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을 맞은 정선아리랑 시장의 정겨운 풍정들입니다.
주말의 문화장터에는 뷔페 시범운영으로 부산했지만, 장옥주변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한결 여유로웠습니다.

따스한 가을 햇살이 내려 비치는 정선시장에서 만난, 아름다운 사람들이 두고 간 추억의 장면들입니다.


 

 

 

 

 

 

 

 

 

 

 

 

 

 

정선아리랑시장협동조합과 문화관광형시장육성사업단이 주관한  “정선향토음식 뷔페 시범운영“이

지난 11월 3일 정오12시에 정선아리랑시장 문화장터에서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곤드레밥, 콧등치기, 올챙이국수, 메밀전병, 수수부꾸미 등 정선향토음식 36종류를 망라한 뷔페를,

어른 6.000원, 어린이 4,000원에 제공하여 관광객들에게 큰 호응을 받아냈다. 

이 날 주최측에서 150명분의 음식을 준비하였으나 200여명이 신청하는 등의 혼잡을 빚었지만,

2차(11월 10일), 3차(11월15일)의 보완된 시범운영을 거치게 된다. 

 

정선 향토음식 뷔페는 정선아리랑시장협동조합의 장기적인 사업으로 발전시켜나가야 할 중요한 행사로 판단되었다.

이 사업은 수익성을 떠나 정선을 찾는 고객들의 만족도를 높이는, 정선아리랑시장에 대한 이미지개선에도 기여하였다.
물론 가격의 현실화는 고려해야겠지만, 다른 지역에서 먹을 수 없는 음식들을  한 자리에서 골고루 맛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매력인 것이다.

이번 행사는 주변 음식점에 대한 손해를 사업단에서 일부 보상해주었다지만 장기적인 운영에 대한 해결책이 필요하다.

그리고 별도로 가져가거나 음식을 남기는 등의 잘 못된 형태는 벌금을 물리도록 하는 안내판을 세워 무질서도 막아야한다.

부산 대청동에서 온 전창식(48세)씨는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골고루 맛볼 수 있는, 이 것만으로도 다시 찾을 수 있는

메리트”라며 반겼다.

 

 

 

뷔페에 제공된 정선향토음식 36종류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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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2일은 장날인데다, 주말이 겹쳐 정선아리랑시장은 관광객들로 넘쳐났다.

한 때, 동강이 물 반, 고기 반이라고 했듯이 시장은 사람 반, 상품 반이었다.
시장통으로 가려면 잰걸음으로 사람들에 떠 밀려가야 하지만,
기다리는데 익숙한 요즘사람들은 잘 적응해 갔다.
정작,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자리 이동이 더 힘들어 보였다.

오후에 비가내리기 시작하자 장옥 밖은 사람들이 줄어들었지만, 장옥 안은 여전했다.
아침식사를 거른 채 나와 배가 꼬르륵 거렸으나, 곤드레 밥 한 그릇 사 먹는데도 인내가 필요했다.

모든 게 많아도 탈, 적어도 탈이지만, 적당한 게 좋다는 걸 다시 한 번 절감하였다. 

 

이 날, KBS방송국에서 나온 기자들도 촬영하느라 인터뷰하느라 분주했다.
문화장터에서는 정선아리랑공연과 떡메치기, 노래자랑 등이 열렸으나
관람객이 늙은이보다 젊은이가 더 많은 탓인지, 가수 이완의 절창이 인기를 끌었다.

 

 

 

 

 

 

 

 

 

 

 

 

 

 

 

 

 

 

 

 

 

 

 

 

 

 



 

지난 19일, 토요일을 만난 정선시장은 가을 여행을 떠나 온 관광객들로 붐볐습니다.
주말 장이라 노점상 없는 장옥 길은 좀 한산했지만, 대신 먹거리촌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장터공연장에는 효소와 장아찌 체험행사로 들썩였고, 길거리 좌판에는 들국화 꽃잎들이 아름다웠습니다.

