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저리 살다 보니 잊어버린 지가 한 참된 고향에 들리게 되었다.

 

지난 20일 부산에서 열린 최민식 선생 10주기 심포지엄 가야 하는데,

열차표가 매진되어 부득이 고물차를 끌고 가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차도 불안하지만, 나 역시 걸어 다니는 송장이지만 어쩌겠는가!

 꼭 가야 할 일이기도 하지만, 호텔 방까지 잡아 두었다는데...

평생을 천운에 맡기고 살아온 내가 새삼 걱정할 게 무언가?

걷는다면 오백 미터도 못 가지만, 차만 있다면 다음날 죽더라도 어디엔 들 못 가겠는가?

정동지 더러 ‘지루하지만 멋진 드라이브가 시작 된다는 안내맨트를 날린 것까지는 좋았는데,

 불알처럼 차고 다니던 카메라 주머니를 두고 와 버렸다.

이미 시가지를 벗어났으나, 그냥 갈수는 없었다.

 

되돌아가 다시 네비를 보니, 도착시간이 심포지엄 시작 시간보다 15분 늦었다.

연료 넣으러 휴게소에 잠시 들렸을 뿐, 도착시간 줄어들기만 바라며 냅다 밟았다.

단속 카메라 피해 다니느라 졸음 올 겨를도 없었다.

통행료 계산할 시간마저 아끼려고 하이패스로 빠져버렸는데, 정확하게 15분 늦었다.

 

지금 다시, 최민식을 바라보다는 타이틀로 열린 심포지엄은

이광수교수의 최민식 사진의 작품성: 평론가와 대중의 평가 차이를 중심으로발제로 열리고 있었다.

사진가 이동근씨의 사회로 진행된 패널로는 사진가 김문호, 문진우, 강제욱씨가 나와 있었다.

오기 전에 발제문을 보아 내용은 알고 있으나, 귀가 어두워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옆에 앉은 정동지 메모 글을 넘겨보며 짐작할 뿐 자리만 지킨 것이다.

끝날 무렵에는 나 더러 무슨 말을 하라는데, 귀만 어두운 것이 아니라 입도 벙어리나 마찬가지다.

더구나 관중공포증이 있어 사람의 눈만 마주치면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벙어리 가슴 앓는 소리 몇 마디 지껄이긴 했지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조차 없다.

 

심포지엄이 끝나고 아구찜 집에서 술 마시는 시간은 좋았다.

이차로 하숙집이란 술집까지 갔는데, 술 맛나는 이교수 구라에 어찌 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방에 들어가니, 그때 사 누적된 피로가 덮쳐 정신없이 뻗어버렸다.

다음 날은 이 교수 안내로 해운대 달맞이 명물 대구탕 집에 가서 해장하는 호강도 누렸다.

 

행사를 주관한 김정근 감독과의 인터뷰 약속이 있어 김 감독 스튜디오도 갔다.

걱정되는지 이교수까지 옆에 지켜 섰는데, 김감독이 다른 방으로 가시란다.

아마 김감독이 나의 문제점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정동지는 있어도 괜찮다는 걸 보니, 보호자로 여기는 모양이다.

말은 잘 못 하지만, 김감독 묻는 대로 답하니, 어려울 것도 없었다.

놓친 말이 있어 블로그에 다시 글을 쓰기도 했는데, 그래도 할말이 남았다.

언젠가 하늘나라 계시는 선생님께 못다한 편지를 쓰고 싶다.

 

일은 마쳤지만 길바닥에 기름 쏟으며 부산까지 왔는데, 반 본전이라도 뽑아야 하지 않겠나!

인근에 있는 경상도 장을 찾아 가려는데, 하필이면 밀양 무안장에 가 잔다.

어린 시절에도 가본 기억이 있는 무안장은 고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이곳이라고 안 바뀔 수 있겠는가?

정동지는 사람들 만나 이야기를 듣거나 사진을 찍었지만, 나는 차에 자빠졌.

가만히 생각해보니, 무안까지 와서 고향 산소에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장터 마겥에서 소주 한 병과 과자 한 봉지를 샀다.

 

부곡 온천을 거쳐 고향 영산으로 들어오니, 초입의 만년교가 반겼다.

만년교 풍경을 보니 돌아가신 아버지 친구 김형권씨가 생각났다.

김형권씨는 쇠머리대기기능 보유자로 사진을 하셨는데, 주로 민속놀이를 찍으셨다.

삼일문화제를 찾는 아마추어 사진인들을 위해

한복을 차려 입은 어린이나 농부가 만년교를 건너가는 모습을 연출해주기도 했다.

  만년교 위에서 쥐불 돌리는 사진들은 대개 김형권씨 도움을 받아 찍은 사진일 게다.

 

그리고 박만영씨가 운영했던 '녹지사진관'의 진열장에는 항상 가족사진 대신 흑백풍경이 걸려 있었다.

나도 60년대 중반 무렵,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구입한 적이 있었다.

사진도 사진이지만 텅스텐  전구를 터트리는 텅스텐 스트로보가 멋 있었다. 

친구들 기념사진이나 찍으며 폼 잡고 다닌 것이다.

