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에는 장경호씨 호출로 인사동에 불려나갔다.
지방 다녀와 밀린 일 좀 하려니, 그냥 두지 않았다.






저녁 한 끼 때울 겸 인사동 ‘툇마루’로 나갔더니,
최명철씨가 딸내미 보라양을 데려왔더라.
처음인데도, 인사성도 밝고 성글성글한 게 붙임성이 좋았다.






된장비빔밥에 막걸리 한잔 마시고, ‘낭만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장씨나 최씨나, 다들 술에 골았는지 비실비실했다.
쇠 덩어리도 그리 퍼마시고 나부대면 견디지 못할 것이다.






최명철씨는 집에 가자는 보라 데리고, 먼저 퇴청한지라 그만 일어나야 했다.
안주로 시켜놓은 가자미찜이 그대로지만 보영이 더러 싸 달라고 했다.
귀찮아도 가져가면, 내일 아침식사는 폼 나게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만 돌아갔으면 좋겠으나, 다시 ‘유목민’에 들어갔다.
옆 자리에는 화가 강행복씨가 앉아 있었다.






그런데, 장경호씨 몸이 말이 아니었다.
추운데서 웅크려 잤는지, 마치 풍 맞은 것처럼 허리를 펴지 못했다.
혼자 사는 사람은 몸 아픈 것보다 더 서러운 것이 없는데, 걱정이다.






뒤늦게 페북에 들여다보니 최명철씨도 이틀 동안 잠만 자다
결국 병원신세 진다는 글을 보았다.





오나가나 술뿐인 연말을 견디려면, 몸 관리 잘 해야 한다.
살아남아야 마시지...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9일은 술 마시느라 바쁜 하루였다.
전주 문화계 맹주 도예가 한봉림씨가 인사동에 온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논산 강경장에서 열리는 보부상축제에 있었으나,
서둘러 저녁시간은 맞출 수 있었다.






오후6시 무렵, 서울에 도착했는데,
김명성씨와 장경호씨의 전화가 약속이나 한 듯 연이어 걸려왔다.
장경호씨는 최명철씨와 ‘툇마루’에 술판을 벌여놓았고,
김명성씨는 한봉림씨를 맞이해 ‘여자만’에다 술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오후7시엔 ‘로마네꽁띠’에서 열리는
소설가 박인식씨의 시집 출판기념회도 있지 않던가.






먼저 들린 ‘툇마루’ 입구에는 화가 장경호씨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새김아트의 창시자 정고암씨의 모습도 보였다.
제주를 다녀 온 최명철씨는 짐 보따리를 옆에 둔 채 술을 마셨다.





급히 막걸리 두 잔만 연거푸 마시고 일어나려니,
최명철씨가 한봉림씨를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안주가 그대로였으나, 술 잔만 비운 채 옮겨야 했다.






‘여자만’에 들려 오랜만에 한봉림씨를 만났다.
몇 년 만인지 아득했으나,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의 여유 있는 너털웃음에 세상설음 다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전주로 이사 간 송상욱시인도 와 있었고,
김명성, 김상현, 김각환, 이상훈씨 등 반가운 분들이 많았다.
회와 탕 등 안주를 잔뜩 시켜놓았으나,
다들 박인식씨 출판기념회 때문인지 마음이 바빠 보였다.






한봉림씨만 ‘여자만’에 남아 장경호씨와 어울려 마셨다.
그 날 따라 가는 곳 마다 술상이 푸짐했으나, 다들 술꾼들만 있어 음식이 줄지 않았다.






담배 피우고 돌아오니, 한봉림씨는 옆 자리 분과 합석해 있었는데,
인사를 나누어 보니, BMC 대표로 있는 조민제씨 였다.
함안 조가의 제자 항렬이면 대개가 일가이기도 했으나, 폐친이라 더 반가웠다.
건너편 자리에는 김종철씨와 신학림씨의 모습도 보였고,

그날따라 눈에 익은 분들이 많았다.






그러나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난 출판기념회에 걸려 술자리가 편치 않았다.
한봉림씨가 기꺼이 자리에 남은 것도, 남은 사람이 마음에 걸려서 일거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이지만, 어쩌랴!



사진, 글 / 조문호
































20여년 동안 인사동에 둥지 틀었던, 음유시인 송상욱 선생께서 전주로 떠나신다.
인사동 풍류와 낭만도, 정들었던 벗들도 하나 둘 사라져,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제 누가 인사동을 지키며 선생의 빈 자리를 메워 줄 수 있을가?
부디, 가시더라도 건강이나 잘 챙기시고, 인사동을 향한 마음만은 변치마시길...






