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막사발로 통하는 도예가 김용문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모처럼 인사동에 나왔으니, 얼굴 한 번 보자는 거다.
그 날은 짐 옮길 일이 있어 차를 끌고 나왔는데,
술 한 잔 하려면 차를 돌려주어야 했으나 시간이 없었다.
박도선생의 ‘미군정3년사’작가와의 만남‘ 뒤풀이로 시간이 지체된 것이다.
술은 미시지 못하더라도 얼굴만 볼 작정으로
종로경찰서 옆에 있는 관훈주차장에 밀어넣고 ‘유목민’에 들렸다.






‘유목민’에는 사기꾼들이 여럿 앉아 있었다.
막사발 장인 김용문씨를 비롯하여 분청하는 변승훈씨와 이형석씨도 있었다.
안쪽에는 화가 정영철씨와 성애씨도 자리를 잡았더라.


인사동에서 김용문씨를 처음 만난 지가 30년도 더 되었으나, 오랜만에 만난 것이다.
터키 하제테페대학교 도예과 초빙교수로 떠나며 보기 힘들어졌는데,
페북에서 근황을 지켜보았던 터라, 겉으로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마치 트레이드마크처럼 말아 올린 상투가 막사발 같은, 그런 친숙한 모습이었다.






더구나 변승훈씨까지 오랜만에 만났는데, 어찌 술 한 잔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제일 잘 지켜지지 않는 약속이 차 때문에 술 먹지 않는 일이다. 
한 잔만 한 잔만 하다 발동이 걸려 '에라~ 모르겠다. 퍼 마신 것이다.
김용문씨에게 터키에서 전시한 수묵드로잉이 좋았다고 이야기했더니,
인사동에서도 그 전시를 한다는 것이다.
이달 31일부터 보름동안 ‘나무화랑’에서 한다는 데, 술 마실 건수 하나 생긴 것 같았다.






그리고 주변에서 들은바로, 삼례역의 막사발미술관을 비우라는
통보가 왔다는데, 사실이냐고 물었더니, 그렇다는 것이다. 
외국에 체류하는 날이 많아 자주 비워 그런지는 모르지만, 너무 아쉬웠다, 
그동안 세계막사발 축제로 쌓아놓은 탑을
어떻게 그리 쉽게 무너트릴 생각부터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최소한 작가와 협의하여 명맥을 이어갈 수 있는 방법부터 협의했어야 했다.






그런데, 변승훈씨가 자기 후배한테 찾아가 이빨하라며 성화다. 
그동안 대신 부담할테니 이빨 하라는 사람이 여럿 있었지만, 싫었다.
남에게 부담 주는 것도 싫지만, 그보다 오가는 게 번거로워 싫었다,
이번에도 변승훈씨가 해주겠다며 망가진 이빨을 핸드폰으로 찍어
후배에게 견적을 내보라며 부산을 떨어댔다.
나이 들면 하나 둘 망가지는 게 이치고,
그렇게 사라지는 게 인생인데, 더 이상 무슨 소용이랴!






강행복, 손기환씨를 비롯한 여러 명이 등장해 술집 분위기는 한층 무르익어갔다.
취하면 취할수록 차 걱정에 술 맛이 없었다.
어차피 대리운전을 불러야 했으나, 점차 올라가는 주차비가 걱정되어서다.
비상금으로 꼬불쳐 둔 신사임당 한 장 뿐이라,
대리운전을 부를 수밖에 없었는데, 나 또래의 늙은이가 왔다.






그런데, 주차장을 빠져 나가려니 차단기가 열리지 않았다.
아무리 찾아도 주차관리인은 물론 현금 넣는 기계도 없었다.
비켜달라는 뒷차의 경적에 빼고 박기를 반복하였으나, 나갈 방법이 없었다.
30여분을 씨름하다 뒤늦게 알았는데, 카드만 사용할 수 있는 주차장이란다.
신용카드가 없으면 차도 끌고 다닐 수 없는 요상한 세상에 잠깐 어리둥절했는데,
갑자기 인사동이 아니라 외국에 온 냥 낯설었다.






하는 수 없어 ‘유목민’의 전활철씨를 불러 해결했으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목적지인 녹번동으로 가자고 했더니, 수동에 익숙하지 않은지 시동 꺼트리기를 밥 먹듯 했다.
그런데, 어떻게 운전을 하는지 차가 탱크 달리는 소리를 냈다.
기사가 본래부터 소리가 심하냐고 물었지만, 아니었다.
속으로 마후라가 터졌나 걱정되기도 했으나, 뭔가 조작을 잘 못한 것 같았다.
차라리 내가 운전하는 게 더 편할 것 같았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간신히 도착해 차를 점검해 보았더니, 여지 것 사륜구동으로 달린 것이다.





“에라이! 이 아저씨야~”
그 실력으로 대리운전 하다니, 참 사는 게, 다 힘든 것 같았다.

족쇄 같은 차 때문에 시달리는 일도 이제 그만하고 싶다.
지공도사 형편에, 주제 파악 하라는 야유가 뒤통수를 치더라.

