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저께 인사동 터줏대감 강민 선생의 운명이 임박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니 방에 틀어박혀 있을 수 없었다.

선생께서 자주 들리시며 친구들을 불러 모았던 인사동 '나주곰탕' 앞에서 한 참을 서성이며 선생을 생각했다.



사실, 인사동 인사동 노래를 부르며 들락거리지만, 공간의 추억보다는 사람의 추억이다.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선생은 오래전에 전설이 되었지만, 김동수, 이계익, 신봉승, 심우성선생께서 차례로 떠나가셨고,

마지막 터줏대감으로 여겼던 강민시인 조차 오늘 내일하고 있으니, 이제 인사동도 막 내려야 하는 것인가?

아직 구중서, 김승환, 민 영, 방동규. 신경림, 황명걸선생 등 인사동을 사랑하는 원로들이 계시지만,

강민선생이 계시지 않으면 뵐 수는 있을까?


 

80년대 중반 '나주곰탕'집 자리는 망각 강이라는 술집 ‘레테’가 있던 자리다.

소설가 배평모씨를 그 곳에서 처음 만나 이틀 동안 쉬지않고 마셨던 곳이기도 하다.

그 술집은 이점숙씨가 운영했는데, 펑퍼짐한 엉덩이를 가진 미색도 죽이지만,

숨이 끊어질듯 애절하게 부르는 춘향가의  ‘갈까보다’라는 소리에 숨이 턱턱 막힌다. 



"갈까보다, 갈까보다. 님 따라서 갈까보다.

천 리라도 따라가고, 만 리라도 갈까보다.

바람도 쉬여 넘고, 구름도 쉬여 넘는..." 

강민 선생님 앞에서 이 소리 한 자락 불러 드렸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사실, 배평모씨는 친구 좋아 날밤 까며 이틀 동안 술을 마셨다지만, 그 여인이 없었다면 어림없었다.

가끔 임춘원 여사가 출몰하여 불러주는 뚝뚝 떨어지는 ‘목련’도 기가 막혔다.

그 때부터 인사동 예술가들 술값 뒷바라지 한 김명성씨는 다 털어먹은 지금까지 술값 대느라 바쁘다.



'레테'가 있던 윗층에는 박중식시인이 운영한 '툇마루'가 생겼지만, 

옆 건물 옥탑방에 내가 사용한 '카메라워크'가 있어 자주 들락거릴 수 밖에 없는 골목이었다. 

강민선생을 '나주곰탕'에서 그리워하며, 망각의 강에서 '갈까보다'를 듣고 싶었다.





그외 인사동을 추억할 만한 장소는 찻집'귀천'과 실비대학으로 불리던 '실비집'이었다.

'귀천'에서 천상병시인에게 저승가는 노자돈을 바치거나, 민병산선생의 서예글씨를 만날 기회가 많았다.

운이 좋은 날에는 '한국일보' 사진기자 김종구를 만나 진토닉까지 얻어 마실 수 있었지만...




그리고 '실비집'은 가난한 인사동 예술가의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인심이 후해 술값이 싸니, 누구든 막걸리 한 병 값만 있으면 갈 수 있고, 외상까지 통한다.
안주를 시키지 않아도 김치나 콩나물을 내주지만, 버스가 끊겨 자는척하는 날에는 이튿날 해장국까지 얻어 먹을수 있었다. 
이북이 고향인 주모 아닌 실비대학 총장님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이 없다. 



또 한가지 잊을 수 없는 일은 '실비집'에서 가진 결혼식 뒤풀이였다.

대학로에서 혼례식을 끝냈으면 신혼여행이나 갈것이지, 실비집에 자리를 왜 잡았는지 모르겠다. 
그 당시 '87민주항쟁' 개인전을 말리는 이사장이 싫어, '사진협회를 그만두고 박한웅씨를 밀어넣었는데.

그 날 뒤풀이에서 사고를 치고 말았다.  삥땅 뜯는 땡초 적음을 대머리로 들이 받아 앞니를 부러트린 것이다.
뒤 이어 술 취한 내가 옷을 벗고 난리를 피웠으니, 신부를 비롯한 신부 우인들까지 질겁해 도망갔다.




잔치는 완전 개판 되었으나, 그 이튿 날이 더 문제였다.

적음의 치료비를 걱정한 화가 강용대가 부추겨, 출근하는 박한웅을 잡아가게 한 것이다.

새 직장에 나간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잘 못하면 목 잘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배평모씨와 둘이서 적음을 찾아가 고소를 취하하라고 얼마나 사정했는지, 입에서 화근내가 났다.



한참 뒤인 15년 전에 생긴 '작은 뜨락'이란 대폿집도 잊을 수 없는 공간이다.

'작은 뜨락'은 '한지추억'이란 점포로 바뀌었고, '시인통신'자리는 '古 ART'로 바뀌었더라. 

인사동 풍류객의 ‘참새 방앗간’으로 통한 이 곳은, 장사라고는 처음한 노인자씨가 운영한 곳이다.

원래 건물 옆에 버려진 골목을 차양으로 가리고, 건물 벽에 의지해 폭 1미터에 길이 5미터 남짓한 공간을 마련했다.

폭이 좁아 일반 탁자를 놓을 수가 없어 벽에 긴 나무판대기를 붙이고, 바닥에는 엉덩이를 걸칠 만한 간이의자를 놓았다.



이 집에서 먹고 마시기 위해서는 한껏 몸을 웅크린 채, 본의 아니게 면벽을 해야 한다.

그런 술집이 인사동풍류객들의 아지트가 되었는데, 술값은 자율적으로 먹은만큼 바구니에 담고 나갔다.

자리가 없으면 그 옆 건물 이층으로 이사 온 한귀남씨의 '시인통신'에서 죽치기도 했는데,

긴 세월은 아니지만, 한 동안 인사동을 풍미했던 대폿집이 틀림 없었다.

