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철 화백의 아내 강고운 시인이 지난 8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배우자 : 신학철  / 자 녀 : 노현산



빈소 : 삼육서울병원 추모관 105호
발인 : 2019년 11월 10일 오전7시
장지 : 백제 승화원



아래 사진은 강고운 시인의 생전 모습과 추모관을 찾은 문상객 사진입니다.
고인을 추억하며 명복을 빌어 주시기 바랍니다.











































8일 저녁 장례식장을 찾은 문상객 입니다.

손장섭, 주재환, 김세균, 성완경, 공선옥, 정희섭, 이철수, 박불똥, 정희성, 장경호,

김진하, 김영진, 최석태, 이종구, 양기환, 서인형, 박흥순, 김윤기, 공윤희, 노광래,

정영신, 덕원스님외 다수





















지난 9월2일 오후6시, '인디프레스'에서 ‘한국현대 형상회화 2016’전이 열렸다.


이 전시는 화가 장경호가 인사동 ‘관훈미술관장’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열어 온 전시다.

한 푼 없는 가난한 화가 입장에서 매년 치룬 다는 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아직까지 시원하게 풀리지 않는 형상미술의 실체를 보여주기 위한 그의 고집이 아닌가 생각된다.

형상미술은 80년대 초반, 민주화가 진행 중인 시대에 격렬한 예술로서 시대적 위기에 맞선

인간과 삶의 문제를 풀어가던 우리 미술의 한 축이기도 하다.

그 무렵 세상 밖으로 밀려나온 민중미술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그 당시 한강미술관장으로 있을 때, 젊은 에너지를 일으켜 장경호를 민중작가로 보는데, 그 건 아니다.

민중미술보다 형상미술이 삶과 시대현실에 더 강하게 다가가게 했다는 점을 그는 간과하지 않았다.

그래서 장경호는 화가이기에 앞서 이론가이고 기획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림을 통해 잘 못된 세상을 부정하고, 스스로를 반성하는 진정한 형상미술 작가가 얼마나 될까?

그 해답으로 장경호가 끌어낸 작가가 이번에 출품한 작가들이 아닌가 생각한다.

미술을 제대로 모르는 내가 보아도 참신하고 신선했다.

지난 해와 달리 박불똥에서 정복수로 일부 선수가 교체되었지만, 모두가 말하려는 개성이 뚜렷했다

공성훈, 성병희, 이샛별, 이세현, 이흥덕, 장경호, 정복수, 차혜림, 최경선, 최경태, 황세준씨 등 열 한명의 작품이 걸렸는데,

내가 몰랐던 또 다른 가치를 일깨우게 한 전시였다.

장비처럼 호방하게 생긴 장경호는 너무 많은 것을 알아 그림이 많지 않다.

왼 만하면 내 놓아도 될 텐데, 쪽팔리기 싫어 지우기를 반복하니, 그림이 남지 않는 것이다.

이번에 출품한,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도 좋지만, 오래전 본 최시형의 초상화가 더 강하게 머리에 남아있다.

올 해 중에 열릴 ‘나무화랑’ 초대전이 벌써 기다려지는데, 이 친구가 외로움을 너무 많이 타,

술 자리를 넘보아 그게 맘에 걸리지만, 살아남기 위해 잘 해낼 것으로 믿는다.

‘한국현대 형상 회원전’에 장경호이야기가 많은 것은 그가 주도하는 전시이기도 하지만,

형상미술하면 그를 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날 작가들 외에도 김세균 정의당 공동대표인 김세균선생, 미술평론가 최석태씨, 사진가 정영신, 강고운시인,

김정대 관장, 노광래 관장, '아라리오 서울'의 박선영씨, 배성일씨 등 많은 분들과 어울려 ‘청하’에서 취했다.


이 전시는 통인동에 있는 '인디프레스'(010-7397-8498)에서 21일까지 이어진다.

사진, 글 / 조문호


























































 

 

“꽝~ 퍽~ 쨍~
승용차를 오함마로 두들겨 부수는 통쾌한 소리다.
폐차일지라도, 세월호에 성난 국민들의 분노고
음모의 틀을 깨부수라는 원혼들의 절규였다.“

이건 성남에서 열린 '저항예술제' 퍼포먼서 한 장면이다. 
이 퍼포먼스 하나가 저항예술제의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양혜경씨는 어린 원혼들을 위한 넋전 춤을 추고 있었고,

삐라가 어지럽게 늘린 행사장 주변에는 다양한 게릴라성 퍼포먼서가 이루어졌다.

