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를 찾아간 적이 2개월은 족히 된 것 같다.

순서에서 밀려난 나주이야기를 코로나에 격리되는 바람에 불러들인 것이다.

 

영산강이 흐르는 나주 목사골장은 무안의 일로장과 더불어 최초로 열린 장이다.

중종실록에 1470(성종1) 장문이라는 이름의 시포가 나주에서 처음 열렸다는 기록이 있다.

 

옛날에는 영산강을 통해 무안과 나주를 드나드는 뱃길이 해안과 내륙을 잇는 중요한 수송로였다.

서남해안의 해산물과 호남의 곡물이 유통되는 요충지로 서민경제의 버팀목으로 지역경제의 한 축을 맡아왔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공설시장이 생기며 다소 위축되었으나 아직까지 그 명맥을 이어 오고 있다.

 

나주는 시가지 북쪽을 둘러싼 금성산이 삼각산과 비슷하고,

영산강을 낀 지세 또한 한강과 남산이 어우러진 서울과 비슷해 소한양이라 불리기도 했다는데,

전주와 더불어 호남의 대표적인 도시였다

 

나주평야의 중심지로 질 좋은 쌀을 생산하는 대표적인 곡창지대이며 과수와 원예농업도 활발하다.

곡창지대 답게 모찌기노래’, ‘모심기노래’,‘논매기노래’,‘장원질노래’,

물두레질소리’,덜래기소리’,‘뜰모리’,'등짐소리등의 노동요가 일찍부터 발전했으며,

1929년에 발생한 '나주역 사건'으로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발발한 진원지기도 하다.

 

지금부터 나주 구도심에서 둘러볼 만한 곳을 찾아나설 작정인데,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있듯이 밥집부터 찾았다.

 

나주하면 먼저 떠오르는 게 나주배와 나주곰탕이 아니던가?

장꾼에게 나주곰탕 잘하는 집을 물었더니, 금성관 부근에 있는 나주곰탕 원조집으로 가란다.

 

찾아 간 시간이 점심때가 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식당은 손님으로 꽉 차있었다.

얼마나 맛있으면 이렇게 손님이 많을까 사뭇 기대 했으나

소문난 집에 먹을 것 없다 듯이 인사동 나주곰탕보다 못하더라.

 

기다리는 손님 때문에 정신없이 먹어 치웠는데, 그 사이 손님이 몰려들어 긴 줄이 형성되어 있었다.

솔직히 원조라는 말에 현혹되지 말라며 말리고 싶었다.

 

나주곰탕집에서 지척에 있는 금성관부터 들렸다.

금성관은 조선 성종 때인 1475년과 1479년 사이에 나주목사 이유인이 세웠다고 한다.

나주목이라는 지역 특성상 관찰사 업무를 담당하며 사신 접대까지 맡았던 관아의 객사로,

나주목사가 기거하던 목사내아도 있었다.

 

금성관은 정면 5, 측면 4칸의 팔작지붕으로 전국의 객사 건물 중 그 규모가 가장 웅장하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칸의 넓이와 높이가 커서 위엄이 느껴진다.

 

전남지방에 많지 않은 객사 중 하나로서 그 규모가 웅장하고 나주인의 정의로운 기상을 대표할 만한 건물로 꼽힌다.

일반적인 객사와는 달리 궁전의 정전과 비슷하게 구성한 점은 금성관 만의 고유성을 지닌 특징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는 나주군 청사와 군수 관사로 사용되며 원형이 변형되기도 했다는데,

다행히 지금은 일제 때 없어진 동·서익헌과 망화루도 복원되었다.

 

임진왜란(1592) 때 의병장 김천일 선생이 의병을 모아 출병식을 가진 곳이고,

일본인이 명성황후를 시해했을 때도 이곳에 명성황후 관을 모셔 항일정신을 높이기도 했다.

망화루는 단발령의거와 광주학생독립운동 등 나주의 의향정신을 상징하는 곳이다.