그림쟁이들을 자주 만나는 장소는 전시장보다 뒤풀이 장소인 '부산식당'과 '사동집'이었다.



그 날 만난 아는 분으로는 30여년 동안 인사동을 오가며 기름 행상한 권경선씨와 미술판의 방랑자 성기준씨 뿐이었다.

'갤러리 가이아'에서는 사보 클라라 페트라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고,

주인이 바뀌어 수리하는 점포나, 전시가 바뀌어 디스플레이 하는 전시장들이 많았다.



고서 파는 '통문관'은 셔터 내린 날이 더 많고, 그 옆에는 거대한 흉물 하나가 꿈틀대고 있었다.
옛 민정당사 터에 긴 세월동안 눈치 보며 터를 잡아 온 호텔공사가 마무리에 접어들고 있었다.

인사동 거리 쪽에 지어놓은 건물 벽에는 장사할 사람 찾는 임대광고가 붙어 있었다.



이러다 한 세기는 커녕 반세기 전의 인사동 모습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인사동의 오랜 정체성은 오간데 없고, 이름만 있는 껍데기만 남아버렸다.




10년 전 '눈빛출판사'에서 펴낸 '인사동 이야기'사진집에도 소개된바 있지만,
현재의 인사동 명칭은 일제강점기였던 1914년에 생겼다.

조선시대 한성부의 관인방(寬仁坊)과 대사동(大寺洞)의 가운데 자인 인(仁)과 사(寺)를 따서 불러졌다.

인사동 거리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삼청동 개천에서 시작해 청계천을 따라 형성되었다고 한다.

국가에 공훈이 있는 신하들에게 상을 내리고 공적을 보존하는 일을 맡아보던 조선시대 관아인 충훈부도 이곳에 있었다.

특히 도화원이 이곳에 있어 미술활동의 중심지가 되어 중인들이 주로 모여 살았다.




1910년대의 인사동은 소위 양반들이 몰려사는 북촌의 노른자위였다.

일제말기에서 해방직후까지 4-5개의 점포가 있었는데, 6,25후 혼란했던 사회가 안정돼 가자

일부 벼락부자와 정치인들 사이에서 골동품 붐이 일면서 골동품거리가 번창했다고 한다.



한국전쟁을 겪는 동안 먹고 살기위해 집안에 가보처럼 모셔두었던 것을 인사동에 내다 팔기 시작했는데,

골동품을 똥값으로 후려 쳐, 비싸게 되팔아 부자가 된 골동품상도 많았다.

더 안타까운 일은 그렇게 수집된 상당부문의 고미술이나 골동품들이 쪽바리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이다.




그 이후 1930년대부터 인사동 길 주변에는 서적이나 고미술 관련 상가가 들어서면서 골동품 거리가 점차 형성됐다.

50년대 한국전쟁 이후에는 낙원상가 아파트 자리에 낙원 시장도 생겼다.

1970년대에는 최초의 상업 화랑인 현대 화랑이 생긴 것을 계기로 화랑들이 모여들면서 미술문화의 거리로 변신했다.

그러나 인사동엔 문화적 특성을 이용한 부동산 투자로 벼락부자가 된 사람도 속출했다.

난, 80년도 초에 인사동에 입성하여 그 이전 이야기는 노인들에게 주워 듣거나 사료에서 확인한 것이다.




1987년 인사동을 문화지구로 지정한 것은 전통문화의 보존이라는 측면에서는 좋은 일이었으나.

부동산 개발이라는 돈이 개입되며 개판이 된 것이다.

문화보다는 관광객들이 몰려들게 하여 주목받는 상권은 되었지만, 우리 전통문화는 흐지부지된 것이다.




지금의 인사동 문화지구는 인사동을 비롯하여 낙원동, 관훈동, 견지동, 경운동, 공평동을 아우르는 말인데,

동쪽으로는 운현궁 앞 삼일로, 서쪽으로 조계사 앞 우정국로, 북쪽으로 종로경찰서 앞 율곡로,

남쪽으로는 남인사마당과 종로가 붙어있다.




인사동이 전통문화의 거리로 지정되어, 한국을 상징하는 공간이자 외국인이 즐겨 찾는 명소는 되었으나, 속빙 강정일 따름이다.

문중을 지키는 종갓집 며느리처럼 명맥을 잇던 골동품 가게들이 치솟는 건물임대료에 쫒겨 대부분 장안동으로 밀려났다.

대신 커피체인점이나 옷가게 등으로 바뀌었고, 남은 것도 국적 없는 잡화상으로 변해 싸구려 관광거리를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

2013년 지정된 ‘인사동문화지구 관리 변경 안’의 권장업체였던 공예품 가게는 인형이나 탈 몇 가지 진열해 둔 잡화상으로 변신한 것이다.

더욱 아쉬운 것은 수 많은 갤러리들이 인사동에 몰려 있으나, 작품 관람에는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이제 오래된 인사동 공간의 추억은 물론, 인사동의 풍류를 주도해 온 예술가들도 대부분 돌아가시거나,

살아 있어도 만나 보기 힘들어 인사동 기록을 접을 때가 된 것 같다.



10년 전 '인사동 이야기'사진집을 출판했으나, 오래전 절판되어 지금은 구할 수가 없다.

'인사동 이야기' 사진집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3년전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청량리588'사진전을 열 때 보관하고 있던 '인사동이야기' 한 권을

관객들을 위해 입구에 비치해 두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책이 사라진 것이다.




더 이상 구할 수 없는 책이라 아깝기도 했지만, 어떻게 사라졌는지가 궁금해 못견디겠더라.

전시가 끝난 후 갤러리를 관리하던 공윤희씨와 CCTV를 확인해 보았는데, 깜짝 놀랄 지인이 슬쩍 가져가는 것이 아닌가.

얼마나 그 책이 갖고 싶었으면 그랬을까 싶어, 확인한 둘다 안 본 것으로 하고 영원히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래도 한 권은 있어야 할 것 같아 청계천 중고서적상을 뒤져 책 구하느라 한 나절을 뺑뺑이 돈 적도 있다.




