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상호, 왕인숙씨의 아들 태영군과 강찬모, 정영임씨의 딸 현인양이

지난 5281230아펠가모 반포'에서 화촉을 밝혔다.

 

이번 결혼이 예사롭지 않은 것은 이십 년 전인

초등학생 시절부터 가까웠던 친구 사이라는 것이다.

 

이보다 더 좋은 인연이 어디 있겠는가?

살다 보면 어린 시절 인연이 결혼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늘 친구처럼 행복하게 살기를 축원한다.

 

예전에는 딸 시집보내는 부모의 마음은 딸을 잃은 듯

허전함을 감출 수 없었으나, 이젠 세상이 역전되었다.

아들 장가보내는 부모 마음과 뒤바뀐 것이다.

 

딸을 시집보낸 것이 아니라 아들 같은 사위를 얻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날 결혼식에는 많은 지인이 참석하여 결혼을 축하했다.

 

이성 구로구청장을 비롯하여 조준영, 오세필, 전활철,

이만주, 서길헌, 조해인, 김수길씨 등 많은 분을 만났는데,

김명성씨는 부인 지혜숙씨와 아들 한성군까지 대동했다.

 

강 화백께 다시 한번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

 

사진,  / 조문호

 

 

 

지난 일요일 정오무렵, 춘천 ‘미래컨벤션웨딩홀’에서 오세필, 이종난씨의 장남 원석군과

황석규, 이정순씨의 장녀 임정양이 화촉을 밝혔다.

 

원석이 장가가는 걸 보러 모처럼 춘천에 갔는데, 웨딩홀이 마치 이산가족 만나는 장소같았다.

친지들 만나는 혼주야 말할 것도 없지만, 하객들도 반가운 분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정영신, 김명성씨와 함께 출발한 예식장은 혼주인 오세필씨 가족을 비롯하여

최백호, 정기범, 이정숙씨 내외와 공윤희, 임태종, 손연칠씨 등 많은 분을 만날 수 있었다.

 

울산 신랑이 신부 댁이 있는 춘천에서 가진 혼례였으나,

코로나 시국에도 불구하고 많은 하객들이 축하하러 왔었다.

 

여태 늙어가는 스스로의 처지를 잊고 지냈는데,

모처럼 만난 지인들의 늙어가는 모습을 보고서야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정기범씨와 손연칠씨도 이전보다 늙어 보였고,

최백호씨는 나보다 세 살이나 아래인데도 이전 같지 않았다.

 

그동안 희귀병에 걸려 고생을 많이 한 모양인데,

돈벌이에 급급한 큰 병원들의 문제점에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다행이 그 병을 잘 아는 분을 만나 완쾌했으나 체중이 10킬로나 빠졌단다.

 

어제께는 가수 이동원씨의 부고에 가슴이 아팠다.

이제 벗들이 하나 둘 떠나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지만, 결코 남의 일이 아닌 것이다.

 

지인들과 어울려 3층 연회장으로 올라갔더니, 김상현씨가 뒤늦게 찾아왔다.

다들 차를 끌고 와 술 한 잔 마시지 못했으나, 춘천까지 와서 어찌 그냥 갈수 있겠나?

 

김명성, 김상현, 정영신씨와 소양강을 찾아가 늦가을의 정취에 빠지기도 했다.

 

휴일이라 차 밀릴 것을 염려해 춘천까지 와서 닭갈비 맛도 보지 못하고 출발했는데,

어이쿠! 다들 이심전심인지 차가 엄청 밀리기 시작했다.

김상현씨가 들려주는 남인수씨의 낭낭한 노래 소리에 위안해야 했다.

 

다시 한 번 오세필씨의 장남 원석군의 결혼을 축하합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정주영은 정영신동지의 친동생이고, 한 때 나에게는 처제이기도 했다.

지난 토요일 둘째 딸 현아 결혼식이 마포에서 열린다는 기별에 집안 식구들이 다 모였다.

작년에 치룬 첫딸 소현이 결혼식에 이은 두 번째 경사였다.

 

둘 다 사랑이 얼마나 고팠으면 사람을 많이 모울 수 없는 코로나 시국에 날을 잡았겠나?