전남 고흥이 고향인 송상욱(79세)선생은 27년간 국어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쳐 왔으나, 

시작에 전념하려 갈현동의 선정고등학교를 명퇴한 후, 98년도에 인사동에 입성하였다.

인사동에 셋방 하나 얻어 작업실로 쓰며, 그동안 ‘백지의 늪’, ‘무무놀량’, ‘광대’ 등 일곱 권의 시집을 펴냈고,

1인 무크지인 ‘송상욱 시(詩)지’ ‘멧돌’을 꾸준히 펴내어, 시 나눔 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쳐왔다.

노래하는 음유시인으로, 인사동 골목골목을 풍미하는 등, 돈 안 되는 일만 골라 해온 것이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창예헌’과 산삼 심는 모임인 ‘농심마니’ 맴버로 어울리며,

인사동에서 열리는 만찬이나 연회 때마다 그 만의 노래로 향수를 불러 일으킨 분이었다.

진주기생 산홍이를 애절하게 그리는 ‘세세연연’이나 요절한 누이를 그리는 시 ‘부용산’ 노래도 더 이상 들을 수 없고,

밤새도록 이어지는 가요반세기의 메들리도 이제 끝나버렸다.






송선생은 45년 전, 아내가 가출한 이후 오래 동안 독신으로 지내다 10년 전 지금의 아내 김미옥(57세)씨를 만났다.

당시 ‘툇마루’가는 골목 초입에 있던 ‘아라가야’라는 이름의 전통의상가게에 우연이 함께 들린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가게를 운영하고 있던 지금의 아내와 눈이 맞았다고 한다.

18세 연하의 꽃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게 될 줄이야 꿈엔들 알았으랴! 인사동이 선생께 드린 선물 아닌 선녀였다.






이번에 연고도 없는 전주로 갑자기 이사하게 된 것도 아내의 뜻을 따른 것 같았다.

아내의 고향은 공주지만, 전주서 학창시절을 보내며 무용을 배우는 등, 추억이 많은 곳이라는 이유였다.

감히, 꽃 따라 나비 가는 이치를 어찌 거역할 수 있으리오.






송상욱 선생을 떠나보내는 송별 만찬이 지난 10일 오후7시 인사동 ‘툇마루’에서 있었다.

송상욱선생을 비롯하여 김명성, 박인식, 송성묵, 정채은, 김각환, 김시인, 강성몽, 서길헌씨 등 열 명이 모인 조촐한 자리였지만,

새벽 두시까지 자리를 옮겨가며, 술과 노래로 아쉬움을 달랬다.

‘툇마루’에서 송성묵씨 작업실로, ‘로마네꽁티’에서 이름도 모르는 주막에 이르기까지 엄청 퍼 마셔댔다.

그 날 선생께서 목이터져라 부르는 ‘비나리는 호남선’이 술취한 이들을 더 슬프게 만들었다.


“목이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 돌아서서 피눈물을 흘려야 옳으냐?”


사진 , 글 / 조문호


















































지난 명절연휴 끝자락에 인사동에서 독거들 밥상머리가 있었다.
장경호, 하태웅씨와 ‘툇마루’에서 만나기로 했으나, 시간이 맞지 않아 같이 먹진 못했다.
장경호씨는 너무 일찍 와 먼저 먹어버렸고, 하태웅씨는 너무 늦게 와 먹지도 못했다.
중요한 것은 술꾼들이 술보다 밥을 먼저 챙겨먹었다는 사실이다.
긴 연휴동안 얼마나 곯았기에...






그런데 오랜만에 ‘툇마루’ 비빔밥을 먹었더니, 너무 맛있었다.
밥 한 그릇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우고, 막걸리를 두 주전자나 비워 재꼈다.
장경호씨는 어렵사리 이사한 자기 사정보다, 손장섭선생 작업실을 걱정하고 있었다.
다행히 미대 다니는 아들이 자기가 이사한 연신내로 합친다는 반가운 소식도 주었다.
드뎌 독거는 면했지만, 행여 아들놈 시집살이 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아들 때문이라도 끼니는 좀 챙길 것이고, 술도 좀 줄이겠지.
이야기 중에 치과의사 이세희씨가 죽었다는 놀라운 소식을 전해 주었다.
‘로마네꽁티’에서 와인을 엄청 얻어 마셨는데, 유난히 건강을 챙기던 양반이 아니던가?
매일 죽는다고 나발 부는 나는 멀쩡하고, 아직 짱짱한 양반이 먼저 죽다니, 세상사 참 새옹지마다.
난, 대장암 걸린 신경림 선생 소식을 전해 주었는데. 제발 무탈하시길 빌 뿐이다.






