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재환선생 전시 개막식에서 무세중, 무나미 내외분을 보았습니다.
지난 1월 중순, 인사동‘유목민’에서 저지른 무례에 분노해,
그와의 악연을 끊는다며, 공개 성토한 터라 마주치기 싫었습니다.

못 본 척, 사진만 찍고 있었으나, 내게 닥아 오셨습니다.
나를 만나러 왔다며, 그 날 일을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두 내외분이 번갈아 용서를 빌어, 더 이상 할 말을 잃었습니다.
눈가에 눈물이 고인 걸 보니, 쇼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선생님 이번 결별 선언은 나만의 일이 아닙니다.”
선생의 무례에 돌아 선, 주변 분부터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말 했더니.
마음 상한 모든 분들께 사과하고, 달라질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좀 더 지켜 볼 것이나, 일단 닫았던 마음의 문을 열었습니다.
행여 마음 다친 분들이 계시다면, 너그러이 풀어 주십시다.
무세중 선생만의 그 뜨거운 예술혼을 위하여...

조문호


지난 16일 조준영 시인으로 부터 연락이 왔다.
인사동에 나갈 일이 있는데, 얼굴 한 번 보자는 전화였다.
요즘 통풍이 도져 다리가 절리지만, 오랜만이라 ‘유목민’으로 찾아갔다.
그 곳에는 시인 이승철, 김이하씨와 평화의 소녀상을 제작한 조각가 김운성씨가

먼저 자리하고 있었는데, 골목을 지나치는 곽대원씨를 만나기도 했다. 

술자리에 앉았지만, 술을 마시지 못해 안주만 축내야 했다.
조준영씨가 "집에 책이 너무 많아 다른 곳에서 보관한다"는 말을 꺼냈다.
정년퇴직하면 인문학강좌도 열며 조그만 마을도서관하는 게 꿈이란다.
캐나다에 교환교수로 갔다 귀국할 때도, 헌 책만 잔득 사왔다.
다른 사람들은 그곳에서 사용하던 자동차까지 가져 오는데,

돈 되는 물건은 제켜두고 책만 가져 온 것이다.

그때 검색대에서 했던, 공항직원의 말이 재미있다. “건강하게 사시네요”

뒤늦게  행위예술가 무세중선생과 무나미씨도 오셨다.



사진, 글 / 조문호

























 

영국 런던 마임축제, 프랑스 미모스마임축제와 함께 세계3대 마임축제로 자리매김한

춘천마임축제의 도깨비 난장 '미친 금요일'에 무세중선생이 연출한 '남남북녀 통일아리랑'이 초청되었다.

 

지난 30일 오전1시30분부터 25분에 걸쳐 열린 '남남북녀 통일아리랑' 공연은 축제 관계자들의 지대한 관심 속에

춘천 공지천 의암공원에서 펼쳐져, 수많은 관객들로 부터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아냈다.

 

'남남북녀 통일아리랑' 공연에는 무세중, 무나미씨를 비롯하여 한호선, 장성진, 원건희씨가 출연하였는데,

노구를 끌고 나오신 선생께서는 무거운 서낭대를 안은 채 얼마나 힘을 썼던지, 얼굴에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렸다.

정말 '노병은 살아있다'는 말이 실감나는 공연이었다.

 

이 공연의 바디페인팅은 통미분장예술연구소의 김민지, 송지환씨가 맡아 공연의 완성도를 높여 주었다.

 

사진,글 / 조문호

 

 

 

 

 

 

 

 

 

 

 

 

 

 

 

 

 

 

 

 

 

 

 

 

 

 

 

용기만 있었다면 세상사 비우고 사는 스님처럼 살 수도 있었겠으나

팔자가 그렇지 않은지 돈과 일, 인연에 얽힌 갖가지 욕망에 시달리며 산다.

돈은 아예 나와 인연이 없었던지 일찍부터 욕망의 조절대상이 되지 못했으나

사진과 관련된 일에서는 그 욕망을 버릴 수도 조절도 되지 않는다.

