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씨 껍질 모아 한 모금 피웠다.
도무지 일손이 잡히지 않고, 마음이 어수선 해서다.
사진 동지가 물 밑으로 가라앉아 연락 두절이었다.
떨어져 있어도 소통은 되었는데,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햇님이로 부터 손녀 태어났다는 연락도 왔고,
사진가 이정환씨의 장인 돌아가셨다는 부고도 떴다.
어디부터 가야 할까? 
손녀야 볼 일이 많겠지만, 세상 떠난 망자부터 찾아 나섰다.







생전에 한 번도 뵌 적은 없으나, 편안한 저승길이 되길 빌었다.
문상객이 넘치는 장례식장에서 모처럼 이정환씨와 술 한 잔했다.
처가 가족 중 유일하게 자신을 아껴 준 장인이었다고 한다.
해외여행에서 오자마자 돌아가셨으니, 힘들어 보였다.






충무로 사진축제 부활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충무로 사진축제에 관여한 적이 있으니, 사정을 잘 아는 듯 했다.
우선 명동에서 충무로 넘어오는 건널목 만드는 게 시급하단다.





사진축제에 사진인들이 협조하지 않는 것도 슬픈 일이지만,
사진으로 먹고사는 카메라점이나 각종 업주들의 무관심을 더 안타까워했다.
무엇보다 다양한 사진인을 포용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한 것 같았다.


소주 한 병으로 끝내고 일어나니, 알딸딸한 게 기분 좋았다.






'현대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잠실나루 역 가는 길은 호젓했다.
다리 위에서 바라본 야경을 찍어려니, 세 다리가 없었다.
카메라가 흔들려 불빛이 미끄러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진이면 어떻고, 빛 그림이면 어떠랴?






유난히 밝은 보름달에 끌린 건, 술 때문만이 아니었다.
세상에 갓 태어난 손녀 같았다.


이 험난한 말세에 태어난 걸, 과연 좋아만 할 일인지...



사진,글 / 조문호














[서울문화투데이] 2018년 10월 15일 (월) 16:59:07 조문호 기자/사진가 press@sctoday.co.kr  

▲미아리2011_7
 

이정환씨 ‘미아리 이야기’사진전이 충무로 '비움 갤러리'에서 19일 까지 열린다.

‘미아리 이야기’ 전시를 보며 오래된 추억들이 떠올랐다.

유행가에 나오는 눈물의 미아리 고개가 아니라, 슬프기도, 우습기도 한 “희비쌍곡선”이다.




▲미아리2015_7


고등학생 시절 영화에 미쳐, 미아리에 있었던 ‘서라벌예대’에 들어가려 안달한 적 있었다.

집에서는 “줄만 서면 들어가는 딴따라대학에 들어가 딴따라 될끼가?”라며 어림 반푼어치도 없었다.

그래서 무작정 서울로 도망쳐 와 할부 책장사를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어눌한 주변머리에 책 판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팔았다 하면 망하는 회사에 풀어, 돌려받느라 혼 줄 난적도 여러 차례다.



▲미아리2011-1


친구 자취방에서 잠은 끼어 잤지만, 굶기를 밥 먹듯이 하여 배가 얼마나 고팠는지 모른다.

그래도 틈만 나면 미아리 학교 주변을 기웃거렸다,

고갯길의 중국집에서 공갈빵 하나 사서 간신히 허기를 메웠는데,

그 공갈빵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지금도 공갈빵만 보면 그때 생각이 난다.

사서 고생 하다 결국 집으로 잡혀 갔지만, 몇 달 동안 미아리 주변을 맴돌았던 추억이 새록새록 했다.



▲미아리2013_4


다른 추억 하나는 20여년 후, 사진에 미쳐 두 번째 야반도주했던 때 이야기다.

인사동 친구들 여러 명이 어울려 마시다, 술김에 단체로 미아리 택사스에 몰려 간 것이다.

박모 시인 덕에 누린 호사였는데, 정말 죽이더라. 그때 난생 처음 계곡 주를 맛 보았다.

열 명이 넘는 남녀가 발가벗고 술 마신다고 한 번 생각해보라. 생각만 해도 웃음이 절로난다.



