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 화백 1주기 유작전
1주일에 5일 인사동 머물며
문화계의 허브 역할 했던
정 많은 화가 유작 모아 개인전

아버지 떠난 지리산 작품 외
목탄 드로잉 등 50여점 전시
“지아비 위한 아내의 씻김굿”

 

 

 


그는 지리산으로 갔을 거다. 웅대함은 아비요, 넉넉함은 어미인 그 품으로. 지리산은 그리움이었고 마치지 못한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일주일이면 닷새밤을 인사동에서 머물어 ‘인사동 밤안개’로 불리며 문화계 허브 역할을 했던 여운 화백의 1주기 유작전 ‘민족혼, 여운을 남기다’가 19일부터 25일까지 서울 종로구 관훈동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다. 1970년대 추상표현주의적인 작품에서부터 민중미술을 거쳐 목탄드로잉에 이르기까지 50여점을 2개 층에 걸쳐 펼친다. 지난해 1월 66세를 일기로 타계하기 전, 이리저리 궁리하려다 못한 제8회 개인전을 겸했다.
사람들은 대개 그를 두고 ‘정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다. 하룻저녁에 인사동 일대에 서너 군데 약속을 잡아놓고 장소를 옮겨가며 술을 마셨다고 한다. 수십년을 그리하여 으레 그러려니 된 터라 그에 얽힌 일화를 뚜렷이 기억하는 이가 많지 않다. 화가, 문인, 정치인, 종교인 등 두루두루 마당발이어서 내 사람이거니 챙기는 사람도 적다. 기억은 여운의 몫이고 챙기는 것 역시 그의 몫이었다. 1979년 오의정과 꾸린 수유리 신혼집은 시인, 묵객으로 북적였다. 배부른 새댁은 멋 모르고 국수를 삶아내고, 슈퍼에서 병술을 사서 날랐다. 수유리에서 ‘현실과 발언’이 태동하던 무렵이다. 광주항쟁 직후에는 황석영, 윤한봉 등 고달픈 이들이 그의 집에서 몸을 숨겼다. 한양여대 교수 월급은 주변인들 옥바라지와 주머니 가벼운 이들을 위한 술값으로 나갔다. 중국 노신대학 교환교수로 가서는 거기서 받은 월급을 모두 기부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여운은 퇴색한 부친의 사진을 늘 지갑에 넣고 다녔다고 한다. 부친 여창렬은 일본 와세다 대학을 나와 해방 뒤 여운형의 건준에 참여하고 좌우합작운동에 간여했다. 한국전쟁 중에 지리산 자락에서 행방불명되었다. 아비에 대한 기억이 없는 여운은 해남여고 교장을 지낸 모친한테서 소문처럼 들었을 터다. 어쩌다 남북회담이 열리면 혹시 아비의 소식을 들을까 하여 북한대표 숙소 언저리를 헤맸다고 한다.



 