요즘은 장모님이 한 달 넘도록 병원에 계셔서 간병하느라 아내가 꼼짝을 못합니다.
늘 함께 다니던 정선길이 요즘은 외로운 길이 되어버리고 말았는데, 정선 와도 재미가 별로 없답니다.
이번에 떠나 올 적엔 집 주변에 늘려있는 들국화를 따 오라는 어부인의 하명을 받았지만,

가을걷이에다 눈에 가시처럼 시야를 가려왔던 50m높이의 거목을 처리하느라 들국화 딸 시간이 없었습니다.
장에서 좀 사고 싶었으나 조그만 바구니에 담은 들국화가 오천원이라 쉽게 손이 가지 않더군요.

"들국화야! 다음에 올 때까지 제발 시들지 말고 좀 기다려다오."

 

 

 

 

 

 

 

 

 

 

 

 

 

 

 

 

 

 

 

 

 

 

 

 

 

 

 

 

 

 

 

 

 

 

 

 

 

 

 

 

 

 

 





















 

세계 아리랑축전이 열린 첫 날 정선읍내 시가지에서 정선군 각 읍면 팀들이 참여한 길놀이가 진행되었다. 많은 팀들이 보여 준 다양한 가장행렬들이 있었으나 이미 오랜동안 보아온 진부한 소재이거나 수동적인 동작이었음에 비해 정선읍 아리랑시장의 보부상단 행렬은 참신함과 함께 활달한 몸짓을 보여 구경나온 군민들의 눈길을 가장 많이 끌었다. 풍물패를 앞세워 엿장수, 새우젓장수, 옹기장수 등 다양한 분장의 조합원들이 참여한 길놀이는 정선아리랑시장에 걸 맞는 컨셉일 뿐 아니라 참가자들의 연기 또한 열성적이었다. 엿장수로 분장한 이윤광조합장의 튀는 연기는 말할 것도 없고, 돗자리를 짊어진 우임직씨의 코믹한 표정이나 각설이 조명숙씨, 계란장수로 분한 이옥분씨의 열정도 돋보였다. 그 뿐 아니라 보부상들을 이끄는 풍물패들의 신명나는 장단 또한 분위기를 압도하였다. 최덕화씨의 꽹과리, 민병만씨의 징, 정춘경씨의 북을 비롯한 모든 분들이 맡은 역활을 잘 소화해주어 성공적인 길놀이가 되었다. 



이 보부상단들의 가장행렬을 지켜보며 보부상들의 재미난 이야기를 극본화해 정선아리랑시장 무대에 올렸으면 어떨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새로움에 대한 관심보다 장사꾼에 대한 친근감으로 고객들의 호응이 좋을 것 같은데, 몇몇 조합원들은 이미 전문가 못지않은 연기와 열정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정선은 과거와 만나는 곳이다. 그 오랜 향수를 맛볼 수 있는 날이 2일과 7일에 서는 오일장이다.
두메산골에서 자란 산더덕,·곤드레를 비롯한 갖가지 산채도 구경하고 덤으로 구성진 정선아리랑도 들을 수 있다.  오일장이 서는 장날이면 흥겨운 잔치마당도 열려 관광객들의 신명을 끌어낸다.

정선 장에 가면 꼭 맛봐야 할 향토음식도 많다.
메밀전병과 수수부꾸미, 이름도 재미있는 콧등치기국수와 올챙이국수가 그것이다.
콧등치기국수는 메밀을 껍질째 갈아 거뭇머뭇한 가루를 물에 넣어 손으로 치대어 칼로 썰어 내놓는 메밀국수다.  굵기는 거짓말 좀 보태 손가락만 한데, 옛날에 뗏목을 타던 떼꾼들이 주막에 들려 장국에 말아먹었다고 한다.  굵은 면발을 후루룩 먹으면 면발이 콧등을 쳐서 콧등치기국수라고 불린다.  이에 비해 올챙이국수는 옥수수를 묵으로 쑤어서 구멍 뚫린 틀에 내리면 큰 물그릇에 떨어지는 국수가락이  올챙이가 헤엄치는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콧등치기나 올챙이 국수를 처음 먹는 사람들은 그 진맛을 잘 모르지만 먹을수록 당기는 음식이다.

