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가을 동자동 ‘가톨릭사랑평화의집’에서 실시하는 도시락배달에 함께 한 적이 있었다.

급식소에 갈 수도 없을 만큼 힘들어하는 동자동 빈민 중 300여명을 정해, 매주 두 번씩 도시락을 나누어 주었다.

이곳은 알코올 중독자였던 허 근 신부님이 주도하시는데, 그는 ‘중독 해결사’로도 유명하다.

의지할 곳 없이 허물어진 이들이 다시 건강하게 설 수 있도록 돕는 것을 소명으로 여기고 사신다.

매번 후원과 봉사하는 분들의 정성으로 도시락이 만들어지고, 동자동 구석구석 가난한 이들에게 배달되어졌다.

그 당시 내가 기록한 봉사현장 사진들과 글을 SNS에 올렸는데, 봉사하는 분들이 노출되는 것을 싫어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그동안 블로그에 올린 관련 내용을 모두 내리고, 배달봉사까지 자제해 달라는 사무장의 말에 아쉽게도 발길을 끊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한다는 취지는 백번 맞는 말이나 각박한 세상에 한 가닥 희망이라도 전해주려는

기자의 입장에서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때 이루어졌던 모든 기록들은 그 순간부터 백지가 되어버렸다.

가끔 도시락을 배달하는 분들을 거리에서 만나면 지난 날이 생각났다.

당시 두산 박영만 회장께서도 도시락 싸는 봉사에 참여하셨다. 지난 달 우연히 페친이 되어 반갑기 그지없었는데,

그 당시 찍은 사진들을 모두 폐기시켜 사진 한 장 전해주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마침 두 장씩 모아둔 인물사진 파일을 뒤져보니 허건 신부와 박용만 회장의 사진이 각각 나왔다.

변변찮은 사진이지만 다시 꺼내, 유쾌한 모습으로 인식되었던, 당시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사진,글 / 조문호










지난 12일 오후6시 무렵 동자동 공원으로 나갔다.
쪽방은 찜통이었으나, 공원은 너무 시원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나와 술을 마시거나,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한 쪽에서 동네 어른이신 이상준씨가 나를 불렀다.
그 자리에 김창헌씨도 함께 있어 너무 반가웠다.
우건일 조합장이 다녀간 이야기에서부터 많은 말씀을 주셨다.
다들 우건일 조합장을 좋아하고 아끼는 마음은 한결같았다.
빨리 완쾌하여 동자동에 복귀 할 날만 기다릴 뿐이었다.






그 자리에는 한정민, 변성식, 이원식씨도 있었는데,
이원식씨가 외국인과 사진 한 판 찍어달라며 부탁했다.
공원에 들어오며 낮선 악사가 자리 잡은 것을 보았으나,
친분이 없어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스페인 사람이라는데, 기타 하나들고 짚시처럼 떠도는 젊은이었다.






뒤늦게 이번 사건과 관련된 분이 나타나 방범초소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합장 행방불명에 따른 전달내용의 인식차이는 다소 있었으나,
서로 동자동사랑방을 아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은 틀림없었다.


문제는 글을 올린 후 급히 부산 내려갔던 것이 일을 키웠다.
모든 일은 서로 만나 소통하면 쉽게 풀릴 일인데,
전화나 글로만 감정을 표출하니 문제가 된 것이다.

솔직히, 이야기를 글로 올리는 과정에서 개인적인 추측이 개입된 점도 인정했다.
아무튼 이번 일로 오해를 일으킨 점에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사진, 글 / 조문호














동자동에 들어온 지 10년차인 조인형(74)씨는 아직까지 총각이다.
평양에서 난리 통에 내려와, 어린 시절을 마산에서 보냈다.
집도 절도 없이 대전으로 서울 가리봉동으로 떠돌았지만, 사는 게 만만치 않았다.
온갖 일을 안 해본 것이 없는 밑바닥 인생을 굴렀는데,
기초생활수급자 혜택을 받으며 그나마 안정을 찾았다고 한다.






이제 일흔 넷이나 아직 장가도 못 가고 혈혈단신으로 외롭게 지낸다.
어쩌면 외로움을 잊으려 부지런하게 사는지도 모르겠다.
잠시도 쉬지 않고, 동네 구석구석을 다니며 고물을 주워 모았다,
그래서 조씨가 사는 동자동 쪽방은 고물 창고, 아니 보물 창고다.






