기 위해 588번지로 들어가서 함께 생활하셨잖아요. 그렇게까지 집요하게 청량리를 담으려는 이유는 뭐였어요? 
처음에 작정을 하고 가봤어요. 근데 찍을 상황이 아니더라고. 살벌해서 접근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근데 마침 동아일보 신문에 사진 공모가 났는데, 주제가 직업인이었어요. 아, 그럼 이걸로 해볼 수 있겠다 싶어서 찍기 시작했죠. 처음 들어갔을 때 건달들한테 맞기도 하고, 필름도 뺏기고, 소통하기 위해 몸까지 섞다 보니까 성병도 걸리고 그랬었거든요. 그러고 나서 1985년도에 공교롭게도 대상(동아미술상)을 받았어요. 참 난감하더라고요. 정작 그 친구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거든요. 그 후에 100만 원 상금을 가지고 아예 588로 들어갔죠. 부산에서 빈털터리로 올라와서 <월간 사진> 편집장 할 때였는데, 요즘 잡지사는 어떤지 모르지만 말이 편집장이지 돈을 조금 줘서 살 수가 없었어요. 청량리에 들어간다고 하니까 마누라가 부산 내려간다고 이삿짐을 싸는데 그날따라 비가 오는 거예요. 근데 옆에서 자식 놈이 한쪽에서 가기 싫어서 울고 있더라고. 그 얼굴이 잊히지 않네…. 저는 좀 사진에 미친 놈이에요. 인본주의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으면서 어떻게 처자식을 버릴 수 있냐, 그런 이야기를 하지….  

그의 사진에는 독특한 점이 있다. 아니,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독특하게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동시대에 윤락가를 촬영했던 외국 작가들은 화려한 촬영 기법과 렌즈를 이용하여 윤락가를 왜곡시켜서 촬영했다. 구미를 당길 만한 소재고, 더 특별하게 포장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조문호 사진에는 어떠한 왜곡도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사진 속 여성들은 전혀 불편한 표정 없이 일상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데, 놀라운 건 이 모든 사진들이 50mm 표준 렌즈로 촬영됐다는 거다. 

마음을 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 같아요. 
작업을 하려면 그들하고 동화되어야만 해요. 그렇지 않으면 작업을 할 수 없거든요. 그러다가 정숙이란 애를 참 좋아하게 됐어요. 혼자 있을 때기도 했고. 그 친구가 마음을 열어줬으니까 작업이 가능했죠.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 설득도 해줬고. 

‘본인은 알아보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할 때가 된 것 같다’라는 사진집의 소개 글귀가 이번 전시의 의미를 잘 나타낸 것 같았어요. 
출판사에서 꾸준히 책을 만들자고 했었어요. 근데 안 된다 그랬죠. 출판사에서도 20년만 지나면 초상권 문제도 없어져서 괜찮다고 하는데, 초상권은 둘째 치고 인간적인 문제잖아요. 근데 정숙이는 그때도 워낙 의식이 뚜렷한 아이여서 지금도 당당할 거예요. 오히려 그들은 당당한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괜히 불쌍하게 보고 그러는 거거든요. 그런 것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었던 계기가 되기도 했죠.     

사진에도 그런 시선이 담겼던 것 같아요.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느낌이 들지 않았거든요. 
외국 작가들은 사창가를 찍으면 왜곡시켜서 찍고 그래요. 근데 저는 50mm 표준렌즈로만 촬영을 했어요. 표준렌즈는 우리의 시선하고 가장 비슷한 렌즈거든요. 과장하지 않으려고 그렇게 했지. 사진은 재미가 없겠지만.  

그분들을 만나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세요? 
일부러 프린트를 한 컷에 두 장씩 했어요. 한 장은 본인들 오면 주려고. 특히 정숙이 사진은 다 뽑아놨는데 안 왔어. (웃음) 사람들이 나이 들면 티브이나 보고 있지 신문은 안 보거든요. 그래도 지금 588 가니까 다 알고 있더라고. 아저씨가 그 사람이구나, 하고.  

 

 

 

 

[사람, 사랑]
다큐멘터리 사진가에게 숙명과도 같은 ‘기록’은 온전히 타인을 향한다. 사라지는 것이 아쉬워 사진기를 품 안에서 떼어 놓지 못하면서도 자신의 세월이 가는 것에는 무심하기 그지없다. 그런 조문호에게 정영신 작가는 삶을 기록해주는 또 하나의 매개다. 모임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두 사람은 부부의 연을 맺고 10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며 500여 개의 장을 기록했다. 그는 운전을 하지 못하는 부인의 수족이 되어 파김치가 되도록 촬영을 하면서도 그게 그렇게 행복할 수 없다고 미소 짓는다. 그 모습을 보며 평생 타인을 기록해온 그의 삶을 기록해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참으로 행복한 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같이 촬영 다니시면 외롭지 않으시겠어요. 
그렇죠. 지금 만난 마누라는 10년 됐는데, 나한테는 그 10년이 생애 가장 행복한 시간이 아니었나, 생각해요. 우리 둘은 생각이 똑같거든. 다 빈털터리 개털이에요. 오늘만 살지, 내일은 없다 그래요. 우리는 주머니에 돈 10만 원만 생기면 촬영하러 가요. 대부분이 아내가 동조를 안 하잖아요. 근데 아내가 나랑 생각이 똑같으니까. 참 살 맛 나네. (웃음)  