그의 타계 1주기를 맞아 유고전이 19일부터 열린다. 아래 작은 사진은 ‘지리산’ 연작 중 한 작품. 오의정씨 제공
 


그의 화력은 가족사에서 확대된 슬픈 민족사와 일치한다.
1947년 전남 장성에서 난 그는 홍익대와 같은 대학원 서양학과를 졸업했다. 1970년 모더니즘 계열의 작품 ‘창’으로 1970년 한국미술대상전에서 우수상을 차지했다. 그해 김환기가 초대작가로 대상을 받았다. 창 연작은 유리창을 화폭 삼아 신문지 조각들을 콜라주한 모더니즘 계열의 작품이다. 일부 작품에서는 120년전 갑오농민전쟁을 이끈 전봉준 등 역사적 주제가 눈에 띈다. 1960년대 말 그는 친구 이두식을 통해 황석영을 만나고, 고은 신경림 백낙청 이문구 김지하 현기영 최민 유홍준 리영희 백기완 등 민족예술가들과 교류했다. 1985년 김윤수 신학철 오윤 김용태 주재환 민정기 등과 함께 민족미술협회를 창립해 2004년부너 4년간 회장을 지내며 민중미술 계통 그림을 그렸다. ‘동학’, ‘단절시대’, ‘별들의 전쟁’, ‘세상굿’ 등 민화풍 그림, ‘실향민’, ‘거리에서’, ‘먼 산 빈 산’, ‘곰나루 터’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 무렵 그는 장지를 즐겨 이용했다. 2006년 연 개인전 ‘검은 소묘’에서 목탄으로 그린 풍경화를 선보이는데, 말년에 선택한 목탄이 작가의 몸짓을 날로 드러내는 미디어인 점은 그가 소재로 삼은 철원, 대추리, 북한산, 지리산 등이 역사적인 장소인 점과 연계된다. 분단, 통일 등을 직접 말하기보다 말없음으로 말하는 초심으로 옮아갔다고 할까. 어쩌면 누르고 눌러온 속엣말을 펼칠 그만의 수단을 비로소 얻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코올에 쩔은 그의 몸은 1994년 간경화를 진단받은 이래 가파르게 기울었다. 그림만 그리고 싶다는 바람은 2012년 정년퇴임 하면서 이뤄졌지만, 새로 사들인 캔버스를 다 쓰지 못한 채 타계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붓을 들고 마주 앉았던 그림은 아비가 사라진 지리산이었다.
그의 아내 오의정씨는 “여운은 병상에서 비로소 지아비로 돌아왔다”면서 “이번 전시는 죽은 지아비를 위한 아내의 씻김굿”이라고 말했다.


한겨레신문 /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임지호, 인사동 리서울갤러리에서 3월25일까지 전시

 

서양화가 임지호씨의 제10회 개인전이 인사동  리서울 갤러리에서 3월5일부터 25일까지 열린다.   '상상의 시작'이란 부제로 소품 회화작품을 주로 전시한다. 일상, 순수, 세월, 인연, 꽃밭 등의 단어가 제목으로 들어간 작품들로 예술적 상상과 영감, 삶의 쉼표를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편완식이 만난 사람] 그림 그리는 방랑식객 임지호

 

캔버스란 접시에 요리 담아… 누군가의 허기진 배 채워주겠죠”

임지호씨는 “음식은 복덩어리라 먹는 자는 복을 받는다는 감사한 마음을, 만드는 자는 복을 짓는다는 정성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산과 들, 그리고 바다에 자생하는 모든 풀과 해초 등을 식재료로 삼아 나름의 요리를 만들어 가는 자연요리 연구가 임지호(59)씨. 그가 인사동에 나타났다. 전국을 누비며 할머니들의 토종 손맛을 구걸하고, 산야에 널려 있는 자연요리재료들을 채집하던 이가 전시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오래전에 그가 운영하는 양평의 레스토랑에서 서너 번 그를 마주한 적이 있다. 전원속에서 작업하는 작가들을 취재하다가 요기를 해결하기 위해 우연히 들른 곳이 그의 레스토랑이었다. 그가 일을 마치고 그림을 그린다는 얘기를 했지만 그저 호사스러운 취미일 것이라고 흘려들었다. 이후 그의 전시소식이 간간이 들려왔다.


인사동 거리에서 맞닥뜨린 그가 다짜고짜 그의 개인전이 열리는 전시장으로 이끌었다. 그림들을 둘러보며 그의 이야기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요리 한 접시가 캔버스에서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림에서 음식이 보인다는 사람들의 평가가 괜한 말이 아니었다. 방랑식객으로 유명한 그가 왜 그림을 그리게 됐는지 우선 궁금했다.

“누구에게 필요한 음식이나 축하해 주기 위한 음식을 만들 때 그 사람에 맞는 것을 우선 그려보게 됩니다. 일종의 스케치이자 영감의 기록이지요. 음식 디스플레이도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하다보니 그림이 됐습니다.”

