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1

지난 28일은 많은 화가들이 방문해 주셨다.

원주에서 김진열씨가 올라와 김진하, 이태호, 김정헌씨가 모여 역적모의 하는 ‘이모집’으로 안내했다.

 

그 자리는 김수영시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그림전을 협의하는 오찬 자리였다.

‘흐린 세상 건너기’로 건너가 차 한잔하고 전시장에 돌아오니, 사진가 최정균씨가 와 계셨다.

 

이 분은 나와 동갑인데 무슨 비결이 있는지, 나보다 10년은 젊어 보인다.

그리고 전시장 올 때마다 봉투를 내 놓으며, 좋은 전시를 어찌 그냥 볼 수 있냐고 하신다.

그 보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뒤이어 류연복, 박진화, 손기환, 이인철, 정복수, 박문종씨 등 화가들이 전시장을 방문해 주셨다.

 

그날은 학고재에서 개막된 박영균의 ‘보라색 언덕 너머’와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정비파의 ‘한라에서 백두까지’ 목판화 전시까지 겹쳐

겸사겸사 서울 나들이를 하신 것 같은데, 다들 그리웠던 얼굴이었다.

 

문 닫은 전시장에서 숨겨 둔 와인으로 마시는 술맛은 더 좋았다.

발동 걸린 술자리가 ‘사랑채’로 이어졌는데,

술안주로 내놓은 나물에 취했는지 한 사람 한 사람 쓰러지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김진열씨가 어지럽다며 일어나더니, 류연복, 이인철씨까지 다락방에 더러 누웠다.

 

화단의 술 판을 휩쓸던 역전의 용사들이 차례대로 무너진 사건은 오랫동안 구설수에 오를 것이 틀림없다.

그 와중에 정복수씨는 내 초상화까지 그렸는데, 마치 지명수배된 범죄자 형상이었다.

 

그 다음 날인 29일에는 일찍부터 구중서선생을 비롯하여 장봉숙, 서정란 시인이 오셨다.

어려운 걸음을 하신 구중서 선생께서 식사하러 가자는데, 어찌 나 몰라라 하겠는가?

 

더구나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나온데다 전시장에서 만나기로 한 선약까지 있었다.

대전의 이석필씨에게 연락받은 김문호씨가 먼저 전시장으로 올라왔지만,

잠시 기다리게 하고 따라 나설 수밖에 없었다.

 

두 분 식사하는 자리에 끼어 술만 홀짝홀짝 마셔야 했다.

그런데, 밥 값 내려고 따라 나섰는데 구중서 선생께서 계산해 버렸다.

그렇다면 차라도 대접해야 하지만 기다리는 사람이 마음에 걸려 찻집은 따라갈 수 없었다.

그나저나 술을 급하게 마셨더니 일찍부터 취해버렸다.

 

헐떡이며 4층까지 올라갔는데, 다들 식사하러 가고 없었다.

‘마중’에 갔다던 이석필씨와 김문호씨는 간판을 잘못 보았다며 개성만두집에 앉아 있었다.

 

이차로 자리 잡은 ‘유목민’ 골목에서는 조명환, 기국서, 장 춘씨가 합석했고,

김기덕, 유진오, 김발렌티노도 만났다.

 

30일엔 사진가 하재은씨를 비롯하여 김문경, 윤현선, 김석철씨가 찾아오셨다.

운현선씨가 정영신의 '어머니의 땅' 동영상을 만들어 보여 주는데, 너무 멋지더라.

‘유목민’ 골목에서는 사진가 권양수, 박윤호씨를 만났는데, 외국에 나갔던 안애경씨도 오셨다.

 

뒤늦게는 화가 강지현, 이현숙씨와 어울려 술 한잔했다.

강지현씨는 이현숙씨 초상화를 그려 오셨더라. 다들 페이스북에서 가까워진 사이 같았다.

 

노재학, 임경일씨가 차례대로 오가기도 했고, 김이하 이승철씨는 맞은 편에 자리 잡았다.

 

이틀 만에 올리던 보고서가 삼일만에 올리게 된것은

술로 점차 기력이 쇠진해가는 징표이오니 널리 양해해 주시길 바란다.

아무튼 전시장을 찾아 주신 많은 분에게 거듭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6일은 인사동 ‘나무아트’에서 열린 ‘말하고 싶다’전이 막 내리는 날이었다.

겨울비가 부슬 부슬 내리는 인사동 거리는 번개의 노래 소리만 처량하게 울려퍼졌다.

 

작품을 발송하러 전시장에 갔더니, 박 건씨 혼자 지키고 있었다.

코로나로 꽁꽁 얼어붙은 미술시장에서 작품이 많이 팔린 이변은

박 건씨의 참신한 기획과 노력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대개 전시가 끝나는 날은 다음 전시를 위해 일찍 철수하지만, 그 날은 늦게까지 진행되었다.

 

박건씨 도움을 받아 포장하고 있는데, 반갑게도 안성의 류연복 작가가 나타났다.

류연복씨는 3년 전 충무로에서 열린 ‘사람이다’전시에도 찾아와

이번에 네 점이나 팔린 '부랑자' 10번 중 1번을 소장해 준 분이 아니던가?

 

좀 있으니, 광주에서 귀한 손님들이 몰려 오셨다.

먼 걸음 해주신 것도 고마운데, 4층까지 무거운 막걸리를 한 상자나 들고 오셨더라.

전시 작가 주홍씨와 함께 오신 분은 5,18 역전의 용사라고 소개하셨다.

그 참혹한 현장에서 가두 방송을 맡았던 차명숙선생은 꽃다운 소녀가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현대사기록연구원’ 이정열여사와 놀부지부장으로 통하는 김순흥교수도 함께 오셨다.

뒤 따라 전시 작가 고경일씨와 김진하 관장도 등장했다.

 

그런데, 김순흥교수께서 쓰고 있는 안경은 알이 하나 밖에 없었다.

요즘 젊은이야 멋으로 안경테만 쓰고 다니기도 하지만,

연세 지긋한 분이라 의외였는데, 이유를 들어보니 일리가 있었다.

