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리, 남한강을 적셨다
뱃길 주막서 아라리로 어울려 떼꾼 입 통해 전국으로 전파
가사·가락에 해학 담겨
 

 

 

정선아리랑은 일하는 사람들의 노래다. 누가 지은지 알 수 없는 수많은 가사가 입과 입을 통해 전해졌다. 그럼에도 불과 35자 안팎에 담긴 가사는 투박하지만 질긴 생명력을 지녔다. 아라리(어러리)는 정선에서 머물지 않고 강원도, 그리고 전국 방방곡곡으로 흘러가 아리랑이 되었다. 그들의 애절한 삶과 애환이 담긴 대표적인 아라리가 바로 떼꾼들의 노래다. 첩첩산중 정선의 노래가 1200리 남한강 물길을 타고 내려가 한양에 알려진 배경에도 구수한 떼꾼들의 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남한강 뗏목에서, 나루터에서, 주막에서 흥얼흥얼 불려진 떼꾼들의 아라리를 찾아가 보자.


 

 

 

 
▲ 정선 뗏목의 출발지였던 정선군 북평면 아우라지 전경


■ 나루와 주막

정선은 지리적으로 오지마을이었다. 외부와 소통할 수 있었던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던 철길을 예로보면 쉽게 알 수 있다. 1957년 3월 영월에서 정선 함백까지 석탄수송용 기차가 첫 운행됐다. 여기서 정선역까지 개통되기는 10년이 걸렸다. 그리고 조선시대부터 한양으로 나무를 실어나르던 뗏목의 출발지인 정선 아우라지에 기차가 개통된 시기가 1971년 5월이다. 이 때까지 뗏목은 정선사람들의 일반적인 교통수단이자 운송수단이었다.

정선 아우라지, 나전, 용탄, 가수리 등지에서 출발하는 뗏목은 동강을 타고 영월까지 내려간다. 이 구간을 ‘골안떼’라고 했는데 물살이 급해 기술 좋다는 떼꾼들도 영월 덕포까지는 사흘이 걸렸다.

이 때 물굽이가 휘도는 마을마다 나루와 주막이 성행했다. 점재나루, 진탄나루에 정선읍 덕천리 연포 객주와 영월읍 거운리 전산옥의 주막 등이 대표적인 떼꾼들의 쉼터였다. 이곳에서 떼꾼들과 주막의 여자들은 툇마루에 걸터앉아 아라리를 주고받았다.


술은야 안먹자고 맹세를 했더니

술잔보고 주모보니는 또 한 잔 먹네


놀다가세요 자다가세요

그믐 초성달이 뜨도록 놀다가 가세요


정선에서 영월 동강을 지나 남한강 물길을 타고 한양 광나루까지 도착하면 적어도 보름에서 한달가량 걸린다. 물길을 타고 오는 동안 색주가들과 어울린 떼꾼들의 신명나던 모습은 단양 꽃거리, 제천 청풍, 충주의 목계 달천, 여주의 이포, 양평의 양수리, 팔당 광나루 뚝섬 서빙고 노량진 마포 등지로 이어졌다. 밤만 되면 정선아리랑이 울려 퍼졌던 곳이다.


오늘 갈지 내일 갈지 뜬구름만 흘러도

팔당주막 들병장수야 술판 벌여 놓아라


떼꾼들은 술과 노름, 여자로 돈을 탕진하면 넋두리로 아리랑을 불렀다. 한마디로 신세타령이다..


술 잘 먹구 돈 잘 쓸때는 금수강산 일러니

술 안 먹구 돈 떨어지니 적막강산일세


오랜 세월 한강을 풍미했던 뗏목은 1960년대 본격 개통된 기찻길과 한강물길을 막아선 댐 건설 여파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뗏목은 사라졌지만 떼꾼들이 목청 높여 부르던 아라리는 한강 유역과 그 내륙에 이르기까지 ‘정선아리랑’으로 전파돼 오늘날 보편화된 소리로 자리잡았다. 요즘으로 말하면 ‘중독성’이 강한 노래라고 할 수 있다.



