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에 이른 여섯 문인들, 지난 세월을 詩로 노닐다 어느덧 소년·소녀가 됐다

 

강민 시인 시선집 ‘외포리의…’ 출간회서 해후

팔순의 벗들이 오랜만에 9일 서울 인사동에서 만났다. 신경림 민영 황명걸 박정희 서정란 시인과 극작가 신봉승 등이 그들이다. 우리네 세는 나이로 팔십을 넘겼거나 팔순 언저리에 도달한 이들이다. 모두 한 세월 건너오며 이름을 날린 문인들이라는 점도 같다. 벗 강민(81) 시인의 시선집 ‘외포리의 갈매기’(푸른사상) 출간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자리였다. “참으로 긴 세월의 고개를 넘어왔구나/ 굽이굽이 80굽이/ 험하고 눈물 많던 고개, 고갯길/ 한 많던 굽이길, 가시밭길/ 그 길을 이렇게 쉽게 넘다니/ (중략) / 그 많던 동반들/ 아리고 아픈 내 사랑, 풀꽃 노을에 타버린/ 아리고 아픈 내 사랑/ 따뜻했던 피붙이, 그 친구, 그 여인들/ 이제는 손 놓고 떠난 이들/ 그 문 들어서 이제는 꿈의 본향 찾았는가”


팔십이 넘은 연치에도 견결한 문장이 돋보이는 강민의 ‘산수령(傘壽嶺)’이다. 1962년 ‘자유문학’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이듬해 시 동인지 ‘현실’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 세대는 일제 강점기에 성장기를 보내고 청년기에 6·25전쟁을 겪었으며 팔팔한 20대에 전후 황폐한 1950년대를 보냈다. 이어 4·19, 5·16, 10월유신, 5·18광주민주화운동 등의 역사적 현장을 온몸으로 통과해 왔다. 이미 그들 표현대로 ‘저 위로’ 떠나간 이들이 더 많다. 이날 인사동에 모인 이들은 지나온 세월 막역하게 부대껴온 몇 안 남은 벗들이다. 강민 시인은 모두에 이런 인사말을 했다.

강민 시인의 새 시집을 축하하기 위해 모처럼 서울 인사동에 모인 팔순의 벗들. 왼쪽부터 강민

신경림 박정희 시인, 극작가 신봉승, 민영 황명걸 시인. 민영 시인은 “세월의 무게에 못 이겨

아름다운 친구들 다 먼저 가고 이만큼만 남았다”고 웃었다.


“중학교 6학년, 요즘 학제로는 고3 때 6·25를 만났습니다. 피란 갈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라디오 연설로 서울시민이여 안심하라고 방송하더니 자신은 대전 부산으로 도망가면서 한강 다리를 폭파해버렸습니다. 남은 이들은 발이 묶이고 무심히 다리를 건너던 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물속으로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날 대한민국호는 이미 침몰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후 살아온 세월은 늘 배멀미를 하듯 어질어질했는데 세월호 참사에서도 여전히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니, 대체 달라진 게 무언지 답답합니다.”

그는 1950년 8월 또래의 인민군을 만나 희미한 등잔불 아래 밤을 밝히며 나누었던 이야기를 ‘경안리’에서라는 시편에 적었다. 서로 적의는 없었다. 북에서 고급 중학교에 다니다 강제로 끌려나왔다는 ‘그’에게 ‘나’는 철없이 “북이 쳐 내려오니 남으로 달아나는 길”이라고 말했지만 서로 쳐다보며 피식 웃었을 뿐이다.