그러나 그 책이 남아 있더라도 보완할 내용이 더 많았다.

인사동 사람들이라고 내세운 115명의 예술가들도 덜 인사동 다운 사람이 많은데다, 꼭 들어가야 할 사람이 많이 빠졌다.

사진가 한정식선생의 발문에다 시인 강 민, 민 영, 신경림, 황명걸, 서정춘, 김신용, 소설가 배평모, 박인식, 민속학자 심우성씨등

37명의 문인들이 쓴 인사동 추억담에다 필자가 쓴 인사동 에피소드 열 토막까지 게재했으나,

대개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씨 세분 이야기거나 '귀천'이나 '실비집'에서 있었던 중복되는 내용이 많은데다,

정작 사료로 필요한 골동품 거래 이야기나 인사동의 중요한 증언들이 빠져 있었다.



1부는 흑백으로, 2부는 컬러로 나누어 편집할 계획이다.

천상병, 박재삼, 심우성, 이계익, 목순옥, 이호철, 김동수, 최영해, 강용대, 김종구, 김용태, 여 운, 김영수씨 등

그동안 돌아가신 분들의 사진과 오래된 인사동 사진만 흑백으로 게재하고,

10년동안 기록한 사람들과 인사동 거리풍경은 컬러로 바꾸어 제대로 된 인사동 자료집을 올해 중에 마무리할 작정이다.

관련있는 분들의 많은 자문과 도움을 바랍니다.




모든 것이 사라져가는 인사동은 이제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하나의 성지로 남게 되었다.


사진, 글 / 조문호

































'

지난 15일은 오후6시부터 인사동 ‘툇마루’에서 ‘인사모’ 모임이 있는 날인데,

이 날따라 아리따운 사진가 오현경씨의 오찬초대와 겹쳐 점심 때부터 인사동에 나왔다.





만찬 모임이 있기까지의 서너 시간은 ‘정독도시관’에서 일할 생각으로 노트북까지 챙겨왔는데,

반주로 마신 막걸리 한 병에 맛이 가 ‘백상사우나’에 더러 눕게 된 것이다.





뼈를 도배한 삐쩍 마른 몸뚱이를 물속에 풀어놓고 스스로을 돌아보는 자성의 시간을 가졌는데,

한마디로 나이 값 좀 하라는 생각이었다.

똥파리처럼 전시장이나 쫓아다니며, 사진 찍어 올리는 짓거리는 이제 자제하겠다는 것이다.





시간 맞추어 ‘인사모’ 모임이 있는 ‘툇마루’로 갔더니, 원로변호사 민건식 회장을 비롯하여

김완규, 박일환, 조균석, 전국찬, 김길선씨가 먼저와 있었고, 뒤 이어 박원식, 송재엽, 이재훈씨 등 여러명이 오갔으나,

이 날은 모르는 화가 두 분이 끼어 있었다.





명함을 받아보니 김용모씨와 황경숙씨였는데, '미협'에 소속된 화가로 ‘인사동 사람들’이라 적혀 있었다,

난,  명함에 ‘사협’이나 ‘미협’ 로고가 찍혀 있으면 일단 하수로 보는 못된 버릇이 있다.





‘인사아트프라자’에서 29일까지 초대전을 한다는 엽서를 한 장 주었는데,

화가 김용모씨의 용모는 산적 두목같이 생겼으나 그림은 서정적인 풍경이었다.

기와집 위로 꽃비가 휘날리는 그런...





전시 개막식에 가보고 싶었으나, 문영태 유작전과 시간이 겹쳐 못간 것이다.





‘인사모’모임에는 세상을 떠난 이동엽 화백을 비롯하여 화가 김양동, 이목을, 김근중씨 등 여러 명이 있으나, 요즘은 잘 나오지 않는다.

매력을 잃은 건지 재미를 잃은 건지는 모르겠으나, 대개의 '인사모' 회원들이 작가들 작업에는 별 관심이 없어 그럴거다.





김용모씨 명함에도 뭘하는 모임인지도 모르는 ‘인사동 사람들’회장이라 찍혀 있으나,

‘인사모’도 인사동도 다들 정체성 없는 이름만 걸고 하늘하늘 할 뿐이다.





이 날은 툇마루 좌석 배치가 흩어져 끼리기리 대화가 나누어졌는데,

마침 박일환, 전국찬, 김길선씨와 북한 여성 한 분이 있는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나의 관심사는 북한 여성이 어떤 사유로 이 자리까지 흘러왔는지가 궁금했으나,

온통 유튜브에 스타로 부상한 박일환씨의 사건 아닌 사건에 집중되었다.





요즘, 법원행정처장으로 대법관을 지낸 박일환씨가 유튜브에 ‘차산선생 법률 상식’이란 코너를 만들었는데,

조회수가 급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9,000여명의 팔로우에서 케이비에스 뉴스에 ‘전직 대법관 유튜브되다’

당신의 법 궁금증을 쉽게 풀어드립니다.란 자막 방송이 나가자 16,000여명으로 늘어나는 등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이다.






난, 페이스북만 알지 유튜브는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어 다음에 알아볼 생각이었다.

이보다 의미 있는 재능기부가 어디 있겠는가? 박수에 박수를 쳐야 할 좋은 소식이었다.





점심 때 막걸리에 혼쭐난 터라 막걸리 한 잔으로 개기며 돌아 갈 시간만 기다리는데,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해진 코스처럼 노래방으로 옮겼으나, 노래방에 관심없는 '통인' 관우선생은 안내만 하고 핫바지 방귀 새듯 사라졌다.

호흡기 이상으로 노래를 부를 수 없는 나 역시 사라지고 싶었으나, 인사치레로 잠시 눌러 앉은 것이다.





노래방에 들어가자 말자 김용모씨가 ‘미워도 다시 한번’을 청승스럽게 뽑아재꼈다.