메밀전병에다 황기막걸리를 한 병마셨지만 곤드레밥을 먹지 않고 어찌 그냥 떠날 수 있겠는가.
이름만 들어도 입맛을 돋우는 곤드레 나물밥. 된장을 넣어서 비벼도 좋고, 양념장으로 비벼 먹어도 되지만  그 각 각의 맛이 다르니 골고루 먹을 수 밖에 없다.  그 맛에 끌려 곤드레 만드레가 될지라도...

정선아리랑시장에서는 토요일을 맞는 9월28일부터 네차례에 걸쳐 장아찌와 효소 담는 법도 가르쳐 준다고 한다.  모든 것이 공짜인데, 자기가 담근 장아찌까지 준다니 귀가 솔깃해진다. 

잘 배워두웠다가 아내에게 점수 좀 따야지...
그리고 10월2일부터 나흘동안 '대한민국 아리랑대축제'가 정선에서 열리지 않는가.
님도 보고 뽕도 딸 겸, 올 가을여행은 정선으로 한 번 떠나보자. 

떠나오는 발길 뒤로 들리는 밥집 아낙의 인사도 정겹더라.
"담에 또 오시드래요"

 사진,글 / 조문호

추석을 이틀 앞둔 정선시장은 단대목이라 그런지 친숙한 정선 사람들이 더 많았다.  

제수용품을 구하기도 하고, 아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 나누는 모습들이 정겨워 보였다.  

장터를 돌아다니다 반가운 우리동네 주민들도 많이 만났다.  

혼잡했던 정선시장이 오랜만에 고향 골목에 들어선 것처럼 포근하고 정겨웠다. 

 

정선군청 직원들도 "추석제수용품은 전통시장에서 구입하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었다.  

최승준 정선군수도 상인들과 인사를 나누며 나물 등 갖가지 제수용품을 사기도 하고,  

옷가게에 들어가 어머니들과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정선 역전에 사는 김지성(57세)씨는 장에서 술 한 잔 걸쳤는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술마실 돈이 부족했던지, 원님 소매 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한 푼만 줍쇼~" 

참 세상 많이 좋아졌다. 옛날 같으면 곤장을 쳤을텐데... 


 

 

 

 

 

 

 

 

 

 

 

 

 

 

 

 

 

 

 

 

 

 

 

 

 

 

 

 

 

 

 

 

 

 

 

 

 

 

 

 

 

 

 







 

 

 

 

 

 











 

 

 

 


 

 






 

 

 














 


 

 

 


 

        이 시냇물은 영월ㆍ상동을 지나 정선 고을로 들어간다. 고을 앞 임계 서쪽에 있는 산기슭 남쪽이 정선 여량촌(餘糧村)이고,

우통수 물이 북쪽에서 여량촌을 둘러 남쪽으로 흘러간다. 양쪽 기슭이 제법 넓고 언덕 위에는 키 큰 소나무와 흰모래가

맑은 물결을 가리고 비추기 때문에 참으로 은자(隱者)가 살 만한 곳이다.

다만 전지(田地)가 없는 것이 한스러우나 마을 백성은 모두 자급자족하여 넉넉하다.

 

 

『택리지』에 기록된 내용이다. 정선은 산 깊은 골짜기인지라 사는 것이 쉽지 않은 고을이었던 모양이다.

이곳을 찾았던 허소유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땅이 궁벽하니 누구인들 쉽사리 갈 수 있으랴
온 종일 몰아 달려서 강성(江城)을 택했네
개 어금니처럼 울퉁불퉁하여 고르지 않은 험한 길에 당했으니 고단(高丹, 땅 이름)이 멀고
여자의 눈썹처럼 공중에 떴으니 태백산이 가로질렀네
냉담(冷淡)한 것으로 즐거움을 삼으니 세속의 취미 어긋나고
평안하고 한가로움으로 스스로 즐기는 것이 나의 장점이네
토지는 메마르고 무거워서 유리(流離)해 도망한 백성이 많으니
집집마다 석청(石淸, 돌 사이에 모은 벌꿀)을 뽑아 바치는 것을 차마 못 보겠네

 

 

임계천을 받아들인 골지천은 구미정(九美亭)을 지나 정선군 북면 여량리, 즉 아우라지1)에서 송천을 받아들인다.

