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일 전, 동자동 쪽방 촌에 들어왔습니다.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을 찍으러 와 보니, 너무 눈물겹습니다.
여지 것 살기가 힘들어 불평만 해 왔는데, 부끄러웠습니다.


한 평 남짓한 쪽방에 사시며 짐이 많아 다리를 못 펴고 주무시는 노인도 많습니다.

그들의 방에 가려면, 대낮인데도 어두워 조그만 후레쉬를 지녀야  할 정도입니다.

그 경사진 좁은 계단을 오르다 잘못하면, 떨어져 죽을 수도 있습니다.


대개들 하는 말이 ‘요즘 굶어 죽는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몸만 움직이면 무료급식도 늘려있고, 정부에서 지원하는 기초생활수급비로 먹고 사는 데는 지장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들도 사람답게 살고 싶어 합니다. 20여명이 사는 쪽방건물에 화장실이 하나뿐이니, 아침이면 곤욕을 치룹니다.

그러한 육체적 고통보다 더 무서운 건 사회로 부터의 소외고 외로움입니다.


지난 추석 무렵, 동자동 쪽방에서 십 여 년 동안 사셨던 박정용(71)씨가 목메어 자살했습니다.

경찰이 가족을 찾아 불렀는데, 10여 년 동안 제대로 안 먹고 모은 돈이 1700만원이나 나왔습니다.

가족이란 자는 돈만 챙겨가고, 시신은 그냥 두고 갔습니다.


어떻게 동방예의지국이라 자처하는 나라가 이 지경까지 되었습니까?


내가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은 사진을 찍어드리며, 어려운 실상을 알려 구원의 손길을 요청하는 일 뿐입니다.
부지런히 쪽방촌의 비참한 실상을 기록하는 것은 물론, 영정사진과 그들의 삶의 모습을 찍어 드리며

조그만 위안이라도 되어주고 싶으나, 여력이 없습니다.


5X7사이즈와 8x10사이즈의 사진을 뽑을 수 있는 출력기와 잉크, 종이를 후원받고 싶습니다.

엡숀이나, 캐논 등 여러 회사 중에 동자동의 빈민들을 도와 줄 업체는 없는지요?

혹시, 그 방법을 아시는 분이 계시면 좀 알려 주십시오.



사진,글 / 조문호




























무자비한 경찰의 물대포를 맞아 일 년 가까이 식물인간처럼 사셨던,

백남기 선생의 주검을 두고 일어나는 일련의 일들에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

이제 공부하는 학생이 권력에 줄 대려고, “시체팔이‘란 괴변으로 말썽을 일으키지 않나,

최고의 지성이란 서울대 의사들이 권력에 겁먹어 어린애들도 다 아는 사인을 병사라 적지 않나,

정의를 최고의 가치로 일해야 할 검찰들이 억울하게 생을 마감한 시신을 꺼내 한 번 더 죽이려고 몸부림치지 않나,

서민들은 힘들어 죽을 지경인데, 대통령이란 인간은 골프 살린다며 서민들 염장이나 지르는,

이런 개 같은 나라에 더 이상 살아서 뭐하겠나?

이제 마지막이란 각오로 불의에 맞서 싸우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양심이라고는 저당잡힌 이 정권을 향해 비폭력저항의 촛불시위 한다지만, 쓸데없이 힘빼지 말자.

죽도록 싸워 정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 땅에서 사라질지라도, 후손들에게 정의가 뭔지 알게해야 하고, 그런 세상에서 살게 해야 한다.

모두 나서자! 비명에 돌아가신 백남기 선생을 추모하러 장례식장을 찾아 조문부터 올리자.
그리고 물러서지 말자. 백선생을 죽음으로 몰게 한 세월호의 한을 풀기 위해서라도 끝까지 싸우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냥개에 맞서려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치열하게 싸우는 수밖에 없다.

백남기선생 따라, 부끄러운 이 나라를 떠나자.

그 날이, 닥아 오는 10월1일 오후3시다.

“백남기농민 국가폭력 살인정권 규탄 범국민대회”에 모두들 나서다.

힘에는 힘으로 맞서야 한다. 청와대까지 쳐들어가 박근혜의 무릎을 꿇게 하자.


사진, 글 / 조문호

아래사진들은 지난 26일의 백남기선생 장례식장의 모습과 오후2시에 열린 “백남기농민 상황 및 입장발표“ 기자회견장 모습이다.

