찍은 흑백필름을 박만영씨 사진관에 맡겼는데, 그 때 암실을 살펴 본 기억이 난다. 

 서정적인 농촌풍경을 많이 찍으셨는데, 그 사진 원판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60년대 초반 창녕경찰서장으로 계셨던 이봉하씨도 사진을 찍었다.

이봉화씨는 주로 백로사진을 많이 찍으셨는데,

한 번은 관용차 타고 늪에 사진 찍으러 가다 엠비시 기자한테 걸려 혼이 나기도 했으나, 

정년 퇴임하여 '사협' 이사장까지 하셨다. 

 

영축산 아래턱의 대암골이라 불리는 산소는 본래 감나무 과수원이었다.

감나무는 고목이 되어 다 넘어졌으나, 지팡이 짚고 버티던 제실마저 넘어지고 없었다.

 

몇 년 만에 왔는지 기억조차 아련하니, 조상님께 어찌 고개 들 수 있겠는가?

언제나 감싸주시던 할머니부터 술 한 잔 올렸다.

마음으로 빌었으나,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힘들게는 살지만 하고 싶은 일 하며 잘 산다고 말씀드리고.

산소에서 뵙는 건 마지막이 될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몇 년 만에 고향을 찾았다.

그것도 함안에 대목장 찍으러 간 김에 들린 것이다.

가끔 구마고속도로를 거쳐 갈 때도 있었지만

시간에 쫓겨 그냥 지나칠 때가 더 많았는데,

이날은 고향인 영산도 장날이라 작정하고 찾아나선 것이다.

 

 

 꼭 가보고 싶은 곳도 있었다.

죽기 전에 꼭 한 번 찾아 보아야 할 숙제처럼, 마음 깊이 자리잡고 있었다.

함박산 약수터는 어릴 때 약수 길러 다니기도 했지만,

약수터 옆에 있던 여관의 아름다운 추억을 잊지 못해 서다.

 

영축산에서 내려다 본 영산시가지 전경 / 2019.8 촬영

 

청년시절 애인과 고향을 찾아 그 여관 이층방에 묵었는데,

아침에 눈을 떠보니 열어놓은 창문으로 벚꽃이 날아들어 꽃방이 되어 있었다.

몸 위에 흩 뿌려진 그 꽃잎의 행복감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모든 것은 바뀌었다.

돌길은 시멘트 포장으로 바뀌었고, 여관은 오간데 없고 절집만 버티고 있었다.

약수터에서 내려다 본 읍내 풍경도 예전과 딴 판이었다.

 

누군 ‘산천은 유구한데 인걸은 간대 없네’ 라고 한탄 했다지만,

산천도 인걸도 다 바뀐 살풍경이었다,

 

약수터에 물통은 줄지어 기다리는데, 물이 없는지 병아리 눈물처럼 찔찔나왔다.

지켜 선 아낙의 선심에 약수 한 잔 얻어 마실 수 있었는데. 역시 물맛 하나는 죽였다.

즐겨 드셨던 아버지 산소에 약수 한 병 떠가고 싶었으나,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내려오다 석빙고 주변을 정비해 놓아 석빙고도 들려 보았다.

어린 시절엔 그 곳이 놀이터가 아니라 공포의 대상이었다.

한 밤중에 석빙고에 들렸다 오는 것에 내기 걸 정도였으니까... 

 

잔디밭을 넓게 조성하여 마치 왕릉처럼 만들어 놓았는데,

석빙고 문이 잠겨 창살 틈으로 살펴 보아야 했다.

천정을 비스듬히 쌓은 석축의 장중하고 우아한 자태는 여전했다.

남산아래 만년교 석축과 연관은 없는지 모르겠다.

 

영산 만년교 2019. 8 

 

시간이 없어 함께 간 정영신씨만 장터로 가고

혼자 영축산 중턱에 있는 대암골 산소에 찿아갔다,

고사 직전에 있는 과수원의 감나무 가지는 내 눈을 찌를 것 같았고,

무너진 석축은 가슴을 후벼 팠다.

 

할아버지 할머니께 술 한 잔 올려 드리고,

아버지 무덤 앞에 엎드려 마음의 빚을 다 토해냈다.

아버지 옆에 묻지 말라는 어머니 말씀을 거역하지 못해 정선에 모신

이 못난 자식이 얼마나 원망스러웠겠는가?

아버님! 이 불효자식을 부디 용서하십시요.

 

얼마 전 병원에서 조직검사 한다기에 불길한 생각이 들었는데,

어쩌면 살아생전 마지막 사죄일지 어찌 알겠는가?

생전에 잘 모셔야지 돌아가시면 다 헛것인줄 알건만,

죄책감에 의한 스스로의 위안인걸 어쩌겠는가?

 

기약 없는 발길을 돌려 찿아 간 장터는 이미 파장이었다.

흥청대던 옛 장터의 정취는 사라진지 오래지만,

낯선 상인들만 마지막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게 다 바뀌었지만, 딱 하나 남은 것도 있었다.

 

바로 싸전 입구에 세워진 종탑이었다.

종탑이라 불렀지만, 싸이렌이 울리던 철탑이었다.

