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동 금보성아트센터에서 세 가지의 목소리를 내는 특별한 초대전이 열리고 있다.



    

 

이흥덕의 불안의 에티카’(1)는 현대사회를 비판하고,

조신호의 “DMZ로 부터”(1)는 생태환경을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이민종은 나의 노래’(2), 자연은 자연으로 두라는

각기 자신만의 어법으로 쟁점화 시켰다.



 


작가들이 한 목소리를 내는 비판적 현실이 암울하고 참담할 뿐이다.

돈과 권력에 눈이 어두워 정신은 병들었고,

물질문명의 노예가 되어 마치 하루살이처럼 살아간다.

남이야 죽던 말든, 자연이야 망가지던 말든,

오로지 개인주의적 탐욕으로 똘똘 뭉친 것이다.

그 비정의 현실을 말하는 기획전이라 뜻하는 바가 크다.



 


이흥덕이 사회를 보는 불안한 시각은 꽤 오래 되었다.

40년 가까이 욕망이 이글거리는 우리 시대의 다양한 사회풍경을 풍자하고 비판했다.

불안한 현실을 그려내는 심리 도해로서의 지옥도고, 온몸으로 부대낀 보고서다.

    


 



해골 무덤에서 탱고를 추는 남녀 군상들, 구제역에 매몰되는 가축들,

전쟁놀이 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

구덩이에 처박혀 떨고 있는 사람들, 십자가에 눌린 무력한 예수,

모든 작품들이 지옥이 따로 없는 오늘의 현실을 말해준다.



 


작가의 불안한 증상은 개에 쫒기는 사람으로 동시대적 폭력과 야만을 보여준

80년대부터 시작되었단다.

풍자적으로, 때로는 에로티시즘적인 수사학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상을 형상화해냈다.



 


흑백 목탄이나 초록의 유화 모노크룸,

또는 강렬한 색을 사용하여 마치 요지경이나 만화경 속에 들어 있는

무대처럼 몽환적 풍경을 만들어낸 것이다.

원시의 울산 암각화처럼...




 

근대미술의 시조격인 고야의 동판화집 "이성이 잠들면 요괴가 눈 뜬다"라는 작품이 있다.(중략) 이흥덕의 그림도 거기에 맞닿아 있다. 요괴를 부정하는 근대도 지나고, 그 유산으로 '찬란한 문명(?)'을 성취한 현대도 100년 이상이나 지났건만, 우리는 여전히 요괴가 눈 뜨고 횡행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이흥덕은 그런 동시대를 때로는 겹 눈질로 때로는 정면으로 응시하며, 그의 불안을 임상보고하고 타자와의 미적·정서적 연대를 시도한다. 이는 보편적인 이웃과 더불어 인간욕망과 욕망이 야기한 폭력과 그로인한 '불안'을 바로 보고, 거기에 맞서려는 작가 이흥덕의 저항적 '에티카(Ethica)'에 다름 아니라 하겠다.“고 미술평론가 김진하씨가 썼다.




 

두 번째 작가인 조신호씨는 대학생 신분으로

한강미술관푸른깃발전에 참여한 적도 있단다.

일찍부터 시대정신에 눈 떠 현실에 주목하기 시작했는데,

미를 추구하는 그림에서 벗어나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다 18년 전, 살기가 어려워 파주로 들어가 DMZ를 접하며

생태환경에 빠지는 일대 전환을 맞는다.

고통 받는 동물들을 치료해 주며 스스로 위안 받았다고 한다.

지구의 환경오염이 인간이나 동물에게 미치는 심각한 폐해를 자각한 후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것이다.




 


작가는 DMZ를 다닐 때마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똑같다는 생각을 했다.

인간의 초월적인 힘은 도저히 용납하지 않았다.

인간을 끝없이 불안한 존재로 인식하며,

그런 문제의식을 그림으로 토해내기 시작 했다.



 


살기를 뻔뜩이며 날개 짓하는 독수리무리, 해골에 박혀있는 나무,

앙상한 나목을 마지막 보루처럼 지키는 조류, 하나같이 섬뜩한 장면이다.

마치 작가의 분노가 고스란히 화폭에 옮겨진 것 같다.

강렬한 색과 터치로 그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한 것이다.



 


미술평론가 곽대원씨는 이렇게 말했다.

작가의 작품을 보면 영국의 화가 프렌시스 베이컨(1909-1992)을 연상케 한다. 베이컨은 고기와 형상과의 관계를 통해 극도의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작가다. 베이컨 그림에 나타난 인간과 동물은 아름다움보다는 처절함이다. 조신호의 작품에서 종종 비슷한 그림을 발견한다. 동물을 인간의 정형이라고 믿는 베이컨이나 조신호가 혹시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묻고 있다.

    


 



세 번째 작가 이민종이 나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내 놓은

일련의 작품을 보면 우선 나른한 느낌이 든다. 자극거리가 없다.

땅에서 시작되는 삶이란 원래 지루하고 따분하다.

성적인 말로 조루와 반대되는 지루의 상태로

언제 사정해 버릴지 모르는 아슬아슬함을 지닌 채 오래도록 지속된다.

본래 자극을 주는 것이란 쉽게 눈길은 가지만 금방 싫증을 느낀다.



 


마치 드론으로 찍은 부감사진 같은 풍경은

재현적인 사실주의라기보다 조형화한 산수화 같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는 아주 높고 치밀한 불완전함이 있다.

무기교의 기교이며, 무기교를 위장한 기교다.

바로 이것이 이민종 풍경화의 매력이다.



 


색을 중첩하는 채색방식이야 서양화지만, 동양화의 관점이다.

미세한 붓 자국으로 눈이 쌓이듯 잔잔하게 찍어 그렸는데,

작가는 사물의 물성을 강조하지 않는다.

물감의 흔적으로 화면 층을 깊게 하며,

붓 자국이 쌓이는 시간을 기다려 공간감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형상화해가는 방법이 아니라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에 있다.

자연은 그냥 그대로 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연은 지루해야 한다는 것이다.



 


겨울은 가능성의 세계이고 봄은 생동하는 계절이기에 선택되었으나, 계절 속 자연은 침묵으로 생명의 흔적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동양사상의 핵심은 현실 속에서 주변과 자기마음을 조용하고 화평하게 하는 데 있다. 화가 이민종의 정신은 이러한 자연에서 발견한 감성적인 이미지를 재창조하는 것이다.”고 주성열교수가 적었다.



 


지난 30일 전시를 보러 금보성아트센터를 가야했으나,

그날따라 서울대학병원장례식장에서 열리는 김윤수선생 추모식 시간과 겹친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한 곳은 포기해야 할 텐데, 기어이 욕심을 부려 더 힘들게 만들었다.




   

먼저 전시장부터 들렸으나 이미 개막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금보성 관장과 미술평론가 김종근씨 등 작가들이 차례대로 나와 이야기들을 했다.