다들 노래백과 뒤적이느라 바빴으나, 난 등짐도 풀지 않은 채 지켜보았다

두 번째로 마이크를 잡은 차산선생의 ‘숨어우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슬며시 빠져 나간 것이다.





레퍼토리가 바뀐 처음듣는 노래였는데,

“길잃은 사슴처럼 그리움이 돌아오면 쓸쓸한 갈대숲에 숨어우는 바람소리”라는 노래소리가 들렸다.





인사동 밤거리를 힘없이 걸어가는데, 어디선가 애절한 바이얼린 소리가 들려왔다.

길모퉁이에 선 낮선 젊은이가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를 연주하고 있었는데, 한 어린이가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왜 그리 슬프게 들리는지, 나도 죽을 때 ‘봄날은 간다’를 열창하다 숨을 멈추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사진, 글 / 조문호















현대도예의 거목 한봉림씨가 요즘은 그림 삼매경에 푹 빠졌다. 
작년에 완주 작업실에 가보았더니, 완성된 대작들과 진행 중인 작품도 있었다.

아마 원광대에서 정년퇴임하며, 그림에 매달렸던 모양이다.
이미 그만의 확고한 작품세계를 보여주어, 보는 이를 놀라게 했다.






지난 12일에는 그가 상경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끼는 몇 안 되는 제자 중의 한 사람이 인사동에서 전시를 한다는 거다.
그동안 인사동에서 술 한 잔하자는 말은 여러 차례 오갔으나 성사되지 않았는데,
모처럼 친구와 한 잔 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인사동의 ‘인사아트센터’6층으로 올라가니 최범홍씨의 도예전이 열리고 있었다.
한봉림씨와 안문선씨가 먼저 와 있었는데, 전시된 작품들이 너무 좋았다.
“연을 먹인 器”란 제목이 붙은 최범홍씨의 도예작품은 묘한 마력이 있었다.
연 먹인 빛깔도 이채롭지만, 도자에 번진 무늬가 신비로웠다.





뒤틀린 도자 작품들도 있었는데, 인상적이었다.
난, 마음이 뒤틀려 그런지, 뒤틀린 작품이 좋았다.
좌우지간, 한봉림씨가 아낄만한 제자였다.






식당으로 옮기는 길에 시장 봐 오던 ‘유목민’의 전활철씨를 만나기도 했다.






‘툇마루’ 된장비빔밥으로 간만에 입맛을 돋구었는데,
한봉림씨는 밥은 거들떠보지 않고 술만 마셨다. 점심은 본래부터 안 먹는다나...
그냥두기 아까워, 두 그릇이나 먹어 치웠더니, 술 들어 갈 자리가 없었다.
낮술에 쥐약인 내가 그 날 살아남았던 이유다.






한봉림씨는 인사동 옛 이야기로 시간가는 줄 몰랐다.
학창시절엔 연적을 만들어 인사동 필방에 납품한 적도 있단다.
그가 디자인한 독특한 맵시의 연적을 필방주인이 좋아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 만난 친구가 인사동의 양두 거목인 ‘통인가게’ 김완규 대표와

공화랑’의 공창호 대표라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 학교 다니는 것 보다 전통 문화를 더 좋아했다고 한다.






공창호씨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표구점에 들어갔지만, 김완규씨는 달랐다.
학교를 안 가고 가게를 기웃거리니, 부친께서 가게 점원으로 일시키고,
대신 밤에 가정교사를 불러 공부시켰다고 한다.
한 분야에 일가를 이룬 장인이란 정규교육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말해준다.






그리고는 하소연을 늘어놓기도 했다.
작업이 풀리지 않아 “내가 왜 이 짓을 하냐?”며 붓을 놓은 적도 있단다.
그렇지만 한봉림이가 누구인가? 그 장인정신은 기어이 뿌리를 뽑는다.






요즘은 밤 그림자에 끌려 다닌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몇 시간동안 어두운 밤길을 혼자 걸어 다닌다고 한다.
아내는 “몽유병 환자처럼 어디를 떠돌아 다니냐?“고 타박한다지만,
대붕의 뜻을 누가 알리오.
그가 구상하는 작품이 어떤 울림으로 닥아올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빈 술병이 몇 개나 나왔다.
안문선씨가 술을 마시지 않으니, 한봉림씨가 세병은 마신 것 같았다.
이미 고속버스 표를 예매해 둔 터라, 더 마실 수는 없었다.






안국역으로 지하철 타러 갔다.
난 습관적으로 인사동 거리를 찍다 반가운 사람을 만난 것이다.
화가 장흥래씨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일행이 보이지 않았다.
부리나케 지하철로 내려갔는데, 이산가족 찾는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빨리 종로경찰서 앞으로 오라는 것이다.
다른 방향으로 가는 안문선씨를 배웅해 주고, 지하철로 내려와서는 나를 잠시 보잖다.
똘똘 뭉친 파랑새 뭉치를 내손에 쥐어주며, 술 사먹지 말고, 밥 사먹어란다.
친구의 따뜻한 마음이 추위를 녹였다.


"고맙다 친구야! 술 안주로 밥 사먹을께..."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6일 인사동 ‘툇마루’에서 ‘인사모’ 모임이 있었다.

‘인사모’는 ‘통인가게’ 김완규씨를 주축으로 하여,
원로 변호사 민건식씨가 회장인,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모인지가 숱한 세월이 흘렀지만, 요즘은 모임이 좀 뜸하다.
예전엔 매월 만났지만, 작년 망년회 후로 처음이다.






그 날 모임에는 민건식 회장을 비롯하여 김완규, 박일환, 조균석, 박원식, 강윤구,
전국찬, 윤경원, 김길선씨 등 열 명이 자리했는데, 안 나온 분이 많았다.
다들 건강한 모습이라 반갑기 그지없었는데,
첫인사가 이번 여름 탈 없이 잘 보냈냐는 말이었다.