▲미아리2013-1


이정환씨의 ‘미아리 이야기’가 그만 필자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미아리 이야기’사진전이 열리는 전시장은 마치 미아리 택사스 촌처럼 어두컴컴했다.

푸르스름한 조명이 좀 야한 분위기를 연출했지만, 전시된 사진들은 야하지 않았다.



▲미아리2014-1


이정환씨는 미아리에서 태어나 55년의 세월을 미아리에서 살아 누구보다 미아리를 잘 알고, 추억과 애정 또한 남다르다.

그는 사진가이기 전에 한 때 영화 전문가였다.

30대부터 컴퓨터 그래픽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며 각종 CF의 CG작업을 했다.

‘신 씨네’ 와의 인연으로 국내 최초의 CG영화 ‘구미호’의 CG디렉터로 활약하기도 했다.



▲미아리2018_34


그가 늦게 사진을 시작해 옛날 기록은 남기지 못했지만, 일찍부터 사진을 했다면,

완전한 미아리의 역사를 남겼을 것이다.

그러나 사진 사진마다 미아리에 대한 애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옥상 난간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는 개를 찍어 추억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점집 앞에 제수로 엎어 놓은 돼지 한마리가 비정한 오늘의 현실을 대변했다.

아파트가 미아리를 잠식해가는 사진에서는 작가의 안타까움이 절절했다.

비닐 막을 통해 보이는 꽂집 풍경과 택사스촌 입구를 지키고 앉은 여인, 음습한 유흥가를 지나는 발길들,

가로등이 조는 밤늦은 뒷골목 등 하나같이, 오랜 기억을 불러들이는 쓸쓸한 풍경이었다.



▲미아리2017_32


그는 골목에 대한 애착도 대단하다.

그동안 '국제 골목사진전'과 '골목은 살아있다'에서 보여주었듯이 '골목'에 대한 그의 철학도 남다르다.

그의 지난 사진들은 보지 못했지만, ‘북촌’, ‘사라지는 교남동’을 발표한 것으로 보아 장소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

지난 해 보여 준, '우연한 의도'전과 '미아리 이야기' 모두 장소에 대한 기억의 연장선상이다.

사진 속 공간 공간에는 사람 살아가는 끈적한 인간애가 배어있고, 변해 가는 고향에 대한 연민의 정이 묻어 있었지만,

작가의 시선은 냉소적이었다. 사랑과 미움의 갈등 같은 것이 묻어났다.



▲미아리2018_02


어릴 때부터 살아 온 미아리 전경의 사진에서는 그나마 아련한 향수가 밀려왔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바뀌긴 하지만, 아직은 골목골목의 정취가 남아있었다.

언젠가는 아파트 무리에 밀려나겠지만, 마지막 파수꾼처럼 묵묵히 지키며 기록하는 것이다.

예술 한다며 겉멋 부리지 않고, 그냥 담담하게 바라 본 것이다.

사진에서 만나는 장면은 지나치다 우연히 발견했지만, 늘 찾는 대상이었다.

그 미아리의 아픔을...



▲봄소풍의 추억


아래는 이정환씨 ‘미아리 이야기’ 전시 서문 일부다.

“추석 즈음, 모 교수의 칼럼이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렸다.


그걸 따라 하자면 나에게 "미아리는 무엇인가?"

나에게 미아리는 태어난 장소, 곧 자궁이요, 고향이다.

나에게 미아리는 놀이터요, 나에게 미아리는 삶의 터전이요,

나에게 미아리는 사회성을 키워준 공간이요,

그러고 보니 미아리는 내 삶 그 자체인 거다.

나는 미아리에서 태어나서 55년을 살았다.“



▲전시장에서 강아지를 안고 있는 작가 이정환 (사진작가제공)



이 전시는 충무로 ‘비움갤러리’에서 19일까지 열린다.








 




충무로 '비움 갤러리'에서 열리는 이정환씨 ‘미아리 이야기’사진전에 오래된 추억들이 떠올랐다.
유행가에 나오는 눈물의 미아리 고개가 아니라, 슬프기도, 우습기도 한 “희비쌍곡선”이다.