“하염없는 얘기로 밤을 밝혔다/ 그리고 새벽에 그는 떠났다/ ‘우리 죽지 말자’며 내밀던 그의 손/ 온기는 내 손아귀에 남아 있는데/ 그는 가고 없었다/ 냄새나고 지치고 더럽던 그의 몸과는 달리/ 새벽별처럼 총총하던 그의 눈길/ 1950년 8월 경안리/ 새벽의 주막 사립문가에서 나는 외로웠다”(‘경안리에서’)


강민 시인은 그때 이별의 인사말로 나누었던 “우리 죽지 말자”는 다짐이 지금도 귓전에 생생해 서럽다고 했다. 전후 폐허의 거리에 청춘들이 갈 곳은 마땅치 않았다. 당시 문인들의 무대는 그나마 얼기설기 엮은 폐허의 건물더미 사이에 자리 잡은 명동의 술집과 음악다방이었다. 이날 어렵사리 만난 벗들도 그 시절 명동을 누비던 추억을 공통으로 지니고 있었다.

민영(80) 시인이 시를 읊듯 말했다. “세월의 무게에 못 이겨 아름다운 친구들이 다 먼저 가버렸어. 강물을 지나서 바닷속으로 빠져버렸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파도에 쓸려서 없어지고 말았어. 여기 온 사람들 몇 명만 남았어.”

강민 시인은 그들이 명동 시대에 이어 인사동을 누비던 시절을 추억하며 이렇게 적었다.

“늘 다니던 길인데/ 갑자기 물감을 뿌린 듯/ 내 눈에는 이상한 필터가 걸린다/ 동서남북이 분별되지 않는다/ / 그이가 떠난 여기는/ 스산한 여기는/ 내 마음의 황무지// 가면을 쓰고/ 물구나무 선 이들이 다가온다/ 그리운 이들이 나비처럼 춤을 춘다/ 황혼을 마신 이들이 흐느적거리고 있다/ 갈 길 잃은 내가 헤매고 있다”(‘인사동 아리랑 4-황무지’)

연전에 아내마저 떠나보낸 강민 시인은 그리운 이들이 모두 떠나간 곳은 ‘황무지’라고 썼다. 노경의 시인들이 실감하는 삶의 무게와 헛헛함이 생생한 자리였다. 이날 팔순의 벗들은 너나들이하며 소년 소녀들처럼 들떠서 떠들었다.

세계일보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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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시인들 “읽어도 이해안되면, 詩 아니다”

 

신경림 등 원로시인들 쓴소리

 

▲  9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한 음식점에서 열린 강민(윗줄 왼쪽 첫 번째) 시인의 새 시집 ‘외포리의 갈매기’ 출간 기념회에서 신경림·민영·황명걸 시인, 신봉승 작가(윗줄 왼쪽 두 번째부터 시계방향으로) 등이 시 낭송을 듣고 있다. 서서 시를 낭송하는 이는 이경철 동국대 만해연구소 연구교수. 김선규 기자 ufokim@munhwa.com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난해한 시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하는 시는 시가 아닙니다. 밤중에 허공에 대고 소리를 지르는 거랑 같아요.”

시를 읽지 않는 시대다. 한국 시단을 대표하는 원로 시인들은 안타까움을 토해냈다. 9일 강민(81) 시인의 새 시집 ‘외포리의 갈매기’ 출간을 축하하기 위한 서울 종로구의 한 식당에서다.

이날 자리에 모인 신경림, 민영, 황명걸, 구중서, 서정란, 박정희 등 원로 시인들은 새 시집에 대한 얘기에 앞서 독자들과 멀어지고 있는 현 한국 시단의 흐름에 쓴소리를 했다.

신 시인은 “최근 나오는 시들은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읽었을 때 이해가 안 되는 시는 시인 스스로가 무엇을 쓰는지 모르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시 쓰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일반적인 것과는 구별되는 무엇인가를 계속 요구하는 비평가들 때문에 영국프랑스의 시 경향이 지나치게 난해해졌고, 결국 독자와 호흡하지 못한 채 망가져 버렸다”며 “우리도 이들의 경향을 따라 해석이 안 되는 시들을 쓰려 하지만, 각 나라에 맞는 시를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신 시인은 “젊은 시인들에게 ‘시는 결국 말로 하는 것이고, 말은 통해야 한다’는 말을 전해주고 싶다”며 애정 어린 조언도 남겼다.