이 모임의 특징은 법조인과 사업가, 예술가가 어울린 모임인데,
요즘은 예술가들이 잘 나오지 않는다.
사는 게 바쁠까? 아니면 모임에 큰 의미가 없어서일까?
아마 끈적한 연대감이 없어서 일게다.






사람 사는데 제일 중요한 것이 상대에 대한 관심과 배려인데,
바빠서 라기 보다 사는 게 가족중심으로 치우치다보니,
주변에 관심이 멀어진 것일 게다.
그러니 만나도 정겨운 이야기가 나올 수 없는 것이다.






그렇고 그런 인사치례의 말들만 나누다 노래방으로 옮겨간다.
그 날도 여섯시에 만나 식사가 끝난 시간까지 정확하게 한 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일어나기 직전에 윤경원씨가 나타나 20여분 더 지체했지만...






인사동 ‘선화랑’ 맞은편에 노래방이 생겼다는 관우선생의 정보에 따라갔다.
노래방으로 옮겨 노래백과를 들추기 시작하는데, 다들 한 참을 헤 멘다.
법관 출신들이라 육법전서는 잡았다 하면 바로 나오는데 말이다.






박원식씨의 노래 ‘삼각관계’가 테이프를 끊었다.
친구냐 애인이냐의 다소 신파적인 노래였다.
민건식회장의 ‘나그네 슬음’을 비롯하여 십팔 번들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다들 가수 빰 칠 정도로 잘 불렀다. 연이어 100점이 터졌다.






나더러 ‘봄날은 간다’를 부르라고 충동질했으나 손을 내저었다.
왜냐면 오늘 틀니를 끼고 나왔기 때문이다.
음식 맛도 제대로 모르는데다, 발음까지 이상해 좀처럼 끼지 않으나,
습관을 들여야 한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왔다.
그래서 점잖은 모임이라 점잖게 끼고 나왔는데, 영 죽을 맛이었다.






노래도 부르지 않으면서 노래방은 왜 따라 갔냐하면,
혹시 더 이상 못 만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지만, 오늘 일기를 살찌우기 위해서다.
돌아가며 부르는 노래를 한곡씩만 감상한 후, 핫바지 방귀 새듯 사라진 것이다.






그 중 인상적이었던 노래는 박일환씨가 부른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다.
음정은 따라가지 못했지만, 가사에 묻어나는 감정이 진득했다.
마지막 대목에선 마치 '인사모'의 이야기처럼 애절했다.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사진, 글 / 조문호


























아들의 결혼을 앞두고 이런 저런 관습에 따른 저항에 부딪힌다.

가난한 형편에 엄청난 돈을 예식비용에 쏟아 붙는 것도 그렇지만,

무슨 놈의 쓸데없는 격식은 그리도 많은지...



 


결혼식을 하루 앞둔 지난 24일 동네 목욕탕을 찾았다.

더러워진 몸의 때보다 마음의 때를 벗겨내기 위해서다.

탕에서 눈을 지그시 감고 이런 저런 불편한 마음을 닦아내며, 아들의 행복을 축원했다.

그 불편한 마음들은 모두 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좋은 말도 잘 못 전달되면 욕이 될 수 있고, 별 것 아닌 말도 오해하면 독이될 수 있는 것이다.

더러는 선입견이나 가치관의 차이에서 오는 문제로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나는 말보다 인터넷에 올린 글이 불편함을 유발시킬 때가 더 많다.

잘못된 일을 알게 되면 아무리 가까워도 지적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내가 잘못한 일도 감추지 않아 가족으로 부터 원망을 들을 때도 있다.



 


그리고 종교는 잡종이다. 기독교에서 천주교, 불교를 두루 다녔기 때문이다.

지금은 토속적인 무속을 좋아하나, 사실은 무신론자에 가깝다.

불쑥 종교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바깥사돈 남선우씨와 친구 배평모씨,

그리고 내가 천주교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사돈이 된 남선우씨는 16년 전에 우연히 한 번 만난 적 있는 분인데,

상견례 자리에서 혹시 배평모씨를 모르냐?“고 물어 온 것이다.

자신이 배평모씨의 천주교 대부라는 것이다.

배평모씨는 나의 친구이기도 하지만, 한 때 내 대부 역할을 한 적이 있어, 

그 별난 인연에 놀랐다.



 


배평모씨에게 전화해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연락처를 몰라 끊어진 사돈과의 관계가 다시 복원된 것 같았다.

오지랖 넓은 친구라 걱정은 되었으나,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나에게 전화해 블로그에 올린 글을 나무라기 시작했다.

자식 놈이 속도위반해 손자 가졌다는 이야기가 어떻게 자랑이지 욕일 수 있나?

싸가지 없는 말버릇에 더 울화가 치밀어 니 걱정이나 하라”는 말이 튀어 나왔는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결혼식에 참석한 다음 날,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안부 전화로 알고 잘 내려갔냐?‘며 인사부터 했는데다시 신경 건드리는 이야기를 꺼냈다.

너의 사돈과 통화를 했는데..“라는 말에 갑자기 불쾌했던 그 날이 생각났다.

데없이 사돈에게 전화질 해 말 물어 나르지 말라며 끊어 버렸다.



 


또 다른 일은 정영신씨에게 일어 난 이야기다.

그동안 햇님이를 친자식처럼 여겨 물심양면으로 애를 많이 써왔다.

결혼식에도 나가서 인사동 축하객을 맞기로 약속했는데,

당일엔 전화를 꺼 놓아 연락이 닿지 않았다. 많은 지인들이 찾았지만 감감소식이었.



 


결국 결혼식이 끝난 밤 늦게서야 만났는데, 그 사연을 들으니 귀가 찼다.

어느 지인의 전화질에 마음이 상해 하루 종일 돌아 다니며 방황했다는 것이다.

“네무슨 자격으로 예식장에 가냐?”며 가서는 안 될 자리라고 충동질했다는 것이다.