고등학생 시절 영화에 미쳐, 미아리 있었던 ‘서라벌예대’에 들어가려 안달한 적 있었다.

울 아부지는 “줄만서면 들어가는 딴따라대학 들어가 딴따라 될끼가?”며 어림 반푼어치도 없었다.

그래서 무작정 서울로 도망쳐 할부 책장사를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어눌한 주변머리에 책 판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팔았다 하면 망하는 회사에 풀어, 돌려받느라 혼 줄 난적도 여러 차례다.






친구 자취방에서 잠은 끼어 잤지만, 굶기를 밥 먹듯이 하여 배가 얼마나 고팠는지 모른다.

그래도 틈만 나면 미아리 학교 주변을 기웃거렸다,

고갯길의 중국집에서 공갈빵 하나 사서 간신히 허기를 메웠는데, 그 공갈빵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지금도 공갈빵만 보면 그때 생각이 난다.
사서 고생 하다 결국 집으로 잡혀 갔지만, 몇 달 동안 미아리 주변을 맴돌았던 추억이 새록새록했다.






다른 추억 하나는 20여년 후, 사진에 미쳐 두 번째 야반도주했던 때 이야기다.

인사동 친구들 여러 명이 어울려 마시다, 단체로 미아리 택사스에 몰려 간 것이다.

박ㅇ수 시인 덕에 누린 호사였는데, 정말 죽이더라. 그때 난생 처음 계곡 주를 맛 보았다.

그래서 오래 사는지 모르겠다.

열 명이 넘는 사내와 계집이 발가벗고 술 마신다고 한 번 생각해보라. 생각만 해도 웃음이 절로난다.

이정환씨의 ‘미아리 이야기’가 그만 내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이정환씨의 전시가 열리는 ‘비움갤러리’가 충무로 대한극장 주변에 생겼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사진 한다는 놈이 사진전문 갤러리 위치를 모른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대한극장 주변을 맴돌다 결국은 이정환씨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전시장이 마치 미아리 택사스 촌처럼 어두컴컴했다.

전시장에는 사진가 이정환씨와 성유나씨가 있었는데, 푸르스름한 조명이 좀 야한 분위기를 연출했지만,

전시된 사진들은 그리 야하지 않았다.





이정환씨는 미아리에서 태어나 55년의 세월을 미아리에서 살아 누구보다 미아리를 잘 알고, 추억과 애정 또한 남다르다.

그는 사진가이기 전에 한 때 영화 전문가였다. 30대부터 컴퓨터 그래픽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며 각종 CFCG작업을 했다.

신 씨네와의 인연으로 국내 최초의 CG영화 구미호CG디렉터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가 늦게 사진을 시작해 옛날 기록은 남기지 못했지만, 일찍부터 사진을 했다면, 완전한 미아리 역사를 남겼을 것이다.

그러나 사진 사진마다 미아리에 대한 애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옥상 난간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는 개를 찍어 추억을 상기 시키기도 했다.





점집 앞에 제수로 엎어 놓은 돼지가 비정한 오늘의 현실을 말했다.

아파트가 미아리를 잠식해가는 사진에서는 작가의 안타까움이 절절했다. 

비닐 막을 통해 보이는 꽂집 풍경과 택사스촌 입구를 지키고 앉은 여인, 음습한 유흥가를 지나는 발길들,

가로등이 조는 밤늦은 뒷골목 등 하나같이, 오랜 기억을 불러들이는 쓸쓸한 풍경이었다.






그는 골목에 대한 애착도 대단하다.

그동안 '국제 골목사진전'과 '골목은 살아있다'에서 보여주었듯이 '골목'에 대한 그의 철학이 남다르다.

그의 지난 사진들은 보지 못했지만, ‘북촌’, ‘사라지는 교남동’을 발표한 것으로 보아 장소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

지난 해 보여 준, '우연한 의도'전과 '미아리 이야기' 모두 장소에 대한 기억의 연장선상이다.





사진 속 공간 공간에는 사람 살아가는 끈적한 인간애가 배어있고, 변해 가는 고향에 대한 연민의 정이 묻어 있었지만,

작가의 시선은 냉소적이었다. 사랑과 미움의 갈등 같은 것이 묻어났다.