객석에는 류연복, 정복수, 이재민, 나종희, 김진하, 김재홍, 김구씨 등

반가운 분들의 모습도 여럿 보였다.



    

 

개막식이 끝나야 전시를 볼 수 있을 텐데, 행사는 지루하게 이어졌다.

그런데 류연복씨가 추모식에 갈 것이냐며 재촉해 온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다음 날 다시 볼 생각으로 나왔는데.

가보니 추모식도 이미 끝날 직전에 있었다.

반가운 분들이야 만났지만...



 


지난 2일은 아침부터 궁상맞게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정영신씨에게 연락해, 전 날 못 본 금보성아트센터전시를 다시 찾은 것이다.

작가 이흥덕씨는 자리에 없었지만, 조신호, 이민종씨가 있었고,

금보성 관장과 사진가 양재문씨도 와 있었다.



    


전시도 찬찬히 돌아보고 기념사진도 찍고, 관장실에 들려 커피까지 얻어 마셨다.



 


마침 서재에 전주의 류휴열씨 도록이 꽂혀 있었다,

! 이 얼마 만에 듣는 이름인가?

30년 전에 그의 주선으로 전주에서 전농동588번지전시를 연적도 있다.

어떻게 서로 전주와 서울을 오가며 이토록 무심하게 잊을 수 있었단 말인가?

다음에 전주 가면 꼭 한번 만나보기로 다짐했다.




 

그런데 금보성 관장께서 내년에 나와 정영신씨에게 전시를 하란다.

난, 형편도 되지 않지만, 전시 같은 건 별 관심이 없으나,

정영신씨의 장터사진은 한 번 추진해 봐야겠다.

죽기 전에는 동지로서의 계약을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한꺼번에 세 작가의 작업을 감상할 수 있는 이 전시를 놓치지 마라.

오는 17일까지 금보성아트센터’(02-396-8744) 전관에서 열린다.

 

사진, / 조문호












 





지난 6일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칡뫼 김구의 “아프다!?“전이 개막되었다.






그 날은 하던 일을 마무리하려다 개막시간을 한 시간이나 넘겨버렸다.
다들 뒤풀이 장소로 옮겨 버렸고, 작가와 낯선 몇몇 분만 남아 있었는데,
전시장이 한산해 작품은 찬찬히 살펴볼 수 있었다.






전시된 작품에는 분단의 상징 같은 철조망이 자주 등장하였고,
상품에나 붙어야 할 바코드도 여기저기 그려져 있었다.
갈라진 땅에 수술용 가위와 실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분단의 상처와 더불어 욕망에 의한 인간성상실을 말하는 듯 했다.





철조망이 툇줄로 연결된 ‘분단둥이의 탄생’이나
쿠르베의 작품인 ‘세계의 기원’을 패러디한 ‘세계의 상처’란 야한 그림도 있었고,
고사 지낼 때나 등장하는 돼지머리 설치물도 있었다.






휴전선과 인접한 김포가 고향인 작가로서는 분단에 대한 앙금이 남다를 것이다.
어릴 적부터 보아 온 철조망, 즉 분단에 대한 한이 곳곳에 묻어나고 있었다,
서로 편 가르는 단절이나 소통부제가 주는 현실이 아픈 기억을 촉발시켰을지 모른다.
마치, 분단된 사실을 잊고 사는 오늘의 현실을 꾸짖는 듯 했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 내가 처한 현실, 그 삶의 진면목은 과연 뭘까?
늘 묻던 질문입니다.(중략) 저는 작가 자신도 잘 모르는 공허한 그림을 반대합니다.
우연히 만들어진 이미지에 목매는 작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라는
작업노트에 적힌 글에서 분단된 나라에서 사는 작가로서의 아픔이 베인,
문제의식을 읽을 수 있었다.






뒤풀이 장소인 ‘유목민’으로 갔더니, 축하객들이 너무 많아 앉을 자리가 없었다.
정복수, 김진하, 장경호, 이명희, 임경일, 이만주, 김아란, 김행수,
김발랜티노, 하형우, 노광래, 김이하, 강경석, 전강호, 김수길,
유진오. 최명철, 김재홍, 손기환, 이수호, 김명성, 이인섭,
이정황, 장종수, 편근희씨 등 많은 분들이 술잔을 기울였다.





류연복씨를 비롯한 이인철, 박문종, 김현숙씨 등 몇몇은 인근의 ‘사랑채’에 자리하고 있었다.
작가의 인간적 친화력을 엿볼 수 있는 뒤풀이 현장으로, 양쪽을 오가느라 혼자 바쁜 걸음 쳤다.






이 전시는 6월19일까지 열린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1일 오후 4시경, 모처럼 인사동에 나갔다.
나무화랑에서 열리는 광화문미술행동, 100일간의 기록을 보기 위해서다.
이 전시는 이달 초하루에 막을 올렸으나, 내일 내일 미루다 여지 것 보지 못했다.
전시되는 사진이나 설치물은 함께 한 일이라 알고 있으나, 눈도장은 찍어야 했다.

얼마 전, 동자동 일에 너무 소홀해 일체의 오프닝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나발 분 것이 족쇄가 되어, 꼭 가야할 전시회마저 갈 수 없었던 것이다.
어디에는 가고 어디에는 안 간다면 욕먹기 십상이라, 얼굴에 철판 깔고 버틴 것이다.

사실 열림식 있는 날에는 사람 만나기는 좋아도 작품 보는 데는 별로다,
꼭 보아야 할 전시는 평소 시간 날 때 들리기로 했는데,

이날은 판화가 류연복씨가 전시장 지킴이라기에 찾아 나섰다.

 

전시장에는 류연복씨 외에도 김준권, 변정대섭, 김이하, 육인순씨 등 반가운 분들이 여럿 있었다.

좀 있으니 죽은 용태형 딸래미 김보영과 그의 친구 김진영씨도 나타났다.

숨겨 둔 막걸리를 얻어 마시며, 오랜만의 회포를 풀었던 것이다.





이 전시는 출판기념회를 겸해 열렸으나, 사실 광장이나 야외에서 전시되어야 했다.

그 많은 설치물과 국민들의 염원이 담긴 현수막들을 어떻게 조그만 전시장에 다 펼칠 수 있겠는가.

광화문광장에 모두 펼쳐놓고, 그 날의 감회를 맛 볼 날이 올 것으로 기대한다.

전시된 사진과 현수막들을 돌아보니, 지난겨울의 하루하루가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끓어오르는 분노의 열정으로 추운 줄도 몰랐고, 역사의 순간순간들을 기록하느라 배고픈 줄도 몰랐다.

그 타오르는 촛불의 물결을 바라보며, 사실상 짜릿한 희열도 맛보았던 것이다.

올바른 세상을 향한 국민들의 외침으로 철옹성 같은 벽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드디어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다.

이제 적폐들이 하나하나 청산되고, 갑과 을이 없는 평등한 세상을 조용히 기다릴 것이다.