아우라지는 정선군 북면 여량리 한강 상류에 있는 나루터로, 평창군 대관령면의 황병산과 구절리에서 흘러내린 송천,

동쪽에서 흘러온 임계천이 합류하는 곳이다.

 

아우라지 섶다리

 

이 아우라지의 뱃사공이 부르던 노래가 바로 「정선아리랑」이다. 「정선아리랑」, 즉 「정선아라리」가 처음 불리기 시작한 것은 조선 초기부터였다고 한다.

고려 왕조를 섬기고 벼슬에 올랐던 사람들 중 일곱 선비(전오륜, 고천우, 김충한, 변귀수, 김한, 이수생, 신안)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성을 다짐하면서

개성의 깊은 산골 두문동에 은신하다가 지금의 정선군 남면 낙동리 거칠현동으로 옮겨와 살면서 지난날 섬기던 임금을 사모하고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였다.

그들이 멀리 두고 온 고향의 가족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본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애달픈 모습을 보고 한시로 지어 읊은 것이

정선아리랑」의 시원이 되었다고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주게
싸리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백은 낙엽에나 쌓이지
사시사철 임 그리워 나는 못 살겠네

 

 

또 다른 설에 따르면, 옛날 여량리에 사는 처녀와 아우라지 건너편 유천리에 사는 총각이 연애를 하였다.

그들은 동백을 따러 간다는 구실로 유천리에 있는 싸리골에서 서로 만나곤 하였다.

그러나 어느 가을에 큰 홍수가 나서 아우라지에 나룻배가 다닐 수 없게 되자 그 처녀는 총각을 만나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정선아리랑」 가락에 실어 부르게 된 것이다.

 

 

눈이 오려나 비가 오려나 억수장마 지려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
명사십리가 아니라면은 해당화는 왜 피나
모춘삼월이 아니라면은 두견새는 왜 우나
(······)
정선읍내 일백오십 호 몽땅 잠들여놓고서
이호장네 맏며느리 데리고 성마령을 넘자

 

 

그러나 「정선아라리」는 사회적, 시대적 흐름에 따라 새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반달 같은 우리 오빠는 대동아전쟁 갔는데 샛별 같은 우리 올케는 독수공방 지키네”라거나, “사발그릇은 깨어지면은 세네 쪽이 나고 삼팔선이 깨어지면은 한 덩어리로 뭉치네”라고 분단 상황을 노래하기도 하였으며, “아우라지 건너갈 때는 아우라지더니 가물재 넘어갈 때는 가물감실하네”라고 날 가문 날을 노래하기도 하였다.

이뿐만이 아니다. “동면같이 경치 좋은 곳에 놀러 한번 오세요. 용산소, 폭포수 물 밑에도 해당화만 핍니다. 산천이 고와서 뒤돌아다봤소. 정든 곳이라서 뒤돌아다봤지”라는 구절도 있고, “겉눈은 슬쩍 감구야. 속눈으로 보니, 대관령 서낭님두 돈 시구 가잔다. 연감은 할멈 치고, 할멈은 아 치고, 아는 개 치고, 개는 꼬리치고, 꼬리는 마당 치고, 마당 가역에 수양버들은 바람을 받아 치는데, 우리 집 그대는 낮잠만 자느냐”라고 노래하기도 하였다.

성마령(星摩嶺)은 정선군과 평창군 사이에 있는 고개로 지금은 잘 쓰이지 않지만 옛날에는 이 고을의 관문이었다. 어찌나 높은지 그 마루에 서면 별을 만질 수가 있을 듯하다는 뜻에서 성마령이라고 불렀다 한다.

정선군 북면 유천리 양짓말에서 갓거리로 넘어가는 가물재는 몹시 가팔라서 재 밑을 내려다보면 정신이 가물거린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고, 자족령이라고도 부르는 칠족령은 신동면 제장에서 평창군 미탄면 마사리 뇌룬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꽃베리는 강릉에서 정선읍으로 오려면 반드시 지나야 했던 베리, 곧 벼루(벼랑)였다. 조선시대에 어느 관리가 가마를 타고 지나면서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자 가마꾼에게 얼마나 더 가야 되느냐고 몇 차례를 물었는데, 그때마다 가마꾼들이 곧 베리가 끝난다고 했던 데서 ‘곧베리’가 되었다가 나중에 ‘꽃베리’로 바뀌었다고 한다.

