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 류경선씨가 세상을 떠난 지가 벌써 일 년이 되었다.

중대사진동문들이 마련한 일주기 추모 사진전 개막식이 지난 16일 인사동 ‘경인미술관’3전시실에서 열렸다.

개막식에는 유가족을 비롯하여 사진가 강운구, 최인진, 최재영, 김녕만, 양재문, 차정환, 김종호, 이평수, 고 헌,

노연덕씨 등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고인을 기리는 시간을 가졌다.

전시된 사진들과 그가 사용했던 유품들을 돌아보니 지난날의 이런 저런 생각들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아마 ‘사진협회’ 이사장만 하지 않았더라면 그리 빨리 세상을 하직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을 늘 해왔다.

왜 쓸데없는 감투에 그리 집착했는지 모르겠다.
필자도 당시 ‘사협’을 개혁하려는 욕심에 두 차례에 걸쳐 이사장선거에 개입한 적이 있었다.

처음은 이명동선생을 후보로 모셨고, 두 번째는 류경선씨를 도왔는데, 두 분 모두 백현기씨의 치밀한 조직에 밀려났다.


이명동선생이야 선거비용을 주변에서 조달해 모셨으나, 류경선씨는 자기 돈 쓰 가며 집착했다.

그는 낙선해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매달려 기어이 그 뜻을 관철시켰다.

그러나 이사장에 당선되었지만 ‘사협’을 조금도 바꾸지 못했다. 출마의 변으로 변화와 창조란 캐치프레이즈를

내 걸고 부정과 비리를 척결하고 실추된 한사전을 새롭게 부활시키겠다고 내 세웠지만, 조직에 둘러싸여 못했다.

결국 임기 중에 병석에 드러누웠는데,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얼마나 심적 고통이 컸겠는가?

그 이사장 자리가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었을 것인데,

전임이었던 문선호씨와 백현기씨도 이사장자리로 수명을 단축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자리다툼과 공모전에 따른 이권 배분 등, 숱한 비리 한 복판에서 처신하기가 녹녹치 않았을 것이다.

류경선교수는 사진병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하며 사진인생을 시작했다.

서라벌예대 사진과를 거쳐 일본에 유학하여 줄곧 중앙대 사진과 교수로 재임하며 후학들을 양성해 왔다.

정년을 한 해 앞두고는 1톤 트럭을 개조해 0,5mm 구멍을 뚫은 세계에서 가장 큰 핀홀카메라를 만들어

전국 해변을 돌며 촬영하기도 했다.

마치 흐릿한 안경너머로 떠오르는 옛 그림자를 회상하는 듯한 ‘바다, 그 기억을 그리다’전이 그의 마지막 전시였다.


사진가는 작품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한 평생을 사진에 바친 그의 흔적치고는 너무 초라하다. 그를 대표할 만한 작품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가 정년퇴임하여 자유로운 몸이 되었을 때, ‘사협’ 이사장에 머리 싸 맬 것이 아니라 작품활동에 혼신을 다했어야 했다.

명예롭지 못한 경력 한 줄에 모든 걸 바친 고인을 생각하니 너무 가슴 아파 드리는 말이다.

부디 저승에서나마 이승에서 못 다한 모든 걸 성취하길 기원한다.

사진,글 / 조문호
























인사동을 우리나라 미술시장 메카로 만들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참 많다.
‘통인가게’의 김완규씨, ‘아라아트’의 김명성씨, ‘아리수’의 김준영씨 등 갤러리를

운영하는 분들은 물론이고, 장경호씨를 비롯한 수많은 작가들과 기획자들이 머리를 맞대어 그 방법을 찾고 있다.

그 중 사진계의 한 사람으로는 단연 ‘갤러리 나우’ 이순심 관장을 꼽을 수 있다.

그는 대학에서 사진을 가리키다, 10년 전 인사동에 ‘나우’라는 이름의 사진전문 갤러리 문을 열었다.

교육자 경험을 바탕으로 포트폴리오 리뷰, 전시기획, 전시 카운슬링 등의 갤러리와 관련된 일도 열심이었지만,

사진의 대중화를 위한 노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척박한 사진 시장을 타개하려 “아트 나우”의 작가 지원 및 교육 프로그램도 꾸준히 운영 해왔다.

