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호의 나목’ 그 황량함에 대하여...사진전이 

 96일부터 23일까지 충무로2가에 위치한 아주특별한사진교실에 초대 전시되고 있다.

 

 먼저 나목이란 제목 자체가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온다.

소설가 박완서씨가 나목으로 등단하기도 했지만, 신경림 시인의 시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시각예술로는 박수근화백의 나목에 이어 사진가 임응식선생의 대표작이 줄줄이 떠오른다.

벌거벗은 나무로 벌거벗은 인간을 말한 그 상징성이...

 

1983년 발행한 '한국현대사진대표작선집'에 게재된 임응식선생의 '나목', 글은 고 이명동선생께서 쓰셨다 .

한국전쟁이 발발한 50년대 부산에서 촬영한 임응식선생의 나목은 포화에 불타버린 앙상한 가지에서

희망을 건져 올리려는 당시 시대상황을 대변했지만, 박종호의 나목은 사진으로 쓴 시에 가깝다.

 

박종호는 작가노트에 기다림은 희망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그 시간을 묵묵히 견뎌내며, 조용히 준비하는 것이다. 언젠가 다가올 그 봄을 말이다.

그 때가 오면 앙상했던 나목에는 푸르름이 가득하게 될 것이다.

나목은 우리에게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오히려 모진 겨울 한가운데 서서 그 시간을 인내하라고 한다.

그 속에 봄에 대한 희망을 간직한 채, 그 속에 생명을 간직한 채 말이다.

그렇게 나목은 찬란하게 빛날 그 봄을 기다리고 있다고 적었다.

 

 박종호의 작업노트를 읽다보니, 근원적인 인간의 모습이 나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모두가 나목처럼 벌거벗은 존재로 오지 않던가?

 

 박종호의 사진들은 잎을 모두 떨구고 매서운 추위를 견디는 앙상한 나목을 통해 인간의 삶을 성찰하고 있다.

이미지의 형상성이나 심미감에 앞서 작가의 삶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깔려있는 것이다.

 

아래 적힌 신경림시인의 나목시구처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목은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소외된 자들의 상징이고,

하늘을 향해 길게 팔을 내뻗은 것은 무언가를 간절히 기원하는 인간의 간구일 수도 있겠다.

 

 나무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서

하늘을 향해 길게 팔을 내뻗고 있다.

밤이면 메마른 손끝에 아름다운 별빛을 받아

드러낸 몸통에서 흙 속에 박은 뿌리까지

그것으로 말끔히 씻어내려는 것이겠지

터진 살갗에 새겨진 고달픈 삶이나

뒤틀린 허리에 배인 구질구질한 나날이야

부끄러울 것도 숨길 것도 없어

한밤에 내려 몸을 덮는 눈 따위

흔들어 시원스레 털어 다시 알몸이 되겠지만

알고 있을까 그들 때로 서로 부둥켜안고

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뜨릴 때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전시는 9월 23일까지 열린다.

 

/ 조문호

 

박종호 나목그 황량함에 대하여...’

전시기간 202396-23(12:00-19:00, ,월 휴관)

서울 삼일대로(충무로2)414 신원빌딩 401

아주특별한사진교실’ 02-771-5302

 

 

 

'화사집' 초판에 얽힌 이야기


▲ 표지 화사집 초판 표지
ⓒ 소명출판사



상상속의 동물인지 실존하는지 헛갈리는 희귀본이 있다. 김구 선생이 직접 서명해서 증정한 <백범일지>라든가, 1973년에 나온 신경림 시인의 월간문학사판 <농무>는 구하기는 무척 힘들지만 소장하는 사람이 있어서 구경은 할 수 있다. 근대 서지를 좋아하고 수집하는 사람들조차 존재한다는 것만 알뿐 그 실물은 구경조차 하지 못하고 한탄한 책이 있다. 1941년 오장환 시인이 경영하던 <남만서고>라는 출판사에서 간행한 미당 서정주의 <화사집> 특제본이 그 주인공이다. 

미당 서정주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인 2015년 국립중앙도서관이 <화사집> 특제본을 구입했다고 발표했다. 근대 서지 전문가들조차도 그제야 <화사집> 특제본이 있긴 있었구나 하고 감탄했다. 특제본 <화사집>은 경매에 낙찰된 가격이 무려 1억 원이어서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특제본이란 말 그대로 특별히 제작한 한정판이라는 의미인데 이 사전적인 설명만으로는 <화사집> 특제본의 귀함을 다 담지 못한다.