한 쪽 눈은 이상이 없으니, 안경알 하나라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 날 광주에서 비행기로 공수해 왔다는 막걸리가 보통 막걸리가 아니었다.

막걸리 이름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 맛이 귀가 막혔다.

막걸리 뿐 아니라 곰삭은 홍어와 묵은지 김치까지 챙겨 오셨는데,

둘이 먹다 한 놈 죽어도 모를 정도로 맛있었다.

 

하필이면 이날따라 차를 끌고 와, 술은 맛만 보아야 했다.

지지리도 술 복 없는 날이었다.

그리고 손님이 남아 계셨지만, 오래 머물 수도 없었다.

주차비 아끼려고 인사동 골목에다 차를 세워 놓았기 때문이다.

포장 마무리도 하지 못한 채 빠져 나와야 했다.

 

그날 광주전시도 거론된 것 같은데,

불 붙은 김에 한 판 더 뛰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말하기 싫을 때 까지...

 

사진, 글 / 조문호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리는 정영신의 ‘장에 가자’사진전이 이제 종반에 접어들었다.

개막 후 이틀 동안의 전시장 방문객 사진은 보여드렸으나,

그 이후부터 컴퓨터와 만날 시간이 없어 많은 일거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 포스팅은 13일부터 16일까지 방문한 분들의 모습과 전시장 풍경이다.

전시장을 비워 뵙지 못했거나, 미처 사진을 찍지 못한 분들에게는 송구스럽다.

 

지난 13일 정오 무렵에는 곽명우씨가 다시 방문했다.

첫 날 늦게 와 사진을 찍지 못한 것 같았다.

 

김남진관장과 곽명우, 정영신씨와 ‘진수성찬’에서 오찬을 함께 했다.

‘진수성찬’은 처음 가본 정식집인데,

집에서 먹는 것처럼 반찬이 정갈하고 구수한 누룽지가 일품이었다.

 

그 다음 날 정오 무렵에는 소설가 김승환선생 께서 먼저 와 계셨다.

강민 시인께서 살아계실 적엔 가끔 인사동에서 뵐 수 있었으나,

선생께서 돌아가신 후로는 전혀 뵐 수 없던 터라 반갑기 그지없었다.

 

먼 거리를 와 주신 것만도 황송한데, 선물이라며 가죽가방 하나를 꺼내 주었다.

아마 선생님께서 애용하신 가방 같은데,

이젠 외출할 일이 별로 없어 정영신씨를 준 게 아닌가 생각되었다.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을 고맙게 받았다.

 

그 날은 휴일이라 그런지 대개의 식당이 문을 닫았더라.

문이 열린 집이라고는 순대국밥 뿐이라 썩 내키지 않았는데,

반주에다 맛있게 드시는 걸 보니 한결 마음이 편했다.

식사 후 커피라도 한 잔 대접하고 싶었으나, 기어히 사양하시며 발길을 재촉하시네.

김선생님의 쓸쓸한 뒷모습을 바라보니 마음이 짠해졌다.

그 뒷모습이 바로 내 모습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은 하룻밤을 지나면 한 달이 지난 것처럼 세월이 쏜살같다.

들려오는 주변 분들의 부음조차 남의 일 같지 않은 것이다.

 

난, 동자동에서 지내다 필요할 때만 나가니, 뵙지 못한 분도 많았다.

없는 시간에 다녀 간 분으로는 전활철, 한선영, 류엘리, 노연덕, 황성호, 권순광,

안옥철, 이정숙, 황인선, 최치권, 김준희, 권혜진, 김기덕, 서은화. 정명식, 김광안,

정남준, 안현수, 이세연, 노은향, 최재순, 남 준, 이태호, 이수만, 하춘근, 정주영,

김소연, 이성표, 심지윤, 김중호, 김명점, 이창수,씨 등 많은 분이 다녀갔더라.

 

지난 15일 오후에는 화가 나종희씨가 전시장을 찾았다.

오랜만의 만남이라 ‘전시할 계획은 없냐?’고 물었더니,

이 달 25일부터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연다더라.

 

마치 알고 물어 본 것 같았는데, 어떤 작품을 보여줄지 벌써 기다려진다.

그 날 ‘인사아트프라자’에서 열리는 김윤수선생 2주기 추모전과 겹쳤지만,

가까운 거리라 일거양득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다음 날은 끝 날 시간이 가까운 늦은 시간에 들렸는데, 사진가 하형우씨가 와 있었다.

좀 있으니 강릉의 황지웅피디와 이승구피디가 멀리서 찾아왔다.

먼 길을 와 주신 것만도 황송스러운데, 밥 값을 계산해 버렸네.

다들 운전 때문에 술 한 잔 마시지 못했으나, 반가운 소식도 전해 들었다.

 

도시 재생을 위해 철거된 화광아파트와 광부들의 애환을 담은,

황지웅PD가 만든 '광부의 기억 화광아파트'가 방송문화진흥회가 시상하는

2020 지역프로그램대상에서 금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더구나 지역방송사의 열악한 예산과 인력 탓에 휴일을 이용하여 개인적으로 취재했다고 한다.

주민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인터뷰하는 긴 과정에 아들이 조수 역할을 맡았는데,

상보다 더 값진 선물은 작업 과정을 지켜 본 아들로부터 들은 ‘자랑스러운 아빠’라는 말 한마디였다.

이 보다 더 한 보상이 어디있겠는가?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더 좋은 일 많이 만들기를 바란다.

 

지난 16일 오후에는 뮤지션 김상현씨가 동자동에 찾아 와 함께 전시장에 들렸다.

사진가 김범수씨와 판화가 류연복씨, 미술평론가 황정수씨와 오란석씨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차례대로 나타났다.

김범수씨는 인도커피를 가져 와 즉석에서 뽑아 돌렸는데, 그 맛이 귀가 막혔다고 한다.

쓴맛, 단맛, 짠맛 등 갖가지 맛이 어우러진 별난 맛이라는데, 나만 사양했다.

믹스커피나 마시는 커피 맛도 모르는 촌놈이 귀한 커피를 축낼 수야 없지 않겠는가?

 

사람 좋기로 소문난 류연복씨를 만나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이 편해진다.

한 편으론 안스러운 생각도 든다.