어릴 때부터 살아 온 미아리 전경의 사진에서는 아련한 향수가 밀려왔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바뀌긴 하지만, 아직은 골목골목의 정취가 남아있었다.

언젠가는 아파트 무리에 밀려나겠지만, 마지막 파수꾼처럼 묵묵히 지키며 기록하는 것이다.

예술 한다며 멋 부리지 않고, 그냥 담담하게 바라 본 것이다.
사진에서 만나는 것들은 지나치다 우연히 발견했지만, 늘 찾는 대상이었다.

그 미아리의 아픔을...






아래는 이정환씨 ‘미아리 이야기’ 전시 서문 일부다.

"추석 즈음, 모 교수의 칼럼이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렸다.
그걸 따라 하자면 나에게 "미아리는 무엇인가?"
나에게 미아리는 태어난 장소, 곧 자궁이요, 고향이다.
나에게 미아리는 놀이터요, 나에게 미아리는 삶의 터전이요,
나에게 미아리는 사회성을 키워준 공간이요,
그러고 보니 미아리는 내 삶 그 자체인 거다.
나는 미아리에서 태어나서 55년을 살았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6일은 인사동 사람들 만나는 셋째 수요일이다.
우중충한 날씨는 우산을 폈다 접었다 바쁘게 하지만,
곳곳에서 반가운 분의 환한 웃음을 만날 수 있었다.






'갤러리 이즈'에서 나오는 미술평론가 박영택씨를 만났고,
영화감독 이정황씨와 산악인 반민규씨를 길거리에서 만났다,






낙원동 ‘유진식당’에서 ‘통인가게‘ 김완규씨와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씨,

기업은행 김재수 지점장, 사진가 정영신씨를 만나 냉면에 소주 말아 마셨다.
오라는 사람은 없어나 갈 곳은 많아 퍼질 수는 없었다.






'갤러리H'에서 열리는 유혜정씨의 ‘색은 속삭이다’를 보러가야 했다.
제목이 야시시한 냄새를 풍기지 않는가?
마음 설레며 그림을 둘러보고, 유혜정씨의 미소도 찍었다.






‘유목민’에 들렸더니, 낮에 조햇님 선거사무소에 같이 갔던
사진가 이정환씨와 성유나씨도 있었고,
길에서 만났던 이정황감독과 김이하, 이산하시인을 만났다.






그런데 안쪽에는 오래된 사우 배병우가 아니라 배병수씨가 있었는데,
몇 년 만에 만나는지, 계산이 되지 않았다. 살아 있으니 만나는 것이다.
오래 전 부여에서 벌인 정액페인팅을 그는 영영 잊지 못할 것이다.






인사동 귀신인 불화가 이인섭씨와 전활철, 유진오씨 등

올 때마다 만나는 사람들이지만, 더 이상 술잔을 나눌 수가 없었다.
술 땡기는 이 꿉꿉한 날, 구경만 해야지만 어쩌겠는가?

반가운 사람 만나 사진 찍는 것으로 만족할 수 밖에...






그 사람들 떠나고 나면, 인사동이 인사동일까?
인사동보다 사람이 더 좋은 이유다.



사진, 글 / 조문호








































구의원에 출마한 아들의 당선여부에 앞서, 요즘 구의회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다.
그동안 중앙정치에만 관심 가졌지, 지방의회는 무관심했던 것도 사실이다.
모든 게 아래서 부터 시작되는데 말이다.






지난 16일은 사진가 이정환씨가 조햇님 선거사무실을 방문하기로 한 날이다.
약속 시간에 맞추어 나갔는데, 아들 혼자 선거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한사람의 유권자라도 만나야 할 후보가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이정환씨를 기다리는 동안 선거운동을 하며 겪는 여러 가지 이야기도 들었다.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이 선거운동에 따라 붙는 돈이었다.
아무리 돈 없이 몸으로 부딪힌다지만, 꼭 들어가야 할 돈도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애비란 사람이 돈 한 푼 없는 거지라 전혀 도움을 줄수가 없었다 






햇님이란 이름을 잊지 않고 반겨주는 분이 많아 힘이 솟는다고도 했다,
어떤 분은 아들처럼 친근하다며, 각별히 사랑해 주시는 분도 있다는 것이다.






