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아리랑시장의 두 번째 더덕장아찌 담그기 체험행사가 지난 21일 정오 12시부터 선착순에 의해 접수된 4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성황리에 진행되었습니다.

행사에 앞서 사회자 정춘경씨는 신혼부부에서 결혼 10년차, 20년차, 30년차, 40년차의 다섯 부부를 모셔, 더덕 하나를 두 내외가 물고 나누어 먹기도 하고, 아내를 업고 구부리기를 제일 오래하는 커플을 뽑아 상품도 주었습니다. 시합에서 신혼부부와 20년차 부부가 끝까지 겨루다 결국 무승부로 끝났는데, 상품은 신혼부부가 양보하는 아량을 베풀었습니다.

본 행사에서는 이윤광조합장과 강승권 사업단장이 차례로 나와 체험행사에 참여하신 고객들에게 행사 취지와 진행에 대한 인사말씀을 드렸고, 지도강사로는 정선향토음식연구회장이신 권영원씨가 나와 도움 말씀을 주셨습니다.

고객들의 시장만족도에 대한 설문지를 받고, 기념 촬영하는 것으로 마무리된 본 체험행사는 시종일관 가족적인 분위기로 진행되어 고객들에게 보람을 안겨준 시간이 되었답니다.

 

 

 

 

 

 

 

 

 

 

 

 

 

 

 

 

 

 

 

 

 

 

 

 

 

 

 

 

 

 

 

 

 

 

 







 

지난 6월17일의 정선아리랑시장 난전에는 산과 들에서 따온 각종 열매들이 좌판을 메우고 있었습니다.

보기만 해도 탐스러운 앵두에서부터 보리수, 복분자, 오디를 비롯하여 매실, 개복숭아, 그리고 술 담그는 청솔방울까지 나왔어요.  곰취나 더덕 등의 정선특산물은 말 할 것도 없고, 할머니들이 텃밭에서 따온 마늘쫑과 호박 몇 개도 얼굴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늦은 시간이라 문화장터에서는 수리취떡을 나누어주며 공연을 마무리하고 있었는데,

신명을 주체 못한 분들이 나와 음악 반주도 없이 너울 너울 춤추고 있었답니다.

 

그러나 시장 한 편에는 시장조합 직원들과 상인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어수선한 분위기였습니다.

몇 달 전 번영기원제에서 잘못을 저질러 쫓겨났던 품바 “삼순이”가 전국노점상연합회 회원들을 대동해,

노점상 권익을 요구하는 소란을 피웠던 모양입니다.

 

모든 걸 대화로 풀었으면 좋으련만, 힘과 힘이 맞서는 악순환이 반복되어 안타까웠습니다.

 

 

 

 

 

 

 

 

 

 

 

 

 

 

 

 

 

 

요즘 자동차 없는 덕분에 산책시간이 좀 많아졌다.

산골짜기서 차 없이 산다는 게 불편하기 짝이 없지만, 앞만 보고 달리던 일상에서 다시 한 번 뒤 돌아보게 하는 소중한 시간을 만들어 주고 있다. 빨리 빨리 보다 천천히 살자는 말은 자주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더구나 현장을 쫓아다니는 다큐멘터리사진가에게는 그럴 여유도 없지만, 금세 잊어버린다.

십년 넘게 전국의 장터와 인사동을 기록하러 다니다보니 대인관계는 물론 집안 형편도 말이 아니다. 이젠 신용카드 없는 신용불량자에서 자동차마저 멈춰 섰으니, 완전 무장해제 된 기분이다.

요즘 정선 만지산 ‘사진굿당’에서 버스 정류소까지 2킬로 남짓한 산길을 자주 걷는다. 일하는 시간이 좀 줄긴 하지만, 대신 걷거나 버스 기다리는 동안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리고 십오 년 넘게  만지산을 오갔으나 이렇게 꼼꼼하게 자연환경을 관찰한 적은 없었다. 과히 생활의 재발견이라 할 만큼 모든 게 전혀 새롭게 다가왔다. 먼 산도 자세히 보니 미세한 숲의 일렁임이 마치 살아 꿈틀거리는 것 같았고, 뼝대의 속살이나 형상들은 어느 조각가도 흉내 못 낼 걸작들이었다. 길섶에 핀 이름 모를 야생화의 속삭임과 흐르는 강물소리의 절절함에 이르기 까지 자연환경과 소통할 수 있는 또 다른 시간이 된 것이다.