혼자 사는 것이 편할지 모르겠으나, 나이가 들어갈수록 외롭기 때문이다.

아니면 중의 팔자를 타고났는지도 모르겠다.

 

황정수씨는 날 잡아 류연복씨 집을 방문할 생각이라고 했다.

나 역시 인근에 있는 정복수씨나 변승훈씨 작업실은 가 보았으나,

류연복씨 작업실은 가보지 못했다.

날짜만 맞으면 이참에 따라 붙으면 어떨까 생각한다.

 

그 날 황정수씨가 보여 준 이청운씨의 오래된 작품 한 점에 깜짝 놀랐다.

그동안 보아왔던 작품과 달리 콩크리트 골조가 화면을 채운 현실 비판적 그림이었다.

 

난, 이청운화백을 감히 천재 작가라고 말한다.

하루속히 병석에서 일어나 머리 속에 담아 둔 이야기들을 화폭에 쏟아냈으면 좋겠다

지난 병문안 때의 활기찬 모습에 기대했는데, 다시 입원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다.

 

그 날 묵은지 갈비찜이 맛있는 ‘김삼보’집에서 어울려 기분좋게 술 한 잔 했다.

지하철 탄 기억도 나지 않는 걸 보니, 취하긴 취한 모양이다

요즘은 코로나에 목숨 걸고 마시는 술이라 그런지 취하는 것도 유별나다.

 

영원한 동지 정영신씨가 요즘 고생을 사서한다.

전염병으로 개막식 초대를 없애는 대신, 항시 자리를 지키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쉼 없이 이어지는 손님들로 인해 마음 편히 쉴수도 없겠더라.

몇 날 몇 일을 전시장에 틀어박혀 손님만 맞았으니 몸이 견디겠는가?

 

자! 이제 이틀 밖에 남지 않았다.

장돌뱅이는 죽어도 장에서 죽어야지...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류연복의 온 몸은 길이다전이 인사동 나무아트에서 열리고 있다.


 

개막식이 열리는 날, 정복수, 정영신씨와 전시장을 찾았는데, 

전시작가 류연복씨를 비롯하여 김진하관장, 화가 이흥덕, 송 창, 김재홍, 장경호, 성기준,

김이하씨 등 많은 분이 와 있었다.



전시작들을 돌아보니, 지난 해 진천 전시 때 빠진 작품과 신작도 있었다.


류연복씨의 목판화에는 힘이 흘러넘쳤다.

여러 번의 칼질이 아니라 단칼의 칼질이 빚은 선명한 골격이 돋보였다.

풍경조차 서민적이고 민중적이라 풍경의 수려함 속에 비극적 슬픔이 깔려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실적이고 역사적인 문제를 토해냈다.

저항적이고 비판적으로 칼을 휘두르기도 하고 때로는 서정적으로 다독였다.

날카로운 칼로 한의 정서를 새겼으나 보는이에게는 따뜻하게 다가온다.

풍경 에너지와 사람의 삶을 응결시키려는 속내가 엿보였다


 

류연복씨의 목판화는 국토에 대한 애정과 자연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베어 있다.

풍경을 이루는 산과 강의 흐름은 강력하고 마을의 경계는 선명했다.

넓고 탁 트인 시선에서 부터 작고 가까운 곳을 바라보는 섬세함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명료했다.

국토에 대한 형상성은 두드러지고, 부분적인 독자성은 분명했다.



사계절의 담쟁이 덩굴을 새긴 '온몸이 길이다'는 심오한 경지를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폐기된 온갖 무기들이 탑처럼 쌓인 꼭대기의 야생화 한 송이는 전쟁에 대한 거부를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다.



류연복씨는 작품도 좋지만 사람은 더 좋다. 많은 사람들이 류연복씨를 좋아하는 이유다.

비실비실 웃으며 바람처럼 살지만, 항상 말보다 행동이 앞서고 불의에 굴하지 않는다.




대개 작품을 먼저 알고 나중에 작가를 만나는 경우가 많은데, 실망스러운 경우를 종종 접한다.

작품은 좋으나 인간성이 형편없는 작가는 사람이 아니라 작품 만드는 기계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사람 나고 작품도 있는 것이다.




미술평론가 김진하씨는 “국토와 민중에 대한 애정, 작가로서 목판화에 대한 자기표현의 정합성,

그리고 동시대에 대한 지식인적인 실천적 참여라는 삼위일체가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간단명료한 잠언으로,

또 때로는 웅대한 서사적 서정으로 갈무리 지어지고 있다.”고 서문에서 말했다


.


이 전시는 인사동 '나무아트'에서 24일까지 열리니,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진, / 조문호




























온몸이 길이다


류연복展 / YOOYEUNBOK / 柳然福 / printmaking
2020_0205 ▶︎ 2020_0224


류연복_꽃 한송이_Ed. 9/A.P 1_소멸다색목판_97×72cm_2018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91013b | 류연복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20_0205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30pm



나무화랑

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 4층

Tel.+82.(0)2.722.7760



동시대적 '생生'과 역사적 '태態'를 증언하는 칼의 언어 ● 류연복이 스스로 작명한 그의 이메일 주소는 풍류(pungrheu)다. 타인들이 그를 일컫는 별명은 '도사님'이고. 탁빼기 한잔 걸치고 어떤 경계도 없이 사람들 잘 사귀고 늘 허허실실 웃는 모습과, 거칠 것 없이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아온 이력이 그에게서 자연스레 묻어나는 모양새라 그런 모양이다. 그러나 80년대 이후 지금까지도 그는 한반도에서의 불의한 정치사회적 현실에 대해, 또 그런 불의한 세력에 대해 비판적 칼(조각도)을 휘두르는 검객이기도 하다. 그의 품성에는 인식적 저항·본능적 반항·그리고 낙관적이고 리버럴한 자유주의자의 부드러움이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 ● 80년대 초반 서울미술공동체에서의 벽화팀 「상생도上生圖」 활동, 이후「민족미술협회」와「민예총」을 중심으로 전시 및 현장 조직 활동에서, 단칼의 날 선 목판화의 공격성을 분명하게 보여 왔다. 90년대 경기도 안성에 정착하면서 목판화 풍경을 통해 우리 국토와 이웃에 대한 애정과 문제의식, 그리고 삽화적 아포리즘을 통해 낮은 곳에 있는 생명과 자연스런 삶에 대한 통찰을 통일시키면서 작업해왔다. 류연복의 목판화를 가로지르는 주제라면, 바로 이런 생명들이 살아가는 현상인 '생生'과 그 꼴인 '태態'를 전통적인 각법의 바탕에서 현대적인 미감으로 형상화하는 '생태성'과 '생명성'이다. 낮은 곳에서 살아있는 것, 그런 생명이 살아가고자 애쓰는 것, 죽임에 대한 항거 등을 타자들과 더불어 연대하고 실천하려는 바탕이 곧 작업이란 뜻이다. 그래서 그에겐 늘 '현장'과 '민民'이란 어휘가 접두어처럼 붙어 다닌다.