제 애미가 어려운 살림살이에 자식들 혼례 치루려고

남의 집 길융사마다 적금 들어 둔 게 얼마나 많은데...

 

그래도 철부지 딸에게 듬직한 사위를 짝지어 주는 기쁨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오죽하면 정동지 말에 의하면 "돌아가신 엄마가 말썽꾸러기 두 딸 시집보냈다는 이야기 들었으면

너무 좋아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것이라" 말하겠는가?

 

작년에 환갑을 맞은 정주영씨의 삶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운명의 드라마다.

나이 삼십에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병아리 같은 두 딸과 아들을 혼자 키워냈으니,

그 고생이야 보나마나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름까지 바꾸었겠는가?

친일파 김활란이가 싫었겠지만, 활란이란 이름을 돈 많은 정주영으로 개명한 것이다.

 

청상과부의 불타는 가슴도 생존의 절박함 앞에는 눈 녹듯 녹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제 살 파먹는 보험회사 외판원에서부터 안 해 본 게 없을 정도로 악착같이 살았는데,

이제 아들 딸 대학 졸업시켜 시집까지 보냈으니, 그 뿌듯함이야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이게 평범한 어머니들의 자식을 향한 마음이고, 이름 없는 소시민의 성공담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좋은 잔칫날, 코로나 역풍에 축배대신 눈물을 훔쳤지만...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떠나간 남편 김영덕씨는 전기공학과를 나와 전기차를 만들겠다는 야심찬 꿈을 키우며 자동차정비소로 생계를 끌어갔는데, 

어느 날 감기증세로 입원해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얼마나 살 길이 막막했으면 백일도 되지 않은 아들을 안고 6개월 동안 울었다고 한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듯 시집 간 현아는 강북삼성병원 간호사로 일하며 코로나와 싸우는 방역의 전사로 나섰고,

첫째 딸 소현이는 시집살이도 없이 편하게 잘 살고 있다.

막내아들 희중이는 스스로 나라 지키는 직업군인을 택해,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게 된 것이다.

 

김현아양의 결혼과 정주영씨의 헌신적인 삶에 축하와 격려를 보낸다.

 

그 날은 신부대기실 들리는 틈에 순서를 놓쳐 식장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50명까지만 들어가고 나머지는 모두 식당으로 가야했다.

친지 결혼식장 와서 예식사진 한 장 찍지 못한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지난 해 소현이 시집 갈 때는 식사 대신 기념품을 주더니, 장사가 안 된다며 다시 뷔페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 사육장 먹이처럼 칸칸이 갇혀 먹어 사람인지 짐승인지 모르겠고,

뒤통수에는 결혼식 스크린이 왕왕거리는데다 사람까지 많아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분간 없었다.

이승 풍경인지 저승 풍경인지 헷갈렸다.

 

그런데, 뒤늦게 특혜 아닌 징벌의 보너스까지 받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 온지 사흘 만에 방역당국에서 자가 격리라는 통보가 왔는데,

결혼식장에 확진자가 생긴 바람에 집에서 꼼짝하지 말라는 청천벽력이었다.

결혼식장 CCTV를 샅샅이 뒤져 확진자 동선 따라 마스크를 벗은 사람만 찾아냈다는데,

하필이면 커피 마시는 모습이 찍혀버렸다.

앉으나 서나 마스크만 쓰면 살아 남는다는 교훈이다.

 

격리가 끝나는 7월 4일까지 집에서 징역 아닌 징역살이를 해야한다.

세상에! 쓰레기까지 내 오지 말라는데, 화장실 없는 쪽방에서 똥은 어디다 쌀까?

아무래도 내가 너무 오래 산 것 같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날 12일 신도림 테크노마트웨스턴 베니비스 7층 그레이스홀에서

정주영씨의 딸 김소현양과 이규철, 양미순씨의 아들 이성표군이 화촉을 밝혔다.

 

철부지로만 알았던 ,정영신씨의 조카 소현양이 시집을 간다니,

세월이 참 빠르긴 빠르다.

 

외할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정영신씨 말로는 저승에서도 깜짝 놀랄 일이란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는 때라 결혼식 올리기가 난감했으나,

일 년 전부터 예약해 둔 결혼식이라 어쩔 수가 없었단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2,5단계라 식장에 50명밖에 들어갈 수 없다는데,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정영신씨와 시간 맞추어 갔는데, 시골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서울 근교의 친척만 왔는데도, 신랑 측과 우인을 합하니 50명이 훨씬 넘었다.