은평 라선거구 구의원 후보 등록자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여당에서 문제 있는 후보도 공천하였다기에 ‘중앙선관위’ 사이트에 들어가
구의원 후보 등록자의 신상을 살펴보았다.






세명의 구의원을 뽑는 은평 라선거구에는 ‘더불어 민주당’에서
강희범(45), 오덕수(60), 강용운(53) 세 사람이 나왔고,
‘자유한국당’에서 황재원(50), ‘바른 미래당’에서 김길성(59),
‘정의당’에서 조햇님(42) 등 모두 여섯 명이 등록되어 있었다.






후보들의 신상을 살펴보았는데, 학력이 중졸인 사람이 세 사람이나 있었다.
학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의 교육환경에서 그런 분을 찾기도 싶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전과가 있는 분도 두 사람이나 있었는데, 대개 돈 있는 사람이었다.
문제있는 그 두 사람이 집권당에서 공천한 후보라는 것도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모든 게 집권당 공천만 받으면 안전 빵으로 당선될 수 있는 선거구조의 모순에 있는 것이다.






국회의원의 하수인으로 전락하여 거수기 노릇이나 하는 기초의회의 문제점은 개선될 수 없을까?
폐지되어야 할 기초의원 정당공천제를 폐지하지 않으니, 이젠 유권자들이 생각을 달리 할 수밖에 없다.
이제부터라도 정당을 보고 후보를 선택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
지역에 거름이 될 수 있는 후보의 사람 됨됨을 살펴 신중하게 뽑기 바란다.






선거사무실을 잘 못 찾겠다는 이정환씨의 전화를 받아 나가보니,
사진하는 후배 성유나씨와 함께 오고 있었다.
다리도 불편한 분이 먼 길을 마다않고 찾아주니 고맙기 그지없었다.


힘내라며 박카스까지 사왔는데,

초년병에 불과한 후보라 여러 가지 자문도 해주고 격려의 말도 주었다.

SNS 홍보를 위해 기념사진도 찍었다.






많은 분들의 도움에 보답하는 길은 최선을 다해 당선되는 길 뿐이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되겠지만, 멋지게 한 판 붙어보자.
조햇님 파이팅!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3일 정오 무렵, 사진가 이정환씨의 ‘우연한 의도’가 열리는 '갤러리 브레송‘을 찾았다.
이정환씨의 사진은 처음이라 궁금하기도 했지만,

‘우연한 의도’라는 상반된 제목과 함께 페북에 올린 사진 한 장에 끌렸던 전시였다.

일이 있어 개막식엔 못 들리고, 그 이튿날 이른 시간에 찾았는데, 마침 이정환씨도 있었다.






먼저 작가노트부터 읽어 보았는데, 첫 문구에 ‘삐딱이 기질이 다분하다’는 글이 눈에 들어왔다.

다큐멘터리 사진가의 문제의식은 당연한 것이지만, 사진을 둘러보니 공감되었다.

무차별적인 도시개발에 대한 분노가 곳곳에 도사렸다.





그의 지난 사진들은 보지 못했지만, ‘미아리 이야기’, ‘골목은 살아있다’, ‘북촌’, ‘사라지는 교남동’

등을 발표한 것으로 보아 도시재생 문제에 따른 장소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진듯했다.

사진에 나타난 공간들은 대부분 우연히 발견한 것이라지만, 늘 찾아왔던 대상이라 의도된 사진이나 마찬가지다.






추억의 공간이기도 했던 ‘동대문 운동장’ 자리에 마치 우주선같이 버틴 DDP건물 찍은 사진 한 장이 모든 걸 말해주었다.

이질적으로 보이는 서울시청사 역시 유령도시처럼 보였다.





어릴 때부터 살아왔다는 미아리 전경의 사진에서는 그나마 아련한 향수가 밀려났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바뀌어 가긴 하지만, 아직은 골목골목의 정취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멀리 버티고 있는 아파트 무리가 점령해 오면 그마저 끝이라는 듯 코딱지 같은 건물들이 겁먹은 듯 웅크리고 있었다.






