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해, 김석종씨의 전시작처럼 비사진적인 작품을 사진으로는 보지 않는다.
이러한 작품들은 회화의 영역에 가깝지만, 단지 찍는다는 이유로 사진에 분류되고 있다.

사실 회화와 사진의 경계마저 허물어진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사진을 활용하는 박불똥씨나 안창홍씨 같은 화가들도 있다.

이미 사진계도 주관에 의한 파인아트가 대세로, 그림보다 울림이 더 큰 작품들도 나오고 있다.
그 방면의 대표적인 국내 작가로는 원로 황규태선생이 선구자 격이다.
그 다음 꼽을만한 중진 몇몇 중의 한 사람이 김석종씨 인데, 이 분은 항상 아웃사이드라 조명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학맥이나 지연이 안 닿아 그런지, 사진판에 줄을 설줄 모르는지, 그 많은 사진상 한 번 받아본 적 없고,

한국사진을 대표하는 기획전에도 번번이 빠져있다. 이게 한국 사진판의 현주소다.

그러나 그는 열심히 작업하고 있고, 작품들도 여전히 잘 팔리고 있었다.
매기가 없어 작품이 잘 안 팔리는 요즘에 닷새 만에 아홉 점이 팔려 나갔다.
가격형성도 거품 빠진 합리적인 가격이었다. 

20R 정도의 규격으로 열장만 뽑는 작품이 200만원이면 그의 커리어에 비해 싼 것이다.

김석종씨의 청담동 ‘갤러리 두’ 초대전인 ‘Sea Lights’는 7년 가까이 작업해 왔다고 한다.

그는 한마디로 빛을 자유자재로 요리하는 마술사였다. 여러 가지 노출의 변화로 빛을 포개기도 하고,

섞어 올려서 만들어낸 다양한 질감이나 색감이 그림 빰 칠 정도였다.

물체를 빛 에너지로 환원시키는 작업의 일환이라는데,

에너지를 충돌시키고 확장시켜 자기만의 바다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 전시는 10월20일까지 이어진다.

사진,글 / 조문호








[전시장 및 주변 스케치]














고종 초상 사진. 제공-국외소재문화재재단 © News1



(서울=뉴스1) 박창욱 기자 = 한국 근대 서화가이자 사진가인 김규진(1868~1933)이 1905년 경운궁(덕수궁)에서 촬영한 황제복식 차림의 가장 오래된 고종황제 초상 사진이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의 조사를 통해 확인됐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사장 안휘준)은 지난 4월 미국 뉴어크박물관(Newark Museum)에 소장된 한국문화재에 대한 조사를 실시한 결과, 이 박물관에 소장된 고종황제 초상 사진이 지금까지 알려진 한국 사진가가 촬영한 대한제국 황실 사진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5일 밝혔다.

이 고종황제 초상 사진은 1905년 덕수궁에서 김규진이 촬영해 미국 외교사절에 제공한 것으로 촬영 장소와 시기, 그리고 사진가 이름이 정확히 기록되어 있어 큰 의미를 갖는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사진뿐 아니라 사진이 부착된 앨범과 이 앨범이 보관된 목제 상자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아울러 이 사진은 입수 경위도 명확하며 복제본이 아닌 오리지널 프린트라는 점에서 매우 가치가 높아 우리나라 근대사 연구 및 사진사 연구에 있어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된다.

김규진은 그동안의 연구에서 대한제국 황실의 사진가로 활동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 전하지 않았다. 이번 발견으로 김규진이 황실 사진가로 활동하였음이 증명되었을 뿐 아니라, 1907년에 천연당(天然堂) 사진관을 열기 이전부터 사진가로서 활동하였음이 확인됐다.

또 이 사진이 덕수궁 중명전(重明殿) 1층 복도에서 촬영되었다는 점도 밝혀졌다. 사진 아랫부분을 보면 서양식 타일이 있는 바닥에 카펫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는데 타일 문양을 비교해 보았을 때 현재의 덕수궁 중명전 1층 복도의 타일과 일치하고 있다.