그렇다고 인원수를 제한해 들일 수는 없으니, 위험한 결혼식이 아닐 수 없다.

 

다들 마스크를 쓰고 있어 하객이 누가 누군지도 몰라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결혼식이 진행되었다.

 

식순에 따라 예식이 진행되었는데, 하객들은 바짝 쫄았으나,

신랑 신부는 좋아서 연신 싱글벙글하네.

 

목숨 걸고 하는 결혼식인데, 사랑이야 얼마나 뜨겁겠나?

 

신랑 성표군이 신부 소현이를 위해 노래를 불렀는데,

요즘 노래라 모르지만, 노래는 정말 잘 부르더라.

 

또 한 가지 바뀐 풍정이라면 신부가 부케 던지는 장면이었다.

대개 신부가 될 여자 친구에게 던지는 것이 상례인데,

신랑이 될 남자친구에게 던진 것이다.

 

하기야! 순서에 남녀가 어디 있겠는가?

잘못된 관습은 모두 바꾸어야 한다.

 

신랑 신부만 제외하고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있었는데,

주례선생께선 기념사진 찍을 때도 마스크를 벗지 않았다.

사진기사가 좀 벗어달라고 부탁했는데,

잠시 벗었다가 바로 쓰는 걸 보니, 코로나가 무섭긴 무서웠다.

 

신랑 신부 친구들도 모두 마스크를 쓰고 찍었는데,

세월이 지나면 누가 누군지 알아볼지 모르겠다.

코로나 시대가 만들어 낸 살풍경이다.

 

오랜만에 반가운 친척을 만났으나 밥도 한 끼 못 먹을 판이었다.

식당은 텅텅 비었는데도 다들 기념품으로 대체하여 그냥 가는 것이다.

 

정영신씨와 둘이서 밥도 못 먹고 돌아 왔는데, 마침 조카 지윤이로 부터 연락이 왔다.

어디서 밥이나 먹자는데. 정영신씨 집 부근인 ‘풍년집’으로 정한 것이다.

 

김중호, 심지윤 내외와 딸 유원이를 만나 점심 겸 저녁을 먹게 된 것이다.

소주를 반주로 돼지 한 마리 잡았는데, 고기가 모자라 소까지 잡았다.

덕분에 고기를 포식하는 호강을 했는데, 조카가 계산을 해버렸네.

요즘 일이 많아 밥 살 형편은 된다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가족들이 한 자리 모여 뒤풀이 잔치라도 열 수 있도록 빨리 코로나가 물러가야 할텐데,

쉽게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 같다.

 

상표야! 소현아! 알콩달콩 잘 살그래이~

그날 주례선생께서 하신, 서로 배려하라는 말씀 잊지 말고...

 

사진, 글 / 조문호

 



정광원, 박옥순씨의 장남 정성태군과
권태영, 박동자씨의 장녀 권민숙양이
지난20일 오전11시 분당 ‘메종드베르’8층 베르사유홀에서 화촉을 밝혔다.




정영신씨의 조카인 성태군은 권민숙양과 오래전부터 연인관계였다고 한다.
무슨 사연인지 모르지만, 서로 헤어져 노총각으로 살았는데,
9년 만에 권민숙양이 아들 정 훈을 데리고 나타난 것이다.




아마, 둘 다 결혼 하지 않았던 것도 서로를 못 잊은 것 같았다.
애인만 돌아온 게 아니라 생각지도 못한 아들까지 데리고 나타났으니,
어찌 경사중의 경사가 아니겠는가?




입이 쩍 벌어져, 부랴부랴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는데,
아들 꽃다발 받는 결혼식을 치룰 줄이야 꿈엔들 알았겠는가?




결혼한다기에 정영신씨 따라 갔더니, 서울과 분당 사는 가족은 물론,
광양과 함평 사는 친척까지 모두 만나게 되었다.
다들 건강한 모습을 뵈니, 반갑고 고맙기 그지없었다.




성태야! 행복하게 잘 살아라.

