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가객 최백호의 산문집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마음의 숲에서 출간되어 절찬리에 판매되고 있다.

출판된지 한 달도 되지않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최백호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마음의 숲/ 240면 / 가격17,000원

지난 달 초에 발간된 산문집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는 그가 써온 노래가사처럼 깊은 우수와 사유,

삶에 대한 통찰이 오롯이 담겨있다.

 

산문집에는 최백호가 가수가 된 우여곡절과 가수로서 진정성을 잃지 않고 살아 온 진득한 이야기,

노래에 얽힌 사연, 그리고 깊은 울림을 주는 삶의 잠언들이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60세가 넘어 그리기 시작하여 여러 차례 개인전을 가졌던 그림 30점도 수록되어

산문집의 볼거리를 더해주는데, 그림에 이어 글 솜씨도 보통은 아니었다.

하기야! 그가 쓴 시 같은 노래가사들을 보면 일찍부터 노래하는 시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수이며 시인이고, 시인이며 화가인 최백호는 이 시대의 진정한 풍류객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난 4일 오후 4시에는 광화문 교보빌딩 대산홀에서 최백호의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북 콘서트가 열렸다.

 

교보빌딩 23층 대산홀은 350석 규모지만 코로나 방역으로175명만 입장할 수 있는데다,

책은 이미 구해 읽은 터라 북 콘서트는 가지 않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뜻밖의 이변이 생겨버렸다.

 

필자가 포스팅한 북 리뷰를 본 울산의 오세필씨가 사발통문을 돌려버렸다.

그 덕에 김명성씨가 좌석을 확보하여 인사동 지인들을 불러 모은 것이다.

이십여 명이나 추가로 참석할 수 있었던 것도 객석의 반만 예약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그 날 오후 3시 무렵, 정영신씨와 인사동부터 들려 갤러리인덱스에서 열리는

) 김기찬선생의 어게인 골목안 풍경 속으로사진전을 관람했는데,

사진전 역시 모처럼 사람냄새 물씬 풍기는 좋은 사진이었다.

 

전시를 보고 나오는 길에 역술인 신단수씨를 만나 그날 일진이 어떨지 궁금했는데,

북콘서트가 열리는 대산홀 입구에는 신단수씨의 친형인 김명성씨가 구입한 책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객석에는 오세필, 임태종, 정기범, 이정숙씨등 반가운 분도 여럿 보였다.

 

오후4시부터 시작된 북 콘서트는 최백호의 주옥같은 노래와 함께

가을 낙엽처럼 구수한 이야기들이 듣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국회의원이었던 아버지께서 태어난 지 몇 개월 밖에 되지 않은 자신을 보러오다 교통사고를 당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에서부터, 누님으로부터 너 때문에 아버지를 잃었다는 원망과 더불어

공부가 하기싫어 방황했다는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가슴에 맺힌 상처까지 다 털어놓아

그의 진정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별도의 사회 없이 혼자서 1시간 30분 동안 끌어가는 북 콘서트 진행 솜씨도 보통은 아니었다.

 SBS 라디오에서 '최백호의 낭만시대'14년 동안 끌어 온 경험이 뒷받침 되지 않았나 싶다.

 

그 날 부른 노래는 부산에 가면을 비롯한 애창곡을 일곱 곡이나 불렀는데,

우수에 젖은 그의 노래는 흩어지는 낙엽처럼 아련한 향수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특히 지금은 별이 되어버린 친구 홍수진 시인을 생각하며 가사를 쓴

영일만 친구에서는 친구에 대한 그리움이 왈칵 밀려왔다.

마지막 구절인 친구를 부르는 대목은 절규처럼 가슴에 내려 꽂혔다.

 

3월 말에는 부산에서 최백호의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북 콘서트가 열린다니,

부산에 계신 분들은 잊지 말고 좋은 시간 만들길 바란다.

 

'인사동 사람들'은 북 콘서트가 끝난 후 미리 예약해 둔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겨 유쾌한 만찬의 시간도 가졌다.

그러나 김명성씨가 마지막 기념사진 찍으며 뱉은 농담 한마디는 영원히 잊지 못할 마음의 상처가 되고 말았다.

 

사진, / 조문호

 

정영신 사진
정영신사진
정영신사진

  

최백호 /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 마음의 숲 / 240면 / 17,000원

낭만가객 최백호의 산문집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마음의 숲에서 출간되었다.

가수에서 화가로, 화가에서 문필가로, 끊임없이 도전하는 전방위 예술가로 거듭나고 있다.

 

인사동 공화랑/ 쵀백호개인전에서 2008.5

 다들 바쁘게 살다보니 그의 소식은 인터넷에서나 볼 수 있었는데, 최근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산문집이 나왔다는 기사를 보고 서둘러 구해 보았다. 노래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에 이어 맛깔 나는 글 솜씨 또한 일품이었다. 그의 노래 가사처럼 깊은 사유와 삶에 대한 통찰이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가수로서 진정성을 잃지 않고 살아 온 이야기와 노래에 얽힌 사연, 그리고 속 깊은 울림을 주는 인생의 잠언들은 최백호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다. 환갑이 되어 그리기 시작해 여러 차례 전시 해 온 그림 삼십여 점도 볼거리를 더해준다.

