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만 떠돌고, 찍은 이가 밝혀지지 않은 사진이 있습니다.
해방이 되며 서대문교도소에서 나와 감격스러워 만세 부르는 수감자들의 모습으로,

추측 컨데 신문사 기자가 찍은 사진인 것 같습니다,
오래된 역사자료집에 실려 있었고, 이젠 인터넷에서 유령처럼 떠도는 사진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빚진 사진이기 때문입니다.
사진을 찍은 작가를 몰라 원고 사용료를 드리지 못했거든요.
물론, 지금은 고인이 되었겠지만, 무덤이라도 한 번 찾아가 술 한 잔 올리고 싶습니다.

행여 사진의 주인을 아시는 분 계시면, 좀 알려주십시오.

그 내막은, 내가 사진을 처음 시작할 무렵인 40년 전 ‘감격시대’란 이름의 대규모 학사주점에,

이 사진을 메인사진으로 활용했습니다. 간판과 로고는 물론, 음악신청용지에도 그 사진을 사용했거든요.

복사한 사진을 술집 한가운데, 2m나 되는 크기로 프린트해 걸었는데도,

사진입자가 거칠었지만, 사진이 주는 분위기 자체가 감격스러웠습니다.

그 주점은 경남 진주의 불난 극장을 인수해 친구와 동업 했으나, 문을 여니 손님이 미어터졌습니다.

돈이 많아지면, 욕심이 생기는 건 인지상정이라, 친구를 잃을까 물러났습니다.

돌려받은 투자금으로 마산에서 제2의 감격시대를 열었으나, 쫄딱 망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젊은 손님들을 모으려면, 가장 마음이 들뜨는 이브나 연말에 맞추어 문을 열어야,

그 손님이 이어지는데, 시설을 하다 보니, 타이밍을 놓쳤던 것입니다.

그 뒤, 빚내어 부산 서면에서 ‘이별의 부산정거장’이란 제목의 피난시절을 상징하는 술집을 다시 열었으나 손님이 없었습니다.

도저히 견디지 못에 서울로 야반도주했는데, 내가 떠난 이후부터 손님이 몰려들어 인수자는 돈을 많이 벌었답니다.

그 것이 화류계와 마지막인 '이별의 부산정거장'이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나와 돈과의 인연은 끝났습니다.

돈 안 되는 사진이었지만, 그동안 열심히 찍고 마시며 잘 살았습니다.

어제 광복71주년을 맞아 불현 듯, 그 때 그 사진이 생각났습니다.
그 때의 느낌을 찾으려 서대문형무소에서 열린 유진규의 ‘왜놈대장 보거라!’ 퍼포먼스에 갔습니다.

그 당시의 분위기를 재현할 수는 없었으나, 공연을 끝낸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모습으로 갈음합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추당 박영달 회고전-사진예술과 휴머니즘


박영달展 / PARKYOUNGDAL / 朴英達 / photography
2016_0714 ▶ 2016_1002 / 월요일 휴관



박영달_하선_디지털 재인화_28×43cm_1956~58
박영달_어장_디지털 재인화_40×50cm_1954~57

초대일시 / 2016_0714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월요일 휴관



포항시립미술관Pohang Museum of Steel Art

경북 포항시 북구 환호공원길 10

Tel. +82.54.250.6000

www.poma.kr



포항시립미술관은 우리나라 사진예술에 큰 발자취를 남긴 것은 물론 우리 지역 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공헌한 추당 박영달(秋塘 朴英達)의 사진예술과 생애를 조명해 보는 회고전을 마련하였다. 이번 전시는 지역미술사 정립을 위해 마련되었으며, 우리 지역 사진예술의 태동과 발전을 가늠해볼 수 있다. 또한, 추당 박영달의 '사실주의(Realism)' 사진예술과 생애를 조명하고, 옛 포항의 생생한 삶의 현장과 우리 시민의 생활상을 담은 사진작품 속에 진한 '휴머니티'를 느낄 수 있는 전시이다. ● 박영달은 1913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1938년 대구일보 포항지사에 기자로 부임한 이후 48년간 포항을 지키며 활동한 사진작가이다. 박영달은 6.25 직후 포항에 '사진DP'점(店)을 낸 계기로 사진을 시작하였으며, 구왕삼(1909~1977)과 활발한 교류활동으로 사진의 이론적 토대를 다졌다. 해방 이후 구왕삼은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소위 "회화적 서정성이 가미된 공모전 위주의 자연관조적 살롱사진"1) 을 비판하였으며, 리얼리즘 사진론과 비평을 자주적 입장에서 제시하여 대구사진의 중요한 맥락을 형성하였다. 구왕삼에 의하면 사실주의 사진은 "인간(人間)의 본질(本質)에 대(對)한 진실(眞實)하고 열정적(熱情的)인 탐구(探求)와 생동적(生動的)인 역사적(歷史的) 현실(現實)을 「카메라」로 형상화"2) 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한편, 박영달은 사진이 가진 조형성과 사실성은 물론 회화성과 문학성까지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사진은 조형예술의 한 분야이지만, '인생의 주제'를 담아야 한다고 믿었으며, 사진미학은 "많은 예술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완성된다."3) 라고 말한다.


박영달_풍선_디지털 재인화_61×78cm_1963_제23회 아사히국제사진쌀롱 입선작


박영달_길동무_디지털 재인화_92×61cm_1963_제23회 아사히국제사진쌀롱 입선작


박영달_노도의 위험을 뚫고_디지털 재인화_40×62cm_1967_제5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입상작


박영달은 1958년과 1963년에 '조일국제사진공모전'에서 입선하였으며, 1965년 국전 제1회 사진부와 1966년, 1967년 '동아사진콘테스트', 1973년 '국제사진공모전' 등 당시에 명성이 높았던 국제사진공모전에서도 입상하면서 사진예술의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박영달은 1957년 대구 미문화원에서 제1회 사진개인전을 개최하였다. 당시 사진만으로 개인전을 개최하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것으로 우리나라 사진예술사에서 화젯거리이자 선각자로서 높이 평가한다. 또한, 사진예술의 한계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조형예술의 본질론에 근거하면서도 현대성을 찾는 다양한 방법을 연구하였으며, 꾸준한 연구발표를 통해 사진예술 이론가로서의 면모도 보여주었다.


