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오후5시, 조선일보미술관에서 일본의 원로 다큐사진가 구와바라 시세이 사진전이 열렸다.

한국을 제2의 고향삼아 50년 동안 기록해 온 시세이선생의 진귀한 사진들은 감동 그 자체다.

그 분의 사진들을 대할 때마다 늘 부끄럽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그 분이 대신한 것이다. 나야 시세이선생보다 한 참 늦게 사진을 시작했지만,

그 무렵의 우리나라 사진가들이 대부분 살롱사진에 빠져 기록의 중요성을 놓쳤다.

정치적 상황과 맞물린 시사성 사진들은 우리나라 기자들도 찍었겠지만,

우리가 방치한 한국 이면사는 그가 남긴 사진들이 유일한 게 많다. 미군기지촌을 오가는 양공주들의 모습이나

청계천 판자촌에서 사는 서민들의 생활사 등 보석 같은 사진들이 전시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역시 가난한 다큐사진가로 힘들게 살아간다.

'눈빛출판사' 이규상씨가 ‘격동한국50년’이란 사진집을 발간하며 전시를 도왔으나, 모두들 힘에 부치는 전시였다.

일본에서 직접 프린트해 온 작품이었지만, 획일화된 규격에다 빌린 액자라 작품에 비해 전시 효과는 반감되었다.

가난이 유죄다. 그러나 사진들이 너무 좋아, 보고 또 보게 만들었다.

판매가격도 오리지널 프린트 한 점에 250만원이면 국내 작가들에 비해 한참 싼 가격이다.

개인이 일본의 원로사진가 시세이선생의 명작을 소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된다.


그 날 전시장에는 국내 다큐사진가는 물론 많은 지인들이 참석했다.
개막식에는 작가 내외를 비롯하여 윤주영, 한정식, 황규태, 박 도, 김승곤, 구자호, 전민조, 이규상, 안미숙, 김녕만, 김보섭,

엄상빈, 임향자, 이기명, 김남진, 안해룡, 이상엽, 정영신, 김지연, 최경자, 이경수, 천수림, 이상봉, 김승혜, 조성호, 한선영,

마동욱, 나떠구, 견석기, 남 준, 곽명우, 김양수, 성윤미, 인현우씨 등 100여명이 전시를 관람하며 축하했다.

사진, 글 / 조문호

 

 

 

 

 

 

 

 

 

 

 

 

 

 

 

 

 

 

 

 

 

 

 

 

 

 

 

 

 

 

 

 

 

 

 

 

 

 

 

 

 

 

 

 

 

 

 



 

 

 

 

 

 

올해로 열네 번째 맞는 '동강국제사진제'가 지난 24일 오후7시 영월 사진박물관에서 개막되었다.
차가 밀려 개막시간 한 참 지나 당도하였고, 장대비가 쏟아져 진행 과정을 제대로 지켜보지 못했다.

사실 개막식보다는 오후1시30분부터 시작된 '오늘의 한국사진과 사진문화를 진단한다'라는 주제의 

워크샵에 참여하고 싶었으나 시간이 맞지 않았다.

나머지 워크샵을 위해 2박3일 동안 머물며 '동강사진제'의 이모저모를 유심히 살펴보게 된 것이다.

정선 갔다 오는 길에 영월 사는 장꾼 정수옥씨를 만나 '동강사진제'에 대한 주민 반응도 접할 수 있었다.
정씨에게 사진축제는 가봤냐고 물었더니 아는 손님이라도 오면 같이 가 볼 생각이란다.

그런데 해마다 가지만 뭐가 좋은지 모르겠다는 하소연을 했다.

“어린 조카 놈이 사진 보며 물어 보는데 뭘 알아야 답을 하지..."

하기야 사진하는 우리도 이해 안 되는 작품이 많은데, 어찌 시골 장꾼의 눈높이에 맞겠는가.

그러나 최소한의 궁금증은 풀어주어 소통할 수 있도록 해 줘야한다.

전시장을 지키는 도우미라도 교육시켜 궁금증을 풀어주게 하면 안될까? 

그리고 '동강사진제' 문제점을 지적한 '한겨레신문' 노형석기자의 글을 흘려들어서는 안 된다. 제대로 본 것이다.