그의 이름처럼 인형들이 가지런히 앙증맞음을 잃지 않았고,
상여 집 같은 조화나 온갖 잡동사니의 행색들이 어설프게 고개 내밀고 있다.
짐 때문에 누울 곳이 변변찮아도 물건을 처분하지 못한다.
구리나 동 파이브 등 비싼 고물만 한꺼번에 팔기위해 모을 뿐,
대개 자신의 손길이 묻은 애착어린 집기들이기 때문이다.






이젠 물건들이 오히려 주인을 내몰려고 할 정도다. 
더러 처분하면 좋겠지만, 그게 삶의 유일한 낙인데 어쩌겠는가?
버려진 사물을 주워 닦아 희망을 심어주고, 죽어가는 화초를 살려 생기를 돌게 한다.
마치 노인들이 모여 있는 요양소처럼, 잠시 소멸을 유예시켜 주는 것이다.






기초생활수급비에다, 고물 수집으로 한 달에 20-30여만 원을 더 버니,
이웃보다는 한결 여유로운 삶을 산다.
발발 떨며 안 쓰고, 돈을 숨겨두는 사람들에 비해
건강을 위해서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 현명한 처신이다.
자기 말처럼, 백수는 무난할 것으로 보였다.






방에 들일 침대크기를 재기 위해 줄자를 좀 빌려 달랬더니,
아예 가져다 쓰라며 보관하던 줄자를 내 주었다.
얼마나 만졌으면 케이스가 반질반질 그의 콧등을 닮았다.
사람이나 사물이나 제 기능만 할 수 있다면 살아남는 게 미덕이다.
부디 건강 지켜, 보물과 함께하는 백수잔치를 기대한다.

사진, 글 / 조문호












‘동자동사랑방’ 공제 조합장 행방불명사건은 근 한 달 가까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열흘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혼자 전전긍긍해야 했다.

무슨 일 일까? 그가 없다면 '동자동 사랑방' 운영에 지장이 없을까?


퇴원하여 정선 오일장 박람회에 다녀와서 동자동에 복귀한 것은 27일이었다.

사흘 동안 동자동을 돌아다니며 여러 사람에게 물어보았으나 각기 추측에 의한 이야기들이 분분했다.

한 달 후 조합장이 돌아온다는 긍정적인 분도 있었으나, 부정적인 의견도 많았다.


같은 말도 어 다르고 아 다르듯이 상황에 따라 부풀리기도 하지만,

문제는 날개 없는 소문이 빠르게 번진다는 것이다.

빨리 조합장이 돌아오기를 바랄 뿐이다.


그가 나타나야 모든 추측을 불식시킬 수 있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2일 저녁 무렵, ‘동자동 사랑방’ 손님들이 병문안을 왔다.
시나리오작가 최건모씨도 다녀 갔고, 동자동에선 선동수간사와 김정호, 김창현씨가 왔는데,
우건일조합장 잠적 의혹이 불거질 때 입원하여, 여러 가지 궁금했던 터라 더 반가웠다.






‘최원호병원’ 맞은편에 있는 ‘도야지 포차’로 안내하여 삼겹살을 안주로 소주 한 잔 대접했다.
이 집은 일인당 구천원이면 돼지고기를 무제한 먹을 수 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다들 기분 좋게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헤어졌다. 



  


평소 늦게 자는 버릇으로 두시 무렵에야 간신히 잠들었는데, 눈을 떠 보니 벌써 조반이 나와 있었다. 

점심 한 끼에 저녁은 빵 한개로 해결해 왔는데, 요즘은 하루에 세끼나 먹어 너무 포식하는 것 같다.
두 차례 물리치료 받는 일 외에는 간간히 병원 옥상에서 바람이나 씌며 한가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병원비 정산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다.





부지런히 치료받아 빨리 동자동으로 돌아가야겠다.   

오라는 곳은 없으나, 할 일이 널려있어 마음은 늘 바쁘다. 


사진, 글 / 조문호


















다큐멘터리 영화 ‘내 친구 정일우“ 시사회가 지난 2일 종로3가에 있는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에서 열렸다.

우리나라 빈민운동의 선구자였던 정일우(존 데일리)신부의 선종 삼주기를 맞아 김동원, 노은지감독이 만든 작품이었다.

이 날 같은 시간에 ‘동자희망나눔센터’에서 주민자치회의가 열렸지만,

낯선 이국땅에서 평생을 낮은 자세로 사신 신부님의 헌신적인 삶을 돌이켜보지 않을 수 없었다.


신부님은 빈민운동을 하셨지만, 빈민들을 조직화, 의식화하지 않고, 그들이 움직일 때 까지 기다려주었다.

즉 빈민들을 끌고 가려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빈민들의 권리를 위해 싸운 것이다.