이번 조사에 참여한 장진성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고종 초상 사진은 여러 점이 전하지만, 뉴어크박물관 소장 고종 초상 사진은 연대와 작가가 함께 작품에 기록된 유일한 예”라며 “단순히 왕의 초상이라는 미술사적 가치를 넘어 1905년 격동하던 한국근대사의 양상을 알려주는 역사적 가치도 지니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 사진은 미국의 철도 및 선박 재벌이었던 에드워드 해리먼(1848~1909)의 소장품이었던 것을 그 부인이 1934년 뉴어크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다. 해리먼은 1905년 당시 대통령 루즈벨트(1858-1919)의 지시로 증기선 만주호(SS Manchuria)를 타고 아시아 각국을 순방했던 미국의 대규모 외교사절의 일원이었다.

그는 1905년 9월 대한제국 황실을 예방하였다. 고종 초상사진을 비롯해 그가 갖고 있던 한국문화재들은 당시 황실에서 선물로 받은 것으로 보인다. 유사한 초상사진이 미국의 프리어-새클러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는 고종이 순방단의 또 다른 일원이었던 루즈벨트의 딸 앨리스 루즈벨트(1884-1980)에게 선물하였던 것이다.

당시 고종은 일본의 한국 병탄 의도가 날로 드러나는 가운데, 미국의 도움을 얻고자 순방단을 극진히 대접했다. 그러나 미국 사절단은 한국 방문에 앞선 일본 방문에서 일본과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상호 인정하기로 한 상태였다.

해리먼이 뉴어크박물관에 기증한 한국문화재는 이외에도 갑주(甲?) 일괄품과 조선 말기 화원화가였던 석연(石然) 양기훈(1843-1919 이후)의 노안도(蘆雁圖)도 두 폭이 있다. 갑주 일괄품은 한말 한국에 왔던 외국인들에 의해 많이 수집되었던 고급 갑주로써, 잃어버리기 쉬운 투구의 첨대와 술장식까지 거의 모든 구성품이 완전하게 남아있다. 전용 칠기 보관함과 함에 담는 의향(衣香)까지 그대로 남아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두 유물 역시 해리먼이 대한제국을 방문했을 당시 고종의 초상사진과 함께 황실에서 선물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뉴어크박물관에서 조사한 한국문화재 자료를 모두 정리하여 도록 형태의 보고서로 간행할 예정이다.
cup@


김보섭씨의 ‘인천 청관’사진 전시회가 열린  지난 1일, 충무로 비지찌개집에서 뒤풀이가 있었다.
작가 김보섭 내외를 비롯하여 한정식, 이규상, 김남진, 엄상빈, 류은규, 안미숙, 곽명우,

장 숙, 허현주씨 등 여러 명이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인천의 다큐사진가 김보섭씨의 ‘인천 청관’ 사진집이 눈빛사진가선 16호로 출간되었다.
지난 10월1일 오후6시, 그 사진집 출판을 기념하는 전시회 개막식이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렸다.


사진가 한정식선생을 비롯하여 ‘갤러리 브렛송’ 김남진관장, ‘눈빛출판사’ 이규상대표의 인사와 격려가 이어졌다.

김보섭씨는 프로젝트로 비쳐주며 사진에 담긴 이야기들을 들려주기도 했다.

대부분의 사진들을 20년 전 ‘삼성포토갤러리’에서 본 사진이지만, 그 때보다 감흥이 훨씬 더 컸다.

세월의 두께가 주는 가치였다. 퇴색된 집들과 사물들, 그리고 그곳에 뿌리박고 살아 온 사람들의 애잔함이 가득했다. 

지나치며 찍은 것이 아니라, 사진가가 그들의 삶 깊숙이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든 것은 다 사라지겠지만, 사라져가는 화교에 대한 안타까움도 곳곳에 배어 있었다.

김보섭씨는 사라져가는 화교의 소중한 기록을 남긴 것이다.
이를 축하하는 건배 제의를 최광호씨가 했다.
한정식, 이규상, 김남진, 엄상빈, 윤길중, 류은규, 박병문, 안미숙, 정영신,

곽명우, 장 숙, 허현주, 이영우, 이시영씨 등 참석한 많은 분들이 함께 축배를 들었다.