■ 마지막 떼꾼의 어러리

영월 동강이 래프팅 코스로 유명한 영월읍 거운리. 이곳에서 서울까지 뗏목을 끌고 다녔던 마지막 떼꾼, 홍원도(80)옹을 만날 수 있다. 그는 정선~영월을 오고가는 이른바 ‘골안떼’ 뗏목을 수십여차례 이끌었다. 서울까지는 두차례 다녀온 떼꾼이다.

열 아홉살에 떼꾼이 되어 스물여섯인 1959년까지 떼를 탔다. 현재 정선에서 서울 나루터까지 뗏목을 끌었던 유일한 떼꾼으로 알려졌다.

“아직까지도 그 때 떼를 탔던 기억이 생생하지. 적막한 분위기에서 뗏목을 타고 가다보면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해 자연스럽게 노래가 나와. 가사야 찍어 붙이면 되니 얼마든지 불러도 지루하지 않았어.”

옛 기억을 떠올린 그는 거침없이 한 곡 뽑아낸다.


세월아 봄철아 오가지 말아라

이세상 청춘 남녀가 세월따라 늙는다


홍 옹은 “서울까지 강변으로 주막이 수도 없이 늘어섰지. 때로는 객주여자들이 정선아리랑을 부르며 떼꾼들을 유혹하기도 했어. 주막에서 며칠 자면서 술도 먹고 얘기도 하면서 노래도 많이 불렀지. 그때는 생각나는대로 가사를 만들어 부르니까 말씀 어(語)를 붙여 어러리라고 했던 거지 뭐”라며 웃음지었다. 그는 이어 “누가 뭐래도 아리랑 가락의 원조는 정선이야. 아무리 불러도 참 좋아”라고 말했다.

 

  
▲ 마지막 떼꾼 홍원도(80)옹이 영월읍 거운리 동강변에서 옛 기억을 회상하며 뗏목코스를 가리키고 있다.


■ 단양 도담삼봉 아리랑

정선 아우라지를 출발한 뗏목은 조양강~동강을 지난 충청도 땅을 흐르는 남한강은 단양 도담삼봉(島潭三峰)에 이르면서 흐름을 늦춘다. 이곳 역시 떼꾼들이 강변에 떼를 묶어두고 한밤을 지샜던 곳이다. 현재는 하류지역에 충주호가 생기면서 옛 뗏목의 추억은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단양팔경의 하나인 도담삼봉은 정선에서 떠내려온 돌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전해질 정도로 문화적인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유적지로 꼽힌다.

정선아리랑연구소가 1995년 채록한 고 권이순(당시 74세)할머니의 가사와 가락은 강을 따라 흘러간 정선아라리의 해학을 그대로 담고 있다.


남우집 낭군은 사향내가 팔팔 나는데

우리집 멍테이 낭군은 땀내만 나네


단양지방에서 불린 ‘띠뱃노래’에서도 정선아라리의 정서가 묻어난다. 띠뱃노래는 한양에서 남한강을 거슬러 일용품을 싣고 도착한 뱃사람들의 노래다.


잘있거라 갈보들아 변치말고 잘있으면

명년삼월 돌아와서 다시한번 만나보세

이어가나 한양뱃길 비틀비틀 소금배야

서러워서 못가겠네


40여년째 단양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는 이의홍(75)씨는 “1960년대 중반까지 현재 도담삼봉 위치에서 뗏목을 맞이한 객주집들이 많았는데 여주인장이면 아리랑 노래는 기본이었지”라며 당시 상황을 뚜렷하게 기억했다.

진용선 정선아리랑연구소장은 “한강의 물길 위에 풀어놓은 정선아라리는 떼꾼의 입과 입을 통해 전국 각지로 흘러갔다”며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뗏목과 떼꾼, 주막은 오늘날 아리랑을 만들어낸 역사의 현장이자 주인공”이라고 말했다.  

 

강원도민일보 : 정선/박창현 

 

(선진시장 견학을 다녀와서...)