마누라 만 그런게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이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토요일에 참 아름다운 결혼식을 보았다.


글도 그림도 깨어있는 이 시대의 청백리 이 성구청장의 둘째 아들 영일군과

이병직씨의 딸 민석양이 ‘신도림웨딩시티’에서 화촉을 밝힌 것이다.


이 날은 ‘눈빛출판사 30주년 기념전’ 부대행사인 이광수씨의 강의가 강남에서 있었지만, 포기해야 했다.






그런데, 매번 늦장 부리는 이 못된 버릇은 죽을 때까지 고치지 못할 것 같다.
장소를 잘 모르면 일찍 서두르면 될 걸, 뺑뺑 돌아 신도림역에 내렸는데, 이미 결혼식은 치루어 지고 있었다.

아는 사람들은 모두 식당으로 옮겼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영일군 장가가는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두려 남은 것이다.





어린 소년 소녀로 만나 친구에서 연인으로 부부로 골인한, 그 일편단심 민들레 커플이 아니던가.

그런데, 또 하나 놀란 것은 의례있는 주례사를 생략한다는 것이다.
성혼선언서를 갖고 나온 이 성씨가 주례사 아닌 주례사를 간략하게 대신 한 것이다.
처음엔 좀 의외로 생각되었으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진짜 바람직한 일이었다.
부모보다 잘 아는 자식이 어디 있겠는가?





이 성씨가 아들 영일군의 장점과 단점을 일일이 열거했다.
착하고 명석한 두뇌는 장점이 되겠으나, 끈기나 용기가 좀 부족하단다.
부족한 것은 신부 민석양이 보완해 주고, 신부가 부족한 것은 영일이가 보완하라는 부탁을 했다.
아무리 유명 인사의 공자 말씀도, 이보다 더 좋은 주례사는 있을 수 없었다.

이름이나 간판 위주로 내 세우는 주례의 내용이라는 게, 다 그렇고 그렇지 않던가?
어떤 이들은 돈으로 주례 설 사람을 사기도 하는데, 다 필요 없는 낭비고,
즐거운 결혼식을 지루하게 만드는 요인일 뿐이다.






잘 못된 허례의식을 가감하게 바꾼 이 성씨의 혜안이 돋보였다.

그리고, 축의금도 오만원이 넘어면 장학금으로 보내겠다고 공지했다.


이 성씨가 누구던가?
80년도에 행정고시로 서울시 공무원이 되어, 시정개혁단장을 역임했다.
많은 일들을 바꾼 장본인으로, 중요한 것은 그의 생각이 항상 깨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글 잘쓰는 '인사동 사람'으로, 지금은 구로구청장을 연임하고 있다.
한 때는 '월간문학'에서 ‘돈바위산의 선물'을 펴냈고, ’아버지‘로는 신인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성단장의 온가족 세계 배낭 여행기“는 세간의 화제를 모우기도 했다.





그런데, 아들 영일군 칭찬을 해야 할 자리에서 아버지 이야기만 늘어 놓았네.

사실, 영일이는 잘 모르기도 하지만, 아버지가 워낙 훌륭해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피는 못 속인다는 말처럼. 영일군도 밀리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신랑신부가 퇴장하는 사진을 찍고, 연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연회장은 장소가 너무 넓어, 아는 분들이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연극배우 이명희씨와 소설가 박인식, 시인 김명성, 성악가 이경오씨 등, '인사동 사람들'이 여럿 왔다는 전갈 받았는데...

혼자 음식을 챙겨 소주 반 병만 마시고 나왔더니. 그 때야 전화가 빗발쳤다. 

 

영일아~ 민석아~  부디 알콩달콩 행복하게 잘 살아라.


사진, 글 / 조문호









조햇님이가 남지현에게 장가가고, 남지현이가 조햇님에게 시집왔다.

그 것도 자식까지 잉태하여 울리는 빵빠레인데, 내 복에 이런 날이 올 줄 어찌 알았겠나?




    


햇님아! 그동안 엄마와 병든 외할매 모시고 사느라 고생했다.

짐 떠 넘긴 죄로 마음 한 구석엔 말 못할 아픔이 항상 응어리졌다.

셋방에서 가난하게 살지만, 올 곧게 살아주어 고맙고 자랑스러웠다.