마전치는 정선읍 광하리 마전에서 평창군 미탄면 백운리로 넘어가는 재로, 고개가 하도 높아서 마치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비행고개라고도 부른다.

 

 

 

 

 한편 조선시대에 이곳 여량리에는 여량역이 있었다. 큰 말 2마리, 짐 싣는 말 4마리,

역리 84명, 역조 77명, 역비 12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피곤에 지친 말은 실처럼 가는 길 뚫고 가기 주저하는데
삐죽삐죽 산봉우리는 깎아지른 듯 겹쳐진 성과 같네
바람은 바위틈에서 나오니 대포 실은 수레가 구르는 듯하고
물은 마을 터 안고 흐르니 한 필의 비단 가로놓인 듯
내 신세 백년을 살며 양쪽 귀밑머리만 희어지고
강산 천리 길로 벼슬살이하러 다니는 심정이여
난간에 기대 앉아 동쪽 산에 떠오르는 달 기다리는데
고요한 밤 시를 짓고 싶은 마음 오래될수록 더욱 맑아져

 

용재 성현의 시가 흐르는 듯한 아우라지를 지난 강물은 나진을 지나고 한반도 지형을 빼닮은 상장산 자락을 지나 정선에 이른다. 여기부터가 동강이다.

「정선아리랑」을 연구하는 진용선은 “옛 문헌을 보면 우리 선조들은 아우라지에서부터 동강이라는 말을 썼고, 표기도 지금의 ‘동녘 동(東)’이 아니라 ‘오동나무 동(桐)’을 썼다”라고 말한다. 영월읍을 중심으로 동쪽은 동강, 서쪽은 서강이라고 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였다는 것이다.

 

 

 

  

서강 강원도 영월군 서면에서 만난 평창강과 주천강이 영월읍 서쪽으로 흐르다가

다시 동강과 합류할 때까지의 강을 서강이라 한다.

 

 

동강에는 열두 곳의 아름다운 경치가 있다. 여울과 소, 절벽, 섶다리, 마을 풍경이 그것들이다. 1경은 가수리 느티나무와 마을 풍경이고,

2경은 신동읍 운치리의 수동 섶다리다. 3경은 나리소와 바리소(신동읍 고성리~운치리),

4경은 백운산(고성리~운치리)과 칠족령(덕천리 소골~제장마을), 5경은 고성리 산성(고성리 고방마을)과 주변 조망,

6경은 바새마을 앞 뼝대, 7경은 연포마을과 홍토 담배 건조막, 8경은 백룡동굴(평창군 미탄면 마하리), 9경은 황새여울과 바위들,

10경은 두꺼비바위와 어우러진 자갈, 모래톱과 뼝대(영월읍 문산리 그무마을), 11경은 어라연(거운리), 12경은 된꼬까리 여울과 만지나루(거운리) 등이다.

산은 높고 골은 깊은 정선군에서 흘러내린 물이 골지천, 오대천, 지랑천, 용탄천, 어천, 임계천 같은 여러 내를 이루며 흘러내리다가 조양강이 되고 다시 더 내려가 동강이 된다.

정선은 고구려 때 잉매현(仍買縣)이었다가 신라의 경덕왕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 때 군으로 승격되어 조선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고려 때 사람인 곽충룡은 이곳 정선을 두고 “풍속은 순박하고 백성들은 송사를 벌이지 않는다”라고 하였고, 역시 고려 때의 문장가인 이색은

 “일천 산엔 겹겹 푸름이 가로놓였으니 한 가닥 길은 푸른 공중으로 들어간다”라고 하였다. 곽충룡은 이어서 “일백 번 굽이져 흐르는 냇물은

멀리 바다로 향하고 천 층으로 층계 진 절벽은 하늘에 의지해 가로질렀네”라고 하였다. 이렇듯 산이 높고 물이 깊은 정선군을 일컬어

고려 때의 문인 한철충은 그의 시에서 “벼랑을 따라 보일 듯 말 듯 가느다란 길이 있구나. 옛 읍이 산을 의지하였는데 산은 성을 이루었네.