류연복_숲 2_Ed. 6/A.P 1_소멸다색목판_92×92cm_2017


생명현상이란, 억누름이나 억압에 대한 본능적 반응이자 능동적으로는 스스로를 살아내고자 하는 힘의 실행이자 분출이다. 한 개의 세포나 하나의 동식물 개체로부터 군집 집단, 나아가 사회, 국가, 세계, 자연, 우주에까지 이르는 모든 생물의 동적인 활동과 의식·무의식적 의지와 지향성에 바탕한다. 불의에 저항하는 사람, 자신의 의지대로 생사를 판단하는 사람, 가치를 지향하며 사는 사람들 모두 이 생명현상에 의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런 인자들로 형성된 사회도 마찬가지의 구조로 유지된다. 류연복은 바로 이런 자연스런 생명현상을 우리 국토와 그곳에서 살아온, 그리고 살고 있는 온갖 식물과 풍경과 민중의 삶을 통해서 '형상'과 '기운'으로 도출해낸다. 미세하고 구석진 곳의 미물에서부터 전체에 이르는 열린 생명과 삶, 그리고 그 터까지 모두 그의 칼끝으로부터 넓은 나무 판면으로 옮겨져서 통일된 힘의 이미지가 된다. 풍경으로, 사람으로, 잠언으로, 그리고 글씨로… 그렇게 그려지고 판각되고 찍혀진 이미지들은 자연과 사람의 능동적인 기운을 배태한다. 우리 국토 모든 곳에 있는 존재를 아우르는 생명력으로 말이다. 그 생명력이 이 땅에서의 숱한 삶들이 이어온 역사의 바탕이다. 낮은 곳으로부터 솟아나는 질기디 질긴 힘 말이다. ● 류연복의 목판화는 일도양단의 칼질로 그 이미지가 선명하다. 구사된 칼은 주저하거나 돌아가거나 에둘러 여운을 남기지 않는다. 전통적인 목판화의 원초적인 칼맛의 연장선상에서 대상의 특징을 포착해내면서 그 내용의 핵심을 도드라지게 만든다. 명료하다. 강하다. 그래서 류연복스럽다. 기실, 여담이지만, 류연복의 성격이 그렇다. 좋은 건 좋고 싫은 건 싫다는 표현이 분명하다. 어떤 사안에 대해 생각을 하고, 결정하면 곧바로 행동을 한다. 나는 그와 1985년 「신촌벽화」 탄압 대책모임, 1986년 「정릉벽화」, 2016년 「광화문미술행동」, 2017년 「목판대학」의 일을 함께하면서 그의 행동스타일을 봤다. 민주적인 토론을 하고, 일단 팀의 공론이 결정되면 그는 사심이 없고 또 저돌적이다. 뒤로 물러나지 않고 앞서서 거침없이 행동한다. 몸이 곧바로 생각을 실천한다는 뜻이다. 신념과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 류연복의 판화도 그의 성격이나 행동과 판박이다. 앞서 쓴 '단칼'이란 말처럼, 목판화에서 그의 칼은 명쾌하게 대상과 배경을 가른다. 풍경의 근골은 강력하고 그 형태의 경계는 선명하다. 장쾌한 대관적인 다시점(多視點)의 시선부터, 작고 가까운 곳을 응시하는 섬세한 관찰의 아포리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명료하다. 그런가 하면, 잠언과 더불은 형상들에서는 그 맛과 형태와 내용이 유려하고 유연하고 부드럽되, 간결하고 명징하다. 뿐인가, 80년대의 목판화에 이르면 저항적 직진성과 형상 및 주제의 직접성이 오히려 추상적인 에너지로 전환된다. 작품의 전달력이 그만큼 그의 심중을 반영해서다. 류연복의 작가적 체질과 삶의 태도와 작업형식이 일치해서다. 그래서 나는 "작가가 곧 그의 작품"이란 말을 떠올리면, 류연복의 경우가 딱 거기에 해당된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와 작품, 형식과 내용이 두루 작품으로 수렴되어 하나의 세계와 주제로 귀결되어서 그렇다. 그렇게 목판화로 자신을 표현해온 세월이 35년이다. 끈질기고 뚝심이 있고 또 한결같은 사람이다. 그래서 작가다. 우리 현대목판화사에서 자신의 족적을 분명하게 남긴 목판화가로 부족함이 없다.