적당히 보기 좋게 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하자 그가 손사래를 쳤다. 하나의 법이라며 그림에서의 화법 같은 것이라고 했다.

“성공하고 싶은 사람에겐 꿈을 상징하는 씨앗 요리를 해 줍니다. 꿈의 씨앗을 키우라는 의미지요. 성공의 색인 황금색 열매와 채소류 요리가 좋아요.”

그는 용기가 부족한 사람에겐 우주적인 용기를 상징하는 검은색 요리를 해준다. 청정함이 필요한 이에겐 푸른색 음식을, 순수함이 요구되는 자에겐 흰색 식재료를, 열정이 부족한 이들에겐 붉은색 요리를, 사랑이 결핍된 이에겐 핑크색 음식을 마련해 주는 식이다. 화가들이 색을 다루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림에서 선 못지않게 음식에서의 선도 중요합니다. 선은 에너지이기 때문이죠. 요리를 직선과 곡선으로 배열했을 때 느낌이 다릅니다. 식재료를 사각, 삼각, 원으로 잘랐을 때 맛이 달라져요.”

그는 천천히 갔으면 하는 사람에겐 빠른 직선이 아닌 느린 곡선의 요리를 해 준다. 함께 하는 삶이 필요한 사람에겐 식재료를 엉켜있게 해서 서비스를 한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몸은 인식을 하게 됩니다. 몸이 따라주면 생각도 따라주게 돼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삶이란 결국 자신을 진화시켜가는 행위지요.”

그는 이런 식으로 색상과 선을 선택해 가며 그림을 그렸다. 드로잉만 3000여점을 했다. 요즘엔 스케치 없이도 요리를 한다. 완숙한 경지에 오른 화가의 붓놀림이라 할 수 있다. 캔버스라는 접시에 요리를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제 그림이 어느 누군가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리란 믿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제겐 현실을 넘어선 환상 여행입니다.”

맛과 멋이 접시와 캔버스에만 머물라는 법은 없다. 우리 모두의 영혼과 육체 속에서 수많은 반복의 자맥질을 하면서 행복이란 열매를 키워내고 또 다른 나와 너를 다듬고 보듬는 것이 아닐까. 그의 그림을 빈 가슴에 듬뿍 담아 본다. 봄날의 향기, 힘, 그리움 등이 벅차게 몰려든다.

그의 관심사는 자연재료와 그것을 조상 대대로 어떻게 먹었는가이다. 바닷가와 산속에 몇 년씩 머물거나 전국을 유랑하며 우리 손맛을 찾아나선 이유다.

“우리의 젓갈과 장문화에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 땅에서 생존케 해주는 지혜가 숨겨 있습니다. 조상들이 미래세대에게 최소한의 생존조건을 마련해 준 셈이지요.”

그는 아파트 등 생활환경 변화로 전통의 가치들이 사라져 버린다면 우리의 미래를 잃는 것이라 했다.
“공동체 회복 차원에서라도 아파트 등의 화단에 공동의 장독대를 마련하는 운동이 필요합니다.”

재래 간장엔 해독작용이 있고 아미노산이 풍부하다. 된장엔 저항력을 높여주는 성분이 다량 함유돼 있다. 전통음식이 몸을 살리는 지혜의 보고라는 얘기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게장을 담가 그 위에 참기름을 부어 부패를 방지하기도 했다. 찬 성질의 참기름이 밀폐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았다.



작품 ‘품바 새’ 옆에 선 임지호씨. 각설이 같은 그의 삶에서 음식은 생명살림이고 그림은 영혼의 쉼터였다.


그는 각종 첨가제나 조미료가 인간의 오각을 망가뜨리는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향이나 색 등을 왜곡, 획일화시켜 ‘그 자체’의 맛의 감성을 잊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재료의 본맛이 바로 몸의 건강한 요소라는 논리다.