<화사집>과 시인 오장환

먼저 서정주의 <화사집>을 발행한 오장환 시인에 대해서 설명이 필요하겠다. 오장환 시인은 1937년 시집 <성벽>을 발표했으며 서정주, 이용익과 함께 당시 시단의 3대 천재로 불렸고 심지어 시의 황제라는 칭호를 듣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때 많은 문인들이 친일성향을 보였지만 오장환 시인은 꿋꿋하게 지조를 지켰다.

서정주 시인과 <시인부락>의 동인으로 함께 활동하면서 우정을 나눈 것이 <화사집>을 출간하는 인연이 되었다.

<시인부락>은 1936년 당시까지만 해도 문단에서 그럴듯한 명성이나 경력이 없는 서정주가 주도를 해서 창간을 한 소박한 시 동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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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들 또한 서정주와 처지가 다르지 않은 무명신인들로 김진수, 김달진, 오상원 등이었다. 부락이라는 명칭 또한 무슨 심오한 뜻이 아니고 그냥 여러 민가가 모여 사는 시골 마을을 뜻하는 그 부락이다. 시작이 미약했고 끝도 미약했으니 2호를 마지막으로 종간했다. 오장환은 미당이 친일활동을 한 이후로는 교류를 끊고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더라도 인사도 하지 않으며 친일파라고 대놓고 비판했다고 한다.
오장환 시인은 1946년이 되자 임화 등과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했고 1948년 월북했다. 오장환 시인의 시는 강건하고 치열했지만 그의 일생은 짧았다. 많은 월북 작가들이 그러한 것처럼 그의 사망시기와 사망원인이 분명치 않다. 늦어도 1953년경 결핵 또는 숙청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휘문고보를 중퇴하고 일본 메이지대학 전문부에 유학 생활을 하였었는데 이때 일본의 화려한 장정 책을 접하고 장차 본인도 아름다운 장정으로 책을 출간하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서양 서적이 많이 유입되고 출판 산업이 발달한 도쿄에서 생활하면서 오장환 시인은 주 책방에 드나들었을 것이다. 가죽을 비롯한 고급 재료로 장정을 하고 화려한 마감을 한 서양의 고서가 비싼 값에 팔리는 것을 보고 오장환 시인은 조선에 돌아간다면 한정판을 전문으로 만드는 단체를 만들어서 춘향전이나 용비어천가를 비롯한 고전이나 조선 현대 문인들의 책을 내기로 결심했다. 오장환은 시인이면서 발행인이기도 하고 한정판 애호가였다.

'명동백작'이라는 별명을 가진 소설가 이봉구의 기억에 의하면 오장환이 일본에서 귀국하고 나서 1938년에 차린 책방 '남만서방'는 시집, 문학, 역사, 철학책을 주로 취급했고 희귀본과 호화장정본이 가득했다고 한다.

오장환 시인의 부친이 사망하고 나서 물려받은 유산을 밑천으로 해서 서점을 열은 서점이다. 서울 인사동 한복판에 시집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서점을 차린 것을 두고 세간의 사람들은 '일 년에 시집이 몇 권 출간되지 않는 나라에서 웬 시집 전문 서점이냐?'며 오장환 시인의 객기를 어지간히 걱정했다고 한다. 

서점 정면 벽에는 이상이 선물한 자화상이 걸려있었다. 1940년대 '남만서방'에 자주 드나들면서 벽에 걸린 이상의 자화상과 난생 처음 보는 진귀한 책들을 보고 충격과 감동을 느낀 십대 후반의 소년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박인환 시인이다. 

'남만서방'에 걸린 이상의 자화상은 보통의 그것처럼 근엄하고 멋있는 모습이 아니고 연필로 그렸는데 머리는 무성한 잡초처럼 보였고 수염은 면도를 하지 않아 갈대밭처럼 보였다니 소년 박인환은 적잖이 놀라기도 했을 터였다. 서점이름도 평범함을 거부하고 '남쪽 오랑캐'를 뜻하는 '남만'이지 않는가.  



          

오장환 시인이 유학하던 시절 도쿄에는 '남만서점'이라는 서점이 있었는데 사회주의 사상을 담은 책을 펴내다가 판금을 당하는 등 사회주의 사상의 온상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한 오장환 시인이 서울에 서점을 차리면서 도쿄의 서점 상호를 따온 것이 아니겠냐는 설이 있다. 아쉽게도 서점은 문을 연 지 2년이 채되지 않아 문을 닫고 만다. 대신 남만서점의 고객이었던 박인환이 파고다 공원 근처에 '마리서사'라는 책방을 열었고 그 이름처럼 외국 서점을 연상케 하는 서양 책들이 많이 진열되었다. 