이제 전국 장터도 대부분 찍었고, 인사동도 대충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사진원고를 정리해 출판사에 넘기는 일만 남았으니, 진짜 천천히 살아 볼 작정이다.

장모님 생신날에는 기차타고 갈 작정인데, 텃밭에서 뽑은 채소와 카메라, 옷 보따리 등 짐이 많아 걱정이다. 장에 나오는 노인들처럼 봇짐, 등짐 짊어지고 가야할 처지지만, 벌써부터 그 날의 기차여행이 기다려진다.

아래 사진들은 지난 15일 오전9시 무렵의 윗 만지산길이다. 집에서 귤암리 버스정류소로 가며 만난 풍경들이다.

 

 

 

 

 

 

 

 

 

 

 

 

 

 

 

 

 

 

 

 

 

 

 

 

 

 

 

 

 

 

 

 

 

세월호 참사에다 6,4지방선거까지 겹쳐 바닥을 쳤던 시장경기가 현충일 연휴와 함께 다시 살아났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오일장과 더불어 주말에 열리는 장아찌 체험행사를 취재하려 지난 12일 새벽 일찍 서울에서 출발했다.
어디를 가던, 출근시간대의 자동차정체를 피하기 위해 새벽에 떠나는 것이 일상화되었으나,
엊저녁 인사동에서 늦도록 퍼 마신 후유증인지 몸이 편치 않았다.

오전 9시무렵에야 만지산 '사진굿당'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짐을 내린 후 곧 바로 정선장으로 나갔다.
문화장터에는 손님 맞을 공연준비에 바빴고 , 또 하루의 전쟁을 시작하는 장사꾼들은 손님 받을 준비로 부산했지만, 모두들 표정들이 밝아 보였다.  

파출소 앞에서는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에서 나와 농산물원산지표시제와 부정유통신고 캠페인을 벌이며, 강원도 배추로 담근 김치시식과 한우 등을 홍보하고 있었고, 문화장터 입구에서는 '강원대학교'에서 '정선아리랑시장'에 대한 고객 만족도 설문조사를 하고 있었다. 이젠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간 뺏기는 것을 꺼리기 때문에 홍보나 설문조사도 그냥은 잘 응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설문조사에 참여하는 사람은 치약을, 홍보 전단지를 받는 사람에게는 물티슈를 나누어 주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제법 몰려 들었다.

문화장터에는 단골 할머니들이 한 분 두 분 모여들었고, 아리랑가락도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늘상 보아왔던 아리랑소리공연과 민속놀이, 떡메치기, 노래자랑 등이 순서대로 진행되었으나 그 중 ‘아리랑무용단’이 보여 준 전통무용이 가장 눈길을 끌었다. 춤의 완숙함보다는 시골 어머니, 할머니들로 구성한 순수 아마추어 무용단이라는 점에 더 호감이 갔다. 가끔은 군무 대열이 비틀어지기도 하고 손발이 안 맞는 경우도 있었으나, 그런 건 문제될게 없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 분단장 곱게 하고 춤을 춘다는 것 자체만으로 보는 관객까지 행복해진다.