 

인사동 '경복궁'에서 '인사동사람들'모임에서 / 2018.8

, 최백호를 추남(秋男)으로 부른다.

며칠 전에는 우연히 유튜브에서 그의 노래 부산에 가면을 들었는데, 쪽팔리게 왜 그리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 마치 낙엽이 흩어질 듯한 우수에 젖은 목소리가 아련한 향수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만난 지가 몇 년은 족히 된 것 같아 모처럼 그에게 문자메시지로 편지를  보냈다. 평소 어눌한 말버릇으로 소통이 잘 안되는데다, 이젠 귀도 어둡고 발음까지 분명치 않아, 전화는 잘 걸지도 받지도 않는다. 마침 '스마트협동조합' 일로 상의할 것도 있어 장문의 편지를 쓴 것이다.

 

정동 이화아트갤러리 / 장사익글씨전에서 2019.5

그를 알게 된지도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10여년 전 정영신씨와 내가 인사동에서 '아트온'이란 사진출력소를 차린 적이 있었다. 그 때 김명성시인과 뜻을 모아 '앱숀' 출력기를 사라며, 천 만원이나 되는 큰 돈을 준적이 있었다. 돈이 있어도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지난 세월은 아름다운 시간도 있었지만, 지워버리고 싶은 부끄러운 시간도 많았다. 그는 부끄러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부끄러움도 배워야 한다. 배우지 않으면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모른다.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얼마나 용감한 것인지 모른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그것을 가르쳐야 한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볼이 빨개진 모습. 그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알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어른인 우리도 배워야 한다. 그래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 한다.“

 

인사동 '툇마루'에서 김명성, 오세필씨와 함께 / 2018. 7

산문집에 실린 글들은 떠나보낸 세월 속의 모든 것들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소환되고 있었다. “노래 속에 나오는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은 부산 동래시장 근처 수안파출소 부근의 어느 허름한 다방이었다. 힘들었던 시절 길을 걷다가 갑자기 비가 쏟아져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에이스 캐논의 색소폰 연주곡인 로우라가 흘러나와 그 자리에서 스무 번을 넘게 들었던 것 같다. 그런 기억을 더듬어 만든 노래다

 

마포 '뮤지스땅스' 개막식에서 / 2014.12

노래에 대한 투지에 대해서도 말했다. “여든이 되어도 나는 입영전야를 부를 수 있다. 젊은 시절에 한 호흡으로 부르던 대목을 두세 호흡으로 나눠 부르면 된다고 생각한다. 여든에는 여든의 호흡으로 아흔에는 숨이 좀 가파르겠지만 충분히 노래할 수 있다.”  그렇다. 그는 부지런하고 최선을 다하는 친구다. 책 속에 이런 대목도 나온다. “나보다 음악을 잘하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나처럼 열심히 하는 사람은 드물 거라고 생각한다. 매일 새벽 6시 반쯤 일어나 두세 시간씩 노래 부르고 그림을 그린다. SBS 라디오'최백호의 낭만시대'14년째 하고 있다. 열심히 하는 일에 타협은 필요 없다.”

 

인사동 덕원갤러리의 정영신 '장날' 전에서 / 2016.8

그리고 사회를 향한 질책도 빠지지 않았다. “온갖 부정부패를 저지르고도 카메라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 어른에게 심한 욕설을 해대는 젊은이, 더욱 거칠어진 폭력범, 갑 질하는 부자들의 뻔뻔스러움 등은 씁쓸하면서도 오늘의 현실을 돌아보게 만든.

이외에도 스스로 간이 작았다며 무대에서 손을 올리기까지 한없이 힘들었다는 이야기, 할 말은 하는 그의 성격 덕에(?) 일어났던 방송국 에피소드, 70년대 해외 공연에서 일어났던 에피소드, 박자가 틀리고 부를 때마다 노래가 다르다고 후배들에게 핀잔 듣는 솔직한 이야기들은 공감과 웃음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표절에 대해 남긴 글에서는 정의로운 의지를, 교편 잡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어린 시절의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압구정 '장천아트홀'에서,, 옆은 오세필씨와 필자 / 2014,8, 정영신사진

이 책의 매력은 결코 최백호의 진정성 있는 고백이었다.

어떤 일을 하던 그가 주목하는 지점은 진정성이다. 고독해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서지 않고 돋보이려 하지 않는 것. 그 고독을 견디는 힘이 최백호의 음악과 그림 그리고 지금의 글을 만들지 않았나 생각한다.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자신에 대한 진정성이라는 중력이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겨 독자들로 부터 사랑받게 된 좋은 책이다. 나 온지 며칠 되지않았으나 벌써 베스트셀러다.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효교' 교주로 등극 / 2014.8

 나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고독이다. 그것은 내가 노래와 그림을 시작할 수 있게 해준 언제나 가장 소중한 친구다. 고독에서 사유의 힘이 오고 혼자 견뎌낼 수 있는 강인함이 온다. 진정한 고독은 따뜻한 위로를 준다.”

 

나는 일출보다 일몰을 더 사랑한다. 세상을 삼 킬 듯이 힘차게 솟아오르는 피둥피둥한 아침 햇살 의 욕망스런 모습보다, 온몸을 불태워 최선을 다한 장엄한 황혼의 그 처절한 모습에 감동 받는다.”