지루하게 끌어 온 제2회 최민식사진상 부정심사 의혹 문제를 매듭지으려는 자리가 ‘온빛사진가회’의 주선으로 지난 22일 오후4시부터 충무로에 있는 ‘영상미디어센터’에서 열렸다.

다큐멘터리사진가 석재현씨의 사회아래, 이 문제의 핵심이었던 이상일 당시 운영위원장과 정주하 심사위원장, 그리고 이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온몸을 던졌던 이광수 사진비평가와 ‘눈빛출판사’이규상대표가 패널로 자리했다,

그런데 안성용씨 작품을 지지한 송수정씨는 물론 다른 심사위원들은 왜 부르지 않았을까? 그들은 이 문제에서 아무런 관계가 없단 말인가? 특히 심사위원 이갑철씨는 1회 수상자로서 최광호씨와의 관계가 예사롭지 않다. 그 심사에 관련되었던 전원을 불러내 의혹을 푸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다 알고 있는 내용의 질의나 변명으로 일관된 토론보다 방청석에 앉은 사진인들의 질의 듣는 시간을 더 많이 할애했어야 했다

인본주의와 사회정의를 추구한 최민식선생의 사진철학을 지향한다는 1회 때의 공모 목적도 슬그머니 사라졌고, 미 발표작으로 한정된 공모요강이 한마디 언급도 없이 기 발표작도 가능하다는 등, 엿쟁이 마음대로 방향을 바꾸었다. 최광호씨의 출품작이 발표작인데다, 최민식선생의 사진철학과는 전혀 동 떨어진 작품이었으니, 어찌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 하지 않겠는가?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볼 수 없는 최광호씨의 ‘천제’라는 출품작에 대한 평가는 이미 박진호씨가 세세하게 밝힌 내용처럼, 일고의 가치 없는 사진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천제’라는 출품작 제목의 한자까지 틀려 ‘천제’에 대한 정확한 뜻도 모른다는 의혹까지 샀다. 그 외에도 의혹을 살만한 일이 한 둘이 아닌데, 이처럼 문제투성이 작품을 밀어 붙인 것이 부정심사가 아니고 도대체 무어라 말인가?

사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처럼 이왕이면 가까운 사람에게 상을 주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라 그 문제에서는 대부분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공모전이나 각종 시상의 운영시스템 자체를 뜯어 고쳐야 한다는 생각은 오래 전부터 해왔다. 훌륭한 원로나 중진에겐 돈보다 명예를, 열심히 현장에 매달리는 가난한 사진가에게는 조그만 지원금이라도 나누어 주는 실질적인 사진상이 필요한 것이다. 제도적 개선이 더 시급했던 사진상 문제였기에, 이 문제의 핵심인 이상일씨의 사과 한마디로 사진계의 화합을 이끌 것으로 기대했으나, 예상은 한참 빗나갔다.

“최민식사진상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는 유명 사진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가난한 친구인 최광호씨를 지지했다”는 이상일씨 발언 자체가 부정심사임을 스스로 밝힌 꼴이다. 그리고 이상일씨의 발언들을 종합해 보면, 자신이 이 상의 주체로서 마음대로 주물렀다는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났으나 반성이나 사죄의 기색은커녕, 야유 썩힌 웃음만 흘리고 있었다.

토론의 장을 지켜보던 온빛사진가회 조대연회장과 ‘스페이스22’의 정진호 대표께서 사과를 유도하는 발언을 하였으나, 그는 변명과 자기자랑에만 치중하다 끝까지 사과 한 마디 하지 않고 끝냈다. 이 건 우리나라 전체 사진인 들을 능멸한 처사다. 오죽하면 토론자로 나선 이광수교수가 사진인들에게 대신 사과했을까?

“아! 이 사람 정말 구제할 수 없는 사람이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아마추어 단체인 ‘사협’에서 일어 난 문제라면 신경 쓸 일고의 가치조차 없다. 배울 만큼 배웠고, 옳고 그럼을 훤히 아는 자가 저지른 일이라 더 화가 난 것이다. 안타깝지만, 더 이상 토론할 대상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법적으로나 인간적으로 매장시켜, 그 뿌리 자체를 뽑아야한다는 판단을 했다.


