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자 시집 '별사탕 속의 유리새' 표지

인간과 문학사 발행 / 2017.12.28일 발행/ 값 9,000원



요즘 너무 한가하게 지낸다.

전시장은 물론 바깥출입을 자제하는데다 핸드폰 번호까지 바꾸어버리니 찾는 사람도 없다.

쪽방에서만 딩굴며 낮잠까지 자는데, 밤에는 잠이 오지 않아 큰일이다



1990, 9 인사동 '귀천'앞에서

 

 

몇일 전 정영신씨 집에서 서재를 뒤져 볼만한 책을 뒤적거리다 뜻밖의 시집을 발견했다,

미국에 계신 최정자시인이 쓴 별사탕 속의 유리 새였는데, 일 년 넘게 잊었던 시집이다.

작년에 미국에서 최정자 시인으로 부터 시집이 부쳐왔다는 전화를 받았지만, 깜빡 잊어 버린 것이다.

눈에 부딪히지 않으면 잊어버리는, 그의 치매수준이니 이일을 어쩌랴!




2016,9 인사동 '귀천'


    

몇 권의 책을 챙겨 와 모처럼 책 속에 푹 빠지는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최정자시인 시집 표지에 나온 프로필 사진을 보니, 할머니가 처녀처럼 찍혀있었다.

뽀샵은 아닌 것 같은데, 사진도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세상에 사기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2012.9 인사동 커피숍에서


    

최정자 시인은 80년대 중반 인사동에서 만난 누님 같은 분이다.

천방지축 날뛰던 개막난이를 거두고 보살펴 주셨다.

돌아가신 천상병, 민병산, 박이엽씨를 비롯한 인사동 터주대감 반열에 드시는 분인데,

어느 날 뉴욕으로 이민 간다며 보따리를 싸셨다.

나라꼴이 싫어 갔을까? 아니면 사는 게 힘들어 가셨을까?




2013.12 인사동에서 / 좌로부터 정영신, 박양진, 최정자시인

    


가끔 생각나면 처녀작이나 마찬가지인 개망초 꽃 사랑을 뒤적였는데, 어느 날 새 시집을 보내 주셨다.

얼마나 서울이 그리웠으면 제목이 서울로 서울로였다. 구구절절 서울을 향한 그리움을 노래했다.

    


 

2016. 9 인사동 '귀천'



어려운 형편에 여비만 마련되면 서울로 나오셨는데, 신판 유배나 다름없었다.

그 뒤로 미동부한국문인협회회장을 맡는 등 마음을 붙이시는 것 같아 다소 마음이 놓였다.

그동안 뉴욕에서만 일곱 권의 시집을 펴냈으니, 온통 시작에만 매달린 셈이다.


    

 2012.9 인사동에서 / 좌로부터 배평모, 최정자, 공윤희, 편근희씨



나는 한국이다란 제목의 시에서도 시인의 간절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전략) 내가 한 발자국 걸으면 거기가 한국이다./ 내가 두 발자국 걸으면 거기가 한국이다./

나는 걷고 또 걷는다./ 내가 걸으면 걷는 대로 다 한국이 됨으로....”



2015.9 인사동 커피숍에서

 


그런데, 작년에 펴낸 별 사탕 속의 유리 새 표제 시는 시인 자신의 유년의 모습이며 현재의 모습이었다.

백일홍 꽃밭에서는 어머니는 꽃밭 앞에 서 있었다./어머니는 왜 거기 서 있었을까.“로 적고 있는데,

공터에 핀 백일홍을 보면서도 어머니를 떠 올리고, 봉숭아꽃을 모티브로 한 첫사랑도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했다.

손톱에 봉숭아 꽃물이 남아 있어/ 첫눈이 내리면 첫사랑을 만난다는/ 철석같이 믿은 그 말인데, 태어 난 나라를 떠나와서/

이역만리 타국에서/ 봉숭아 꽃물을 들인들./물빛 위로 첫눈이 내린들./첫사랑이 온들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는 한숨이 섞여 있었다.

제주도에서 온 낙타를 대상으로 한 마두금소리나 제주도 해녀를 대상으로 한 숨비소리“,

양노원을 말한 거기 가고 싶지 않다등 대부분의 시들이 자아성찰에 의한 그리움이었다.