이리 저리 장터를 돌아다니던 오후3시 무렵 허기가 졌다.
돌아다니다보니 아침식사를 걸렀다는 사실조차 잠시 잊었던 게다. 먹거리촌의 단골집 '아우라지식당'에 갔더니 아줌마들이 모여앉아 다슬기를 까며 정담을 나누고 있었다. 즐겨먹는 곤드레 밥을 시켰는데, 배고픈 걸 어떻게 알았는지 밥을 수북이 담아 주었다. 된장에 양념장에 정신없이 비벼 먹고나니 갑자기 식곤증이 몰려왔다.
근 일주일을 비어 둔 집 청소에다 군불 때고, 할 일들이 많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정선시가지에서 벗어나 꼬불꼬불 산길 따라 가는 솔치재 쯤에서 졸음이 쏟아져 아찔한 순간을 만났다. 낭떠러지 직전에 핸들을 꺾어 위기는 면했으나, 순간적으로 “오! 마이 갓”이란 말이 튀어 나왔다. 평소 잘 쓰지 않는 말이 나와 웃었지만, 결국 덜 급했다는 이야기였다. 구석진 자리에 차를 세우고 가벼운 몸 운동을 한 후 다시 차를 몰았다. 전국장터를 떠돌아다닐 때, 졸음운전으로 아찔한 경우를 당한 적이 한 두 번은 아니지만 용케도 사고를 낸 적이 없는데다 조금만 가면 된다는 생각에 무리를 감행한 것이다. 잠 쫓느라 꼬집기도 하고, 때로는 돼지 목 따는 소리로 노래도 불러가며 조양강 강변길을 접어들었으나, 결국 귤암리 마을입구에서 사고를 내고 말았다. 갑자기 "쾅~"하는 소리에 놀라 눈을 떠보니 시멘트로 만든 가드레일을 들어 박은 것이었다. 내려 보니 운전석 타이어는 찢어졌고 바퀴를 잡아주는 축이 주저앉아 있었다.

 

몇일 전 자동차검사 받는데 문제가 생겨, 수리비로 40만원이나 지출했는데, 또 사고까지 쳤으니 마누라 볼 면목이 없었다. 다시 정선시내에 견인되어 견적을 받았으나 보험처리가 안 되는 업체라 ‘아세아공업사’로 옮겼는데, 수리비가 처음 견적보다 1/3이나 더 많았던 것이다. 아무리 보험사가 봉이라지만 결국은 소비자들의 보험료만 높게하는 이러한 악덕업체는 절대 이용하지 않아야 한다.

​하루에 네 번씩, 오후6시에 출발하는 귤암리행 마지막 버스는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서야 도착했다. 

버스에 올라 요금이 얼마냐고 물었더니 기사양반의 대답도 재미있다. “이북서 왔능기요?”

사실 정선에 온지 15년이 넘었으나 정선에서 한 번도 버스를 탈 기회가 없었다.

 

귤암리 하차장에서 내려 윗만지산까지 걸어야 했지만 불편하다는 생각도 잠시 뿐, 너무 행복한 산책길이 되었다. 매번 지나치던 길이지만 새롭게 다가왔던 것이다. 흐르는 강물소리의 절절함에서, 길섶에 핀 이름 모를 야생화의 속삭임에 이르기 까지 모든 자연환경과 소통할 수 있는 또 다른 시간이 된 것이다.

밭에서 옥수수 파종하던 최종대씨로 부터 저녁식사 초대를 받아, 털털거리는 경운기를 타고 만지산 꼭대기에 있는 최씨댁으로 갔다. 저녁상을 받으며 그제사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평소 “죽을 때가 되었다.“던지 ”죽는다.“란 말을 입버릇처럼 뱉어 왔기에 “당신은 벌 받아 천 년 만 년 오래 살 것이란” 말을 아내로부터 수차 들어 왔던터다. 이번 졸음 사고도 걱정할까봐 숨기려 했으나 나중에 보험사의 연락으로 알게 될 것 같아 이실직고 했더니 아내의 답이 걸작이다.

​ “당신 진짜 명줄 하나는 길다!”  

 

 

 

 

 

 

 

 

 

 

 

 

 

 

 

 

 

 

 

 

 

 

 

 

 

 

 

 

 


 

 


"Let's Dance~!! Shake it up~!! "


정선아리랑시장 문화장터는 수시로 춤판이 벌어집니다.
누가 권하지 않아도 신명을 주체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덩실 덩실 춤추는 할아버지도, 정신없이 엉덩이를 흔들어대는 아주머니도 있습니다.