'동강사진제' 집행부에서는 이 지적을 불쾌히 여기지 말고, 시정할 수 있는 자성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나 역시 '동강사진제' 만의 뚜렷한 색깔, 즉 정체성이 없다는 생각은 늘 했었다.

타 도시에서 열리는 사진축제들과의 변별력도 없었다.

오히려 기록사진에 초점을 맞추었던 2002년 출범 당시가 더 나았다.

무분별한 현대사진의 수용으로 마치 양공주 낯짝에 분칠한 격이었다.

작가주의로 시상되어 온 역대 수상작가 선정도 마음에 걸렸다.

한 때는 오형근씨와 노순택씨가 받아 뭔가 제대로 되나 싶었는데, 다시 원상복귀 되길래 그건 양념이란 걸 알았다.

'한국사진의 현재와 미래'란 주제를 내걸고 시작한 워크샵은 주제 자체가 너무 포괄적인 것 같았다.

좀 더 부분적이고 집중적으로 논의해 대안을 찿아내야 하는데, 노기자 말처럼 용두사미 꼴이 되고 말았다.

 

마지막 날 진행된 '사진전문지, 사진전문 출판의 현황과 문제'는 들을 만 했다.

그러나 참석률이 너무 저조했다. 다른 워크샵에는 200여명 가까이 되었으나 그 곳은 불과 20여명 밖에 참가하지 않았다.

마지막 날은 두군데서 동시에 열려 분산되기는 했으나 기실 사진 책에 대한 관심이 적다는 뜻 일게다.
참석자는 적었으나 가장 눈높이에 맞았고, 현실적인 문제들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발제자들의 워크샵에 임하는 자세도 달랐다.

발제문들을 프린트해 나누어 주는 것은 물론, 오래된 사진 책까지 들고 와 참석자들의 이해를 높였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동강사진제'에 초를 쳐 미안하다.
그렇지만 대꾸없는 침묵이 더 무섭다. 부정적이라고 여론을 수렴하지 않으면 자멸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사실 새로 구성된 '동강사진제' 운영위원회에 커다란 숙제가 안겨진 것이다.
각계의 의견을 수렴 논의하여 이 사진제를 반석 위에 앉힐 방법을 찿아 내야 하기 때문이다.

 

정체성 있는 성공적인 '동강사진제'가 되기를 다시 한 번 기대한다.

사진,글 / 조문호

 

 

 

 

 



 

동강국제사진제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전시가 거리 설치전이다.
기존 전시장을 벗어난 일상의 공간에서 만나는 작품으로 일종의 공공미술 형태다.
강예제, 고병찬, 김전기, 오성민씨 등 네 명의 젊은 작가가 참여한 '영월의 정취'전은

영월군청 주변을 비롯한 시가지 곳곳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다.

 

 

 

 

 

 

 

내가 이광수선생을 좋아하는 건 단지 588사진집의 발문을 써주어서만이 아니라
불의를 두고 보지 못하는 피 끓는 그의 정의감 때문이다.

이광수 교수를 알게 된 것은 오래지 않았다.

올 들어 전시장에서 몇 차례 만나 인사를 나누었지만, 그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없었다.

마침 지난 동강국제사진제에서 자리를 함께하게 되었는데,

그의 강직한 의지와 소탈한 인간적 면모에 매료된 것이다.

무슨 일이던 개혁을 하려면 혁명가기질의 총대를 멜 사람이 필요하다.
바른말을 쏟아내는 이규상선생의 투사정신도 이광수선생 못지않지만

'눈빛출판사'를 운영하며 긴 세월 얽혀 온 사진판의 인맥들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느지막에 사진평론가로 등장한 이광수선생은 그 부분에서 오히려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두 분 모두 일신상의 손해를 감내할 수밖에 없다.

왕따에다 직업 또는 사업상의 불이익을 당 할 건 불을 보듯 훤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약자들을 위해 강자들과 싸울 전사를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면 사진판 개혁을 운운하는 네가 직접 나서 칼을 휘두르라 할지 모르지만, 난 그렇게 나설 자격을 이미 상실했다.

긴 세월 이어져 온 공모비리에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여러 사진단체 일에 직 간접적으로 관여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가까이에서 지켜보았기에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끄집어 낼 수는 있을 것 같다.