강 시인 또한 “김수영 시인도 1950년대 모더니즘을 추구했지만, 의미가 전혀 통하지 않는 난해한 시를 썼던 ‘후반기’ 동인에 대해선 ‘그건 시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며 “읽히는 시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민 시인은 “후배(시인)들이 정성이 담긴 시를 썼으면 한다”는 말을 전했다. 그는 “시를 쓰면서 10번은 더 고치고, 잡지사에 보낸 후에도 다시 가서 고쳤던 기억이 난다”며 “시 한 편을 쓰더라도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고 조언하고 싶다”고 했다.
이날 자리에서 원로 시인들은 함께한 지 50년이 된 만큼 첫 만남, 동인 활동 등 추억도 자주 꺼내 이야기했다. 이경철 동국대 만해연구소 연구교수는 “6·25전쟁, 4·19혁명, 군사독재 등 현대사를 온몸으로 맞서온 원로 시인들의 경험이 그냥 잊혀서는 안 된다”며 “문단에서 원로들과 현 활동 문인들이 함께할 수 있는 자리를 자주 만들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화일보 / 유민환 기자 yoogiza@munhwa.com

e-mail 유민환 기자 /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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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의 시]

 

그을린 도심의 빌딩 위로

창백한 초승달이 떠 있다

피곤한 시민들의 우수가 떠 있다

분노가 떠 있다

 

-강민의 '만추' 중

 

 

 

 

숨막히게 더웠던 지난주 어느 날, 서울 인사동 한 식당에서 강민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외포리 갈매기’가 나온 것을 축하하는 자리가 있었다. 소감을 말하라자 시인은 뜬금없이 한국전쟁이 터지고 3일 후인 1950년 6월 28일의 이야기를 꺼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그는 동네 교회를 지킨답시고 피난 행렬에 끼지 않았다. “그때 (정부가) 이런 방송을 했습니다. ‘서울 시민이여, 안심하라.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라.’ 그리고 얼마 후 한강다리를 폭파시켰습니다.” 단어가 주는 뚜렷한 기시감에 자리는 일순 침묵에 빠졌다. 차가운 바닷물을 보며 뿜어냈던 분노와 다짐은 어느새 폭염 속에 녹아 일그러지고 있었으나, 백발의 시인은 여전히 파랗게 분노하고 있었다. 윗글은 ‘외포리 갈매기’에 수록된 첫 번째 시 ‘만추’의 마지막 연이다.

 

한국일보 /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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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을]

 

인사동 아리랑 6 -세모(歲暮)

 

강 민

 

눈이 내릴 듯
우중충한 하늘이 겨울 햇살을 가린
인사동 뒷골목을
약속도 없이 배회하고 있다
섣달그믐이 내일인데
이제 곧 질곡의 경인년은 가고
새해가 온다는데
이 굽이에선 작은 꿈이라도 영글려나
흑룡(黑龍)의 임진년이 온다는 날

 

- 시집 <외포리의 갈매기>(푸른사상)에서

 

[한겨레신문]

강 민선생의 시집 ‘외포리의 갈매기’ 출간에 대한 기자간담회가

지난 7월9일 정오 무렵 인사동 ‘포도나무집’에서 있었다.

 

이 자리에는 인사동의 원로시인들이 대부분 참석하였다.

문학평론가 구중서, 극작가 신봉승, 시인 민 영, 신경림,  황명걸, 맹문재, 박정희,

서정란, 이경철씨와  문화일보 유민환기자, 세계일보 조용호기자, 한국일보 황수현기자 등

일간지 문학담당 기자 7명이 참석하여 오찬을 겸한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강 민 선생께서는 시집출판에 대한 인사말에서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도

동요하지 말고 안심하라 했다면서 세월호 참사의 동질성을 질타했고,

신경림선생께서는 시집출간을 축하하는 격려 말씀을 주셨다.


 

시인 민 영선생에 이어 맹문재씨가 낭송한 강민선생의 “명동, 추억을 걷는다” 시 한편을 옮긴다.

 



명동, 추억을 걷는다.