류연복_환도산성_Ed. 6/A.P 1_소멸다색목판_62×185cm_2015


풍경-민중들의 질긴 삶의 터 ● 류연복 근작의 핵심은 국토풍경 목판화다. 한반도 구석구석 그의 눈길이 목판화로 바뀌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다. 풍경과 역사와 민중의 삶이 강인한 힘으로 드러난다. 아름다운 곳과 추한 곳을 가리지 않고 애정어린 그의 눈길이 국토풍경으로 전치된다. 수려하다가 비극적이고, 애절하다가 역동적이다. 그런가 하면 어딘가는 평화로운 쉼터로 묘사된다. 언뜻 겸재가 오버랩 된다. 그렇다. 류연복에게서는 겸재의 시선과 멋이 드리워져 있다. 근래 풍경목판화로 전 국토를 누빈 작가가 둘인데, 김억과 류연복이다. 홍선웅과 김준권도 있지만 이 둘은 풍경의 개념에 대한 접근이 약간 다른 궤에 있다. 홍선웅은 전통문화적 바탕에서, 김준권은 목판조형적 실험으로 풍경을 다루고 있어서, 실제 국토의 현장성을 주목적으로 하는 류연복, 김억과는 작업 동기나 맥락이 조금 다른 지점에 있기에 여기서는 논외로 한다. ● 친구인 이 둘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각자 미적 개성이 뚜렷하다. 국토에 대한 애정과 자연에의 미적 시선이 공통점이되, 류연복이 기운과 흥취라는 풍류적 미감의 서정적 접근에 의한 민중정서를 반영하는 태도를 취한다면, 김억은 이웃의 일상적 삶의 기록과 서사를 통한 시공간의 역사성을 중요시한다. 그래서 내 주관적인 기준에서 비교하자면 류연복은 겸재, 김억은 미적인 고산자에 가깝다. 그만큼 이 둘의 국토에 대한 형상성은 구체적으로 두드러지고, 또 그만큼 각자의 독자성은 분명하다.


류연복_흐르는 강_Ed. 9/A.P 1_소멸다색목판_65×185cm_2015


아무튼, 류연복은 분단풍경인 DMZ, 금강산, 북한산, 지리산, 무등산, 한라산, 독도, 그가 살고 있는 안성… 등 전국방방곡곡을 누비며 국토의 아름다움과 민중의 비애와 강인함을 풍경으로 컨버팅해왔다. 여러 번의 칼질로 묘사하는 방식보다는, 단 몇 번으로 단칼의 칼질이 빚은 선명한 형태감과 골격의 표현을 선호한다. 그것은 오윤의 인체에서 보이는 근골의 꺾임이 야기하는 기운을 솎아내는 형태나 칼질과 닮았다. 특히 산의 판각에서 돌올시키는 형태적 힘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런 꺾임과 연결, 굵고 가는 선의 반복이 칼맛의 리듬과 호흡을 통해서 류연복의 풍경을 유려한 에너지로 전환시킨다. 부분은 단단하고 딱딱(剛)한데도 전체는 부드러운 흐름(柔)을 띄면서, 시각적 풍경 '너머'의 민중적 한과 강인한 생명력(强)을 소환해낸다. ● 이런 작업과정에서 류연복은 크게 두 가지의 방식으로 풍경에 접근한다. 답사한 현장의 철저한 사생과 구체성에 기반한 실제 현장 풍경과, 그의 조형적 미의식으로 관념화시킨 평면적으로 편화된 이미지가 그것이다. 전자는 전통 실경산수의 맥락에, 후자는 디자인 일러스트적 맛에 기반한다. 「환도산성」, 「북한산을 거닐다」, 「금강산」 연작은 전자의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단단함과 부드러움의 회화적 조화가 압권이다. 남성적인 근골과 여성적인 살의 맛이 현장적 리얼리티와 역사성으로 잘 결합되어 풍경화가 제공할 수 있는 미적 쾌감의 한 지점에 다다랐다. 그런가 하면 가로로 길게 늘어진 「D.M.Z」연작에서는 무언가 적요한 허정미(虛情美)를 이끌어내는데, 이도 전자의 주요한 작품에 속한다. 분단 조국의 잘린 허리 그 현장에서 격렬한 현장성보다는 작가의 정서를 있는 그대로 노출하는 관조적 태도로, 오히려 분단의 긴장감을 극대화시킨다. 이와 유사하되 더 서정적인 바다를 건너가는 나비를 그린 「다시 건너간다」의 작은 나비와 장중한 바다의 대비는 한편의 시적인 드라마로 손색이 없다. ● 후자인 일러스트적 특징을 지닌 대표적 작품으로는 「나는 온몸이 길이다」, 「세월-상흔-꽃」, 「한라-상흔-꽃」과 같은 반복적인 시각적 패턴을 구사하는 연작들이다. 내면적인 심상 이미지를 통해서 작가의 서정을 자연스레 표출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뒤에 거론되는 잠언(Aphorism) 형식의 작업과 그 조형적·형식적 형상어법의 맥락이 연결된다.


류연복_나는 온몸이 길이다-봄_Ed. 5/A.P_다판다색목판_91×91cm_2012


그리고 이 둘을 아우르는 최근의 실험으로 「꽃 한송이, 2018」, 「숲, 2017」과 같은 작품이 있다. 「꽃 한송이, 2018」는 들판에 폐기된 온갖 무기들이 집적되어 탑처럼 쌓인 꼭대기에 핀 야생화 한 송이가 좀 더 명료한 메시지로 전쟁에 대한 거부를 하는 작품이다. 풍경을 보고 그리는 방식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동시대적 주제를 강조하는 형식으로 변주한다. 이럴 때 풍경에서 장소성의 리얼리티는 감소되나, 작가가 의도하는 당대적 메시지는 강화된다. 2018년 남북정상회담 시기 '종전선언'을 기대했던 작가의 희망이 강하게 반영되어서일 것이다. 그리고 이보다 먼저인 2017년에 시도한 「숲」은 뭍 생명들의 상생적인 생태문화, 그 에코 사이클(Eco-cycle)에 관한 내용이다. 철저하게 평면으로 환원시킨 화면에는 여러 도상이 함께 어울리면서 유기적으로 화면을 구성한다. 대포의 포신·포탄·총구 등과 함께 달팽이·물고기·새·나비·다람쥐·곤충 등이 함께 어울리며 무성한 녹색의 숲을 이루는 '상생(相生)'을 그려내고 있다. 현장성보다는 작가의 강한 희망이 몽타주로 어우러진 잠언적 형상성이 회화적 입장으로 연결된 적극적 시도다. 한반도에서 평화를 바라는 류연복의 마음이 작업으로 유추되어 나오는 알레고리다. 근작의 모던한 이 형상성에서 류연복의 형상어법의 변주가 감지된다. ● 이처럼 풍경을 통해서 류연복은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현실적·역사적 문제들에 대해서 발언하고 있다. 강력한 단칼의 힘으로, 유려한 서정으로, 또 아이디얼리즘에 바탕한 내면적 관념과 희구의 공감을 확장하는 소통성으로... 그 바탕에는 국토를 몸으로 누비고, 헤매면서 산하와 그 사이 사람들의 삶을 동시에 하나의 에너지로 응결시키려는 류연복의 작업의도가 있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그의 풍경 목판화는 힘이 넘치고 건강하다. ● 한편 「도피안사 전도, 2003」, 「외암골 전도, 2002」, 「동강전도, 1999」 등은 전통적인 부감법(俯瞰法)과 함께, 고지도의 사방을 아우르는 시점(視點)을 수용하면서 드넓은 공간을 한눈에 조망케 한다. 웅장하다. 게다가 강의 흐름이 길처럼 꼬불꼬불 펼쳐지고, 그 동세에 산과 집들이 어우러진 풍경은 답사와 함께 새의 눈으로 본 상상도이되 지도처럼 실경이라고 하겠다. 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반 류연복의 목판화가 비로소 자기식의 풍경을 확보하는 마중물이 바로 이 작품들이라고 하겠다. 그 이후 땅에서 풍경을 올려보거나 산에서 내려다보는 겸재의 진경(眞景)과 같은 금강산이나 북한산과 같은 대형의 산 그림들이 가능해진 건 바로 이 시기, 이 판화들에서 확보한 풍경의 골격과 공간감각, 그리고 거기에 어울리는 칼의 구사가 그 바탕에서 충분하게 자기 조형의 튼튼한 뼈와 근육이 되면서부터였다. 그로부터 그의 풍경목판화는 그 특유의 강골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포용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조각도로 세상을 솎아내고, 또 동시대 불의에 저항하는 칼잽이가 문기(文氣)까지 아우른 고수의 포스를 물씬 풍기면서 말이다.


