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화가 장경호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장안동서 신학철선생과 한 잔하고 무다헌에 넘어 왔으니 빨리 나오소~”

이미 술에 취해 목소리는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어제 마신 술로 주독도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내일도 마실일도 걱정인데, 가만 두질 않았다.

소 도살장에 끌려가듯 인사동에 나갔더니, 일찍부터 술집이 부산했다.

 

신학철선생은 반가워하셨으나, 장경호씨는 김정대씨와 입씨름하느라 아는 척도 안 했다.

금방 한 판 할 것 같은 기세였으나, 술 취하면 부르는 그의 행복한 노래쯤으로 생각하고 앉았다.

그다음엔 나한데 시비를 건다. “어찌 알고 왔어요?” 자기가 전화해놓고도 매사 이런 식이다.

술 취하면 부르는 그의 시비성 노래는 익히 알지만,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좌불안석이다.

나중엔 나죽으면 형이 가마니때기라도 한 장 덮어주소라기에 가마니는 구하기 힘들고

카시미롱 이불은 덮어 줄게라고 말했다.

 

신학철선생께서 처음보는 류제홍박사를 소개했다.

모내기그림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꽤 오랜 교분 같은데, 너무 젊어 보였다.

내가 여자라면, 한 번 꼬셔보고 싶을 정도로 핸섬했다.

명함을 주고 받았는데, 너무 다양하게 바쁜 사람이더라.

사회경제를 통솔한다는 뜻도 가진 ‘planner’라는 글자아래 공공공간연구소 공간력소장이란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바닥에 깨알같이 적힌 글을 보니 정신이 없었다.

문화학박사, 정책컨설턴트, 전통시장전략가, 도시마을계획가, 청년도시메이커, 세계대회기획사라 적혔는데,

사짜는 아닌 것 같았다. 점잖았고, 이야기도 진솔했다.

오죽하면 술 취한 장경호씨의 거친 말투가 류박사와 연결되면 곧 바로 공손해 지겠는가?

    















옆 자리에는 요즘 몸이 불편해 잘 나오지 않는 주임마담 강고운시인도 보였다.

언제 왔는지, ‘관객모독을 연출한 기국서씨도 있었다. 그도 한 가닥 하는 주당이다.

말은 별 없지만, 거슬리면 여지없다. 한 때 서정춘시인이 그의 헤딩 한 방에 날아가는 것도 보았고,

도예가 한봉림씨를 향해 늑대처럼 튀어 올라 얼굴을 활키는 것도 봤다.


작은 거인 기국서씨가 반가웠지만, 일행이 있어 인사만 나누었다.

뒤늦게는 미술평론하는 김준기씨가 등장해, 술자리 대화가 갈리기도 했다.

장경호씨의 십팔번 뒷동산 아지랑이~”를 뒤로하며 먼저 도망쳤다.
















돌아오다 습관적으로 유목민에 들렸다. 안국역 옆에 있으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주인장 전활철씨와 박혜영씨는 손님받느라 정신없고,

인사동에서 풍요로움이란 회사를 운영하는 조원희씨가 같은 일가라며 엄청 반가워했다.

김기영씨와 함께 앉았지만, 술을 더 마실 수 없었다.

퓨전피아니스트 윤강욱씨와 노래하는 신현수씨도 있었고, 나오는 길에 노광래씨를 만나기도 했으나

이로서 모두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인사동 술 방랑은 끝났다.

 

씰데없는 술주정 듣느라 고생했슴니더.”

 

사진,/ 조문호










































 


 



페이스 북에 들어와, 세상 도는 꼴을 낱낱이 알았다.
모르는게 약이라며 등 돌리고 살았으나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잘 못된 현실을 바로잡을 수 있는 게 정치이기에 정당 입당부터 작정했다.
여지 것 정치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악을 쓰고 말렸으나, 욕심만 없다면 말릴 일은 아니었다.