출간이 늦어진 이유

다시 <화사집> 특제본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오장환 시인은 본인의 시집을 수수하고 평범한 장정으로 출간했지만 한때 동인으로 활동했고 절친했던 후배 미당의 <화사집>은 그야말로 초호화판으로 출간을 했다. 한마디로 미당의 시에 홀딱 반한 오장환 시인은 발표작도 얼마 되지 않은 미당에게 시집을 내자고 제안했다. 미당은 일지감치 오장환 시인에게 시집에 수록할 시를 넘겼지만 1941년에 와서야 출간이 되었다. 

출간이 늦어진 것은 제작비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결국 당시 남대문 약국의 주인이자 <시인부락>의 동인이기도 했던 김상준이 500원을 출연해서 간신히 출간한 것으로 보인다. <화사집> 모두를 호화 장정판으로 출간을 한 것은 아니었다. 이른바 보통의 독자들을 위한 보급판과 한정판을 따로 제작했다.

한정판들은 가로 14.5cm, 세로 23cm인 데 비해서 보급판은 가로14.5cm, 세로21cm로 작은 크기다. 수집가들 사이에서 '100부 한정판 시집'이라는 영광을 얻지 못하는 이유다. 보급판도 하드커버였는데 몇 부나 발행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한정판이라고 해도 표지나 용지를 조금 더 고급스러운 것으로 제작하는 우리의 출판 관례와는 달리 <화사집> 한정판은 그 외관이 보급관과는 차원이 다르게 제작했다. 총 100부로 발행했으며 초판본 속지에 번호별로 용도가 아래처럼 기재돼 있었다. 
 

正壹百部限定印行中
第壹番에서 第拾五番까지 著者寄贈本
同拾六番에서 同五拾番까지는 特製本 
同五拾壹番에서 同九拾番까지 竝製本

同九拾壹番에서 第百番까지는 印行者寄贈本 
本書는 其中第 番 


정리하면 1번에서 15번까지는 저자 증정본, 16번에서 50번까지가 문제의 특제본, 51번에서 90번은 병제본(병제본의 의미가 분명치 않지만 대략 보급판 정도의 뜻으로 추측된다), 91번부터 100번까지는 발행인 증정본이라는 것이다. 번호별로 정확한 용도가 정해져 있었지만 실제로는 번호가 인쇄돼 있지 않은 책이 많았고 수기로 임의로 쓴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 화사집>은 오장환 시인이 장정을 책임졌고, 정지용 시인이 표지 제호를 썼으며 근원 수필로 유명한 김용준의 그림을 수록한 그야말로 당시 내로라하는 문인이 동원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특제본만은 내지를 태지(닥나무와 이끼를 섞어서 제작하는 한지)를 사용했고, 비단으로 책 등을 만들었으며 책등의 책 제목을 붉은 색 실로 수를 놓아 만들었다. 특제본은 한눈에 보기에도 증정본과 병제본과 확실히 구별되는 군계일학이었다. 저자와 발행인 증정본은 말 그대로 증정된 비매품이었다. 그러니까 35권의 특제본은 한정판의 한정판이었던 셈이다. 

보급판이 1원 80전, 병제본이 3원이었고 병제본보다 크기가 크고 장정이 화려한 특제본은 5원이었다. 특제본을 제외한 나머지 한정판들은 능화판 문양의 누런색 표지다. '모두 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병제본과 일반 독자들을 위한 보급판은 의미가 비슷해서 헛갈리는데 가격이 다르고 장정도 달랐다.

보급판은 두껍고 딱딱한 종이 위에 천을 덧씌운 하드 커버형태로 제작되었다. 보급판이지만 상당히 고급스럽게 제작되었다. 최근 경매에서 원저자와 발행인 증정본도 경매에서 5천만 원에 낙찰되었고 한정판과 한날한시에 같은 출판사에서 발행된 보급판마저 1천만 원에 팔리기도 한다.

< 화사집>은 당시 문단의 큰 자랑거리였다. 김기림, 임화, 김광균을 비롯한 당시 조선을 대표하는 9명의 문인들이 명월관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었을 정도였다. 워낙 오장환 시인이 술을 좋아해서 나온 말일 수도 있는데 명월관 기생 치마폭에 붉은 실로 '花蛇集' 석 자를 수놓은 다음 특제본 표지로 삼았다고 한다. 자줏빛 실로 제목을 수놓은데 오장환 시인이 직접 수 놓은 집에 가서 한 권 한 권 제대로 하는지 참견했다고 한다. 