류연복_나는 온몸이 길이다-여름_Ed. 5/A.P 1_다판다색목판_91×91cm_2012


일상적 삶에 대한 잠언-작은 생명에의 예의 ● 한편 류연복의 또 다른 장점은 목판화를 출판미술과 삽화에 활용하는 멀티플레이어란 점이다. 그의 간단한 칼질로 만평이나 카툰처럼 일상적이되, 동시에 출판미술로서도 충분히 제 기능을 하는 아포리즘 일러스트의 소통성은 분명 장점이다. 회화적인 풍경목판화와 더불어 90년대 이래로 류연복이 집중해서 가다듬어온 매체라 하겠다. 기실, 목판화의 본래적 정체가 출판용 삽화 아니던가. 목판인쇄, 목활판 인쇄, 목판화, 금속활자에 이르기까지 인쇄술의 강국이었던 우리 전통에 비추어보면, 류연복의 이 일러스트 작업도 1950년대 이래로 순수미술로만 범위가 좁혀진 우리 현대 목판화에 전통목판화의 열려진 기능성을 재귀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미술을 모르는 일반 서민들이나 민중과의 마음을 나누는 형식으로 본다면 더없이 친근한 내용과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 소소한 일상에서 마주친 대상이나 현상들, 그 낮은 곳에서 일렁이는 생각과 마음의 편린들, 그러면서도 거대한 시국과 사건에서의 상처들을 자분자분 낮은 언어로 얘기하는 이 형식은, 80년대 문화 투사로서 그가 일정 부분 유보했던 삶의 지혜에 대한 잠언을 드러내는 형식으로 손색이 없다. 노자나 장자가 판화 이미지 밖으로 걸어 나오듯 소탈하고도 깊은 사유들이 쉬운 시각언어로 번안되었다. 이미지의 힘이다. 지식이나 전문적인 소양이 없어도 소통할 수 있는 성찰과 통찰의 결과물들이다. 이런 언어들로 류연복 스스로 본인의 판화와 글로 에세이를 간행하고, 또 80년대 이래로 친우 문인들의 책표지나 삽화, 진보운동권 각종 행사의 현장포스터, 전단, 현판, 장서표 등으로 목판화를 활용해왔으니 긴 시간 지속적인 그의 판화가로서의 실천은, 그 자체로 한국 현대목판화에 소중한 자산이라 하겠다. ● 칼칼한 단칼의 구사와 간단하게 편화한 캐릭터의 평면성이 제시하는 이 이미지들은 가볍고 발랄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문인화의 그것처럼 적요하고도 절제된 선비적 품격도 갖췄다. 간단한 언어의 구사와 함께 이 그림들은 분명 일상적 소통에 장점이 있다. 또한 서구는 물론이고 중국이나 일본 목판화와는 전혀 다른 간결미가 제시하는 류연복의 이런 시각적 형상언어는, 미술이라는 '아우라'의 권위를 근본적으로 해체시킨다. 탈 아우라의 이런 매체특정적 메커니즘은 분명 대중적이되, 따뜻한 감수성으로 인해 서민적이고, 또 때로는 부조리에의 저항이 담김으로 민중적이고, 현장에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동요케 해서 군중적이다. 한마디로 류연복이란 사람의 있는 그대로의 다면적 모습이 반영되어 나오는 게 바로 이 소소한 관조성으로부터 독자를 견인하는 일러스트 목판화라고 하겠다. 이 출판미술 목판화의 관조성은, 그의 회화적 목판화의 묵직한 무게감과 비판적 정치성을 보완한다. 한칼 한칼 생활에서의 깨달음을 목판에 옮길 때마다, 그의 풍류도사로서의 탈속과 첨예한 현실인식이 깊고 부드럽게 어울리는 것은 분명하다.