박영달_꼬마야구_디지털 재인화_40×52cm_1957


박영달_율동_디지털 재인화_28×37cm_1960년대


박영달_젊은 인어들_디지털 재인화_40×51cm_1960


박영달은 1952년부터 1966년까지 '청포도 다방'을 운영하였다. 우리 지역 문화예술의 사랑방 역할과 함께 시민에게 오랫동안 사랑받는 장소였던 청포도 다방은 일명 '청포도 살롱시대'라고 불리며 포항의 르네상스를 일컫는 용어로 사용된다. 이곳에서는 미술 관련 전시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인들의 토론 장소, 음악감상실로 활용되었다. 특히 박영달은 우리 지역의 첫 문화예술단체인 '흐름회'를 1960년에 조직하여 문화예술 발전에 공헌했다. 박영달이 이렇게 우리 지역에서 다양한 역할을 겸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그 자신이 왕성한 활동가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당시의 시대적 요청이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당시 포항문화예술계는 신념과 열정을 갖춘 선각자가 필요했다. 박영달은 포항에 살면서 문화운동가이며 화가인 이명석(1904~1979, 포항초대문화원장)과 수필가인 한흑구(1909~1979) 등과 깊은 교분을 맺고 이들과 함께 포항의 문화예술 운동을 일으켜 준 우리 지역의 선각자이다. 이들에 의해 포항이 다른 지역과의 교류와 소통 각 장르의 문화예술에 대한 인식의 저변확대와 교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면모들은 포항문화원과 포항예총이 탄생하는데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박영달_무제_디지털 재인화_40×52cm_1960


박영달_부두의 생태_디지털 재인화_40×51cm_1957


박영달_휴식_디지털 재인화_55×40cm_1960년대


박영달은 풍경이나 정물보다 인물을 주로 주제로 삼았다. 어린이, 학생, 부부, 노인, 어부 등 당시의 생생한 삶의 현장을 고스란히 그의 카메라에 담았다. 이 사진에는 시대성과 생명력 넘치는 표현으로 있는 그대로의 우리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자연스럽게 '인간다움'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진한 '휴머니즘(Humanism)'이 배어 있다. 이번 '추당 박영달 회고전 - 사진예술과 휴머니즘'으로 우리 지역 사진예술의 태동을 알 수 있는 것은 물론 카메라로 바라본 시대적 상황과 예술적 표현, 현대성 등 포항 사진의 역사 정립에 중요한 단초를 이루게 될 것이다. ■ 장정렬


* 주석1) 김태욱, 대구 근대사진의 형성과 전개 - 사진공모전과 이론적 비평을 중심으로, 한국학논집 제49집, 2012, p. 300.2) 김태욱, 1930-50년대 대구ㆍ경북사진의 특성, 한국컨텐츠학회논문지 제12권 제7호, 한국컨텐츠학회, 2012, pp. 83~843) 대구문화예술회관, 사실주의 vs 조형주의 1950, 60년대 대구의 사진논쟁, 2009. 7. 14. ~ 8. 2.



Vol.20160714i | 박영달展 / PARKYOUNGDAL / 朴英達 / photography




지난 817일 오후의 인사동 거리 풍경이다.

남자가 여자 한복을 입은 꼴 볼견 패션으로 인사동을 웃겼다,

이젠 패션도 젊은이에겐, 하나의 놀이처럼 보였다.

남자들이 여자들 기에 눌리니, 여성우월성에 편승하고픈 잠재적 욕구는 아닌지?

 

오후6시 무렵에는 인사동 아라아트’5층에서 열리는 조명환사진전 출판기념회에 들렸다.

그런데 사진전에 사진가는 없고, ‘농심마니회원들만 잔뜩 모인 것이다.

난 아라아트김명성씨의 저녁식사 초대로 나왔으나, 바쁜 일이 있어 나 올 사정은 아니었다.


일단 전시장으로 오라해서 들렸는데, 사실인즉 사진전 출판기념회에 부른 것이었다. 

아마 박인식씨 부탁으로 연락한 모양인데, 기분이 나빴다.

요즘 '농심마니'모임에 잘 나가지 않으니, 김명성씨를 통해 쓰리쿠숀을 친 모양이다.


더 어이없는 것은, 행사에 노래 하러 나온 송상욱 선생께서 작가가 어느 분이냐고 묻는 것이다.

아마 그 자리에 참석한 대부분의 농심마니’회원들 박인식씨 연락으로 온 듯 했다.


난 '농심마니'에 나간지가 숱한 세월이 흘렀지만, 조명환씨는 최근에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노광래씨의 유카리전시나 농심마니모임에서 한 두 차례 만났을 뿐이다.

일전에 전시 안내장을 전해 받았으나 바쁜 일 재켜두고 나갈 형편도 아니지만,

사진 자체가 풍경에 대한 전형적인 아마추어 시각이라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일로 의뢰하지 않는 건 무턱대고 나서지 않기로 해 일정표에 메모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왜 '농심마니' 모임에 가기 싫으냐 하면, 적 잖은 회비 낼 형편도 아니지만,

미팅장소인 '로마니꽁티'에서 마시는 와인을 즐기지 않으니, 항상 마음의 부담만 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록으로 대신하긴 하나, 싫은 자리에 더 이상 끌려다닐 필요는 없다고 생각되었다.

이제 새로히 추진할 작업에다, 사진 정리하기도 바빠 시간적 여유도 없는 것이다.


문제는 박인식씨가 조명환씨 전시에 집착하는지,그 것이 궁금했다.

산 사진이긴하나, 일전에 전시한 임채욱 사진과의 격차를 알면서도

무료대관 추진에다 오버한 서문까지 쓴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전시를 축하해주고 반가운 분들을 만나는 것은 좋은 일이나

이 나이에 마음이 동하지 않는 일에 억지로 동원되는 것 자체가 싫고,

초부터 생계대책으로 시작한 문화알림방에 대한 일의 원칙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이런 사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농심마니'와의 단절을 알리기 위해서다.


아무튼, 작가를 비롯하여 백기완선생, 농심마니 회장 박인식, 작가의 오랜 친구였다는 도예가 김용문, 황예숙,

시인 송상욱, 김명성, 이만주, 화가 강찬모, 서길헌, 연극연출가 기국서, 그리고 노광래, 박기성, 최유진, 공윤희,

이상훈, 정영신, 강경석, 박성식씨 등 대략 50여명이 참석했고, 뒤풀이는 산수갑산에서 가졌다.

