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은 차 없는 길로 천천히 산책하기에 적합하다


[골목 내시경]


인사동이 문화의 거리로 불린 것은 구한말부터 1960~70년대까지 만들어진 이야기다. 인사동에는 골동품상, 표구사, 고서점, 화랑이 즐비하고 뒷골목 막걸리집에는 시인이며 기자에 그림쟁이들이 득실거렸다. 

서울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몰리는 길, 한국의 일상을 엿보고 싶은 외빈이 오면 으레 들르는 곳, 인사동이다. 서울의 구도심이 그렇듯 인사동에는 여러 골목길이 구석구석 숨어 있다. 그리고 골목마다 사연과 역사가 감춰져 있다.



안국동 교차로부터 종로2가에 이르는 인사동 큰길은 아침부터 밤까지 나들이객들이 점령한다. 길가의 가게에는 중국어, 일본어 안내판이 당연히 붙어 있고 노점상이나 호객꾼도 외국어 한두 마디는 거침없이 한다. 큰길 가게들은 대부분 관광객 상대의 기념품이 주종이거나 구색을 갖추고 있다. “분위기가 이렇게 바뀐 것은 대략 2000년 이후부터인 것 같다. 그 전에도 외국 관광객들은 오갔지만 이렇게 많지는 않았다. 지금은 하루에 관광버스 100여대 이상이 관광객을 풀어놓는다”는 게 인사동 토박이 상인의 설명이다. 뼈아픈 우스갯말로 인사동에 “중국 관광객이 몰려와서 중국산 짝퉁 골동품을 사간다”고 한다. 그만큼 인사동에서 팔리는 대부분의 물건은 저렴하게 중국에서 들여온 것들이다. 

관광버스 하루에 100여대 몰려 

인사동이 문화의 거리로 불린 것은 구한말부터 1960~70년대까지 만들어진 이야기다. 인사동에는 골동품상, 표구사, 고서점, 화랑이 즐비하고 뒷골목 막걸리집에는 시인이며 기자에 그림쟁이들이 득실거렸다. 누구라도 시 한 편을 팔거나 그림 한 점을 주문받으면 호기있게 벗을 불러 거나하게 취하던 분위기가 있었다. 지금도 대를 이어 문을 열고 있는 부산식당을 비롯해 골목 안에 숨어 있는 밥집들이 잊혀진 인사동의 전설을 썼던 곳이다. 큰길에서 버티던 천상병 시인의 찻집 ‘귀천’은 뒷길로 밀려났고 1층에 줄을 이어 있던 표구사들도 하나둘 떠났거나 도로변을 피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40년째 인사동에서 표구 일을 하는 이는 “인사동 큰길가로만 표구사들이 30곳 넘게 있었다. 작업 중인 그림을 길가에 내놓고 말리곤 했는데, 그냥 인사동 전체가 미술관이었다. 한 바퀴 돌면 당시 화단의 분위기를 그대로 감상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많은 화랑들이 인사동 문화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많은 화랑들이 인사동 문화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어느 종갓집에서 고서 궤짝이 들어왔다는 소문이 돌면 골동상이며 사학자, 한학자에 기자들까지 고서점에 몰렸다. <석보상절>이며 추사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도 인사동에서 발견돼 세상을 들썩이게 했다. 그야말로 눈 밝은 이들이 종종 보석을 찾아내던 창고였던 셈이다. 요즘엔 중국에서 들여온 석물을 판다는 골동품상은 “지금은 귀한 물건은 인사동까지 오지도 않는다. 사람들 인식도 많이 달라져서 고물상이 국보급 보물을 주워오던 시절은 끝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귀하다 싶으면 따로 감정을 맡긴다. 골동품상들도 대부분 장안동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골목 안에 다양한 사연과 이야기가 깃든 카페가 있다.

골목 안에 다양한 사연과 이야기가 깃든 카페가 있다.