류연복_나는 온몸이 길이다-가을_Ed. 5/A.P 1_다판다색목판_91×91cm_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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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저항의 역사 ● 90년대 안성으로 낙향하면서부터 시작한 풍경이 류연복 목판화의 힘줄이고 출판용 일러스트가 류연복 목판화의 살이라고 본다면, 뼈대는 역시 80년대의 저항적·역사적 작업이라 하겠다. 1984년경부터 시작한 것이니 35년쯤 되었다. 처녀작 격인 「갑오농민전쟁」, 5.18에 관한 「뒤늦게 세운 비석」, 「무엇을 바라느냐」 등의 자연주의적 서정성의 시선으로, 변혁기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하려는 리얼리스트의 입장이 진득하게 묻어나온다. 지금처럼 몸에 잘 저축된 칼의 운용이나 기교보다는 당연히 청년작가의 몸짓에 의한 직접성과 어눌함이 보이지만, 한편으로 날 것의 싱싱함은 자연스럽다. 그러면서도 「씻김굿」이나 시민들 판화체험을 위해 제판한 「십이지신상」 등은 조선시대의 목판화의 전통양식을 수용한 것으로, 전통목판화를 소환하면서 거기에다 동시대적 문제의식을 중첩시킨 초기 목판화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 이후 86년도 경 그의 기질이 그대로 반영된 「기도」, 정신대시리즈 중 하나인 「능욕도」, 그리고 6월 항쟁의 현장을 그대로 포착한 「6월 항쟁중 시민의 항의」, 반독재 투쟁의 이미지를 극대화한 「끝내 이루리라 이루어 내리라」, 노동자들의 투쟁을 형상화한 「갈라치며 나아가자」, 「골리앗 전사들」 등은 이 시기 류연복의 대표작들이다. 지금의 능숙해진 칼의 구사에 비하면 투박하지만, 당시 류연복의 사회적 의식과 전투적 실천성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주저함 없이 파 내려간 칼의 직진성도 그렇지만, 다듬지 않고 거칠게 밀어붙인 호흡에서 당시의 긴박했던 그의 심리와 시대상이 묻어난다. 확실히 그땐 젊었다. 기교나 테크닉이 아니라 날 것의 표현성을 힘으로 밀어붙인 목판화의 칼맛과 판면의 표정은 류연복 "답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류연복_나는 온몸이 길이다-겨울_Ed. 5/A.P 1_다판다색목판_91×91cm_2012

마무리하면서 ● 물론 환갑이 지난 지금도 그는 여전히 젊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라서다. 나와는 몇 번 함께 동지로 활동한 적이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나는 그와 함께 팀원으로 작업한 적이 있었다. 86년 정릉 그의 집 담벼락에 벽화 「상생도」를 함께 그릴 때도 먼저 선두에 나서서 작업을 이끌었다. 또 2016년 말부터 2017년 3월까지, 『광화문 미술행동』을 함께할 때도 그랬다. 회의를 통해서 어떤 사업안이 정해지면, 그는 머리를 굴리지 않는다. 주저 없이 몸이 먼저 나서면서 일을 했다. 자기 개인의 이득은 전혀 생각지 않는다. 오로지 일의 명분과 자신의 역할에 책임지는 모습만 보인다. 그러면서도 남들보다 앞서서 힘든 노동을 두말없이 휙휙 날렵하게 처리한다. 화단에서 보통의 선배들은 뒷전에서 일을 시키는 데 비해 허드렛일조차도 류연복은 자신이 먼저 몸으로 그렇게 처리했다. "류연복답다"는 말은, 온몸으로 밀어붙이는 그의 생활 태도와 작업 과정에 잘 어울리는 수사다. ● 아무튼, 1980년대 초에는 서울미술공동체를 통한 벽화운동으로, 이후 민미협과 그림마당 민을 중심으로 작가활동을 지속한 류연복의 저항적 이력은 결국 지금 남아있는 100여 점의 그의 80년대 목판화와, 그 이후 500여 점의 작품으로 증명된다. 그리고 80년대 그의 건강한 의지와 비판적인 의식으로부터 도출된 저항적인 미적 태도는 90년대의 자기 성찰적 잠언과 더불어 국토풍경을 통한 낮은 곳으로부터의 기운 혹은 정서, 즉 진지한 민중성으로 확장한다. 민중성은 반드시 전투성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80년대에는 그래야 했겠지만). 또는 사회과학적인 논리의 문제만도 아니다. 그것은 넉넉한 정서, 혹은 더불어 일하고 누리려는 따뜻한 생명성을 의미한다. 낮은 곳으로부터 움트면서 소외된 존재들에 대한 연민과 공감과 함께, 이웃과 연대하려는 감성공동체적 세계관의 발로이기도 하다. ● 1980년대 이래 지금까지 류연복의 이런 세계에 대한 입장은, 그 소재나 방식이 바뀌었을지라도, 여전하다. 작가로서 방법적 모색과 일탈과 실험은 했었어도 그가 세계를 대면하는 마음과 태도는 그때와 같은 지점에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대미가 바로 지금 진행하고 있는 대형 목판화들이다. 국토와 민중에 대한 애정, 작가로서 목판화에 대한 자기표현의 정합성, 그리고 동시대에 대한 지식인적인 실천적 참여라는 삼위일체가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간단명료한 잠언으로, 또 때로는 웅대한 서사적 서정으로 갈무리 지어지고 있다. 이런 작가적 궤적은 한국현대목판화의 진행과정 중에서 평가받아야 할 분명한 지점을 확보하고 있다. 허허실실 낙관적 웃음과 함께, 국토를 순례하며 그곳에서 이웃들과 함께하려는 그의 미적 지향성과 함께 말이다. ■ 김진하



Vol.20200205e | 류연복展 / YOOYEUNBOK / 柳然福 / printmaking




[스크랩 : 서울아트가이드 2020년 2월호]










류연복씨의 ‘온 몸이 길이다’ 판화전이 지난 11일 오후2시 ‘진천군립생거판화미술관’에서 개막되었다.




기다리던 전시라 만사를 제쳐두고 갔다.
다시는 전시장 돌아다니며 일 만들지 않겠다는 다짐한지가 오래지 않건만,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북한산을 거닐다2, 2013, 1,38X165cm,소멸다색목판

류연복씨의 작품을 띄엄띄엄 보았지만, 36년 동안의 전 작업을 한꺼번에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풍악산 일만이천봉,2009, 1,23X180cm다판다색목판


그의 작품을 처음 만난 것은 80년대 민주화투쟁을 형상화한 끝내 이루리라 이루어 내리라’였다.
민중적이고 투쟁적인 판화에 매료되어 그의 이름은 각인 되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뭇 선동적인 작품이었다.