 

사진, / 조문호















































































 

장 날
정영신展 / JUNGYOUNGSHIN / 鄭永信 / Photography
20160824-20160830



정영신-장날-1990 순창장-잉크젯 프린트 160X110cm



초대일시 / 2016_0824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아라아트센터

ARAart

서울 종로구 인사동9길 26

Tel. +82.2.733.1981

www.araart.co.kr




장날은 느림의 미학이다. / 30여 년 동안 장에 미쳐 장돌뱅이처럼 쫓아다닌 정영신의 장날세월의 두께에 의해 된장처럼 구수한 냄새도 베어나고, 잘 익은 막걸리 맛도 난다그는 아무런 기교도 멋도 부리지 않는다. 다만 따스한 인정과 고향을 향한 그리움만 차곡차곡 쌓여 있다. 시골 할아버지의 등짐에, 아줌마들의 봇짐에 감춘 사연 사연들을 장마당에 풀어 낸 것이다.



정영신-장날-1988 남원장-잉크젯 프린트 35X24cm




솔직히, 마누라 자랑 자식 자랑하는 자를 팔불출이라 하지만, 난 팔불출이란 소리들어도 할 수 없다. 그 긴 세월동안 작업해 온 과정을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번에 전시되는 80년대 사진들은 나와 결혼하기 이전인 사진동아리에 함께 할 때 찍은 사진들이다. 같은 다큐사진을 하지만, 장터에 대해서는 선배고 스승이다. 비단 사진뿐만 아니라 사람을 중시하는 인문학적 접근도 따를 수가 없다.


전국 오일장 600여개를 다 돈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았지만, 좌절하지 않고 이겨낸 것이 고맙기 그지없다. 그것도 경제적 뒷받침이 전혀 되지 않는 상황에서 말이다. 한 집안에 다큐사진가가 한 사람만 있어도 망한다는데, 두 사람이 모두 다큐사진을 하니 사는 꼴이란 보나마나다. 신용불량자 주제에 기름 값만 생기면 떠나기를 반복했으니, 미쳐도 단단히 미친 짓이다. .



정영신-장날-1990 순창장-잉크젯 프린트 160X110cm




어쩌면 내가 끼어들어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는 아내의 사진철학을 그르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전국 오일장을 다 돌도록 재촉해, 그만의 방식에 제제를 가했기 때문이다. 버스타고 장에가 하루 종일 할머니들과 놀며 삶의 철학을 카메라에 담았는데, 난 사라져가는 현장을 빨리 기록해야 된다는 안타까움에 발발거린 것이다


장마당에 펼쳐진 사물이나 장에 나오는 사람들도  나처럼 바쁘게 서둘지 않았다. 행여 친구나 사돈이 나타나지 않을까 사방을 두리번거리기도 하고, 이 것 저 것 구경하며 느리게 느리게 장날을 즐긴다. 정 나누는데, 바삐 서둘 일이 아닌 것이다. 그렇지만 장터에서 마음조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어렵사리 나왔으면 한 군데라도 더 돌아야하는데, 그저 할머니들과 이야기 나누느라 일어 날 생각을 않기 때문이다. 없는 돈에 할머니 물건까지 바리바리 사들고 일어나는 데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만큼 사람들의 정을 중요시하는 그의 접근법을 이해는 하지만,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정영신-장날-1987  구례장-잉크젯 프린트 160X110cm



다큐멘터리사진의 속성이기도 하지만, 그의 사진에서는 현장성과 인간에 대한 정이 짙게 깔려있다. 그래서 그의 장터 사진을 보면 따뜻한 인간애가 모닥불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이다. 정영신은 처음 카메라를 잡았을 때부터 장터의 사람을 겨냥했다. 장터를 기록해야겠다는 뚜렷한 목표의식을 갖고 사진을 선택하는 것과, 사진을 하다 장터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다르다. 대개 사진가들이 작업을 하다보면 시류에 따라 주제가 바뀌기도 하고, 살기 위해 새로운 주제를 찾기도 해, 평생 작업으로 끌고 가는 경우는 드물다. 오래 동안 장터를 찍었다는 사진가들도 대개 2-3년이면 끝내는 경우가 많았고, 그 외는 취미나 공모전용 사진소재를 찾아다니는 넝마주이식이 전부였다.




정영신-장날-1990 무주장-잉크젯 프린트  35X24cm



정영신의 장터사진은 다소 산만한 느낌은 들지만, 사진들을 꼼꼼히 살펴보면 장터의 난장스러움이 잘 묘사되어 오히려 정감이 간다. 대개가 화면을 단순화시키기 위해 장애물을 치우거나 지워 기록적 가치를 망가트리는 경우가 있지만, 그런 짓은 절대 안 한다. 세월이 지나면 그런 하잘 것 없는 장애물도 역사적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럴듯한 배경을 택해 장꾼들을 연출시키는 기존의 사진들에 비해, 이 처럼 소통하며 찾아 낸 상대방 감정묘사나, 장마당의 어지러운 분위기가 주는 잔잔한 울림이 훨씬 오래간다.



정영신-장날-1986 담양장-잉크젯 프린트  35X24cm




대개 사진인들이 습관적으로 찍을 대상을 만나면 화면부터 구성하게 된다. 특히 장터 특성상 위에서 내려 보고 찍을 경우가 많은데 정영신이 구사하는 카메라앵글은 대개 수평이다. 찍히는 사람과 찍는 사람의 자세가 평행이거나 아니면 더 낮은, 즉 동격을 의미하고 있다. 사진을 찍기 전에 물건을 사고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간의 벽을 허무는 것 또한 그만의 어프로치다. 재미는 좀 덜하지만, 그보다 몇 배로 값진 장꾼과 사진쟁이의 소통된 마음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영신식 색깔의 장터세계고 작품세계인 것이다


정영신의 장터 사진을 보면 그 때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각박한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을 반성케 할 단초를 제공한다. "사람 사는 게 이런 것이라고..."  / 조문호(사진가)




정영신-장날-1988  청양장-잉크젯 프린트  35X24cm



추억으로 가는 문 / 정영신의장날은 추억으로 가는 문이다. 이미 사라졌고, 잊힌 풍경이라 여겼는데, 벽돌 벽이 문으로 변하는 마법처럼, 사진은 고정된 이미지가 아니다. 정지된 것 같은 평면 안에서 이야기가 솔솔 새어 나온다. 사진을 보고 있자면, 나도 어느새 20년여 전, 혹은 30년여 전으로 들어가 있다.