산중에 숨어 살고자 하나 참으로 방도가 없구나. 비록 벼슬을 그만두겠다고 말하나 진정(眞情)이 아닌 것만 같네”라고 하였다.

정추는 “하늘 모양은 작은 것이 우물 속에 비쳐서 보이는 것 같고, 산의 푸름은 멀리 구름 위에 가로놓였다. 다섯 동혈(洞穴)은 차고 서늘하여서 능히 뼛속까지 시리게 하고, 한 시냇물은 목메어 울어 순정(純情)을 호소하는 것 같다”라고 노래하였다. 그래서 이 근래에도 정선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장을 두고 “하늘이 세 뼘밖에 되지 않는다”라거나 “앞산과 뒷산을 이어서 빨랫줄을 맬 수 있는 곳” 또는 “닭이 울면 그 소리가 온 고을을 메울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한 안축은 그의 시에서 “산마을에 돼지의 배부름은 반드시 새벽에 물 먹인 것이 아니요, 이웃집 닭이 살져도 날마다 훔쳐가는 자가 없다”라고 하였다.
정선 관아의 북쪽에는 봉서루라는 이름의 정자가 있었다. 그 정자를 두고 안축은 다음의 시를 남겼다.

 

 

가파른 언덕을 빙빙 돌아 말을 급히 몰아가니
뽕나무와 삼[마(麻)]이 십 리를 이은 옛 성터
거친 땅엔 자갈만 삐죽삐죽 규전(圭田)도 적고
비좁은 산허리에 가로질러진 실낱같이 가는 길
빗소리 들으니 나그네 시름 더하고
구름 보니 어버이 그리는 마음 참기 어렵네
바람 바위 물구멍은 사람 세상 아니로세
티끌 흔적 씻어내니 뼛속까지 시원하네

 

 

한편 이곳 정선에서 거두어들인 전세(田稅)는 무명이 1동(同) 19필이었고 『여지도서』에 그 이동 경로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3월에 거두어들여 4월에 바친다. 처음에는 육로로 실어 날라 사흘이면 충주 목계강에 도착한다. 배에 싣고 출발해 자진포, 두무포를 거쳐 경강의 뚝섬에 도착한다. 순풍을 만나면 이틀 반이면 호조에 바칠 수 있다. 대동과 균세도 이와 같다.

 

두메산골이었던 정선이 새롭게 변모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정선 오일장의 부활이다. 5월에서 가을까지 2일과 7일에 서는 정선 오일장에는 서울에서 관광차 오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정선읍내의 오일장에는 정선군 일대에서 채취된 산나물이 다 쏟아져 나온다. 참취, 곰취, 며느리취, 나물취, 참나물, 누롯대, 참두릅, 개두릅, 더덕, 고비, 도라지, 곤드레 등 나물도 좋지만 무엇보다 정선 여행의 별미인 콧등치기와 올챙이국수를 맛볼 수 있어 더욱 좋다. 콧등치기는 일종의 메밀국수다. 메밀을 반죽하여 국수를 만든 것인데 올챙이국수에 비해 끈기가 있고 단단하여 국숫발이 물에 쉽게 풀어지지 않는다. 육수에 된장을 살짝 풀고 깨소금 양념을 하여 먹는데 맛이 좋아 급히 빨아들이다 보면 국숫발이 살아 있는 듯 콧등을 친다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

올챙이국수는 찰옥수수를 갈아서 묽게 반죽하여 나무로 만든 굵은 체에 내려 만든 것이다. 찰기가 적어서 국숫발이 부슬부슬 끊어지는데, 갖은 양념을 하여 묵처럼 말아서 숟갈로 떠먹는다. 하지만 옛 시절 정선의 명물이었던 꿩꼬치산적 같은 음식은 아쉽게도 찾아볼 수가 없다.

태백에서 시작된 남한강이 유장하게 흐르는 영서지방을 두고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영의 오른쪽은 영서(嶺西)라고 한다. 모든 물이 서쪽으로 흘러 한강과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가는데, 물이 적은 데는 거룻배가 다닐 수 있고, 물이 많은 데는 큰 배가 다닐 수 있다.