술 마시다 밖에서 담배피우고 있으니, 그 때야 하태웅씨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술자리 끝났다며, 밥도 한 그릇 먹이지 않고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겨 버렸다.
‘유목민’에는 공윤희, 이회종, 전월봉씨 등 반가운 사람이 여럿 있었다.
취기가 올랐으나 이번엔 소주 한 병을 시켰는데,
화가 전월봉씨가 즉석에서 내 몰골까지 스케치 해주었다.






그런데, 왜 그림에다 보증수표 만원이라 쓰 달라고 졸랐을까?
술 취하면 택시비로 사용하기 위해서일까? 팁 주기 위해서일까?
그 날 장경호씨가 한 말처럼, 정말 세상 잘 놀았다.

사진, 글 / 조문호































마석 사는 장경호씨가 성신여대 부근으로 이사를 했다고 한다.
이사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지난겨울 내내 들었으나, 마땅한 집이 없었던 모양이다.
돈만 있으면 왜 집이 없겠냐마는 적은 돈으로 큰 작업실을 구하려니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이사한 집은 두 달 후에 철거되는 집이라 곧 비워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 철거될 집으로 이사 했는지 모르겠으나, 어지간히도 급했던 모양이다.

광화문촛불집회가 막을 내리며 한 동안 연락이 없었는데,

이사 짐 옮기느라 힘들었는지 일주일 넘게 몸살을 앓았다고 한다.

그동안 끼니는 어떻게 챙겼 먹었는지, 보나마나 비디오다.

평소 밥처럼 먹어 온 커피우유만 쫄쫄 빨며 더러누웠을 텐데,

독거의 서러움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지난 일요일엔 모처럼 인사동 나왔다는 전화가 왔다.
‘툇마루’에서 만나 막걸리 한 잔 했는데, 입맛이 없었던지 게장을 안주로 시키더라.
빨리 그려야 할 그림 걱정부터 했으나, 작업실이 확정되어 정착하는 게 더 급해 보였다.

거처가 인사동과 가까워 15분 만에 올 수 있다지만,

술 마시는 시간은 절약될 수 있겠으나, 작업에는 오히려 장애가 될 뿐이다.

빨리 작업실이 정해져 그림에 매진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으면 좋겠다.

그 날은 개털 두 사람이 마셔 비상금을 꺼냈으나, 기어이 자기가 내겠다고 우겼다.

사진, 글 / 조문호













많은 시민들의 호응 속에 열리는 ‘촛불역사’전이 이제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
아쉽지만 오늘 정오에 막을 내리게 된다.
그동안 전시장을 지키며 마지막까지 최선을 대해 준 사진가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곽명우씨의 헌신적이었던 노력은 물론,

몸이 아파 진통제까지 먹어가며 전시장을 지켜준 이정환씨께는 미안한 마음 감출 수 없다.

일요일인 19일에는 박영환씨가 아침 일찍 나와 전 과정을 중계방송 하듯 알려 주며,

도시락까지 싸와서는 온 종일 지켜주는 열성을 보였다.

전시가 끝난 후 박영환, 곽명우씨와 ‘황금도야지’에서 저녁식사를 함께하며 미안한 마음 달랬다.

그 이틀 날은 너무 늦게나가 이정환씨 대신 하형우씨와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그동안 틈틈이 나와 교대해 준 하형우씨도 고생 많이 하셨다.


이 날은 ‘광화문 광장’ 지킴이 화가 이윤엽씨도 만났고, ‘민미협‘회장 이인철씨도 전시장을 찾아 주었다.
’광화문미술행동’ 김준권대장과 함께 인사동 '툇마루‘에서 식사하고, ’비밀정원‘에서 차 마시고, ’유목민‘에서 대포도 한 잔 했다.
뒤늦게 합류한 장경호씨와 함께, 서둘러 제작하게 될 자료집 제작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 정오에 철수하며 함께한 분들과 자리를 같이 할 예정이니, 시간 있는 분들은 참석해 주길 바란다.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다.


사진,글 / 조문호

































지난 9월30일 오후6시부터 인사동 ‘툇마루’에서 ‘인사모’의 9월 정기모임이 있었다.

그동안 이런 저런 사정으로 몇 차례나 빠진 터라, 하던 일을 미뤄두고 나갔다.

그 자리에는 회장이신 민건식 원로변호사를 비롯하여, 대법관 지내신 박일환 변호사, 선우영 변호사,

‘통인가게’ 김완규회장, 검찰지청장에서 이대교수로 말을 갈아탄 조균석교수, 해병대 장성출신인 윤경원씨,

하나은행 박상균 지점장, 사업가 박원식, 강윤구, 송재엽사장, 테너 이동환, 화가 류재춘씨 등 열 세 명이 자리했는데,

이 날도 저조한 참석률이었다.