“음식은 땅의 소식을 하늘에 전하는 것입니다. 하늘은 바로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들이지요. 우리는 그 소식을 온전히 느껴야 합니다. 인간도 자연이기에 그렇습니다.”

요즘엔 땅에서 자란 것들도 자연산보다는 인공재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자연산이 영양소 100%라고 한다면 재배한 것은 영양소 15% 정도에 그치고 있습니다. 봄이 됐으니 온가족이 소쿠리를 들고 들과 산으로 나가 각종 자연산 나물을 캐 한 끼 식사를 준비해 보십시오. 가족 화목에도 좋지만 필요한 건강 영양소를 100% 섭취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는 우리 주변 산야에 널려 있는 풀들에 주목하라고 한다. 이 시대에 맞게 진화한 먹거리들이라는 것이다.

“이 시대의 풀과 나무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성분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자연진화에 순응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때 인간은 건강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예를 들어 질경이가 지천으로 흥했을 땐 돌림병이 유행했다. 예로부터 질경이는 바로 그런 돌림병에 특효 성분을 지닌 것으로 알려졌다. 자연은 그런 방식으로 흥하고, 진화하고, 준비했다.

“인간이 요리하는 것은 자연에 가장 잘 순응하려는 몸짓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11살 때부터 라면집, 횟집, 공사판 함바집, 중국집 등을 떠돌며 요리를 배웠다. 한때는 호텔 레스토랑에서도 일을 했다. 어느 순간부터 숙명처럼 자연재료와 전통요리법에 빠져들었다. 서울 강남에서 자연요리전문점을 3년간 운영하기도 했다.

“제가 가는 길은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성공모델은 아니어도 가야 할 모델만큼은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의 이런 생각에 강원도 화천군이 화답하고 나섰다. 그가 주도하는 산촌의 자연요리학교가 내년쯤이면 가시화될 예정이다. 외국인 학생도 받아들여 화천을 식문화 혁명의 세계적 메카로 키운다는 포부다.

세계일보 /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wansik@segye.com


한민족 역사성화 61점을 완성한 최종린 화가 인터뷰

 

 ▲ 5일 '한민족 역사성화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가운데 작품 <신시개천>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최종린 화가


“상고사를 되찾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은 많았죠. 저도 국민의식을 깨우는 작업을 해왔기 때문에 (이번 전시가) 그분들의 해온 일이 음식이라면 그 위에 조미료를 뿌렸다고 봅니다. 이것을 시작으로 대중적으로 더 재밌는 콘텐츠가 많이 나와야 해요.”

지난 5일 서울 인사동 갤러리이즈 1층에서 만난 최종린 화가(44)는 선도문화진흥회(이사장 만월 손정은)가 주최한 한민족 역사성화 전시회(클릭)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최 화가는 20대 초반에 선도(仙道)수련을 했다. 그의 그림이 ‘선仙의 세계’를 담게 된 계기다. 그동안 미국 애리조나주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지난 2009년 선도문화진흥원의 의뢰를 받아 마고시대부터 단군조선시대까지의 역사를 5년 동안 61점의 그림으로 완성했다. 전시회는 17점이 출품됐다.

“한 작품씩 계획적으로 하지는 않았어요. 떠오르면 바로 그렸죠. 안 떠오르면 수행하거나 등산하고 그랬습니다.”

전쟁의 군신(軍神), 치우천왕의 다른 모습은?

올해 브라질 월드컵이 열린다. 이날은 100일을 앞둔 붉은악마와 시민 1천여 명이 서울광장에서 출정식도 했다. 붉은악마는 배달국 14대 ‘치우천왕’으로 유명하다.

치우천왕을 처음으로 그린 최 화가는 “제일 극적인 인물이라 재밌게 그렸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그런데 그림을 자세히 보면 전쟁에 나서는 장수의 모습이지만, 무섭지가 않다.