이번 선진시장견학은 20여년만에 단체여행을 체험할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이었다.
긴 이동시간을 활용하여 어머니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도 들어보고 밀린 원고도 쓰는 등 여러가지 할 일들을 정했으나 예상은 빗나갔다.
관광버스에 노래방기계가 장치되어 있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다. 마이크에서 흐르는 노래 소리는 어느정도 견딜 만 했으나
반복되는 시끄러운 반주소리에 귀가 멍멍해졌다. 이걸 두고 "꿈도 야무지다"고 하는 것일까?
다행히 어제 잠을 설친 탓에 소주 두 컵에 곯아 떨어 질 수가 있었는데, 잠결에 어머니들의 정선아리랑 노래 소리에 잠을 깼다.
반주 없이 부르는 노래라 귀동냥 할 만했고, 특히 이옥분씨가 부른 구전민요에 귀가 번쩍 띄었다.
“영 글렀네, 영 글렀어 내 댕기 찿기는 영 글렀어”라는 후렴이 따라붙는 처음 듣는 구전민요였다. 너무 좋아 가사까지 옮겨 적었다. 
장터에서 여러 차례 뵙기는 했으나 이렇게 노래를 잘 하시고 신명이 많은지 미처 몰랐다. 이번 여행에서의 가장 큰 발견이었다.

12시 20분경 목적지인 진주에 도착하였고, 진양호와 촉석루를 거쳐 진주중앙유등시장을 방문했다.
마침 장터에 공연이 있는지 공연장에는 관객들로 꽉 차 있었다. 그 자리에서 이윤광 조합장과 유등시장 상인회장의

선물교환도  인사말도 있었다. 시장을 한 바퀴 돌아보며 이 것 저 것 물어보기도 했다.
서울이나 정선보다 물가가 쌌고, 무뚝뚝했던 경상도사람들의 불친절도 많이 개선되어 있었다.

숙박지인 부곡온천에 도착하여 따뜻한 목욕탕에서 하루의 피로를 풀 작정이었는데, 여전히 시설들이 너무 낡아 있었다.
부곡온천에 들릴 때마다 혹시나 하여 다른 숙박업소를 찾지만 대개 오래된 시설들 뿐, 리모델링한 업소는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 온천 개발 때 지은 건물들이라 낡을 수 밖에 없지만 왜 재투자를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시설이나 서비스를 개선하지 않아도 저절로 나오는 물이니 밑질 건 없다는 생각인지 모르지만 그러니 손님이 더 떨어지는 것이다.
이웃에 고향을 두어 나름대로 부곡온천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지만 다시 오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저녁식사 시간에는 여기 저기에서 권하는 술잔을 사양하지 못하다 결국 취해버렸다.
이윤광조합장 일행이 이끄는 가요주점까지 들렸는데, 모두들 기력이 대단하셨다.
특히 연세 많은 어머니들의 지칠 줄 모르는 춤 솜씨에 두 손 다 들었다. 어디서 그런 신명들이 나오는지...
어머니들과 보조 맞추느라 지쳤는지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곯아 떨어졌다.
이틑 날 들은 이야기로는 숙소에 가서도 이옥분씨 구전민요를 배우며 놀았다는데, 모두들 타고 난 체질이셨다.
이번 견학에서 정선아리랑시장사람들이 가진 장점들을 두루 보았다.

모두들 정이 많고 예능적인 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튿날 첫 일정으로 밀양 표충사를 들렸는데, 그 곳에서는 꼭 촬영해야 할 사진 한 장이 있었다.
오래전 전국의 불교관련 자료들을 촬영할 때 실수로 표충사 삼층석탑만 빠트렸던 기억이 난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표충사 자연환경은 변하지 않았으나 불사 탓인지 절집들이 좀 많아진 것 같았다.