사진, 글 / 조문호





























야 이 개새끼야~ 우당-탕 탕술 자리에 난리가 났다.

지난 14일 새벽, 완주 한봉림씨 작업실에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술 취해 졸다 시끄러워 눈을 떠보니, 꿈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안개가 자욱한 듯 사람은 보이지 않고 고함소리만 들렸다.

소화기 포말 냄새로 보아 불이 난 걸로 착각했다

슨 일로 왜 싸울까 궁금했지만, 꿈 꾸듯 헷갈렸다.

옆 자리에는 자다 깬 송상욱, 이만주, 박인식씨가 놀란 망아지처럼

우두커니 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싸우는 사람은 바로 이상훈씨와 김명성씨였다.

도자기 깨지는 소리와 의자를 집어던져 벽의 통유리가 깨지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화가 서길헌씨는 이상훈씨를 부여 잡았고, 김영국씨는 김명성씨를 떼어놓느라 정신없었다.

그런데 작업실에 있던 한봉림씨가 방에 들어나자

이상훈씨의 화살이 그 곳으로 날아가는 걸 보니, 이상훈씨와 한봉림씨 싸움 같았다.



    


나이 많은 선배에게 행패부리는 것을 김명성씨가 그냥 두고 볼리 없기 때문이다.

힘에 부친 김영국씨가 손을 다쳐, 김각환씨가 나서서야 간신히 김명성씨를 제압했다.


결정적인 것은 한봉림씨가 2년에 걸쳐 완성했다는 100호쯤 되어보이는 그림에

술병을 날렸는데, 캠퍼스천을 뚫으며 액자가 바닥에 나 뒹군 것이다.





간신히 이상훈씨가 밖으로 밀려 나가서야 사태가 수습되기 시작했다.

김시인씨가 쓰레기를 한데 끌어 모아 대충 정리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사진 찍을 자격도 없는 것 같았다.

밤새도록 카메라를 들고 놀았으나, 왜 그 기막힌 현장을 찍지 안했을까?

무의식적으로 카메라에 눈은 갔으나, 차마 잡을 수 없었다.

벗들이 죽자 살자 싸우는 그 다급한 판에 어찌 카메라를 들이댈 수 있겠는가?

사진은 냉정함을 요하니, 차라리 사진가이기를 포기하는 게 낳겠다.



   


뒤늦게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한봉림씨의 술 취한 퍼포먼스를 이상훈씨가 과잉 대응한 것 같았다.





다들 하루종일 술을 너무 많이 퍼 마셨다.

낯부터 전주 막걸리골목에서 마시고, 한봉림씨 댁에 준비된 술은 물론 비축주마저 씨를 말리지 않았던가.

자정이 지나서는 그마저 없어져 콜택시에 연락해 전주에서 소주 한 박스와 맥주 두 박스를 사 오게 만들었다.

얼마나 기분좋게 놀았는지, 내 생애 최후의 화려한 만찬이라 했다가,

그 자리에 정영신씨가 없어 최후란 말은 거두었다.




 

술 마시며 재미있게 놀다 분위기가 식은 시간은 새벽 두시 무렵이었다.

두시부터 시작되어 새벽 네 시 무렵에야 사태가 진정 되었으니,

무려 두 시간 동안 난장을 벌인 것이다.



 


분위기가 시들해서 포커 판을 벌였는지,

포커 판 때문에 술자리 열기가 식었는지 모르겠으나,

문제는 이상훈씨등 네 사람이 벌인 포커 판이었다.



 


나 역시 포커하는 게 싫어 자리에 누웠지만, 다들 그 때부터 술자리에서 물러난 것 같았다.

그 무렵, 작업실에 있던 한봉림씨가 갑자기 소화기를 들고 나타난 것이다.

처음엔 벽난로의 불이 옮겨 붙는 착각에 소화기를 잡았는지 모르지만,

느닷없이 포커 판 쪽으로 소화기를 쏜 것이다.



 


그래서 직격탄을 맞은 이상훈씨가 난리를 친 것이다.

하나의 퍼포먼스 였으나, 이상훈씨는 그런 상황에 익숙하지 못했다.

차라리 하얀 눈가루를 맞으며 춤이라도 너울너울 추었으면 좋으련만...




 


무작정 한봉림씨에게 욕하며 달겨드니, 김명성씨가  빰을 몇 대 때렸다고 한다.

그래서 분풀이로 기물을 때려 부수며, 난장판을 벌인 것이다.



 


사태가 어느정도 수습되고 나니, 사고 친 이상훈씨를 비롯한 다섯명은 콜택시를 불러 탈출하고 없었다.

미처 차를 부르지 못한 김상현씨는 아코디온과 기타 통을 둘러메고 한 시간 반을 걸어 읍내까지 나갔다고 했다.

어두운 눈길을 걸어가며, 살아남은 유랑악단의 설움을 절절히 씹었을 것이다.





그 난장판을 피한 사람도 있었다.