끝내 이루리라 이루어 내리라1,1989,37X37cm,채색목판


그 이후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90년대 후반 동강 댐 건설을 막으려는 환경단체의 목소리가 높을 때, 다시 류연복이란 이름을 찾아냈다.
초창기 보았던 투쟁적인 작품과는 달랐다.
국토에 대한 애정과 자연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묻어있었다.


동강전도, 1999, 180X110cm, 다판다색목판


그 당시는 동강을 찍기 위해 정선 귤암리에서 일할 때다.
백운산에 올라가 동강 물줄기를 부감으로 찍기도 했는데, 그 장면을 사진처럼 극명하게 드러낸 것이다.


동강(고성산성에서)1999, 57X107cm, 단색목판


바세와 연포마을을 굽이굽이 휘감는 강줄기 사이로 박혀있는 집들은
동강사람들의 삶처럼 아름답기도 하고 애절하기도 하고 역동적이기도 했다.



바로, 현장 답사에 의한 실경산수였다.
“아! 민중미술가 류연복씨 작품이 실경산수로 바뀌었구나. 역시 대단한 작가다!”며 다시 흠모했다.
주제만 바뀌었지 민중정서를 반영하는 태도는 똑 같았다.


외암골 전도, 2002, 120X84cm, 다판다색


풍경을 이루는 산과 강의 흐름은 강력하고 마을의 경계는 선명했다.
넓고 탁 트인 시선에서 부터 작고 가까운 곳을 바라보는 섬세함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명료했다.
국토에 대한 형상성은 두드러지고, 부분적인 독자성은 분명했다.


서운산-겨울, 2003, 65X123cm, 다판다색목판


그러고는 또 잊고 있었는데, 6년 전 인사동 ‘부산식당’에서 그를 처음 만난 것이다.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었는데, 첫 인상이 소탈하고 겸손했다.
그 이후 광화문광장‘의 ’광화문미술행동‘팀에 함께하며 유심히 지켜볼 수 있었는데, 사람이 진국이었다.


꽃 한송이 2018, 97X72cm, 소멸다색목판


허허실실 웃으며 바람처럼 살지만, 늘 말보다 행동이 앞서고 잔머리 굴리지 않았다.


나는 온몸이 길이다-봄, 2012, 91X91cm, 다판다색목판.


류연복씨는 사람과 작품이 똑 같았다.
대개 작품을 먼저 알고 나중에 작가를 만나는 경우가 많은데, 실망스러운 경우를 종종 접한다.
작품은 좋으나 인간성이 형편없는 작가는 사람이 아니라 작품 만드는 기계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사람 나고 작품도 있는 것이다.




작가와의 만남이 있는 지난11일 오후3시 무렵, 정영신씨와 함께 전시장을 찾았다.
‘진천군립생거판화미술관’은 처음 가보았는데, 시골에 이렇게 좋은 전시장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개성없는 비슷비슷한 전시장이야 가는 곳마다 늘려있지만, 판화만 보여주는 전문미술관을 어찌 시골에서 볼 수 있겠는가?
아마 진천에 사는 판화가 김준권씨의 노력에 의한 산물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그 멀리까지 많은 사람들이 왔더라.
류연복씨의 작품성이나 인간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대목이다.
아는 분으로는 평창에서 온 화가 권용택씨 내외를 비롯하여 미술평론가 김진하, 이태호씨,
화가 변정섭, 박불똥, 박진화, 김 억, 송용민, 김 구, 임정희, 김건희, 김가영씨가 참석했다.

판화가 이윤엽씨는 아들 땅을 데리고 왔는데, 뒤늦게는 김준권씨도 나타났다.




개막식은 끝나고 작가와의 만남이 시작되고 있었는데,
류연복씨는 마치 장터 약장사처럼 너스레를 떨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예요”라며 흩어진 관객들을 불러 모았다.




류연복씨의 목판화에는 힘이 흘러넘쳤다.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실적이고 역사적인 문제를 토해냈다.
저항적이고 비판적으로 칼을 휘두르기도 하고 때로는 서정적으로 다독였다.
국토를 온 몸으로 누비며 체득한 산하지만, 풍경 에너지와 사람의 삶을 응결시키려는 속내가 엿보였다.


도피안사 전도,2003,110x80cm,다판다색

류연복씨의 근작은 국토풍경을 담은 목판화다.
분단풍경인 DMZ에서 부터 독도,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 무등산, 북한산 등
방방곡곡을 누비며 국토의 아름다움 속에 민중의 비애를 버무렸다.
여러 번의 칼질이 아니라 단칼의 칼질이 빚은 선명한 골격이 돋보였다.
풍경조차 서민적이고 민중적이라 풍경의 수려함 속에 비극적 슬픔이 깔려 있었다.


갈라치며 나아가자,1989,28X49cm, 채색판화


미술평론가 김진하씨는 서문에 이렇게 썼다.
“류연복의 목판화는 일도양단의 칼질로 그 이미지가 선명하다.
구사된 칼은 주저하거나 돌아가거나 에둘러 여운을 남기지 않는다.
전통적인 목판화의 원초적인 칼 맛의 연장선상에서 대상의 특징을 포착해내면서
그 내용의 핵심을 도드라지게 만든다. 명료하다. 강하다. 그래서 류연복스럽다”


가난한 사랑 노래,1998, 37X27cm, 채색목판


이 전시는 12월 31일까지 열리니 진천을 지나치는 걸음에 꼭 한 번 보시기 바란다.

두번째 작가와의 대화가 열리는 11월22일(금) 오후3시에 가면 금상첨화다.
작가의 말처럼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다.

사진, 글 / 조문호


모자,1992, 27X18cm, 소멸다색


붓을 들어 육천만 가슴에, 1989,30X30cm,채색목판.


백골단과 전사,1991,37X25cm, 다색목판

빈들 생명-딛고 선 땅, 2004, 45X124cm, 소멸다색목판

해방춤1,1986, 45,5X53cm,채색판화

숲2, 2017, 92X92cm, 소멸다색목판.

전각판화(책표지),2016-2018, 16X16cm X54

달밤-금강산외 열두폭 평풍, 2007, 61 X30,5cm X12



[전시 개막식날 작가와의 대화에서 찍은 사진이다]






























































[스크랩 : 서울아트가이드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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