내가 처음 장을 보러 간 것은 1981년의 일이다. 우리 집에서는 현금이 워낙 귀해서 계란으로 돈을 사서 차비를 써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머니가 손에 쥐어 준 계란 몇 개를 가지고 가면 며칠간 차비를 쓸 수있었다. 그런데 계란을 팔 수 있는 곳은 한 군데가 아니었다. 그중 가장 편하게 팔 수 있는 곳은 학교 앞 점방이었고, 가장 먼 곳은 장터였. 처음 가져 간 계란을 팔았던 곳은 학교 앞 점방이었다. 느그들 차비 해사 씅께, 이 닭알 가지가서 폴아갖고 오니라.” 어느 날 아침, 어머니가 계란 한 꾸러미를 내밀며 말했다. 이런 것은 엄니가 폴아사제. 학생이 어띃게 계란을 다 폴로 간다? 그라다 깨져불기라도 하먼, 우짤라고.” 장에 갈 시간이 없응께, 안 그라냐, .”

아무리 버텨 보아도 다른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어머니는 농사에 정신이 없었고, 무거운 가방을 든 형의 눈빛은 완강한 거부의 뜻을 담고 있었다. 결국 나는 계란 개수를 줄이는 협상을 하였고, 짚으로 싼꾸러미 대신 계란 세 알을 주머니에 담았다. 하지만 문제는 버스 안이었다. 그 당시의 통학 시간대의 버스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은 손님을 실었다. 사람을 태운 것이 아니라, 람을 쟁여 실었다. 더구나 장날은 더 심했다. 짐이고 사람이고 실을 대로 실은 버스가 차장의오라이!” 소리에 출발을 하면, 기사는 직선의 길도 갈지자를 급하게 그으며 차를 몰았다. 차의 오른쪽에 타고 내리는 문이 있었으니, 차의 왼쪽으로 사람이며 짐을 쏠리게 하였던 것이. 때로는 그 정도가 너무 심하여 실제로 넘어진 버스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버스 한 번 타고 나면, 책가방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고, 사람이나 다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용케 의자에 앉았다고 해도 편할리가 없었다. 함부로 열린 창문으로 책가방이며, 짐이 날아들었고, 이 질질 흐르는 짐도 유리창을 통해 닥쳐오는 판이었으니, 아무리 멋쟁이 여학생이라도 장날 통학버스를 타고 나면 거지꼴이 되었다. 거기다가 새끼줄에 묶여 있던 닭이라도 풀리는 날이면, 옷이며 머리며 가릴 것없이 닭똥이뿌려지며, 물크덩하고 따뜻한 닭똥세례에 오리까지꽥꽥 소리로 음악을 연주해대면, 그야말로 감동의 도가니가 아니라 고통과 아우성과 악취가 진동하는 오물통 같았다. 계란 세개를 주머니에 담고 있었던 나는 버스를 타기 전에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계란이 깨지지 않게 해야 했다. 그 당시에는 계란 하나 값이 차비보다 비쌌다. 계란 하나를 팔면, 왕복 차비가 되었으니, 요즘 시세로 한다면, 계란 하나에 2천 원 내지는 3천 원은 하였던 것이다. 나는 호주머니보다 가방이 더 안전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계란을 가방에 넣었다.



정영신-장날-1989 순창장-잉크젯 프린트  35X24cm




버스는 역시 만원이었다.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으나, 우리 마을의 아이들과 장꾼들 20여 명이 더 탈 수 있었다. 그때의 시골버스는 고무로 만든 버스 같았다. 그 후로도 적잖은 손님을 더 태웠으니, 고무중에서도 신축성이 대단히 좋은 고무로 만든 버스였음에 틀림없다. 주머니에 있던 계란을 책가방에 옮기고 나는 초긴장을 하며 버스에 올랐다. 읍내까지 갈 동안 가방을 사람들 머리 위로 들고 있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버스에 타는 것도 쉽지 않아서 두 손으로 가방을 들어올린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버스를 타는 순간부터 가방에 충격이 가해졌다. 그것은 인력으로는 막기 어려운 일이었다. 다행이었던 것은 버스에 탄 후 가방을 두 손으로 치켜들고 있자, 것이 안쓰러워 보였던지, 형이 대신 가방을 들어 준 것이었다. 그렇게 내 책가방은 읍내까지 배달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했. 가방을 열어 보니, 그렇게 고이 간직해 온 계란 중 하나가 깨져 있었던 것이다. 나는 주변의 풀잎을 뜯어 책과 공책과 가방 안을 닦아냈. 하도 귀한 계란이라 어지간하면 먹었을 것이지만, 으깨어진 계란은 그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나는 그 계란이 갑자기 미워져서 장터에 가서 팔라던 어머니의 말을 무시하고 학교 앞 점방에 주고 말았. 그 점방에서는 계란 한 개당 70원을 쳐주었다. 계란 판 돈을 받아 든 어머니의 눈이 동그래졌다. 마땅히 300원 정도를 받아와야 하는데, 내가 내민 돈은 140원이었다. 나는 버스 안에서 계란을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였던 일도 상세히 이야기하였다. 란 하나가 깨졌다는 말에 어머니는 안타까워했지만, 나무라지는 않았. 어머니가 알고 싶은 것은 어디에다 계란을 팔았냐는 것이었다. 학교 앞에서도 계란 받어요.” 그렇게 말했다. 똑같은 계란이 학교 앞에서는 70원 쳐주고, 장터에서는 100원 쳐준다는 것을 어머니의 말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것은 실로 엄청난 가격 차이였다. 조금만 걸어가면 훨씬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는 물건이 된다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그 다음부터 계란을 팔 때면, 꼭 장터에 갔다. 그것도 어머니의 단골집으로 갔다. 단골집 아주머니는 같은 물건이라도 더 낫게 값을 쳐주었으며, 하다못해 사탕 하나라도 내입에 물려 주었다.