일이 벌어지기 전에 숙소에 들어간 전활철씨 가족과 김혜련, 황예숙씨만

그 사실을 깜쪽같이 몰랐는데, 현장을 확인하고 아연실색했다.



 


남은 사람이라고는 김명성, 서길헌, 김영국, 송상욱씨 등 다섯 명인데,

이불은 소화기 가루가 뿌려져 버슥 버슥했지만 그 위에 쓰러져 잠시 눈을 붙여야 했다.





아침 무렵, 한 숨 자고 나온 한봉림씨가 현장을 보고 한 말이 죽인다

하하하~ 대단한 퍼포먼서였어


포말가루 자욱한 컵들을 씻어 커피 한 잔씩 마셨으나, 한봉림씨는 남은 맥주로 속을 풀어야 했다.




 

한참 후, 버스타고 올라가며 보내오는 메시지도 각양각색이었다.

화가 강찬모씨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날아가는 나비만 보았다고 적었고,

무용평론하는 이만주씨는 소화 분말을 많이 마셨더니, 속에 있는 울화가 다 사라졌다고 적었다.





 

인사동 풍각패의 유랑 길에 어찌 이 정도의 풍파를 거세다 할소냐?



 

 

전주로 유배 떠난 지가 몇 달된 음유시인 송상욱씨께 위문공연 가자는 이야기는 지난 년 말부터 나왔다.


난, 새해 첫날부터 감기에 걸려 두문불출하고 있었는데, 년초에 김명성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근일 간에 전주 가야하는데, 전주 가는 날을 형이 잡아라고 다잡았다.

일주일 후에는 감기가 나을 것 같아 토요일로 정했으나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감기도 완쾌되지 않았지만, 창원의 양철수씨가 보냈다는 택배를 받아 노숙인에게 나누어주어야 하는데,

빼도 박도 못할 처지가 되고 말았다.



 


구체적인  일정이나 누가 가는지도 모른 채강남고속터미널로 나갔더니,

이만주씨와 김상현씨가 먼저 나와 있었다.



 


주모자인 김명성씨가 무작위로 불러 모은 사람이 공교롭게도 십 팔명이었다.


십 팔년의 첫 유랑 길에 십 팔명이 떠난다는 암시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진 모르지만,

좋은 쪽으로 해석했다. 아무튼 괜찮은 년일 것 같은 예감은 들었다.





뒤이어 박인식, 김혜련, 황예숙, 김시인, 서길헌, 김각환, 이상훈, 김영국, 이만주,

강찬모, 전활철씨와 아들 시원이, 딸 예원이 까지 다양한 층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인사동 창예헌농심마니 팀으로 이루어 진 잡탕이었.



 


전주터미널에 도착하니, 송상욱선생과 한봉림씨가 나와 있었다.

첫 코스는 송상욱선생 작업실이 있는 전주 막걸리 골목이었다.

처음들린 집이 옛촌 막걸리였는데, 공교롭게도 바가지 집이었다.






술에 안주가 따라 나오는 게 아니라 안주를 시켜야 술이 한 주전자씩 나왔다.

많은 안주를 시킬 수 밖에 없어 잠깐 동안 마신 술값이 무려 40만원이나 되었다.

전주의 맹주 한봉림씨가 내려는데, 김명성씨가 먼저 내버려 구역침범했다며 화를 냈다.

그보다 엄청난 바가지 골목이 되어버린 막걸리골목의 못된 장삿속에 더 울화가 치민 것 같았다.

인터넷에 올려 아무도 가지 못하게 할 것이라며 펄펄 뛰었다.





그 자리에서 황예숙씨는 송상욱선생께 도예작품을 이주선물로  전하기도 했다.

이어 송상욱씨의 재미있는 노래와 김상현씨의 구성진 연주가 이어졌다.


“사랑이 좋으냐 친구가 좋으냐? 막걸리가 좋으냐 색시가 좋으냐?

사랑도 좋고 친구도 좋지만, 막걸리 따라 주는 색시가 더 좋더라

이어지는 열두냥짜리 인생도 들었고, 김상현씨가 부른 '에디트 피아프'의 사랑의 찬가도 들었다.



    


지척에 있는 송상욱선생의 무대로 옮겨갔다.

입구에는 송상욱선생의 시집 제목이기도 한 무무놀랑이란 현판이 붙어 있었다.

안에는 송상욱선생께서 노래 할 수 있는 무대가 만들어 져 있었고,

부인이 춤 출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벽에다 거울을 붙여 그런지 엄청 넓어 보였는데, 더 놀라운 것은 가게 임대료였다.

한 평도 되지 않는 쪽방  임대료가 23만원인데, 그 넓은 작업실이 한 달에 20만원이라는 것이다.





그 곳에서 송상욱선생의 아내인 김미옥여사를 만날 수 있었다.

인사동 아라가야에서 처음 만난 지가 벌써 10이나 흘렀는데,

세월이 빠른 건지, 사는 게 급한 건지, 나도 모르겠.


김미옥여사가 준비한 다과에다 보드카도 한 잔 씩 마셨다.