지난 28일, 예술가들을 규합하겠다는 야심찬 생각으로 인사동에 나갔다.
‘리얼리즘의 복권’전이 열리는 ‘인사아트’에서 많은 분들을 만났다.
‘유목민’에서 화가 장경호, 시인 조준영, 한겨레 논설위원을 지낸 김형배씨와
목만 축이고 ‘무다헌’으로 옮겼더니 신학철선생께서 먼저 와 계셨다.
뒤 이어 박불똥, 이인철, 최석태, 박은태, 김정대, 조경연씨가 들어왔다.

신학철 선생과 함께하는 술꾼 모임을 늘 ‘신학철사단’이라 불러왔다.
술 마시는 것도 전투에 속할지 모르지만, 무언가 일을 작당하려는 속내도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조준영시인을 비롯한 한 두 사람만 빼고, 모두 정의당원이었다.
술자리에서 정치이야기는 안 하니까, 여지 것 나만 몰랐던 것이다.

아무도 하지 않는 악역 있으면, 좀 맡겨 달라고 신학철선생께 부탁했다.
죽든 살든 끝장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치란 감정으로 하는 게 아니고, 이성으로 하는 거야.
여지 것 잘 하고 있잖아. 그대로 사진이나 찍어..”
하긴 늙은 놈이 힘쓸 것도 아니고, 내가 잘 할 수 있는 그 것 뿐인 것 같았다.

소주, 맥주, 양주 등이 오가는 술잔 속에 모두들 취하기 시작했다.
그 날 소주를 꽤 마셨으나, 왠지 술이 취하지 않았다.
노래를 부르라지만, 마음은 온통 초저녁에 본 ‘리얼리즘의 복권’전에 꽂혀 있었다.
자본권력에 농락당한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뜻밖의 소식도 들려왔다.
이인철씨가 ‘민미협’ 이사장을 맡았다는 소식도 들었고,

김정대씨는 더 큰 갤러리를 만들어 본격적인 화상으로 돌입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사업을 확장하는 일이야 좋은 일이지만, 감투를 쓰는 것은 그렇게 달가워 보이지 않았다.
단체라는 게, 아무리 열심히 해도 욕먹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좌우지간 누군가 맡아야기에, 잘 끌어가길 바라며 축하해 주었다.

음악회에 갔던 아내도 돌아왔는데, 술 시간이 왜 그리 빨리 가는지 모르겠다.
조금만 일찍 일어났으면 좋으련만, 결국 마지막 지하철을 놓치고 말았다.
아내와 택시 뒷자리에서 느긋하게 가는 맛도 좋았지만, 스스로를 자성하는 시간도 되었다.
사단장님 말씀처럼 감정을 다스리려면 먼저 마음에 맺힌 분노를 녹여야하기 때문이다.
열 받지 말고, 닥치는 일을 편안하게 대처하자.

사진 :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술 생각이 간절하던차에, 화가 장경호씨로 부터 전화가 왔다.
제대하고 돌아 온 아들 만나러 나왔으니, 술 한 잔 하자는 이야기였다.
‘유목민’은 문이 잠겼다기에 ‘포도나무집’으로 달려갔다.
과메기안주로 술 한 잔했는데, 소주가 입에 짝짝 달라붙었다.

요즘 장경호씨는 전시가 닥쳐 그림도 그려야 하지만,
방 구하러 서울 곳곳을 살피는데, 집구하기가 만만치 않단다.
100호 정도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넓은 공간이 필요하지만, 돈이 적기 때문이다.
의외로 경기도 지역보다 불광동이나 구파발 지역이 저렴하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집을 구하고 보니, 전세가 빠지지 않는 다는 것이다.

빼도 박도 못할 형편이지만, 사돈 남 걱정하고 있었다.
없는 놈이 없는 놈 처지 안다더니, 느닷없이 돈 봉투를 내민 것이다.
이미 작심한듯해 거절치는 못했지만, 나중에 돌려 줄 생각이다.
얼마나 가슴이 먹먹하고 편치 않은지, 계속 술만 마셨다.
뒤늦게, 식사하러 오신 ‘심우성선생도 만났다.