정영신-장날-1989 남원장-잉크젯 프린트  35X24cm



장터는 세상의 모든 것을 모아 놓은 집합소였다. 닭이며 오리 같은 가축은 물론이고, 온갖 생선과 과일에, 보지도 못했던 신기한 물건들까지 거기에 가면 있었다. 세상의 모든 그릇을 모아 놓은 것 같은 그릇가게, 세상의 모든 진기한 것들이 모여 있는 잡화상, 수백 가지의 옷들이 걸려 있는 옷가게 등. 나는 서울이 아무리 크다고 하여도 장터 정도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 많은 것들 중 내 발목을 잡았던 것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니라, 짜장면 집에서 풍겨 나오던 음식 냄새였다. 중학교 입학식 날 먹어 보고는 다시는 먹어 보지 못했던 짜장면. 그것은 지상 최고의 음식이었고, 후루룩 빨아먹다가 혀까지 빨려 들어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던 음식이었다하지만

그 무엇보다 장터에 많았던 것은 물건이나 다른 짐승들이 아니라, 사람들이었다. 벙거지 모자를 쓰고 막걸리집에서 환하게 웃는 할아버지도 있었고, 마을 사람들의 짐을 다 싣고 장터로 들어서는 구루마도 있었다. 그렇게 구루마를 끌고 온 소에게 막걸리를 먹이고, 지를 먹이는 장면을 볼 수 있는 곳도 장터였다. 장을 보러 온 사람 중에는 남녀가 따로 없었지만, 물건을 사거나 파는 사람들은 대부분 여자들이었다. 특히 노점에 앉아 물건을 파는 이들은 거의 전부가 여자들이었다. 그녀들의 손은 새카맸고, 주름이 많았으며, 갈라진 데가 많았. 즉 장터는 어머니들의 삶의 터였고, 그녀들의 생활력이 살아있는곳이었다.



정영신-장날-1989 고창장-잉크젯 프린트  35X24cm



내 어머니도 몇 번 좌판에 앉은 적이 있었다. 산에서 채취한 버섯이나 나물 같은 것은 물론이고, 깻잎이나 오이나 고추를 따서 장에 내다 팔았다. 특히 버섯은 상당히 비싼 값을 받기도 하였는데, 어머니는 며칠간 따온 버섯 중, 비싼 것과 싼 것을 나누어, 싼 것은 집에서 먹고, 싼 것은 죄다 장에 내다 팔았다.

친구 중 하나는 병영이라는 곳에서 유학 온 아이였는데, 자취생이었, 공부를 잘했다. 나는 그 친구의 어머니가 장터에서 멸치 장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던 그 친구는 홀어머니의 뒷바라지에 힘입어 훌륭하게 성장하였고,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남을 배려하는 삶을 잘살고 있다. 그 친구가 그렇게 성공하고 바르게 살게 된 것은, 그의 어머니, 나아가 장터의 힘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더러 몇몇 집에서는 눈속임을 하기도 하였다. 쌀집의 되는 일반 가정집의 되와 달라서 쌀집에서 쌀 한 되를 팔아와 집에 있는 되에 담아보면, 9홉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장꾼들 저울은 눈금도 다르다고 하였지만, 모든 장사꾼들이 그러지는 않은 것 같다. 더러 눈속임으로 속여 파는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 그런 눈속임 뒤에 덤이 있었기에 웃고 넘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장사꾼들은 단골 장사를 했기 때문에 뜨내기 장사꾼이 아니고는 사람을 속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양 좋은 물건을 눈에 보이는 데에 얹고, 물짠 물건을 그 아래에 깔아 놓는 것이야, 눈속임이 아니라, 포장의 기술이라 해야 할 것이다.


장터에서는 지명도 생생히 살아있었다. 지금은 그냥토요시장이라 불리는 장흥의 옛 장터만 보아도, 십여 가지의 지명이 따로 있었다. 전머리, 비석거리, 쇠전머리, 지전거리, 주막거리, 진골목, 온뚝길, 겟똥 등 지명마다 골목마다 장소마다 그 나름의 풍광이 살아있던 곳이 옛 장터였다. / 이대흠(시인)



정영신-장날-1988 담양장-잉크젯 프린트  35X24cm



  

작업노트 / 난 전라도 땅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촌사람이다. 어렸을 적, 장날은 잔치 날처럼 온 동네가 들썩거렸다. 삼식이 아버지 소달구지가 동구 밖에 다다르면, 여인네들이 이고나온, 보따리가 하나둘 실렸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안동아재가 사방이 초록색으로 뒤덮인 길을, 휘적휘적 걸어가는 풍경은 고향에 남겨 둔 내 흑백사진이다.


남도 땅에서 처음만난 최씨할머니는 장에만 나오면 뱃속이 다 시원하다며 장바닥에 퍼질러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5일후, 다시 찾은 장마당에서 하얀 고무신에 꽃분홍치마를 입은 최씨 할머니를 다시 만났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남도 땅의 색과 향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고, 따스한 햇살아래 포근한 인정을 나누기도 했다.

이렇게 아련한 추억을 그리며 장날을 찾아다닌 게, 30년째다.



정영신-장날-1988 순창장-잉크젯 프린트  35X24cm




오늘도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아내는 이들과 이야기를 나눈다.장에서 일하는 우리 어머니들은 손을 놀리면 아깝다고 한다. 그 손의 숭고함을 느끼기 위해 나도 모르게 손을 덥석 맞잡곤 한다.이 날 팽상 흙만 몬지고 산께, 손이 짜잔하지라. 이손으로 새끼 덜 맥이고, 갈쳤제.” 오롯이 장에 앉아, 오고가는 계절을 헤아리며 살았던 사람들이다.

또한 이들이 보자기를 풀면, 밭과 산과 들판이 한쪽씩 따라 나온다.



정영신-장날-1989 장수장-잉크젯 프린트 160X110cm  35X24cm

  


 

이 책에 실린 사진들은 1986년에서 1989년까지의 기록이다. 옛날 필름 속에 지역의 문화와 생활상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좀 더 열심히 작업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움으로 남지만, 지금도 장을 지키며, 오롯이 살아내는 사람들이 있어 희망은 있다.아직도 장날이면 삼대가 한 공간 안에서 문화를 향유하고, 세대 간의 정을 나누는데, 꾸밈없는 사람들도 있다.