2007년3월29일, 오전 11시40분경
약속 시간이 남아
내 추억의 앨범에는 없는
낯선 명동을 걷는다.
2,30대의 우리가 거의 날마다 들려
헤매던 거리와는 완전히 달라진
화려하게 분칠한 명동을 걷는다.

지하철 명동역에서 내려 충무로를 가로지르려다
문득 태극당 앞 건물 지하에 있던 [음악회관] 생각이 난다.
건장한 체구의 노익장이셨던 첼리스트 김인수 선생이 운영하시던
거기서 천상병을 위시한 우리는 무척 선생의 속을 썩혀 드렸다.
이추림, 김희로의 [오시회/午時會]도 여기서 주로 모임을 가졌었지
충무로에 들어선 김에 우측으로 돌아 명동성당 길로 발길을 옮긴다.
길모퉁이, 여기 쯤이던가
이산 김광섭 선생이 내시던 문예지 ‘자유문학’사가 있었지
편집을 하던 이는 시인 김시철, 또 다음에는 소설가 박용숙이었던가
거기를 통해 남정현, 최인훈, 송혁, 남구봉, 권용태, 황명걸 등이 등단했고
아니지 결국 나도 그리로 등단하지 않았던가
조금 내려가니
우측에 빈대떡집 ‘송림’, ‘송도’ 자리가 보인다
아나운서 유창경, 소설가 정인영, 송기동, 시인 김춘배, 출판편집인 김승환, 김상기 등이
때로는 거의 고장 난 고물 시계를 맡기고 외상술을 마셔도
싫은 내색도 없이 오히려
“너희들 술 좀 작작 마셔라. 몸 상할라”
염려하시던 주인아줌마들...
70년대 어느 날에는 ‘겨울공화국’에 쫓기는 양성우 시인과 야인 백기완과
여기서 급한 회포를 나누기도 했지
아, 잊을 수 없다. 그때 쏘아보던 양성우 시인의 새파란 야수 같은 눈빛!
폭격으로 페허가 된 건물 지하에 수십 집이 얼기설기 칸을 막고 영업을 해서
우리가 ‘아방궁’이라 불렀던 곳에는
이제 이름 모를 큰 빌딩이 치솟아 있고
박성룡, 이규헌, 이일, 이창대, 김관식, 이현우, 송혁, 신기선, 송영택 등이
소금으로 안주를 삼고 동동주라는 카바이트 술을 마시던
언덕배기의 ‘몽파르나스’는 이일 시인의 명명(命名)이었던가
이현우가 자주 노숙을 한 공원이었던 제일백화점 자리는 흔적도 없고
그 앞에 있던 음악감상실 ‘돌체’, ‘엠프레스’
폐질환으로 파랗게 질린 표정의 천재 화가 김청관을 비롯한 박서보, 문우식, 최기원 등의 화가며 조각가들의 모습이 떠오르며
거기서 DJ 역할을 하던 나중에 ‘조선일보’문화부장을 한 정영일 생각도 나고
좁은 골목 안에 있던 ‘쌍과부집’은 알콜 중독의 천상병이 주기(酒氣)가
떨어지면 가서 큰 유리잔으로 막소주 한 잔을 홀짝 마시던 곳이었지
다시 명동의 본길로 돌아와 복원 중인 ‘국립극장’ 쪽으로 걷는다
왼쪽의 화려한 패션 상점 거기에 ‘청동’에서 ‘금문’, ‘송원’으로
이름이 바뀐 찻집이 있었지
늘 그 자리에 눌러앉아 연신 담배를 피워 물며
끊임없이 찾아오는 여학생들의 손을 만지작거리시던
‘청동문학’의 주인이시며 우리 문단의 원로 공초 오상순선생!
거기서 만난 남구봉, 신봉승, 김종원 등의 친구와 멋쟁이 선배 황명, 최재복
그리고 김금지, 최희숙, 박정희 등의 여자 친구들
아, 지금의 내 아내 소국당(小菊當)도 거기에 이따금 출입했었지
그 위가 ‘송원기원’이었는데
우리나라 바둑계를 이끌던 조남철 선생이 운영하시던 그곳에서
민병산, 신동문, 김심온, 신경림, 황명걸, 이시철, 김문수 등을 만났다.
겨우 두 집 내면 사는 정도밖에 모르는 내게
조선생은 떡 8급 딱지를 붙여 주시고...
네거리에 서면, 국립극단 초년생으로 무대에 섰지만, 열정적이고
인상적이었던 김금지의 ‘만선(滿船)’ 무대 연기가 생각난다.
왼쪽으로 발길을 돌렸다가 다시 을지로 쪽으로 꺾는다
텔런트 최불암의 어머니가 운영하시던 그 유명한 목로‘은성‘
그 자리 앞에 선다.
그 집의 벽화로 불리운 명동백작 이봉구선생, 박봉우, 문일영, 김하중, 이문환 등의 시인 묵객들...
모두가 그리운 이름들이다.
그리고 그 앞집이 ‘몽블랑’이었다
내 인생의 진로를 바꿔 놓은 영화감독 김소동 선생이 늘 진치고 계시던 찻집
어려서부터 영화에 미쳐서 그 길로 가려고
서라벌예대 첫해 연극영화과에 입학하려는 나를 극구 말려 동국대 국문과로 돌려놓으신 선생님!
여기서 문득 내 추억 걷기는 멎는다
약속시간이 다 되고 그 장소가 바로 거기 보였기 때문이다
‘갈채’ ‘코지코너’ ‘동방살롱‘ ’청산‘ ’도심‘ ’문예살롱‘ 등의 찻집과
‘명천옥’ ‘구만리’ ‘할머니집’ ‘도라무통집’ 등의 대폿집...
많은 이들이 가고 명동은 변했다
허지만 아직도 많은 명동 구석구석의 추억을 찾아 나는 또 여기 올 것이다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떠난 '용태형' 운구행열은 서소문 배제학당을 한바퀴 돌아 인사동으로 들어왔다. 오래전 문화운동의 본거지였던 '그림마당 민' 앞에서, 그 시절을 회억하는 유홍준선생의 이야기를 들어며 고인의 넋을 기리기도 했다. 그리고는 망자의 가게였던 '낭만'으로 자리를 옮겨 노제를 올렸다.