통금이나 반공 훈련 때나 울었지만,

옛 추억이 배어 있는 유적의 파편이었다.

 

돌아오는 길가 연지 못 위로 석양이 넘어가고 있었다.

물가에 노는 물오리마저 처량해 보였다.

 

"처량한 내 신세에, 네 신세마저 처량한 것이더냐?"

 

사진, 글 / 조문호

 

(1982, 창녕 영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코로나19'와의 전쟁으로 작년에 이어 올 해도 여전히 어려운 한 해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 같이 힘 모아 전염병과 적폐를 함께 청산하는 힘찬 한 해가 되길 기원합니다.

 

조문호 올림

박원순씨 죽음으로 눈물도 채 마르지 않았는데, 형수님께서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접했다.

고향인 창녕 영산에서 장례를 치루지 않고, 마산 '신세계 요양병원 장례식장'에서 치룬 다기에

부랴부랴 창원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고, 신용희씨

큰 형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혼자 3남매를 키우느라 평생 고생만 하셨다.

이제 자식들이 출가해 손자까지 장성했는데, 좀 살만하니 돌아가신 것이다.

인자하셨던 큰형이 돌아가신 지도 어언 반세기가 지나버렸다.

연탄까스가 새어 나와 부산에서 세상을 떠나셨는데, 생전의 형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다들 고향을 등졌지만, 장남인 조봉래가 형수님을 모시고 고향을 지켜왔다.

영축산 중턱에 자리 잡은 대암골 산소를 돌보며 고생스럽게 살았는데,

생전에 찾아뵙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가슴을 짓눌렀다.

 

나보다 열 살이나 많은 팔순은 넘겼지만, 너무 안타깝게 돌아가셨다.

사경을 헤매면서도 회생하기 어렵다는 의사 말이 들렸는지, 눈가에 눈물이 베어나왔다고 한다.

 

지난 14일 오후4시 무렵에야 창원역에 도착했는데, 눈물인양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장례식장에는 상주인 조봉래, 노정숙내외, 조영래, 조봉숙과 하희성 내외,

손자인 조한슬. 조한길, 하현종, 하민종 등 오랜만에 보는 친지들이 모두 모여 있었고,

인천에서 내려운 형님 조정호씨와 조카 조웅래도 와 있었다.

 

그 날 뜻밖에 반가운 분도 만났다.

세월이 너무 흘러 기억조차 아리송했지만,

부산 에덴공원 시절 가깝게 지낸 하재을씨가 옛 기억을 끄집어내도록 만들었다.

요즘에는 하단에서 토얼당이라는 골동품상을 운영한다고 했다.

 

내일 일정에 발인도 지켜보지 못한 채 돌아왔으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시신은 화장하여 '함안 하늘공원'에 모신다고 했다.

 

부디, 그리웠던 형님 만나 편안이 영면하시길 바랍니다.

 

사진,/조문호

 

 




양재동에서 ‘진주청국장’ 밥 장사하는 조영희 누님께서 엊그제 팔순을 맞았다.
옛날 같으면 고려장에 들 연세지만, 아직도 주방에서 고군분투하신다.
한 평생을 진주에서 여의도로, 양재동으로 옮겨가며 청국장만 끓여 왔다.
이제 딸 박홍전이에게 식당을 맡겨놓고, 주방에서 맛만 지키신다.
한편으론, 그 지긋지긋한 일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사니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팔순을 맞아 점심이라도 같이 먹자는 연락을 받았는데, 가게 옆 일식집으로 오란다.
‘진주청국장’은 손님이 많아 편하게 드시지도 못하지만, 외식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것도 전 가족이 모이는 팔순잔치가 아니라, 남매만 모이는 오붓한 자리였다.
형님 조정호와 동생 조창호, 조카 조아라, 동지 정영신씨 등 여섯 명이 함께 한 것이다.
작은 누님은 몇년 전 돌아가셨으나, 여동생 조옥희가 급한 일이 생겨 오지 못했다.






평소에는 만나기 힘든 형님께서 나와 반갑기 그지없었는데, 지난 년 말 퇴임 하셨단다.
팔순을 이년 남겨두고 일손을 놓았지만, 시원섭섭한 모양이시다.
재벌총수 댁 집사로서 남의 살림을 도맡아 살다보니, 식당 누님처럼 변변히 노는 날도 없었다.






누님과 형님께선 돈 걱정 안하고 살지 모르지만, 내가 볼 때는 불행하기 짝이 없었다.
좋아하는 취미생활 한번 즐기지 못한 채, 평생 돈에 끌려 다닌 게 아니던가?
동생 창호는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며 산전수전 다 겪었으나,
이젠 교회에 열심히 다니며, 생활에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사실, 우리가족은 노는 데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들이다.
형님은 젊은 시절엔 한량이었다. 사교 춤과 당구 등 재주가 다양한 분이라 말씀드렸다.
“이젠 ‘완 투 쓰리 카바레”도 가시고, 당구장도 열심히 다니며 즐겁게 사시라”고...






