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문영태화백

 

 

민중미술가 문영태씨가 지난 9일 아침, 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이 세상을 훌쩍 떠났단다.

이틀 전 박진화화백으로부터 뇌경색으로 쓰러져 어려울 것 같다며 영장사진 한 장 만들어 달라는 연락을 받아 

걱정은 하고 있었으나, 억장이 무너지는 전갈이었다.


문영태씨는 나이는 나보다 세 살 아래지만, 늘 존경하는 친구였다.

1980년대 중반 '통일전', '여성과 현실전', '탄압사례전', '반고문전', '정치와 '미술전' 등의 미술운동으로 문화의 힘을 결집시켜 사회운동으로 확장시키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이다. 그 이후 90년도에 들어와서는 이지누, 박불똥, 류연복, 박 건, 조경숙씨 등 열일곱 명이 모여 ‘경의선모임’이라는 작업공동체를 만들어 '분단풍경'(눈빛출판사)이라는 사진집을 펴내는 등 사진작업에도 지대한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그의 글이다.

한 때 진보잡지에 연재했던 한국 문화에 대한 독보적 비평들이 큰 울림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80년도 중반 인사동 '그림마당 민'에서 관장으로 일할 무렵이었다.

인사동 길거리나 술집에서 자주 부딪혀 술자리를 같이 할 수 있었는데,

작업에 대한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눈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게 마음의 후원자로 술 친구로 한 30년 지낸 것이다.

 

지난 5월27일 느닷없이 전화가 걸려왔다. 김포 자택에서 열리는 전시가 내일까지니 와 달라는 것이다.

자기가 하는 줄 알고 예정된 약속까지 취소하며 달려갔으나 서양화가 최선호씨와 도예가 변승훈씨의 전시였다.

너무 실망스러워 “문형의 작품은 언제 보여 줄 거냐?‘고 투덜댔더니 ’한 번 해 볼까‘라는 긍정적인 말을 뱉어 내심 기대하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 무슨 청천벽력이란 말인가?

아무리 가는데 순서가 없다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떠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날 찍었던 기념사진이 영정사진이 되고 그의 마지막 모습이라니 가슴이 미어진다.

 

다른 작가들은 인터넷까지 올려가며 작품을 못 보여줘 안달인데, 어찌 그토록 자신을 알리는데 인색할 수 있단 말인가?

아마 세상 돌아가는 꼴 더러워 몽땅 싸가지고 갔는지도 모르겠다.

아무쪼록 저승에서나마 당신의 전람회도 열고, 당신의 생각을 담은 글도 발표하구려.

그리고 미워도 이 세상 끝까지 그 아름다운 향기를 좀 전해주시오.


여보시게 친구! 부디 잘 가시게.

먼저 가신 인사동 터줏대감들께 안부도 전해주고, 저승에서 만나거들랑 푸대접이나 하지 마시게...

 


사진: 정영신,조문호 /글: 조문호

 

 

2015,년 5월 28일, 그의 서재에서

 

 

2015년 5월 28일,자택 뜰에서

2015년5월 28, 서양화가 최선호씨가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라며 간곡히 당부하고 있다.

2015년 5월 28, 사진가 정영신씨에게 저 물 건너가 북한의 개풍군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2015년 5월, 28일, 자택 거실에서 부인 장재순씨와 함께 즐거워하는 모습

 2015년 5월, 28일, 필자와 함께

‘용태형’ 추모식장에서 밤새도록 퍼 마신 술자리는 다음 날 백제 화장터 까지 이어졌다.

문화사가 유홍준씨를 비롯하여 서양화가 강요배, 류연복, 박흥순, 이인철, 이강군, 장경호씨 등 여러 명이 어울려 땅바닥에 술상을 차린 것 까지는 좋으나 제주에서 올라온 강요배씨는 술이 취해 땅바닥에 드러눕기까지 하였다. 안쓰럽게 지켜보던 장경호씨가 초코렛 한 조각을 전해주자 그걸 먹고 벌떡 일어나서는 힘자랑에 나선 것이다. 옆에 있던 가로등을 뽑겠다고 설치다 가로등이 꼼짝달싹 않으니 이젠 산비탈에 올라가 큰 소나무를 뽑겠다고 난리를 피웠다.
중국 심양에 사는 이강군씨가 걱정스러워 데려오긴 했으나, 직성이 풀리지 않았는지 씩씩거렸다.

천하의 강장사께서 술만 마시지 않았더라면 그까짓 가로등 쯤이야 간단히 뽑았겠지.
그러나 술 취한게 천만다행이야. 

만약 가로등이 뽑혔다면 공공시설 파괴로 경찰서에 끌려 갈 뻔 했잖아.


 

 

 





용태형’의 유언대로 유골은 신촌 봉원사에 안치되었다.

한 때 세들어 살았던 봉원사 사가에 대한 추억들이 많았을 것이다.

봉원사 주변 길들을 돌아다니며 오랜 기억 조각들도 찾아보았다.

저돌적인 성격에 상처받았던 생각도, 잔잔한 정에 코 끝이 찡하기도 했다.

 

 

추모회 때는 ‘용태형’의 정확한 나이를 알게 되어, 실 웃음을 짓기도 했다.

그동안 나보다 한 살 많은 것으로 행세하며 항상 동생처럼 대했는데,

알고 보니 나보다도 한 살 적은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같은 입장이던 김정헌씨가 오죽하면 조사 제목을 “야 임마! 용태”를 추도함“

이라 적었겠는가?

 

 

“이젠 나이가 한 살이라도 많은 것이 더 서러운 처지가 되었으니,

그도 다 부질없는 일이 되고 말았구나.

가끔 봉원사에 들려 술 한 잔 올릴테니 저승 소식이나 전해주고,

부디 극락왕생을 누리시게나

 

 


 



















                                              옛날 '용태형'이 살았던 봉원사 집이다










                                                아래사진 두 장은 사진가 정영신씨가 찍은 사진이다.

                                            


인사동에서 노제를 마친 '용태형' 시신은 백제 화장터로 옮겨져, 한 줌의 재가 되어버렸다.

인상무상이라는 말을 다시 한 번 절감했다. 

    

'용태형' 부디 극락왕생 하소!

 















































 

                                                                            류연복 (판화작가 / 민예총 경기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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