담배 피우러 골목에 나갔더니, 새로운 밥집 하나가 생겼더라.
상호가 “꽃, 밥에 피다”였다. 이름은 예쁘지만, 식당 이름으론 좀 그렇더라.
맛보다 멋을 더 좋아하는 젊은이를 겨냥한 듯싶었다.
‘무다헌’으로 자리를 옮겨 마시다, 인사동 밤거리를 쏘다니기도 했다.
추운 날씨 탓인지, 불 빛 탓인지, 인사동이 낯설어 보였다.

마치 이국의 밤거리를 걷는 듯, 허전하고 외로웠다.
에디뜨 피아프의 ‘사랑의 찬가’가 더 애절하게 들리더라.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0일 이른 시간, 화가 장경호씨를 만나 술집에 마주 앉았다.

인사동 '툇마루'로 평론하는 최석태씨와 화가 김진두가 차례로 나타났다.

이차를 간다며 '백련'으로 옮겼더니 배성일씨와 헨리 윤까지 등장했다.

 

헨리 윤은 만난 지가 오래되어 무지 반가웠다. 아마 7-8년은 지난 것 같다.

한 때 인사동 '작은 뜨락'을 들락거리며 밤이슬에 젖은 적이 어저께 같은데...

펀드메니저가 '대한다인회'를 이끄더니 서양화와 사진에도 진출했었다.

이젠 시와 수필에도 등단했다니, 그의 예술에 대한 욕구는 끝이없어 보였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다 술이 취해 깜빡 잠들었는데, 다른집으로 옮기자며 깨웠다.

삼차로 들린 '무다헌'에는 먼저 자리 잡은 주객들로 부산스러웠다.

소주에서 위스키로 격상된 것은 좋았으나, 더 마시기 싫었다.

내가 무슨 이팔청춘이라고 코가 비틀어지도록 마실 형편은 아니지 않는가.

 

그 날은 돈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이나 위용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했다.

장경호씨의 '뒷동산 아지랑이 가물거리는' 노래 소리 들어며 퇴각해야 했다.

 

사진, 글 / 조문호

 

 

 

 

 

 

 

 

 

 

 

 

 

 

 

 

 

 

 

 

 

 

 

 

평소에는 한참 기다려야 했던 병원이나 식당들이 모두 비어 있었다.

피서 떠난 4일의 서울은 평양 거리인양 낮 설었다.

 

장경호씨와의 약속으로 ‘한국현대형상전’이 열리는 ‘팔레드 서울’로 갔다.

그 곳에도 관객은 있을 리 없었다. 단 한 사람 박 건씨를 만났을 뿐이다.

장경호씨는 전시 마무리가 가까워와서야 도록을 만들겠다며 작품촬영을 부탁했다.

전시 못 본 분들을 위한 배려인 듯싶었다.

 

촬영을 끝내고 인사동 ‘무다헌’으로 넘어왔다.

주인만 앉은 가게에서 메뉴에도 없는 막걸리와 소주를 시켜놓고, 꼬이는 일들을 한탄했다.

술을 마시다 장경호씨가 말을 꺼냈다.

여지 것 공부하고 체득해 온 자신만의 미술론을 하나 둘 발표해야겠단다.

 

그리고 22일에는 신학철, 최석태, 강고운씨와 함께 고 김진석 화백의 생가에 들리기로 약속했다.

강고운시인의 남편이며 신학철화백 친구였던 김진석씨의 유작전을 위한 준비다.

그 핑게로 마음 맞는 사람들 끼리 어울려 여행할 생각하니 기분이 들떴다.

뒤늦게야 이두엽씨를 비롯한 여러 명의 손님들이 들어닥쳤다.

 

장경호씨의 한계 주량 막걸리 두 병을 넘기자 강고운씨가 바짝 긴장한다.

행여 다른 손님들에게 실수할까 걱정하기에 그만 퇴청하자며 꼬드겼다.

괜찮다고 퍼져 앉은 그를 두고 나오기가 편치 않았지만 나와야 했다.

재미없이 혼자 있어야 그도 일어나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가 발표하려는 미술론이 미술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면 좋겠다.