사진, 글 / 조문호

 

오는 3월4일 교보문고(23층대산)에서 최백호 북콘서트가 열린다.

 

지난 일요일 정오무렵, 춘천 ‘미래컨벤션웨딩홀’에서 오세필, 이종난씨의 장남 원석군과

황석규, 이정순씨의 장녀 임정양이 화촉을 밝혔다.

 

원석이 장가가는 걸 보러 모처럼 춘천에 갔는데, 웨딩홀이 마치 이산가족 만나는 장소같았다.

친지들 만나는 혼주야 말할 것도 없지만, 하객들도 반가운 분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정영신, 김명성씨와 함께 출발한 예식장은 혼주인 오세필씨 가족을 비롯하여

최백호, 정기범, 이정숙씨 내외와 공윤희, 임태종, 손연칠씨 등 많은 분을 만날 수 있었다.

 

울산 신랑이 신부 댁이 있는 춘천에서 가진 혼례였으나,

코로나 시국에도 불구하고 많은 하객들이 축하하러 왔었다.

 

여태 늙어가는 스스로의 처지를 잊고 지냈는데,

모처럼 만난 지인들의 늙어가는 모습을 보고서야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정기범씨와 손연칠씨도 이전보다 늙어 보였고,

최백호씨는 나보다 세 살이나 아래인데도 이전 같지 않았다.

 

그동안 희귀병에 걸려 고생을 많이 한 모양인데,

돈벌이에 급급한 큰 병원들의 문제점에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다행이 그 병을 잘 아는 분을 만나 완쾌했으나 체중이 10킬로나 빠졌단다.

 

어제께는 가수 이동원씨의 부고에 가슴이 아팠다.

이제 벗들이 하나 둘 떠나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지만, 결코 남의 일이 아닌 것이다.

 

지인들과 어울려 3층 연회장으로 올라갔더니, 김상현씨가 뒤늦게 찾아왔다.

다들 차를 끌고 와 술 한 잔 마시지 못했으나, 춘천까지 와서 어찌 그냥 갈수 있겠나?

 

김명성, 김상현, 정영신씨와 소양강을 찾아가 늦가을의 정취에 빠지기도 했다.

 

휴일이라 차 밀릴 것을 염려해 춘천까지 와서 닭갈비 맛도 보지 못하고 출발했는데,

어이쿠! 다들 이심전심인지 차가 엄청 밀리기 시작했다.

김상현씨가 들려주는 남인수씨의 낭낭한 노래 소리에 위안해야 했다.

 

다시 한 번 오세필씨의 장남 원석군의 결혼을 축하합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0일엔 아침부터 출동명령이 떨어졌다.

녹번동 정영신씨 다락방에 있는 대형 프린트기를

'한국스마트협동조합' 사무실로 옮긴다는 것이다.

 

그 기계가 인사동 '아트 온'에서 녹번동 다락방까지 온

지난한 과정을 지켜보았기에 보통 일이 아니었다.

장정 몇 명이 달라붙었지만 좁은 방 턱에 끼어 힘을 쓸 수 없었다.

 

다행히 나갈 때는 '앱숀'사무실에서 온 젊은 분들이 쉽게 빼낼 수 있었다.

협동조합르로 옮겨 놓은 프린트기를 보니 지난 일이 생각났다.

우리 손에 들어 온 사연은 뜻밖이었다.

 

8년 전 영일만친구 최백호씨가 인사동에서 그림 전을 열었는데,

그 개인전을 아라아트김명성씨가 추진한 것이다.

전시를 끝낸 최백호씨가 전시경비 보태라고 천만 원을 내 놓았는데,

김명성씨가 기어이 받지 않은 것이다.

 

그 돈이 왔다 갔다 하다 결국 내 프린트기 사주기로, 뜻을 모은 것 같다.

후배들의 고마운 뜻에 앱숀 프린트기가 생겼는데, 원님 덕에 나팔 불게 된 것이다.

 

정영신씨의 손놀림에 의해 정선 산천이 줄줄이 펼쳐 나왔고,

전국 장터가 왁자지껄 난장을 만들어냈다.

돈 버는 기계가 아니라 돈 쓰는 기계였다.

만만찮은 잉크와 종이 값 날려가며 어지간히도 떠벌렸다.

 

이제 그 기계도 8년차가 되니 내 몸처럼 골골한다.

얼마 전부터 컬러 사진이 안 되고 흑백만 된 모양인데,

문제 생긴 헤드를 수리하려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단다.

이제 수리하던, 새로 사던, 주사위는 스마트협동조합에 넘겨졌다.

 

그 날은 스마트협동조합 식구들이 함께 밥 먹는 수요일이었다.

처음으로 차린 공동 밥상인데, 주방 일을 도운 게 문제였다.

밥에 물을 많이 부어 죽밥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책임질 주방장이 없어 그렇다며 혼자 변명해댄다.

 

황경아씨가 가져 온 갓김치와 칼치구이,

정영신씨가 가져온 두룹나물에, 입만 가지고 간 나만 맛있게 먹었다.

함께 먹는 밥이 맛있는 거야 두 말하면 잔소리다.