  

'눈빛출판사' 발행 / 정영신 '장날' 사진집 



장날은 여전히 인정이 오가는 문화의 텃밭이고, 선조들이 살아온 삶의 거울이다.그러나 장마당 풍경도 인심도 서서히 변하고 있다.돈의 논리에 그 훈훈한 인정이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유령처럼 떠도는 그 때 그 사람을 만나러 오늘도 배낭을 챙긴다. 우리 모두, 인정 한 사발 마시러, 장에 가자. / 정영신



 정영신展 / JUNGYOUNGSHIN / 鄭永信 / Photography


갤러리‘벽과 나 사이’에서 오는 28일까지 열린다

지난 일요일, 윤길중의 ‘석인의 초상’사진전에 갔더니 마치 오래된 고분의 석실을 찾아든 느낌이었다.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석상들의 숙연한 모습은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무덤가에서 망자를 지켜야 할 석인들이, 이 복잡한 홍대까지 왜 떼거리로 몰려 나왔을까?




▲윤길중,석인1 경기도 수원



그건 바로 사진가 윤길중이 3년에 걸쳐 전국 700여 곳의 무덤에서 찾아 낸 결과물이었다. 그는 세월의 더께에 쌓인 석인의 형상에서 우리와는 전혀 다른 시간을 살았던 조선인들의 얼굴을 만났으며, 거기서 우리 이전에 존재했던 우리 민족의 원형을 찾고 싶었던 것이다.


전시장을 메운 윤길중의 사진들은 디지털화 된 오늘의 프린트 기술이 만들어 낸 최고의 퀄리티였다. 흐린 날씨나 비 맞은 석인들을 찍어 화면을 차분하게 가라 앉혔으며, 형상만 정교하게 따내어 배경과 같은 톤으로 프린트해 석조물에 무게감을 더해 주었다.



▲윤길중,석인2 경기도 시흥



프린트 종이도 지금은 거의 사라져버린 조선시대 외발뜨기 전통방식으로 복원한 한지였다. 나도 처음들은 UV프린트(자외선 가시광선 분광법) 방식은 석조물에 낀 세월의 이끼까지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대상이 주는 분위기도 아주 독특했다. 사료적 가치에다 작가의 감성까지 담았구나. “야! 멋지다” 속으로 감탄을 연발했다.


‘석인의 초상’ 사진집에 서문을 쓴 문예비평가 유헌식씨는 이렇게 적어 놓았다. “석인의 의미를 죽은 자의 ‘수호에서 죽은 자와의 ‘동행’으로 해석할 때, 윤길중의 석인 사진은 단순한 기록사진이 아니라 예술사진으로 편입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윤길중,석인3 경기도 용인



그때부터 스스로의 가치지준에 혼돈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난 사진 본래의 가치는 기록으로 치는 사진쟁이라 예술로 가는 사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전시장에 올 때 까지만 해도 전국각지의 석인을 기록한 작업인 줄 알았다. 또 한 가지 마음에 걸렸던 것은 석인이란 민초들과는 동떨어진 왕이나 세도가들의 능을 지킨다는 고리타분한 생각도 자리했다.



▲윤길중,석인4 경기도 용인



그렇지만 그 형상을 새겨 낸 석공은 바로 우리와 같은 민초들이 아니던가? 그들이 만들어낸 것들의 대개가 문인석과 무인석으로 정형화되기도 하지만, 꼼꼼히 파낸 얼굴들은 늘 상 보아왔던 우리민족 본래의 정겨운 표정이다.


지그시 감은 눈에선 절실한 염원이 느껴지고, 굳게 다문 입에선 결연함이 배어난다. 내면의 절제미가 흐르는 가운데 애잔함도 묻어난다. 무엇보다 세월의 풍상이 덧입혀진 표정들은 마치 우리 선조들의 영혼을 만나듯 친숙하고 편안하다.



▲윤길중,석인시리즈1


서재 앞에 걸어놓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증표로 삼고 싶었다. 사실, 실제의 석인이 있다면, 이 사진처럼 가까이 두고 싶은 마음은 없었을 것이다.


갑자기 기록이냐? 예술이냐?는 근원적인 질문도 별 것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대작이니 위작이니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진짜도 가짜도 스스로만 좋으면 그만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세월 따라 눈높이가 바뀔지라도 본인이 좋아하는 작품이 최고인 것이다.



▲윤길중,석인시리즈2


아무리 평론가 잣대로 본 최고의 걸작이라 할지라도 본인이 편치 않으면 집에 걸어두겠는가? 돈의 논리에 따르지 않고 스스로의 가치기준에 맡긴다면 말이다. 나 역시 아무리 최고의 다큐멘터리작품이라도 끔찍한 살인 장면이라면 걸지 않을 것이다. 작품의 소장가치와 평소 눈으로 즐기는 현실적 가치는 이처럼 이율배반적으로 다른 것이다.


가끔 오래된 그림이나 서예작이 담긴 액자들이 버려지기도 하지만, 한 참 후에 조명 받을 작품인지 누가 알겠는가?  알 수도, 알 필요도 없지만...  또 한 가지 신통한 것은 다 버려져도 옛집 툇마루에나 안방에 걸렸던 가족사진틀은 버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전시장의 석인 사진들1



사진가 윤길중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작년 ‘류가헌’에서 열린, 아현동 철거지역을 찍은 ‘기억흔적’ 사진전이었다. 곰팡이 낀 낡은 물품을 소재삼아, 변하고 버려져 가는데 대한 안타까움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전엔 장애인과 쓰러진 채 살아가는 나무도 찍었다고 했다. 얼핏 지금의 석인 작업과 일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죽어가는 것에 다시 숨결을 불어 넣으려는 되살리기 의식은 모두 같다는 점이다.



▲전시장의 석인 사진들2


듣기로, 윤길중은 오래 전 중병으로 투병하다 기사회생으로 새로운 삶을 찾았다고 했다. 잘나가던 대기업 사원에서 사업가로 승승장구하다 덜컥 중병에 걸렸는데, 생사를 넘나들며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사진작업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영혼을 사진 속에 불사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아마 석공처럼 하잘 것 없는 사물에 염원을 담고 싶었던 게다.


이처럼 이름 없는 석공들의 염원을 담은 석인들의 모습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듯 처연했다. 신기한 것은 그 많은 석상의 형상과 표정들이 하나도 같은 게 없다는 점이다. 마치 사람들처럼...