화사집 내지 그림 뱀이 사과를 물고 있는 아름다운 내지 그림
ⓒ 소명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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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사집>출간 50주년이 되는 1991년에 도서출판 전원에서 명월관 기생 치마폭으로 표지를 삼은 <화사집> 특제본을 재발간하기 위해서 원본을 구하려고 애를 썼지만 허사로 돌아갔다. 결국 서정주 시인의 기억에 의지해서 <화자집> 특제본의 복간본을 출간했다. 1941년판 특제본을 그대로 구현한 복각본이라고 하는데 이 역시 500부 한정판이었고 지금은 이 마저도 구하기 어렵다. 

나중의 일이지만 김광균 시인조차도 <화사집> 특제본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세월이 흘러 미당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2017년 은행나무출판사에서 전20권 미당 서정주 전집을 발간했다. 물론 친일과 군사정권을 찬양한 글들은 포함하지 않은 전집이다.

그의 정치적 행적을 걷어낸다면 <화사집>은 한국어로 쓰인 가장 아름다운 시집이며 화사집을 읽고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면 한국어를 제대로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찬사가 그리 틀리지 않는다. 읽을 때 마다 아름다움에 몸서리를 치며 눈물을 흘리게 된다는 찬사도 수긍하게 된다. 그의 정치적 행적을 걷어낸다면 말이다. 


 [스크랩] 오마이뉴스(시민기자)박균호







  



나라를 바로 세우려면 정권교체가 먼저이고, 그 다음에 하나하나 바로잡아야 한다.
시시비비 말꼬리 잡고 왔다 갔다 할 것이 아니라, 냉정하게 판단해야한다.
양다리 걸친 안철수 같은 사이비가 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 말짱 도루묵 된다.
꺼지지 않는 촛불의 힘을 모아, 투표장으로 몰려나가 선거혁명을 이루자.






세월호 참사 3주기를 하루 앞둔 지난15일, 22차 촛불 집회가 광화문광장에서 열렸다.
본 행사를 앞두고 광화문 일대 10여 곳에서 사전 대회가 진행되기도 했다
‘전교조’에서는 '교육적폐 청산과 새로운 교육체제 실현을 위한 교육주체결의대회'를 열었다.

결의대회에서 이들은 대학·고교 서열체계의 해제, 교육부 해체와 국가교육위원회 설치를 통한 교육 자치 실현을 주장했다.
정의당 심상정후보가 단상에 나와 “학교교육을 책임지는 주체는 교장이 아닙니다. 교사입니다.

교육과정의 민주화, 학교운영의 민주화, 교사와 학부모, 학생들이 함께 운영하는 교육민주화를 반드시 이루고 지원 하겠다”며.

극단적인 경쟁교육을 뿌리 뽑는 근본적인 교육 대혁명을 시작하자고 외치기도 했다.





그리고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상 앞에서는 '평등'을 요구하는 '페미니스트' 단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월호참사 3년 기억 문화제'로 진행된 이 날 촛불집회에서 ‘미수습자 수습과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을 호소하였고,

박원순시장은 “광화문광장 세월호 텐트촌은 이 슬픔과, 이분노와, 이 위로를 나누는 공간이었다”며

‘우리가 나서서 낡은집을 허물고 국가라는 새로운 집을 광장시민들과 함께 지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어 심상정 후보는 ‘세월호를 외면하고는 대한민국이 단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며

오늘 세월호 참사 3년의 기억식은 그것을 확인하는 자리라고 했다.

‘세월호는 낡은 대한민국에서 새로운 대한민국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건너야 할 다리’라고 강조했다.

이날 촛불집회 무대에는 한충은씨의 구슬픈 대금연주를 배경음악으로

신경림시인이 ‘언제까지고 우리는 너희를 멀리 보낼 수가 없다’라는 시를 낭송하기도 했다. 





이날 광화문광장에서 반가운 분들도 만났다.

백기완선생을 비롯하여 사진가 정영신과 김명지 시인을 만났고, 연극연출가 기국서씨를 만나 함께 식사했다.

늦은 시간에는 '동자동 사랑방' 식구들도 여럿 만났다. 선동수, 김정호, 김창헌씨 등 여러 명이 집회장에 앉아 있었다.






