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막사발로 통하는 도예가 김용문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모처럼 인사동에 나왔으니, 얼굴 한 번 보자는 거다.
그 날은 짐 옮길 일이 있어 차를 끌고 나왔는데,
술 한 잔 하려면 차를 돌려주어야 했으나 시간이 없었다.
박도선생의 ‘미군정3년사’작가와의 만남‘ 뒤풀이로 시간이 지체된 것이다.
술은 미시지 못하더라도 얼굴만 볼 작정으로
종로경찰서 옆에 있는 관훈주차장에 밀어넣고 ‘유목민’에 들렸다.






‘유목민’에는 사기꾼들이 여럿 앉아 있었다.
막사발 장인 김용문씨를 비롯하여 분청하는 변승훈씨와 이형석씨도 있었다.
안쪽에는 화가 정영철씨와 성애씨도 자리를 잡았더라.


인사동에서 김용문씨를 처음 만난 지가 30년도 더 되었으나, 오랜만에 만난 것이다.
터키 하제테페대학교 도예과 초빙교수로 떠나며 보기 힘들어졌는데,
페북에서 근황을 지켜보았던 터라, 겉으로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마치 트레이드마크처럼 말아 올린 상투가 막사발 같은, 그런 친숙한 모습이었다.






더구나 변승훈씨까지 오랜만에 만났는데, 어찌 술 한 잔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제일 잘 지켜지지 않는 약속이 차 때문에 술 먹지 않는 일이다. 
한 잔만 한 잔만 하다 발동이 걸려 '에라~ 모르겠다. 퍼 마신 것이다.
김용문씨에게 터키에서 전시한 수묵드로잉이 좋았다고 이야기했더니,
인사동에서도 그 전시를 한다는 것이다.
이달 31일부터 보름동안 ‘나무화랑’에서 한다는 데, 술 마실 건수 하나 생긴 것 같았다.






그리고 주변에서 들은바로, 삼례역의 막사발미술관을 비우라는
통보가 왔다는데, 사실이냐고 물었더니, 그렇다는 것이다. 
외국에 체류하는 날이 많아 자주 비워 그런지는 모르지만, 너무 아쉬웠다, 
그동안 세계막사발 축제로 쌓아놓은 탑을
어떻게 그리 쉽게 무너트릴 생각부터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최소한 작가와 협의하여 명맥을 이어갈 수 있는 방법부터 협의했어야 했다.






그런데, 변승훈씨가 자기 후배한테 찾아가 이빨하라며 성화다. 
그동안 대신 부담할테니 이빨 하라는 사람이 여럿 있었지만, 싫었다.
남에게 부담 주는 것도 싫지만, 그보다 오가는 게 번거로워 싫었다,
이번에도 변승훈씨가 해주겠다며 망가진 이빨을 핸드폰으로 찍어
후배에게 견적을 내보라며 부산을 떨어댔다.
나이 들면 하나 둘 망가지는 게 이치고,
그렇게 사라지는 게 인생인데, 더 이상 무슨 소용이랴!






강행복, 손기환씨를 비롯한 여러 명이 등장해 술집 분위기는 한층 무르익어갔다.
취하면 취할수록 차 걱정에 술 맛이 없었다.
어차피 대리운전을 불러야 했으나, 점차 올라가는 주차비가 걱정되어서다.
비상금으로 꼬불쳐 둔 신사임당 한 장 뿐이라,
대리운전을 부를 수밖에 없었는데, 나 또래의 늙은이가 왔다.






그런데, 주차장을 빠져 나가려니 차단기가 열리지 않았다.
아무리 찾아도 주차관리인은 물론 현금 넣는 기계도 없었다.
비켜달라는 뒷차의 경적에 빼고 박기를 반복하였으나, 나갈 방법이 없었다.
30여분을 씨름하다 뒤늦게 알았는데, 카드만 사용할 수 있는 주차장이란다.
신용카드가 없으면 차도 끌고 다닐 수 없는 요상한 세상에 잠깐 어리둥절했는데,
갑자기 인사동이 아니라 외국에 온 냥 낯설었다.