 

그 날 저녁부터 이틀에 걸쳐 정영신씨 집 환경미화작업이 펼쳐졌다.

방을 차지했던 프린트기가 빠져나갔으니, 얼마나 시원하겠는가?

아무리 코 구멍한 집이지만 수시로 위치를 바꿔가며

변화를 즐기는 정영신씨 입장에서는 앓던 이가 빠진 것 같을 거다.

 

미화작업이라 해도 이쪽 책장이 저쪽으로 가고

저쪽 책장이 이쪽으로 오는 수준이지만, 여간 신경 쓰는 일이 아니다.

김명성씨가 가져가야 할 대형 작품 여덟 점이 남아 마무리를 못했으나

다락방 삼면은 대충 정리가 되었다.

 

그동안 이리 옮기고 저리 옮기는 과정에서 많은 책들을 버렸다.

일부는 정선으로 옮겼으나, 이젠 정선도 둘 곳이 없다.

그 날도 버릴 책과 남길 책을 구분하는

정영신씨의 판단에 따라 많은 책들이 운명을 달리했다.

 

그렇지만, 자의든 타의든 또 다시 책은 들어 올 것이다.

대개 버려지는 책은 사지 않고 얻은 책이었다.

그래서 책을 사지 않는다면, 공짜는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말아야 한다.

자칫, 쓰레기 양산하는 일에 일조할 필요가 있겠는가?

 

, 버려지는 책이 아까워 고물상에 팔려고 모았는데,

정영신씨는 없는 사람 가져가게 그냥 밖에 내놓으란다.

세상에 니보다 없는 사람이 어딧노?”라고 했더니, 비시시 웃는다.

그래! 돈은 없어도 마음이 부자니, 니가 더 부자인지도 모르겠다

 

어디에선가 우리가 만든 책들도 이처럼 버려질 걸 생각하니,

세상만사 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끼던 책도 싫어지면 버리듯이 모든 것은 언젠가 버려진다.

결국 인간조차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것이 세상 이치 아니던가?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 인터넷 뒤져가며 책을 주문할 것이다.

제 버릇 개 못준다.

 

사진, / 조문호

 

 

 




소리꾼 장사익선생의 붓으로 노래한 ‘낙락장서(落樂張書)’전이
지난 8일 어버이날에 맞추어 성황리에 개막되었다.






절절한 소리를 그침 없이 쏟아내는 그의 노래처럼,

물 흐르듯 자유롭게 쓰 내려가는 붓글씨 역시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글씨였다.






예술가의 끼를 타고났지만,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그의 인간미다.
무엇보다 사람을 사랑하는 진솔한 마음이 바탕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겸손하고 상대를 배려하며 껴안아주는 따뜻한 마음은
각박한 세상에 한 줄기 빛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예술의 무기화로 잘난 채 않는다. 그냥 예술 자체를 즐긴다.
누구든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노래 부르며 글을 쓰 왔다.






지인들의 행사마다 찾아 와 축가를 불러주기도 하지만,
오래전에는 어느 공원에 모인 아줌마들의 요청을 마다 않고,
질퍽하게 부르는 소박한 모습에서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가끔 부쳐오는 편지의 붓글씨도 그렇지만,
작년 이 맘 때 아들 결혼식에 보낸 휘호는 글씨의 아름다움을 넘어
그의 따뜻한 마음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스스로의 미약함과 악필의 부끄러움에 답장조차 보내지 못한 처신은
돌이킬 수 없는 과오로 남아 큰 빚을 짊어지게 된 것이다.





장사익, 그는 참 아름다운 사람이다.
노래도, 시도, 글씨도, 그가 행하는 모든 예술세계가 그를 빼 닮았다.
아무런 규범도 없고 규칙도 없이 단지 마음에서 우러나는 힘이 넘실거릴 뿐이다.
예술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시대 마지막 음유시인이 아닌가 생각된다.






난, 그를 가수라 부르지 않고 소리꾼이라 부른다.
토해내는 것은 대중적인 노래지만, 그 노래는 판소리에 바탕 둔 소리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만이 부를 수 있는 소리는 유행이나 세대의 구분 없이 모두가 느낄 수 있는
가장 한국적인 소리로 자리 잡은 것이다.






전시장 벽에 걸린 글씨들은 평소 보아왔던 글씨체를 벗어 난 작품도 있었다.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작가의 창의성을 엿볼 수 있었는데,
한마디로 소리 없는 악보를 보는 느낌이었다.






이번 전시작에는 그가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도 더러 있었지만,
작가의 소소한 일상이나 느낌이 솔직하게 담겨있었다.
노래처럼 진솔한 삶의 자욱이 글씨에 그대로 드러났다.






그의 글씨는 자유롭게 변주하는 가락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며 뻗쳐 나갔다.
각기 다른 모양의 글자들이 어우러진 가운데,
균형과 리듬의 조화가 만들어 내는 즐거운 글씨 놀이였다.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이영철총장은 서문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선생의 서예는 삶의 꽃이며 눈물이고, 낙지자(樂之者)의 필묵유희(筆墨游戱)입니다.
그리고 그의 서예는 그의 노래와 더불어 우리에게 흉금을 울리는 삶의 휠링이라 하겠습니다”






‘落樂張書’전이 열리는 개막식은 작품이 벽에 걸렸을 뿐이지, 다 같이 어울리는 놀이마당이었다.
벗들과 후배들이 나와 노래 부르며 연주하는 공연장이었다.