“치우천왕을 지배자의 모습으로 패국적으로 그린 그림도 있습니다. 저는 힘도 있으면서 백성들을 품는 연민의 모습도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리게 되었는데 의도했던 것에는 많이 못 미쳐요.(웃음)”

치우천왕은 동양의 군신으로 숭앙됐다. 한고조 유방이 전쟁에 나갈 때마다 치우 천왕에게 제를 올렸다고 전한다.

최 화가는 “여러 자료를 보면 덕(德)으로 다스린 모습도 있다. 그런 부분에서 시각을 달리해서 봐야 하지 않나”라고 말했다.

백성과 같은 옷을 입은 ‘단군’

최 화가의 말을 듣고 나니 그림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왕의 옷이 백성들과 같은 점도 흥미로웠다.

“너무 권위적이지 않게 일반 백성과 차이가 없도록 표현했습니다. 배달국이 밝은 땅을 나타내죠. 태양을 닮은 옷인 흰옷을 주로 입었습니다. 왕과 신하가 다르다는 것보다 함께 아우르는 상징일 수 있죠. 백성과 비슷한 하얀 옷으로 진리를 품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이어 <신시개천> 그림으로 자리를 옮겼다. 배달국 1대 거발환(居發桓) 환웅이 나라를 세우고 신단수 아래에서 신시(神市)를 개천하는 모습을 그렸다.

지난 2004년 천안 국학원 개원 기념으로 전시한 <신시개천도>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한 손에 청동거울과 방울을 들고, 또 한 손은 검을 치켜든 모습이었다. 3천여 명의 백성들보다 더 높은 단상에 있는 환웅의 모습은 그림을 압도한다. 이에 반해 <신시개천>에서 환웅은 신하들과 같은 위치에서 검을 들었다. 그러나 환웅이 높이 든 칼의 뜻은 다르지 않다고 밝혔다.

“검은 법입니다. 우리 민족의 천지인(天地人) 사상이죠. 근본적인 법을 들고 나왔다고 보면 됩니다.”



▲ 5일 '한민족 역사성화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가운데 최종린 화가가 <배달국 14대 치우 환웅>을 보고 있다(사진=선도문화진흥회)
 
스스로 자랑스러운 역사를 만들어야

한민족의 역사를 담았다고 해서 동양적이지 않을까 했는데 서구적인 느낌도 든다. 초등학생이 보면 환웅 할아버지가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간달프’라고 볼 수도 있겠다고 농을 던졌다.

“그런 느낌이 있죠. 동양적이지도 않고 서양적이지도 않은 그런 느낌을 주고 싶었습니다. 모든 인종을 복합적으로 그리다 보니 서양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네요.(웃음)”

인사동은 외국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그들은 작품을 어떻게 봤으면 좋겠는지 물어봤다.

“어떻게 보면 우리 민족 우월주의나 국수주의라고 볼 수도 있는데, 근본적인 사상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인류를 포괄할 수 있는 홍익정신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역사보다 그 분들이 가진 정신과 사상에 초점을 맞춰서 보면 그분들과 우리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공감하게 될 겁니다.”

단군조선 47대 마지막 단군 고열가를 그린 <2천년 후의 약속>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이 그림에서 주목되는 것은 산을 배경으로 뒤돌아선 단군의 표정이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을 담고 싶었어요. 나라를 폐관하고 산으로 수행하러 가는 모습에서 민족적인 애환도 있을 것이고 어떤 미래에 대한 희망도 있지 않았을까요? 감정을 초월한 면도 있습니다.”

최 화가는 우리 민족이 인류의 뿌리 민족이라고 하는데 우리 스스로 말하지 않고 중국이나 일본에서 역사를 조명할 수 있어야한다고 지적했다. 과거의 역사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미래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는 그의 말에 공감됐다.