하는 수 없어 ‘유목민’의 전활철씨를 불러 해결했으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목적지인 녹번동으로 가자고 했더니, 수동에 익숙하지 않은지 시동 꺼트리기를 밥 먹듯 했다.
그런데, 어떻게 운전을 하는지 차가 탱크 달리는 소리를 냈다.
기사가 본래부터 소리가 심하냐고 물었지만, 아니었다.
속으로 마후라가 터졌나 걱정되기도 했으나, 뭔가 조작을 잘 못한 것 같았다.
차라리 내가 운전하는 게 더 편할 것 같았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간신히 도착해 차를 점검해 보았더니, 여지 것 사륜구동으로 달린 것이다.





“에라이! 이 아저씨야~”
그 실력으로 대리운전 하다니, 참 사는 게, 다 힘든 것 같았다.

족쇄 같은 차 때문에 시달리는 일도 이제 그만하고 싶다.
지공도사 형편에, 주제 파악 하라는 야유가 뒤통수를 치더라.

사진, 글 / 조문호
































완주의 왈패 한봉림이가 화두를 보내왔다.

작은 영웅들의 동네 인사동’, 우리 그들을 만난다.”로 글을 쓰란다.

생각해 보니, 인사동을 풍미한 많은 걸물들이 떠오르더라.

 

더러는 저승사자한테 붙들려가기도 했지만,

대개 변두리에 처박혀 구멍 파느라 두문불출하고 지낸다.

인사동만 바람난 줄 알았더니, 그들도 바람났나보다.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 중광스님은 그래 그래 놀다 가셨고,

별만 줄 창 그리던 강용대, 체류냄새 풀풀 풍기며 낄낄거리던 사진기자 김종구,

어디엔들 이 한 몸 머물 곳 없으랴산문집으로 폼 잡던 땡초 최영해,

민중미술 그림판을 좌지우지한 사단장 김용태, 인사동 밤안개 여 운,

성질 더러운 콧수염 사진쟁이 김영수 등 많이도 잡혀갔다.

 

김명성, 노광래, 전활철, 최일순 등 몇몇은 인사동에 남았지만,

소설이 안 팔려 작가폐업술집 낸 배평모는 풍기 갔고,

인사동만 나오면 인사불성 된다는 사기꾼 한봉림은 완주 있고,

품팔이 노동자 시인 김신용은 골병들어 소래있고,

부산의 파아란 바다를 그리워하던 이청운은 병원에 갇혀 산다.

 

막사발처럼 사는 상투꾼 김용문은 터키에 돈 벌러 갔는데,

대처승인지, 시인인지, 사기꾼인지 헷갈리는 신동여는 영주 살고,

임진각에 바람개비 날린 털보 김언경은 단양 살고,

떠돌이 유목민  최울가는 어디 있는지 정처 없고,

술버릇 지랄 같은 장경호는 남양주서 독수공방 기다린다.

 

날씨처럼 왔다 갔다 하는 게 인생인지 모르지만,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겠나.

노세노세 늙어 노세, 죽고 나면 못 노나니...” 이 말 참 명언이다.

이 봄 가기 전에 인사동서 경노잔치 한 판 벌이자.

함양 호랑이 이목일이가 인사동서 잔치한다니, 떡 본 김에 제사지낼까?

다음달 27, 인사동의 갤러리M’이란다. (회비20,000원)

 

제목은 거창하게 작은 영웅들의 동네로 시작해 놓고,

글이 삼천포로 빠져 경노잔치 사발통문이 돼 버렸네.

지정곡은 싫어하는데다, 본디 글쟁이가 아니고 사진쟁이니,

너그러이 양해 바란다.

 

사진,/ 조문호




아래 사진들은 23일의 인사동거리다.







인생 말년을 멋지게 연출하신 인사동 풍류객 이계익선생께서 떠나셨다.
요즘 거동이 어렵다는 이야기는 들었으나, 그렇게 빨리 떠날 줄은 생각 못했다.

어제 노광래씨로 부터 부음을 받고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어차피 한번은 가야할 길이고, 죽음 자체가 축복이라 생각하지만,
인사동 풍류의 마지막 불길이 꺼졌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장례식장인 ‘서울성모병원’을 찾았더니, 오래 된 영정사진이 낯설어 보였다.
입구에서 만난 도예가 김용문씨를 비롯하여 채현국, 황명걸, 백낙청, 구중관, 이소라,

배평모, 김영복, 공윤희, 노광래, 박진관, 오춘석 씨 등 많은 문상객들이 모여 있었다.