해마다 10월이 되면 금성관 일원에서 영산강 문화축제도 열린다.

 

다음은 나주 지역 최초의 천주교회며 대표적 성당 건축으로 꼽히는 노안 천주교회를 찾았다.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노안 천주교회의 역사는 1894년 서울에서 피신 온 정락이

함평 나산에서 약방을 운영하며 노안면의 이민숙, 이진서, 이학서에게 전도하며 시작되었다고 한다.

1900년 무안에서 요양 중이던 이내수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이들이 중심이 되어 계량공소가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까따르 신부가 손수 벽돌을 찍어 십자형 40평 규모의 초가성당을 마련하고 2층 양옥의 사제관도 신축했다.

19265대 주임신부로 박재수 신부가 부임하며 서구식 성당으로 확장하며 아름다운 성모 동굴도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장방형의 강당인 평면 구성이었으나 1957년 트랜셉트 부분을 동·서 방향으로 증축하면서 라틴십자형 평면이 되었다.

정면의 탑신부 1층은 거칠게 표면을 다듬은 화강석을 사용하였으며, 건물 곳곳에 다양한 아치를 배치하였다.

 

1935년 나주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1957년 십자모양으로 성당을 확장할 때 사제관을 신축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성당 건물의 정면 출입구 3면에는 돌로 아치를 쌓았고 건물 측면에 낮은 아치 창문을 배열하였으며

그 위쪽에 벽돌로 종탑을 만들어 십자가를 올렸다.

노안성당은 건축적인 면에서 가치를 인정받아 2002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전국에서 20번째로 오래된 노안 성당에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한국전쟁 중 나주를 점령한 인민군들이 성당을 눈엣가시로 여겼단다.

인민군 장교 지시에 의해 주민들이 성당에 못 가도록 불을 지르러 가는데,

언덕 위의 성당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고 한다.

인민군들은 다른 병력이 불을 질렀구나 생각하며 돌아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붉은 벽돌에 의한 환상이었다는 것이다.

 

성당이 멀쩡한 것을 보게 된 인민군 장교가 다시 성당을 불태우라고 지시했으나

똑같은 이유로 성당건물이 살아남았는데, 그 기적은 세 차례나 이어졌다고 한다.

그때부터 신자들에게 기적의 성당으로 알려졌고,

그런 사실이 외국 선교사에 의해 전해지며 ‘TIME’지에 보도된 적도 있단다.

 

다음에는 봉황면 철천리 덕룡산 기슭에 있는 미륵사를 찾았다.

 

백양사 말사인 미륵사는 544년 연기조사가 창건하여 창룡사라 불렀다고 전해지지만,

문헌상의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는 없다.

한국전쟁 후 거의 폐사 되어 인법당 형태로 유지되다가 그후 미륵당이라 불리면서 무속인이 거주하였다.

 

1990년대 후반 원일스님이 벌인 불사로 대웅전, 삼성각, 관음전, 설법전, 요사 등을 조성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대웅전 내부 불단에 삼존불이 모셔져 있고, 불화로는 후불탱화, 지장탱화, 신중탱화가 조성되어 있다.

 

대웅전 뒤쪽에는 보물로 지정된 철천리 칠불석상과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는 철천리 서조여래입상이 있다.

 

철천리 석조여래입상 / 1993년도 촬영

석조여래입상은 5.38m나 되는 거불인데, 광배와 같은 돌에 조각되었다.

소발의 머리에 육계가 큼직하고 얼굴은 사각형에 가까우며 둥글고 도톰했다.

눈은 길고 코는 크며 얼굴에 가벼운 미소를 보이나 생동하는 불상의 미소는 보이지 않는다.

신체는 괴량감이 충만하고 당당하나 어깨가 부자연스러우며 굴곡도 잘 나타나지 않았다.

발목 아래는 드러내지 않았는데, 원래는 이중대좌였다고 한다. 법의는 너울처럼 반복된 선을 이룬 통견이 발목까지 내려왔.