당사자인 햇님이 친모도 니 색시는 안 왔냐?”며 걱정했는데 말이다.

사람 관계란 만들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데, 다들 그렇게도 할 일이 없나?

왜 쓸데없이 남의 일에 '감 놓아라 배 놓아라'참견해 불편하게 하는지 모르겠다.



 


그 뿐 아니다. 혼주가 넥타이를 매지 않으면 안 되고, 사진도 찍으면 안 된단다.

별의 별 관습이 나를 다 불편하게 했다. 우리가 언제부터 양복을 입기 시작했으며,

사진찍는 것은 반가운 사람 만났을 때 하는 나의 인사법이다.

사람 찍는 사진쟁이가 반가운 사람들을 만났는데, 어떻게 그냥 둘 수 있겠는가?

길들어 온 민족성 때문인지, 관습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난리 나는 줄 안다.

자기에게 조그만 덕이 되면 불법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이...



 


지난 24일 밤은 결혼식 전야제를 하자는데, 술 마실 핑계도 다양했다.


울산에서 오세필씨가 올라오기도 했지만, 김명성, 최백호, 이상훈씨도 인사동에 나와 있었다.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부터 찾았으나, 태풍소식 때문인지 가는 곳마다 문이 닫혀 있었다.

여자만부산식당을 거쳐 결국 '툇마루'에 자리 잡은 것이다.



 


김명성, 최백호씨는 결혼식 날 선약이 있어 축의금만 보냈단다.

걱정하지 말라며 안심시키려 했던 말이지만, 예의가 아닌 말을 뱉고 말았다.

한 사람 식대가 오 만원씩 들어가니, 안 오면 더 좋아





'유담' 커피집으로 자리를 옮겼더니, ‘유목민에 장경호, 김상현, 이한성씨도 있었다.

지나가던 이정황감독까지 합세하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화제작에 관심 많은 최백호씨가 은근히 걱정되더라.



 


결혼식을 끝낸 그 이튿날은 유목민에서 착복식을 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불편한 양복을 입어 착복식이라 이름 붙였지만,

지방에서 올라 온 벗들과 헤어지기 아쉬워 만든 핑계거리였다.

옛날 시골에서 결혼하면 이웃이나 친구들이 어울려 하루 종일 놀았는데,

요즘의 결혼 풍속도는 너무 야박해 싫었던 것도 사실이다.





먼저 집부터 들려 편치 않은 양복부터 벗어버렸다. 그리고 불편한 틀니도 뽑아버렸다.

결혼식 때문에 틀니를 끼웠더니, 음식 맛도 모르겠고 발음까지 정확하지 않았다.

마치 광대처럼 차려입은 불편한 것들을 모조리 해체하니 속이 후련했다.



 


유목민에는 신동여씨를 비롯하여 조준영, 김용문, 박상희, 전강호, 임태종,

유진오, 이명희, 전활철, 이정환, 성유나씨가 있었고,

툇마루에는 장경호, 헨리윤, 김진두, 배성일, 신상문씨가 자리 잡고 있었다.

유목민으로 합류한 뒤에는 이인섭, 신명덕, 한상진, 공윤희씨도 나타났다.



 


그런데 착복식 한다며 큰소리치고 나갔는데, 지갑에 돈이 십만 원 밖에 없었다.

정영신씨를 만나지 못해 생긴 일로, 돈도 없으면서 혼자 큰 소리 친 셈이다.

처음엔 임태종씨가 계산하고, 나중에는 조준영씨가 부족분을 메웠으나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어쨌든 자식 핑계로 즐겁게 놀긴 놀았는데, 너무 취해 버스 종점까지 가버렸다.


어차피 내 인생은 좌충우돌 연착이다.

 

사진, / 조문호

































 





지난 8일은 인사동사람들 만나 술 한 잔하는 셋째 수요일이었다.
죽기 전에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만나자고 나발 분지가 제법 되었건만,
다들 그리운 사람이 없는지, 사는 게 힘든지 잘 나오지 않는다.






그 날은 오후2시부터 인사동 나오라는 장경호씨 전화를 받았다.
일찍부터 마시면 늦게까지 버티기 힘들어 겁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만난 지 오래된 최명철씨와 함께 ‘툇마루’에 있다는데...






나오다 동자동 입구에 자리 잡은 유정희씨 일당에게 덜미 잡혔다.
“날씨도 더운데, 막걸리 한 잔 해요.”
차마 거절할 수 없어 마시다보니 30분이 후딱 지나버렸다.






바삐 갔더니, 그 때까지 장경호씨와 최명철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최명철씨는 전국구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일 없이 바쁜 양반인데, 모처럼 인사동에 나온 것이다.
툇마루 막걸리는 맛은 있으나 느즈막에 달아올라 힘들게 하는 술이지만, 찔끔 찔끔 받아 마셨다.






그런데, 인사동에서 30여 년 동안 양념 행상을 해 온 권정선씨가 ‘툇마루’ 이층에 올라 온 것이다.
알고 보니 ‘툇마루’의 된장비빔밥에 들어가는 참기름을 권씨 할매가 댄다고 했다.
‘툇마루’를 단골로 잡고 있는 권씨 할매가 갑자기 존경스러워 보였다.
뵐 때마다 옛날 같지 않은 야박한 인사동이라 사는 게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비빔밥 한 그릇 먹고 ‘유목민’으로 가다 거리에서 뜻밖의 까딱이를 만난 것이다.
이 친구 역시 인사동에서 만난 지가 30년 넘었지만, 잊을만하면 나타나는 인사동 물귀신이다.
그것도 날씨가 무섭도록 춥거나 더울 때만 나타난다.
보이지 않으면 혹시 죽지나 않았는지 걱정하는데, 그 걱정을 비웃듯 나타나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이다.