 

 

 

 

 

 

 

 

 


 

 

 

 

 

 

 

 

 

 

 

 

 

 

 

 

 

 

 

 

 

 

 

 

 

 

 

 

 

 

 

 

 

 

 

 

 

 

 

 


지난 4월19일은 채현국선생께서 팔순을 맞는 날이었다.  

 

노광래씨로부터 전화는 왔으나 시간과 장소는 좀 있다 연락하겠다는 것이다.
아마 선생님께서 본인 스스로 잔치 상을 차리기도 그렇지만 평소 자신의 일로 떠벌리는 것을 싫어하시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오후6시가 되도록 연락이 없기에 선생님께 인사 전화를 드렸더니 빨리 인사동으로 나오라고 재촉하셨다.

부랴부랴 축하선물로 드릴 작품 한 점 프린트해 나갔으나 이미 파장이었다.
그나마 들어가시는 채현국선생 내외분과 구중관씨를 골목 입구에서 만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안내된 술집에는 신경림선생을 비롯하여 강신옥, 김태서, 최혁배, 장경호, 노광래, 편근희, 남민우씨가

남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채선생님께서는 팔순을 알리지 않은채, 인사동에서 만난 분들과 점심 때부터 술을 드신 모양이었다.  

 

남의 일에는 팔을 걷어 부치지만 스스로의 일로 내세우지 않는 선생님의 성품을 알면서도,

미리 자리를 마련해 드리지 못한 게 후회스러웠다. 팔순 기념사진 한 장, 찍지 못한 것이다. 

 

뒤늦게 알게된 공윤희씨도 달려왔으나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 버렸다.

모두들 ‘노마드’로 자리를 옮겼지만, 술이 취한 분들과 서로 사이클이 맞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배성일씨와 나재문씨도 만났지만, 그냥 줄행랑쳤다.

