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은 정영신동지의 친동생이고, 한 때 나에게는 처제이기도 했다.

지난 토요일 둘째 딸 현아 결혼식이 마포에서 열린다는 기별에 집안 식구들이 다 모였다.

작년에 치룬 첫딸 소현이 결혼식에 이은 두 번째 경사였다.

 

둘 다 사랑이 얼마나 고팠으면 사람을 많이 모울 수 없는 코로나 시국에 날을 잡았겠나?

제 애미가 어려운 살림살이에 자식들 혼례 치루려고

남의 집 길융사마다 적금 들어 둔 게 얼마나 많은데...

 

그래도 철부지 딸에게 듬직한 사위를 짝지어 주는 기쁨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오죽하면 정동지 말에 의하면 "돌아가신 엄마가 말썽꾸러기 두 딸 시집보냈다는 이야기 들었으면

너무 좋아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것이라" 말하겠는가?

 

작년에 환갑을 맞은 정주영씨의 삶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운명의 드라마다.

나이 삼십에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병아리 같은 두 딸과 아들을 혼자 키워냈으니,

그 고생이야 보나마나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름까지 바꾸었겠는가?

친일파 김활란이가 싫었겠지만, 활란이란 이름을 돈 많은 정주영으로 개명한 것이다.

 

청상과부의 불타는 가슴도 생존의 절박함 앞에는 눈 녹듯 녹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제 살 파먹는 보험회사 외판원에서부터 안 해 본 게 없을 정도로 악착같이 살았는데,

이제 아들 딸 대학 졸업시켜 시집까지 보냈으니, 그 뿌듯함이야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이게 평범한 어머니들의 자식을 향한 마음이고, 이름 없는 소시민의 성공담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좋은 잔칫날, 코로나 역풍에 축배대신 눈물을 훔쳤지만...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떠나간 남편 김영덕씨는 전기공학과를 나와 전기차를 만들겠다는 야심찬 꿈을 키우며 자동차정비소로 생계를 끌어갔는데, 

어느 날 감기증세로 입원해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얼마나 살 길이 막막했으면 백일도 되지 않은 아들을 안고 6개월 동안 울었다고 한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듯 시집 간 현아는 강북삼성병원 간호사로 일하며 코로나와 싸우는 방역의 전사로 나섰고,

첫째 딸 소현이는 시집살이도 없이 편하게 잘 살고 있다.

막내아들 희중이는 스스로 나라 지키는 직업군인을 택해,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게 된 것이다.

 

김현아양의 결혼과 정주영씨의 헌신적인 삶에 축하와 격려를 보낸다.

 

그 날은 신부대기실 들리는 틈에 순서를 놓쳐 식장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50명까지만 들어가고 나머지는 모두 식당으로 가야했다.

친지 결혼식장 와서 예식사진 한 장 찍지 못한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지난 해 소현이 시집 갈 때는 식사 대신 기념품을 주더니, 장사가 안 된다며 다시 뷔페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 사육장 먹이처럼 칸칸이 갇혀 먹어 사람인지 짐승인지 모르겠고,

뒤통수에는 결혼식 스크린이 왕왕거리는데다 사람까지 많아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분간 없었다.

이승 풍경인지 저승 풍경인지 헷갈렸다.

 

그런데, 뒤늦게 특혜 아닌 징벌의 보너스까지 받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 온지 사흘 만에 방역당국에서 자가 격리라는 통보가 왔는데,

결혼식장에 확진자가 생긴 바람에 집에서 꼼짝하지 말라는 청천벽력이었다.

결혼식장 CCTV를 샅샅이 뒤져 확진자 동선 따라 마스크를 벗은 사람만 찾아냈다는데,

하필이면 커피 마시는 모습이 찍혀버렸다.

앉으나 서나 마스크만 쓰면 살아 남는다는 교훈이다.

 

격리가 끝나는 7월 4일까지 집에서 징역 아닌 징역살이를 해야한다.

세상에! 쓰레기까지 내 오지 말라는데, 화장실 없는 쪽방에서 똥은 어디다 쌀까?

아무래도 내가 너무 오래 산 것 같다.

 

 

사진, 글 / 조문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