어떻게 만나신 거예요? 
사동에 흑백 암실이 있었는데 거기서 같이 동아리 활동을 했어요. 내가 계속 프로포즈를 했는데 안 먹히더라고.

저놈은 워낙 잡놈이다 그러면서. (웃음) 근데 세월이 지나니까 그게 아니란 걸 알았던 거 같아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아낌없이 주는 거… 


아낌없이 주고 계세요? 
줄 게 없으니까. 허허허. 얼마 전에 내가 니한테 줄 건 없고, 세월이 지나면 사진첩 하나 멋지게 만들어줄게 그랬어요. 

사진 찍으면서 서로 작품을 평하기도 해요? 
이야기 절대 안 합니다. 자기도 장에서 30년 사진을 찍은 전문간데, 내가 감히 언급하진 못하지.

그의 주관이 누가 이야기한다고 바뀔 것도 아니에요. 

그래도 가끔 칭찬받으면 기분 좋으시죠? 
네, 잘 찍은 사진을 보면 서로 질투도 느껴요. (웃음)

 

 

 

사람을 통해 배운다고 하잖아요. 장터에서 사람들을 기록하면서 뭘 배우셨어요? 
사람이 제일 중요해요. 부산에서 장사할 때는 돈도 좀 벌었었거든요. 근데 어느 날 우리 가게에 사진가 최민식 씨가 왔었어요. 그분이 동아일보에서 나온 <휴먼>이란 책을 한 권 주더라고. 백 마디 말보다 사진 한 장이 주는 힘이 강하는 걸 느꼈어요. 다큐멘터리 사진은 일관되게, 하다못해 스마트폰으로라도 꾸준히 기록해나가는 게 중요한 거거든요. 중간에 그만해버리면 안돼요. 

천상병 시인을 추모한 사진집도 인상적이었어요. 참 소년 같으시더라구요. 
부산에서 처음 올라왔을 때 저의 유일한 탈출구가 인사동이었어요. 일 끝나고 인사동 가면 천상병 시인이 앉아 계시거든요. 그 양반은 만나면 노잣돈으로 천 원을 내라 그래요. 천 원 있어서 주면 그렇게 행복해하세요. 주는 사람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거죠. 그분 책을 내면서도 참 아쉬운 게 많았어요. 책을 만들 줄 알았으면 계산해서 찍었을 텐데 그러질 못했어. 책을 보여주면 두고두고 욕 얻어먹겠다 싶었지. (웃음) 

기록 뒤에는 사라진다는 의미가 내재돼 있어요. 사라지는 것들을 기록하는 이유가 있으세요? 
지금은 돌아가신 이경모 선생님이 있어요. 그분이 옛날에 호남신문에서 일하면서 여수, 순천사건을 다 찍었어요. 근데 그 당시만 해도 그분이 기록 사진의 소중함을 몰랐던 거예요. 원로 사진가들이 아름다운 사진에만 빠져있었거든. 모델을 찍거나 텅 빈 공원의 사진을 찍으면서 그런 게 예술작품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그 책을 만들기 위해 필름을 끄집어내면서 기록사진이 소중하다는 걸 알게 된 거예요. 지금 보면 1960년~1980년대 사이의 우리 기록들이 제일 없거든요. 그 당시에 카메라는 아무나 가질 수 없었잖아요. 소중함을 몰랐기에 남겨지지 않았던 거지.

 

 

 

[다큐멘터리 사진의 힘]
1985년 연작 ‘홍등가’로 동아미술제 대상을 수상한 조문호는 다음해 ‘아시안게임 기록사진 공모전’에서 같은 상을 받았다. 이후 <월간 사진> 편집장을 역임하고, 한국 환경사진가회 회장을 지내면서 사라지는 수많은 것들을 기록했다. 그가 기록 사진을 찍는 이유는 간단하다. 역사를 알아야 우리가 걸어가야 할 미래를 알 수 있다. 단순하지만, 당연한 이 논리 속에서도 빠지지 않는 것이 있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동강댐 건설 논란이 한참이던 1999년, 조문호는 정선군 귤암리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오지마을을 찾아다니며 산골 사람들의 모습을 6년간 기록했다. 생태계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 중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주관적인 감정이 개입되지 않도록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촬영을 계속해나갔다. 흑백 사진 속 말없이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가 故 최민식 선생의 사진을 봤던 때의 감상이 저절로 떠오른다. 백 마디 말보다 한 장의 사진이 주는 힘이 강하다는 것. 이것이 기록 사진이 가진 힘이 아닐까.   
 