이 인간 보면 사람 목숨이 참 질기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노숙자들이 몰리는 서울역 부근으로 가면 밥이라도 쉽게 얻어먹을 수 있지만,
그가 즐겨 다니는 곳은 인사동이나 미술관이 몰린 곳이라 밥은커녕 사람들의 눈총만 받는다. 



 


비록 노숙하며 살아가는 걸승이지만, 내공은 보통이 아니다.
저승 떠난 화가 강용대씨가 그를 일찍부터 알아채어 유일하게 벗이 되어주기도 했다.
그는 한 때 해인사 중이었지만, 무슨 사연인지 인사동을 헤맨 지 숱한 세월이 지났다.
인사동에서는 스님들이 그의 밥이다.
얼마 전에는 조계사 경내에서 보살 한 분이 거지 행색을 푸대접 했다가 혼쭐나는 모습을 최명철씨가 봤단다.






그는 중답게 술은 마시지 않는다.
녹차는 좋아할 정도가 아니라 그의 중독자에 가깝다.
거지 주제에 따뜻한 물 구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그 비결은 나도 모른다.
녹차 문제로 종로경찰서에 들락거린 적도 두 차례나 있는데, 그 때마다 고인이 된 ‘귀천’ 목여사가 빼 내 주었다.






아무리 꼬드겨도 그의 법명은 물론 신상에 관한 일체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무슨 의문이 그리 많은지 항상 고개를 까닥거리고 다녀 그냥 까딱이로 부른다.
탁발 또한 아무한테나 손 벌리지 않고 아는 사람에게만 강탈하듯 뺏는다. 
푼돈이지만, 만나면 항상 갈취 당했는데, 요즘은 내 사는 꼴을 짐작했는지 돈 달라는 소리를 일체하지 않는다.






너무 반가워 담배 한 대 권했더니, “주제에 담배는 무슨 담배냐”며 갑 채 빼앗아 자기만 피운다.

오히려 내가 담배를 구걸하도록 만들었다. 좌우지간 보통 내공이 아닌 의문의 걸승이다.






이 날은 오래된 인사동 꼴통들을 자주 만났다.
돌 위에 자리 잡은 사람에게 카메라를 들이댔더니, “문호형님 아입니꺼?”라는 말에 화들짝 놀랐다.

올려다보다 지산이었다. 이 인간 이야기 꺼내려면 날 샐 것 같아 그만해야겠다.






그 날은 막사발로 통하는 김용문씨를 비롯한 서울공고 동문들의 단체전이 있다기에 ‘나무화랑’에 올라갔다.
석심 미술전이라 이름 붙였는데, 돌에는 마음이 없으니 보나마나다.
김용문씨를 내세운 아마추어 동문들 전시였는데, 아는 분이라고는 김용문씨와 김진하관장 뿐이었다.






날씨도 내 마음처럼 왔다 갔다 했다.
비오다 더웠다 들랑날랑 하니 사람들도 많았다 적었다 날씨 따라 갔다.
‘유목민’에 자리 잡았으나 시간이 이른지 손님도 없었다.
오가며 만난 아는 사람이라고는 이수호선생과 김명성, 공윤희, 유진오, 전활철, 박혜영씨가 전부다.






그나저나 술이 취해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다들 늦게나오는데, 나오기도 전에 내가 취해버렸으니 어쩌랴!
다음부터는 오후 여섯시 이전에는 절대 나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장경호, 유진오씨를 남겨두고 삼십육계 줄행랑 쳤다.






아! 살아남기 힘들다.

제발 셋째 수요일을 기억해다오.



사진, 글 / 조문호































모처럼, 인사동 터줏대감들이 총 출동하셨다.
‘엉겅퀴 꽃’의 민영시인과 ‘한국의 아이들‘을 쓴 황명걸시인,
인사동을 노래하는 강민 시인, 문학평론가에서 서화가로 발 넓힌 구중서선생,
조선의 3대 구라 중 한 분으로 꼽히는 방배추(방동규)선생 등
인사동을 주름잡던 터줏대감들이 여럿 나오신 것이다.






암으로 투병중인 신경림시인께서 나오지 못했지만,
원로 다섯 분을 한자리에서 만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다들 양평이나 용인 등 멀리 계시기도 하지만, 이제 연세가 많아 예전 같지 않으시다. 
열 몇살이나 작은 나도 빌빌거리는데, 다들 지팡이에 의지하며 힘들게 사신다.
이젠 작정하여 모시지 않으면, 한자리 모시기 힘들게 되었다.






나이가 들수록 친구밖에 없다는데, 친구들 끼리 한데 뭉쳐 살수는 없을까?
별로 나눌 말씀이야 없겠지만, 얼굴만 보고 있어도 추억이 줄줄 하니 행복하지 않겠는가?
이제, 인사동 터줏대감을 모시는 경로잔치라도 자주 열었으면 좋겠다.
예전에는 ‘창예헌“이란 모임에서 모셨으나, 그마저 풍비박살 나 자주 뵐 수 없게 되었다.






이번 모임은 지난달, 영주의 신동여화백 왔을 때 갑작스레 결정된 일이다.
그 날 ‘유목민’ 술자리에서 우연히 구중서 선생을 만난 것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김명성, 조준영시인이 한 번 모시자고 제안한 것이다.
29일로 정한 것은 조준영교수의 수업 없는 날로 택한 것이다.






그것도 양평 계시는 황명걸선생을 모셔오기 위해
조준영시인이 차로 모셔 와서는 끝난 후 다시 모셔 드리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조준영시인은 차 때문에 반가운 자리에서 술 한 잔 못 마시는 징역을 살아야 하지 않는가?
저만한 제자 둔 황명걸 선생은 진짜 복 많은 분이시다. 요즘 그런 제자 없다.