그리고 해외 아트 페어 참여로 한국 작가와 사진을 알리는데 주력해 우리나라 사진시장을 형성, 확장하는데도 기여했다.

그 중 사진 대중화를 위해 벌인 ‘한 방에 한 작품 (ONE ROOM onE PHOTO)’ 캠페인은

여러 언론매체에 소개되며 대중의 호응을 받기 시작했고, 기업체를 비롯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강의에서도

사진작품에 대한 해외의 위상 사례를 들며 사진이 대중화에 다가가는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 공적을 인정받아, 오늘 시상되는 제2회 ‘수림사진문화상’의 공로상도 받게 되었다.


지난 13일 거리에서 손님 배웅하는 그녀를 만나, 차 한 잔 하자는 권유에 전시장으로 따라 들었다.

차를 마시며, 사진가들의 중구난방식 작품가 형성과 일반인들의 사진에 대한 오해를 물었더니,

팔리지도 않는 작품에 가격만 높여 놓은 게, 사진 대중화에 가장 큰 장애요인이라며 불만을 토로했다.

작가가 아무리 비싸게 불러도 소용없어요. 갤러리에서 거래된 가격이 기준이지요.

그리고 사진은 한 컷으로 수없이 프린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았어요.”

그래서 판화처럼 작가마다 프린트 할 수 있는 에디션 넘버가 정해져 있다며 고객을 이해시킨다는 것이다.

 

아트마켓 확장을 위해 꾸준히 판로를 개척하며 인사동 미술시장 대중화 에 이바지하는

이순심관장의 수림사진공로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앞으로 더 큰 발전 있기를 바란다.

 

사진,/ 조문호




 




 

 

‘2015 북경국제사진제’에 참가할 한국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의 첫 미팅이
지난 18일 오후3시 인사동 ‘귀천’에서 있었다.

그 자리에는 한국사진가들의 참여를 추진한 ‘눈빛출판사’ 이규상대표를 비롯하여
기획자인 류은규씨, 다큐사진가 엄상빈, 김보섭, 조문호, 임재천씨 등
모두 6명이 모였다.

 

오는 10월24일부터 11월1일까지 열리는 축제에 다섯명의 국내 작가가 참여하게 되는데,

각각 20여점씩 출품하게 된다고 한다.

류은규씨의 진행 상황을 전해 듣고, 준비할 것들을 챙기기도 했다.
참가할 사진가들의 소통을 위해 엄상빈씨가 통역원을 제공한다는 이야기도 했다. 

모임이 끝난 후, 인사동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겨 대낯부터 술 자리를 만들었다.
그런데 술집으로 내가 이끌어 놓고, 술값은 엄상빈씨가 내 버렸다.
그 술값이 만만 찮을텐데...

사진 : 류은규, 조문호 / 글 : 조문호

 

 

 

 

 

 





 

프로젝트 ‘장에 가자2’ 정선전시를 어렵사리 끝 마쳤다.
27일간 서울과 정선을 오가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으나 일반인들의 참여를 확대하기에는 한계를 느꼈다.

어떻게 하면 대중들이 전시 문화에 친숙하게 다가올 수 있을까 하는 큰 숙제만 남긴 셈이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은 지역 사진인의 비협조적인 자세다.
주최 측인 정선문화원에서 정선군청 홈페이지에 ‘장에 가자’ 초상사진 퍼포먼서 안내를 했는데,

그곳에다 비난하는 댓글을 올린 것이다.
정선 사진의 대가로 자처하는 스스로의 존재를 몰라주는데 따른 불만인지 모르지만,
전시는 보지도 않은 채, 말도 안 되는 시비를 걸어 와 실소를 머금게 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사협회원’이란 과대망상적 ‘중병에 걸려 있다는 것이다.