시간이 되어 전시장 문을 걸어 잠그고, 다들 풍류사랑으로 몰려갔다.
그런데 어디를 가나 류연복씨는 인기 짱이다.

그토록 여성 팬이 많은 그가 홀 애비로 사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좋아하는 것과 사는 것은 다른 것일까? 아니면 무슨 비밀이라도 있는지...
이 날도 풍류사랑에 가자마자 보영이 엄마로부터 뽀뽀세레를 받았다.
"주여! 왜 이리 세상이 불공평하나이까?"

돌아오는 길에 습관적으로 유목민에 들렸다.
뜻밖에도 정영신씨가 유목민술자리에 있었다.

나도 반가워  뽀뽀세례를 받고 싶었으나, 최혁배, 장경호, 공윤희, 배성일, 임경일씨 등

사내들 속에 끼어 있어 들어 갈 수가 없었다.


좀 있으니 옛날 유행가 가사가 생각나더라.
헤어지면 그리웁고 만나보면 시들하던, 모를 건 이내심사~






이 전시는 16일까지 이어지고,

오는 20()은 오후1시부터 8시까지는 광화문광장에서 노무현대통령 8주기 추모문화재 사전행사도 열린다.

노무현재단에서 주최하고 광화문미술행동에서 주관하는 시민과 함께하는 추모예술난장에 많은 분들의 참석을 바란다.

사진, 글 / 조문호















































광화문미술행동-100일간의 기록
100Days Document for Kwanghwamun Art Activity展
2017_0501 ▶ 2017_0516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30pm



나무화랑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 4층

Tel. +82.(0)2.722.7760



광장의 미술, 미술의 광장 - 보고 혹은 설명 ● 박근혜에 대해서 하야와 탄핵을 외치며 100일간 진행된 '광화문미술행동'의 프로젝트는 "OVER THE WALL"이란 붙박이 타이틀 아래 크게 세 개의 마당과, 15개의 작은 소주제로 14주 100여 일간 진행되었다. 「퇴진행동」본부와 「예술인 텐트촌」의 전체행보에 컨셉을 맞춤과 동시에, 미술행동이 자체적으로 지향한 방향성으로「차벽공략→차벽 넘어 광장으로→촛불광장」이란 진행과 정적 슬로건을 설정하고, 거기에 당시 긴급한 시국현안에 조응하는 시의적절한 실행 타이틀로 '바람찬 전시장'의 기획을 진행하며 촛불시민들과 소통했다. 그 15개의 슬로건을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차벽공략 Project  

- 2016. 12. 24: "촛불은 꺼지지 않는다."  

- 2016. 12. 31: "촛불이 국민의 명령이다-君舟民水"  

- 2017. 01. 07: "우리 모두가 블랙리스트 예술가다"  

- 2017. 01. 14: "응답하라! 1987, 한 걸음 더 2017!"   


2. 차벽 넘어 광장으로 Project  

- 2017. 01. 21: "동녘이 밝아온다"  

- 2017. 01. 28: "촛불시민 만복래"-캠핑촌예술위와 설날 한마당  

- 2017. 02. 01: "광장목판화전"(궁핍현대미술광장)  

- 2017. 02. 04: "새로운 나라로! - 彈劾大吉 建陽多慶"  

- 2017. 02. 11: "대선? 탄핵이 먼저다!'   

- 2017. 02. 18: "黑雲萬天 天不見"   


3. 촛불광장 Project  

- 2017. 02. 25: "임을 위한 행진곡"  

- 2017. 03. 01: "민주주의 촛불공화국 만세!"  

- 2017. 03. 04: "역사, 광장민주주의"  

- 2017. 03. 11: "촛불시민 여러분 사랑 합니다"  

- 2017. 03. 14: "촛불 역사전"(궁핍현대미술광장)


이런 정규적인 메인프로젝트 사이로 국회의사당, 검찰, 세종시 문화부 등에서의 현장 작업과,

여타 궁핍미술광장 목판화전 등의 다양한 부정기적 프로젝트 참여 등이 있었다.




12월 24일에 시작해서 네 번 진행했던 『차벽공략 Project』를 1월 중순에 『차벽넘어 광장으로 Project』란 슬로건으로 바꾸면서, 광장 한쪽 끝인 미대사관 앞 차벽으로부터 광장 중앙으로 진입했다. 그동안 미술행동의 『차벽공략 Project』 작업이 촛불시민들에게 호응을 받고 있다는 판단이 들어서였다(특히 1월 14일의 박종철 열사 30주기를 기념하며 기획한 "응답하라! 1987, 한걸음 더 2017!" 은 현장미술의 새로운 이정표가 될 기획이란 판단이 들 정도로 시민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2월 말쯤 헌법재판소에서 박근혜의 탄핵이 인용될 거라는 예측하에 광장 가운데서 시민들과의 '조우'와 '합류'가 우리들의 희망사항이라서 그렇기도 했다. 새로운 나라를 향한 중심 무대, 그 열린 광장에서 우리들의 미술행위도 촛불시민들과 함께 하기를 바래서이기도 했고. ● 우리는 미술행동의 작품을 설치하는 주 무대를 경찰차벽에서 세종대왕 동상 바로 뒤편의 8개의 조형물 기둥 사이에 'Open Air Gallery'란 이름으로 터 잡았다. 4회의 현장작업 진행하고 마침내 미술행동은 차벽을 넘어 광장에 이른 것이었다. 얼마 뒤 백기완 선생은 영어가 아닌 순우리말로 '바람찬 전시장'이란 이름을 붙여 주셨다. 시민들은 우리들을 더 환영했고, 또 시민들 스스로 미술행동의 현장프로젝트에 더 많이 참가했다. 또 그 결과물들을 더 가까이서 더 기꺼이 감상하고 향유했다. ● 그러나 2월로 예상되었던 탄핵인용은 다시 미뤄졌다. 광화문집회도 얼마나 진행될지 알 수가 없었다. 총 10개의 프로젝트를 소화한 뒤, 3월을 목전에 둔 2월 마지막 주부터 이제는 미술행동이 곧 촛불시민이고 또 광장의 한 주체라는 자부심에서 『촛불광장 Project』이라고 명명했다. 미술행동이 촛불시민들 한가운데에서 가족이 되었음을 알려도 될 만큼 상호 간 소통과 믿음을 공유하고 있다는 확신이 서서였다.