그는 1935년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18살 때 예수회에 입회했다.

세인트루이스대에서 철학을 공부하여 60년부터 서강대에서 철학을 가르쳤고,

3년 후 미국으로 돌아가 신학을 공부해 사제서품을 받고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우리나라에서 40년 가까이 예수회 신부로서 빈민운동을 하다, 2014년 78세의 나이로 선종하셨다.


신부님은 복음을 입으로만 전하지 않고 온 몸을 바쳤다.

개발 논리에 밀려 내팽겨진 빈민들의 삶을 접하며, 73년 청계천 판자촌에 들어갔다.

청계천과 양평동, 상계동을 떠돌며 판자촌 빈민들과 함께 살며,

그들이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판자촌 철거 반대 시위에 앞장서 빈민들의 '정신적 아버지'로 자리 잡았다.





철거민 공동체 식구들은 아무런 조건이나 아무런 가식 없는 정신부의 인간적인 모습에 끌려 동화되었다.

양평동 판자촌에서 철거당한 빈민 170가구와 함께 경기도 시흥 소래면 신천리로 옮겨간 그는

빈민운동가 고 제정구씨와 함께 복음자리 공동체를 꾸려 살기도 했다.


서울올림픽을 앞둔 1980년대. 곳곳에서 철거작업이 진행되자 상계동과 목동 등지에서 철거민을 도왔고,

이들의 자립을 위해 '복음자리 딸기잼'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정 신부는 김수환 추기경과도 친했지만 정태춘씨 노래를 특히 좋아해, 가끔 만나 교류했다,

그러나 그의 곁에는 고(故) 제정구씨가 든든한 동지로 늘 함께했다.

두 분은 1986년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공동 수상했다.






도시빈민운동이 자리 잡을 무렵, 저가 미곡정책으로 희생을 강요당하는 농민들에게도 관심을 가졌다.

1998년 괴산군 삼송리에 농촌청년 자립을 돕기 위한 누룩공동체를 만들어 농촌 운동에도 힘을 쏟았다.


날카로운 혜안을 가진 정일우 신부는 낙천적인 기질의 자유로움과 넉넉함을 가진 재미있는 분이셨다.

항상 장난 끼 넘치는 익살과 해학으로 빈민들을 즐겁게 했다.

영화에서도 함께 술 마시며 노는 모습이 자주 등장하는데,

괴산군 삼송리 마을잔치의 돼지 잡는 모습에서는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한 주민이 망치로 돼지의 급소를 쳐 죽이려 할 무렵, 녹음테이프 하나를 가져와 음악을 틀었는데,

그 선곡이 귀가 막혔다. “짜자 쟌 쟌~”으로 시작되는 베토벤의 ‘운명’이었다.

정일우신부의 가식 없이 어울리는 진솔한 모습에서 뜨거운 인간애를 느꼈다.

영화를 만든 푸른영상 김동원, 노은지 감독은 기존의 영상자료에다 주민들의 이야기를 모우고,

정일우신부의 고향인 미국까지 건너가 주변 분들의 인터뷰를 담는 등, 신부님의 삶을 리얼하게 조명하였다.

특히 인간적인 모습을 부각시켜, 감동을 안겨주었다.






마지막으로 보여 준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주민들이 신부님 49제에서 영정사진을 든 채 ‘노란샤스 입은 사나이’노래를 부르며 춤추고 놀았다.

격식 없이 즐겁게 사셨던 신부님을 생각하는 주민들의 모습에서, 그 값진 삶을 다시 한 번 깨우치게 된 것이다.
‘죽음도 축제다.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하며, 즐겁게 살자‘

이 날 시사회에는 정일우 신부님을 그리워하는 분들이 영화관을 가득 메웠다.

좌석이 없어 복도까지 앉아야 했다.

동자동사랑방’에서도 우건일 조합장을 비롯하여 김호태, 김정호, 선동수, 허미라,

강병국, 임수만, 김창헌, 최성규, 김정길, 유한수, 전인중, 정시영씨 등 20여명이 갔다. 


[정진우신부와 관련된 사진들은 'Daum'의 이미지 블록에서 스크랩했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5일 정오 무렵, 동자동 쪽방으로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미디어 작가 김도이 군이 밑 반찬을 잔뜩 사들고 찾아 온 것이다.
어저께 페북에 올렸던 불신의 병에 시달린다는 글을 본 것 같았다.
그렇잖아도 몇 달 전 다녀 간 후로 만나지 못해 근황이 궁금했었다.
같이 점심 식사하며 소주 한 잔 하자는 제안에 쌍수로 환영했다.