■ 최종린(Al Choi)

1971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20대 초반에 선도수련을 했다. 이후 선仙의 세계를 그리기 시작했다. 선도수행과 명상은 그의 무의식을 깨워주어 그림 작업에 무한한 생명력과 창조력을 불어넣어 주었다고 한다. 그동안 미국 애리조나 주를 거점으로 활동했다. 지금은 국내에서 작업하고 있다.


2000년 세계밀레니엄 세계평화회의 전시(서울 코엑스)
2000년 개천절 행사 초대전
2003년 미국, sedon artist association 공동전
2003~2004년 미국, SHAA(sedona healing art association) 아트디렉터&전시 활동
2007~2009년 미국, jerome art association 공동전
2008년 NOISE 아리조나 매거진 인터뷰
2008년 미국, 스캇데일 갤러리 전시
2008년 미국, 세도나스토리 전시

[브레인 미디어] 글, 사진. 윤한주 기자 kaebin@lycos.co.kr

 

서양화가 이남희(ARTIST, LEE NAM HEE)

 

커다란 통유리가 멋스러운 서울 인사동 커피숍에서 작가와 만났다. 사람들의 발걸음은 분주하고 봄기운 생동감이 수줍게 창가로 스며들었다. 작품도 작가의 분위기를 닮는가 보다. 서정적 멜로디가 영감을 불어넣는 화면처럼 오렌지색 스카프를 길게 늘어뜨린 화가는 조용조용 진지했다.

 

                                                                                         서정의 향기, 45.5×38.0㎝ Mixed Media, 2010

 

피아니스트 유키 구라모토(YUHKI KURAMOTO) ‘ 로망스(Romance)’가 연서(戀書)처럼 가슴을 파고든다. 맨발로 강변을 천천히 걷듯, 선율은 물낯에 반짝였다.  “여유로운 마음을 담아 캔버스에 옮기려고 했고 그늘 속에서 잠시 머물 듯 편한 마음으로 붓을 들었다”고 작가는 기록했다.

”잔잔하고 평화로운 정물화(靜物畫). 그 숨결이 자그마한 손으로 나의 얼굴, 가슴을 어루만진다. 푸르른 초원언덕에 한 무리 새들이 날아들었다. 몸과 마음이 서로 배어 들 때 왜 눈물이 솟는지. 아마도 화가의 길은 그러한 내가 캔버스와 일체되는 일생의 여행이지 싶다”라고 말했다.

 

                                                                                         38.0×45.5㎝ Oil on Canvas

 

푸르스름한 이끼 뒤덮은 고성(古城)의 초원언덕에 곧 넉넉하고도 날카로운 침묵의 연륜(年輪)을 담은 소나타가 연주될 것이다.

한가로운 바람결사이 나풀거리며 날아가는 기억의 단편들, 유장한 선율에 묻은 이별의 비탄과 애틋한 그리움…. 숙명을 받아들인 깊은 강물처럼 색채는 흐른다.

 

 

                                                                                               91.0×65.2㎝ Mixed Media

 

화해 그리고 마음의 회복

파스텔 색조 화면엔 시간과 공간의 감각이 다감하게 말을 건네듯 다가온다. 겸손한 시선과 마주한 풍경의 파편들.

잔잔한 음률위에 낭송되는 한편의 서정시처럼 화면은 일상의 사소하고 순진한 순간의 감성을 확장시킨다. 동심(童心)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주인공과 함께 웃고 눈물 훔치는 심성의 자유!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부옇게 흔들리는 저녁안개 속 고독하게 서 있는 자아(自我). 비로써 바라본 스스로와의 화해(和解). 늦지 않았으리.”

 

이코노미 리뷰 / 권동철기자


추상화로 다시 태어난 전통 민화

 

 

 


참으로 먼 길을 돌아왔다. 나의 길을 찾기까지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서 온전히 자유로워지기는. 칠순을 맞아 고희전을 여는 서양화가 최홍순은 "이제야 형식에서 자유로워졌다. 길이 보이는 것 같다"고 했다.