사진가 김영준, 장영식, 정남준씨가 참여하는 '저항전'도 눈에 띄었다. 



한국민예총과 성남민예총이 공동 주최한
'제1회 저항예술제' ‘예술대단지사건’은 그렇게 열리고 있었다.

지난 23일, 신학철화백을 비롯하여 최석태, 하태웅, 강고운시인과
성남 오리공원에서 열리는 '저항예술제'에 참여하기로 작정했다.

충청도에서 함께 지내다 목적지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으나
고물 핸드폰이 꺼져버려 연락이 끊겨 버린 것이다.
일행들의 전화번호 하나 외우지 못했으니 난감했다.

여기 저기 다니며 사람 찾느라, 진득하게 보진 못했으나
눈에 띄인 '저항예술제'의 면면을 담았다.

사진, 글 / 조문호

 

 

 

 

 

 

 

 

 

 

 

 

 

 

 

 

 

 

 

 

 

 

 

 

 

 






 

 

세상을 하직 한지 어언10년이 넘은 김진석화백의 유작을 찾아 길을 떠났다.
미망인 강고운시인과, 절친이었던 신학철화백, 그리고 후배 장경호화백과 미술평론가 최석태씨,

무예가 하태웅씨 등 가까운 몇 명이 조를 맞추어, 흐릿해져 가는 그의 혼 불을 찾아 나선 것이다.

길을 떠난 22일은 윤주영선생의 사진전과 민미협 ‘역사의 거울전’ 개막식이 동시에 열리지만,

오래전부터 나들이 약속을 잡아둔 터라 펑크 낼 수가 없었다.

더구나 강고운씨는 인사동 가게 문까지 걸어 닫고 떠날 준비를 한다는데...

사실 김진석화백의 유작전을 위해 작품들을 촬영하려는 이유였으나,
패밀리를 자처하는 이들 끼리 콧바람 한 번 쐴 계략도 한 몫 한 것이다.
아침 일곱시에 만나 작품들이 보관된 충청도로 떠났다.

현장 창고에 보관된 작품들을 훑어보니, 이게 장난 아니었다.
작품들도 많지만 100호나 되는 대작들을 밖으로 끌어내기가 만만찮았다,
유리 낀 작품들은 신경이 쓰였으나, 모두들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신학철선생의 지휘로 하태웅씨가 끌어내면, 강고운씨는 걸레로 닦고,

최석태씨가 규격과 내용을 메모해 두면 장경호씨가 정리하는 식인데, 셔터만 누르는 내가 제일 편했다.

최석태씨는 바닥에 쓰인 깨알 같은 글씨를 판독하느라 아예 땅바닥을 기었고,

장경호씨는 미술관장의 오랜 관록을 보여주듯 안전하게 작품들을 정리해 넣었다.

김진석화백은 80년 국전대상 수상작가로, 홍익대를 거쳐 전북대 미대교수로 재직하다 2004년 2월경에,

환갑도 넘기지 못한 나이로 아깝게 세상을 떠났다. 사랑하는 남편을 떠나보낸 아내 마음이야

그 그림들이 원수처럼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니 오랜 세월 창고에서 먼지만 쌓였던 것이다.

고인의 유작들은  황토 길을 헤집은 개미집 같기도 하고, 때로는 시멘트 바닥의 기포 같은 물질적 표상들을

패턴화하고 있었다. 작품마다 작가의 깊은 고뇌와 사유가 엿보였다.

그러나 창고 깊숙이 들어앉은 먼지 쌓인 작품일수록, 감성이 출렁였다.

학창시절이나 젊을 때의 작품들은 마치 물감이 캔버스 밖으로 밀려날 것 같았다.

김진석화백의 초창기 작품에서부터 마지막까지, 그 많은 작품들을 훑어보며 한 작가의 변천 과정도 읽을 수 있었다.