 

인사동으로 가거나 장에 가거나 어딜 가던 사진은 찍게 되는데,

많은 것들을 찍다보니, 찍는 것 못지않게 정리하는 일도 만만찮다.

그래서 밤늦도록 컴퓨터와 씨름해 아내로부터 종종 잔소리를 듣게 된다.

그의 중독 수준이라며...

 

아내 말처럼 적당하게 하면 좋으련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더라.

조금만조금만 하며 일에 빠지다보면 금세 한두 시간이 지나버린다.

특히 블로그 관리하느라 매일 같이 인터넷에 접속하다보니 더 하다.

카페까지 버리며 멀리하려 했으나, 이젠 블로그에 덜미 잡힌 셈이다.

 

블로그는 일기 쓰 듯, 인사동 자료들을 정리하기 위해 만들었으나

이젠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인사동을 더나드는 사람들을 찍다보니

당사자의 사적 기록에 연결되는 경우가 많은데, 스스로 일을 만드는 셈이다.

다 인연에 얽혀 사는데, 내가 할 일과 아닌 것을 칼같이 자르기도 쉽지 않았다.

 

몇일 전, 아내가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얻게 되어 함께 돌아다닐 기회가 생겼다.

그 동안만이라도 컴퓨터에서 해방되기 위해 일단 사진정리부터 않기로 작정했다.

김포 문영태씨의 살림집 전시회를 비롯하여 채현국선생 강연회와

춘천의 무세중선생 공연, 인사동, 정선 귤암리 등 곳곳을 기록했지만, 모두 그대로 뒀다.

 

그런데 닷새 만에 사진을 정리하려 책상 앞에 앉아보니, 이게 장난 아니다.

하루 온 종일 걸릴 분량인데, 어디 부터 손을 대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습관을 바꾸는 것은 물론, 적당이 한다는 말이 참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닥치고, 눈에 보이는 것을 그냥 지나칠 수도 없지만, 미뤄 둘 일도 아닌 것이다.

 

여지 것 작업은 ‘꾸준하게’라는 말을 좌우명처럼 살아왔으나

이젠 ‘적당하게’라는 말을, 더 마음에 새길 때가 된 것 같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인사동이 싸구려 기념품이나 파는 관광지로 변했지만,
밤이 되면 골목 구석구석 예술가들의 이야기로 낭자하다.
인사동의 멋이 살아남은 곳이란 고즈넉한 골목 길 뿐이다.

지난 3일, 인사동 ‘유목민’에서 반가운 분들을 만났다.
무세중, 무나미선생을 비롯하여 김명성, 김상현, 유진오,
장경호, 정영신, 전인경, 전인미씨 등 많은 분들을 만났다.

김상현씨의 애끓는 노래 소리를 안주삼아 기분 좋게 마셨다.
옛 생각나는 많은 노래를 들었지만, 마음에 남는 노래가 있다.

“그대 나를 버리고 어느 님의 품에 갔나? 가슴에 상처 잊을 길 없네..“
바로 ‘검은 상처의 부루스’다.
사라져가는 인사동 낭만을 노래한 것 같았다.

사진,글 / 조문호

 

 

 

 

 

 

 

 

 



전위예술가 무세중 ‘지랄발광’ 공연
집단 탈 변신 보디페인팅 등 벌여
“박근혜 대통령과 함께 하고 싶어”

 

 


“지금은 우리 모두가 한바탕 ‘지랄발광’해야 합니다.”


당대 독보적인 전위예술가 무세중(78·사진)씨가 25일부터 29일까지 서울 인사동 31갤러리에서 도깨비 난장굿판을 벌인다. 이번 굿판의 제목이기도 한 ‘지랄발광’의 이유를 물었더니 그는 대뜸 두루마리 족자를 풀어내리며 자작시 ‘천서─단군의 후손들아 들으라’를 읊었다.