화가에게 70이란 숫자는 의미가 깊다. 중진에서 원로화가로 넘어가는 분기점이 되기 때문이다. 20대 중반의 나이에 화단에 데뷔했다면 화업 반세기를 지난 시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칠순을 맞이한 최홍순 이름 앞에는 ’화업 30년’이라는 타이틀이 붙는다. 마흔 살의 늦은 나이에 첫 개인전을 연 탓이다.

어려서부터 화가가 꿈이었으나 서울대 미술대 졸업 후 미술교사로 생업에 나선 그는 현실적인 이유로 그룹전에만 참여했지 개인전을 미뤘다. 그러다 더는 방치할 수 없어 1984년 마흔이 되던 생일날을 잡아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가 30년간 화업을 조망하는 고희전을 서울 인사동 갤러리라메르 3층에서 연다. 1970~1980년대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120여 점이 걸리는 대규모 전시다. 그의 대표작은 2012년부터 그리기 시작한 ’생ㆍ률(生ㆍ律)’. 삶과 리듬이라는 의미의 이 타이틀로 그는 각 존재의 몸짓을 생명력 있는 환희로 풀어낸다.

"전통 민화에 모든 것이 있더군요. 자유분방하고 파격을 즐겨 한 민화에서 모든 모티브를 얻었어요. 제 그림은 어찌 보면 민화에서 표현되는 색과 형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지요."

그는 우주와 자연의 생명력을 빨강 파랑 노랑 삼원색으로 붓질한다. 새와 물고기, 작은 곤충 등은 원시적인 형태로 언뜻언뜻 모습을 보이지만 화폭을 싸고 감도는 거대한 생명의 소용돌이에 있을 뿐이다.

"젊었을 때에는 어떻게 하면 전에 없는 그림을 그릴 수 있나, 어떤 형식을 만들어야 하나에 몰두했지요.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의무감과 억압에서 해방됐어요. 자기 길을 찾는다는 것은 그림 안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로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선화예술학교 미술주임으로 은퇴한 지 10년이 지났다. 은퇴 후 10년간 개인전을 네 번 열 정도로 왕성한 창작열을 보이고 있다.

"지금이 모든 면에서 가장 작업하기 좋은 때에요. 이제는 매년 전시를 열 겁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그림을 처음 선택했을 당시로 돌아가면 답이 보이더군요. 허허."

전시는 3월 5일부터 11일까지.
(02)730~5454

매일경제[이향휘 기자]


 

 

 


1980년대 작가의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30년에 걸친 아크릴화 4점을 비롯한 소묘 53점이 전시된다.
이 전시는 강요배의 드로잉만을 한 공간에 모아 선보이는 첫 전시로 작가의 작품세계를 한층 더 깊게 이해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드로잉은 작가의 생각이나 느낌을 순수하고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하나의 독립된 회화 예술로서 가능성이 꾸준히 탐구되고 있다.
80년대 삽화가로 활동하기도 했던 강요배는 수많은 소묘작업을 통해 작가의식과 작품세계를 형성하였다.
또한 제주출신인 강요배는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정주처를 찾아 다시 제주도로 돌아왔을 때에 바닷가와 들판에서
풀꽃과 풍경들을 스케치하며 온몸으로 고향 땅을 느꼈고, 이런 과정을 통해 섬 땅의 자연은 그의 마음 속 풍경으로 자리 잡았다.
이렇듯 소묘는 강요배의 큰 테마인 민중성과 리얼리즘의 근간이자 토대가 된다.
강요배의 드로잉은 낭만적 재해석과 같은 조형적 변주 없이 대상의 존재 자체를 덤덤하고 정직하게 드러내고자 하며,
이러한 그의 소묘는 오히려 관객에게 더 큰 의미를 읽어낼 계기를 부여한다.
이 전시는 강요배의 드로잉이 주는 담백하고 꾸미지 않은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의 작업실은 그의 그림 색깔만큼이나 칙칙했다.
표정 또한 세상의 고민을 혼자 안은 것처럼 우울했다.
그는 지독한 “애정 결핍증” 환자다.
유년기부터 줄 곳 사랑의 고갈로 고생해 왔다.
어린 나이에 부모와 헤어져 혹독한 삶을 이겨내야 했기 때문이다.
한 때는 실어와 대인기피증까지 있었다.
이제 환갑을 겨우 넘긴 나이지만 귀도 잘 들리지 않고, 말도 어눌해 의사소통조차 힘들다.