먼저, 우리나라 사진판에 끼리끼리 나누어 먹는 관행은 원로사진가들이 먼저 만들었다. 지금 문제가 되는 비리들도 선생들께서 만들어 놓은 구태를 직계 제자들이 이어받아, 돌려 먹은 것이다. 이런 일이 터졌으면 진작에 제자들을 불러 타이르거나 이런 공론의 자리라도 나오시어 발전적으로 이끌 수 있는 충언을 아끼지 않아야 하는데, 아무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셨다. 하기야, 무슨 면목으로 나서겠냐마는, 그래도 나서야 했다. 노학자로서 사진계 발전에 앞서, 사회정의를 위해...


공론의 장에 참석한 사진가로는 엄상빈, 박진호, 정진호, 김문호, 김남진, 성남훈, 신동필, 강제욱, 이상엽, 조대연, 이기명, 천수림, 박이찬, 이규철, 박영규, 김주혁, 서준영, 윤정원, 황서진, 남 준, 곽명우, 이은숙, 이혜숙, 강홍구, 이세연씨 등 60여명이 좁은 토론장을 가득 메웠다.


공론의 자리가 파한 뒤에는 모두들 술집에 모여앉아 독주로 분노를 다독여야 했다. 그 파편이 튀어 우리 마누라의 가슴에 박혔다.

이제 내 갈 곳은 없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8일엔 일찍부터 김신용 시인을 만났다.

양동 구석구석을 돌아보고, 인사동 거리를 쫒아 다녔으나 목추길 곳이 마땅찮았다.


문 걸린 유목민앞에서 서성이다, 툇마루로 발길을 옮겨야 했다.

들어서다, 박중식시인의 처남이 굽는 빈대떡에 쏠렸다.

오븐에서 던져, 돌려 눕히는 솜씨가 대단했다.

그 빈대떡은 바싹하고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빈대떡 한 장과 김신용씨가 마실 맥주와 막걸리를 시켰다.

이 집 막걸리는 뒤늦게 취하는 것을 알지만, 맛에 꽂혀 마냥 들이켰다.

두 시간 동안 홀짝 홀짝 마셨으나 취기가 오르지 않았다.

양동에 있다는 시나리오작가 최건모씨도 부르고, 김명성시인도 불렀다.

된장비빔밥으로 마무리하고 유목민으로 옮겼다.

 

그 때까지 유목민은 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 집 앞에 퍼져 앉아, 안주는 푸른별 주막에서 배달시키고,

술은 옆집에서 가져와 마셨다.

김명성씨가 등장하니, 젊은 사업가들도 줄줄이 나타났다.

이상훈, 김민수씨가 등장했고, 뒤늦게는 김태서, 신상철씨도 나타났다.

푸른별이야기에 잠시 들렸더니, 이미례, 박기성 내외도 있었다.

 

! 큰일 났다. 툇마루에서 마신 취기가 서서히 오르기 시작했다.

입에서 걸러지지 않은 소리가 마구 나오기 시작했고,

술에 잠들지 않으려고, 여기 저기 쫒아 다녔다.

심지어, 사진 찍는다며 담장 위에 기어오르는 지랄발광도 했다.

 

그 때 마침, 인사동을 떠도는 악사 강다식씨가 지나갔다.

한 곡 켜라고 불러 세웠는데, 역시 분위기를 가라앉혀 주었다.

무슨 곡인지 기억에는 없지만, 가날 픈 바이얼린 소리가 마음을 건드렸다.

구슬프다 못해 슬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니기미~

김태서씨의 막춤이 어울리진 않았지만, 마치 사회를 향한 조롱 같았다.

 

 

사진, / 조문호





















































 

 





양동에서 김신용시인을 만나, 인사동에 들렸다.
추석연휴가 끝나는 날이라 거리는 번잡했다.
건들거리기 좋은 날씨까지 받혀 줘, 많은 사람들이 북적였다.
한복들을 곱게 차려입은 학생들의 행렬은 들녘에 핀 코스모스 같았다.
외국관광객들의 눈길이 내려 꽂혔다.

부처를 밟고 서서 “깨어나라”는 피켓을 든 사나이도 있었다.
사람들이 많으니 인사동에 별의 별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
그 화려한 거리풍경 속에는 가난한 이들의 안타까운 삶도 숨어있다.
빈 깡통을 줍는 노인도 있고, 막걸리 한 잔으로 끼니를 때우는 이도 있다.
더위가 물러나 잘 팔리지 않는다는, 부채 파는 노인의 한숨이 내려앉는다.