 

 

 

 

 

 

 

 

 

 

 

 

 

 

 

 

 

 


김용태씨를 돕기 위한 “산포도 사랑, 용태 형” 출판기념회 및 “함께 가는 길” 전시회 개막식이

지난 26일 오후5시부터 '가나아트센트'에서 열렸다.

 

“산포도 사랑, 용태 형”은 민중미술의 핵심 인사 45명이 '용태 형'에 대한 경험담을 털어 놓았고,

“함께 가는 길”은 지난 시절 '용태 형'에게 빚 진 민중미술가 43명의 작품을 추렴해 갖는 자선전이다.
‘김용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결성해 살아있는 이를 위한 회고집을 내고 전시회를 갖게 된 것은

병상에 누운 ‘용태 형’을 돕기 위한 자리였지만, 뿔뿔이 흩어진 옛 전사들의 결집이었다.

투병 중이라 개막식에 나오지 못할 줄 알았던 ‘용태 형’의 멀쩡한 등장에 깜짝 놀랐다.

모처럼 때 빼고 광냈겠지만, 전혀 간암 말기의 환자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개막식장에는 80년대 민중예술을 이끌었던 역전의 용사들이 총집결했다.
김정헌, 민정기, 박진화, 성완경, 신경림, 임옥상, 신학철, 박재동, 박불똥, 정동석, 주재환, 강요배, 김준권, 문영태, 신학철,

심정수, 이애주, 임진택, 장경호, 최석태씨 등의 내노라하는 작가들과 백기완, 문재인, 이부영, 이재오씨 등의 정치인,

시인 신경림, 소설가 황석영, 언론인 임재경, 이도윤, 가수 최백호, 환경운동가 최 열, 연극배우 이명희, 사진가 정인숙, 곽명우, 무도인 하태웅, 김태서, 임계재, 편근희, 유재만, 노광래씨 등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용태 형'의 쾌유를 바라며 전의를 다졌다.

임진택씨의 사회로 진행된 개막식 첫머리에 최백호씨가 나와 “보고 싶은 얼굴”을 불렀다.

그 노랫말들이 새록 새록 지난 시절을 떠올리게 했는데, 나에게는 보고 싶은 얼굴이 몇 명이나 될까 하는 씁쓸한 생각도 들었다.

이왕이면 “산포도 익어 가는 고향 산길에, 산포도 따다 주던 산포도 처녀”로 시작되는 ‘용태 형’의 십팔번 “산포도 처녀”를 들었

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이어 문재인, 황석영, 이부영, 백기완씨의 인사말이 이어졌다.

백기완씨는 “술도 마셔야 하고, 할 일이 많은데, 빨리 일어나라”며 꾸짖듯 말해 자리를 숙연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애주씨의 살풀이 춤으로 행사는 마무리되었으나, 오랜만에 반가운 분들 만나고 사진찍느라 정작 보아야 할

전시작품들을 놓쳤다. 

뒤풀이 집으로 자리를 옮겨서는 “나도 막걸리 한 잔 도오!”라며 “용태 형”이 술잔을 들었다.

하기야 전투를 지휘할 사령관이 자기 몸 생각으로 꽁무니 뺄 위인은 아니지만, 좀 걱정되었다.

‘괜찮다’를 연발하는 ‘용태 형’의 밝은 모습에서 다시 살아 난 맹장의 모습을 보는듯 했다.

민중미술로 민주화 운동에 불을 지핀 옛 전사들의 결집 자체가 '용태 형'의 부활을 의미했다.

 

손님들이 너무 많아 뒤풀이 집을 두 군데나 잡았으나 여전히 자리가 부족했다.
신학철, 문영태, 장경호, 이명희씨를 비롯한 몇 명은 인사동 ‘노마드’로 자리를 옮겨,

신학철씨의 작품 '물레방아 도는 내력'을 들었다.