 

사진,글 / 조문호

 

 

7월 첫 날  인사동 풍경입니다.
징그럽던 메리야스는 정상을 찾은 것 같으나,

여름 비수기라 그런지 전시장들이 많이 비었습니다.
그 자리를 신바람나게 팡팡 돌릴 수 없을까요?

 

통인에서 오픈한 Mutlu Baskaya도예전에서 한 잔 하고,

'무다헌'에서 장경호, 정희성선생과 어울려 좀 마셨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신학철선생을 만났으나 일행들이 있었습니다.

취해 집에 들어가는 장경호씨의 어깨가 무거웠습니다.

 

그 놈의 성질머리 좀 죽여야하는데...

뒷 손에 잡은, 그 우유팩이 안 스럽습니다.

 

사진,글 / 조문호

 

 

 

 

 

 

 

 

 

 

 

 

 

 

 

 

 

 

 

 

 

 

 

 

 

 

 

 

 

 

 

 

 

 

사람이 그리워 인사동에 나간다.

인사동 어디에선가 반가운 사람을 만날 수도 있지만, 때론 만나자는 연락들을 주고 받기도 한다.

 

인사동하면 그림판이고, 그림판하면 서양화가 장경호씨를 떠 올린다.

인사동 그림판의 마당발 장경호씨를 만난 지가 한 달도 넘어

오랜만에 저녁식사라도 같이 하자며 문자메시지를 날렸다.

 

싫어하는 사람 안 보고, 싫어하는 말에 참지 못하는 꼬장꼬장한 성격으로

안 보면 보고 싶고, 보면 징그러운 그런 사이다.

 

지난 5일 오후 6시30분경 인사동 ‘툇마루’에서 만나기로 했으나 난감한 일이 생겼다.

끌고 다니던 자동차 정기검사에서 불합격을 받아 수리를 해야 했다.

몇일 전에도 정선의 급경사 절벽 앞에서 후진이 되지 않아 가까스로 견인된 일이 있었다.

더 이상 돈 들이기 아까웠지만, 할 수 없어 수리를 맡겼는데 시간이 30분이나 지체되어 버렸다.

 

뒤늦게 아내와 나간 인사동 거리는 메르스인지 메리야스인지 헷갈리는 전염병으로

거리에 사람들도 줄었지만, 마스크 가판대란 별난 것도 생겨났다.

 

‘툇마루’에는 장경호씨와 한양대 무용과 장순향 교수가 먼저 와서 마시고 있었다.

민예총 부이사장 직책까지 뒤집어 쓴 장순향씨는 매번 돈 안 되는 공연에 끌려 다니다 모처럼 돈 되는 공연 하나 생겼는데,

망할 놈의 메르스란 병 때문에 공연 자체가 취소되었다며 불만을 털어 놓았다.

 

그 날은 우연찮게 시작된 자동차이야기로, 술 마시는 내내 자동차로 시작해 자동차로 끝났다.

 

장경호씨가 형한테 딱 맞는 차라며 추천했으나 차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9인승 밴 종류의 차 이름은 다 들먹였으나 모두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다 사방팔방에 전화를 해 대는 것이다.

끝내 알지 못하자 타 보았던 차 주인을 수배해 결국 ‘트라제’란 이름을 알아낸 것이다. 정말 의지의 사나이였다.

얼마나 그 차에 쏠렸으면, 다음 달쯤 자기가 돈을 마련해 줄 테니 중고차 하나 사라는 것이다.

 

자동차이야기로 두어 시간을 보내다 ‘무다헌’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곳에는 노래 부르는 ‘마로니에’ 일행들이 먼저 장악하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들린 ‘무다헌’의 실내 분위기도 약간 업그레이드되어 있었다.

고장 난 노래방 기계 덕분에 돼지 목 따는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도 했으나

장경호씨가 특별 부탁한 한대수 노래 ‘하루아침’이 최고의 분위기로 이끌었다.

“소주나 한 잔 마시고 소주나 두 잔 마시고 소주나 석 잔 마시고 일어났다.”

 

모두들 취해 뿔뿔이 헤어졌다.