막걸리 잔을 나누며, 오랜만의 회포를 푸는 중에 민회장 께서 느닷없는 인쇄물 한 장씩을 나누어 주었다.

마치, 무슨 성명서라도 발표할 듯한 의아한 분위기였는데, 읽어보니 ‘자화상’이란 늙어감에 대한 소회가 적혀 있었다.

민회장께서는 "박정희처럼 총 맞기 전에 회장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인사동을 위한 모임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데다, 이미 관광지화 되어버린 인사동에 대한 미안함도 깔린 것 같았다.

다른 분으로 바꾸어 참석률이라도 높일 생각인 것 같았으나, '통인'의 김완규씨가 손사래 쳤다.

‘인사모’ 회장직은 종신제라는 것이다.

그런데, 민회장님께서 쓰신 ‘자화상’이란 글은 스스로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했다.
그 글에는 늙어감에 따른 안타까움이 묻어났으나, 산 다는 게 뭔지 되묻고 있었다.

‘덧없는 인생이라지만 그런대로 오래 살았구나.
그럭저럭 지나 온 나날을 돌이키면서 남은 세월은 얼마나 될지.
네 얼굴을 보라 뭐 그리 불만이 많은 가?
인간이란 본래 그런 것이야.
쓸데없는 미련과 욕망은 버렸어야지.
젊은 시절, 너나 나나 밝은 미래를 꿈꾸며 힘차게 날개 짓 했지.
빛나는 이상, 행복, 환회 등 모든 것이 영원하리라 믿었지.
(중략)
불안과 고통, 절망에서 해방되는 영원한 편안함과 행복도 있다며,
노구를 추슬러 나마지 힘겨운 여정을 이어가자는 말씀이셨다.

자리가 파한 후, 김완규, 조균석, 이동환, 송재엽씨 등 다섯명만 남아 낙원동 ‘다리밑집’으로 갔으나,

더 이상 술 마실 형편이 아니었다.

여러 차례 혼 줄 났던, '툇마루' 막걸리의 뒤늦은 취기로, 삼십육계 줄행랑 친 것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8일엔 일찍부터 김신용 시인을 만났다.

양동 구석구석을 돌아보고, 인사동 거리를 쫒아 다녔으나 목추길 곳이 마땅찮았다.


문 걸린 유목민앞에서 서성이다, 툇마루로 발길을 옮겨야 했다.

들어서다, 박중식시인의 처남이 굽는 빈대떡에 쏠렸다.

오븐에서 던져, 돌려 눕히는 솜씨가 대단했다.

그 빈대떡은 바싹하고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빈대떡 한 장과 김신용씨가 마실 맥주와 막걸리를 시켰다.

이 집 막걸리는 뒤늦게 취하는 것을 알지만, 맛에 꽂혀 마냥 들이켰다.

두 시간 동안 홀짝 홀짝 마셨으나 취기가 오르지 않았다.

양동에 있다는 시나리오작가 최건모씨도 부르고, 김명성시인도 불렀다.

된장비빔밥으로 마무리하고 유목민으로 옮겼다.

 

그 때까지 유목민은 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 집 앞에 퍼져 앉아, 안주는 푸른별 주막에서 배달시키고,

술은 옆집에서 가져와 마셨다.

김명성씨가 등장하니, 젊은 사업가들도 줄줄이 나타났다.

이상훈, 김민수씨가 등장했고, 뒤늦게는 김태서, 신상철씨도 나타났다.

푸른별이야기에 잠시 들렸더니, 이미례, 박기성 내외도 있었다.

 

! 큰일 났다. 툇마루에서 마신 취기가 서서히 오르기 시작했다.

입에서 걸러지지 않은 소리가 마구 나오기 시작했고,

술에 잠들지 않으려고, 여기 저기 쫒아 다녔다.

심지어, 사진 찍는다며 담장 위에 기어오르는 지랄발광도 했다.

 

그 때 마침, 인사동을 떠도는 악사 강다식씨가 지나갔다.

한 곡 켜라고 불러 세웠는데, 역시 분위기를 가라앉혀 주었다.

무슨 곡인지 기억에는 없지만, 가날 픈 바이얼린 소리가 마음을 건드렸다.

구슬프다 못해 슬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니기미~

김태서씨의 막춤이 어울리진 않았지만, 마치 사회를 향한 조롱 같았다.

 

 

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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