이익이 생존했던 18세기 중엽만 해도 남한강엔 수없이 많은 배들이 오르내렸지만 오늘날엔 큰 배는커녕 고깃배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정암사

 
 

이곳 정선군 고한읍에 자장율사가 세운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중의 하나인 정암사가 있다. 신라의 큰 스님이었던 자장율사가 태백산 서쪽 기슭에 정암사를 창건한 것은 선덕여왕 14년이었다. ‘숲과 골짜기는 해를 가리고 멀리 세속의 티끌이 끊어져 정결하기 짝이 없다’는 의미에서 정암사라는 이름을 지었다는 이 절은 오대산의 상원사, 양산의 통도사, 영월의 법흥사, 설악산의 봉정암과 더불어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다. 정암사의 창건 설화와 문수보살을 만난 자장율사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정암사 적멸보궁 태백산 서쪽 기슭에 자리한 정암사는 신라의 큰스님이었던 자장율사가 선덕여왕 14년에 창건한 절이다.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다.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불교의 융성에 힘쓰던 자장율사는 진덕왕 때 대국통의 자리에서 물러나 강릉에 수다사를 세우고 살았다. 어느 날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말했다. “내일 너를 대송정에서 보리라.” 놀라 깨어난 자장이 대송정에 이르자 문수보살이 나타나 “태백의 갈반지에서 만나자” 하고 말한 뒤 다시 사라져버렸다. 그 말을 따라 태백산에 들어가 갈반지를 찾아 헤매던 자장은 큰 구렁이들이 나무 아래 서로 얽혀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보고, 그곳이 문수보살이 말한 갈반지라 여겨 ‘석남원(石南院, 곧 정암사)’이라는 절을 지었다.

자장율사가 석남원에 머물며 문수보살이 나타나기를 몹시 기다리던 어느 날 다 떨어진 가사를 걸친 초라한 늙은이가 죽은 개를 삼태기에 싸들고 와서 “자장을 보러 왔다”라고 하는 게 아닌가. 자장율사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이 언짢았던 자장의 시중이 “어디서 온 누구인가?” 하고 호통을 치자, 그 늙은이는 천연덕스럽게 “자장에게 전해라. 그래야 갈 것이다”라고만 대꾸하였다.

자장율사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 늙은이를 쫓아내게 하였다. 그러자 늙은이는 “아상이 있는 자가 어찌 나를 볼 수 있으리오” 하고 탄식하면서 가지고 온 삼태기를 뒤집으니 죽은 강아지가 푸른 사자로 변하였다. 늙은이는 그 사자를 타고 빛을 뿌리며 하늘로 솟구쳐 올라갔다. 알고 보니 바로 그 노인이 문수보살이었던 것이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자장이 곧바로 뒤를 쫓아갔으나, 이미 문수보살은 떠나가버린 뒤였다. 자장은 몸을 남겨두고 떠나며 “석 달 뒤에 돌아오마. 몸뚱이를 태워버리지 말고 기다려라” 하고 당부하였다. 그러나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한 스님이 와서 오래도록 다비하지 않음을 크게 나무란 뒤 자장의 몸뚱이를 태워버렸다. 석 달 뒤 자장이 돌아왔으나 이미 몸이 없어진 뒤였다. 자장은 “의탁할 몸이 없으니 끝이로구나! 어찌하겠는가. 내 유골을 석혈(石穴)에 안치하라” 하는 부탁을 하고 사라져버렸다.

한편 자장은 사북리의 산꼭대기에 사리탑을 세우려 하였으나 세울 때마다 계속 쓰러졌다. 간절히 기도하였더니 하룻밤 사이에 칡 세 줄기가 눈 위로 뻗어 지금의 수마노탑, 적멸보궁, 사찰 터에서 멈추었으므로 그 자리에 탑과 법당과 본당을 짓고 그 절의 이름을 갈래사(葛來寺)라고 하였다. 그래서 고한읍에는 갈래라는 마을의 이름과 함께 갈래초등학교가 있고, 상갈래ㆍ하갈래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정암사는 숙종 39년(1713)에 중수되었으나 낙뢰로 부서져 6년 뒤 다시 중건되었고, 1771년과 1872년 그리고 지난 1972년에 다시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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