아직도 철이 안 들었다고 탓할지 모르지만, 돈은 없어도 내가 제일 잘 살았다.
나처럼 꼴리는 대로 살기가 쉽지 않은 세상이 아니던가?
가족을 고생시킨 무책임은 면할 수 없지만, 오히려 돈의 노예가 되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팔순을 축하하는 술잔을 들며 나눈 대화는 요즘 사는 이야기는 뒷전이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추억을 먹고 산다 듯이, 다들 옛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어린 시절의 잊을 수 없는 사연들이 줄줄이 나왔는데,
한국전쟁 때 불바다가 되었던 고향, 영산 이야기도 나왔다.






낙동강전투의 마지막 방어지역인 영산은 피비린내 나는 전장의 한 복판이었다.
내 나이 세 살 때라 기억이 흐릿하지만, 딱 한 가지만 생각이 또렷하다.
남산 밑의 미나리꽝을 지나가는데, 총 맞은 군인이 엄마 치맛자락을 잡고 물 달라 통사정하고,
옆에 선 군인은 그냥 가라며 총부리로 위협했다.





등에 업힌 나를 돌려 업고 도망치던 엄마의 거친 숨소리는 아직도 생생하다.
왜 위험한 전쟁터를 지나가야 했는지 이해되지 않았는데. 가게 된 사연을 누님께서 들려주었다.






식구들은 모두 안전한 곳으로 피난하였는데,
동네가 불바다가 되는 바람에 집에 숨겨 둔 패물이 걱정되어 가셨다는 것이다.
당시 도정공장을 운영할 때인데, 쓰임세가 큰 아버지 몰래 자식들을 위해
패물을 사모아 두었다는데, 그게 걱정되어 가지러 가셨다는 것이다.
좌우지간, 그 놈의 돈이 무엇이기에 목숨까지 걸어야 했는지 모르겠다.






다음에 시간나면 녹음기 챙겨 다시 와야겠다.
누님 돌아가시면,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가족사는 영원히 파 뭍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젠 형님이 한가해졌으니, 정선 만지산에 계신 엄마 산소에서 봄놀이 한번 하자고 제안했다.
가족과의 봄놀이도 이제 몇 번이나 더 할 수 있겠는가?






술이 얼큰하여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차 한 잔 하러 ‘진주청국장’으로 몰려갔다‘
식당은 바쁜 시간이 끝나 한가했고, 조카 홍전이도 한 숨 돌리고 있었다.
이제 오십에 가까운 조카가 시집도 가지 않은 채, 일에 파묻혀 사는 것을 보니 불쌍했다.
술김에, 늙은 외삼촌과 결혼하자는 흰소리를 지껄이며 낄낄대기도 했다.






누님께선 틈만 나면 맥주 드시는 것이 낙인지라 식사에 소홀한 것 같았다.
우야튼, 밥 잘 챙겨 드시고, 백세까지 팔팔하게 사시길 바랍니다.






“노세 노세 젊어 노세”가 아니라 “노세 노세 늙어 노세”로 노래도 바꾸자.


사진 :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삼일혁명 100주년이 되었지만, 아직까지 일제 잔재들이 각계 각층에 똬리 틀고 있다.

대한독립만세을 외친 33인의 순국선열과 일제 탄압을 맞서 싸우신 선열께서 얼마나 통탄하고 계실까?
일제에 부역한 친일세력의 잔재를 밝혀내어 뿌리 뽑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삼일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선열들을 기리는 행사가 지난 26일부터 3월1일까지

서울 청계광장과 광화문, 탑골공원 등 여러 곳에서 펼쳐졌다.






공식적인 행사 외에도 ‘3,1운동 100주년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에서 주최한 ’만북울림 문화제‘와
’3.1민족평화신명천지축전 추진본부‘에서 주최한 ’민족평화신명천지축전‘이 열렸다.





그 중 ’민족평화신명천지축전‘에서 준비한 ‘한겨레 큰 줄당기기’에 관심을 가진것은
고향의 ‘영산줄다리기’가 참여해서다.






'영산줄다리기보존회'를 이끄는 고향 친구인 신수식씨를 비롯하여 차재현, 황태암, 장상록,

김정식, 이일선, 차창규, 조찬호, 이철식, 윤호웅, 김건수, 김홍광씨를 만났다,
그리고 재경 동문인 김상현, 송장식, 이수만씨와 조창호, 김판호, 강판순, 이영태, 김대곤,

하영종, 김진규, 이상국, 배일윤, 이용기씨도 만났다.






그 외에도 ’민족평화신명천지축전‘을 진행하는 채희완, 장순향, 김봉준, 변우균, 안봉모씨를 비롯하여

김정헌, 박종관, 김이하, 정덕수, 정영철, 이수환, 정복수, 하형우, 김문호, 이만주, 김명지. 이희종,

리 반, 손병주, 성기준, 정영신, 여현수씨 등 반가운 분들을 많이 만났다.