광장의 주체는 시민이다. 미술행동은 시민들이 제공한 무대에서 미술이란 특수한 분야를 실행한 또 다른 소수의 시민이었다. 민주주의란 보편성과 미술이란 특수성이 결합하고 융합하면서 불의한 권력과 공권력에 감성적인 '이미지투쟁'·합리적인 '상징투쟁'·그리고 역사적인 '기억투쟁'('상징투쟁,'과 '기억투쟁'이란 용어는 미술평론가 김준기선생의 글에서 차용)을 실행하면서, 동시에 촛불시민들과의 동지적 배려를 통해서 진심을 소통하는 겸손한 운동방향을 세웠고, 이는 미술행동의 기본적 태도이기도 했다. '진심과 전략'을 모토로 실행한 미술행동의 프로젝트는 참여작가 대부분이 쉰을 넘긴 나이였으나, 그럼에도 이 광장에서의 속도감 있는 프로젝트는 대부분에게 또 새로운 경험이었다. 상당수 작가들은 젊은 시절 민중미술운동의 주역들이라 능동적으로 자기작업의 포지셔닝을 이해했지만, 시민운동으로 그 틀이 바뀐 지금의 방법은 과거의 그것과는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익명적인 프로젝트 진행의 이런 기획/진행 방식은, 1980년대 시위 현장에서의 물리적 충돌을 염두에 둔 전투성과는 또 다르게 작용하는 현장 소통의 메카니즘으로 원작자-기획자-시민들 사이에서 이해의 폭이 넓게 기능했다. 특히 기획자의 의도대로 작가들의 원작이 아닌 디지털 출력물들을 이미지 소스(Source)로 활용함으로, 원작의 아우라(Aura)나 '팍투라'를 거세한 '팍토그라프'적 정보 중심의 대중적 소통방식이 유발하는 현장성은 파괴력이 있었다. 충분한 시간을 두고 정교하게 결과를 예측하고 준비를 하는 전시장 중심의 전시에 비한다면 상당 부분은 그 밀도감이 생경할 수밖에 없었지만, 예술로서의 작품 감상이 아닌 현장에서의 실제적 소통효과를 내야만 하는 목적에서 보면 기민하고 유격적인 작품제작/설치/향유의 방식으로선 좋은 전략이었다.





지난 100여 년간 근·현대 한국의 미술은 시민들과 겉돌았다. 현대미술이나 미학이 작가중심적인 것이고, 또 대부분의 미술이 미술관이나 갤러리 내부에서 벌어지는 제도적인 감상/거래의 대상이라서 그렇기도 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시민들과의 일상공간에서 만날 수 있는 대중적 소통문법과 교감의 독법을 실행할 수 있는 기획의 실험과 시도가 별로 없어서 그렇기도 했다. 특정한 장소를 반영구적인 고체로 모뉴멘트化 하는 공공조형물들의 하드웨어적 속성과는 달리, 이렇듯 공공적 집회와 시위에서 기민한 순발력의 퍼포먼스로 진행되는, 게릴라식 즉흥·즉발적 미술행위의 유연한 개입과 탈주의 현장성은, 한마디로 미술과 대중의 살아있는 호흡을 이루기에는 적합한 것이었다 ● 작업실에서처럼 작업의 고립된 주체로서의 '작가'가 아니라, 열린 광장에서의 상호 의견과 작업프로세스와 정서를 나누는 한사람의 '시민'일 때도 여전히 미술은 그 표현과 전달력이 강력하다. 미적으로 발달된 기능을 가진 '작가시민'이 마음만 있는 '일반시민'을 미술이란 공감의 과정으로 불러들일 때, 바로 그때 그 조우에 의해서 전혀 예상치 못한 신선함이 발생한다. 그 '발생'의 과정과 결과물이 특정한 공적 현장성과 정치적 이념성을 담보할 때, 우리는 살아있는 미술의 작용을 감동스럽게 나누고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 기실, 미술의 존재방식은 여러 가지다. 특정한 틀이 있을 수 없다. 작가의 생각·입장·태도도, 작업의 내용·형식·이념도, 관객의 관람과 수용하기에도 어떠한 룰이나 제도도 개입할 수 없다. 작업실에서 내밀한 자신의 세계를 소요하는 작가나 공공현장에서 사회적 가치를 부르짖는 작가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미술의 개념이나 소통의 작동방식에도 당연히 틀이 없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 현대미술은 제한된 제도의 틀 속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거기에 집단적 논리가 자리 잡았고, 자본과 기득권이 생겨났고, 그 결과 미술은 부와 명예의 코스프레를 위한 장식품이자 기호품의 이미지로 박제화되었다. 유통제도권 내에서 그림값이란 숫자로 대체된 미술은 2016, 7년의 겨울 광장에선 없었다. 시민들의 선택이 빛나게 한 민주주의를, 미술이 또 향유하는 역동적인 운동장이었다. 미술은 그곳에서 작가명 없는 익명으로, 자본가가 아닌 시민들을 만나고·호흡하고·울고·웃으면서 미술의 근원적 기능을 누렸다.