 


가난이 욕이 아니라 덕이라는 변명 같은 말을 다시 한다.

만약 우리가 돈이 많았다면, 그 중독성에서 과연 헤어날 수 있었겠나?

돈이 인간성을 죽이는 원죄라는 걸 너도 잘 알잖아.



 


결혼식이 있던 25일은 마음이 들떠 일찍부터 설쳤다.

기념사진 찍는다기에, 오전 아홉시에 '하림각'으로 달려갔다.



 


사진 촬영하는 신부를 지켜보니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았다.

지난 번 선거유세장의 첫 만남에 그 사람 됨됨은 짐작했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선녀였다니...



 


조씨 집안에 호박이 넝쿨 채 굴러들어 온 경사가 아니겠는가.

더욱 믿음직한 것은 험난한 현실에 뛰어들어 바르게 살았다는 점이다.

어찌 햇님이와 천생연분이란 생각이 들지 않겠나?.



 


햇님이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칠십 나이에 지팡이 짚은 초라한 모습에서 지난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그 성질머리에 식구들마저 등진 채, 오로지 자식 하나 보고 살아온 비련의 여인이 아니던가?

호랑이 이빨같은 깡다구는 다 어쩌고, 이렇게 양처럼 온순해졌나?





오직 햇님이 만이 그 성질 다 받아주며 모셨는데,

이제 자식마저 떠나 보내게 되었으니,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나?

그래도 신혼 방이 좁아 햇님이 짐을 가져갈 수 없다니 천만다행이다.

집에 들릴 때마다 따뜻하게 손잡아 줘라.



 


시간이 다가오니 하객이 한 사람 두 사람 모여들기 시작했다.

멀리 계시는 분들이 더 일찍 왔는데, 다시 만날 수 없는 분들 같았다.

그 사연 사연은 뒤로하고 부지런히 그들 모습을 카메라에 주워 담았다.



 


다들 고맙고, 고맙습니다.

가난한 처지라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살았건만, 잊지 않고 찾아 준 그 정에 가슴이 찡하다.

예식장을 가득 메운 친지들의 고마움이 한편으론 짐처럼 어깨를 짓누른다.

뒤늦게 알았지만, 하객이 400여명이 넘었다니, 이 어찌 부담이 아니겠는가?



 


한편으론 정의당 전당대회 같았다.

주례를 맡은 심상정의원을 비롯하여 천호선, 김재남, 박원석, 양경규, 김종민씨 등 알만한 분들은 다 보였다.

한 때는 당원이었으나. 지금은 쓴 소리를 거침없이 하는 논객 이광수교수까지 부산에서 올라 오셨다.

고향 친구를 비롯하여 인사동을 사랑하는 예술가들도 많이 참석하셨다.



 


햇님을 항상 도와주는 박재송씨의 사회로 심상정의원이 주례사를 했다.

이날 심상정의원의 주례사는 부부가 일심동체라는 말은 잘못되었다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심이체임을 인정하며 뜻이 다를 땐 서로 듣고, 같을 때는 합심하라고 했다. 

정의당과 사회를 위해 일하며 더불어 건강한 가정을 만들라고 말했다.





신부가 던진 부케는 유동호위원장이 받았으나, 거리가 멀어 사진을 찍지 못했다.

예식 장면을 기록할 수 없어 아쉬웠지만, 앉은 자리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 한 두컷 찍었다.





또 하나 귀 똥찬 이벤트는 정의당 합창단의 노래 노란샤스 입은 사나이였다.

노란 셔츠 입은 말없는 그 사내가 어쩐지 나는 좋아”로 시작되는 노래가 절로 흥얼거려졌다.

분명 정의당의 히트곡이 틀림없었다.





정치를 떠나 인간적인 만남의 자리이니, 이 얼마나 뜻 깊은 자리인가?

정으로 뭉쳐 정의로운 평등사회를 만드는 것이 정의당의 존재이유지만,

정의당이 뜨지 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했다.



 


결혼식과 오찬이 끝난 후, 햇님이 엄마를 차에 태워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햇님이 없는 빈집이 얼마나 허전할까 걱정스러웠으나,

강아지 밥 챙겨 줄 걱정 하는 것 보니, 정 붙일 곳이라도 있어 다행이다 싶다,

옛날엔 짐승을 그토록 싫어하더니, 뒤늦게나마 마음을 돌렸구나.