소주를 홀짝이며, 지난날의 선생님을 추억했다.

선생께서는 서울대 나와 기자에서 장관까지 엘리트 코스를 밟은 분이다.
선생말씀에 의하면 은퇴 전까지는 ‘국,영,수’를 충실히 한 모범생으로 살았지만,
은퇴하고 나서야 ‘예체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단다.

그래서 뒤늦게 아코디온 연주를 배우고, 여 운 화백으로부터 그림도 배웠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라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그렇게 인사동을 흘러 다니셨다.
그림 전시도 열고, 후배들 전시에서 멋진 연주를 하며 풍류를 마음껏 즐기신 것이다.
가끔 술이 취해 오버하기도 하셨지만, 난 오히려 그런 모습이 좋더라.

언젠가 교통부장관 시절 있었던 얘기를 들려 준 적이 있다.
고속철 개통을 앞두고 프랑스 ‘테제베’로부터 엄청난 로비자금을 받았다는 것이다.
상상도 못할 액수라 청와대로 들고 갔는데, 김영삼대통령의 대답이 재미있다.
“니가 알아서 해야지, 그걸 와 내 한데 묻노?”
정신이 버쩍 들어, 열차 값을 그 이상 낮추도록 하고 돌려주었으나,
솔직히 갈등은 좀 있었다고 한다.
만약 그 돈을 받았다면, 비참한 노후가 되었을 것이라며 가슴을 쓸어 내리셨다.

문상객들이 하나 둘 떠난 자리는 허전했다.
터키에서 교편 잡는 막사발 장인 김용문씨와 ‘K옥션’에 나가는 김영복씨가 남아 있었다.
인사동 원조들만 남은 셈인데, 인사동 이야기를 하다 김영복씨가 말을 꺼냈다.

80년대 인사동을 추억할 수 있는 전시와 책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응답하라 인사동”이란 제목까지 말하는 걸 보니 많이 생각한 것 같았다.
그 시절의 사진들과 그림, 이야기를 한데 묶어보자는 것이다.


80년대에는 김용복씨가 ‘통문관’에 있을 때인데, 강용대와 김종구가 많이 생각난다고 했다.
그 소리에 ‘실비집’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실비집’은 그 당시 유일한 해방구였기 때문이다.
"그래 그 시절 이야기들을 한 번 모아보자." 셋이서 뜻을 모았다. 
그러나 그걸 못 보고 가시는 이계익선생이 원망스러웠다.

멋들어지게 하모니카 불며, 노래 한 곡 뽑으실 텐데...

“선생님 잘 사셨습니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노래 부르며 편히 승천하십시오.
그 곳에는 천상병선생을 비롯한 많은 친구들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거기서 아코디온 연주로 멋지게 풍악 한 번 울려야지 예!“

사진,글 / 조문호
























 


 

 

도예가 김용문씨의 토템과 막사발전이 지난 7월15일 오후5시 인사동 '통인화랑'에서 개막되었다.

세계막사발실크로드 프로젝트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작가는 현재 터키의 앙카라하제테페대학교의 도예과 초빙교수로 있다.

맛사발은 조선도공의 오랜 숙련 끝에 이루어 낸  밥그릇, 찻잔, 막걸리 잔으로 서민들의 애환이 담긴 그릇이다.

작가는 작품이 진열대에서 장식화 되는 것보다 실 생활화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항상 작품가격을 저렴하게 책정한다.

이번 전시작들은 한국의 토착신앙을 보여주는 토템 조형물적 특징과 카파도키아의 자연과 함께 조화되는

독특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 전시는 7월21일까지 계속된다.

개막식에는 작가 김용문씨를 비롯하여 이계선 통인관장, 철학자 채현국선생, 서양화가 정순겸씨, 연출가 고상준씨,

소설가 구중관씨, 유카리 노광래관장, 오덕훈씨 등이 참석하였다.

사진, 글 / 조문호

 

 

 

 

 

 

 

 

 

 

 

 

 

 

 

 

 

 

 

 

터키의 무틀루 바스카야 도예전이 지난 1일 오후5시 인사동 ‘통인화랑’에서 개막되었다.