방음된 공연장에서 듣는 아코디언 연주와 노래소리는 좀 달랐다.  

역시 뽕짝은 술집에서 젓가락 두드리며 부르는 맛이 좋더라.



    


늦을세라, 한봉림씨 아지트가 있는 완주 소양면 종남산 자락으로 옮겼는데,

그런 귀 막힌 퍼포먼스가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꿈엔들 알았으랴!





앞서 말했지만, 그 날만큼 재미있게 논적도 드물었다.

유목민주인장 전활철씨의 노래도 한 몫했다.

달래듯, 빈정대듯 하소연하듯 상대의 마음을 툭툭 건드리며 부르는

쌍팔년도 포크송에 세 여인의 입이 쩍 벌어졌다.

다양한 춤이 어우러진 가무 또한 어디 내놓아도 손색없을 듯 싶었다.



 


그런데 종남산자락의 집터가 샌 것인지, 오래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창예헌가을여행과 농심마니산행이 겹쳐진 10년 전에도

이곳에 전국각지의 명물 100여명이 모였는데, 그때도 가관이 아니었다.


영화사를 운영하던 임정하씨가 술이 취해 넘어져 구급차에 실려 가기도 했고,

관객모독의 연출가 기국서씨가 여우 공격법으로 한봉림씨를 활킨 사건은

아직까지 회자될 정도의 사건 사고였다.





그 날이 한봉림씨 모친 구순 생신이라 다들 인사를 올리기도 했는데,

이젠 백수를 넘기도록 종남산을 지키고 계시니, 보통 명당은 아닌 듯싶다.



 


한봉림씨의 안 서러운 배웅을 받으며 10시버스로 다들 전주 시내로 나왔다.

콩나물 해장국으로 속을 달랜 후, 또 다시 술집을 찿았다.

'전주한옥마을'에 있는 술집을 물어물어 갔더니, 가는 날이 공일이라 문이 잠겼다.

하나님 만나러 간다나...





닥치는 대로 찾아 들어간 집은 '구일집'이었다.

생각 밖의 맛있는 음식집이었다. 김밥도 가락국수도 나오는 음식이 모두 맛있었다.



 


오후3시 무렵에서야 서울로 올라오며, 지난 일들을 곱씹었다.


술이 취한 상태지만, 이상훈씨가 너무 무례했다. 그렇게 막 나갈 군번이 아니었다.

젊은 혈기라 그런지 모르지만 나이 많은 선배에게 너무 감정적으로 대처한 것 같았다.

좀 지혜로웠다면 소화기를 빼앗아 퍼포먼스를 대신 할수도 있잖은가?



 


그리고 이런 술자리에서 포커판을 벌여서는 안 된다,

일단 돈 냄새나면 역겹다. 꼭 해야 한다면 방을 빌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해야 한다.

어쩌면 호탕한 성격의 노장 한봉림씨의 거침없는 가르침 일 수도 있다.


어떻게 자기집에 찾아 온 손님에게 포말을 쏠수 있냐고 흥분하였지만,

남의 집이 아니고 자기가 청소할 집이니 가능한 것이다.





이번 일은 남의 기물을 망가트린 손해배상에 앞서 진정한 사과가 따라야 한다.

한 쪽 모서리가 터진 작품은, 또 하나의 훈장을 단채 의미를 더할 것이다.





아무튼, 술판의 돈 놀이를 채찍질한 훌륭한 퍼포먼스라 생각된다.

오랫동안 추억할 일이 틀림없으니, 이게 좋은 유랑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 터줏대감들께서 모처럼 나오신다기에, 신년 인사드리려 인사동에 나갔다.


인사동에 대한 애정이 식어가는 요즘, 유일하게 인사동을 챙기는 분이 강민선생이시다.
용인에서 버스와 지하철을 몇 번이나 갈아타야하는 불편함을 무릅쓰고 나오시는
선생의 인사동에 대한 애착에 그져 고개가 숙여 질뿐이다.
삭막하게 변해가는 인사동을 보면 속만 답답하실 텐데 말이다.






점차 친구들도 한 분 두 분 세상을 떠나고 있다.
재작년엔 소설가 이호철선생과 극작가 신봉승선생께서 세상을 떠나셨고,
작년에는 심우성선생마저 공주 요양병원으로 떠나지 않았던가.
살아 남은 분이라도 자주 만나고 싶어하시나
다들 몸도 마음도 예전 같지 않으시니, 잘 나오지 않는단다.






년초부터 감기에 걸려 이틀 동안 누워지내다 3일에서야 간신히 추수릴 수가 있었다.

정영신씨를 대동하여 약속장소인 ‘나주곰탕’으로 갔더니, 강민선생을 비롯하여 김승환, 장봉숙선생이 와 계셨다.
너무 반가운 만남이었다. 페북에서야 가끔 인사 드리지만, 뵌 지가 몇 달은 된 것 같았다.

