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게 얼마 만인가?
산소에 조상님을 모셨지만, 고향을 등진지가 어언 십년이 가까워 오고 있다.
한 때는 영산에서 열리는 삼일민속문화제를 기록하기 위해 해마다 다니기도 했으나,

카메라장비를 행사장에서 몽땅 도둑만나면서 그 작업은 중단되었고, 발길마저 멀어진 것이다.


 

 



늘 돈 안 되는 사진 찍느라 고향마저 잊고 살았는데, 지난 13일은 모처럼 기회가 생겼다.

영산초등학교 45회 친구들의 모임이 매년 8월15일마다 고향에서 열렸으나,

광복절행사와 겹쳐 참여하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이틀 앞 당겼기 때문이다.

더구나 안내장에 적힌 이승을 떠난 친구들의 이름 나열에 화들짝 놀란 것이다.

죽기 전에 친구 모습을 한번이라도 더 보고, 기록이라도 남겨야겠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찾았다.

시간이 맞지 않아 고물자동차까지 끌고 내려갔으니, 친구 만나는 대가도 수월찮게 든 셈이다.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한지라 만년교 돌다리를 건너 남산부터 올라갔다.

‘고향 길은 밤에 가도 돌에 채이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오르는 산길이 편안하고 고즈넉했다.

마을 곳곳을 살펴보며 오래된 기억들을 하나하나 떠 올렸다

제일 오래된 기억으로는 한국전쟁통의 희미하지만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울 엄마 등에 업혀 남산 밑 미나리깡 뚝길을 가는데, 총 맞아 피 흘리던 군인이

물 좀 달라며 엄마치마를 부여잡았고, 옆에서는 그냥 가라고 총부리를 흔들었다.

등에 업은 나를 앞으로 돌려 업고, 내 뛰는 울 엄마의 거친 숨소리가 아직까지 벌떡거린다.

 

 

 


 

두 번째 기억은 50여 년 전, 제1회 영산삼일문화제의 기억이다.

올 해로 56회라니 반세기가 지난 일이다. 그 때의 하이라이트도 역시 줄다리기였다.

동부 대장은 아버지가 맡았고, 서부 대장으로는 아버지의 친구인 하점원씨가 맡았다.

우리 집은 동부 팀의 거점이 되어 몇 날을 술과 음식 장만하느라 정신 없었다.

줄다리기 행사를 지금처럼 운동장에서 벌인 것이 아니라 영산 큰 들에서 벌였는데, 줄의 규모도 어마어마했다.

하점원씨는 아버지의 친구지만, 진영을 나누고 부터는 원수처럼 으르렁 거렸다.

장수에게는 말이 제공되었는데, 말을 탄 채 얼마나 치열한 싸움을 했는지,

서부대장의 목검은 두 동강이가 났고, 아버지는 말에서 떨어지는 사태까지 벌어진 것이다.

포수가 쏜 신호탄으로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는데, 마른 논에서 이는 흙먼지와 함성이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곁 줄이 끊어져 내동댕이치는 사람이 여기 저기 생겨나고, 계속 밀리고 당기는 줄다리기가 한 동안 진행되었다.

다들 논 턱에 힘을 실어 버텼으니 쉽게 끌려가지 않았는데, 그 긴박한 순간들은 정말 잊지 못할 장관이었다.

 

 

 


 

옛날에는 보름날 행사로 열린 줄다리기와 쇠머리대기가 독립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삼일문화제에 맞추어 열렸는데,

영산의 지식인이었던 조성국 선생이 계셨기에 올 곧은 전승이 가능했다.

중학생시절에는 국어교사로 계셨는데, 한 번은 “빨갱이라 붙들려갔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잘 아는 아버지에게 여쭈었더니, 별일 아니라 곧 석방될 것이라 하셨다.

문화의 힘으로 대동단결을 이루어내는 리더십이나 영산을 양파 주산지로 만드는 등 훌륭한 일을 많이 하셨다.

한 때는 '민예총' 공동대표를 맡기도 했고, 지역문화와 농업 발전의 양축에 선구자적 역할을 하신 분이다.

 

 

 


 

영산은 서울에 이어 두 번째로 삼일 독립운동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지만, 줄다리기, 쇠머리대기의

중요무형문화재를 비롯하여 구계목도, 문오장 단오제 등 많은 전례 민속놀이의 전승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낙동강전투의 마지막 보루로 치열한 격전을 치룬 곳이라 남산위에는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인간도 아니었던 전두환시절에는, 영산에서 유적을 발굴하다 이변이 생긴일도 있었다. 