광장은 용광로였다. 모든 이질적인 것들을 용해해서 공동체적 발언을 주조해 낸다. 지난 100일간 광장에선 미술도 그런 용광로의 역할을 했다. 작가와 기획자, 작가와 작가, 작가와 시민, 시민과 시민들이 담장을 헐고,용융하고, 융합했다. 미술도 미적 조건 없이 시민들과 수평적으로 만나고 행동했다. 작가들의 그림에 시민들은 낙서를 했고, 거기에 작가들은 또 그림으로 응답했다. 작가/시민, 주/객, 예술/낙서, 토로/독백, 함성/속삭임, 그림/글, 이미지/리터러티들이 그 경계를 넘어서 함께 어울리며 광장을 거대한 표현과 발언의 현장으로 만들었다. ● 자유로웠던 것이다. 미술행동과 시민 사이에서 즉발적으로 발생하는 작용과 교감과 행동에 의해, 공동작업의 결과가 전혀 새롭게 생성되는 예측하지 못한 결과적 이미지의 우연한 발생은, 기존의 미술 관습과는 전혀 다른 현상이기도 했다. 굳이 미술이란 범주의 안팎 어느 지점에 있어도 상관없을 그런 열린 소통과 교호작용이었다. (다만 오랜 기간 고답적인 미술계와 그 구조 안에서 살아온 필자 같은 경우엔, 이 현상의 교감 내지는 정보전달작용의 싱싱함에 다소 낯선 느낌이 있기는 했지만) ● 아직은 논리적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체험이지만, 광장에선 미술의 어느 한 부분이 훨씬 건강하게 넓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감지된다. 일찍이 미술에서 시민이 미술가들과, 또 미술가들이 대중들과 이렇게 수평적으로 만난 적이 있었던가. 대부분의 관객 참여형 해프닝·이벤트·퍼포먼스도 기획자의 로드맵이나, 작가의 아우라에 의해서 진행된다. 그런데 수백, 수천, 수만, 수십만의 시민들이, 작가들과 함께, 작품행위의 객체가 아닌 주체가 될 수 있었던 현상은 2016~7년의 여기 광화문 광장에서만 있었다. 기존 미술계 시스템의 바탕에서 자본, 인맥, 학맥, 기타 제도화된 미술의 한계에서 일탈하는 거대한 열림의, 또 다른 미술의 개념과 프로세스와 장르적가능성을 보았다면 내가 지나친 걸까. ●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나는 여전히 흥분해 있다. 기존의 제도와 양식과 개념의 틀로부터 일탈·이탈·돌파를 시도하는 미술은 얼마나 짜릿한 것인가, 라는 생각에 말이다. 지난겨울부터 봄까지 그 광장에 빠지지 않고 내가(그리고 우리가) 참여하고 있었다는 것에, 거기서 능동적으로 시민들과 미술로 함께 했다는 사실에 난 얼마나 뿌듯해하는가. 감동이었다. 촛불시민이자 미술인으로서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추신-에피소드 1 ● 황당한 일이었다. 분명 정부종합청사를 가로막은 경찰차벽 앞에서 '광화문미술행동'이 시민들과 작업을 하고 그 결과물을 붙이기로 했는데, 그날따라 경찰버스가 나오지 않은 것. 미술행동의 첫 번째 '차벽공략' 프로젝트인데 그 대상인 경찰차벽이 없다니 닥친 현장에서의 그 난감함이란. 그 자리에 있던 미술행동 대장인 김준권 형과 부대장인 류연복 형, 총무 김남선씨와 나, 그리고 몇 명의 멤버들 모두 허탈했다. 리어카에 가득 실어온 각종 그리기 도구들이 무색했고, 그 리어카 한쪽 귀퉁이에서 하릴없이 혼자서 펄럭이는 '광화문미술행동' 깃발이 야속했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의 적당한 한기와 바람이 우리들의 눈에서 초점을 흐리게 했다. 준권 형이 나를 돌아보며 묻는다. "어떡하지?" 묻는 것보다는 차라리 탄식이다. "다른 자리를 찾죠, 뭐. 여기만 의미 있는 장소는 아닐 테니."라고 대답하는데, 연복 형이 끊고 들어온다. "아무 차벽이나 골라서 하자고. 다 광화문인데. 괜찮아." 모두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오후 1시의 광장엔 아직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모두의 눈이 동시에 모아진 곳은 미대사관 앞에 장기적으로 정박(?) 중인 굳건한 경찰차벽이었다. 바로 앞 세종대왕 동상 뒤편의 광장도 넓게 비어있다. '퇴진행동'의 메인 무대로 치자면 맨 뒤쪽이니, 행사가 시작되어도 다른 곳에 비해선 인구밀도가 다소 낮은 곳이라 작업조건도 좋은 편이란 생각이 들었다. "저기 미 대사관 앞으로 갑시다. 저기 경찰차는 행사가 끝날 때까지 뿌릴 내리고 있을 터이니"라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준권 형과 연복 형은 김총무에게 리어카를 끌게 하곤 벌써 세종대왕 동상 쪽으로 가고 있다. ● 불과 이삼일 전에 급하게 이 프로젝트를 시작해서 우리들은 아직 어떤 계획도 없었다. 준비고 뭐고 게릴라 특유의 현장 임기응변으로 첫날 작업을 하기로 했다. 준권형과 김총무는 부랴부랴 청계천과 여기저기에서 사다리·실사출력천·물감·크레용·기타 물품들을 준비했고, 웹자보를 이은걸씨가 디자인했다. 난 2주쯤 뒤 프로젝트를 기획하기로 한 터라 지금은 그저 현장에서 몸으로 할 일밖엔 없었으니, 나뿐 아니라 모두가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세종대왕 동상 뒤편에 이르자 바로 출력 롤지를 대략 15m씩 너덧 개를 바닥에 테이프로 고정하며 낙서를 시작했다. 제발 많은 시민들이 동참해서 거기에 쓰고, 낙서하고, 그리고, 밟고 지나가기를 바라면서. ● 이 즉흥적인 첫 번째 해프닝은 성공적이었다. 우리들과 작가 몇 명이 바닥에 엎드려서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면서, 호기심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구경하는 시민 관객들에게 동참을 호소하자 곧바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깔깔거리면서 낙서를 한다. 그리고 바로 옆에서는 서예가 여태명 선생의 온몸을 사용하는 큰 붓질로 서예퍼포먼스(김준권 형이 미리 기획한 프로그램)가 동시에 진행되었다. 시민들이 점점 모여들어서 그 현장을 둘러싸서 구경하고, 사진을 찍고, 또 낙서에 동참한다. "박근혜는 하야하라!", "민주주의 만세!" 등과 같은 낙서가 대세였다. ●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광화문미술행동의 첫 번째 '차벽공략 프로젝트'는. 마침 화가 송용민씨가 붙박이로 붙어서 현장관리를 한다. 자발적이고 자동적이고 유기적으로 돌아가는 멤버들의 참여 시스템은 그렇게 자연스레 파르티잔의 게릴라 전술처럼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구축되어 가고 있었다. 12월 31일도 마찬가지였다. 다이나믹한 이미지들이 수십 미터의 대형 천위로 집적되었다. 촛불시민들의 박근혜정권에 대한 심판과 민주주의에 대한 갈증은 컸다. 그것을 차벽에 붙일 때(경찰들과 실랑이가 있었고, 또 12월 31일의 작업 중 가장 큰 차벽작업은 분실되기도 했다) 뿌듯한 마음이 일었다. 미술행동의 '차벽공략'이 시작된 순간이었으니까.