▲작품 앞에 선 윤길중, 석인을 닮았다.(사진=조문호)



사진의 느낌은 인터넷에 소개된 이미지로 제대로 알 수 없으니. 꼭 전시된 사진들을 관람하기 바란다. 홍대부근에 있는 갤러리‘벽과 나 사이’(02-323-0308)에서 오는 28일까지 열리고, ‘이안북스’에서 ‘석인’사진집(40,000원)도 나왔다.


[서울문화투데이 / 조문호기자/사진가]





지난 4일 어렵사리 약수동 이명동선생 댁을 방문했다.
보름 전에 설렁탕 사 주겠다며 오라는 전화를 하셨으나,
차일피일 미루다 늦은 것이다.

마침, 정선에서 옥수수와 감자를 캐 왔기에 약수동을 찾았다.
그런데, 선생님의 허리 디스크가 심해져, 잘 걷질 못한다는 것이다.
좋아하시는 설렁탕집도 멀어서 못 간다고 했다.

먼저 ‘한미미술관’에서 열리는 황규태선생 전시에 못 가봐 걱정이라며 말씀을 꺼내셨다.
황선생과의 각별했던 사연들을 줄줄이 풀었다. 미국으로 경향신문 특파원1호로 가게 된 동기,
황선생께서 LA 동아일보지사를 설립할 때 만류했던 일, 대구 차용부씨가 미국 공부하러 갈 때, 부탁했던 일 등

그 오래된 이야기들을 소설책 읽듯 슬슬 풀어냈다. 아흔 여섯의 연세를 무색케 했다.

그 다음엔 스튜디오 조명에 관한 이야기로 옮겨 붙었다.
동아일보사에서 여성지를 복간할 무렵, 일본의 고단샤출판사를 들렸는데,
그 곳의 스튜디오 장비를 보고 깜짝 놀랐다는 것이다.

그 당시 국내에서는 텅스텐 조명을 사용하느라 땀을 뻘뻘 흘리며 일했는데,

새로 나온 스트로보에 홀딱 반한 것이다.

그 때부터 동아일보 김상만회장을 설득시켜 장비를 구입하고,

충무로 광고사진 스튜디오에서도 모두 구입하게 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적극적으로 보급했는지 코맷트 스트로보 회사에서 선생님을 깍듯이 모셨다고 한다.

그 덕으로 열악했던, 신구전문대와 돈보스꼬 대학 사진과에는 스트로보를 그냥 보냈다는 것이다.

“아이구 선샘 예! 배고파 죽겠습니더. 고마 밥 묵고 이야기 하입시더.”
다리가 아파 멀리는 못가시고, 가까운 곳의 된장끼게에 비벼 다시 이야기를 들었다.

사진,글 / 조문호







지난 일요일, 윤길중의 ‘석인의 초상’사진전에 갔더니 마치 오래된 고분의 석실을 찾아든 느낌이었다.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석상들의 숙연한 모습은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무덤가에서 망자를 지켜야 할 석인들이, 이 복잡한 홍대까지 왜 떼거리로 나왔을까?



작품 앞에 선 윤길중, 석인을 닮았다./ 조문호사진



그건 바로 사진가 윤길중이 3년에 걸쳐 전국 700여 곳의 무덤에서 찾아 낸 결과물이었다.

그는 세월의 더께에 쌓인 석인의 형상에서 우리와는 전혀 다른 시간을 살았던 조선인들의 얼굴을 만났으며,

거기서 우리 이전에 존재했던 우리 민족의 원형을 찾고 싶었던 것이다.




전시장을 메운 윤길중의 사진들은 디지털화 된 오늘의 프린트 기술이 만들어 낸 최고의 퀄리티였다.

흐린 날씨나 비 맞은 석인들을 찍어 화면을 차분하게 가라 앉혔으며, 형상만 정교하게 따내어

배경과 같은 톤으로 프린트해 석조물에 무게감을 더해 주었다.



프린트 종이도 지금은 거의 사라져버린 조선시대 외발뜨기 전통방식으로 복원한 한지였다.

나도 처음들은 UV프린트(자외선 가시광선 분광법) 방식은 석조물에 낀 세월의 이끼까지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대상이 주는 분위기도 아주 독특했다. 사료적 가치에다 작가의 감성까지 담았구나.

“야! 멋지다” 속으로 감탄을 연발했다.



전시장 풍경



‘석인의 초상’ 사진집에 서문을 쓴 문예비평가 유헌식씨는 이렇게 적어 놓았다.
“석인의 의미를 죽은 자의 ‘수호에서 죽은 자와의 ‘동행’으로 해석할 때,

윤길중의 석인 사진은 단순한 기록사진이 아니라 예술사진으로 편입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전시장 풍경


그때부터 스스로의 가치지준에 혼돈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난 사진 본래의 가치는 기록으로 치는 사진쟁이라 예술로 가는 사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전시장에 올 때 까지만 해도 전국각지의 석인을 기록한 작업인 줄 알았다.

또 한 가지 마음에 걸렸던 것은 석인이란 민초들과는 동떨어진 왕이나 세도가들의 능을 지킨다는

고리타분한 생각도 자리했다.



석인 시리즈



그렇지만 그 형상을 세겨낸 석공은 바로 우리와 같은 민초들이 아니던가?

그들이 만들어낸 것들의 대개가 문인석과 무인석으로 정형화되기도 하지만,

꼼꼼히 파낸 얼굴들은 늘 상 보아왔던 우리민족 본래의 정겨운 표정이다.



석인 시리즈



지그시 감은 눈에선 절실한 염원이 느껴지고, 굳게 다문 입에선 결연함이 배어난다.

내면의 절제미가 흐르는 가운데 애잔함도 묻어난다.

무엇보다 세월의 풍상이 덧입혀진 표정들은 마치 우리 선조들의 영혼을 만나듯 친숙하고 편안하다.





서재 앞에 걸어놓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증표로 삼고 싶었다.
사실, 실제의 석인이 있다면, 이 사진처럼 가까이 두고 싶은 마음은 없었을 것이다.



석인1 / 경기도 시흥



갑자기 기록이냐? 예술이냐?는 근원적인 질문도 별 것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대작이니 위작이니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진짜도 가짜도 스스로만 좋으면 그만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세월 따라 눈높이가 바뀔지라도 본인이 좋아하는 작품이 최고인 것이다.