김종규(국민문화신탁재단이사장), 이근배(시인), 심문섭(조각가), 이영철(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총장), 진옥섭(한국문화재재단이사장),
석태진(글씨21대표)씨의 축사가 이어진 후 가수 최백호씨를 비롯하여 기타리스트 김광석, ‘아카펠라 더 솔리스츠’, ‘장사익 소리판 친구들’,
대금연주자인 아들 장영수씨 등 주변의 가까운 음악인들이 몰려나와 흥겨운 자리를 만들어 갔다.






객석에는 서정춘, 허영만, 김형영, 한명희씨 등 시인도 많았지만, 김녕만, 강제훈, 곽명우씨 등 사진가들도 여럿 보였다.
그 외에도 문봉선, 이정희, 전유성, 정재숙, 최재천, 윤세영, 최열씨 등 많은 축하객들이 전시장을 가득 메웠다.






그 날의 공연은 기타리스트 김광석씨의 반주로 최백호씨가 부른 ‘봄날은 간다“도 절창이었지만,

‘장사익 소리판 친구들’의 연주로 시작된 장사익씨의 주옥같은 노래들은 전시장을 후끈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이토록 오감을 즐겁게 한 전시는 여지 것 경험하지 못했다.
인사차 들린 전시가 어버이 날 받은 최고의 선물이 되었다.






오는 14일까지 ‘이화아트갤러러’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의 작품 판매 수익금 일부는 유니세프에 기부될 예정이라고 한다.

사진, 글 / 조문호











































































































40주년 앨범 '불혹' 내고 공연…"굴곡에도 살아남은 건 부모와 운이 팔할"



데뷔 40주년 맞은 최백호 (서울=연합뉴스) 진연수 기자 = 데뷔 40주년을 맞은 가수 최백호가 21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아현동 뮤지스땅스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7.2.21 jin90@yna.co.kr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싱어송라이터 최백호(67)는 '낭만 가객'으로 불린다. 가객보다는 '낭만'에 방점이 찍히는 뮤지션이다.

45세이던 1995년 발표해 20여 년간 사랑받은 대표곡 '낭만에 대하여'의 영향이겠지만 까칠한 탁성에 깃든 쓸쓸한 무드는 평범한 가사에도 낭만을 입히는 운치가 있다.

"전 꽤 낭만적인 사람이에요. 허허허. 단순하거든요. 인생이란 게 깊고 복잡하게 계산하면 힘들어지죠. 고민이 있어도 길게 못 가고 심각하게 상처도 안 받아요. 단기 기억이 떨어져선지, 안 좋은 일에 몸이 움츠러드는 자기 보호 능력이 뛰어나선지…."

천성적으로 부끄럼이 많고 소극적이던 그가 어느새 올해로 40년간 무대에 섰다.


23일 0시 선공개할 '바다 끝'을 시작으로 3월 데뷔 40주년 기념 앨범 '불혹'을 발표하고 같은 달 11~12일 서울 LG아트센터에서 기념 공연을 펼친다.


2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아현동 뮤지스땅스에서 만난 그의 소회에는 행간에 여러 의미가 스몄다.


"전 크게 드러나지 않아도 개인적인 굴곡은 좀 있었는데 정말 운 좋게 살아남았어요. 저 자신의 가치보다는 다른 어떤 힘이 작용하지 않았나 싶어요. 노래가 알려지고 나쁜 건 요소요소 피해갔으니 운이 팔할이죠."


에코브릿지가 작사·작곡한 '바다 끝'은 최백호의 동년배에게도 공감을 얻을 인생의 무게가 실린 곡이다. 나이 들며 겪은 여러 이별을 바다 끝에 다 놓아주자는 노랫말이 서정시 같다.


데뷔 40주년 맞은 최백호(서울=연합뉴스) 진연수 기자 = 데뷔 40주년을 맞은 가수 최백호가 21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아현동 뮤지스땅스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7.2.21  jin90@yna.co.kr


어느덧 백발이 성성한 최백호에게 가장 아팠던 이별은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이다. 부산 기장군 출신인 그는 생후 5개월에 2대 국회의원을 지낸 아버지를 교통사고로 잃었고, 20살에 암투병하던 어머니를 떠나보냈다.


그는 기억조차 없는 아버지에 대해 "부산 영도에서 기호 6번 무소속으로 출마해 29살에 국회의원이 되셨다"며 "이승만 정권 시절 내무부장관 하신 막강한 분과 겨뤄 가장 큰 표차로 이겼다고 한다. 어느 날 아버지가 아들을 보러 서울에서 부산으로 오시는 길에 김천 부근 다리에서 교통사고를 당하셨다. 반대편에서 오던 터키군 트럭 중 한대가 갑자기 튀어나와 충돌했는데 가족은 당시 암살이라고 생각했나보다. 정부에 진상조사를 요구하기도 했다"고 떠올렸다.