그리고 ’만북울림 문화제‘에 참여한 ’몸북‘의 유진규씨를 바롯하여 유홍영, 윤시중, 김기상,

김발렌티노, 안재근, 전형근, 강지수, 양길호, 김종학, 황현성, 장성진, 김선미, 하택후,

홍윤경, 서승아, 서우림, 방관철, 한혜민, 고명희, 한준휘, 홍성표, 최원석, 위다은, 신지은,

김초원, 이소라, 김동효, 양철해, 이창준, 이유현, 이채은, 김태영, 하태웅, 김상인, 이요한,

김현신, 이성희, 최정산,  Ian John, 권제인, 박광선, 손건우, 고은별, 이은주, 윤혜경, 윤지원,

이두원, 최수라, 최수현, 이재돈, 김국원, 안상현, 정기욱, 문숙경씨도 만났다.




'몸북' 단체사진(유진규 페이스북에서 스크랩)



아쉬움이 남는 것은 사진가 박옥수, 최광호씨와 김정숙씨도 만났지만, 미처 사진을 찍지 못했다,
분주하게 돌아 다니느라 차도 한 잔 못 나누었지만, 다들 반가웠습니다.

늘 건강하시길,,,



사진, 글 / 조문호


































































































추석 명절에 대한 즐거움도 나이가 들어가며 점차 시들해진다.


어린 시절엔 꿈에도 그리던 명절이 아니었던가?

명절이 다가오면 모처럼 목욕도 하고, 엄마는 기와장 부순 재로 녹그릇 닦는다고 바빴다.
다들 옷에다 신발까지 새것으로 갈아주어, 완전 케이스 갈이 하는 날이었다.

그리고 먹거리도 지천에 늘렸었다.





들리는 친척 집마다 좋아하는 제삿밥은 물론 푸짐한 음식을 내놓았다.
대암골 산소에 가도 과실이 늘려있었다.

감나무 과수원이었으니, 감은 말 할 것도 없고, 밤, 대추가 주렁주렁 달렸다.






장난 삼아 감나무 밑에 입 벌리고 누워, 형 더러 감나무를 흔들라고 했더니, 진짜 홍시가 떨어졌다,

그런데 입이 아니라 눈에 떨어져, 눈탱이가 밤탱이 된 적도 있었다.
새 옷 버릴까바 얼굴을 풀밭에 비볐던 기억도, 이제 아스라한 추억이 되어버렸네.





어른이 되어서는 명절만 다가오면 걱정이 태산 같았다.
없는 돈에 선물 보낼 곳도 많은데다, 돈 들어 갈 곳이 한 둘이 아니었다. 

또한 고속도로에서 진을 빼버리는, 고향가는 길은 얼마나 힘들었던가?






늙어버린 말 년에는 그래도 은근이 기다려졌다. 좋아하는 제삿밥 생각에...
제삿밥은 탕국을 잘 끓여야 제맛이 나는데,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듯이 정영신씨도 곧 잘 끓인다.
전라도 여자지만, 경상도식 탕국을 제법 맛 낼줄 안다.  단지 박을 구할 수 없어 무우를 넣었지만...

그런데 동자동에 들어가고 부터는 그 좋아하는 제삿밥을 맛볼 수 없었다.






여지 것 명절 차례는 ‘서울역 쪽방상담소’에서 마련한 공동차례로 대신했는데,
소장이 바뀐 올 해부터, 추석날 지내야 할 제사를 삼일이나 앞당긴 21일에 치러 버렸다.

명절이라 직원들도 쉬어야 겠지만, 그렇다면 주민자치회에 제사를 맡겨야 할 것 아닌가?
이건 사진 찍기 위한 제사지, 오갈 데 없는 가난한 주민을 위한 제사는 아니었다.





그래서 이번 추석은 부득이 제사상을 차릴 수 밖에 없었다.

장가간 햇님이도 며느리 데리고 온다는데, 밥이라도 먹여 보내야 하지 않겠는가?

마침 누님께서 제사상에 과일이라도 올리라며 보낸 십만 원이 있어,
정영신씨를 대동하여 녹번동 대조시장으로 장보러 갔다.






물가가 높다는 이야기는 자주 들었으나, 진짜 물가가 장난이 아니었다.

병어 한 마리에 2만원이라, 만 원짜리 생선으로 대체하고,
과일 한 알, 나물 한 줌, 전 조금, 구색만 갖추었는데도, 십만 원이 금세 날아가 버렸다.

제사만 아니면, 식당에서 사 먹는 것이 싸게 먹힐 것 같았다.






다들 귀찮아 그런지, 시장에서 산 음식으로 제사 지내는 사람이 부쩍 많아 진 것 같았다.

대목장이라 분잡 서러웠는데, 나물과 전 부쳐 파는 곳은 장사진을 쳤고,

떡집은 불난 호떡집처럼 소란스러웠다.








정지용 시인의 “녹번리”가 적힌 공사장 가림막도 인상적이었고,
한쪽에서는 상인들의 노래 장단이 신바람을 돋우었다.







언제나 대묵장의 북적임은, 사람 사는 맛을 진득하게 느낄 수 있어 좋다.
물건이 잘 팔려, 돈 세는 장꾼 모습까지 얄미우면서도 정겹더라.
부대끼며 살아가는 서민들의 모습에서 살아 꿈틀거리는 힘이 느껴졌다.