추신-에피소드 2 ● 해가 바뀐 2017년 1월 7일. 새해 첫 프로젝트로 "우리 모두가 블랙리스트 예술가다-衆志動天"이란 타이틀을 실행했다. 새해 초부터 준권형과 전화로 컨셉, 타이틀, 방법 등에 관한 많은 협의를 했으나 당장에 어떤 작가도 1~2주 만에 신작을 준비할 수는 없는 일이라, 80년대 오윤·이철수·홍선웅·이상호의 목판화와 류연복의 근작·정찬민의 근작·이윤엽의 백남기 농민 등의 목판화를 대형 실사출력한 사이로 이윤엽의 파편화시킨 이미지들을 배치하고, 거기에다가 시민들이 참여하고 낙서할 빈 여백을 만들었다. 시민들과 작가들의 경계가 없어지는 작업이다. ● 이날도 또 재미있는 사건이 연속으로 일어났다. 지난주까지 차벽에 작업을 부착할 때 우리를 바라만 보던 경찰이 이날은 부착을 막는 것이었다. 그래서 경찰과 실갱이를 하던 우리는 긴 그림은 들고 서서 전시를 하고, 3m높이의 그림은 차벽 앞 도로바닥에 작품을 설치했다. 벽화가 바닥화로 바뀐 것. 차벽에 그림걸기라는 일종의 데몬스트레이션에, 또 즉흥적인 바닥화로서의 데몬스트레이션을 추가한 행위였다. 많은 시민들이 동참해서 그림을 함께 들어주기도 했고, 또 정찬민의 '세월호 미귀환자 초상'에는 촛불을 설치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밤 7~8시경 경찰들이 다른 곳으로 위치 이동한 틈을 타서 우리는 급하게 이 그림들을 차벽에 부착했다. 많은 시민들이 박수를 치고 격려의 함성을 우리에게 보내며 부착을 도와줬다. 그러다가 한 10분쯤 뒤에 보니 그림 한 점이 위치가 바뀌어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난 위치를 바로잡으려 까치발로 그림을 떼서 손에 든 채로 돌아서는데 누군가 갑자기 내 멱살을 잡는 것 아닌가. 시민들 대여섯 명이 우루루 몰려와서 나를 빙 둘러싸고는 포박하듯 내 양팔을 붙잡고 "당신, 누구야? 왜 그림을 떼는 거요?, 당신 경찰이야? 아니면 박사모야?"라며 소리쳤다. ● 이런 황당한 일이... 바로 옆에서 울리는 메인 무대의 거대한 마이크 소리 때문에 "내가 이 프로젝트의 기획자입니다"라고 나를 밝히는 내 목소리는 그들에게 들리지 않아서, 1분 정도를 난 멱살이 잡힌 채로 그들에게 '박사모'로 오인되어 혼쭐(?)이 났다. 청와대로 행진하던 시민들이 차벽의 그림을 내가 폐기하는 줄 오해하고 그런 것이었다. 그림을 떼지 않겠다는 내 몸짓이 그들에게 입수된 다음에 비로소 내 멱살은 풀렸다. 봉변(?)을 당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다행히 민주시민들이라 폭력은 당연히 없었던 터, 시민들은 이 그림을 자신들의 마음과 동일한 것으로 여겼기에 나를 제어한 것이었으니까. 언제 미술이 대중들에게 이런 관심과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있었던가?, 라는 흐뭇함과 함께 그간의 시민들과 유리된 채로 오로지 자본적 가치로만 존재해 온 미술에 대해서 약간의 자괴감도 동반되긴 했다. ● 확실히 광장에서는 작가가 아니라 시민과 대중이 주체다. 생각해보니 광화문미술행동을 운영한 건 작가들이지만, 일을 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준 건 촛불시민들이었다. 자본을 가진 재벌이 아니라, 촛불시민들이 '메쎄나'였다. 십시일반 모금함에 작은 돈을 넣어주고, 작은 판화전에서 작품을 사주고, 일회성 경매에서 판화나 글씨를 응찰해주고, 또 어떤 분들은 따로 봉투를 전해 주고... 바로 그런 시민들이 마련한 운동장에서 우리는 함께 뒹굴고 놀았던 것이었다. 재미있게 놀아서 이런 사랑도 받았다. 불의하고 불법적이고 무능한 정치권력 앞에서 시민들은 자동적으로 운명공동체가 되었다. 한 사회에서 참여하는 시민들의 윤리적·정치적·사회적 의식의 성숙도가 이리도 높을 수 있는지를 1980년의 광주에서 전해들은 이후 처음으로 느꼈다. 바로 그 역사적 현장에 내가 있었다. 광화문미술행동도 있었다. 시민이자, 작가이자, 기획자로 바로 거기에 우리들이 있었다. 그리고 승리했다. 정치적 승리이자 미술의 승리이기도 하다. 이런 숭고함과 넉넉한 기쁨과 영광이 어디 있으랴. 이런 미술행동의 동기를 제공해 주신 촛불시민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촛불시민 여러분, 고맙습니다". ■ 김진하


『광화문미술행동-100일간의 기록』책 출간  

김준권, 김진하 엮음  

ISBN: 978-89-966435-9-3  

나무아트 刊 / 100페이지 / 24*19cm / 800부 한정판 / 값 15.000원


Vol.20170504d | 광화문미술행동-100일간의 기록展

 

-정영신사진-

 

 

박근혜가 끝장 난 지난 10일 오후에는 ‘광화문미술행동‘의 뒤풀이가 예정되어 있었다.

탄액이 인용될 것으로 알고, 미리부터 날자를 잡아 둔 것이다. 

그 날 헌재 앞에서 판결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사진가 전민조씨도 보였고, 안해룡, 성남훈씨도 만났다.

 

 

 

 

 

 

 

예견했던 것처럼 만장일치로 가결되는 걸 보고, 모두들 흥분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박근혜 구속을 외치며 헌재 앞에서 청와대까지 행진하다 정영신, 장경호씨를 만나,

시원한 생대구탕으로 점심 식사도 했다.

 

 

 

 

 

오후 여섯시 무렵 약속장소인 인사동 ‘풍류사랑’에 갔더니다들 싱글벙글 모여들었다.

 

병신 년 하나 때문에 몇 달 간을 고생한 보람은 있었다.

그 날은 '광화문미술행동'의 결산을 겸한 자리였는데, 팔백만원이나 빚졌더라.
광화문 현장에서 김준권, 류연복, 윤여걸, 유대수씨 등 여러 명이 판화도 찍어 팔고 독지가들의 후원도 받았으나,
그 돈으론 한 참 모자랐다. 결국 총대 맨 김준권씨가 끌어안게 되었는데, 결과라도 좋았으니 다행이다 싶다.
가난한 동지들 술 한 잔 크게 대접한 걸로 여기시길... 그 날은 개털인 나도 기분 좋아 술 한 잔 사고 싶더라니까.
그 날 ‘풍류사랑’ 술 값도 꽤 나왔을 텐데, 마침 신학철 선생께서 맡아 주셨다.

 

 


-정영신사진-

 

 

‘광화문미술행동’은 김준권, 류연복, 김진하씨가 지난 12월 초순에 깃발을 든 모임이다,
모두들 박근혜에 열 받아 뭉쳤는데, 시민혁명에 동참하려는 많은 작가들이 모여 판을 키운 것이다.
그동안 열 네 차례에 걸쳐 다양한 퍼포먼스와 전시를 벌이며 촛불시민들과 함께 어울렸는데,
예술이 대중 속으로 녹아든 의미 있는 프로젝트였다.
가난한 작가들이 고생은 했지만, 현장 미술운동사에 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운 것은 틀림없다.



 



 

이제 마지막 ‘촛불역사’사진전만 남았다.
오늘부터 21일까지 광화문광장의 ‘궁핍현대미술광장’에서 열린다.
곽명우, 권 홍, 김문호, 김이하, 노숙택, 박영환, 부은정, 양시영, 엄상빈, 이재민, 정영신,

조문호, 채원희, 최연택, 하형우, 홍윤하, 정덕수, 강민, 김명지, 양혜경씨등

사진가, 시인, 화가, 촛불시민들이 함께 한 전시로, 난 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이다.
열림식은 오후4시로 시간나면 한 번 들려 구경하세요.