선생께선 낮에만 나오시고, 난 올빼미처럼 밤에 출몰하니 잘 만날 수가 없었는데,
다들 건강하신 모습을 뵈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곰탕 건더기를 안주삼아 조촐한 신년하례식을 가졌는데,
강민선생은 방동규선생께 미처 연락하지 못했음을 아쉬워하셨다.
방동규선생이 계셔야 호탕한 한 해를 시작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모처럼 식사 한 끼 대접하려 했으나 장봉숙선생께서 먼저 계산해 버렸다.

새해부터 어른들께 신세지는 일을 없애려 했으나, 첫날부터 뜻대로 되지 않았다





커피 마시러 ‘인사동 사람들’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 곳은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인사동을 사랑하는 옛 사람들의 발길이 줄었다는 말이다.


붙잡아도 머물어 주지 않는 세월을 원망해야 할지,
갈수록 야박해지는 세상을 원망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게 하나 둘 변하고 사라지는 게 인생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커피를 마시다 선생님들 앞에서 깜빡 잠이 들어버렸다.

감기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인지, 술이 오르니 갑자기 잠이 몰려온 것이다.

눈을 떠보니 정영신씨 혼자 남아 있었는데, 선생께서 일어나시면 깨워야 하지 않는가?

죄 없는 정영신씨만 원망하고 있으니, 전활철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강민선생께서 지하철 타러 가는 길에 유목민잠시 들렸다고 했다.

그 곳에서 강민선생은 다시 만날 수 있었지만, 김승환, 장봉숙선생은 떠나시고 없었다.

그동안 말씀이 없어 잘 몰랐는데, 강민선생께서 오래전 넘어져 다친 팔목이 아직 불편하다고 했다.

늘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계셔서 눈치채지 못했는데, 빨리 완쾌하셔야 할텐데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뜻밖에도 민화 그리는 장춘씨가 '유목민'에 나타난 것이다. 

홍두깨처럼 나타났다 증발해 버리는 그의 행적이 늘 궁금했기에, 죽은 사람 만난 듯 반가웠다.

오죽하면 북한의 지령받고 움직이는 간첩이 아닌가 생각했을까?


그러나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장춘씨와 정영신씨를 '유목민'에 남겨두고, 강민선생 따라 일어서야 했다.



 


서울역에서 노숙하는 이종민씨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세밑에 잃어버린 카메라가 문제가 아니라, 그 속에 찍힌 사진파일이 더 필요했고,

그 사진파일보다는 그와의 인간적 신의를 되돌리는 것이 더 절실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새해에는 더 이상 절망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사진, / 조문호 

 


























지난 28일 오후3시 무렵, 이청운씨 작업실에 인사동 꼴통들이 쳐들어갔다.

그가 인사동을 떠나 병석에 누운 지도 벌써 3년이란 세월이 흘러 버렸다.


    

그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도 인사동을 사랑했고,

인사동은 그가 순수의 예술혼을 불태운 제2의 고향이나 마찬가지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예술가모임의 간사장 역을 떠 맡은 조준영시인의 주선으로,

해 바뀌기 전에 이청운화백을 찾아보자는 연락을 받았다.


 

서울역에서 지하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서야 작업실이 있는 응암역에 내렸는데, 다들 먼저 와 있었다.

조준영시인을 비롯하여 무용평론가 이만주, 인사동 지킴이로 불리는 공윤희씨가 3번 출구에서 기다렸다.

지척에 있는 이마트로 옮기니, 유목민’의 전활철씨와 사진가 정영신씨도 있었다.

좁은 환자방에 여러 사람이 동시에 가는 것이 바람직한지 걱정스럽더라.


 

3층에 있는 이청운 작업실 문을 살그머니 밀쳐보니,

어두침침한 작업실 풍경 자체가 이청운의 오랜 자화상이었다

이젤 다리는 어두운 뒷골목에 버틴 전붓대 같기도 하고,

그 아래 삽살개가 다리를 치켜들고 오줌을 갈기는 정겨움도 연상되었다.



안 쪽에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와 조심스레 들여다보니,

천진난만한 모습의 이청운씨와 부인 이상랑여사가 함께 있었다.

마치 이청운은 죽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청운씨를 모른다면,  화가라면 간첩이고, 아니면 사는 게 바빠 예술을 등진 사람일 것이다.

그는 정확한 나이조차 모른다.

한국전쟁이 만들어 낸 희생양으로, 추측컨대 나보다 한두 살 적은 일흔 쯤 되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어느 신부님이 이청운의 그림에 대한 재질을 발견하여,

동아대학에서 미술을 공부 시킨 것이 그가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동기였다.


 

이청운씨가 본격적으로 화단에 등장한 것은 1971년 구상회 공모전에 금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의 한 작품에는 집 한 모퉁이의 그림자가 다른 집 지붕에 드리워져 있고, 그 배후는 하늘조차 어둡다.

하늘이 이 정도로 어둡다면 전경을 이루는 집의 모퉁이나 집의 그림자는 존재할 수 없다.