좌우지간, 아들 키우느라 고생많았다.

지팡이 짚고 서서, 떠나가는 뒷모습을 지켜보는 눈길이 왠지 측은해 보였다.





부디, 오래살아 정의로운 평등사회가 오는 날은 보고 떠나자


 

사진, / 조문호



















































 

 

 



결혼식장에 세워진 웨딩사진을 찍었다. [촬영자 미상]



시나리오 작가이며 다큐 감독인 최건모씨가 지난 4월14일 노량진 ‘베라카채플’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나이 40이 넘도록 작업에 미쳐 연애 걸 시간조차 없었는데, 몇 달 전 결혼 할 사람이라며 한 여인을 소개했다.

예쁜 여인이 첫 인상도 너무 착해 보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알아 본 정영신씨가 너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채연희씨는 전라도 해남 처녀인데, 두 사람의 궁합이 너무 잘 맞았다.

속 궁합이야 잘 모르지만, 서로의 생각이 같고 지향점이 같다는 것보다 더 좋을 수는 있겠는가?

연인의 관계에 앞서, 친구처럼 친밀하게 지내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

서로가 하는 일에 큰 에너지가 되어 줄 좋은 배필임이 틀림없었다.




최건모씨를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2-3년 전 나의 다큐를 찍겠다고 찾아 와 처음 만났는데,

인연이 깊게 된 것은, 그가 찍은 빈민들의 영상을 보게 되며서다.

찍힌 현장의 조악함도 그렇지만, 동자동 빈민들의 삶이 너무나 가슴 아팠다.

평생 사람을 찍어 온 나는 그동안 무엇했냐는 자책감이 들 정도였다.




오랫동안 인사동을 기록해 왔으나, 더 이상 한계를 느껴 고민한 것도 사실이다.

인사동을 사랑했던 많은 예술인들이 하나 둘 떠나가는데다,

점차 정체성을 잃어 관광지로 변해가는 인사동을 지켜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현역에서 물러나야 할 나이에,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작업을 시작하는 것이 무리인 것 같았으나,

다 버리고 도전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스스로를 용서받는 의미에서 마지막 인생을 이곳에 바쳐야겠다는 각오를 다진 것이다.




그런데, 그 작업은 오가며 할 작업이 아니라, 똑같은 처지가 되어야 찍을 수 있었다.

그래서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하게 되었는데,

최건모씨는 자기 때문에 가정이 해체된다고 생각했으니, 그의 마음인들 얼마나 아팠겠는가?


우여곡절을 거쳤으나, 2년이란 세월이 지나면서 동자동의 생활도 어렵사리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사회의 규범에 불과한 법적인 절차보다 실리적으로 사는 것을 원해 왔다.

이혼은 했지만, 변함없는 동지애를 유지하며, 서로 도와주고 소통하는 모습에

최건모씨도 다소 안도하는 것 같았다.



이토록 예사롭지 않은 인연을 가진 최건모씨의 결혼 소식에 내가 장가 가듯 들떴다.

정영신씨와 결혼 선물 하나 만들어 달려갔는데, 예식장을 잘 못 찾아 좀 늦어버렸다.

목사님의 주례사가 시작되고 있었는데, 나란히 서있는 한 쌍의 모습이 너무 잘 어울렸다.




신부의 고향인 해남에서 버스를 대절해 온 친지와 이웃들도 많아 예식장은 만원이었다.

그 날 주례사에서도 말씀 하셨지만, 항상 자신보다 상대를 먼저 배려하고,

친구처럼 서로 의지하는 아름다운 삶을 이어가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날, 조준영시인도 예식장에 왔다고 했으나, 길이 엇갈려 서로 만나보지 못했다.


피로연 자리에 찾아 온 신랑의 입이 찢어질 듯 싱글벙글했는데, 함께 온 신부인들 얼마나 좋았겠는가?

신혼여행지로 일본 ‘오사까’라 했는데, 멋지고 좋은 추억 많이 만들고,

부디 행복하게 잘 살기를 축원한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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