그래도 조상 덕에 제사 밥이라도 먹을 수 있는 것을 고맙게 여겨야 했다.
쪽방에서는 제사 밥은커녕, 라면이나 빵으로 해결하는 사람도 한 둘이 아니다.  






십만 원짜리 제사상이라 초라하지만, 감지덕지다.
제사는 간단히 지내고, 음식은 햇님이 내외와 네 사람이 먹고 나니 깨끗하게 없어졌다.
좀 부족한 듯 했지만, 최고의 추석 상이었다.






이번 추석은 그래도 괜찮은 장사였다.

과일 사라며 보태 준 돈으로 제사까지 지냈으니 말이다.

평소 먹고 싶었던 제삿밥도 먹고, 아들 내외 밥까지 먹여 보냈으니, 괜찮은 장사 아닌가?

또 보름달은 얼마나 예쁜지, 햇님이가 질투할 지경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오랜만에 정영신씨와 함께 34일의 장터 여행길에 나섰다.

동자동에 들어 간 후로 숙박을 동반한 여행은 처음이니, 일 년도 더 된 여행이다.

정영신씨는 그동안 대중교통으로 가는 당일치기로 다녔다.

서로 바삐 살아 시간 맞추기도 어려웠지만, 솔직히 경제적 여력이 없는 것도 한몫했다.


얼마 전 황규태선생께서 동자동에서 고생하는 것을 걱정해 침낭 사라며 주셨는데,

필요 없는 침낭보다 여행경비가 더 절실했다.

한편으론 송구스럽지만 염려하신 것처럼 몸도 마음도 춥지 않으니 염려마시길 바라고,

스스로를 충전할 수 있는 여행이 필요했으니, 양해해 주시리라 믿는다.



돌이켜보니, 10여년이 넘도록 장터를 엄청 쫓아 다녔다.

한 번 떠나면 34일이나 45일 일정으로 떠났으니, 필요경비도 만만찮았다.

하루 밥 한 끼와 군것질로 때우고 싸구려 여관을 전전하며 장돌뱅이 노릇을 했는데,

제일 두려운 것이 기름 값과 통행료였다.

한 참 다닐 때만 해도 경유 값은 또 얼마나 뛰는지, 기름 싼 집 찾느라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녔다.

벌이도 없는 둘이서 길에 돈을 뿌리고 다녔으니, 신용불량자 딱지를 면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사라지기 직전의 장터는 많이 기록해 두었으니, 후회는 없다.


 

둘이서 주구장천 떠 돌아다녔으나, 신기하게도 의견마찰이나 다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생각이 같고 목적이 같으니, 감정의 불씨 같은 건 끼일 틈이 없었다.

그때 다진 동료애가 부부로서의 애정보다 더한 신뢰감을 갖게 된 동기일 것이다.

그토록 금실이 돈독했으나, 난데없는 이혼 소동을 벌여 욕도 많이 얻어먹었다

우리에겐 법적인 부부관계 보다 일이 더 중요했으나, 다들 용납하지 않았다.

합의 이혼에 도장 찍을 때만해도 서로 동의했으나,

주위의 입방아에 정영신씨 마음을 많이 다쳤던 것 같다.


 

그러나 한 해를 지나며 모든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함께 생활할 때 보다 궁핍함도 좀 덜었지만, 동자동 작업까지 진척이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어차피 한 사람은 장터에서 죽고, 한 사람은 쪽방에서 죽을 팔자지만,

살아있는 동안 서로 협력하니, 부부연이나 서로의 일에 하등의 문제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장터여행 이야기도 산더미 같은데, 사적인 이바구가 너무 길어버렸다.


 

지난 4일 출발한 장터여행의 첫 목적지는 함안 군북장이었다.

그 많은 장에서 하필이면 군북장을 제일 먼저 택한 것은, 몇 년 전 남았던 아쉬움도 있지만,

그날 저녁 마산에서 환경사진가 조성제씨의 전시개막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군복장에는 오후 세시 쯤 도착했는데, 이미 파장이 되어 있었다.


 

장돌뱅이 세 사람만 남아 짐을 싸는  흔한 풍경이지만, 여기도 파리만 날린 장인 것 같다.

보따리 보따리에 싼 짐이 몇 십개나 되지만,내일을 기약하는 듯 했다.

옷 파는 박씨에게 얼마나 팔았냐고 물었더니, 다섯 사람 받아 사만원 어치 팔았단다.

사만원 모두 남아도 두 내외 점심값에 기름 값 제하면 아무 것도 없겠지만, 안달하지 않았다.

실속 없는 행상이지만, 행여 단골손님들 헛걸음시킬까 걱정되어 나올 수밖에 없다고 한다.

한편으론 부초처럼 떠도는 장돌뱅이 삶 자체에 대한 애착인 듯 여겨지기도 했으나,

이것이 사라져가는 오일장의 현실인 것을 어쩌랴!



 

차를 몰아 조성제씨 전시가 열리는 마산 경남은행 본점의 갤러리로 옮겼더니,

축하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전시장에는 한경호 경남도지사 권한대행에서부터

교육감 등 내노라 하는 명사들과 기업인들로 가득했는데, 좀 의외였다.