화장품 가게 들어서면서 집세 올라 

70년대까지 인사동의 분위기에 고졸한 아름다움이 있었다면 80년대부터는 그야말로 극단으로 치닫게 된다. 소위 그림이 돈이 되기 시작했다. 화랑들이 돈을 쓸어 담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화단을 좌지우지하는 큰손으로 재벌가를 오가며 그림을 거간하는 이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미술계 관계자는 “망조는 그때부터 들었다. 재벌가 마나님들이 미술관 짓는 게 유행이 되고 거기에 거물들이 나서서 판을 바꿨다. 이제는 그런 분위기도 끝났다. 인사동에서는 더 이상 비싼 그림이 거래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부자들에 이어 중산층도 아파트에 걸어놓을 그림을 사들였고 화랑을 드나드는 것이 교양을 과시하는 양 치부되던 때도 있었다는 것이다. 중산층이 무너지면서 미술품 시장의 수요는 소수만이 지탱하고 있다고 했다. 

지금 고가 미술품과 골동품은 옥션에서 경매를 통해 거래되는 것이 대세다. 정확한 감정과 경매를 통해 실시간으로 빠르게 거래된다. 미술품 경매업체 여러 곳이 인사동에 사무실을 열고 있었다. 매물이 나오면 감정을 거치고 손질을 해서 정기적인 경매시장을 열고 커미션을 떼가는 미술품 거래시스템이 정착했다고 한다. 보따리에 싸서 은밀하게 보여주고 작자를 찾던 시절이 아니라서 인사동이 미술품 거래의 중심에서 밀려난 지는 한참 됐다는 것이다. 인사동에서 오랫동안 작품 거래를 소개했다는 업자는 “옥션도 그렇지만 지금 미술품 시장이 바닥이다. 그림값이 최하다. 일단 사려는 이들이 없다. 게다가 인사동은 소위 중간상인 ‘나까마 가격’이라 일반 거래가보다 반 이하로 깎인다고 보면 된다”고 귀띔한다. 

인사동 골목에는 오랜 맛집들이 숨어있다.

인사동 골목에는 오랜 맛집들이 숨어있다.



인사동 거리 상점에서 팔리는 그림들은 싸게는 1만원부터 5만원까지 저렴한 작품도 찾아볼 수 있다. 손으로 그린 그림치고는 비교적 저렴하고 집안 분위기를 바꾸기에 충분해 보인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그림들이 나오는 것일까. 그림을 팔던 가게 주인은 “그림 공장은 삼각지에 서너 곳이 있다. 미대생들이나 아르바이트생을 통해서 직접 붓으로 그려 대량생산한다. 예전에는 인사동에도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떠났다”고 한다. 인사동에 느긋한 유람객들의 발길이 몰리는 이유 중에는 가벼운 주머니로도 소품 그림 한 점 정도는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인사동 일대에는 화방과 필방이 몰려 있어 그림을 그리고 글씨 쓰는 이들은 어김없이 드나들어야 한다. 인사동에서만 40년째 붓과 종이를 팔고 있다는 지업사 주인은 “손으로 붓 만들고 종이 뜨는 이들의 주된 판로가 인사동이다. 화가들도 인사동에 오면 화랑도 들러보고 붓이며 종이도 사갈 수 있으니 이제껏 이 거리에 예술 냄새가 나는 것이다”라고 했다. 관광객들의 난장 속에서도 문화의 뿌리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과 교황도 들러 붓을 사가고 낙관 도장을 파갔다는 필방 주인은 “우리는 대량 소비처와 기업 거래처가 많아 그럭저럭 수지를 맞춰간다. 나머지 필방이나 종이가게들은 매상이 들쭉날쭉하다. 겨울과 장마철에는 손님이 뚝 끊기고 학기 초에는 매상이 좀 오르는 편이다. 인사동에서 예술 팔아서 장사하기에는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이야기했다. 



곳곳에 화랑과 표구점이 인사동을 지킨다.

곳곳에 화랑과 표구점이 인사동을 지킨다.



인사동에 붓글씨를 가르치는 서실들이 남아있으나 드나드는 이들은 예전만 못하다고 했다. 서실 주인은 “요즘 동네 행정복지센터에서도 붓글씨를 가르친다. 2만~3만원만 주면 배울 수 있고 구청 문화센터는 그나마 공짜다. 그러니 누가 인사동까지 나와서 비싸게 붓글씨를 배우나. 요즘은 민화가 대세”라고 한다. 민화는 밑그림을 두고 베껴 그린 후 색을 칠하면 되니 쉽고, 완성품도 화려해서 배우는 이들이 좋아한다는 것이다. 