마지막 행선지인 경주 계림연합시장에서는 시장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계림향토음식촌’에서 식사를 하였다.
식사후 계림연합시장을 돌아보았는데, 이곳 역시 물가가 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선보다 크기가 두 배 정도나 되는
수수부꾸미 한 장에 천원밖에 하지않았다. 그리고 경상도 장꾼들의 손님받는 태도도 많이 달라졌다.
친절이라기보다 살가운 말을 거는 등 많이 매우 싹싹해 진 것을 알 수 있었다.
타 경상도지역 장터에 비해 변했다는 자체가 문화관광형시장육성사업단에 의한 교육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

오는 길에 경주 성동시장을 둘러본 후 동해안 7번 국도를 타고 돌아왔는데, 오후7시가 넘어서야 정선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견학 마지막 날인 9월4일은 나의 생일이었다. 아내와의 약속도 있고 하여 서둘러 서울로 돌아왔다.
간신히 생일날을 넘기지 않은 오후11시경에 도착할 수 있었고, 아내가 준비한 축배도 들 수 있었다.
이번 생일 날은 좀 특별했다. 평소 식사량이 하루 두 끼 정도 먹으면 많이 먹는 편인데 시장 견학 덕분으로
세끼를 꼬박 꼬박 찾아먹고도 술과 간식까지 먹고 놀았으니 생애 최고의 생일이 분명했다.
이틀 날 화장실을 수시로 들락거려야 하는 고충은 따랐지만...

사진,글 / 조문호


 

 

 

 

 

 

 

 

 

 

 

 

 

 

 

 

 

 

 

 

 

 

 

 

 

 

 

 

 

 

 

 

 

 

 

 

 

 

 

 

 

 

 

 

 

 

 

 

 

이 사람-            

 

정선의 문화게릴라 강기희씨

"이 시대의 마지막 빨치산 숙암골로 숨어들다."

 

 

 

강기희씨 하면 진보적인 성향의 소설가, 또는 '동강에는 쉬리가 있다'를 쓴 작가로 대개 기억한다.
그래서 그의 구체적인 이력을 한번 들여다보았다.

 

그는 정선토박이로 강원대학교 무역학과를 졸업하였고, 1998년 ‘문학21’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장편소설로 ‘아담과 아담 이브와 이브’, ‘동강에는 쉬리가 있다’, ‘은옥이 1, 2’, ‘개같은 인생들’, ‘연산’ 등이 있으며

한국최초 전자책 전문업체인 ‘바로북 닷컴’이 주최한 오천만원 고료 ‘제1회 디지털문학대상을 수상하였고,

그리고 2005년 한국문화에술위원회의 문예창작기금을 수혜하기도 했다.

지금은 한국문학평화포럼이사로 한국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한다는 등의 이력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이력보다 더 중요한 그 만의 남 다른 면모가 많다.

순정의 절규를 외치기도 하지만 때로는 날카롭게 현실을 꿰뚫어 보는 문제의식을 가진 작가이다.

그동안 ‘오마이 뉴스’ 객원기자로 일하며 현실을 비판했던 탓인지 가끔 색깔론을 재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정선을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애써 왔다는 사실이다.

가진 것이 없어 망정이지 만약 경제적 능력만 있었다면 쉴 틈 없이 판을 벌일 그런 사람이다.

정선 집에는 서울에서 활동하는 문객들이 수시로 들락거리고, 필자도 정선보다 인사동에서 그를 만날 때가 많았다.

지역적 소외감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 만큼 문화예술에 대한 갈증을 많이 느낀다는 반증이다.

몇 년 전 누전에 의한 화재로 자신의 집을 몽땅 불태워 버린적이 있었다.

집뿐 아니라 책이며 옷이며 살림 전부를 불 태워 숟가락 하나 건지지 못한 빈털터리가 되었다.

다행히 남의 집이긴 하지만 숙암리의 아름다운 저택에 입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한 때 박성범, 신은경 커플이 별장으로 사용했던 꿈의 궁전임에도 불구하고 

오래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던 탓에 그가 아지트로 빌려 쓰게되었다는 것이다.

그 곳에서 얼마 전 출간된 ‘연산’을 음모하기도 했고, 지금은 또 다른 일을 저지르기 위해 음모 중이다.

올 시월달에 열릴 정선아리랑제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기에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그는 분명 정선이 내 세울 수 있는 자랑스러운 작가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가 성장한 배경에는 정선시장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빠트릴 수가 없다,

그의 어머니이신 이춘옥(81세)씨가 한 평생을 정선장에서 벌어 그 돈으로 자식들을 키웠다는데.