 




퇴진행동 측은 이번 대선은 촛불이 이룬 촛불 대선으로,

민의에 따라 박근혜 정권의 적폐를 청산할 새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치러지는 것이라며

그럼에도 대선후보들은 이런 과제 실현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고 구태의연한 선거공학에만 의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대선 후보들이 적폐 청산과 사회 대개혁 과제를 외면하고 있다

다시금 광장의 민의를 보여준다는 의미로

오는 29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경고 촛불을 드는 23차 범국민 행동을 개최할 것이라고 밝혔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3일 정오 무렵, 강민 선생의 생신을 축하하는 오찬회가 인사동 ‘가회’에서 열렸다.
‘도서출판 답게’ 장소임씨가 매년 이맘때면 오찬자리를 만들어 강민선생을 비롯하여 친구 분들을 모셔왔는데,

그 날은 강 민선생과 장소임씨를 비롯하여 신경림, 박정희, 추은희시인, 소설가 김승환선생, 아동문학가 정두리씨,

민속학자 심우성선생, 문학평론가 구중서선생, 시대의 협객 방동규선생 등 모두 열 분이 모이셨다.

난, 그 자리에 끼일 군번은 아니지만, 모처럼의 인사동 터줏대감 회동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덕분에 제대로 차린 밥상을 대할 수 있는 호사도 누렸지만...

마침, 강민선생 옆자리에 앉게 되어, 선생의 핸드폰을 엿볼 기회가 있었다.

핸드폰 창에 소설가 이국자선생의 생전 모습이 떠 있었다. 사모님께서 세상을 떠난 지가 8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그리워하고 계시는 것 같았다. 그토록 못 잊어 그리워하는 님을 둔 사모님이 더 부러웠다.

10여 년 전 양평에 사셨던 선생의 자택을 방문하여, 점심식사를 함께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처음 뵈었는데, 인자했던 모습은 어렴풋이 떠오르지만,

손수 끊여주신 된장국 맛과 방문 앞에 흐드러지게 핀 목련 꽃의 기억은 아직까지 생생하다.

그래서인지 목련의 우아한 아름다움과 구수한 된장국 맛이 잘 어우러진 그런 분으로 기억되고 있다.

준비한 생일 케익을 자르며, 강민 선생의 생신을 축하드리며 축배를 들었다.

그러나 나누는 대화라고는 대개 그렇고 그런 말씀이셨다.

이제 말년에 접어들어 문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처지도 아니고, 그렇다고 반복되는 삶을 되 뇌일 필요도 없었을 게다.

그런데, 그 날은 조선의 주먹으로 통했던 방배추선생의 재미있는 이야기로 화기애애했다.

선생의 자선전을 읽어 대개 아는 사실이지만, 들어도 들어도 재미있는 이야기들이다.

와전된 이야기라지만, 깡패 열 일곱 명을 한 판에 때려 눞혔다는 이야기와,

친구이신 백기완선생과의 첫 만남에 빰을 얻어맞았다는 이야기 등 흥미진진했다.

백기완, 황석영선생과 함께 조선의 삼대구라라 불리지만, 그런 호칭을 들을 만 했다.

주먹이 먼저라는 말이 있듯이, 다른 이야기보다 주먹이야기가 훨씬 재미있었다.

찻집인 ‘인사동 사람들’로 옮기다 연출가 기국서씨를 만나 함께 기념사진도 찍었지만,

다들 반갑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강 민선생님의 생신을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늘 건강하시어 오래 오래 인사동을 지켜주시길...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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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시영

 

신경림 구중서 조태일 시인이 계엄법 위반으로 종로경찰서에 잠시 구금되어 있을 때였다. 소식을 듣고 달려갔더니 세 사람이 나란히 면회실로 나오는데 표정들이 가관이었다. 조태일 시인은 허공에 연신 동그라미를 그리며 담배가 피고 싶다고 했고 신선생은 몇올 안되는 염소수염을 달고 서림이처럼 헤헤거렸고 구선생은 약간 삐딱한 옆모습으로 서서 아이처럼 초밥이 먹고 싶다고 했다. 초밥집을 찾아 인사동, 관훈동 일대를 헤맸으나 그것도 막상 찾으려고 보면 없는 법. 종로서 앞 육교를 벌써 세 번째 오르며김윤희 선생이 투덜거렸다. "아니 자기가 무슨 쟈니 브라더스야 뭐야? 이 한여름에 삐딱하게 서서 초밥 타령은?"

 

이틀을 더 머물다 그들은 서울구치소로 넘어갔는데 수갑이 모자라 세 사람을 한데 묶는 바람에 가운데 낀 신선생이 그들의 큰 걸음을 따라잡느라 오리처럼 심하게 뒤뚱거렸다고 한다.

 

시집 <은빛 호각> 창비. 2003

 

2009년 코리아나호텔에서 열린 구중서선생의 '불면의 좋은시간'시조집 출판기념회에서..