사진 공부는 어떻게 하셨어요? 
<월간 사진> 있을 때 공부를 많이 했죠. 집에서는 엄청 반대했지. 딴따라 될 거냐고. 처음에는 혼자  올라와서 책 외판원을 했어요. 뭐 됩니까. 책 갖다 주고 나면 회사가 사라지고 없어져서 돈을 띠이기도 하고요. 결국 누나가 연락해서 잡혀 내려갔지. 잡혀 내려가서 마음에도 없는 공부를 했었어요.  

<월간 사진> 편집장 생활은 어떠셨어요? 
그 당시에는 먹고 살길이 없었어요. <월간 사진> 사장을 아니까 어려우니 일 좀 달라고 했죠. 그러더니 대뜸 한다는 이야기가 편집장을 하라는 거예요. 막상하니까 자기가 마음대로 주무르면서 나보고 편집장 하라는 거였지. 이 잡지가 외국 포토그래피지를 번역해서 만든 책이어서 모르는 정보를 많이 알게 됐어요. 근데 너무 베끼니까 문제지. (웃음) 

아드님도 사진을 전공하셨죠? 반대 안 하셨어요? 
전혀 반대할 이유가 없죠. 

현실도 무시 못 할 조건이잖아요. 
처음에는 웨딩샵에 들어가기도 하고, 패션사진에서 일하기도 했는데 생활이 안 됐던 거 같아요. 헤어진 마누라하고 외할머니까지 모시고 사니까 더 어렵지. 아직 장가도 못 갔어요. 사진과에 간다고 했을 때 아버지니까 학비를 줘야 될 거 아니에요. 편집장도 그만둘 때여서 돈이 없었거든. 그때 삼성 카메라에서 사진 사업부를 만들어서 이것저것 했었거든요. 거기에 계약직으로 들어가서 자식 졸업할 때까지 4년 동안 있었어요. 

사진 찍고 싶어서 어떻게 참으셨어요. 
책임감이지. 

작가로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더라도 사진을 찍으실 거예요? 
이름 알려지는 거 그거 아무 소용도 없어요. 오히려 알려지면 더 불편해요. 결국은 이 인터뷰도 마찬가지거든. 

이 전시를 하면서 수시로 인터뷰 하자고 그래. 그래서 마누라보고 니가 좀 막아주라 그랬어요. 

<파운드 매거진>도 결국은 기록의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근데 인터뷰는 왜 응해주신 거예요? 
책을 봤어요. 보니까 그런 여성잡지는 아니구나 그랬지. 1990년도에 내 전시를 주로 다뤘던 매체들이 스포츠지나 월간 여성지가 많았어요. 홍등가 이야기니까 선정적으로 갈 수밖에 없잖아요. 심지어는 스포츠지에서 헤드라인을 ‘창녀들을 찍는 찰칵 사진사’ 이런 식으로 뽑았어요. 그래서 결국 걔들이 전시회에 안 온 거예요. 인터뷰하면서도 누누이 그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하려고 하는데도 그런 건 다 묻혀버리니까  안 하려고 했죠. 

사진을 찍으면서 만족했다는 순간도 오세요? 
만족이 있을 수 없지. 

 

 

 

 

어떤 사진이 좋은 사진일까요? 
정의하기가 애매해요. 자기는 좋은데 딴사람이 볼 때 안 좋은 사진이 있고, 반대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건 세월이 지나봐야 아는 것 같아요. 세월이 가면 가치가 드러날 거예요. 전시회에 통인가게 회장이 부인하고 온 적이 있어요. 그분 부인도 콜렉터니까 나한테 와서 “조 선생님, 꽃 사진처럼 예쁜 것 좀 찍지. 왜 이런 거만 찍으세요”하면서 꽃 사진 찍으면 많이 팔아준다고 그러더라고. 내가 “아지매 그런 소리마소. 꽃 사진은 세월이 지나면 쓰레기가 될지 모르지만, 이런 사진은 지나면 지날수록 가치가 올라갈 거예요” 그랬지. (웃음) 

저 같아도 샀을 거 같아요. (웃음) 언제쯤이 돼야 작가로서 만족하는 날이 올까요? 
나는 아직 말단이야. 나이만 먹었지 잘하는 작가들이 너무 많아요. 요즘 하도 좋은 사진들이 많아, 그런 사진보면 입이 안 다물어지더라고. 나이가 내일 모레면 70이에요. 사진은 다리 힘 없으면 못하잖아요. 힘 있을 때까지 열심히 찍고 싶어요. 인사동을 왜 잊지 못하냐면 내가 거기서 많은 것들을 배웠거든요. 안타까운 건 사람들이 몰리니까 정서가 바뀐다는 거죠. 낮에는 지나가는 사람들뿐인데 저녁에 골목길 들어가 보면 옛날 사람들이 많아요. 이제는 누구든 만나면 카메라를 들어요. 