거리는 펄럭이지만, 인사동은 외롭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8일, 김신용시인과 양동에서 만나기로 했다.
서울역 주변에서 쪽방사람들을 찍는 나를 도우려, 시흥에서 나온 것이다.
양동은 그가 지게꾼으로 일하며 시를 쓰 왔던 시작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그는 매혈은 물론, 정부의 산아제한 정책으로 시행된 정관수술을 두 차례나 받았다.

끼니해결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았는데, 그러한 부랑의 시절에 양동골방

(그 때는 쪽방이 아니라 골방이라 했단다)에 엎드려 양동시편을 쓰내어,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창녀촌이자 빈민굴인 양동의 풍경이 생생하게 묘사된 시편들은 '문학적 승화'가 어떤 것인지 보여줄 만큼 아름답다.





양동시편에 나오는 김신용의 '뼉다귀집'시 한 편을 읽어보라.


뼉다귀집을 아시는지요
지금은 헐리고 없어진 양동 골목에 있었지요
구정물이 뚝뚝 듣는 주인 할머니는
새벽이면 남대문 시장바닥에서 줏어온
돼지뼈를 고아서 술국밥으로 파는 술집이었지요
뉘 입에선지 모르지만 그냥 뼉다귀집으로 불리우는
그런 술집이지만요
어쩌다 살점이라도 뜯고 싶은 사람이 들렀다가는
찌그러진 그릇과 곰팡내 나는 술청 안을
파리와 바퀴벌레들이 거미줄의 현을 고르며 유유롭고
훔친 자리를 도리어 더럽힐 것 같은
걸레 한 움큼 할머니의 꼴을 보고는 질겁을 하고
뒤돌아서는 그런 술집이지만요
첫새벽 할머니는 뼉다귀를 뿌연 뼛물이 우러나오도록
고아서 종일토록 뿌연 뼛물이 희게 맑아질 때까지
맑아진 뼛물이 다시 투명해질 때까지
밤새도록 푹 고아서 아침이 오면
어쩌다 붙은 살점까지도 국물이 되어버린
그 뼉다귀를 핥기 위해
뼈만 앙상한 사람들이 하나둘 찾아들지요
날품팔이지게꾼부랑자쪼록꾼뚜쟁이시라이꾼날라리똥치꼬지꾼
오로지 몸을 버려야 오늘을 살아남을 그런 사람들에게
몸 보하는 디는 요 궁물이 제일이랑께 하며
언제나 반겨 맞아주는 할머니를 보면요
양동이 이 땅의 조그만 종기일 때부터
곪아 난치의 환부가 되어버린 오늘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뼉다귀를 고으며 늙어온 할머니의
뼛국물을 할짝이며
우리는 얼마나 그 국물이 되고 싶었던지
뼉다귀 하나로 펄펄 끓는 국물 속에 얼마나
분신하고 싶었던지, 지금은 힐튼 호텔의 휘황한 불빛이
머큐롬처럼 쏟아져 내리고, 포크레인이 환부를 긁어내고
거기 균처럼 꿈틀거리던 사람들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러나 사라지지 않은 어둠 속, 이 땅
어디엔가 반드시 살아있을 양동의
그 뼉다귀집을 아시는지요


 




김신용시인은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며 뼈를 깍는 괴로움 속에서도 좌절않고 시를 쓴, 투지의 작가다.

그리고 그의 맑은 사랑의 정신과 예민한 감성은 눈 부시도록 아름답다.

 소외층의 삶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동질성을 바탕에 두었기에 다른 구호적인 사랑의 시편과는 다르다.

어떤이는 한국의 장 주네(프랑스 부랑아출신 작가)나, 제2의 천상병이라고도 하지만. 그만의 감성은 비교할 상대가 아니다.





시집 “버려진 사람들”, “개 같은 날들의 기억”, “몽유 속을 걷다”, “환상통”, "바자울에 기대다"를 비롯하여

소설 “고백”, “기계 앵무새”, “새를 아세요”등 많은 작품들을 발표했고, 여기 저기 문학상도 많이 받았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노동의 시인일 뿐이다.