“조선 역사에서 탐욕은 죄악이었도다/ 탐욕은 부패를 낳고/ 부패가 은폐를 낳고/ 은폐가 폭력을 낳는다/ 너희 손에 남의 피를 가득 묻히었으니/ 천벌을 맞을 일이로다/ 손을 빌어라 검은 피를 씻어내라/ 살길은 오직 근본을 밝혀야만 한다/ 병든 마음을 수술해야 한다/ 혁명이다 명을 쇄신해야 산다/ 두 손 들어 밝은 태양을 맞이하라/ 본심본 태양 앙명인중 천지일/ 사람이 천하에 제일 으뜸이니라/ 삼인 하나님의 말씀을 삼신 할머니가 전하노라.”


지난 10년 새 두번의 간암 수술을 받은 후유증에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 등으로 한동안 활동이 뜸했던 그를 이처럼 다시금 ‘포효’하게 만든 사건은 바로 ‘세월호’였다. 그는 지난달 14일 <한겨레>에 ‘세월호는 아직도 민족의 가슴에 침몰하고 있다’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세월호 참사는 단순한 해상사고가 아니다. 우리 민족이 이 문제를 풀어 해법을 찾지 못하면 민족의 분단 문제나 민생의 해결도 어려울뿐더러, 정치·경제·산업·문화 전반에 고질적인 암처럼 전이되어 나라가 죽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 사건은 한국 사회 부패의 상징이자 탐욕에 대한 경고’라고 짚은 그는 ‘민족 참사의 무게로 받아들여 혁명의 기운으로 근본 원인을 밝혀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족들의 슬픔을 눈물로 나누고 굶으며 위로하는 동정도 필요하고 특별법 제정 같은 사법 수단도 필요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수많은 억울한 희생의 분노를 풀어주고, 이기적이고 싸가지 없는 우리 마음을 반성하고 새로 깨어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가 택한 지랄발광의 방법은 바로 ‘탈’이다. 하지만 탈을 얼굴이나 몸에 쓰는 것이 아니다. 그와 부인 무나미씨, 그가 이끄는 대동전위극회 회원들의 몸 전체가 탈로 변신한다. 바로 ‘통미(統美) 보디페인팅’을 공연한다. 통미는 머리·미용·의상·액세서리·소도구와 함께 온몸이 통일된 아름다움을 뜻한다. 통미분장예술연구소의 김선미 감독을 비롯한 분장가들이 참여했다. 굿판에 등장하는 도깨비는 이 땅 터줏대감들의 지킴이들로, 귀신이 아닌, 귀신을 다스리고 은폐의 탈을 퇴치하는 존재들이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행동예술에 맞는 공간을 구하지 못해 작은 지하 갤러리를 빌린 공연이어서 30명 남짓이 겨우 함께할 수 있다. 공간만 제공된다면 전국 어디든 찾아가 굿판을 펼치겠다는 그는 “누구보다 박근혜 대통령과 함께 지랄발광을 하고 싶다. 제발 낮은 곳으로 내려와 함께 손잡고 ‘화’와 ‘독’을 풀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그도 살고 우리 민족 모두 살 수 있다”고 당부했다.


[한겨레신문]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Why]

29일까지 '지랄발광' 공연하는 행위예술가 무세중

전위적 춤사위 반백년
풍물·쇼팽 음악 속 집단통곡… 영하에 오대산 알몸 등반…몸으로 저항과 아픔을 표현

내 예술의 뿌리는 사람
잘난 이 기리는건 傳記 작가… 弱者 편 들어주는 건 내몫, 뿌리 없는 전위는 경거망동

내 운명, 내가 운전한다
원래 姓인 金씨 떼고 巫로… 癌 다시 왔지만 갖고 놀 것… 힘과 위선에 대한 도전 계속


행위예술가 무세중(77)은 십수년 전 경기도 고양시 공터에 비닐하우스를 지었다. 그곳이 그의 집이다. 지난 23일 오후 자동차 내비게이션도 잘 못 찾는 먼짓길을 따라가니 삼색 천이 휘감긴 솟대가 객(客)을 맞았다. "어찌 이런 곳에 사시느냐"는 질문에 그는 저 멀리 북한산 능선 사이를 가리켰다. "저기 달이 아름답거든."대낮이라 보이지 않는 달, 그에게만 보이는 달을 가리키며 세상을 향해 반백 년간 사자후(獅子吼)를 토해내온 그가 오는 29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31갤러리에서 새 공연을 저지른다. 이번에는 '지랄발광'이다. 그는 온몸에 페인트를 칠하고 도깨비로 나온다.