인사동 미술단체 관계자는 “대개 인사동은 10년 주기로 분위기가 바뀐다. 이제는 문화적인 색깔이 거의 빠져나가는 분위기다. 중심길에는 화장품 가게가 대세가 되고 있지 않나. 집세가 두 배 이상 올랐으니 개인 업자들은 버티지 못하고, 대기업들은 홍보만으로도 효과가 있으니 비집고 들어온다”고 분위기를 들려줬다. 외국 관광객과 사람들이 몰려드는 부작용으로 인사동의 고유한 문화적 색깔이 지워진다는 점을 지적했다. 

큰길에서 한 걸음만 들어가면 골목의 미로를 만날 수 있다. 한옥을 고친 카페와 수십 년째 문을 연 한식당. 예술가가 자기 이름을 걸고 하는 주점에서, 명상을 반찬으로 내놓는 식당까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미식과 독특한 식당들이 인사동으로 발길을 끌어들이는 또 다른 주역들이다. 70년대에는 몰래 밀주를 담가 팔다가 이제는 전통 가양주의 명인으로 꼽히는 인사동 뒷골목 깊숙한 식당 주인은 “예술가들이 원체 입맛이 까다롭다. 거기다 술까지 들어가서 조금만 성미가 안 맞으면 안하무인으로 소리 지르고 술상을 엎기도 한다. 그들과 호흡을 맞춰가며 장사를 했으니 오래된 인사동 골목 음식점 주인들도 보통 내공은 아닐 것이다”라고 자랑한다.

명월관 등 역사의 흔적 곳곳에 

인사동 화랑들은 대부분 수요일에 전시회 개막을 했다. 그날이면 화가와 서예가를 비롯한 친척에 지인과 동료들까지 인사동 골목 식당에 자리를 잡고 먹고 마시고 예술과 인생과 철학을 이야기하다가 멱살을 잡고 치고받고 싸우며 다시 어깨동무하고 돌아가던 모습이 일상이었다. 그 시절을 경험한 이들에게 오늘의 인사동은 왠지 각박하고 낯선 모습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역사의 격변을 겪은 흔적이 인사동 주변 곳곳에 남아있다. 인사동 초입에 있는 승동교회는 긴 골목을 지나 들어서면 도심과 전혀 다른 적막감을 보여준다. 이 교회 지하실에서 3·1 독립선언문 일부가 인쇄됐고, 청년들의 3·1운동 참여가 있었다. 인사동 길 어귀의 태화빌딩은 이완용의 별장인 태화관이 있던 곳이다. 그곳에 기생 놀음으로 질펀하던 명월관도 있었다. 그러다 1919년엔 민족대표들이 모여 기미독립선언서를 읽던 곳이 됐으니 역사의 우여곡절은 가혹하다. 

철종의 사위로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을 주도한 박영효의 집터에는 경인미술관이 들어서 있어 무정한 세월을 증거한다. 명성황후의 조카 민익두의 우아한 개량한옥은 민가다헌이란 이름의 식당이 됐다. 동학의 후예를 자처하는 천도교의 중앙교당은 아직도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명판을 이고 굳게 서 있다. 그곳은 또 우리나라 어린이 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서울 제1골목이라는 인사1길 골목 깊은 곳엔 100년 넘은 오동나무가 지금도 살아있어 봉황이 날아와 깃들기를 기다린다. 골목 안 보드카를 파는 식당 서까래는 100년 넘게 춘양목의 고운 속살을 고스란히 지켜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인사동 골목을 한 번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우리 근대사의 자취를 밟아볼 수 있는 일이다. 

어제의 모습을 그리워하고 오늘의 변화를 아쉬워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골목은 그 시간대에 어울리는 옷을 갈아입는다. 관광객이 몰리고 옷가게와 화장품가게가 늘고, 값싼 장신구와 기념품이 팔리는 인사동의 모습을 어떤 이는 아쉬워한다. 젊은이들은 그 공간의 모습이 즐겁고 유쾌하다. 그립다고 옛날로 돌아갈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다고 변화를 부정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인사동은 과거 100년 동안 변해 왔던 것처럼 또 다른 100년의 모습을 만들어가고 있다. 변화되는 골목 안에 숨어 있는 향수의 자취를 문득 만나는 기쁨도 인사동에 깃들어 있다.



주간경향 1317호 2019.03.11 <김천 자유기고가 mindtempl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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