그와 함께, 지게꾼으로 살던 30여년 전의 기억을 더듬으며, 현장을 돌아 다녔다.
'힐튼호텔' 아래 벼랑길에 자리 잡은 그가 살던 3층 건물은 여지 것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마침, 그 당시 문학잡지 기자가 찍은 사진 몇 장을 챙겨왔는데, 외벽 타일까지 그대로였다.


 






-김신용시인이 가져 나온, 30여 년전 찍은 양동사진-






 

지금은 사라진 ‘뼉다귀집’ 터를 비롯해, 일 나가던 길목이나 주변 골목을 돌아보며, 회한에 빠져들었다.

지게꾼 최고의 자리인 '코스모스백화점' 전속지게꾼 자리를 자기보다 더 어려운 박인수씨에게 물려주고,

다른 일거리를 찾아 나선 일, 자신을 좋아했던 창녀의 "같이 살자"는 제안을 거절했던 일 등,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창녀가 살던 집을 돌아보고, 서울역이 내려다 보이는 구름다리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는 이야기도 했다.





김신용시인은 옛 ‘대우’그룹에서 주변 땅을 접수하기 시작하며 쫓겨났다고 했다.

폭력배까지 동원해  골방촌 사람들을 내쫒았는데, 자신은 독신이라 이주비 20만원을 받았다고 한다,

가족이 있으면 이주딱지를 주었으나, 그 딱지도 대부분 130여만원에 되팔았다고 했다.

딱지도 끝까지 버틴 사람은 훨씬 많이 받고 팔았지만, 버틴 독신자는 이주비를 30만원까지 주었단다.





양동은 '힐튼호텔'을 비롯한 거대한 빌딩들이 점령했지만, 아직도 퇴락한 골방촌의 면면을 간직한 곳이 많았다.

잘 난 사람들이 북적이는 그 빌딩 틈 사이에, 가난한 사람들이 끼어 진드기처럼 연명하는 것이다.

언제 철거될지 모르니, 집들은 낡을 대로 낡았고, 주변 환경조차 지저분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입주한 쪽방 건물이다. 4층 3호실인데, 전세없이 월세23만원














아직까지 여인숙이란 간판이 그렇게 많은 곳도 처음 보았다. 

더 놀라운 것은, 몸을 파는 양동사창가의 잔재들이 아직 남아 있다는 점이다.


쪽방촌 사람들의 고난과 마음의 상처를 다독여 줄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없는가?


사진, 글 / 조문호








태어 날 때부터 한국 기록에 대한 염원을 부친으로부터 전해 받았던 후지모토 다쿠미선생의 ‘사랑과 정신의 순간’사진전이

지난 9월 10일부터 오는 19일까지 인사동 ‘가나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립니다.

지한파사진가 구와바라 시세이 선생처럼 그 역시 한국의 풍물과 문화를 지극히 사랑한 사진가입니다.

80여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잊혀 가는 우리의 풍물과 문화를 세세히 기록해 두었습니다.

우리나라 원로사진가들이 소홀했던 기록들이 외국사진가들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부끄럽지만,

고맙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사진들은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를 기록한 한국의 모습입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아련한 향수에 빠져들게 하였는데, 아쉽게도 전시된 사진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마저 석탑 같은 문화재까지 뒤섞여있었는데, 다행히도 전시와 함께 ‘눈빛출판사’에서 펴낸 눈빛아카이브

‘내 마음 속의 한국’ 후지모토 다쿠미 사진집이 출간되었습니다.



무려 464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사진자료들은 작품이기 이전에 우리의 소중한 역사이기에

소장의 가치가 높은 사진집입니다.

가격은 33,000원, 




고향 없는 사람 어디 있고, 가족 없는 사람 있겠는가?
정처 없이 떠돌지만, 명절이 되면 더욱 그리운 게 가족일 게다.
남의 점포 앞에 자리 잡은, 이 중 늙은이는 지금 무슨 생각에 빠져 있을까?
지난날에 대한 원망과 후회로 가슴 아플 것이다.

그에게 위로의 노래라도 불러주고 싶다.

“세상을 원망하랴, 내 아내를 원망하랴.
누이동생 혜숙이야 행복하게 살아다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인생길은 몇 구비냐
유정 천리 꽃이 피네 무정 천리 눈이 오네“

2016,9,14_을지로2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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