29일 정오 무렵 ‘유목민’에서 오찬회를 갖기로 했으나, 갑자기 ‘툇마루’로 자리가 바뀌어 버렸다.
전활철씨는 시장까지 보아두었는데, 친구 힘들까 바 김명성씨가 바꾼 것 같았다.
그래서 ‘유목민’에서 만나 '툇마루'로 옮겨 간 것이다.
된장비빔밥과 북어찜으로 막걸리를 마셨는데, 전활철씨는 꼬불쳐 둔 중국술 한 병을 내놓았다.






그 날 마주앉은 방동규선생께서 여러 가지 충고 말씀도 주셨다.
“네가 쪽방에 들어가므로 결국 쪽방 하나가 더 늘어난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노숙자 탓도 하셨다.
방선생께서는 돈을 벌기 위해 박킹 끼우는 일을 받아 하신다고 했다.

한 개 끼우는데 3원씩이니 만개를 끼워야 삼 만원 벌지만, 손톱이 달도록 일하신다는 것이다.





맞는 말씀이지만, 노숙자들도 여러 계층이 있다.
질병이나 신체장애로 일 못하는 노숙자도 있지만, 대개가 알콜 중독자들이다.

그러니 늘 술에 취해 있는데, 스스로의 통제력을 잃은 상태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문제는 나도 서서히 노숙자에 동화되어 간가는 점이다.
그들을 알기 위해 어울리다보니, 이제 주객이 전도된 듯하다.
그래서 지금은 노숙자들과의 술자리를 가능한 줄여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뜻밖의 중국술에 이게 왠 떡이냐며 두 잔 받아 마셨는데, 슬슬 오르기 시작했다.
오후3시부터 '프레스센터'에서 열리는 김경린시인 학술심포지움 사진 찍어야 하는데, 걱정스러웠다.

술 취해 찍는 취사야 몸에 베였지만, 점잖은 분들 계시는데, 쫄랑대면 남사스럽지 않겠는가?






다들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냉커피 한 잔 얻어 마시고 일어서야 했다.
뒤늦게 페북에 올라 온 사진을 보니, 김상현씨와 전활철씨가 노래를 불러가며
흥겨운 판을 만들었는데, 나만 놀지 못해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했다.






이 날 모신 다섯 선생님 외에도 많은 후배들이 나왔다.
처음 말 꺼낸 김명성, 조준영, 김상현. 전활철씨 외에도
박인식씨를 비롯하여 정영신, 장경호, 고중록, 이상훈, 김영국씨가 어떻게 알았는지 줄줄이 찾아왔다.
우짜든, 김명성씨가 잘 풀려야 이런 자리라도 자주 만들어질텐데...


부디, 선생님들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십시요.


사진, 글 / 조문호











































































남북정상 회담하는 뉴스에 가슴이 벌렁 벌렁했다.
꿈도 꿀 수 없었던 통일이지만, 이젠 꿈이라도 꿀 수 있게 된 것 같다.
여지 것 살아오며 티브이 없는 것을 이처럼 안타까워 한 적도 없었다.
페북에 올라 온 뉴스로 보았으나, 큰 화면에서 보고 싶었다.


소원이라면, 죽기 전에 정영신씨와 북한 장터나 한 번 돌아보는거다.




이른 시간부터 축배 들자는 장경호씨의 호출이 있었지만,
하던 일만 마무리하고 가려는데,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서둘러 나가다 인사동 돌 턱에 앉아 노닥거리던 공윤희, 민영기씨를 만났다.
둘 다 술시를 기다리는 듯 했으나, 난 기다릴 겨를이 없었다.




몇 발자국 가다 이번에는 죽은 줄만 알았던 까딱이를 만난 것이다.
진짜, 죽은 사람 살아온 것처럼 반가웠다.
사라졌다 잊을 만하면 인사동에 나타났는데,
이번에는 근 이년 가까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숙자라 길거리에서 객사한 줄 알고, 인사동 골동 하나 사라진 것을 아쉬워 했다.




전에는 그를 만나면 도망치기 바빴고, 그는 쫒아오느라 정신없었지만, 이젠 달랐다.

둘 다, 너무 반가워 손을 덥석 잡고 멀건이 쳐다보았는데,
오히려 그가 나를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꼬라지가 많이 상했네. 이빨은 어데 팔아 묵었노?”라기에
“자슥, 많이 칼 컬어 졌네, 어디 돈 많은 할마시라도 하나 걸렸나?” 서로 안부만 물었다.
그런데, 또 하나 바뀐 것은 평소처럼 돈 내라며 손을 벌리지 않았다.



같이 술이라도 한 잔 하고 싶었으나, 그는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녹차에 중독되어, 어렵게 탁발하여 녹차를 사 마시는 중놈 출신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다시 보자며, 툇마루로 올라가니, 장경호씨와 박세라씨가 앉아 있었다.
옆 자리에는 테너 이동환씨가 젊은 친구들과 앉아 있었는데,
오늘 ‘통인오페라’를 마치고 후배들과 한 잔한다고 했다.
다들 축하주 마시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기분이 좋아 오늘 통일 만찬주는 내가 쏜다며 페북에 날렸는데.
댓글 올라오는 것 보니, 의외로 통일에 겁먹은 사람이 많더라.


갑자기 죽은 김용태씨가 생각나, 이차로 ‘낭만’으로 옮겼는데,
그 곳에는 성기준씨 패거리가 큰 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김보영, 박영애씨 두 모녀를 세워두고, 죽은 용태한테 보낼 사진이라며 한 장 박았다.
그런데, 나올 때 박영애씨가 술값을 받지 않더라. 거지라 불상하게 여겼을까?
그나저나, 용태 주소를 몰라 어디로 부쳐야 할지 모르겠다.




마지막 3차는 ‘유목민’에 들려 임경일씨와, 임태종씨를 만났는데,
다들 기분 좋아 싱글벙글했다.
경상도 성주장 갔다 오는 정영신씨를 불러들여 마지막 축배로 끝냈다.




김정은이 덕분에 이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멋진 놈 인줄, 진정 난 몰랐네.


이러다 내가 받들어 모시는 교주 바뀔지도 모르겠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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