 

개막식에서 전시작가를 비롯하여 이계선 통인관장, 도예가 김용문, 명지혜씨, 서양화가 정순겸씨,

사업가 서홍석, 김성인씨 등 많은 분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중요한 것은 전시 첫 날부터 작품이 몇점 팔렸다는 점이다. 

 

 

 

 

 

 

 

 

 

 

 

 

 

 

 

 

 

 

 

 

 

 

 

 

 

 

 

 

 

 

 

 

 

 

 

 

 

 

 

 

 

 

 

 

 

 




 

 

지난 주말, 일산 사는 노인자, 이대훈씨 부부가 녹번동을 방문했다.


오랜만에 두 내외분을 만나 ‘할머니 추어탕’에서 반주를 곁들인 오붓한 시간을 가졌다.
그날따라 소주도 입에 짝짝 달라붙었지만, 대화마저 잊을 수 없는 추억담이라 사탕처럼 달콤했다.

바로 10여 년 전 노인자씨가 인사동 골목에 차렸던 술집, ‘작은 뜨락’이야기였다.

아쉽게도 일 년 남짓에 문 닫고 말았지만, 그 곳은 인사동 풍류객들이 참새 방앗간처럼 들락거렸던 추억의 대폿집이었다.

‘실비집’을 비롯하여 ‘시인통신’, ‘하가’, ‘누님칼국수’, ‘레떼’, ‘평화만들기’, ‘귀천’, ‘수희제’ 등의

사라진 업소들이 인사동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듯이, ‘작은 뜨락’도 빠지지 않는 이름이다.

그만큼 이야기거리를 많이 만들어 낸 추억의 공간이기 때문이리라.

원래 건물 옆의 쓸모없는 골목에 천막으로 위를 가리고, 건물 벽에 좁은 선반 식 테이블을 붙여

폭 1미터에 길이 5미터 남짓한 공간을 마련했는데, 서양식으로는 스탠드바이고 우리식으로는 그냥 포장마차다.

폭이 너무 좁아 겨우 엉덩이를 걸칠 만한 간이의자만 놓았는데,

이 집에서 술 한 잔 하려면 한껏 몸을 웅크리고 벽을 마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재미있는 낙서나 그림들이 벽에 덕지덕지 붙어 볼거리를 더했다. 

 

기억자로 된 작은 목로주점 안쪽으로 들어가려면 길게 앉아있는 사람들과 일일이 눈인사를 주고받아야 했다.

가까운 사람이 아니더라도 이내 가깝게 되어버리는, 사람냄새 물씬 풍기는 정겨운 술집이었다.

그 곳으로 고양이가 생선냄새 맡듯 인사동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툇마루’ 바깥주인이었던 박중식시인, 전설의 노동자시인 김신용씨, 관훈미술관장으로 일했던 서양화가 장경호씨,

‘작가폐업’이란 카페를 운영하다 풍기로 떠나버린 소설가 배평모씨, 서양화가 김진두씨와 그에게 그림 배웠던 헨리 윤,

인사동에 목맨 김명성시인, 임진각에 바람개비 날린 설치미술가 김언경씨, 막사발 전도사 김용문씨,

천연염색 한다며 술에 염색된 이명선씨 등 인사동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인사동예술가들의 아지트로 변한 것이다.

그런데 대폿집을 차린 노인자씨는 술장사만 처음 한 것이 아니라 돈벌이 자체를 처음 해본 것이라고 했다.

일찍이 큰스님을 모신 포교사 노릇으로 세계 곳 곳을 돌아다녔다는데,

봉사활동으로 아프리카를 종단하며 굶주린 원주민들을 위해 가진 돈을 모두 써버렸단다.

오히려 돈 버는 일보다 쓰는데 이력이 붙은 여자였다.

그런 사람이 술장사를 하니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손님이 “얼마요?”하면 “몰라요. 먹은 만큼 알아서 주세요.”가 대답이고

술꾼들의 취향을 몰라 손님이 시키는 대로 음식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어리석 하게 장사를 하니 인사동 예술가들이 ‘작은 뜨락’을 돕고 나선 것이다.