 

사진,글 / 조문호

 

 

 

 

 

 

 

 

 

 

 

 

 

 

 

 

 

 

 

 

 

 

 

 

 

 

 

 

 

 

 

 

 

 

 

 

 

 

 

 

 

 

 

 

 

 

 

 

 

 

 




ㆍ민중미술·민주화에 평생 바친 김용태 민예총 전 이사장이 주인공


암 투병 중인 그를 기억하고 뜻 기리려 각계각층 지원
‘산포도 사랑, 용태 형’ 책 출간… ‘함께 가는 길’ 미술전·경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는) 어제 큰일을 한 사람이지만, 오늘 정말로 필요하고, 내일 더욱 필요한 사람이다. 이웃을 위해서, 동료를 위해서, 좋은 세상을 위해서, 참다운 예술을 위해서 자기는 희생할 수 있다는 착한 생각을 한….”(시인 신경림)

“그의 삶, 그의 투쟁, 그의 역사가 곧 거대한 예술이 아니던가. 오늘 우리는 그 예술의 그늘에 다가서는 벅찬 순간임을 새겨야 할 것이다.”(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그는 당국의 감시와 압박, 때로는 연행되기도 하고, 저항하기도 하면서 진보적인 문화예술인들의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줄기차게 견인하는 기관사 노릇을 했다.”(김윤수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내로라하는 문화예술인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상찬하는 ‘그’는 누구일까.

바로 진보 문화운동에 평생을 바친 김용태 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이사장(68·사진)이다. 화가인 그는 1979년 민중미술 공동체 ‘현실과 발언’의 창립 동인이 되면서 엄혹하던 독재권력에 맞서 문화예술을 통한 민주화운동을 펼쳤다. 문화운동가로서 그의 전방위적인 활동은 지난 이력에서 잘 드러난다. 민족미술협의회 초대 사무국장,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문화집행위원장, 민예총 초대 사무처장, 남북 문화예술 교류를 위한 ‘코리아 통일미술대전’ 남측 단장,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 민예총 이사장 등을 지내면서 문화예술운동의 한복판을 지켰다.

힘들게 암 투병 중인 그를 기억하고, 그의 ‘시퍼런 뜻’을 기리기 위해 각계각층의 문화예술인 100여명이 모였다. 바로 ‘김용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용사모)이다. 용사모는 17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우리가 사랑하는 벗 김용태 선생, 그와 함께한 문화예술인들의 지난 40여년의 여정을 담은 책을 출간했다”며 “이와 더불어 병원비 등 기금 마련을 위한 미술전시회, 경매도 갖는다”고 밝혔다.

이날 출간된 <산포도 사랑, 용태 형>(현실문화)에는 문화예술인 47명의 글이 묶였다. 저자들은 김 전 이사장과의 개인적 인연은 물론 그의 활발한 문화예술운동 활동과 의지, 이 시대 우리들이 되새겨야 할 뜻 등을 담았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이날 “김 전 이사장은 문화예술계에서 나이와는 상관없이 ‘용태형’으로 불린다”며 “용태형은 한마디로 이 땅의 민주화, 민족예술운동의 심부름꾼으로 평생을 살아온 분”이라고 밝혔다. 유 교수는 “책 제목은 용태형이 늘 부르던 노래 ‘산포도 처녀’에서 따왔다”며 “이번 책 출간을 계기로 용태형의 뜻이 널리 퍼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임옥상 작가는 “용태형은 입으로 민주화운동을 하는 사람, 괜히 먹물냄새를 풍기며 거들먹거리는 사람에겐 망설임 없이 막걸리 주전자를 던질 정도로 담백하고 결백한 사람”이라며 “용태형으로 인해 문화예술계에서 민중미술의 뿌리가 더 확산됐고, 민주화운동이 더 뜨거워졌다”고 말했다.


 


김용태를 특유의 화법으로 그린 강요배의 ‘용태 형’, 종이에 콘테·1991


박진화의 ‘개화-땅2’, 캔버스에 유채, 130×194㎝


강요배·김인순·민정기·박진화 등 작가 43명의 100여점으로 구성된 전시회도 ‘함께 가는 길’이란 제목으로 26일부터 30일까지 가나아트센터(서울 평창동)에 마련된다. 전시회 개막과 함께 출판기념회도 26일 오후 5시 전시장에서 개최된다. 전시 제목은 ‘캄캄한 밤길을 끝없이 걸어갈 때 힘이 되어주는 것은 튼튼한 다리도 억센 날개도 아닌, 친구의 발걸음 소리이다’라는 발터 벤야민의 말을 차용했다.