 

죽음이 가까이 있었기에 어린 시절부터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고민했다는 그는 환갑이 넘어 깨우쳤다면서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부모의 영혼은 자식에게 깃들어 작용하는 듯해요. 제가 부모님께 물려받은 DNA도 있지만 능력치를 넘어 뭔가가 작용한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거든요. 문득 악상이나 영감이 떠오를 때도요. 부모님의 힘이라고 생각하죠."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의 공을 부모에게 돌린 셈인 그는 시인, 화가, 사진작가 등 지인 43명과의 인사동 친목모임에서 이 얘기를 설파하자 '효교'(孝敎)를 만들자고 했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가 형편이 어려워지며 마이크를 잡은 것도 부모의 부재 탓이었다. 만화가 김산호의 '라이파이'를 좋아해 친구들에게 '라이파이'를 그려주곤 하던 최백호는 화가가 꿈이었다.

 

그러나 결국 미대 진학을 포기하고 군에서 의가사 제대한 그는 우연히 부산의 한 라이브클럽에서 노래할 기회를 얻었다. 친구의 매형이 라이브클럽을 열면서 노래할 가수를 찾자 손님이 드문 시간에 부르기로 하고 무대에 올랐다. 1주일 만에 입소문이 났고 서울의 쉘부르 출신 가수들이 내려와 노래하던 대형 라이브클럽으로 스카우트 됐다.


"그곳에서 하수영 씨를 만났는데 그분이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로 뜨면서 저를 서울의 서라벌레코드에 소개해줬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기타를 치며 곡도 몇곡 만들어 첫 앨범부터 자작곡을 담았죠."


서라벌레코드와 5년 전속계약을 한 그는 1977년 1집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를 발표했다. 어머니를 떠올리며 쓴 이 사모곡으로 MBC에서 신인상을 받는 등 바로 인기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두 장의 앨범을 낼 때까지 수익을 배분받지 못해 형편이 나아지지 않았다.


"전속 계약금이 50만 원이었는데 40만 원을 홍보비로 가져가고 10만 원만 주더군요. 옷이 없어 '쇼쇼쇼' 방송에 나갈 양복을 사러 가니 4만 원이던 시절이에요. 앨범은 물론 지방 공연 수입조차 안 줘 하숙집에 월세를 못 낼 정도였죠. 그때 지구레코드에서 계약금 900만 원의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어요. 반포의 아파트 21평이 1천200만 원쯤 했을 거예요."


지구레코드로 옮긴 그는 1979년 '영일만 친구'를 낸 뒤부터 인기가 하락세를 탔다고 한다. 1980년대 초까지 하향 '직선'을 그려 하루 많게는 일곱 군데 유흥업소를 돌며 노래했다고 한다.


그는 "술집에서 노래하는 게 지치더라"며 "마침 지인이 미국행을 제안해서 한 달 만에 짐을 꾸려 가족과 떠난 게 1990년"이라고 기억했다.


로스앤젤레스 한인방송인 라디오코리아에서 DJ로 활동한 그는 그곳의 삶도 녹록지 않자 결국 1992년 귀국했다.


그리고 쓴 곡이 바로 '낭만에 대하여'이다.


노래 중간의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란 가사가 가장 먼저 써지더라고 했다.


"방 너머에서 설거지하는 아내를 보면서 '내 첫사랑도 저렇게 설거지를 하고 있겠지'란 생각이 문득 떠올랐어요. 하하. 그 뒤로 '옛날식 다방', '색소폰'으로 살이 붙었죠. 발표하고 1년 반가량 있다가 김수현 선생님의 '목욕탕집 남자들'에 삽입되며 떴어요. '내 마음 갈 곳을 잃어'가 2년이 지나 노래의 힘이 떨어졌다면 이 곡은 20년이 지나도 힘이 떨어졌다는 느낌이 없어요. 인생곡이죠."

 

40년 앨범에도 이 두 곡을 싣는다. 또 자작곡인 '위로'와 '하루 종일'을 비롯해 혜은이의 '눈물샘'과 린의 '그리움은 사랑이 아니더이다' 등 그가 작곡해준 다른 가수의 곡도 채웠다.


 

'데뷔 40주년' 가수 최백호(서울=연합뉴스) 진연수 기자 = 데뷔 40주년을 맞은 가수 최백호가 21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아현동 뮤지스땅스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7.2.21  jin90@yna.co.kr



그간 동료나 후배들에게 곡을 선물하고 아이유와 듀엣 하는 등 열린 마음으로 교류해온 그는 2011년부터 원로 가수와 인디밴드를 지원하는 ㈔한국음악발전소를 이끌고 있다. 또 정부 지원을 받아 어려운 음악인에게 연습실과 녹음실 등을 적은 비용으로 제공하는 음악창작시설 뮤지스땅스의 '대장'이기도 하다.


그는 "사명감 없이 시작한 일인데 지금은 사명감이 생겼다"며 "하지만 나보다 젊고 활동적인 분이 있다면 언제라도 이 자리를 내줄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불혹'은 미혹하지 않게 꽉 채웠다는 뜻이라며 "이제 욕심을 내려놓고 더 채우지 않겠다"고 했다.

 

그럼에도 예술의 경계를 넘은 그의 낭만적인 욕심은 버릴 수 없는 듯하다.