지난 14회 동강국제사진제 워크샵의 첫 날 최민식사진상 문제가 언급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몇몇 사람의 문제 제기에 대부분의 사진인들이 입을 다물었고, 특히 2-30대의 젊은 사진인들이 나서지 않아 힘을 얻지

못했다는데, 왜 사진인들이 남의 일처럼 등짐을 지고 지켜보고만 있었을까? 귀찮아서, 아니면 찍힐까봐.. 

 

그리고 동강사진제에 다녀 와 올린 어느 사진가의 글도 이해는 되었다.

기득권에 줄 대려 살살거리는 꼬락서니에 염증을 느껴 이후로 아예 신경을 끊겠다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10여 년 전 똑 같은 생각을 하며 내 일만 하고 지냈으나, 뿌리만 더 깊어졌다.

이건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일이기에 끝까지 물고 널어져야 하는 것이다.

똥이 무서워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 피한다는 말도 있지만, 더러워도 밟아 짓이겨버려야 한다.

이 명경알 같이 밝은 세상에 아직까지 개 같은 일들이 계속된다는데 분통이 터진다.
힘들어도 자부심 하나로 살아가는 많은 다큐사진가들의 좌절감을 생각하니 속이 뒤집힌다.

최민식사진상에서 터져 나온 논란은 오랜 세월 이어져 온 사진판의 병폐 중 조그만 불씨에 불과하다.

이제 시작된 기득권과의 전쟁에서 기어이 이겨내야한다.

사진, 글 / 조문호

 

 

 

 





 

 

 

눈빛출판사의 안미숙선생께서 지난 달 제주도에서 다리를 다쳐 한 동안 꼼짝을 못하셨다고 한다.

고생 끝에 사무실에 출근하였다기에 아내가 점심을 쏜다며 자리를 만들었다.

 

겨우 회덮밥 한 그릇 대접하고, 차 값에다 선물까지 받는 민폐를 끼쳐 버렸다.

안선생께서 아끼는 오미자 원액을 한 병 가져 온 것이다.

안선생, 선물 고마웠습니다. 그런데 보약 먹고 힘 넘치면 어쩌지?



사진, 글 / 조문호

 

 




 

최광호씨의 수상작 '天際, 숨의 풍경'

 

 

최민식사진상으로 시끄러운 즈음에 사진인은 물론 일반인들도 아는 현대사진의 흐름을 왜 강조하는지 의뭉스럽다.
기득권을 움켜 진 자들의 눈치보며 내 놓는 어정쩡한 논리에 귀가 막힐 뿐이다.


사진이 아무리 시대 흐름따라 유행처럼 변한다 해도 사진 본연의 기능인 기록의 가치는 영원불변의 사실이다.

그렇다고 시대적 흐름을 따르는 사진가들을 폄하하거나 새로운 사진 형식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다 같이 수용하여 함께 발전시키자는 것이다.

‘동강사진상’이 사진 예술적 성취도에 따라 작가를 선정하는 상이라면, 최민식 사진상은 주최측의 시상 목적대로 사람을 대상으로 작업한 다큐사진가를 뽑아야 한다는 것이다. 형식만 포토폴리오를 제출하는 공모형식을 띄었지, 작가주의 포상식 시상이라는 것이 두 차례 공모에서 밝혀진 것이다. 그럴러면 공모형식보다는 각 전문가들의 추천에 의해 합당한 사진가를 선출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웬만큼 이름있는 작가들은 상을 받으려 스스로 공모에 임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최민식 사진상 만큼은 작가주의 사진상에서 탈피해, 훌륭한 작업 자체에 주어졌으면 한다.

우리나라 사진상들이 오랜세월 잘못된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해 사진인들로 부터 많은 빈축을 사고 있다.

최민식사진상도 말은 예술적 성취도에 따라 시상한다고 하지만, 인맥에 의해 나누어먹기 식의 시상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사진상의 시상방법이나 대상을 찾는 기준이 주최 측의 목적에 따라 다양해야 하고, 제각기 상에 대한 변별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문제가 된, 발표작도 출품할 수 있다는 갑작스런 공모규정 변경도 그렇거니와 공모요강에 그 내용을 밝히지 않은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더욱이 장기 프로젝트는 이중수혜가 가능하다는 말은 특정인을 밀어주기 위한 변명같이 들릴 뿐이다.

문제를 덮으려 내놓는 입에 발린 해명들이 신물난다.