내용인즉 정선문화원의 전시작가란 말에 공식 인증된 작가 타이틀을 공개하란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사진작가란 말이긴 하지만, 사협 회원이 아니니 촬영기사라는 것이고,

사진을 무료로 찍어 주면 자기같은 사람들이 살아남기 어렵다는 논지였다.
한 사진인의 시기심에서 비롯된, 우물 안 개구리 격인 일고의 가치 없는 글이었으나,

아마추어 공룡 집단 '한국사진작가협회'의 병폐를 보는 것 같아 참담한 심정이었다.
회원들의 자질 향상을 위한 사진교육은 뒷전으로 한 채,

숱한 공모전으로 회원들과 감투 늘리기에만 급급하더니, 이제 그 한계점에 달한 것 같았다.

나도 20여년 전 ‘한국사협’이라는 회보 편집장으로 그 조직에 관여한 적이 있었다.
공모전비리는 일상이었고, 조직의 패거리적 병폐에 한계를 느꼈다.

그 당시 이사장이었던 고 문선호씨가 나의 ‘87민주항쟁’전시 추진에 제동을 건 적도 있었다.

사진가를 대표하는 사람이 어떻게 격려, 지원은 못할망정 전시를 방해할 수 있단 말인가?

사직서를 내 던지고 강행했지만, 사협이란 단체가 본래 힘 있는 정치에 아부나 하는 그런 어용단체인 것이다.

그 이후 사진과 교수들을 비롯하여 작가의식이 투철한 사진가들은 모두 사협을 탈퇴하여

‘민족사진가회’란 새로운 단체에 영입되었으나, 그 또한 사진가 김영수씨의 독주로 회원들의 결집을 이루어내지 못했다.

사실 작가들에게 단체는 중요치 않다. 공익의 명분을 내세우지만, 작가 개인으로서는 제약에 불가할 뿐이다.

‘예술인총연합회’ 산하 각 예술단체의 창립 배경도 결국은 부패 정권이 예술가들을 이용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일그러진 사진계 내막도 모른 채, ‘사진작가증’이라 적은 전대미문의 회원증 하나에 현혹되어 

가입한 다수의 피해자(사협회원)들을 구제할 방법은 없을까?

그들을 공모사진이나 형식사진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사진으로 이끌 수는 없을까?
이 것 저 것 고민거리만 안겨준 정선 전시였다.

글 / 조문호

-아래는 군청 홈페이지에 올린 전석원씨의 글-

“정선문화원에서 시행하는 전시사업은 작가가 아니라
촬영기사라고 표기해야 맞습니다
아무나 같다가 붙이는 작가타이틀 말고
국가에서 공식 인증된 작가타이틀을 공개 해주시면,
어떤 공인단체에서 그런 일을 하는지 의문이 가서 묻고 싶습니다.
정선에 포크레인 공사를 정선문화원에서 무료로 다 해준다고 하면
정선에 포크레인 하시는 분들 포크레인 정선문화원에다가 다 세워놓고 항의 할 것입니다
다른 방법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문화 홍보와 마케팅이 가능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추락시키면서까지 그렇게 절박하게 정선문화원을 운영 하는 것
상당히 안타깝습니다
정선문화원의 역할과 기능이 무엇인지를 제데로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사)한국사진작가협회 디지털아트분과 부위원장
(사)한국사진작가협회 강원도지회 사업간사
강원포토 대표 전석원 “

 

 



-정영신씨가 찍은 아래 사진들은, 전시가 끝나는 지난 15일 전시장을 방문한 사람들이다.-

대구에서 온 양기원씨, 부산에서 온 최종렬씨, 서울에서 온 이도영, 심재현, 이명화, 송민준, 손영주, 이해인, 박찬의씨 정선의 이하윤, 이진순씨, 그리고 무지개빛 청개구리라는 이은영, 엄세빈, 박상우, 박준우, 박용현, 전도연, 송영은, 김민지, 박종선, 김봉섭, 신윤택, 정우준, 임나경 학생 등

 

 

 

 

 

 

 

 

 

 

 

 

 





 

 

지난 9일 벼루고 벼루던 이명동선생 댁을 방문키로 했다.
일주일 전부터 선생님께서 한 번 오라는 전화를 하셨으나
차일피일 미루다 뒤늦게 날짜를 잡게 된 것이다.