힙합으로 폼 잡는 젊은이에서 깨춤 추는 애기까지, 장터가 온통 춤바람에 흔들립니다.

춤 자랑 하겠다는 생각 앞서면, 사람 의식해 재미가 없어집니다.
그냥 꼴리는 대로 마음 껏 엉덩이를 흔드는 겁니다.
술이라도 한 잔 드시면 더욱 리얼해지지요.

신들린듯 춤추며, 다 같이 한 번 놀아 봅시다.
쌓인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면, 근심 걱정이 바람과 함께 사라집니다.

 

 

 

 

 

 

 

 

 

 

 

 

 

 

 

 

 

 

 

 

 

 

 

 

 

 

 

 

 

 

 

 

 





그림의 뜻 / 정선 - <백악산>

​최 열 / 인물미술사학회 회장

산새는 울음 그치고 꽃은 져서 날아간다 山禽啼盡落花飛
나그네는 못가도 봄은 벌써 가버렸지 客子未歸春巳歸
갑자기 남녘 바람 정을 불러 일으키니 忽有南風情思在
뜰을 휩쓸어라 고운 풀 우거졌네 解吹庭草也依依

 

- 정도전(鄭道傳), 「사월초하루」, 『삼봉집(三峰集)』

                                      정선, 백악산, 종이,44×33.5cm, 개인 소장


정선은 백악산을 여러 폭 그렸는데 이 작품 <백악산 취미대>는 취미대가 아니라 백악산 전경을 그린 작품이다. 우뚝 솟은 백악의 위용이 대단한데 하단을 받쳐주는 구름 물결이 좌우로 장강처럼 흐르니 마치 하늘에 뜬 산처럼 보인다. 재미있는 것은 구름 물결 아래 검푸른 숲이다. 경복궁 북쪽 담장쯤일 터이다. 그렇게 경복궁을 감춰두고 구름 물결 위쪽에 가파르게 취미대 터를 배치함으로써 이 땅이 신비한 장소임을 드러내고 싶어 했던 모양이다. 실제로 이 백악산에는 백악신사(白岳神祠)만이 아니라 저 삼각산의 신령까지 모시는 삼각신사(三角神祠)까지 자리하고 있었으므로 신령스런 땅이었다.

그림에 구름 물결 흐르는 장소는 오늘날 청와대 터다. 이 땅의 내력은 다음과 같다. 이 터에 처음으로 궁궐이 들어선 때는
『고려사』에 나오듯이 고려 숙종 6년째인 1101년 9월 남경(南京) 궁궐을 개창하면서이다. 그때 이곳을 답사한 신하들은 다음처럼 아뢰었다.
“저희들이 노원역, 해촌, 용산에 가서 산수를 살펴본 즉 도읍을 정하기에 합당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삼각산 면악(面嶽)의 남쪽 산수 형세가 옛 문헌의 기록에 부합되오니 청컨대 삼각산 주룡의 중심 지점인 남향관에 그 지형대로 도읍을 건설하소서라고 하니 왕이 좋다고 하였다.”(『고려사』, 숙종 6년 10월)