사진,글 / 조문호





































발행처 / 눈빛출판사 / 사진집 가격/ 12,000원





정선 온지 나흘 만에 그 동안 지킨 맹세, 개 맹세가 되어버렸다.

정선에서는 아날로그로 산다며 컴퓨터까지 버렸으나, 인터넷에 접선하러 읍내에 나간 것이다.

끝물의 옥수수 맛있을 때 보내자는 구실을 댓지만, 우체국 인터넷을 사용할 생각이 앞섰다.

 

내가 운영해 온  인사동사람들블로그부터 접속했다.

매일 일기 쓰듯 자질구레한 이야기와 사진들을 올려 온 터라, 안달이 난 것이다.

블로그를 확인해 보았더니 사흘간의 접속 율이 엄청나게 불어나 있었다.


진원지는 폐북에 링크시켜 놓은 또 다른 종군위안부, 양공주에 대하여...”란 미군위안부 이야기였다.

그 이전에 올린 부역자 학살사진도 접속률은 높았으나, 이 정도는 아니었다.

21일 하루동안 5,000여명이 접속하고 사흘 만에 85명 공유에 9,000명 넘게 본 것이다.

 

어떤 분은 일본군 위안부와는 격이 다르다는 댓글도 나왔다.

물론 강제로 끌고 간 일본군 위안부와 비교할 수 없으나, 전쟁이 낳은 비극이라 차례대로 나열했을 뿐이다.

어떤 분은 환향녀가 화냥년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는 고증도 주셨다.

아마 미군위안부 문제가 너무 가려져, 젊은이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모양이었다.

 

우체국 들리기 전에 정선터미널문화공간에서 전시하는 김정숙씨 그림전에도 들렸다.

정선의 아름다운 비경들이 다양한 형식을 빌어 화폭에 담겨있었다.

내가 사는 귤암리 작가라 애착을 가졌으나, 전시장엔 작가도 관객도 없어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전시문화에 대한 지역적 한계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으나,

'정선문화원'과 작가들이 머리를 맞대 묘안을 찾아내야 할 것 같다.

일전에는 터미널 입구 도로변에 전시 내용을 알릴 수 있는 세로형 광고 앵글을 만들자는

제안도 했으나, 아직 감감소식이다모두들 적극적인 대처가 없어 아쉽다

 

추석이 얼마 남지 않아 한가롭게 여가를 즐길 때는 아닌 것 같다.

이틀 동안 대목장도 보고 사진도 찍을 겸, 아내와 촬영 길에 나서기로 했다.

어느 시골장터에 가도 대목장은 사람들이 붐벼 활기차기 때문이다.

 

 

사진,글 / 조문호


아내가 달밤에 체조한다.


빨리 창수네 집에 가야는데, 아내는 메시지 보내느라 정신이 빠져 있다.


최종대, 이선녀 내외와 저녁상에 둘러 앉았으나 술병이 보이지 않는다. [정영신사진]


정선 사거리에서 상 파는 장돌뱅이다, 하루에 다섯개 팔면 많이 판다는데, 마진은 얼마나 될까?


정선, 귤암리 화가 김정숙씨가 '정선터미널문화공간'에서 초대전을 하고있다


전시되는 김정숙씨의 작품 중에서...



위안부 문제는 고려,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치욕의 역사다.

그 당시 중국 채홍사를 통해 우리나라 처녀를 수천 명씩 데려갔다고 한다.

기력이 쇠진해져야 고향으로 돌려보낸다고 해서 환향녀라 불렀다 한다.

그 이후 2차 대전에 동원된 일본군위안부와 한국전쟁으로 파생된 미군위안부에 이르기 까지

전쟁마다 따라다닌 위안부 문제는 여성 최대의 잔혹사였다.

    

 


새삼 미군위안부 문제를 말하는 것은, 그동안 양공주에 대한 개인적 인식이 한 참 잘 못되어서다.

그들을 비하하는 양갈보라는 말을 들은 어린 시절에는 허영에 들떠 양놈이나 찾아 나선 바람난 여자들로 알았다.