좌로부터 구중서, 강 민, 신경림시인

 

지난 2012년 인사동 단갤러리에서 개막된 구중서선생 시화전에서..

좌측에 이시영시인이 서있고, 지금은 별이 되어버린 여 운선생 사이로 민충근화백도 보인다.

 

대부호 재산 포기하고 무소유 삶 실천한 철학자
양자 민영기씨 "유고집 이제는 세상 빛 봤으면" 

 

 


 ‘거리의 철학자’, ‘한국의 디오게네스’로 불린 청구자(靑丘子) 민병산(1928~1988)의 유고집이 타계 30여년 만에 세월의 더께를 벗고 빛을 본다.

민병산은 드라마틱한 인물이다. 충북 청주 대부호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스스로 재산을 포기했고 결혼도 하지 않았다. 평생 어디에도 매이지 않은 채 무소유의 자유인으로 살았다. 말 그대로 안분지족의 삶을 향유했다. 그리고 회갑 하루 전날 세상을 떴다.

신경림 시인은 ‘세월청송로(歲月靑松老)’란 시에서 ‘민병산 선생은 회갑 바로 전날 세상을 떴으니/ 세상에 만 예순해를 머문 셈이다/ 가족이 없는 그를 위해 친구와 후배들이/ 잔치를 열어준다는 걸 극구 마다했을 때/ 그의 뜻대로 했더라면 그는/ 그렇게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준비했던 잔치 음식은 장례 음식이 되고/ 회갑 옷은 그대로 수의가 되었다’고 회고했다.

민병산은 철학 문학 역사 예술 등 다방면에 걸쳐 동서고금의 서적을 독파, 해박한 지식으로 번역서와 수필 등을 남겼고 서예에도 능했다. 1960년 <새벽>지에 ‘사일의 철학적 단편’, ‘사천세의 은자’를 발표해 이름을 알렸다. 이후 <사상계> <세대> <창작과비평> 등에 여러 편의 철학 에세이와 전기를 발표했다. 사후인 1990년 지인들이 유고집 ‘철학의 즐거움’을 펴냈다.

그는 생전에 서울 관철동과 인사동 일대를 사랑방으로 삼았다. 사람을 끄는 힘이 있던 민병산이 가는 곳마다 문인들의 아지트가 됐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인사동 3전설’. ‘귀천’의 시인 천상병, 극작가 겸 문필가 박이엽과 함께 인사동 터줏대감으로 꼽혔다. 매일같이 거리에서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만나며 청빈한 교유를 즐겼다.

“돌아가시고 한 차례 유고집을 냈죠. 그 이후에 책으로 나온 건 없습니다. 큰아버님이 생전에 써둔 원고를 쭉 갖고 있었어요. 수기나 일어로 써놓은 내용들입니다. 시간이 많이 지났고 저도 몸이 아파요. 이대로 묻힐 수도 있겠다 싶었죠. 더 늦기 전에 세상의 빛을 봤으면 좋겠습니다.”

민병산의 조카 민영기씨(58)가 이제야 남은 원고를 묶어 유고집을 내려는 이유다. 일어로 된 원고 번역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해서 타계 30주년에 맞춰 유고집을 출간할 요량이다. 민병산이 남긴 원고와 서예 작품을 보관해 온 민씨 역시 고집스레 살았다. 혹시 무소유의 삶을 산 큰아버지의 뜻을 어기는 일이 될까봐 유고집 출간을 미뤄왔다고 했다.

민씨는 호적을 옮기진 않았으나 민병산의 양자 노릇을 했다. 하던 일이 있었지만 큰아버지 뜻에 따라 인사동으로 거처를 옮겨 그 글씨를 서각(書刻)하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선생의 생애 마지막 한 해를 곁에서 지켜본 것도 그다.

지난 22일 명륜동 한 공원에서 한경닷컴과 만난 민씨가 기억하는 생전의 민병산은 스스로의 양심에 예민했던 지식인이었다. 무소유를 지향하되 무책임하지는 않았던 자유인이기도 했다. 재산을 포기하고 독신으로 산 이유도 그가 남긴 원고에서 읽어낼 수 있다고 했다.




- 세월이 많이 흘렀다. 이제야 유고집을 내려는 이유가 궁금하다.