전두환 조상 중 한 사람이 영산의 사또로 있다 떠날 때 만들어졌다는 공적비가 하나 출토된 것이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 덕에 남산의 전적비가 세워졌다는 이야기까지 들렸다.

 

 

 


 

세 번째 기억은 남산 밑 냇가에서 물놀이하다, 수식이 형이었던 신쾌식씨로 부터 혼줄 난 일이다.

물웅덩이에 있는 나를 향해 넓은 판지를 던져 물밑에 깔았는데, 헤어나지 못해 허우적거려야 했다,

자칫하면 익사로 연결될 번한 끔찍한 일이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의 기억으로는 연극도 한 몫 했다. 제목은 기억에 없지만, 

국군으로 분한 이순경선생의 절망스런 절규가 너무나도 생생하게 각인되어 남았다.

그리고 친구 조성호가 연지 못가에서 불었던 트럼펫 소리는 애간장을 다 녹였다.

얼마나 낭만적인 분위기에 동했는지, 그 때부터 트럼펫을 제일 좋아하게 되었다.

하금순의 꾀꼬리 같은 노래 소리도 생각났다.

 

 

 



사회에 첫발을 디뎌 ‘농협’에서 일했던 일도 떠올랐다.

'부산농협'에서 '김해농협'을 거쳐 고향까지 흘러들었는데,

애인이 찾아 와 함박산 약수터 여관에서 하룻 밤 지낸 적이 있었다.

자고 아침에 눈을 떠보니, 이층 창문으로 날라 온 벚꽃 잎이 알몸 위에 흩뿌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 녀는 잊었으나, 그 당시의 행복감은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직장의 무료를 달래기 위해 문 닫은 정미소에다 음악감상실을 차렸는데, 주로 시골 교사들이 단골이었다.

주말이면 부산에서 친구들이 몰려 와 날밤을 까기도 했는데, 이런 저런 추억에 빠지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집결지로 정해진 도천면의 ‘한우마당’을 물어물어 찾아 갔더니, 이미 20여명의 고향친구들이 모여 있었다.

구자훈, 김공조, 김이만, 김종석, 김종호, 문영태, 신규식, 신수식, 윤상고, 윤성관, 이상영, 이석중, 이세중,

이수만, 임성택, 조대권, 조성호, 황정철, 김순남, 하금순, 허영숙 등 하나같이 반가운 얼굴이었는데,

나만 늙은 줄 알았으나, 다 같이 늙어가고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대권이가 “이빨이 와 그렇노?”라며 걱정스레 묻길래 “니 웃길라고 몇 개 빼고 왔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개구장이 같은 어린 시절은 오간데 없고, 다들 늙은이가 되어 점잔만 빼고 있었다.

중요무형문화재 일을 보존하거나 전수하고 있는 신수식, 조대권, 김공조를 위시하여

문영태, 윤상고 등 고향을 지키는 고추 친구라고는 다섯 명 뿐이고,

서울, 부산, 마산은 물론, 인천, 구리, 성남, 충남 당진, 전남 영암 등 전국 각지에서 몰려왔다.

 

 

 


 

반가운 친구가 한 둘이 아니었으니, 얼마나 할 말이 많겠는가?

겁도 없이 주는 대로 여기저기 술을 받아 마셨다가 일찍부터 맛이 가 버렸다.

성호와 금순이는 노래까지 불렀으나, 난 이가 빠진데다 목소리까지 쉬어 끼일 군번이 아니었다.

몸 생각하느라 다들 술을 아껴 먹었는지 모두 멀쩡했는데, 성호와 나만 곤드레 만드레가 되었다.

‘꽃은 반만 핀 것이 곱고, 술도 반만 취한 것이 좋다’는 말도 있지만, 그게 잘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해 되지 않는 일이 하나 있었다.

다들 술 마신 후 차를 끌고 가야하는데, 왜 난데없는 도천면에서 모였는지 모르겠다.

대중교통을 이용한 친구들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오랜만에 친구들이 고향을 찾았다면,

고향에서 즐기는 게 좋지 않겠는가? 이 먼 길을 고기 먹으러 온 것도 아닌데 말이다.

예전에는 이차로 부곡온천에 방을 잡아 밤늦도록 놀며 못 다한 아쉬움을 풀었는데,

한 낮에 술자리가 파하니,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게 늙어가는 징표인가?