아침 일찍 전화를 드렸으나 핸드폰이 꺼져 있었다.
선생님 핸드폰은 잘 연결되지 않는 고물이라 내심 걱정되었다.
네 번째 전화에서 어렵사리 연결되어 아내와 함께 부랴부랴 약수동 자택으로 달려갔다.

마중 나온 선생님보다 밝게 웃으시는 사모님의 모습이 더 좋았다.
끼니마다 선생님께서 쑨 죽으로 연명해 그런지 초채한 모습이긴 하나
아픈 곳이 하나도 없다며 해맑은 웃음을 지어셨다.
“하도 죽을 많이 끓여 이젠 죽 박사가 됐다”며 선생님도 웃으셨다.

탁자 위에는 이번에 나온 “사진예술“8월호가 놓여 있었다.
최민식선생 사진상 논란을 대충 아실 것 같아 선생님 생각을 여쭈어 보았다.
"1968년3월1일,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만든 개인사진집이 최민식 휴먼1집이다"며
말문을 여셨다.

선생께서 추천해 동아일보에서 그 책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작가정신이나 사진들이 좋아 만들었는데, 그 일로 중앙정보부까지 끌려 같다고 한다.
거지일색으로 찍은 사진 책을 만든 것이 북한의 사주를 받지 않았냐는 것인데,
동아일보라는 배경만 없었다면 큰일 날 뻔 하셨단다.
요즘 젊은 사진가들이 최민식선생의 사진을 비하하는 것은 두고 꺼낸 말씀이시다.

황무지나 마찬가지였던 초창기 우리나라 사진의 시대적 배경부터 생각해야 한다며,
평생을 몸 바쳐 일군 업적을 얄팍한 논리로 매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인맥에 의한 수상자 결정은 사람들이 정에 약해 그런 것이지만,
이젠 바뀔 때도 되었다는 말씀을 끝으로 서둘러 일어 나셨다.

“요 앞에 잘 하는 도가니탕 집이 있으니 가자”
이번에는 제가 대접하러 왔으니 선생님께서 계산하면 안 된다고 했더니,
‘씰데없는 소리’라며 말을 자르신다.
가게 가서는 주인더러 ‘이 사람한테 돈 받으면 다시 안 온다’며 엄포까지 놓으신다.

자리를 끝낸 후 댁까지 모셔 드리겠다는 말도 일거에 뭉게버리고,
지하철 에리베이터까지 따라 내려 오셔서 민망스럽게 만든다.
“선생님 부디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사십시오.
저도 마누라 아프면 선생님께 죽 쑤는 거 배우러 올게요.”

사진, 글 / 조문호

 

 

 

 

 

 

 

 

 

 


 

 

정선시외버스터미널에서 열리고 있는 ‘프로젝트 장에가자2’ 사진전도 이제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호객행위로 전시장의 공백을 메워가는데, 막상 사진전에 들려 초상사진을 찍은 사람들은 대 만족이었다.
지척에 있는 좋은 전시를 모르고 지나칠 뻔했다며 정선군의 홍보부재를 아쉬워했다.

지난 7일에는 시간 내어 찾아 온 지인들이 많았다.
정선의 문인 안영환, 김우영씨를 비롯하여 장승공예가 서덕웅, 최원희, 귤암리 최연규, 지동진, 신승철씨 등

여러 명이 들려 축하해 주었고, 그 외에도 전제덕, 이서정, 김혜진, 전형수 이성학, 이승준, 정상임, 임기덕,

강효순씨가 들려 초상사진을 찍었다.

메마른 삶의 현실에 장터가 유일한 희망이다. 모두들 장에가자.
이 전시는 오는 15일까지 열린다.

사진: 정영신 / 글 조문호

 

 

 

 

 

 

 

 

 

 

 

 

 

 

 

 

 

 

 

 

 

 

 

 

 

 

 

 

 

 

 

 






 

 

정선 장날을 맞은 지난 7일 정오 무렵, 정선아리랑시장을 찾아 나섰다.
사진도 찍고 시장식당에 들려 곤드레 밥을 사먹을 작정이었다.
‘장에가자’ 사진전이 열리는 터미널에서 시장까지는 걷기엔 좀 먼 거리였다.