30대 초기의 청년작가로서 이토록 확신에 찬  그림을 보여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빛과 어둠을 대조시키는 작업은 그의 그림세계를 관통하는 기본적인 성격이다.


 

구상전에서 금상을 받은 10년 후에 또 다시 재 부상한다.

세 번째로 열린 중앙미전 공모에서 특선을 한 것이다. 이때부터 화단의 주목을 받으며 여러 공모전에서 상도 받게 된다.

그 당시 우리가 눈여겨 볼 점은 그의 작품이 감히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이다.


 

폭압적인 박정권 말기인 1970년대 말은 억눌림에 견디지 못하던 시기였다.

미술평론가와 작가들이 모여 현실과 발언이라는 미술조직을 만들 때, 같이 합세한 것이다.

잘 나가면 편하게 작업이나 하면 좋으련만, 그 몸속에 베인 정의감은 그냥 두지 않았다.




현실과 발언의 다른 맴버들은 명문 출신으로 백그라운드가 있었던 데 비해 이청운은 그런 배경도 없었다.

그를 만만하게 본 정보당국은 이청운을 납치하여 무려 50일이나 감금한 일이 있었다.

뒤늦게 풀어주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겁준게 두려워 지금껏 숨길 정도였으니,

그의 공포심이 얼마나 심각했을 지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다.


 

당시 그는 미술계에서 각광받는 분위기였지만, 낯설고 먼 길인 프랑스로 떠난 이유는 이런 까닭이었다.

그런데, 마지못해 선택한 외유에서 의외의 성과도 얻었다. 바로 살롱도톤느 전에서의 1등상 수상이었다.


 

이청운씨의 80년대 초반기의 그림들은 그가 유년과 청년 시절을 보낸 부산의 항구 풍경을 줄 창 보여준다.

항구하면 대개 감상적이고 애수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게 일상적인 풍토였지만,

그로테스크하며 질퍽한 그의 그림들은 너무나 사실적이고 진취적이다.

어둡지만 강건한 힘이 느껴지는 항구가 이청운 만의 그림세계다.


 

그의 이력이 너무나 기구 화려해, 쓸을 풀다보니 너무 멀리 와 버렸다. 


 

그런데, 자리에 누운 이청운씨가 인사동 떨거지들이 반가워 바시시 빠개는 쌍다구가 정말 죽이더라.

마치 만화 양산박에 등장하는 무대의 모습이 연상되는 그런 표정이었다.

 사람 한 사람 손을 잡으며, 그동안 깨우친 삶의 진실을 암시하듯 눈을 빤짝이며 바라보았다.

옆에서 밤낮으로 병수발을 드는 아내 이상랑여사가 통역까지 해 주는데, 말년에 호강하는 것 같았다.

여지 것 아내와 하루 스물 네 시간을 부대끼며 정 나누어 본 적이 있었던가?


 

뒤 늦게 김명성시인과 뮤지션 김상현씨가 큼직한 아코디온을 들고 나타났다.

위문공연을 하려는 생각이었지만, 재기의 축하공연으로 돌리고 싶다.

아코디온으로 셀브루의 우산을 켜는데, 얼마나 애잔하고 슬픈지, 눈물 날라 하더라.

이청운씨의 눈시울을 바라보니, 지난 세월을 돌아보는 듯 슬퍼보였다.

그러면서도 감성을 자극하는 음률에서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기도 했다.


 

뒤이어 김상현씨의 변주곡인 동백아가씨를 연주할 즈음에는 작업실을 살펴 보았다.

힘들었던 지난한 과정들이 한 눈에 읽혀졌다.

자리에 누운 3년 동안, 그의 손길을 기다리는 미완성 작품들이 즐비했다.

나란히 메달린, 물감에 짓 이겨진 팔레트 행렬이 정겹고,

마무리 못한 채 이젤에 기대선 그림도 정겹더라.

비록 모든 게 정지되어 있었지만바로 이청운의 색깔이고 분위기였다.



느닷없이 이청운씨가 아내더러 뭘 가져오라 재촉하니, 여러 점의 판화를 가져왔다.

아픈 몸으로 판화에 서명까지 한 액자를 미리 준비해 두고 있었다.

선물로 주겠다며 한 점씩 가져가라는 뜻밖의 배려에 잠깐 어리둥절했다.

아마 그의 그림이 비싸게 팔려나가 친구들에게 그림 한 점 선물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 것 같았다.

누가 먼저 세상을 하직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살아남은 자의 벽에 걸려 이청운을 오래도록 추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년 봄에는 비록 휠체어에 몸을 의지할 지라도 인사동에서 그의 작품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아쉬운 작별을 하고 인사동 유목민으로 돌아와야 했다.

녹번동의 '서부감자탕'에서 소주 한 잔할 생각이었으나,

'유목민'의 전활철씨가 별도의 음식을 준비해두었다고 했다.

덕분에 푸짐한 안주로 호사하며, 또 다시 한해를 보내는 송년을 밤을 인사동에서 즐겼다.