 

지하철 타러 가는 길에 참새가 방앗간을 못 지나듯 ‘유목민’에 잠시 들렸는데,

연극배우 이명희씨가 일본화가 木內 万宇씨를 비롯한 전진열, 설 송씨와 함께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이명희씨가 반가웠으나, 그동안 고관절이 부러져 두 달이나 입원했었다고 한다.

왜 연락하지 않았냐며 나무랐지만, 인사동 사람들의 경조사를 알려주던 ‘창예헌’의 존재가 세삼 아쉬웠다.

 

아무리 각박한 인심 속에 산다지만 서로 연락하고, 만날 수 있는 비상구 하나 쯤은 있어얄텐데...

 

사진,글 / 조문호

 

 

 

 

 

 

 

 

 

 

 

 

 

 

 

 

 

 

 

 

 

 

 

 

지난 1일 오후7시 무렵의 인사동은 주변 도로가 통제된 채, 시위대와 경찰의 대치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근로자의 날을 맞아 서울광장에서 벌인 민노총 조합원들과 세월호 유가족 등 이천오백 여명의 시위대가

청와대로 가려 안국동 방향으로 진입해 인사동 일대가 경찰과의 대치장소가 된 것이다.

‘무다헌’에서 장경호씨를 만나기로 하였으나 골목까지 봉쇄되어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간신히 경찰저지선을 뚫고 들어갔는데, 강고운, 정희성시인, 장경호화백 등 몇 명이 앉아

바깥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게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나 술자리에 퍼져 있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급하게 소주 반병을 마시고 카메라만 챙겨 나갔다.

최저임금 인상과 노동시장 구조개악 폐기, 세월호 진상규명 등을 촉구하는 시위대는 경찰차에 밧줄을 매달고

경찰저지선을 흔들어 댔고, 경찰은 최루액을 섞은 물대포와 캡사이신을 쏘는 등, 인사동 일대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오후 9시 40분 경 경찰은 1차 해산명령을 발표한 뒤 대열 맨 앞 참가자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에 붙들린 참가자 한명은 머리가 땅에 떨어져 부상을 입어 실려 가기도 했다. 

참가자들이 해산하지 않자 경찰은 살수차에서 물포를 시험 발사한 후,  연거푸 다량의 최루액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물포에는 다량의 캡사이신이 섞여 호흡곤란과 피부 고통을 유발했다. 

밤 11시 10분 경부터 약 40-50분 동안 경찰은 훨씬 강한 농도의 캡사이신이 섞긴 물포를 줄기차게 발사했다.

사람들은 물포의 물에 약간만 닿아도 “불에 데인 듯 쓰라렸다”면서,

군사독재 시절 거리에 쏟아진 최루탄 보다 훨씬 심각한 수준이라며 고통을 호소했다.

 

특히 최루탄은 바람이 불면 날라가지만 이번 최루액 물포는 물 방울이 공기 중에 떠다니면서

코와 입을 계속 공격하고 피부에 흡수돼 직격으로 맞지 않았더라도 심각한 통증을 초래했다.

마지막에는 세월호 가족들이 나서 물포 발사 중단을 호소했지만, 그들에게도 물포를 쏘아댔다.

 

정말 오래 만에 맡아보는 지독한 최루 냄새였다. 87년도 민주항쟁 시절 당한 후 처음이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한 건 없었다. 단지 최류탄에서 최류액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저지방법은 더 치밀해져 시위대가 제대로 힘을 쓸 수 없도록 만들었다.

87민주항쟁으로 그 지긋지긋한 군인정치에서 벗어났지만, 그 뒤의 정권들도 별 수 없었다. 

오히려 빈부격차만 높아져 가난한 사람만 더 살기 힘든 세상이 되어버렸다. 
정치판은 재벌들과 협잡하느라, 민생은 뒷전이다.

더럽다고 내 버려둘 일도 아니니 가슴이 답답한 것이다.

물대포 한방 맞고 콜록대며 ‘무다헌’으로 기어들었지만, 술 취한 장경호씨 말대포에 또 한방 얻어 맞았다.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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