지난 23일 경기도 고양 자택 앞에서 전위예술가 무세중씨가 환하게 웃고 있다. 그의 공연 '지랄발광'은 29일까지 이어진다. / 김지호 기자

 

 

―공연명이 왜 '지랄발광'인가.

"전통 탈춤은 중간에 '하던 지랄 다 했느냐'고 묻는다. 지랄은 사회의 병폐를 말한다. 도깨비가 나와 지랄을 희화화하다가 발광(發光), 즉 빛을 보여준다. 빛을 내어 서민들이 살아갈 길을 찾아가는 것이다."

우리나라 1세대 전위예술가인 그는 몸의 은유로 1980년대 암울한 시대의 급소를 내리쳤다. 1982년 '통일을 위한 막걸리 살풀이'라는 뜻의 '통막살' 공연 때는 풍물 소리와 쇼팽 음악을 배경으로 배우 20여명이 곡(哭)을 하고 몸부림을 쳤다. 억압된 체제에 저항하는 반(反)이데올로기의 맹폭이었다. 1990년 2월에는 영하(零下)의 오대산을 알몸으로 오르는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본질을 가리는 껍질을 벗어던져야 한다는 울부짖음이었다.

광산 김(金)씨 9남매의 장남으로, 보들레르와 앙드레 지드를 즐겨 읽던 푸른 청년을 전위(前衛)의 파수꾼으로 변모시킨 것은 20대 초반의 국토 대장정이었다. 무전(無錢)으로 전국을 돌며 이 땅의 맥을 찾아가다 '외국 병'을 버리고 우리 것을 섭렵하기로 마음먹었다. 대학원에서 민속학을 전공하며 함경북도 끝에서 제주도 끝까지 어디에나 있는 우리 것인 탈춤에 빠져들었다. 전국의 탈춤 춤사위 500가지를 한 몸에 익힌 예인(藝人)은 그 이외에 찾기 어렵다. 민속과 민족을 연구하던 그는 1972년 '씨족의 성은 부질없다'며 원래 성(姓)인 김을 떼어버리고 무세중(巫世衆)이 됐다. 무는 하늘과 땅을 맺는 무당의 무(巫)요, 춤의 무(舞)요, 무위(無爲)의 무(無)이면서, 모든 충돌과 맞서 싸우는 무(武)이기도 하다.

―보통 사람에게 전위예술은 해괴한 기행으로 보인다.

"원래 전위는 아방가르드(avant-garde), 즉 앞을 지키는 것이다. 한 사회가 움직일 때 앞에 나가서 길을 안내하는 것이다. 앞으로 나가려면 뿌리가 든든해야 한다. 우리의 뿌리는 커피가 아니다. 숭늉이나 생강차다. 뿌리 없이 전위하겠다고 나서면 경거망동이 된다."

―무세중 예술의 뿌리는 무엇인가.

"사람이 제일이라는 생각이다. 예술은 사람, 그중에서도 약자의 편을 드는 것이다. 잘난 사람은 전기작가가 기리면 된다. 약자를 억압하는 힘과 위선에 도전하는 것이 나의 예술이다."

―명분으로는 좋지만, 그런 예술은 돈이 안 되는데.

"어떻게 예술가가 돈을 버나. 나는 그래서 자식도 안 가졌다. 예술하려면 선택해야 한다. 1990년대에 4~5년간 인사동에 카페를 했다. 잘됐다. 그래서 그만뒀다. 내가 거기에 묶여버릴 것 같았다."

이번 공연도 언제나처럼 무나미(55)와 함께 한다. 1983년 스물네 살이던 무나미는 남산 드라마센터 워크숍에서 무세중을 만나 "아무래도 내가 무 선생님하고 같이 살아야겠다"고 했다. 6개월이 안 돼 결혼했다. 무나미는 무세중의 아내이자 어머니, 제자이자 동지로 31년째 그의 삶에 존재하고 있다. 무세중은 "무나미는 나의 운명"이라고 했다.