아무튼 오랜만에 외출하게 될 그의 혼 불이 재조명되어, 많은 영감을 주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너댓시간의 작업을 끝마친 후 계곡에 가서 토종 닭을 안주로 몸보신도 했다.

때로는 절집을 돌아다니기도 했는데, 자연 속에서 마시는 술은 잘 취하지도 않았다.

'앵두나무'에서 '오동동'으로 넘어가는 메들리로 시작하여 '성냥공장'에서 '봄날'까지 모조리 불러재꼈다.

얼마나 꼬라지가 불쌍하게 보였으면 팁으로 신사임당 지폐가 두 장이나 나왔겠는가?

 

술이 객기에 부채질 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너무 과해 제풀에 꺾여 잠들게 만들었다.

그래서 중계방송이 중단된 것이다. 이건 분명 직무유기로 파면감이다.

사진,글 / 조문호

 

 

 

 

 

 

 

 

 

 

 

 

 

 

 

 

 

 

 

 

 

 

 

 

 

 

 

 

 

 

 

 

 

 

 

 

 

 

 

 

 

 

 

 

 

 

 

 



 

평소에는 한참 기다려야 했던 병원이나 식당들이 모두 비어 있었다.

피서 떠난 4일의 서울은 평양 거리인양 낮 설었다.

 

장경호씨와의 약속으로 ‘한국현대형상전’이 열리는 ‘팔레드 서울’로 갔다.

그 곳에도 관객은 있을 리 없었다. 단 한 사람 박 건씨를 만났을 뿐이다.

장경호씨는 전시 마무리가 가까워와서야 도록을 만들겠다며 작품촬영을 부탁했다.

전시 못 본 분들을 위한 배려인 듯싶었다.

 

촬영을 끝내고 인사동 ‘무다헌’으로 넘어왔다.

주인만 앉은 가게에서 메뉴에도 없는 막걸리와 소주를 시켜놓고, 꼬이는 일들을 한탄했다.

술을 마시다 장경호씨가 말을 꺼냈다.

여지 것 공부하고 체득해 온 자신만의 미술론을 하나 둘 발표해야겠단다.

 

그리고 22일에는 신학철, 최석태, 강고운씨와 함께 고 김진석 화백의 생가에 들리기로 약속했다.

강고운시인의 남편이며 신학철화백 친구였던 김진석씨의 유작전을 위한 준비다.

그 핑게로 마음 맞는 사람들 끼리 어울려 여행할 생각하니 기분이 들떴다.

뒤늦게야 이두엽씨를 비롯한 여러 명의 손님들이 들어닥쳤다.

 

장경호씨의 한계 주량 막걸리 두 병을 넘기자 강고운씨가 바짝 긴장한다.

행여 다른 손님들에게 실수할까 걱정하기에 그만 퇴청하자며 꼬드겼다.

괜찮다고 퍼져 앉은 그를 두고 나오기가 편치 않았지만 나와야 했다.

재미없이 혼자 있어야 그도 일어나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가 발표하려는 미술론이 미술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면 좋겠다.

 

사진,글 / 조문호

 

 

 

육이구 선언한 날, 속 시원한 선언이라도 없을까 기대하는 중에 술 마시러 오라는 기별이 왔다.

 

인사동 ‘무다헌’에는 몸이 불편한 이계익 전 장관을 비롯하여 서양화가 신학철, 장경호, 시인 정희성,

김명지, 강고운씨가 모여앉아 술판을 벌여놓았다.

 

신학철선생은 두 달 전 아내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내 술자리를 자제해 오다 오랜만에 인사동에 나온 것이다.

물론 장경호씨의 전화에 비롯되었지만, 작업이 풀리지 않아 붓을 내던지고 왔단다.

 

시위현장의 야전사령관격인 신학철선생께서 술잔을 기울이며 오래 전 이야기를 꺼냈다.

격렬한 시위현장에서 돌멩이를 잡았으나 차마 던지지 못하겠더란다.

그 돌멩이에 누군가 맞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 연약한 양반이 아직까지 시위현장을 맴돌아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장경호씨는 '무다헌'에서 팔지도 않는 막걸리를 공수해 마시며, 통풍 때문에 맥주 못 먹는 날 위해 시바스리갈을 시켜주었다. 