 

 

 


 

한심한 생각이 들어, 나 혼자 영산의 곳곳을 살피고 다녔다.

예전에 살았던 고향집도 찾아보고, 음악실 했던 정미소 자리도 가보고,

잡초가 무성한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용서를 빌기도 했다.

결국은 부곡온천에 여장을 풀고 독수공방 지냈지만...

 

“친구야! 제발 오래 살 생각만 하지 말고, 재미있게 살아라.”

사진, 글 / 조문호

 

 

 

 

 

 

 

 

 

 

 

 

 

 

 

 

 

 

 

 

 

 

 

 

 

 

 

 

 

 

 

 

 

 

 

 

 

 

 

 

 

 

 

 

 

 

 

 

 

 

 

 

 

 

 

 

 

 

 

 

 

 

 

 

 

 

 

 

 

 

 

 

 

 

 

 

 

 

 

 

 

 

 

 

 

 

 

 

 

 

 

 

 

 

 

 

 

 

 

 

 

[법륜신문]

- 1947년 경남 창녕 출생.
- 1985년 “동아미술제”와 1986년“아시안게임 기록사진공모전”에서 각각 대상을 수상.
- 월간사진 편집장, 한국환경사진가회 회장 등을 지냄.
- 개인전으로 86아시안게임, 87민주항쟁, 전농동 588번지, 불교 상징전, 동강 백성들,

   태풍 루사가 남긴 상처전, 두메산골 사람들, 인사동 그 기억의 풍경 사진전을 가짐.
- 포토에세이집 “동강 백성들”과 사진집 “두메산골 사람들”등을 출판.



어머니를 떠올리면 희미하지만 잊을 수 없는 가슴 떨리는 일이 생각난다.

1950년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이 터져 북한군이 나의 고향인 영산까지 밀고 내려왔을 때의 일이다. 낙동강전투의 최후 보루인 내 고향은 피비린내 나는 전장의 한 복판이 되어 버렸다. 남산에는 유엔군들이 진을 치고 북쪽에 있는 영취산에는 북한군들이 포진하여 서로 포격을 해대니 온 마을이 불바다가 되어 버렸다. 마을 사람들은 살길을 찾아 각자 뿔뿔이 흩어졌고, 우리 가족들은 아버지를 따라 마산으로 피난하였으나 어머니와 나만 떠나지 못한 채 좀 떨어진 시골마을에서 숨어 지냈다.
내 나이 세 살 때였으니 어머니 등에서 겁에 질려 제대로 울지도 못할 때였다. 세월이 한참 지나 들은 이야기지만 그 당시 고향에서 정미소를 운영하여 모은 돈을 어머니께서 이곳저곳 숨겨두었는데, 그것을 미처 챙기지 못해 피난을 떠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며칠후 전쟁 포화가 잠잠해 질 즈음 어머니는 나를 들쳐 업고 총총걸음으로 살던 집을 찾아 나섰다. 온 마을이 불타 재가 된 줄을 짐작하면서도 위험한 전쟁터로 들어간 것이다. 유엔군들이 진을 친 남산 아래 미나리꽝 뚝 길로 지나갈 무렵이었다. 갑자기 피를 흘리고 쓰러진 군인이 “물, 물, 물!”이라 부르짖으며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움켜잡았고, 옆에 선 군인은 그냥 가라며 총부리로 위협하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두려움에 떨던 어머니의 받쳐 업은 두 손이 내 몸을 꽉 조여 왔다. 간신히 군인의 손을 뿌리치기는 하였지만 혹시 뒤에서 총을 쏠까봐 등에 메 달린 나를 가슴에 안고 뛰셨는데, 어머니의 온 몸은 땀으로 흥건히 젖어 흘렀다. 그 때 느낀 어머니의 거친 숨결속의 전율감은 숱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한데, 이것이 내 기억에 가장 오래된 어머니의 초상이다.