―운명을 믿나.

"운명은 존재한다. 내가 9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것은 운명이다. 하지만 인생은 운명이 반, 의지가 반이다. 의지 없이 운명에 끌려가면 팔자가 된다. 나는 절대로 운명에 밀리지 않는다. 내가 운명을 운전한다."

―'통막살'을 공연하던 30년 전의 전위와 지금의 전위는 무엇이 다른가.

"그 시절에는 전위를 둘러싼 민족의 기운이 강렬했다. 지금은 민족이라는 개념이 자꾸 사라져간다. 좋은 현상이 아니다."

―전체가 아닌 개인이 중심이 되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지 않은가.

"후세에게 우리가 물려줄 단위가 튼튼해야 다른 단위하고 싸울 수 있다. 단위가 무너지면 정체성이 사라지고 허망해진다. 이러나저러나 아무렇게나 잘 살면 된다는 강자의 궤변만 남는다. 그러면 사람이 다친다. 세월호를 보라."

무세중씨가 도깨비로 출연하는‘지랄발광’포스터 / 대동전위극회 제공


―전위를 외치는 인생은 외로울 것 같다.

"미치도록 외롭다. 하지만 그런 걸 각오하지 않고 어떻게 앞을 가나. 앞을 가는 것이 내게 주어진 사명이고,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다."

―반백 년간 한길을 걸어왔다. 꿈꾸던 예술의 정상에 도달했나.

"도달했다고 감히 말할 수 없다. 역사에 충실하고 시간에 충실하면서 성실하게 나아갈 뿐이다. 어차피 이 길은 시간이 걸린다. 나 하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동적 개념으로 후세가 이어가야 하니까."

그는 2003년 8월 간암 말기 판정을 받고, 간의 70%를 절제하는 수술을 했다. 운명과도 싸우는 그에게 암 정도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다음 달에 그는 "병마야, 봐라"는 듯, 또 공연을 했다. 2011년 암은 다시 그에게 쳐들어왔다. 지금도 무찔러가는 중이다.

―공연을 계속할 체력이 되나.

"이번이 나의 마지막 인터뷰일지도 모른다. 죽음은 순리다. 하지만 순리에 따르면서 동시에 갖고 놀아야 한다. 순리에 맹종하면 맹추고 맹물이다."

세월은 그의 육신에만 새겨졌을 뿐, 확신을 무력화하지는 못했다. 암과 싸우고, 미칠 듯한 외로움에 맞서며 시대의 위선을 후려쳐온 백발의 전사(戰士)는 오늘도 마당의 솟대를 짚고 아무도 보지 못하는 달을 가리키고 있다. 공연 문의 (02)381-5335


프리미엄조선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지난 25일은 인사동 ‘3.1갤러리’에 도깨비들이 나타났다.

도깨비 구경하러 갔다가 음유시인 송상욱선생을 만났다.
도깨비 나올 시간이 30분밖에 남지 않았는데,

출출한데 어디 가서 막걸리나 한 잔 하자는 것이다.
송선생님에 끌려 ‘툇마루’로 갔으나 앉을 자리가 없었다.
입구 쪽마루에 걸터앉아 마시는 막걸리 맛도 괜찮았다.

돌아오다 남해에서 올라 온 조각가 김동환씨를 만났다.
마침 무세중선생 공연보러 간다기에 함께했다. 
굿판에서 김명성, 김상훈, 유재만, 신현수씨 등 여럿 만났다.

무세중파 도깨비들은 썩어가는 사회를 통렬하게 비판했다.
카메라 들고 그들의 못 짓 따라 다니다보니 금방 끝나버렸다.

모두들 뒤풀이도 없이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인사동 거리에는 묘기를 보여주는 사람들도 있었고,

매직으로 행인들의 발길을 잡는 사람도 있었다.

초상화를 그리는 아가씨는 손님이 없어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안국역으로 가는 길목에서 휠체어를 미는 공윤희씨와 최혁배씨를 만나기도 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