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 전 찾아 간 결혼식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생긴 바람에 꼼짝없이 격리되어 버렸다.

쪽방은 화장실이 없는데다 사람들이 밀집해 정영신씨 집에 같이 격리될 수밖에 없었는데,

담배를 피울 수 없는 애로점은 있으나 대체로 편한 나날을 보낸다.

 

더러는 매일 붙어 있다 보면 싸울수도 있다고 주의하라지만, 동지관계인 우리 사이에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데, 20여 년 동안 전국 장터를 함께 돌아다녔지만 한 번도 그런 일은 없었다.

 

문제는 할 일이 없어 밤낮없이 잠만 자다보니 밤과 낮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유일한 소일거리가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에 포스팅 하는 일로,

강제하는 일은 아니지만 긴 세월동안 일기 쓰듯 하루에 한건씩 빠지지 않고 올려왔다.

 

그동안 포스팅한 게 무려 오천 육백에 이르니 이젠 방문객이 만만찮아 나 혼자만의 공간이 아닌 셈이다.

중요한 것은 접속 수아니라 스스로의 자료창고라는 점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기억이 가물거리니, 그 기억을 되찾아주는 곳이 자신의 블로그인 ‘인사동 사람들’이다.

 

문제는 격리되어 취재할 수가 없어 방구석에 앉아 소재를 찾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다행스럽게도 하루에 한 건씩만 올리다보니, 순서에서 밀려난 기사가 제법 있었다.

그중에 고른 것이 2개월 전에 찾아간 정읍의 ‘무성서원’인 것이다.

 

정읍시 칠보면에 있는 무성서원은 고운 최치원 선생을 비롯하여 국내 가사 문학의 효시로 상춘곡을 지은 정극인,

그리고 신잠, 송세림, 정언충, 김약묵, 김관 등 일곱 분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최치원 선생이 태산태수로 부임하여 8년 동안 선정을 펼침에 따라 1615년 주민들이 건립해 생사당을 세우고 태산사라 했는데,

1696년 무성서원으로 사액되었다고 한다.

 

서원은 선현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으로서의 역할은 물론 교육 기관으로 학문을 연구하는 곳이다.

백성을 교화한 선비문화의 중심으로 높게 평가받은 무성서원이 타 서원과 다른 점은 양반 뿐 아니라 누구나 배울 수 있는 열린 곳이라는 점이다.

자연 경관 속에 자리한 다른 서원과 달리 마을 속에 있어 주민들이 서원의 보존과 운영에 직접 참여해 온 것이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유교 중심의 정책을 펴 고려의 사원(寺院)을 대신하는

서재(書齋),서당(書堂),정사(精舍), 선현사(先賢祠), 향현사(鄕賢祠) 등을 장려했는데, 특히 세종이 이를 장려하여 상을 주기까지 했단다.

 

우리나라 서원의 역사를 살펴보면 1542년(중종 37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순흥에서 고려의 학자 안향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이듬해 백운동서원이라 이름붙인 것이 최초의 서원이었다.

그 뒤 명종 이전에 설립된 것이 29개, 선조 때는 1백 24개, 정조 때는 650개로 늘어났는데,

그 뒤부터 각 도마다 8-90개로 불어나며 일종의 특권적인 공간이 되어버렸다.

유생들은 학문을 공부하는 대신 붕당에 가담하여 당쟁에 골몰하고 심지어는 서원을 근거로 양민을 토색하는 폐단까지 생겨 난 것이다.

지금의 정치판이나 하나도 다를 바 없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점이 생김에 따라 1644년에는 서원 설치를 허가제로 하는 등 정비하기 시작했으나 성과를 얻지 못하자

1864년 흥선대원군이 서원에 대한 모든 특권을 철폐하고 서원 설치를 금했다.

1871년에는 전국의 서원과 사우 1000여 곳을 헐어 버리고 서원 토지를 거두어 국가에 귀속시켜버렸다.