전시 축하하러 누군들 못 오겠냐마는, 마치 세과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개막식이 끝나고 숙소에서 만난 조성제씨의 이야기를 들으니, 한 편으로 이해가 되었다.

경남은행 갤러리의 큐레이터가 조성제씨 초대전을 추진할 때,

은행의 높은 분들께서 어찌 사진을 초대전으로 하느냐며 문제를 삼았다고 한다.

사진을 우습게 보는데 따른 홧김에, 아는 분들을 대거 초대하였고,

최상의 사진 퀄리티를 만들기 위해 돈도 많이 들었다고 했다.


 

아침 일찍 진해 마천장을 돌아, 내 고향인 창녕 영산장을 찾아갔다.

볼 품 없는 작은 장이지만 어릴 적 추억 따라 구석구석을 찾아 보았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예전 장 모습과는 딴판이었지만,

어린시절의 장터 추억을 더듬어 볼 수 있었다.



애들은 가라~ 일단 한 번 자셔보세요. 소변 보면 변기 나프타린이 튕겨나옵니다

너스레를 떨어대던 약장사 자리도 가보았고,

아버지 심부름에 개장국 사러 다닌 장국밥집이 있던 곳도 가보았다.

국밥집은 사라지고 없었지만, 국 쏟을까 조심스레 걷던 골목길의 정취는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기억을 선명하게 한 것은 넓은 싸전 입구에 선 종대로 불리는 철탑이었다.

한 때 싸이렌을 울리기도 했던 종대의 녹슨 형상만이 옛날 장의 상징인 냥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내 머리에 인식된 장터의 규모보다 훨씬 작게 느껴지는 것은

장터에 빼곡하게 늘어 선 자동차 때문인지 모르겠다.


 

오랜만에 들린 고향인지라 영축산 중턱에 있는 대암골 산소에도 가보았다,

제실이 무너져 사라지고 없었는데, 무덤에 계신 아버지의 노여움이 들리는 것 같았다,

몇 년 만에 성묘하는 불효막심에 큰 절 올리며 사죄했다.


 

그 다음에 찾은 장은 합천 초계장이었다.

이 장을 잊을 수 없는 것은, 몇 년 전 병든 남편을 리어커로 모셔 와 장사한 할머니가 궁금해서다.

아픈 사람을 혼자 집에 둘 수 없어 장에서 병 수발들며 장사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돌아가셨는지 걱정되어 인근의 장꾼에게 물었더니, 요즘은 병이 깊어 모셔오지 못하고,

할머니 혼자 나와 한 두 시간만 장사하고 일찍 가셨다고 했다.

장꾼들만 모여 잡담을 날리는 쓸쓸한 장바닥을 돌아보며 자리를 옮겨야 했다.


 

돌고 돌아 찾아간 곳은 전라도 해남이었다.

이장은 큰 읍장이지만, 새벽에 서는 고도리장을 찾아보기 위해서다.

 

해남에 도착하니 어두워져 식당부터 들려야 했는데,

정영신씨가 오래전의 기억을 더듬어 천일식당으로 가자고 했다.

떡갈비로 유명한 집이라지만, 밥값이 장난이 아니었다.

일인당 28,000원이라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몇 일 후에 있을 자신의 생일을 앞당기자는 말에 퍼져 않았다.


 

복에 없는 과분한 식사를 한 덕에 잠은 싸구려 여관에서 자야했다.

두 노인이 운영하는 여관이었는데,

청소한지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방바닥은 머리카락 투성이고,

또 여름용 홑이불은 얼마나 지저분한지 얼굴에 닿을까 염려되었다.


 

그 이튿날은 아침 여섯시에 일어나 고도리장으로 나갔으나

추운 겨울이라 좀 늦게 선다기에, 해남시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장마당은 이른 아침부터 몰려나온 장꾼들로 시끌벅적했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장꾼들의 모습에,

전쟁터인지 장터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자리다툼에 욕지걸이를 퍼 부어며 싸우는 모습에 정신이 번쩍들었다.

도대체 그 놈의 돈이 무슨 요물인지, 억장이 무너졌.

돈에 눈이 멀어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이게 과연 사람 사는 것인가?


 

바닷가에 있는 장흥 회진장으로 이동하였는데, 해변은 조그만 항구로 변해있었다.

관광객을 염두에 둔 듯한 공연장과 낯선 건물이 들어서 있었지만,

손님이라고는 동네사람들 뿐이었다.



그런데 정영신씨가 팔다 남은 병어와 조기새끼를 엄청 싸게 사는 횡재를 했다.

직접 잡은 큰 생선은 경매에 넘기고 잔챙이만 팔았는데, 삼 만원에 한 광주리였다.

동네 사람이 사러왔으나, 자네는 다음에 줄 테니 서울손님부터 드리자며 아이스박스에 담아주었다.

새끼지만 병어고 조기가 아니던가 한 달 반찬거리는 해결할 듯싶었다.


 

그 이튿날은 장흥 용산장에 들렸다.

말이 장이지 장꾼 두 사람만 나온 썰렁한 장터로 머지않아 사라질 것 같았다.