그의 전시는 망가진 서울만 찍은 것이 아니라, ‘표석을 찾아서’, ‘기억’, 아일랜드‘ 등 네 가지로 분류되고 있었다.

그 중 제주도에서 찍은 ’아일랜드‘는 평범한 풍경이었지만, 4,3의 원혼이 떠도는 듯 분위기가 을씨년스러웠다.

카메라를 잡은 사진가의 마음에서 일었던 느낌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그는 풍경조차 삐딱하게 보고 있으니, 타고 난 삐딱인 것 같았다.

모든 사진에서 사라짐에 따른 회한이 서려있었다.







그런데, 이정환씨의 이력을 살펴보니 유별났다.

영화제작자에서 칼럼리스트 등 다방면에 재능을 갖고 있었다.

더구나 영화에서는 컴퓨터 그래픽 1세대라고 했다. 그러니 사진적 대상을 보는 카메라아이도 남다를 수밖에 없다.


망가짐에 대한 아쉬움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의미 있는 전시가 될 것 같다.





전시장에서 김남진관장을 비롯하여 오윤석, 강레아씨를 만나기도 했는데,

밥 먹으러 가자는 이정환씨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따라갔다.

전시장에서 와인도 몇 잔 얻어 마셨는데, 소주를 두병이나 깠으니 낮술로 좀 과하지 않나 싶었다.





밖으로 나오니, 아직 살아남은 박근혜잔당의 발악하는 스피커 소리에 귀 고막이 터질것 같았다.

너무 시끄러워 무슨 소리인지도 모를 지경이었는데, 이런 소음은 법에 걸리지 않나?

미제를 너무 좋아해, 차에 달고 다니는 성조기도 꼴볼견이었다. 분명 정신병자들 같았다.



 


액자집에서 전시 준비에 바쁜 박종우씨를 만났고,

다시 전시장에 들려 석현혜, 김동진, 이재갑씨를 차례대로 만났는데,

뜻밖에도 정영신씨가 등장했다. 일이 있으면 서로 연락할 때가 많지만,

이처럼 우연히 만날 때도 더러 있는 걸 보니 소통에 다소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반갑기도, 술도 거나해 빌어먹는 너스레를 좀 떨었더니, 그가 대꾸하는 애교가 정겹다.

“제발 아는 체 좀 하지 마세요” 아는데 어찌 모른 척 하리오.





그나저나 작가의 형편이 여의치 않아 팜프렛도 만들지 못했는데, 술까지 얻어먹었으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뒤늦게 들은 이야기지만, 몇 점이라도 팔렸다니 다행이다 싶다.





이 전시는 31일까지 열리니, 한 번 들려보면 좋겠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3일의 인사동은 초가을에 접어든 수요일이라 그런지 전시장마다 사람들로 넘쳤다.
난, 전시 열림식에 가야 할 곳도 한두 군데 아닌데다, ‘유목민’에서 사진인과의 모임도 있었다.

문제는 전시 오프닝이 대부분 비슷한 시간대라는 거다.

연락이 와 인사차 들리지만, 다들 사진 찍어 주기를 바라니 작품만 보고 나올 수도 없다.

바삐 인사동 거리를 가다보니 화가 김구씨도 바삐 지나간다. 나만 바쁜 것이 아닌 것 같다.





먼저 ‘갤러리 라메르’에서 열린 설숙영씨의 도예전과 네팔드림팀 그림전, 장흥래씨 인물전을 차례대로 들렸다.

눈도장과 함께, 사진 한 두 컷 찍고 빠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는 ‘인사아트프라자’에서 열리는 강찬모 초대전에 들렸다.

그곳은 대부분의 손님들이 빠져 나가고 아는 분으로는 작가 강찬모씨와 신성준선생, 노광래씨 뿐이었다,





작품을 보려고 작정했던 ‘나무화랑’의 최경선씨 전시에 서둘러 달려갔다.
이미 김진하관장과 장경호를 바롯한 화가들이 뒤풀이에 가려 내려오고 있었다.

다들 ‘낭만’으로 가자지만, ‘유목민’에서 기다리는 분들 때문에 갈 수 없었다.