 
이 날처럼 무더운 날씨는 생전 처음이었다.
밀리는 자동차 사이로 어렵게 주차하였으나, 내려 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푹푹 찌는 열기에 숨이 탁탁 막혔다.

장터에는 사람 반 물건 반이란 말이 실감날 정도로 발 디딜 틈 없었다.
사람들을 헤집고 식당까지 갈 엄두가 나지 않아 주변을 돌며 사진만 찍었다.
난전에는 철이 철인지라 옥수수가 많았으나 그보다는 시원한 냉차가 눈에 들어왔다.

점심시간이라 장터공연은 중단되었지만 사람들은 모여 앉아 연신 부채를 흔들었고,

자신의 더위보다 데리고 나온 강아지에 열심히 부채질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더운 날씨에 사람들과 부딪히기 싫어 시원한 가게를 찾아 나섰다.

시장입구의 농협 ‘하나로마트’에 들어섰더니, 그 곳에도 사람들로 가득했다.
모두들 물건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아이스크림 하나 사 들고 더위를 식혔다.
시장 안의 매장들도 그 많은 사람에 비해 상품은 잘 팔리지 않았다.

요즘 정선에는 피서 온 관광객들로 연일 북새통을 이룬다.
하루 전에 들린 평일도 장은 열렸으나, 장날 보다는 한결 여유로웠다.
외곽에는 어린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있었고, 시장조합의 이윤광 이사장은 손자를 업고 시장바닥을 돌아 다녔다.

질서정연하게 들어 선 매장이나 상인들의 익숙한 손놀림에서 정선시장만의 저력이 느껴졌다.

성공한 정선아리랑시장을 지켜보며, 재래시장의 밝은 내일을 점쳐본다.

사진, 글 / 조문호

 

 

 

 

 

 

 

 

 

 

 

 

 

 

 




 

 

시세이선생의 ‘격동한국 50년’사진전에서 반가운 분들을 많이 만났다.

개막식이 끝나고 헤어지기 아쉬워, 몇몇 분들이 시세이선생 내외분을 모시고 인근 맥주 집을 찾았다.

 

자리에 함께한 분으로는 한정식선생을 비롯하여 전민조, 김보섭, 이기명, 이규상, 안미숙, 정영신, 김남진,

안해룡, 이상엽, 김지연, 이상봉, 김승혜, 조성호, 견석기, 남 준, 곽명우씨 등 20명이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모자를 돌려 술값을 걷을 작정이었으나, 담배 피우러 나간 사이에 시세이선생께서

먼저 계산하고 일어 나셨다. 가난한 원로사진가의 주머니를 털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이후 대부분 자리를 떠났으나 김보섭, 안해룡, 김남진, 이상엽, 조성호, 견석기씨 등 여러 명이 남아 술을 더 마셨다.

 

그 때 옆자리에 앉은 안해룡씨로 부터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우리나라의 사진가들은 관람객이나 독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위안부 사진을 찍었지만, 제목만 없다면 그냥 할머니 사진이지 아무도 위안부사진이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은 조선족 학교의  오랜 역사를 말하기 위해 그 학교에서 배웠던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들의 삼 세대를 함께

교정에 세워 찍었다고 한다. 그 사진 한 장으로 조선족 학교의 역사가 설명되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진집 제작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진들의 나열식 편집에서 벗어나 부분적인 내용끼리 모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옳은 말이었다.

 

그는 다재다능한 후배다.

80년대 후반 ‘사진집단 사실’에서 처음 만났는데, 90년도 나의 ‘전동동588’전시 팜프렛도 그 친구가 만든 것이다.

일찍부터 사진은 물론 편집에도 남다른 재능이 있었는데, 지금은 취재에다 다큐영화까지 여러 가지 일에

일가견을 갖고 있었다.

 

오랫동안 각 자의 길을 가느라 만남의 시간이 없었지만, 가끔 만나 그의 조언을 듣고 싶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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