 

이를테면 돈을 제대로 못 받는 주인을 대신해 모자를 돌려 돈을 거두기도 했고,

원가가 적게 드는 입맛에 맞는 안주를 개발해내기도 했다.

그리고 주인이 있든 없든 하루에 한 두 번은 꼭꼭 들려 ‘작은 뜨락’을 연락처로 삼았다.

그런데 그토록 정들었던 ‘작은 뜨락’이 갑자기 문을 닫게되어, 모두들 길 잃은 나그네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손님이 없는 것도 아닌데다 취객들의 주벽도 그리 심하지않아, 폐업한 동기가 늘 궁금했다.

아마 단골 중에 보기 싫은 사람이 생겼을 것 같다. 보기 싫어도 차마 말 못하는 주인의 성정을 잘 아니까...

이 세상 어느 곳에 '작은 뜨락'처럼 정겨운 목로주점이 다시 생겨 날 수 있을까?
눈 뜨고 코 베이는 세상에, 조그만 바구니 하나가 손님 스스로 먹은 만큼만 내라고 기다려주는

이런 촌스러운 술집이 말이다.

예술을 알고 인사동 낭만을 체득한 사람들도, 사람보다는 돈을 더 반기는 야박한 세상이 되어 버렸다.

인사동의 낭만과 멋도 그대로 머물지 않고, 멋 자체가 상품처럼 넘실댄다면 그건 이미 멋이 아니다.

멋들어짐이 지나치면 곧 바로 건들거리는 법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인사동 거리가 죄다 사람 냄새를 잃은 채 건들거리고 있는 것이다.

인사동의 낭만과 인정이 점점 메말라가는 요즘 들어 부쩍 ‘작은 뜨락’이 그리워진다.

가끔은 술 취한 도공 김용문씨가 부르는 '돌아가는 삼각지'도 듣고싶다.

사진,글 / 조문호

 

 

 

 


정영신,조문호의 ‘장에 가자’ 전람회가 이제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전시가 한 달간이나 이어져 지루한 감은 있지만, 언론사 나팔 덕택에 관람객은 꾸준했다.

 

지인이나 재방문 하신 분으로는 서양화가 문영태, 정복수, 장경호, 이길원씨 미술평론가 최석태씨

조각가 이재욱씨, 도예가 김용문씨, 시인 강 민, 김신용, 조준영씨, 시인 김수영씨 미망인 김현경선생,

‘눈빛출판사’ 이규상, 안미숙부부가 재방문 하셨고, 민속학자 심우성선생께서는 매일같이 출근하셨다.

성원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지난 17일 우리시장 기살리는 '장에 가자' 전람회가 한 달간의 일정을 마무리하였습니다.

 

그동안 많은 관람객들이 본 프로젝트에 동참하였고, 1,216명의 초상사진을 촬영해 드렸습니다.
전시 첫 날에는 개막행사로 인해 참석하신 많은 분들을 촬영해드리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그리고 KBS다큐 촬영에 의해 정선으로 떠난  2일에는 사진가 곽명우씨가 수고해 주셨고,
전시 마지막 날에는 누님 장례 치루느라 약속을 못 지켜 죄송합니다.

 

그러나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4월부터 전국 장터를 순회하며 힘을 결집할 생각입니다.
캠페인에 함께 해 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리며, 지속적인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도예가 김용문씨

 

철학자 채현국선생

 

원로 언론인 임재경선생

 

가정주부 장봉숙씨

 

사업가 이대훈씨

 

아프리카 봉사활동가 노인자씨

 

장봉숙, 심우성, 강송림시인

 

포항MBC 편성국장 최부식씨 부자

 

미래촌 김만수 동장

 

클라라, 사업가 김영재씨

 

2018평창동계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유승근 인력물자부장

 

서양화가 서길원씨

 

회사원 김기훈씨

 

사업가 권영진씨

 

시인 강송림씨

 

소설가 김정례씨

 

도예가 황예숙씨

 

문화기획가 홍명도, 이상철부부

 

사업가 김욱수씨

 

영화배우 양희경씨

 

사진가 이기명씨

 

회사원 심지윤씨

 

회사원 김중호씨

 

경기도미술관장 최효준씨

 

사업가 김택호씨

 

가정주부 조근숙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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