 

광배는 2조의 신광과 두광으로 구별하고 있다.
두광 안에는 머리 주위를 연화문으로 돌리고 그 사이에는 화문을 장식하였고 신광 사이에는 구름무늬를 새겼다.

이 석불은 얼굴의 비만감이나 괴체화된 신체적 조형 등 형식에서 의문을 보이나 전체적인 강한 인상과 촘촘하게 주름진 활달한 의습,

당당한 어깨 등은 당대의 저력과 힘을 보여준 작품으로 평가되는데, 고려 초기에 유행한 거불 양식임을 알 수 있다.

조성연대는 10세기 후반경으로 추정한다.

 

 

천년을 되새긴 미륵불상이 용의 가피를 입은 덕룡산을 지키며 옛 나주인들의 기원을 읊조리는 것 같은데,

때마침 석불입상을 실내에 가두는 전각 건축공사가 한창이었다.

 기나 긴 세월을 자연과 어울렸는데,  돈을 들이는 속내가 궁금했다.

 

석조여래입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4각에 가까운 원추형 바위가 있다.

바위 전면에 일곱 불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옛날에는 바위 위에 동자상도 있었다고 한다.

동면에 좌상 1, 북면에 좌상 1구가 있으며 둘 다 합장하고 있었다.

남면에는 4구의 입불이 새겨졌는데 모두 수법이 비슷했다.

원래 서면에도 2구의 불상이 더 새겨져 있었다지만 일제강점기에 광부들이 떼어냈다고 한다.

 

  좌상과 입상이 모두 비슷한 크기이며 발아래는 1단의 돌출부를 마련하여 자연대좌를 이루고 있다.

이들 불상은 모두 소발의 머리 육계가 명확한데, 얼굴 세부는 뚜렷하지 않으나 윤곽이 분명하고 우아한 편이다.

그러나 체구가 빈약하고 굴곡도 표현되지 않았으며 신체의 구분이나 옷 무늬 등 선 처리가 너무 도식적이다.  1213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4면석에 다수의 불상이 비스듬하게 조각된 예는 극히 드물어 귀중한 불상 자료란다.

지금은 7불이지만 없어진 서면 불상까지 합하면 9불이 된다.

 

미륵사는 평화로운 시절에는 지역민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장소였다.

바다를 통해 무역하는 상인들에게는 뱃길의 무사함을 비는 기도처로서 이 지역 사람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해 왔다.

 

돌아오는 길에 '석관정 나루'에 들렸다.

영산강 물줄기가 죽산보를 지나 내려가다 영산강과 고막천이 합류하는 곳에 있었다.

 

이 정자는 1480년 함평이씨 이극해가 인수정이라는 이름의 4칸 규모 정자를 지었고,

1530년 경 이극해의 증손인 신녕현감 이진충이 정자를 보수한 후

자신의 호를 따서 석관정(石串亭)이라 개칭하여 이곳에서 만년을 보냈다고 한다.

 

현재 정면 2·측면 2칸 규모이며, 내부에 '완산 이승구 등의 석관정기를 비롯한 기문과

다시면 영동리 출신 여력재, 장헌주 등의 시문을 적은 현판들이 걸려있다.

 

석관이란 바위가 뛰어나온 돌곶을 한자로 표현한 말인데, 석관정 아래는 이별바위가 있었다.

전쟁 때 이곳에서 장정들을 실어 날랐다는데, 남편이나 연인을 따라왔다가 이별하는 안타까움에 강물에 투신한 슬픈 역사를 안고 있단다.

 

영산강 제3경으로 선정된 석관정은 영산강 비경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는 동당리와 강건너 신곡리를 오고가는 나루가 있었다는데, 그래서 '석관정 나루, 또는 이야기나루' 라고 불렀다고 한다.

 

석관귀범이란 표석이 있는 곳 주변에는 차박을 즐기는 캠핑족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코로나에 지친 육신, 자연속에 어우러진 유적이나 한 번 찾아보심이 어떨지요.

 

 

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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