지난 세월의 이야기나 듣기 위해 장터식당에 들렸다.

식당 주인 백외자씨는 김장하느라 양념을 잔뜩 해두었고,

옆자리는 동네 노인 세분이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나와 비슷한 연배인 것 같아 연세가 어떻게 되었는지 물었더니,

신옥성씨란 분의 나이가 여든 하나란다. 얼굴은 나보다 젊게 보였지만, 열 살이나 많았다.

그러면서 나이란 아무 소용없다며 이웃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06세 된 할머니는 멀쩡한데. 치매 걸려 누워있는 아들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이가 들수록 세월이 총알처럼 빠르다며, 인생은 뜬구름 같다는 말씀을 하셨다.


 

백반으로 아침 겸 점심식사를 했는데, 밥상은 온통 김치잔치였다.

백김치, 물김치, 갓김치 등 김치만 네 가지가 나왔는데,

금방 버무린 김장김치도 맛있지만, 갓김치가 너무 맛있었다.

식당주인인 백외자씨는 김치가 맛있다는 칭찬에

엄마가 자식에게 싸 주듯 김장김치와 갓김치를 바리바리 싸 주었다.

이걸 어떻게 그냥 가져갈 수 있단 말인가? 문득 두어 달 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입맛이 없어 후암시장에 반찬 사러 간 적이 한 번 있었는데,

할머니 한 분이 갓김치를 버무려 팔고 있었다.

맛이나 보게 삼천원치만 달라고 했더니, 오천원 어치도 팔 수 없다며 퇴박 주던 야멸찬 모습이 떠올라서다.

그 김치에 비하면 오만원어치는 족히 될 만한 량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고맙게 생각하고 끝날 일이지만, 야박한 현실에서는 그 자체만으로 감동이다.

김치가 연이 되어 정영신씨와 전화번호를 주고받는 친구사이가 되어버렸다.


 

인근에 있는 장흥 장평장으로 발길을 돌렸는데, 이곳도 장터의 기능을 잃어가고 있었다.

폐가들이 줄지어 있는 걸 보니, 이곳에 곧 토목공사가 벌어질 것 같았다.

사람이 없는 장터에 뭘 만든다고 될리 있겠는가?

괜히 나라 돈 축내어 공무원이나 업자들 잇속 챙기는 일만 만들고 있다.

사라져가는 장터의 종말을 보는 것 같은 안타까움에 촬영여행을 끝냈다.



여기까지 왔으니, 땅끝 마을에 가 보자는 정영신씨의 제안에 또 다른 여행길에 올랐다.

땅끝 마을에 닫기 전에 미황사부터 들렸다.

남해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달마산 서족에 자리한 이 절은

20여 년 전 전국의 절 찍을 때 들린 적이 있으나, 그 때보다 요사채가 많이 늘어난 것 같았다.


 

이절의 창건설화도 재미있다.

돌로 된 배가 포구에 왔는데, 사람들이 다가가면 멀어지고 물러나면 가까이 다가오는 일이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의조가 목욕재계하고 맞으니 비로소 배가 포구에 도착했는데,

배에 올라보니 큰 상자 안에 경전과 비로자나불상, 문수보살상, 보현보살상, 나한, 불화 등이 꽉 차 있고,

배 안에 있던 바위를 깨니 검은 황소가 나왔단다.



그날 밤 의조의 꿈에 금의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금강산에 봉안하고자 경전과 불상을 싣고 왔으나 금강산에 절이 가득해 새 절터가 없어 돌아가던 중이라고 했다.

이곳의 지형이 금강산과 비슷하다며, 소 등에 불상과 경전을 싣고 가다 소가 머무는 곳에 절을 지으라" 했단다.

그래서 다음날 소 등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길을 떠났는데, 한 곳에 이르러 소가 크게 울고 드러눕자

그곳에 통교사라는 절을 짓고, 소가 다시 일어나 가다가 마지막으로 머문 곳에 지은 절이 바로 이 절인데,

소의 울음소리가 아름답고, 황금으로 번쩍거리던 금의인의 모습을 기리기 위해 미황사라 했단다.



감로수 한 바가지로 목을 축인 후, 땅끝 마을로 향했다.

몇 년 전 땅끝 마을에 있는 송지장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눈을 맞았던 기억에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땅끝 마을은 백두대간의 시작이자 끝으로 한반도의 기가 가장 많이 뭉친 곳이라

기 좀 받을까 하는 기대도 했다.

마지막 여행지라 정영신씨와 호젓하게 바닷가를 거니는 데이트코스로 정했으나

추위가 분위기를 앞질러 서둘러 끝내야 했다.

서울 돌아 갈 일이 아찔하였으나, 차안에서 데이트한다고 생각하니 지루하지 않을 것 같았다.


 

땅끝 마을에서 기를 받았는지, 추위 속의 강행군에도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맛보는 행복한 여행에 어디 피곤 따위가 감히 넘 볼수 있겠는가?

아무튼, 행복한 장터 여행을 만들어 주신 황규태선생께 감사드린다.

나흘간의 지루한 일기를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게도 감사드리고...

 

사진 : 정영신, 조문호/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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