 

뮤지스땅스에서 3년 만의 그림 전시회를 계획 중이며, 무명 가수의 슬픈 이야기를 담은 영화 '미사리'의 시나리오를 써뒀다며 언젠가는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고 싶다고 했다.


최백호, 전설의 귀환(서울=연합뉴스) 진연수 기자 = 데뷔 40주년을 맞은 가수 최백호가 21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아현동 뮤지스땅스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7.2.21 












정영신의 ‘장날’ 사진전이 열리는 동안 반가운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첫 날은 한꺼번에 오시는 바람에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는데,
그 다음 날 부터는 마치 순서대로 오시는 것처럼, 좋은 만남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28일의 인사동은 가랑비가 오는 듯 마는 듯, 술 마시기 좋은 촉촉한 날씨였습니다.








전시장에는 이런 시간부터 울산 오세필씨를 비롯해 국민은행의 여성임원들이 찾아왔습니다.

엊 저녁 유목민에서 뵌 분이나, 전시를 보러 다시 왔다는 것입니다.

좀 있으니, 그저께 다녀 간 가수 최백호씨가 다시 왔습니다.

최백호씨는 자신이 쓴 시나리오로 영화를 찍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답니다.

    






그는 다재다능한 후배입니다. 노래 뿐 아니라, 그림도 잘 그리고, 시인 못지않게 글도 잘 씁니다.

오래동안 라디오에서 MC 일을 맡다보니 말도 구수하게 잘하는데다, 공연기획에도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토탈 아티스트인 셈이지요.

오래전부터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지만, 제작비가 큰데다 주위의 만류로 좌절했으나,

이제 그 문제점을 해결한 후, 다시 꿈을 펼쳤답니다.














그의 새로운 영역 개척에 큰 기대를 걸며, 뜨거운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화가 허미자씨와 공윤희씨가 왔습니다.

그리고 페친이며 사진하는 후배 홍윤하씨도 왔습니다.

미아리에서 열리는 텍사스 프로젝트를 보고 왔다는 정보를 주었습니다.









이 '텍사스 프로젝트'는 작년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전시한 588전시 때, 동참의 제안을 받았으나,

일정이 임박한데다 야외 설치라 사진손상을 우려해 거절한 일이 있어 더욱 관심이 갔습니다.


    






오세필씨가 저녁 식사를 대접한다기에 정영신, 공윤희, 홍윤하, 연극하는 처녀 한 분과 여자만'으로 갔습니다

일인분 45,000원이라는 정식에 술 까지 마셨으니, 괜히 부담 되더군요.

    





그 이틑 날인 29일에는 지하철 종로3가에서 내려 인사동으로 들어오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춘천의 김대영씨 전시 보러, '백송갤러리'부터 갈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전시장에 작가는 없었지만, 조용한 분위기에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마치 고감도 필름에서에서나 볼 수 있는 조립자로 그린 자연 형상들이 범상치 않았습니다.


















'장날' 전시장에 들리니, 김중호, 심지윤씨가 지키고 있었고, 오프닝 때 도와 준 음식 장식 전문가 최소연씨도 왔습니다.

그리고 새로 시작할 계획인 양동 쪽방 사람들에 도움 줄 시나리오 작가 최건모씨와 사회복지사 김성규씨도 왔어요.














잇따라 화가 김하은, 황정아씨도 찾아왔고, 원로사진가 황규태선생과 사진가 Area Park이 다녀갔고,

미국에 거주하는 전기작가 이충렬씨도 왔습니다.

이충렬씨는 간송 전형필을 비롯하여 한국미의 순례자에 이어 , 김수환추기경을 펴낸 작가지요.


얼마 전 각종 메스컴에서 김수환추기경 책 소개가 대서특필되었지만, 판매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데,

이번에는 전국의 성당을 돌며 김수환추기경의 사회정의와 인간존엄이란 주제로 강연을 합답니다.

제일 먼저 잡힌 일정은 오는 922일 오후8시부터 10시까지 불광동성당에서 갖는다니,

시간되는 분들은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기록하러 갈 예정입니다.

 

























마지막에 나타난 친구는 사진하는 이돌필과 김은환씨 였는데, 이석필씨는 사진보다 심령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내가 짐작키로 아무도 찍어보지 못한 심령사진을 염두에 둔 듯 했습니다.

화가 서길헌씨와 유카리관장 노광래씨가 나타나 하루를 잘 마무리했습니다.

 















 

유목민에서 여러명이 만찬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돌필대사가 계산을 해 버렸습니다. 오늘 복채 좀 받았던가?

골목을 지나치던 사진가 안영상씨와 화가 장경호씨를 만나, 마지막 술 잔을 나누었지요.

다행스럽게도 같은 방향인 노광래씨가 차까지 태워 줘 편안하게 귀가 했답니다.

    











전시 철수하는 날인 30일에는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나갔습니다.

충주에서 지용철씨도 오기로 했고, 태백의 박병문씨도 오기로 했거던요.

전시장에 도착하자 말자, 지용철씨가 여성 한 분과 오셨고, ‘나무화랑 김진하관장도 왔습니다.

모두들 철수하기 전에 서둘러 왔다는 것입니다.