하이힐에 짙은 화장을 하고 껌이나 짝짝 씹는 화류계 여성의 대명사로 각인된 건,

청년 시절 본 신상옥감독의 지옥화같은 양공주를 소재로 한 영화들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난 달 조선일보미술관에서 열린 구와바라 시세이선생의 한국격동50사진전에 나온

미군기지촌 여성들을 살펴보며, 그 자책에 따른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들은 생존하기 위해 기지촌에 뛰어 들었거나 어쩔 수 없이 팔려 온 순박한 우리들의 누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군위안부에 대한 지난 자료를 찾아보게 되었고, 그 가슴 아픈 실상에 치를 떨게 되었다.

    

 

미군위안부는 미군을 상대로 몸을 파는 여성을 말하지만, 일종의 정신대나 다름없었다.

양공주는 그래도 점잖은 말이고, 양갈보, 양색시, 유엔마담, 히빠리, 쥬스 걸 등 별의 별 호칭이 다 있었다.

더 귀가 막힌 사실은 1951년 정부에서 한국군 위안소를 직접 운영했다는 기록도 있었다.

이 한국군 위안소는 국군과 유엔군 장병들이 이용하는 유곽이었는데, 특수위안대, 5종 보급품으로 불렀다 한다.

그 당시 드럼통에 위안부를 한명씩 넣고 트럭에 실어 최전선까지 투입했다는 기록에는 할 말을 잃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이들을 달러벌이, 애국자, 민간외교관으로 치켜세워,

62년 한 해 동안 2만 명 이상의 미군위안부가 65,000명의 미군을 상대했다.

65년과 80년 사이는 동두천에만 평균 2,900명의 미군위안부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들에게 인권이란 찾아 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 당시 미군 천 명당 성병 발병자가 700여명에 달할 정도로 성병이 창궐하자

성 접촉자를 추적해 속칭 밍키하우스라 불리는 낙검자수용소에 완쾌될 때 까지 감금했는데,

약물을 과다 투여해 페니실린 쇼크로 사망한 환자도 속출했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미군에게 성폭행 살해된 사건을 법원에서 영장을 기각해

용의자인 병사를 출국시켜 수사를 미궁에 빠트리기도 하고,

인신매매로 들어 온 소녀가 탈출해 파출소에 신고를 해도 경찰이 다시 그 곳으로 데려 주는 등,

인간의 탈을 쓴 짐승들도 득실거렸다.

    



그러한 문제점을 알면서도 방관했던 것은 바로 돈 때문이었다.

1960년대의 기지촌 성매매 수입이 국민총생산의 25%를 차지할 정도로 미군 위안부가 한국 경제에 큰 기여를 했단다.

1970년대에는 청와대 관리가 정기적으로 기지촌에 가서 미군 위안부 여성들을 모아놓고 국익을 위해 봉사함을 격려 했으며,

1973년에는 민관식 문교부 장관이 조국 경제 발전에 기여해 온 소녀들의 충정은 진실로 칭찬할만하다고 말해

논란을 일으킨 적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1971년 박정희 정권이 정부 각 부처 차관들을 모아 기지촌 활성화 정책을 만든 것은 주한 미군 철수를 막기 위함이란다.

국익을 위해서라면 몸 파는 걸 수출까지 할 수 있는 나쁜 놈들이다.

이런 나라에서 태어나고, 이런 위정자들 아래 살아왔다는 게 슬프다.



 

지금도 기지촌 주변에서 할당된 쥬스를 팔기 위해 몸을 파는 위안부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그 역할을 필리핀 등지의 외국인들이 대신 하지만, 아직도 그들은 인권 사각지대에 있다.

속아서 한국에 들어오고, 미군과 동거해 자식까지 낳아도 본국으로 도망쳐 버리는 미군이 많다고 한다.

    

 

지구상에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은 어떠한 방법이든 성매매가 끊임없이 이루어 질 것으로 생각된다.

인간의 본능과 자본주의 속성이 만들어 낸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더 이상 인권이 유린되는 일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사진 : 1965년 구와바라 시세이 선생이 찍은 사진이다. 눈빛출판사에서 발간한 격동한국50사진집에서 옮겼다.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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