무원서원은 그 와중에 살아남은 47개소 서원중 하나로 전북지역의 유일한 서원이기도 하다.

 

무성서원에서는 유학 가운데서도 특히 성리학을 공부하는데 힘썼는데,

‘격몽요결’, ‘소학’에서부터 시작해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를 읽는 것은 원칙이었으며,

입학 기준도 나이나 신분에 상관없이 독서에 뜻이 있고 배우려 하는 자는 모두 허락하였지만, 일단 입학하게 되면 엄격했다고 한다.

 

또한 성리학 개념이 여건에 맞게 바뀌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인정되어

영주의 소수서원, 함양의 남계서원, 경주의 옥산서원, 안동의 도산서원, 장성의 필암서원, 대구 달성의 도동서원, 안동의 병산서원,

논산의 돈암서원 8곳과 함께 한국의 14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제 작년에 등재된 것이다.

 

무성서원의 현존하는 건물로는 사우(祠宇), 현가루(絃歌樓), 명륜당(明倫堂), 장수재(莊修齋), 고사(庫舍) 등이 있는데,

배치는 약간 경사진 땅 위에 강당과 사당을 잇는 직선 축을 중심으로 정문인 현가루와 내삼문을 배치했다.

사당은 정면 3칸, 강당은 정면 5칸이고, 강당과 재실은 모두 마루와 온돌이 결합된 양식이었다.

또 하나 무성서원의 구조적 특징은 다른 서원과 달리 재실이 담장 밖에 세워졌다는 점이다.

 

무성서원은 외삼문 대신 전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인 현가루가 정문 역할을 하고 있었다.

1891년에 세워진 현가루는 칠보8경 중 제3경인 무성현가(무성현의 현가루에서 글 읽는 소리)로 소개되었다.

논어에 나오는 말로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그치지 않는다'는 뜻으로 '아무리 어려움을 당하고 힘든 상황이 되어도 학문을 계속 한다' 는 의미란다.

 

안쪽에 자리 잡은 교육공간 강당은 앞뒤가 시원하게 트여져 있었는데, 좌우에 방이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강당 중앙에 걸린 현판에는 1699년 사액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창건할 당시에는 규모와 형태가 다른 건물이었으나 화재로 타버리고,

1828년 태인 현감 서호순의 도움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다른 지역 서원은 유생들이 거주하는 공간인 동재와 서재가 있는데 비해 무성서원은 동재인 강수재만 남아 있었다.

원래는 동쪽 기숙사인 강수재와 서쪽 기숙사인 흥학재도 있었다고 한다.

 

강당 왼쪽 통로로 나가면 비각영역이 나왔다. 신용희 불망비와 서호순 불망비가 있었고 강수재 서남측면에 2개의 비각이 더 있었다.

내외부에 모두 15기의 비석이 있었는데 역대 현감들과 무성서원을 지켜낸 인물들에 대한 공적비가 대부분이었다.

 

서원의 가장 중요한 기능중 하나인 향사를 지내는 제향영역으로 들어가기 위해 내삼문을 통과하니 '태산사'라는 현판이 보였다.

태산사는 고운 최치원을 비롯한 일곱 분의 신위를 모신 곳이다.

향사는 매년 2월 중정일과 8월 중정일에 향사를 지냈으나, 지금은 2월 중정일에 한번만 지낸다고 한다.

 

연세가 지긋한 분들은 알겠지만 젊은이들이 잘 모르는 부분이라 한번 짚고 넘어가야겠다.

서원에 들어가려면 제일먼저 오른발부터 들이는 것이 중요한 예법이다.

오른발이던 왼발이던 뭐가 다르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서원을 찾는 이의 자세 즉 마음가짐을 일깨우는 것이다.

도덕이 무너진 현실에 캐캐묵은 소리한다고 나무랄지 모르겠으나, 선인들은 깊은 뜻을 새겨보길 바란다.

 

사진, 글 / 조문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