 아직까지 가게도 없는 노점에서 장사하는 어머니를 늘 안스럽게 지켜보는 그다.

그래서인지 정선아리랑시장에 문화의 옷을 입히는데도 많은 고심을 해왔다.

얼마 전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곳에다 돈 안 되는 ‘골목도서관’을 차려 언론의 조명을 받기도 했는데,

지금은 모자가 함께 장터에서 일하고 있는 셈이다.


자랑스러운 장꾼의 아들! 강기희씨의 또 다른 문화적 음모를 기대한다. 

 

 

 

 

 

 

 



 

이번 주말 정선아리랑시장으로 재미있는 마당극 "양반전" 보러 가세요.

아라리촌문화사업단 주관으로 열리는 '양반전'은 주말을 이용하여 정선아리랑시장 공연장과 아라리촌 아라리 마당에서 성황리에 열리고 있습니다.
이제 2주 공연이 끝나고 오는 24일과 31일 오후3시 30분부터 정선아리랑시장에서, 아라리촌에서는 8월25일과 9월1일 오후2시부터 각각 열립니다.

연암 박지원의 양반전을 각색한 ‘마당극 양반전’은 정선아리랑군립예술단 상임단원이 주축이 되어 정선아리랑을 위시한 팔도아리랑을 소리구성의
축으로 마련되었습니다. 정선아리랑과 무속신앙인 굿을 접목하고, 젊은이들이 즐기는 랩까지 끌어들여 실험적으로 제작한 새로운 형태의 마당극입니다.
해학과 풍자를 마당극으로 풀어낸 '양반전'으로 마지막 무더위를 통쾌하게 날려 보냅시다.

무더운 여름철의 야외공연이었지만 시종일관 극에 함몰되어 신명을 풀어내는 출연진들의 열의에도 뜨거운 박수를 보냅니다.

관람객들의 반응에 비해 공연기간이 짧아 아쉬움 감이 많은데, 마당극의 특성상 정선아리랑시장에서 장기 공연이 이루어져 정선아리랑시장을 찾는
많은 관광객들에게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어 주는 프로그램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 간절합니다.

 

 

 

 

 

 

 

 

 

 

 

 

 

 

 

 

 

 

 

 

 

 

 

 

 

 

 

 

 

 

 

 

 

 

 

 

 

 

 

 

 

 

 

 



 

 

 

 

 

 

 

 

 

 

 

 

 

 

 

 

 

 

 

 

 

 


이 사람-                  

 

"장 마당의 흥행사 전제천씨"

 

 

 

       “사람들이 바보라고 해도 좋아요. 내가 좋아서하니까..."

 

정선군 남면 낙동리에 사는 전제천(51세)씨를 만나 제일 먼저 들은 말이다.

3년 동안 한결같이 장날만 되면 어르신들을 위해 봉사해 온 그가 정말 바보일까?

동네서 약수 길어와 목마른 어르신들에게 물 갖다 드리고, 더위 먹은 노인이나 어린이들에게 모자 벗어 바람 일으켜 주고,

마당놀이에서 신명을 일구려 가진 애를 다 써는 그는 바보가 아니라 정선아리랑시장의 보배다.

요즘처럼 자기 돈밖에 모르는 각박한 세상에 아리랑시장을 위해, 아니 정선을 위해 누가 그렇게 봉사할 것인가?

나도 처음에는 장에서 춤추며 바람 잡는 그를 보며 신이 많은 사람쯤으로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한 달 두 달이 지나고 해가 바뀌어도 그의 봉사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그 이후부터 장에만 나오면 그를 유심히 지켜봤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진심으로 마음에서 우러나는 행동이었다.

어떻게 하면 장에 나 오신 어르신들을 즐겁게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정선을 찾은 관광객들에게 호감을 사 다시 찾아오게 할까를 고민하는 것 같았다.

떡을 치고 난 후 관객들에게 떡 나누어 줄때도 세심했다.