석인3 / 경기도 용인


아무리 평론가 잣대로 본 최고의 걸작이라 할지라도 본인이 편치 않으면 집에 걸어두겠는가?

돈의 논리에 따르지 않고 스스로의 가치기준에 맡긴다면 말이다.

나 역시 아무리 최고의 다큐멘터리작품이라도 끔찍한 살인 장면이라면 걸지 않을 것이다.

작품의 소장가치와 평소 눈으로 즐기는 현실적 가치는 이처럼 이율배반적으로 다른 것이다.


석인2 / 경기도 수원



가끔은 오래된 그림이나 서예작품이 담긴 액자들이 버려지기도 하지만,

한 참 후에 조명 받을 작품인지 누가 알겠는가?  알 수도, 알 필요도 없지만...
또 한 가지 신통한 것은 다 버려져도 옛집 툇마루에나 안방에 걸렸던 가족사진틀은 버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석인4 / 경기도 용인



사진가 윤길중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작년 ‘류가헌’에서 열린, 아현동 철거지역을 찍은 ‘기억흔적’ 사진전이었다.

곰팡이 낀 낡은 물품을 소재삼아, 변하고 버려져 가는데 대한 안타까움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전엔 장애인과 쓰러진 채 살아가는 나무도 찍었다고 했다.

얼핏 지금의 석인 작업과 일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죽어가는 것에 다시 숨결을 불어 넣으려는 되살리기 의식은

모두 같다는 점이다.





듣기로, 윤길중은 오래 전 중병으로 투병하다 기사회생으로 새로운 삶을 찾았다고 했다.
잘나가던 대기업 사원에서 사업가로 승승장구하다 덜컥 중병을 얻었는데, 생사를 넘나들며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사진작업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영혼을 사진 속에 불사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아마 석공처럼 하잘 것 없는 사물에 염원을 담고 싶었던 게다.

이처럼 이름 없는 석공들의 염원을 담은 석인들의 모습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듯 처연했다.

신기한 것은 그 많은 석상의 형상과 표정들이 하나도 같은 게 없다는 점이다. 마치 사람들처럼...





전시된 사진의 느낌은 인터넷에 소개된 이미지로는 제대로 알 수 없으니. 꼭 전시된 사진들을 관람하기 바란다.

홍대부근에 있는 갤러리‘벽과 나 사이’(02-323-0308)에서 오는 28일까지 열리고,

‘이안북스’에서 ‘석인’사진집(40,000원)도 나왔다.



글 / 조문호


































 




지난 달, 임재천씨 전시에서 작당한 일이 하나 있다.
인천의 김보섭씨가 민어회가 맛있는 철이라며, 한 번 놀러오라 했다.
모두들 가겠다고 했으나, 술자리에서 오간 말이라 새겨듣지는 않았다.
그런데, 4일 오후5시, 인천역에서 만나자는 이규상씨의 메시지가 떴다.

그 날은 이명동선생 댁에서 시간을 보내 허급지급 달려갔다,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시간 맞출 수 있어 한 숨 놓았는데,
‘차이나타운’방향으로 나가니, 모두들 기다리고 있었다.
김보섭씨를 비롯하여 이규상, 안미숙씨 내외, 엄상빈,

김 헌, 남 준, 이영욱씨 등 일곱 명이 나와 있었다.

다들 간편한 차림이었으나, 김보섭씨와 남 준씨는 중무장을 하고 나왔다.
무더운 날씨라 땀이 줄줄 흘렀으나, 역전의 용사다웠다.
김보섭씨의 안내로 변모하는 차이나타운을 거쳐,
김보섭씨 ‘바다사진관’촬영 현장이었던 만석부두로 옮겨갔다. 

찍을 때의 사진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니, 더 친숙하게 닥아 왔다.

윗도리를 벗은 채 당당하게 포즈를 취한 그 어부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한 인간과 연결된 구체적인 장소성이 주는 의미가 현장감을 더했다.

뜻밖에도 김보섭씨의 ‘바다사진관’사진을 인근에서 볼 수 있어, 더 좋았다.
그 동네에 ‘우리미술관’이란 조그만 갤러리가 있었는데, 마침 초대전이 열리고 있었다.

사실, 사진전은 사람들이 많은 서울의 큰 전시장에서 하는 것 보다,
사진의 배경이 되어준 동네전이 사진을 찍은 작가로서는 또 다른 보람을 느낀다.
나도 ‘두메산골사람’전시를 그 사람들이 사는 분교를 돌며 한 적이 있기에, 
김보섭씨의 자부심이 점쳐졌다.

여태껏 인천을 여러 차례 오갔지만, 만석부두 후미진 곳을 골고루 돌아 본 적도 처음이었다.
오랫동안 현장을 기록해 온 김보섭씨의 안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현장답사에서 재 인식된 것은 김보섭씨의 인천에 대한 지극한 애정이었다.
긴 세월 인천의 역사적 현장들을 기록하며, 그만큼 껴안아 온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인천시는 이런 사람에 감사하지 않고, 어떤 사람을 내세우는지 모르겠다.
한 시간 반 가까이 돌아다니다, 모두들 횟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보섭씨는 식당 집 할머니가 인간문화재급이라며 칭찬이 대단했다.
그 큰 민어를 여유롭게 다루는 걸 보니, 일단 보통 솜씨는 아니었다.
드디어 민어가 상에 올랐는데, 살점을 듬성듬성 잘라 푸짐했다.
입에 들어가니 살살 녹는데, 오죽 맛있었으면, 엄상빈씨는 집사람 걱정을 해댔다.
집에 남겨 둔 마나님 생각에 차마 먹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 같이 오기로 했지만, 허리를 다쳐 못 왔기 때문이다.

시원하게 끓인 서더리탕 안주에 소주가 입에 짝짝 달라붙었으나, 술을 자제해야 했다.
술 취해 오버해 대면, 아내가 난처 할게 뻔하기 때문이다.
이제 마누라 눈치도 봐가며, 알아서 기야 살아남는다.
갈 길도 먼데, 부루퉁해 있으면 입장 곤란하거던...

어쨌든, ‘바다사진관’ 답사도 답사지만, 맛있게 먹고, 잘 놀았다‘

사진, 글 / 조문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