솔직히 까놓고 이야기하자.
이젠 중진작가들을 위한 포상식의 작가주의 사진상은 그만두자.
뒷자리로 물러 난 사진가보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온 몸을 바치는 유능한  다큐사진가들이 너무 많다.

그들에게 시상하여 용기와 힘을 실어 주자는 것이다.
그래야 뒤쳐진 우리나라 사진의 미래가 있지 않겠는가?

조문호


최민식사진상과 관련된 논란의 요지는 바로 예술지상주의 사진가들과

사진 고유의 기록성을 지키려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들과의 한 판 싸움이 아닌가 생각한다.
먼저 결론부터 내놓고 싶다.
주관적인 사고로 작업하는 예술지상주의사진가들은 사진부문보다 미술부문에 편입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논란의 쟁점이 되고 있는 최민식선생의 사진철학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나, 미발표작이 아니라는 것들은 부차적인 문제에 다름 아니다.    최민식상 운영위원회나 심사를 맡은 사람들은 선생의 이름으로 받은 수혜지만, 최민식선생을 뛰어넘는 사진예술상을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그들은 여지 것 최민식선생의 작품을 아마추어 사진으로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니 말이다.

그래서 최민식사진상은 시작부터 잘 못 된 것이다.
최민식선생의 인본주의 정신을 이어받는 사진가들이 주축이 되어 집을 지어야 반석위에 세울 수 있는데,

선생을 허수아비로 세워 자기들만의 새로운 파라다이스를 만들고 싶었으니 문제가 된 것이다.

그러니 기록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많은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반기를 들고 나선 것이다.

설계가 잘 못된 집은 완성되기 전에 허물어야 한다.
나중에 넘어지면 낭비되는 재물도 재물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다친다.
우리 모두 힘을 모아 새로운 최민식선생의 집을 한 번 설계해 보자.
최민식선생의 정신을 이어받은 훌륭한 사진가가 있으면 힘 모아 그들의 전시와 출판을 도와주어

인본주의 다큐멘터리를 부흥시키면 되는 것이다. 다행히 새로운 스폰서가 생겨나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위의 사진은 78년도 무렵, 부산 초량의 한 모퉁이에서 찍은 사진이다.
배고파 잠든 엄마와 울다 지친 아기의 모습을 보며 전생에 무슨 죄로 저렇게 고통 받을까 생각하며 찍었다.

당장 일으켜 세워 식당부터 데려가야 할 텐데 말이다.

잠든 머리맡에 천원짜리 지폐 한 장 눌러 놓고 스스로 위안했으니, 늘 마음의 빚으로 여기며 살아 왔다.

그래서 최민식선생을 따르는 사진방식은 버렸다. 그러한 큰 그릇이 되지 못했고.

내가 아무리 열심히 찍어도 선생님을 뛰어 넘지 못 한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이후부터는 그 사람을 알아야 찍었고, 눈을 마주쳐가며 찍어왔다. 사진은 딱딱하지만...

그리고 사진으로 말아먹고 서울로 야반도주해 30여년을 힘들게 살아왔으나

한 번도 사진을 시작하게 된 최민식선생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해 왔다.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살아 있는 동안은 선생에 대한 잘못된 인식들을 바로잡아

선생의 이름을 기리는데 최선을 다할 작정이다.
그래서 오랜 세월 도움받아 온 선생들까지 싸잡아, 가까운 후배들에게 막말 한 것이다.

 

널리 양해 바란다.

조문호



 

나주 세지장

 

정음 신태인장

 

경산 자인장

 

경주 양남장

 

공주 산성장

 

광주 말바우장

 

군위 우보장

 

성남 모란장

 

보령 웅천장

 

보은장

 

부여 홍산장

 

동해 북평장

 

사천 곤양장

 

사천 장황장

 

순창 복흥장

 

양평 지평장

 

순천 주암장

 

안성 일죽장

 

영광장

 

영덕 남정장

 

영산포장

 

예천 용궁장

 

완주 삼례장

 

완주 삼례장

 

음성장

 

의령 신반장

 

임실 신평장

 

정선장

 

정음 신태인장

 

제주장

 

청원 미원장

 

청원 미원장

 

태백 철암장

 

태백 통리장

 

평택 통복장

 

포항 죽장장

 

익산 함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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