2013,12 문학의 집 PEN문학 수상식에서 



뉴욕과 고향 사이의 거리라는 제목으로 쓴 문학평론가 유한근씨의 서문에서는

시는 의미할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로 있어야 한다. 그처럼, 시인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로 거기에 있어야 한다. 뉴욕의 최정자 시인을 생각할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뉴욕에는 최정자 시인이 있다고로 시작하여, 마지막에는 별사탕 속의 유리 새를 화두로 삼고 최정자 시인의 시를 읽었다. 그리고 그 화두가 함유하고 있는 의미를 하나의 판타지로, 시인 자신의 유년의 모습이나 현재의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한 권의 시집을 읽으면서도 떨칠 수 없는 것은 별 사탕 속의 유리 새라는 이미지다. 그 존재가 어떤 것이든 그 이미지는 곧 최정자 시인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라고 마무리했다.



 2013,12 문학의 집 PEN문학 수상식에서 



위에 거론되지 않은 시중에서 인사동 민병산선생 이야기를 비롯한 마음에 남는 시  세 편을 옮긴다.



2013,12 문학의 집 PEN문학 수상식에서 


 

<사망금지령>

 

죽지 마라

절대로 죽으면 안 된다.”

사망금지령을 내린 도시가 있다. 인구 370만 명이 사는 이탈리아의 한 도시,

팔치아노 델 마시코, 줄리오 세사르 파바시장이 시장 령을 내렸단다.

사망금지령을 내렸단다.

 

반갑다고

즐겁다고

시민들은 춤추었단다.

 

죽지 말라는 명령, 영원히 살아라, 는 명령,

너도 나도 좋아라, 는 명령

명령이라도 죽지 말라면 살아라, 면 좋아라, 는 것

명령이란

따르는 자가 있고 어기는 자가 있기 마련인데

 

당연하게 반란자가 생겼다.

앞장선 노인 두 명

사망금지령을 어기고 말았다.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명령불복종자들.

 

살아야 하는 것이냐,

명령을 거슬러야 하는 것이냐,

무서운 독재자의 명령도 기어코 거스르는 자가 있는 법

아무리 백세시대라 노래 불러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



2016. 9 인사동에서 / 좌로부터 최정자시인과 정영신씨


 

<사람만>

 

사람만

사람을 속이는 거야.

 

사람만

사람을 미워하는 거야

 

사람만

사람을 배신하는 거야.

 

사람만

사람을 등치는 거야.

 

사람만

사람을 뒤집는 거야.

 

사람만

양의 탈을 쓰는 거야.



   

2013.12 인사동 '유목민'에서/ 좌로부터 최정자, 조경석, 이명희



<민병산 선생님 20주기에 드리는 편지>

 

살아계셨다면 이제 겨우

여든이실 텐데

살아계셨다면

힘없고 가난하고 슬프고 외롭고 소외당한 사람들에게

인사동 골목골목에 선선한 바람 불었을 텐데

말없이 말하는 법을

낮게 앉아 높이 보이는 법을

가진 것 없이 넉넉한 법을 배웠을 텐데

 

불광동에서 탄 버스 남대문시장에서 내려

건포도 한 봉지, 바나나 한 개 사면

늘 반기는 옆 집 여섯 살짜리 아가씨 생각나서

절로 나오는 미소까지 배낭에 담으시고

명동을 거쳐 관철동을 거쳐

유행의 물결을 거쳐 인사동으로 오시던 선생님.

 

인사동 세월 느릿느릿 간다 하시더니

선생님 안 계신 세월

그새 스무 해가 지났네요.

강산이 두 번 변했네요.

 

맨해튼 가로수에 오르락내리락하는 청설모를 보면

고속 도로변에 서 있는 사슴 가족들을 보면

흐드러진 풀꽃을 보면 생각나는

슬프면서 슬프지 않았던 선생님.

변하는 세상 변하지 않는 사람들이 선생님 그리워

모두 모였네요.

      

사진, / 조문호



2013 인사동 '귀천'앞에서 / 좌로부터 목영선, 최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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