“큰아버지는 생전에 이런저런 글이며 글씨를 주변 분들에게 나눠주는 걸 좋아했다. 그래서 지인 분들이 유고집 ‘철학의 즐거움’을 냈고. 제가 이런저런 큰아버지의 원고며 수기를 넘겨받게 됐다. 큰아버지 후배 분에게 보인 적 있는데 아무에게나 보여주지 말고 잘 갖고 있으라고 하더라. 옛날에 썼지만 현대인들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라면서. 혹시 돈벌이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있을까봐 그렇게 당부한 것 같다. 그래서 그간 쭉 보관해 왔는데, 시간이 많이 지났고 저도 몸이 아파서 자칫 이대로 묻힐 수 있겠다 싶었다. 이젠 세상의 빛을 봤으면 좋겠다.”

- 민병산 선생의 양자라고 들었는데.

“제 큰아버지 된다. 호적을 옮기진 않았지만 양자로 들어온 셈이다. 늘 ‘너는 내 아들’이라고 말씀하곤 했다. 1987년 가을로 기억한다. 큰아버지가 편찮아 병원 응급실까지 가는 일이 있었다. 만나 뵈러 갔더니 ‘너 이쪽으로 와서 내 밑에서 시키는 것 해라’ 그러시더라. 평생 결혼도 안 하고 산 큰아버지인데 나라도 곁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전자전기 계통 일을 했는데 그때부터 인사동으로 옮겨 서각 일을 배웠다. 큰아버지는 1년여 만에 돌아가셨다. 저도 고지식해서 돌아가신 분과의 약속은 지킨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일을 계속하고 있다.”

- 원고를 봤을 텐데 어떤 내용인가.

“일어로 써놓은 게 많다. 수기는 1권부터 4권까지 있는데 1권은 생전에 직접 번역해 놓았다. 남긴 글을 읽어보니 큰아버지의 삶이 이해되는 점들이 있다. 해방 전 큰아버지가 중학생 때였다. 일제가 패망 중이란 소식을 학생그룹에서 삐라로 만들어 뿌렸다가 구속당했다. 집안에 재산이 있는 편이어서 감옥에서 빼내려고 했는데 혼자선 못 나간다고 버텼다. 결국 몇 달 옥중생활을 한 뒤 손을 써 빼냈다. 큰아버지는 일을 벌인 친구들과 다 같이 감옥에서 나오는 줄 알았는데, 막상 나와보니 아니었던 것이다. 혼자만 혜택을 받은 데 대해 양심에 상처를 입었다고 했다.

원래 활동적이었는데 그 사건 이후 집에 틀어박혀 철학책을 탐독하면서 성격이 변했다고 한다. 해방 후엔 ‘독립운동 하고 나왔네’ 하면서 거들먹거리는 주변 행동에 또 충격 받았다고. 그러니까 큰아버지는 굉장히 양심에 예민한 분이었던 거다. 수기에는 스무살 때 마음에 드는 여학생에 대해 여러 관점에서 쓴 내용도 나온다. 그 여학생 분은 6·25 즈음에 결핵으로 돌아가신 걸로 안다. 큰아버지가 왜 평생 혼인을 안 했는지 글을 읽으면서 수수께끼가 풀렸다. 그만큼 마음을 준 사람이 세상을 떠났으니 딴 사람에게 마음 주기 어려웠을 거란 생각이 들더라.”

 

 

 

 

유고집은 언제쯤 나올 수 있을지.

“번역하는 작업이 만만치 않을 것 같다. 단순히 번역만 하는 게 아니라 큰아버지를 잘 알고 글도 읽어본 분이 맡아야 하지 않겠나. 그런 문제가 걸림돌이다. 사실 이전에도 한 차례 유고집을 내자는 얘기가 오간 적 있다. 큰아버지 글을 많이 읽은 언론사 문화부장 하던 분이 출판사 대표에게 권유해 추진됐었다. 그런데 원고를 번역하려던 분이 돌아가셨고, 그땐 저도 유고집 내는 데에 적극적이지 않아 흐지부지됐다. 이번엔 여유를 갖고 차근차근 추진하려 한다. 3년 후면 큰아버지 돌아가신 지 30주년이니 그때쯤 맞춰 나오면 좋지 않을까 싶다.”

- 선생이 재산을 포기하고 무소유로 산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철학적 사색을 하면서 그렇게 마음을 굳힌 것 같다. 선조들이 이만한 부를 축적한 만큼 남들은 누릴 것을 못 누렸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사실 큰아버지는 자유인이긴 했지만 책임감은 있었다. 큰아버지가 종손이라 집안의 기대가 컸다. 일찌감치 무소유로 살겠다는 결심을 하고서도 1950년대 후반에 집을 떠난 것도 그래서다. 그때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였다. 당시 친구들에게 쓴 편지에 ‘이젠 훌훌 털고 벗어나겠다’는 여운의 문장이 보인다.”