건물 밑에 자리잡은 ‘광주식당’엔 좌석이 없어 도이씨 따라갔다.
‘서울역쪽방상담소’ 부근에 있는 ‘청국장’집으로 안내했다.
동자동 살고 있는 나도 못 가본 식당인데,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했다.
청국장에다 돼지볶음으로 소주 한 잔했다.






빈속에 소주가 들어가니 짜리한 기분이 죽였지만, 낮술이라 은근히 걱정되었다.
다행히 소주 두병을 도이씨가 많이 마셔 주었다.
페북에 올린 동자동소식을 틈틈이 보는지 이 쪽 사정을 좀 아는 것 같았다.
우연찮게 부모님 이야기가 나왔는데,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사연인즉, 어머니께서 심한 당뇨로 고통 받고 계신다는 것이다.
누군들 부모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냐마는, 그 지극한 효심에 감동 받았다.






발동 걸려 동자동 ‘새꿈공원’ 아지트로 갔는데, 이미 많은 사람들이 낮술에 젖어 있었다.
정재헌씨는 이미 맛이 갔고, 이준기, 김용태, 계남기, 이한보, 이원식, 강완우씨 등

많은 사람이 여러 곳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도이씨가 동내 사람들을 위해 막걸리와 담배를 사왔다.

다들 고맙게 받아 마셨는데, 이번엔 고급커피와 캔 막걸리를 또 사온 것이다.

이준기씨가 부담스러운지, 집에 가져가라며 사양한다. 사실 지나치면 자존심 상할 수도 있다.

더구나 이준기씨는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왕년의 주먹 아니던가.





이 날은 교도소 갔다 온 친구들이 많아 그런지 교도소 이야기가 주 화제였다.

다들 사연이야 기구하지만, 이구동성으로 쪽방생활보다는 교도소 생활이 편하다는 것이다,

갔다 오면 몸까지 좋아진다는 교도소 예찬론을 폈다.

하기야 얻어먹으러 다니지 않아도 삼시 세끼 밥 챙겨주겠다, 사람들과 늘 함께 어울리니,

쪽방처럼 외롭지도 않을 것이다. 단지 술 담배를 못하지만, 건강에는 그 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술 취해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이기영씨를 비롯하여 라흥주, 강동근, 이태헌, 연영철,

유한수씨 등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마침 정용성이가 지나갔는데, 그날따라 말짱했다.

궁금증이 발동해 옥탑 방까지 올라가보았는데, 끓여놓은 라면을 먹고 있었다.

황춘화씨는 흐뭇한 표정으로 자식 놈의 라면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 그런데, 황춘화씨 얼굴이 묵사발이 되어 있었다.





그 가파른 '9-18’건물, 마의 계단 에서 또 넘어졌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도 넘어져 팔을 다치지 않았던가.

아들 용성이가 넘어져 다치더니, 정재헌씨가 넘어져 다쳤고, 어제는 황춘화씨가 넘어져 다친 것이다.

건물 계단 손잡이를 쪽방상담소에서 설치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사람 다 잡고 설치할지 모르겠다.

좀 있으니 꼭대기까지 손님이 줄을 이었다. 정재헌씨야 5층에 사니 올라 올 수 있겠으나. 이원식씨도 올라왔다.






내가 술집 작부를 자청하며 노래 한 곡 뽑았다.

‘비나리는 호남선’을 청승맞게 불렀는데, 갑자기 정재헌씨가 서럽도록 울어대는 것이었다.

말 못할 사연이 있어 보였다. 눈치 빠른 황춘화씨가 자기가 춤 출테니, 신나는 노래로 불러 달란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처녀 바람났네”로 돌렸는데,

애미는 신바람 나 흔들어 댔으나 용성이는 처음 듣는 노래라 흥이 나지 않는 것 같았다,

작은 노트처럼 생긴 노래방 책과 손바닥만한 앰프를 켜 놓고 한 번 찾아보란다.

나는 가수라 노래방 노래는 하지 않는다며 밀쳐냈더니, 이해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일 촬영이 있어 강릉까지 가야해 너무 오래 퍼질 수가 없어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동자동 사랑방’ 일행이 방문하겠다는 전갈이 왔다. 타이밍이 귀가 막혔다.

내가 사랑방으로 갔더니, 박정아, 김정호씨가 술과 안주까지 준비해놓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방에 올라와 보니, 밑반찬까지 사온 것이다. 박정아씨도 내 하소연을 페북에서 본 듯했다.

후배가 와서 냉장고를 채워놓았다며 돌려보냈으나, 이게 사람 사는 맛이다.