 

 



 

그 날 뒤풀이에 함께한 분은 김준권씨를 비롯하여 신학철, 류연복, 김남선, 김진하, 장경호, 정덕수, 송용민, 여태명,
김영배, 이인철, 장순향, 이원석, 유대수, 정영신, 정고암, 이도윤, 하형우, 하태웅, 김이하, 김천일, 이철재, 이재민,
윤병권, 강성봉, 이광군, 김보영씨 등 많은 분들이 모처럼 한 자리에 모여 뒷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느닷없이 서예가 여태명씨가 '난 빨갱이'라고 자랑했다. 하기야 박사모라면 모인 사람 모두를 빨갱이로 보이겠지만,

그는 확실히 빨갱이 였다. 상의에서 모자, 양말까지 모두 빨간색인데, 팬티까지 빨간색이었다. 

 

 

 



 

이 날은 서촌에 안가까지 준비해 두어 지방 분 들도 집에 갈 걱정 없이 혁대 풀고 마실 수 있었다.
‘풍류사랑’ 안방에는 채현국, 임재경선생과 임진택씨 등 여러 명이 자리하고 계셨는데, 와인 한 병을 선물 받았다.


난, 혼자서는 술 마시지 않아, 류연복씨에게 주었는데, 그 술이 돌고 돌아 정영신씨 손에 들어갔더라.
‘촛불 역사전’ 사진 프린트 도와주러 녹번동에 갔다가, 덕분에 잘 마셨다.

 




술 취해 여럿이 ‘광화문광장’으로 다시 나갔는데, 늦은 밤이라 기쁨의 열기도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뒤늦게 광장에 나온 최석태씨를 만났으나, 곧 바로 헤어져야 했다.

그 이틀 날의 마지막 축제를 즐기려면 좀 쉬어야 하니까...

사진, 글 / 조문호




 

 

 

 

 

 

 

 

 

 

 

 


 

 

 

 

 


 

 

 

 

 

 

 

 

 


 


 

 


 

 

 

 


 














 

 

 

 

 


 

 

 

 

 

 

 

 

 

 


 

 


 

 

 

 






흐르는 물길을 되돌릴 수 없듯이, 다음 주면 박근혜 탄핵이 인용될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 만으로 봄은 오지 않는다.

정의로운 나라로 가려면, 힘들어도 촛불을 내려서는 안 된다. 이제부터 하나하나 바로 잡아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장으로 몰려나오는 시민들도 지쳤지만, 광화문광장에서 예술행동을 벌이는 작가들의 삶도 말이 아니다.

여지 것 악에 받쳐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물 불가리지 않은 채, 박근혜 퇴진을 위해 한 목소리를 내었지만,

이제 탈진하여 더 버틸 여력이 없다.

 

광화문미술행동에서는 이번 주말 11일을 마지막 예술행동으로 준비하고 있으나,

어떠한 방법으로든 세상을 바꾸는데 힘을 보태야 할 것이다.

    


 


19차 촛불집회가 열린 지난 4일 펼친 광화문미술행동의 프로젝트는 역사, 광장 민주주의였다.

바람찬 전시장에서는 촛불의 역사를 기록한 사진들이 전시되었고, 춤과 함께한 드로잉 퍼포먼스,

서예 퍼포먼스, 작가와 촛불시민들이 함께하는 바닥 글쓰기, 촛불 목판화 찍기 등 다양한 예술행동을 벌였다.



 

촛불집회의 역사적 장면들이 담긴 사진들이 바람찬 전시장양 벽을 가득 메워 지나치는 촛불시민들의 발길을 잡았는데,

참여 다큐 사진가로는 권 홍, 곽명우, 김문호, 노숙택, 양시영, 엄상빈, 이정환, 정영신, 조문호, 하형우씨 등 열 한명이었다.




 

바람찬 전시장옆에서는 가수 양재화씨와 정미씨가 나와 노래 불렀고,

신현아씨의 퍼포먼스에 따라 작가들의 드로잉작업도 시작되었다.

아승연, 이상태, 정용철, 정도나, 노경애, 이철민, 박재수, 김미란, 오귀현, 조형순 등의 드로잉 작가가 참여했고,

오현, 정유영, 김예슬씨 등 촛불시민들도 함께 했다.




 

춤꾼 장순향씨가 보여 준 세월호 씻김굿의 유명세는 익히 알고 있지만, 그 날 처음 본 신현아씨의 몸짓도 예사롭지 않았다.

우연히 멋진 예술행동을 만난 시민들은 구경하느라 눈을 떼지 못했다.


    


 


서예가 여태명씨가 펼친 서예 퍼포먼스는 여러 차례 보았지만, 볼 때마다 감동스럽다.

그의 힘찬 필력이야 다들 알고 있으나, 즉흥적인 그림 솜씨도 대단했다.

그런데, 사진 찍으러 돌아다니다, 번번히 서예퍼포먼스를 놓칠 때가 많다.

이 날도 유진규씨의 퍼포먼스에 갔다 오니, 그 사이 퍼포먼스는 끝나고 작품만 바람찬 전시장에 걸려 있었다.

    


 


광화문미술행동은 오는 11일 열릴 열세 번째 촛불광장 프로젝트로 촛불시민 여러분 사랑합니다를 개최한다.

 ‘광화문미술행동'을 마무리하는 이 프로젝트에는 바람찬 전시장 현장 공개와 촛불시민 인증샷, 촛불 목판화 찍기,

서화 퍼포먼스, 시민 글쓰기 등 다양한 행사들이 진행된다. 마지막 예술행동을 함께 즐기자.



    

 

그리고 박근혜탄핵이 결정된 14일부터 궁핍현대미술광장에서 의미 있는 사진전도 개최한다.

광화문미술행동을 결산하는 전시로서 촛불의 역사를 지켜 본 열다섯 명 다큐사진가들 사진과 

촛불시민들의 사진도 내 걸린다. 또한 광화문미술행동에서 보여 준 다양한 예술행동도 함께 전시된다.

촛불시민의 승리를 기념하는 촛불역사전을 기대하시라.



    

 이 날 함께한 분은 김준권대표를 비롯하여 류연복, 김남선, 김진하, 장경호, 여태명, 장순향, 정덕수, 송용민,

강성봉, 김영배, 이철재, 변정대섭, 이재민, 이인철, 정영신, 신유아, 신학철, 김창규, 김진열, 조신호, 권 홍,

배인석, 김봉규, 성기준, 정세학, 김 구, 임경일씨 등인데, 취재나온 한겨레 노형석기자도 함께 했다.

 

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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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4일 열린 7차 ‘광화문 미술행동’에서 내세운 슬로건은 ‘새로운 나라로!’였다.

새로운 나라가 되기에는 세월이 걸릴 것 같지만, 일단 박근혜 부터 구속시키고 황교안을 사퇴시키자.