‘유목민’에 들렸더니 사진가 김문호, 이정환, 최승희씨가 와 있어 반갑게 술잔을 나누었다.

이정환씨가 준비해 둔 11도짜리 다랭이 막걸리가 별로 독하지 않아

이런 저런 이야기 나누며 홀짝 홀짝 맛있게 마셨다.





마침 강찬모씨 뒤풀이도 ‘유목민’이라 고중록, 김명성, 조해인, 조준영,

이명희, 최유진, 강경석, 조명환, 임태종씨 등 많은 분들이 옆자리에 있었다.

반가운 분들 인사 나누느라 바빴는데, 뒤늦게 주인공 강찬모화백이 등장나자,

화가 이인섭, 전형근씨, 그리고 구로구청장인 이성씨도 나타났다.




그런데 술이 슬슬 취하기 시작했다. 마구초로 다독였으나 소용없었다.

정영신씨가 나타나자 찍던 카메라 내 맡기고 줄행랑쳤다.

도저히 지하철을 탈 수 없을 것 같아, 김명성씨에게 택시비까지 구걸해 집에 왔다.




집에 들어오자 말자 큰 대자로 뻗어버렸는데, 다시는 11도 막걸리 먹지 말아야겠다.
난, 역시 소주 체질이야!

사진, 글 / 조문호



























































정선다녀 온 여독이 간신히 풀린 지난 10일 정오 무렵,

무의도촌장 정중근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서울역 맞은편에 있는 대우빌딩 지하 식당가로 내려오라는 전갈이었다.

더위를 날려버릴 시원한 냉면을 그리며 달려갔다.

조수빈 명창과 와 있었는데, 식당마다 손님이 줄을 서 있었다.

간신히 들어간 곳은 냉면대신 초계국수를 시켜야 했다.






그런데 아프리카에서 시베리아로 넘어 온 기분이었다.

후덥지건한 쪽방에서 벗어났으나, 이곳은 간까지 서늘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추워져 빨리 나가고 싶었다.
벌벌 떨며 국수를 어떻게 먹었는지, 나중엔 다리까지 저려왔다.

어찌 사람이 이렇게 간사한지 모르겠다,






저녁 무렵엔 인사동으로 바람 씌러갔다.
몇 일전 정선 집에 ‘유목민’의 전활철씨가 다녀간 적이 있었는데, 깜빡 옷을 두고 간 것이다.

옷을 돌려준다는 핑계였지만, 술친구가 그리웠던 게 솔직한 심정이다.





입구에는 이행자시인과 ‘민주화기념사업회’ 이종률씨가 마주 앉았고,

옆에는 판화가 강행복씨와 정동용시인이, 상만 달리한 채 함께하고 있었다.

강행복씨의 전시가 '나무화랑'에서 열리고 있다는 소식도 접했다.

한 쪽에는 공윤희씨가 묘령의 여인들을 대동하고 있었다.






안쪽 자리에는 사진가 이정환씨와 ‘유신의 추억’을 만든 이정황감독도 보였다.
테이블에 소주 병이 일곱 개나 늘린 걸 보니, 어지간히 마신 듯 했다.

같은 찍사 입장이라 서로의 사진을 찍기도 했다. 오늘의 기억이, 오늘의 기록이라며...






정동영시인은 내가 잊고 있던 일을 주지시켜 주었다,

인사동 사람들이 만나기로 한 셋째주 수요일이 다음 16일이라는 것이다.

어떤 반가운 사람을 만날지 벌써 기다려진다. 술값으로 신사임당 한 장 쯤은 꼬불쳐 두어야겠다.






맞은편에 앉은 강행복씨가 정동용시인의 시 ‘가시고기새’를 기억하자 정시인 입이 쩍 벌어진다.

그는 한 때 인사동에서 ‘시인학교’란 카페를 운영해 교장선생님으로 통했는데,

돈 안 되는 시로 다 말아먹고, 지금은 노가다 판에 전전하지만, 시인으로서의 자부는 대단하다.






사실상, 돈이 많으면 돈의 포로가 되니, 없는 것만 못하다.
어디, 돈 많아 얼굴에 개기름 번지르한 예술가를 본 적 있는가?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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