‘동자동 사랑방’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박정아씨는 피가 뜨거운 빈민운동가다.

아마 그가 없었다면 주민들이 소통하며 정 나누는 일이 불가능 했을지도 모른다.

말없이 온몸과 마음을 바치니, 그 열의에 보답하느라 김정호씨도 열심히 돕는다.

내가 오버 할 것 같아 술을 자제하니,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떠 난 후 컴퓨터를 열어보니, ‘광화문미술행동’에 대한 김진하씨의 댓글이 올라와 있었다.

핵심에서 비껴 간 글이긴 했으나, 이제 마무리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재발을 막기 위해 누군가 책임지는 사람은 있어야 했다.

대표가 사임하고 부대표가 끌어간다면 협력할 용의가 있다며, 함께한 분들께 죄송함을 표했다.






더 이상 작가 없는 사진이 떠돌아서는 안 된다. 아무리 공익도 중요하지만, 작가에 대한 예의는 갖추어야 한다.

차후 어디에서라도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저작권 침해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작정이다.

잘 못된 일은 바로 잡아야 하니, 다들 양해해주기 바란다.

사진, 글 / 조문호

































































동자동 사는 황춘화씨 쪽방에 볼 일이 있어 올라갔다.
몇 일 전 내 방의 쌀을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지방가기 전에 줘야 편할 것 같았다.
쌀 포대를 안고 좁은 계단의 오층 건물 옥상까지 올라가려니 숨이 찼다.
쌀 포대를 계단에 내려놓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데,
5층 정재헌씨 쪽마루에 정재헌씨와 정용성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용성이 녀석 얼굴이 엉망진창이었다.
그 꼴로 술을 마신 듯 해, 꼬라지가 거기 뭐꼬? 술 좀 거마 무라했더니,
계단 내려오다 넘어졌다는 것이다.

열악한 환경을 비켜 가지 못하는 팔자인지 모르지만최소한의 안전장치는 필요했다.
가파른 계단이라 손잡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건물 주인에겐 통하지 않는단다.

 





가진 자들에게 당하기만 하는 대개 빈민들의 고충이긴 했으나,
서울역쪽방상담소에서 중재를 해 주던지,
아니면 상담소에서 직접 손잡이를 좀 만들어주었으면 한다.
자칫하면 목숨도 잃을 수 있는 일이다.
매일같이 술이 취해 오르내리는데, 여지 것 큰 사고가 없었던 것이 신기하다.
날카로운 시멘트에 부딪혀 그 정도 다친 게 천만다행이었다

용성이 더러 쌀 가져왔다고 했더니, 냅다 달려가 옥탑 방까지 들어 올려주었다.
다친 용성이 때문에 속이 상했는지, 술 취한 황춘화씨는 방에 쓰러져 자고 있었다.
이 대책 없는 두 모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 억장이 무너졌으나, 방법은 없었다.
술을 끊으려면 병원생활을 해야 하지만, 당사자의 의지도 병원비도 없다.






걱정만 남긴 채 돌아오려니, 용성이가 손을 내민다.

돈 좀 달라”는데, 냉정해져야 했다.
그 간절한 눈빛을 거절하지 못해 주어 온 것을 후회했다.
그 돈으로 소주 사 마시니 내가 알콜 중독을 도운 격이다.
이제 돈은 줄 수 없다고 잘랐더니, 풀이 죽어 고개를 푹 숙였다.
돌아서는 마음이 아팠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이 세상에 절대 신은 없다. 있다면 그건 사기일 뿐이다.

착한 놈은 고생하고, 나쁜 놈이 잘 사는 더러운 세상 아니던가?

일층으로 내려오니 구멍가게 앞에 이준기씨와 강완우씨가 있었다.
술이 한 잔 된 이준기씨가 반갑다며 하소연을 풀어놓더라.
어떻게 배붙이고 살던 서방을 교도소에 집어 넣냐?는 것이다.
사연인즉, 친구가 아내에게 손 지검을 했는데, 경찰을 불러 구속시켰다는 것이다.
좁은 방에서 함께 부대끼며 살다보니 화가 났겠지만, 참아야 했다.
다 돈 없는 이들의 서러움이다.






동자동엔 한 가닥 희망을 가지며 참 사람과, 절망을 술로 잊는 사람만 산다
알콜에 중독되거나, 몸과 마음을 심하게 다친 저승 대기자들이다.
하기야! 난 담배 중독자니, 남의 말만도 아니다.
오래 사는 것은 자랑이 아니라 수치라며 스스로 위안한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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