광장갤러리에 설치된 걸개그림은 판화가 김준권씨의 ‘청죽’을 비롯하여 30년 전에 그린 김진하씨의 작품도 먼지 털며 나왔고,

정비파씨의 독수리 무리도 경주에서 날아왔다. 박홍규, 김봉준, 김 억, 류연복, 손기환, 유대수, 윤여걸, 이철수, 홍진숙,

홍선웅씨 등 대가들의 그림이 줄줄이 내 걸렸다. 이젠 알미늄 틀도 만들어져, 다들 반듯하게 걸렸으나,

김진하씨의 작품만 바람난 여인 치맛자락같이 펄럭였다. 오히려 흔들리는 형상에 더 눈길이 끌리더라.


오는 정월대보름 날 열릴 8차 프로젝트에서는 ‘광장갤러리’를 시와 사진으로 꾸밀 예정이다. 

서예퍼포먼스와 함께 춤판도 벌일 예정이나 매주 예술행동에 소요되는 비용 또한 만만찮다.

세화를 찍고, 판화를 파는 등 다방면으로 후원금을 모아 왔으나, 적자를 면키 어려웠다.

가난한 작가들의 예술저항이라 십시일반 나누는 시민들의 도움이 절실한 실정이다. 

‘궁핍현대미술광장’에서 열린 세화로 꾸민 판화전은 관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판화가 류연복씨는 세화 찍느라 바빴고, 옆에서는 김가영씨가 열심히 도왔다.

이날은 반가운 분들도 연이어 등장하셨다.

원로 시인 강 민선생을 비롯하여 백기완, 황석영씨와 함께 조선의 삼대구라로 꼽히는 방배추(방동규)선생,

시골서 상경한 홍석화씨, 맹문재교수, 양문규시인, 장영도이사도 함께했다.

이른 점심을 먹고 나왔으나 ‘청진동해장국’으로 따라갔다. 신축건물이라 옛 분위기는 오간데 없고, 밥값만 비싸졌더라.

맹문재씨가 카드로 결제했지만, 만원씩이나 하는 해장국은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아니나 다를까 자리를 비웠더니, ‘광화문 미술행동’의 서예퍼포먼스가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여태명씨의 서예퍼포먼스는 끝 난 뒤였다.

여태명씨는 ‘탄핵대길. 안민다경’을 써 놓았고, 박수훈씨는 탄핵농자지대본’을 쓰고 있었다.

예술가들의 글과 그림 위에 시민들이 쓰는 자유발언대 참여도 이어졌다.

이날 김준권씨를 비롯하여 장경호, 송경동, 김남선, 김진하, 깁봉준, 정덕수, 김 억, 김 구, 양혜경, 정영신, 장순향,

김영배, 이광군, 장진영, 이윤엽, 이재민씨 등 많은 예술가들이 일을 도왔고, 신학철, 신상철, 박 철, 권 홍, 최석태,

하형우, 김보영씨 모녀도 모습을 드러냈다. 고생하는 후배들을 위해 신학철선생께서 한 턱 쏘았는데,

술 한 잔에 맛이 가 꾸벅꾸벅 졸다 돌아와야 했다. 아직 몸이 정상은 아니었다.

오는 정월대보름날 열릴 15차 촛불집회의 ‘광화문예술행동‘을 기대하시라.
김준권씨는 충북 옥천에서 행진에 사용할 깃발용과, 광화문 달집용 대나무를 벌채하는 사진이 페북에 올라왔다.

정월대보름의 신명난 굿판이 기다려지는 하루다.

사진, 글 / 조문호

























[김준권씨 페북에서 스크랩]

[김준권씨 페북에서 스크랩]





































































[김준권씨 페북에서 스크랩]

[김준권씨 페북에서 스크랩]










돈의 위력에 또 한 번 분통이 터진다.
아무리 돈으로 권력도 만든다지만, 이럴 수는 없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김기춘은 잡아 가두어도,
돈 많은 이재용은 풀어 준 것이다.







함박눈이 쏟아지는 추운 날씨지만,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지 난 주 열린 12차 집회보다 두 배나 되었다.
돈의 질서가 잡히지 않으면, 정치의 질서도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정경유착의 꼬리를 끊지 않으면, 누가 집권해도 마찬가지다.






이 날은 촛불집회 현장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박근혜, 이재용 등의
비리형 인간들 초상사진 외에 또 하나가 추가되었다.
바로 이재용 구속영장을 기각한 조의연 판사다.
퇴임 후 잘 빨아먹을지 모르지만, 이름은 똥칠했다.
같은 조가라는 게 부끄럽다.





이날 ‘국민행동’은 헌법재판소의 신속한 탄핵을 촉구하는 박근혜 대통령직 파면 사유 한 줄 쓰기 캠페인을 벌였다.

그리고 다음 주 설날연휴를 앞두고 국민대토론의 달 연장선상에서 ‘가족토론’을 제안 한다”고 했다.





‘용산 참사’ 8주기를 추모하는 행사에선 철거민과 노점상의 분노도 거셌다.

‘박근혜 정권 퇴진’이라 적힌 빨간색 피켓을 들고 ’박근혜 방 빼’, ’용역깡패 해체하라’, ’용산참사 기억하자’란 구호를 외쳤다.

“쫓겨나는 사람이 없는 세상, 함께 살아가는, 강제 퇴거 없는 세상, 그런 세상을 꿈꾸고 있다.”고 말했다.





비주류예술가들의 여덟 번째 시국퍼포먼스 ‘옳’에서는 이재용 구속영장기각에 분노하여 ‘입을 막은 돈돈돈’을 선보였다.

미래의 십만원권을 만들어 촛불은  돈이 사람 위에 있는 세상을 보통 사람이 돈 위에 서게 될 날을 앞당길 것이라 했다.

‘새로운 나라로 가는 길 굿’과 합류해 각종 식기를 두드리며 광장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광화문 미술행동’에서는 블랙리스트 예술가들의 소송비를 마련하려 세화를 찍어주기도 했다.

판화가 김준권, 유연복씨의 정유년 세화가 즉석에서 만들어 졌는데, 이 팀을 이끄는 김준권씨가 박수를 치며

“헌 닭 버리고 새 닭 가져갑시다.”라고 호객행위를 벌여 주위를 웃기기도 했다.





이어 서예 캘리그래피 퍼포먼스도 펼쳐졌다. 서예가 여태명씨는 ‘동녘이 밝아 온다’, 정병례작가는 ‘광장은 자유다!’,

정병인 작가는 ‘봄날은 온다!’ 를 썼는데, 바닥에 눈이 쌓여 붓으로 눈을 쓸어가는 형국이었다.

눈의 글이 아니라 눈물의 일필휘지였다.





매주 ‘광화문광장’에서 벌어지는 규탄축제는 나날이 발전하며 볼거리를 더해주고 있다.
‘광화문미술행동’과 연대한 ‘서울 민미협’의 깃발전도 볼 만했다.
함박눈이 내리는 가운데 펼쳐 진 규탄축제라, 오랫동안 기억될 것 같다.






많은 국민들이 박근혜와 이재용이 구속되는 새로운 세상을 기다리고 있다.
정병인씨의 글처럼 분명 봄날은 오고 말 것이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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