사진 찍는 걸 다 허락해주시나 봐요? 
이제 너무 오래돼서 별 신경도 안 써요.  

사진 찍어야 하는 모습을 놓치면 아까우시겠어요. 
그래서 항상 가슴에 끼고 있어요. 그제 인사동에서 친구들 만나면서 술을 한 잔 마셨어요. 15명이 모였다고, 사발에 술을 막 부어재끼는 통에 많이 취했거든요. 사람이 술에 취하면 용기가 생겨요. 청량리가서 대담하게 찍었더니 건달한테 걸린 거예요. 카메라 내놔라 그래서 지우라고 줬지. 자기가 일일이 다 지우더라고. 집에 와서 다시 복원했어. (웃음)  

 

 

 

 

 

 

[그래도 사람, 결국은 사람]
조문호의 사진은 늘 뜨거운 감자다. 오랜 끈기로 이루어낸 것이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대체로 그의 사진은 담아내기 어려운 현실 속 사진들이 대부분이다. 사람을 이해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셔터만 눌러서는 절대 담아낼 수 없는 시대의 명암이 공존한다. 그러면서도 작가로서의 욕심과 욕망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기술적으로 과시하거나, 화면을 왜곡시키지 않고 현실 그대로를 전하는데 의미를 둔다. 

인간은 늘 아름다운 순간만을 기억하길 바란다. 수백 장의 사진을 찍어놓고, 찬란한 순간만을 남겨두려는 습성이 그렇다. 이러한 습성에 오래 길들여진 탓인지 조문호의 사진은 누군가에겐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두운 민낯을 포장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그의 화법이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사회의 편견을 바로 잡으려고 오랫동안 노력했지만, 나 혼자의 힘으로 깨기에는 그 벽이 너무나 두꺼웠다.” 사진가는 사진으로 말한다. 그의 꾸준한 발자취는 그가 기록해온 사진들만 봐도 알 수 있다.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먹먹하다.  

인터뷰가 끝난 후, 마지막 촬영을 앞두고 작가는 가방에 놓여있던 카메라를 들었다. 몰래 등 뒤로 숨긴 후, 우리가 사진 찍는 틈을 타 셔터를 빠르게 몇 번 눌렀다. 그리고 소년 같은 미소를 지으며 찍은 사진을 확인했다. 그는 마지막 인사를 나누기 전 “저쪽에 서 보이소”라고 말하며 에디터와 포토그래퍼를 한쪽에 세우곤 다리를 구부려 사진을 찍었다. 찰칵찰칵. 셔터 소리가 귀에서 멀어지기도 전이었다. 
“이 순간을 오래오래 기억하게예…”그가 말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도 그 한 마디가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았다. 그의 사진에 담긴 사람들의 표정이 그토록 편해 보이던 것이 이해가 됐다. 부디 그가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더 오랜 시간 동안 찍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본 기사를 취재한 'F.OUND'의 최인희, 정재호기자

 

 

동강의 봄을 알리는 제9회 동강 할미꽃 축제 개막식이 지난 27일 오전10시 정선, 동강생태체헙학습장에서 열렸다.

이 날 개막식에는 최종열 동강할미꽃보존회장과 장대순 정선 부군수의 인사말이 있었고, 보존회장 최종열씨는 전임 보존회장 권진섭씨에게 감사패를 전달하기도 했다. 행사가 겹쳐 조금 늦게 도착한 전정환 정선군수와 차주영 정선군의회 의장을 비롯하여 김수복 정선군 문화과장, 유경수 정선읍장, 김우영, 안정의, 김은수, 김영철, 유미자, 그리고 마을주민들과 관광객 들이 참석해 수줍게 고개 내민 동강할미꽃 향연을 즐겼다.

정선군립아리랑예술단의 정선아리랑을 시작으로 소리꾼 최윤영씨의 창과 ‘밴드 조’의 노래 공연도 이어졌다.

그리고 나만의 동강할미꽃 심기, 학생백일장, 동강할미꽃 사진전, 떡메치기 등 다양한 체험행사가 진행되었다.

28일에는 어린이 그림 공모전과 백일장 시상식이 있었는데, 주말 나들이객까지 더해 행사장주변이 성황을 이루었다.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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