이청운씨의 고독한 내면세계를 알아보기 위한 몇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림에 등대가 자주 등장하는데, 무슨 상징적인 의미가 있나요?”
“그 등대는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어머니의 상징입니다”
맞았다. 바로 등대가 작가 이청운에게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자 희망이었던 것이다.
아니, 작품의 기조를 이루고 있는 한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이 살아 온 어두운 날들의 기억들을 더듬는 듯한 그림에는 가파른 산동내,
고단한 포장마차, 희미한 부둣가도 자주 등장하는데,
그 것은 작가의 정직한 일상적 삶과 밀착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그림엔 인간의 영혼을 슬쩍 건드리는 이청운만의 “이청운표” 색깔 언어가 있다
그 간결하면서도 색에서 뭍어나는 처절함이 이청운 그림의 최고 매력이다.

그는 도시의 화려한 겉모습보다는 그늘진 서민들의 삶에 항상 초점을 맞추어 왔다.
이는 삶의 현장을 가감 없이 기록한 자전적요소로, 작품 한 점 한 점이 현실을 반영하듯
작가 자신이 살며 체험해야만 했던 처절한 현실사회와 인간 존재에 대한 통찰로 표현체계를 이루었다.
이는 개인적 체험의 한계를 넘어 당대의 문화적 소산으로 자리매김 될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 것은 격동하는 역사적 상황에서 미술이 그 시대와 사회를 어떻게 반영해 줄 수 있는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지하철을 타고 오며 농담삼아 몇마디 물어 보았다.
“작품이 팔려 목돈이 생기면 어디에 쓰고 싶어요?”
“그야 마누라 갖다 줘야지” 정말 이청운다운 솔직한 대답이었다.
이제 큰 딸은 직장생활을 하고 있지만 작은 딸은 대학생이라 어려움도 많을 것이다.
천사로 보였던 아내가 여자로 보이기까지, 힘들었던 지난 날들이 궁금했으나 입을 다물었다.
앞으로의 작업계획을 묻는 마지막 질문에서 의외의 답이 나왔다.
"앞으로는 대중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긍정적인 그림을 그릴 생각입니다."
그의 그림이 세상을 주목하게 한, 그 칙칙하고 어두운 삶의 한이 빠진다면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다.

이청운의 그림들은 자신의 고통과 한에서 잉태되었기에
정상에 오른 지금까지도 가난과 삶의 질곡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작가 이청운이 짊어지고 가야 할 영원한 짐인지도 모른다.
아마 작가가 세상을 등진 훗날, 세인의 입에 오르 내리며 가치를 더해 갈 것이 분명하다

 

 

 

 

 

 

 

 

 

 

 

 

 

 

 

 

 

 

 

 

 

 

 

 

 

 

 

 

 

 

 


'금보성아트센터'개관 초대전으로 원로서양화가 정기호씨와 한글회화작가 금보성씨의 2인전 개막식이 지난 25일 오후6시 평창동 '금보성아트센터'1,2층 전시실에서 있었다. 정기호선생께서 몸이 불편하여 참석하지 못했으나 부인 조경석씨를 비롯하여 서양화가  금보성, 박양진, 김하은, 사진가 정영신씨 등 많은 내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이 전시는 11월 15일까지 이어진다.

                                 

 

 -정기호씨 작품-

 

 

 

 

 

-금보성씨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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