전쟁이 끝난 후 우리 집안은 많은 가산을 잃었지만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땅으로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중학생 시절 동안은 아버지가 벌인 사업이 실패하여 끼니를 잇지 못할 어려웠던 시절도 겪었다.
아침밥을 굶고 학교에 가는 자식들이 불쌍해 혼자 눈물 지우시던 어머니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어머니가 자식을 생각하는 애절한 마음일 것이다. 집안 체면에 남에게 어려운 소리 한마디 못하시는 어머니지만 한번은 이웃에서 빌린 쌀로 밥을 지어 도시락을 갖고 학교에 찾아오신 적이 있다.   교실 앞 화단을 거쳐 유리창너머로 살며시 도시락을 내미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너무나 창피한 나머지 어머니에게 버럭 화를 내며 창문을 닫은 불효막심한 짓을 했다. 점심시간에 이웃 형에게 전해 받은 도시락을 까먹으며 남몰래 눈물 흘렸던 그 일은 두고두고 부끄러운 기억이지만, 친구들에게 가난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 사춘기의 내 모습이기도 했다. 한번은 하루 종일 굶어 허기져 있는 자식들을 차마 보지 못한 어머니께서 남의 집 처마 밑에 걸린 보리쌀 삶은 소쿠리를 몰래 들고 나오다 나와 정면으로 마주친 일이 있었다. 나를 보고 어쩔 줄 몰라 당황하던 어머니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여 가슴이 뛴다.
“내가 눈이 뒤집힌 모양이다”면서 보리밥 담긴 소쿠리를 제자리에 갖다 놓긴 하셨지만 한동안 자식 보기 민망해서인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으셨다. 굶주린 자식을 먹이기 위한 모성애에서 비롯된 본능일지라도 어머니께서는 돌이킬 수 없는 크나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엔 구구셈을 외우지 못하거나 공부를 제대로 못하면 잠을 재우지 않고 회초리로 다그치던 완고한 어머니셨다. 그러나 그 일이 있은 이후로는 무슨 죄인이나 된 것처럼 자식이 잘못을 저질러도 큰 소리 한번 안치시는 무기력한 어머니로 변하고 말았다. 자식 앞에서 나쁜 짓을 저질렀다는 죄책감을 평생 동안 가슴에 묻고 살아오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 미어질 것만 같다.

 

어머니는 지금 인천 형님 댁에서 살고 계신다.
세월이 흘러 이제 연세가 아흔 다섯이나 되셨으니, 제발 희미해져가는 어머니의 기억력을 빌어 악몽 같은 지난 일들은 모두 잊으시길 바라지만 너무 크게 마음을 다친 일이라 과연 잊으셨는지 모르겠다.
십여 년 전엔 화장실에서 빨래하던 어머니께서 학교에서 돌아 온 손녀를 반기려다 미끄러져 허리를 크게 다쳤다. 그 후로는 늘 앉아만 계셔야하는 불편한 몸이 되었지만 잠시도 쉬지 않고 이방 저방 기어 다니시며 청소를 하고, 싱크대를 잡고 일어나 설거지까지 하시던 부지런한 어머니셨다.
요즘은 체력이 쇠진하여 아무 일도 못한 채 앉아만 계시지만 가끔 내가 찾아뵈면 일부러 딴청을 부리신다.
“니가 누고? 해나 종덕이 아들 아이가?”
아버지의 이름까지 들먹이는 어머니의 유머에 한바탕 웃지만, 한편으론 자주 찾아오지 않아 아들 얼굴을 잊어버렸다는 뜻이 담겨있어 부끄럽기도 하다. 일어서지도 못하는 어머니를 꼭 껴안으며 “미안합니더. 어무이”라고 나직이 말하면 금세 좋아 “야! 징그럽다. 술이나 한잔도”하시며 분위기를 바꾼다. 평소에 약주를 즐기시어 농담이나 노래를 잘하는 어머니를 위해 형수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술상을 올린다. 그리고는 평소에 어머니가 즐겨 부르시던 노래를 불러 드린다.

“구름 속에 달빛만 엉큼한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당신의 마음도 검구려
한 되 술 이백 원에 취하면 그만이지, 때 묻은 치맛자락 왜 붙드시나요.
막걸리 사랑이란 싸고도 비싸다, 나도 순정은 있어요 사람 괄세 마세요.”
어머니께서는 기분이 좋아 ”야! 구닥다리 노래 말고 내 신식 노래 한번 들어봐라“ 면서 한곡을 뽑으신다.
“예- 삐빠빠 룰라 씨스마루 뻬뻬…”라는 묘한 발음의 노래 소리가 울려 퍼지면 온 집안이 웃음바다가 된다.
엄마를 노래자랑에 내 보내야 한다는 누님의 맞장구에 더욱 신이 나 어깨까지 들먹이신다.

어머니! 이젠 지난일이랑 모두 잊으시고, 오래 오래 노래하며 즐거운 여생을 보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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