- 철학자이자 문필가, 번역가였다. 그중 어디에 가까웠을까.

“모두 맞지만 사실 큰아버지에게는 평생 소원이 있었다. 기존 위인전이 아닌 역사 속에 묻혀있는 위인들의 전기를 새롭게 발굴해 쓰는 것이었다. 그 꿈을 위해 어렵게 살면서도 청계천 고서점을 다니며 옛날 서책을 사들였다. 그렇게 모은 고서적이 족히 1톤 트럭 분량은 됐던 걸로 안다. 가난 때문에 거처를 자주 옮기다 보니 아는 분 댁에 맡겨뒀는데 책들이 사라져버렸다. 필생의 업이 그렇게 됐으니 얼마나 허무했겠나. 그 이후 주로 글씨로 소일했다.”

 


민병산 선생의 서예 소품

 

 

- 생전에 ‘인사동 3전설’로 불렸다고.

“돌아가시기 전 1년 정도는 곁에서 직접 지켜봤다. 큰아버지는 대개 불광동 숙소에서 오후쯤 인사동으로 나와 찻집을 돌았다. 아는 분들과 말씀 나누고 함께 식사하는 자리를 즐겼다. 미리 그분에게 어울리는 내용을 써 와서 주위에 건네기도 했다. 큰아버지 주변엔 항상 사람이 많았다. 사람을 끄는 힘이 있었다. 유명한 문인들도 큰아버지가 있는 찻집으로 찾아오곤 했다. 사람들이 버글버글 했다. 그래서 큰아버지가 가는 곳은 늘 명소가 됐다.”

- 아지트나 사랑방처럼 만들었구나.

“그렇다. 인사동 자체가 옛날과 많이 달라졌다. 인사동 사람들이 아쉬워하는 부분도 예전의 사랑방처럼 모이는 분위기가 사라진 것이다.”

- 기억나는 선생과의 에피소드가 있다면.

“큰아버지는 천식을 심하게 앓았다. 하지만 남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했다. 여러 번 저를 불러서 쉬엄쉬엄 인사동 뒷골목길로 함께 걸어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평생 무소유로 살았지만 저한테는 ‘야, 나이 먹으니 조금은 돈이 있어야 하겠더라’고 말한 적도 있다. 큰아버지가 당시 건강이 안 좋기도 했고, 원래 물건에 집착하지 않는 분인데 전시회에 출품된 토기 주전자를 아주 마음에 들어 한 기억이 있다. 제게 ‘내가 죽고 나서도 네가 평생 서각할 만큼 글씨를 써놨다’고도 했다. 그런 장면들이 기억난다.”

- 인간적인 면도 있었던 것 같다.


 

“최대한 말을 아끼면서 살아 다른 사람들이 잘 모르는 면도 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무책임한 자유인은 아니었다는 거다. 인사동 분들은 놀랄 텐데, 1970년대에 큰아버지가 고향에 작은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해 어머니를 모신 적이 있다. 물론 서울의 전셋집 보증금도 안 되는 값이었고 그나마도 얼마 안 돼 처분했지만. 어머니를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고 있었다. 집안을 떠나온 몸이었으나 수시로 어머니에게 용돈도 드리고 아들의 도리를 다하는 효자였다.”

한국경제 / 김봉구 한경닷컴 기자 kbk9@hankyung.com

지난 10일은 김준권, 박불똥씨의 전시가 동시에 열려
옛 민주투사들이 인사동으로 대거 몰려들었다.
전시가 파한 후 ‘부산식당’에서 ‘영빈가든’을 거쳐
밤늦게는 ‘소담’에서 ‘무다헌’으로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무다헌’에는 박불똥씨를 비롯하여 이인철, 장경호, 최석태, 김정대, 
이명지씨 등 10여명의 장정들이 마지막고지를 사수하고 있었고,
안쪽에는 신경림, 정희성, 신학철선생 등 고참들이 죽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신학철사령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면 안돼요”
참모총장격인 신경림선생께 삿대질로 힐책을 한 것이다.
유리한 고지만 쫓는 우유부단함에 분노가 폭발했던 것 같다.

그 수행관 격인 김태서장교가 신학철사령관을 나무라자
장경호장교가 김태서를 제지했다.
결국 참모총장께서 퇴청하여 사태는 수습되었지만,
자칫했으면 12,12사태가 아니라 12,10사태가 날 뻔했다.

사진,글/ 조문호

 

 

 

 




시 : 신경림 / 사진 : 정영신



"파장"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켜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빚 얘기
약장수 기타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싯집에라도 갈까
학교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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