전승보 큐레이터는 “시대적 환경을 외면하지 않고, 눈앞에 있는 개인적 불이익이나 두려움을 마다하지 않고, 우리 모두의 공동체인 사회를 위한 발언한 작가들의 작품”이라며 “전시회와 경매를 통해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한 자리에 힘을 보태주기를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미술 경매는 30일 오후 4시 서울옥션 스페이스(서울 평창동)에서 열린다. ‘함께 가는 길’에 출품한 작품 중 35점이 경매 대상이다.



[경향신문 스크랩]

 

만봉스님 기일을 맞아 봉원사 이인섭선생 댁에서 오찬 모임이 있었습니다.
김명성이사장을 비롯하여 공윤희, 이청운, 조문호, 노광래, 편근희씨 등 몇 명이 오랫만에
만나 환담을 나누었습니다. 김명성씨와 이청운씨의 주된 화제는 '아라 아트' 기획전을 위한
이청운씨의 초창기 작품에 관한 대화였고, 적음 시비 건립 문제와 창예헌 사무처장 후임
문제도 논의되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인사동에 들려 노광래씨의 '유카리화랑'과 아라
사무실에 들려 작품들을 감상하기도 했습니다.

2011년10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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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섭 생일잔치에서 천상병을 만나다,|

 

3월28일 정오 무렵, 
                      만봉스님 장자이신 이인섭선생의 생일잔치에 지인들이 모여들었다.
                      이선생의 봉원사 작업실에는 신경림, 김용태, 배평모, 조문호, 김명성, 전활철, 공윤희, 전인경씨를 
                      비롯한 15명이 참석하여 이선생의 생신을 축하하였다.

                      봄바람이 산들거리는 봉원사 모퉁이의 고즈넉한 정경도 좋았지만
                      애주가인 이선생을 위해 갖고 온 양놈술, 때놈술, 쪽바리술 등 휘안한 술 맛을 다 봤다. 
                      그리고 갓 구워 낸 LA갈비 맛도 일품이었다.

                      신경림선생께서 얼마전 일본에 가셨다가, 저승 문턱에서 돌아 왔던 이야기. 
                     "절간에서 술과 기기를 묵는 인간들이 오데 있냐?"는 김용태씨의  너스레에
                      신경림씨는 "그래서 더 맛있다"며 맛장구를 쳤다.

                      자리를 옮겨 제자들이 사온 케익에 촛불도 켜고, 잔득 차린 음식들로 굶는 사람들에게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마침 의정부시와 천상병기념사업회에서 제작하는 시인 천상병 다큐멘터리 촬영을 위해 
                      흘러간 천상병 전설을 듣다, 세삼 돌아가신 천상병선생이 그리워졌다.

 

2011.3.29

 



“농무”의 원로시인


1935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났다. 동국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56년 「문학예술」에 '갈대' 등이 추천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첫 시집 <농무> 이래 민중의 생활에 밀착한 현실인식과 빼어난 서정성,
친숙한 가락을 결합한 시세계로 한국시의 물줄기를 바꾸며 새 경지를 열었다.
70년대 이후 문단의 자유실천운동.민주화운동에 부단히 참여하여 당대적 현실 속에
살아숨쉬는 시편들로 탁월한 예술적 성취를 보여주었다.

지은 책으로 시집 <농무>, <새재>, <달 넘세>, <가난한 사랑노래>, <길>, <쓰러진 자의 꿈>,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뿔>, <낙타>와 장시집 <남한강>, 산문집 <민요기행>1,2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1,2 <바람의 풍경> 등이 있다.
만해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산문학상, 단재문학상, 대산문학상, 공초문학상, 만해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2008년 현재 동국대 석좌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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