곧 닥쳐 올 십 팔년에는 인사동과 가난한 예술가들에게도 따뜻한 봄바람 가득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바램 하나가 있다면, 이청운씨의 작품을 한 곳에 관리하며 보살펴 줄 미술관이 생겼으면 좋겠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그림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부산시에서 이청운미술관을 건립할 것을 요청하고 싶다.

여지 것 부산에서 태어난 작가로서 이만한 역량과 개성을 보여준 작가가 있었던가?

언젠가는 이루어지겠지만, 빠른 추진을 부탁하고 싶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인사동 터줏대감 채현국 선생께서 복막염으로 서울대병원에서 가료중이다.

병문안 드리려 지난 25일, '유목민' 전활철씨와 병원에 들렸더니,

사모님 혼자 병실을 지키고 계셨다.
대학로 내려가는 길목의 커피숍으로 오라신다.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가 선생님의 손을 잡았는데,
손아귀 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힘이 펄펄하셨다.






병원에 입원하신지가 오늘로 십팔일 째이지만,
금식중이라 커피도 입만 축였는데, 어디서 저런 힘이 나오실까?

좌우지간 별난 선생님이시다.
오척단구의 거한, 인사동 낭인들의 활빈당주 등 선생님을 대신하는 이름들도 숱한데,
반세기가 가깝도록 인사동에 나타나시어 가난한 예술가들 술값 대주고
차비까지 붙여주는 그런 구세주였다.






몇 년 전 부터 세상에 너무 알려져, 이젠 간첩도 다 아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채현국선생님이 세상에 알려지며, 인사동에서 자주 만나 뵐 수 없었다.
초청 강의가 전국에서 물밀 듯 밀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두 세시간의 강의를 꼿꼿하게 서서 하시는 등 체력을 과시했으나, 한편으론 걱정도 되었다.
‘과유불급’이란 말이 있듯이 이제 선생님 연세가 팔순을 훌쩍 넘기셨으니...





섞은 사회의 오래된 통념을 가감하게 깨부수는 선생님 말씀에 짜릿한 희열도 맛 볼 수 있었다.


사실 선생님 덕분으로 우유부단하고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두루뭉술 넘어가는 나의 나쁜 성격을 완전히 뜯어 고치게 했으니, 나에게는 큰 스승이셨다.

등달아 입바른 소리해댔다가 이젠 친구까지 잃어버린 외톨이 신세가 되었지만,
많지 않은 남은 인생 쪽팔리게 살지 않는 것만도 천만다행이다.






선생님께서 처음엔 부산대학병원에 맹장염으로 입원하셨다가
오진에 의해 서울대병원으로 옮겨 복막염 수술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다행히 경과가 좋아 곧 퇴원하실 계획이셨다.


사모님까지 고생시키는 힘든 일을 치러고 계시지만,
오히려 건강을 보살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찻집에서 “이제, 식구들을 위해 살거다”란 말씀도 하셨다.
그동안 앞만 보고 달리느라, 가족에게 소홀했던 점을 뒤늦게 깨달은 것 같았다.






의사선생님이 찾는다는 사모님의 전화로 선생님을 모시고 병실로 돌아왔다.
다행히 방귀는 물론 대변까지 시원하게 보아, 모처럼 식사를 맛있게 드셨다.


“선생님의 쾌유를 축하합니다. 부디 건강하고 행복한 여생을 기원합니다.”






다음 주 화요일 쯤 퇴원하실 계획이니 병문안 하실 분은 서두르기 바랍니다.
병실은 대학로 서울대병원 6509호입니다.


사진, 글 / 조문호



















탄핵을 하루 앞둔 지난9일 저녁의 안국역 주변은 소란스러웠다.

촛불시민들은 중요한 날, 소란 피우지 말자며 일찍 흩어졌으나,

낙원상가에서 헌재 가는 길에 몰려있던 태극기부대는 분위기가 험악했다.

신들린 사람처럼 탄핵반대를 외치다가도, 카메라만 들이대면 욕설을 퍼부었다.

 

언론보도에 불만을 가져, 사진찍는 자들을 철천지 원수처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주최 측 사람나 태극기부대만 사진을 자유롭게 찍을 수 있었다.

나 같은 늙은이야 태극기부대로 보아 넘길 만도 하지만, 봐 주지 않았다.

태극기 하나 들고 위장이라도 하면 되겠지만, 그렇게 사기 쳐 뭐하겠나 싶어 돌아섰다.



 


일찍 부터 유목민에서 죽치고 있는 화가 장경호씨와 합류했다.

종로경찰서 옆이라 유목민’엔 손님이 많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리 많지 않았다.

그 부근에 모인 촛불시민들은 일찍 흩어졌지만,

한 사람이 간신히 드나 들수 있는 샛길도 모르거니와 골목 안 구석에 박힌 유목민을 알 리 없었다.

 

유목민에는 주인장 전활철씨를 비롯하여, 장경호. 유진오씨가 마주앉아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좀 있으니, 이승철 시인도 나타났다. 옆 자리엔 황 혁, 김기준, 이기묘, 성영만,

김응규, 박성원, 조봉훈씨 등 여러 명이 날아들어, 사진도 찍고 인사도 땡겼다.