그러니까 지금 청와대가 들어앉은 자리는 고려 남경궁궐 터인 셈이다. 그렇게 300년을 내려오다가 조선을 개창한 태조 이성계가 천도를 위해 권중화(權仲和)로 하여금 궁궐터를 조사하라고 하였더니 『태조실록』 1394년 9월에 아뢰기를 고려 때의 남경 궁궐터가 너무 좁으므로 그 남쪽으로 내려와 개창할 것을 아뢰었고 그렇게 해서 건설한 것이 바로 오늘의 경복궁이다. 이렇게 되자 남경 궁궐터를 후원(後苑)으로 삼아 여러 정자를 지었고 또 상림원(上林苑)을 두어 기화요초를 기르는 식물원으로 가꾸었다. 또한, 농번기 때면 왕과 왕비가 친히 이곳에서 모심기하는 친경(親耕)의 현장이었으며 대원군 때는 후원 둘레에 담장을 설치하고서 문무 대과를 치르는 시험장소로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1910년대까지만 해도 호랑이가 출몰하였으므로 ‘금호방(禁虎榜)’이라고 쓴 팻말이 붙어 있어 민간인의 출입이 자유롭지 않은 곳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기간 내내 그러한 땅이었다가 1939년 9월에 접어들어 이곳에 조선총독 관저가 들어섰다. 경복궁을 헐어내고 1926년 조선총독부를 완공한 때로부터 무려 14년이나 지난 뒤인데 그때까지 총독관저는 남산 밑 필동 2가에 위치한 화장대(和將臺)였다. 조선총독은 이곳 관저로 이주해 오면서 건물 이름을 경무대(景武臺)라고 불렀다. 경무대는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철근콘크리트에 백색 타일을 발랐는데 무엇보다도 지붕이 광채 나는 청색(靑色)으로 아주 먼 거리에서도 그 색깔이 눈에 띌만했다고 한다.

6년이 지난 1945년 해방이 되고 9월 미 군정이 시작됨에 따라 군정장관 Hodge 중장,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더불어 이승만 대통령이 차례로 사용했다. 일본인 통치자가 사용하던 이름인 경무대라는 이름을 청와대(靑瓦臺)로 바꾼 것은 4·19혁명 이후 윤보선 대통령이다. 물론 이 건물은 1993년 10월 철거해 버렸고 지금의 청와대 건물은 1992년에 지은 것이다. 고려 숙종이며 조선 태조는 물론 일제 총독, 미 군정 장관, 대한민국 대통령이 그 땅과 그 건물의 주인이라고 하지만 시대가 바뀌고 세월이 흐르면 모두 이슬처럼 사라지고 만다. 오직 유구한 것은 저처럼 우뚝한 산, 백악의 자태요, 흐르는 구름일 뿐. 요즘 남녘 바다 세월호의 비참으로 힘겨운 나날인데 정말이지 청와대가 평안하기를 소망하며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 「사월초하루」에 불렀던 슬픈 노래 읊조린다 .

문화장터가 '정선아리랑시장'의 꽃이 된지 이미 오래입니다.
이젠 전문가들만 출연하는게 아니라 장터사람 모두가 주인공이지요.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어울려 떡도 치고, 노래 부르며 춤도 춥니다.

지난 6월2일의 장날은 정선아리랑 공연에 이어 떡메치기, 노래자랑, 품바공연 등 재미있는 볼거리가 이어졌는데, 떡메치기에 꼬마 장정들이 나와 실력을 겨루기도 했답니다.
이젠 관광객들도 구경만 하는 게 아니라, 스스럼없이 어울려 참 좋습니다.

엿장수 최덕화씨의 품바공연에는 '더덕정과' 주인 이영화씨가 찬조출연하기도 했습니다.

처음 본 그녀였지만 관객들과 호흡을 맞춰가며 노래부르는 솜씨가 보통은 아니었습니다.
이젠 상인공연단 뿐만 아니라 상인 모두가 광대로 자처하고 나선 셈이지요.

최덕화씨의 품바공연은 북장단도 일품이지만, 그가 추는 가위춤은 어디 내놓아도 손색 없는 명품공연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체를 학대하는 불쇼는 가급적 자제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혐오감을 동반한 눈요기 거리보다는 신명을 푸는 즐거운 자리가 되어야 하니까요...

그리고 문화장터에는 관광객들 뿐만 아니라 낯익은 정선 어르신들도 쉽게 뵐 수 있습니다.
십리길을 걸어서 장에 나오신 정선 북실리의 이용녀(85)씨는 문화장터의 단골이십니다.
옆 자리의 윤채은(82)씨도, 역전에 사시는 권수오(83)씨도 이젠 친구가 되었지요.
모두들 문화장터에서 어울리는 게 유일한 낙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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