골고루 빠짐없이 맛보게 하기위해 컵에 가득 담아 몇몇 사람이 나누어 먹도록 안내한다.

그리고 어린이들을 웃기기 위해 이상한 표정을 지어보이기도하고, 한 마당이 끝나면 관객들에게 박수를 유도하는

제스처 등 그가 하는 행동들이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보는 사람들을 마냥 즐겁게 한다.

 

 

첫 인상은 마치 덩치 큰 곰같이 미련스럽게 보인다. 그러나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너무 순진하고 착하다.

덩치는 크지만 춤을 추거나 행동할 때 보면  날렵하다.

본래 봉산탈춤을 배웠는데, 정선아리랑 춤에 접목하다보니 깡충거리는 춤으로 굳어 졌다는 그의 말이다.

봉사활동을 시작한 동기를 물었더니, 한동안 몸이 아파 혼자 외롭게 지낸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혼자 사는 노인들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 때부터 건강을 되찾으면 어떻게든

어르신들을 즐겁게 해드리기로 작정했단다.

어르신들을 위해 비롯된 시장에서의 봉사활동이 정선아리랑시장이 잘 되어야 어르신들이 즐길 놀이도

유지될 것이라는 생각에 미치자 이젠 시장의 번창을 위해 발 벗고 나섰다는 것이다.

 

 

그는 낙동리에서 혼자 노모를 모시고 산다.

기초생활수급자에게 지급하는 돈으로 연명할 것이니 집안형편이야 보나 마나다.

작년에는 정선아리랑시장에서 이벤트를 벌여 추첨권을 나누어 주었는데, 운이 좋았는지 텔레비전을 탔다고 한다.

경품으로 탄 텔레비전을 찌직거리는 옛날 TV와 바꾸었더니 어머니가 그렇게 좋아하시더라는 것이다.

모처럼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시는 어머니 모습을 보고 자기도 감격해 눈물이 흐르더라는 것이다.

갑자기 나까지 가슴이 뭉클해지고 코끝이 시큰해지는 감상에 빠져들게 만든다.

자신의 생계도 힘든 사람이 남을 위해 봉사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이젠 정선아리랑시장 협동조합에서도 그를 한 식구로 여겨 따뜻하게 배려해야 한다.

지금에야 중소기업청의 문화관광형시장육성사업에 의해 지원 유지되지만,

마지막 3차년 도를 맞게 되는 내년이 지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결국 시장조합원들의 주머니를 털어야하고,

바로 전제천씨와 같이 정선아리랑시장을 사랑하는 자원봉사자들이 나서야 하니까...

 

틈이 나면 그가 사는 낙동리에도 한 번 들려 어머니와의 삶도 엿 볼 작정이다.

 

 

 

 

 

 

 

 

 

 

 


 

 

 

 

정선읍 귤암리에 거주하는 최성월(74세)씨는 정선아리랑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평생을 일하며 불러 온 그의 아라리는 꾀꼬리처럼 부르는 기능보유자들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만의 질박하고 구수한 정선아라리 노래 속에는 민초들의 애환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씨의 독특한 춤사위도 일품인데, 타계한 공옥진여사의 문둥이 춤을 연상케한다. 

이 춤을 추게 된 사연도 재미있다. 수십 년 전 제주도에 관광여행을 떠난 적이 있는데,

머무는 숙소 지하의 시끄러운 음악소리에 끌려 나이트클럽으로 내려갔단다.

거기서 젊은이들이 추는 춤을 보고 연습한 결과 지금의 춤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앞으로 손을 뻗었다 굽히는 등의 독특한 그의 춤사위도 이채롭지만,

시종일관 무표정한 모습으로 춤을 추는 그를 지켜보면 웃음이 절로 터져 나온다.

 

춤과 마찬가지로 구성지게 부르는 아라리 노래 가사들도 대부분이 그의 삶에서 비롯된 내용으로 직접 붙이는데,

모든 것을 자기만의 것으로 만들어 내는 독창성과 광대적 기질이 남다른 분이다. 

 

   글.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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