뒤 이어 박병문씨가 찾아 와 함께 점심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는데실내장식하는 최영문씨가 나타나 갈팡질팡하게 만드네요.

최영문씨에게 양해를 구하고, 박병문씨와 부산식당에서 생태찌개와 참치구이로 식사를 했습니다.

두 시무렵, 전시를 철수하여 짐을 옮기고는 다시 인사동에 나와야 했습니다.

    







조준영시인과 메비우스관장이었던 기획가 김권선씨와 저녁 약속이 있었거든요.

인사동 마중에서 만나 술 한 잔 했지요. 

마중의 막걸리는 맛은 있으나 빨리 취하는 술입니다. 술 취해 돌아오다 유목민에 잠시 들렸더니

김명성, 전인경, 공윤희, 오세훈, 이상훈씨등 여러 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딱 한 잔만, 딱 한 잔만, 하다 맛이 가버렸네요.

 

















이상으로 보고를 끝 냅니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 조문호

 

 





인사동에서 열리는 정영신의 장날 오가며 많은 분들을 만났습니다.

일찍부터 원로사진가 한정식선생께서 오셨습니다. 맛있는 점심 사 주겠다면서요.

아내와여자만에서 쌈밥 얻어먹고, 허리우드에서 커피도 마셨습니다.






전시장으로 돌아오니 부산에서 최혜영씨와 사진가 김지연, 시인 김생나씨가 오셨고,

사진가 양시영씨는 민속학자 심우성선생과 넋전 춤을 추는 양혜경씨를 모시고 오셨습니다.

심선생께서는 신궁장여관이 리모델링한다며 숙소를 옮긴다는 말씀을 들었으나,

어디로 옮겼는지 궁금했는데, ‘종로오피스텔로 옮겼다네요.












반가운 만남이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아래층의 공창호씨가 장구경 하러왔고, 좀 있으니, 가수 최백호씨도 왔습니다.

잇따라 강 민선생께서 시인 천성우, 이혜선, 김정남선생과 함께 다시 오셨네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강민선생의 옛 친구 박병선선생도 지나치다 올라 오셨는데,

구수한 냄새에 끌려 왔더니, 옛 친구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끝 날 시간이 가까워 오니, 곤충사진가 이수영씨가 나타났습니다.

유민목에 장경호씨가 있다는 귀뜸을 전했더니, 거기서 기다리겠다며 먼저 일어났습니다.

뒤따라 눈빛출판사의 이규상, 안미숙 내외가 오셔서 부산식당에서 생태찌개로 소주 한 잔 했습니다.

소주 딱 두병만 까고 유목민으로 옮겼더니, 이수영, 장경호, 공윤희씨가 마시고 있더군요.

막차시간 놓치지 않으려는 이수영씨 따라 일어남으로 하루를 잘 넘겼답니다.









 

그 이틑 날은 미디어아티스트인 이상만회장께서 일찍부터 오셨습니다,

연이어 연극연출가 기국서, 울산의 기와장 오세필, 건축가 임태종씨가 차례로 나타났습니다.

이 날은 장흥에서 이대흠시인과 성은정내외 분이 오셔서, 반가운 만남의 시간을 가졌답니다.

이대흠시인은 아내의 장날사진집 서문을 쓴 인연이라 더욱 기다렸는데,

첫인상처럼 무척 다정다감한 분이더군요. 시간 만들어 장흥에도 꼭 한번 들릴 작정입니다.

















전날 밤, 술이 취한 상태에서 밤을 꼬빡 새웠는데, 갑자기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한 쪽 구석에 누워 잠들어 버렸는데, 이대훈, 노인자 내외분이 오셔서 자는 모습을 찍어,

칠순의 아기천사라는 제목까지 달아 카톡으로 날렸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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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은 문화의 날이라 밤 열시까지 문을 열기로 했으나, 술친구 채근으로 더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전 날 페북에 공지한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밤 여덟시에 문을 닫는 실수를 그만 저질렀습니다.

공교롭게도 사진가 박영환씨가 뒤늦게 다녀 간 흔적이 방명록에 적혀 있더군요.

확인했을 때는 이미 때 늦은 후회였답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자책에 안절부절 하였으나, 결국 젊은 후배에게 실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튼 그 날은 유목민에서 이대훈, 노인자씨 내외와 거나하게 마셨습니다.

옆 자리에는 임태종씨가 친구들과 있었고, 김명성, 이상훈씨도 있었답니다.

좀 있으니 오세필씨가 국민은행에 있는 노처녀 지점장 최명숙씨와 김용식 부장 등 여성분들과 나타났습니다.














일행이 있어 먼저 일어날 수 밖에 없었는데, 인사동 곳곳에 거리공연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한 번 버스킹에 나서자며 길모퉁이 자리잡아 퍼질러 앉았습니다.

난 모자만 내려놓은 채, 눈을 지긋이 감고 있었으나, 이대훈씨의 노래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우아한 노래에 한참 빠졌는데, 눈을 뜨보니, 모자에 천원짜리 지폐가 한 장 담겨있더군요.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때 놈이 먹는 꼴이 되었는데, 왜 그렇게 기분 좋은지 휘파람 불며 돌아왔답니다.

하하하~

 

사진 : 정영신, 조문호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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