밤 늦은 시간, 어디서 꺾었는지 꽃망울 맺힌 벚꽃 가지를 든 신현수씨도 나타났다,



.


요즘은 술이 취해도 좀처럼 신바람이 나지 않는다. 그 병신 년 때문인지?

개구신들이 다 꼬리내려, 술자리 조가 잘 맞지 않았던지? 

예전 같았으면 돼지 목 따는 소리로 봄날은 간다도 한 곡 뽑았을 것이나,

이런 저런 생각만 많아진다이제 철든 것일까?

 

그러나, 철들기를 절대 거부한다. 봄이 오면 미친 듯이 한 번 놀 것이다.

조지피면 같이 웃고, 조지 지면 같이 우는, 알뜰한 그 맹세를 불러대며...

 

사진, / 조문호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찍고 싶은 것도 많은데, 이제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정선에서 돌아 와서 부터 맥을 못 추며 빌빌거린다.
틈만 나면 눕고 싶고, 자고 싶다. 할 일은 많은데...
몸을 막 굴린 후유증 인지, 갈 때가 되었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집에 자빠져 있을 수만 없어, 지난 17일 오후 늦게 인사동에 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그렇고 그런 인사동이었지만, 유달리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걸인노파와 거리를 안방삼아 누운 젊은이였다.

궁상스럽게 쪼그리고 않은 노파야 흔히 봐 온 모습이지만, 젊은이는 생소했다.
누워 그림을 끄적거리다, 술 한 잔 들이키며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다.
세상살이에 고민이 많은 것 같다. 아마 골방에서 뒹굴기엔 사람이 그리웠던가보다.

하기야! 인사동 나온 내 처지와 비슷한 것 같았다.
나 역시 사람이 그리워, 힘든 육신 끌고 나왔지 않은가?

마동욱씨 사진전이 열리는 ‘토포하우스’에 갔더니, 마문호씨가 와 있었다.
그는 러시아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며, 서둘러 일어섰다.
좀 있으니, '가을동화' 찍은 김병천 감독도 나타났다.

요즘은 영화 찍지 않고, 배역 맡으려, 연기 수업한다고 했다.

마동욱씨로 부터 주동현, 임주묵씨를 소개받아, 저녁식사 하러 갔다.
‘툇마루’엔 자리가 없어 ‘포도나무집’으로 갔는데,
한 때 김병천감독의 회사 동료였던 KBS PD 이자성씨도 찾아왔다.
현장에 뛰어 다닐 때는 친구들과 식사 한 끼 할 시간도 없었지만,

요즘은 사내근무라 좀 한가하단다. 

마동욱씨는 이번 전시에 2천 만 원을 들였지만, 아직 4백 만원 밖에 건지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았다. 돈을 쓰면 결국은 돌아온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마동욱씨의 세상사는 방법을 배웠지만, 난 너무 늦은 것 같다.
얼마 마시지도 않았는데, 취기가 올랐다.

모두들 헤어졌다. ‘유목민’ 골목을 들어서니, 젊은이들이 와글와글 했다.
자리가 없어 ‘유담커피집’에 앉은 유진오씨와 냉커피로 속을 풀었다.
전활철씨와 이상영씨도 있었으나, 기력이 딸려 줄행랑쳐야 했다.
할 일은 많은데, 걱정이 태산같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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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해 바뀌고 처음으로 인사동에 나갔다.





싸늘한 돌덩이 위에 잠든 노숙자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문화지업사’ 자리엔 또 다른 대형건물이 들어 설 채비를 하고 있었다.
거리는, 힘든 사람이나 인사동이 변하는 것엔 관심없는 듯 분주했다.




“인사동사람들”에 들리니, 강 민선생님 혼자 쓸쓸이 계셨다.
선생은 기다리는 사람이 있든 없던, 인사동에 나와야 마음이 편한 분이다.
양촌리 커피 한 잔에 시름 달래다,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겼다.






전활철씨가 반갑게 맞았으나, 유작전 개막으로 오래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복분자 한 잔 마시고 일어나려 했으나, 주머니가 비어 난감했다.
마침, 안쪽에 김명성씨와 이상훈씨가 술 자리에 있어 떠넘겨 버렸다.




그렇게 새해의 인사동은 쓸쓸하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새해들어 시작한 '문화알림방' 일거리가 하나 둘 들어오고 있다.
그 일에 신경써느라, 이 이야기도 늦었는데, 이젠 예전처럼 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작가를 인터뷰하여 보도자료를 작성 배포하는 일에서부터, 행사장 촬영 등
잡다한 일에 메여, 찍어 놓은 사진들도 정리 못하고 있다. 늙어 철든 건지, 노망든 건지...
하다보면 요령이 붙겠지만, 책임감에 섣불리 다룰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부탁받은 행사의 성공 여부가 바로 ‘문화알림방’의 성공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 볼 작정이다.

2016,1,4 /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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