너무 감격스러워 박통처럼 총 맞아 죽어도 좋다싶었다.

 

모처럼 다들 즐거워하는 모습에 기분 좋아, 어린애로 돌변하는 주벽까지 슬며시 도졌다.

모든 걸 내려놓고 놀았으나 다행히 총 맞지 않고 살아남았다.

 

 

사진,글 / 조문호

 

 

 

 

 

 

 

 

 

 

 

 

 

 

 

 

 

 

 

 

 

 

 

지난 1일 오후7시 무렵의 인사동은 주변 도로가 통제된 채, 시위대와 경찰의 대치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근로자의 날을 맞아 서울광장에서 벌인 민노총 조합원들과 세월호 유가족 등 이천오백 여명의 시위대가

청와대로 가려 안국동 방향으로 진입해 인사동 일대가 경찰과의 대치장소가 된 것이다.

‘무다헌’에서 장경호씨를 만나기로 하였으나 골목까지 봉쇄되어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간신히 경찰저지선을 뚫고 들어갔는데, 강고운, 정희성시인, 장경호화백 등 몇 명이 앉아

바깥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게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나 술자리에 퍼져 있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급하게 소주 반병을 마시고 카메라만 챙겨 나갔다.

최저임금 인상과 노동시장 구조개악 폐기, 세월호 진상규명 등을 촉구하는 시위대는 경찰차에 밧줄을 매달고

경찰저지선을 흔들어 댔고, 경찰은 최루액을 섞은 물대포와 캡사이신을 쏘는 등, 인사동 일대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오후 9시 40분 경 경찰은 1차 해산명령을 발표한 뒤 대열 맨 앞 참가자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에 붙들린 참가자 한명은 머리가 땅에 떨어져 부상을 입어 실려 가기도 했다. 

참가자들이 해산하지 않자 경찰은 살수차에서 물포를 시험 발사한 후,  연거푸 다량의 최루액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물포에는 다량의 캡사이신이 섞여 호흡곤란과 피부 고통을 유발했다. 

밤 11시 10분 경부터 약 40-50분 동안 경찰은 훨씬 강한 농도의 캡사이신이 섞긴 물포를 줄기차게 발사했다.

사람들은 물포의 물에 약간만 닿아도 “불에 데인 듯 쓰라렸다”면서,

군사독재 시절 거리에 쏟아진 최루탄 보다 훨씬 심각한 수준이라며 고통을 호소했다.

 

특히 최루탄은 바람이 불면 날라가지만 이번 최루액 물포는 물 방울이 공기 중에 떠다니면서

코와 입을 계속 공격하고 피부에 흡수돼 직격으로 맞지 않았더라도 심각한 통증을 초래했다.

마지막에는 세월호 가족들이 나서 물포 발사 중단을 호소했지만, 그들에게도 물포를 쏘아댔다.

 

정말 오래 만에 맡아보는 지독한 최루 냄새였다. 87년도 민주항쟁 시절 당한 후 처음이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한 건 없었다. 단지 최류탄에서 최류액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저지방법은 더 치밀해져 시위대가 제대로 힘을 쓸 수 없도록 만들었다.

87민주항쟁으로 그 지긋지긋한 군인정치에서 벗어났지만, 그 뒤의 정권들도 별 수 없었다. 

오히려 빈부격차만 높아져 가난한 사람만 더 살기 힘든 세상이 되어버렸다. 
정치판은 재벌들과 협잡하느라, 민생은 뒷전이다.

더럽다고 내 버려둘 일도 아니니 가슴이 답답한 것이다.

물대포 한방 맞고 콜록대며 ‘무다헌’으로 기어들었지만, 술 취한 장경호씨 말대포에 또 한방 얻어 맞았다.

사진,글 / 조문호

 

 

 

 

 

 

 

 

 

 

 

 

 

 

 

 

 

 

 

 

 

 

 

 

 

 

 

 

 

 

 

 

 

 

 

 

 

 

 

 

 

 

 

 

 

 

 

 

 

 

지난 24일 늦은 오후, 장경호씨를 만나러 '무다헌'에 갔다.
위스키 한 잔으로 시작한 술판이 좀 과했다.
개털 주제에 큰 사고를 친 것이다.

외상 술 맛이 좋아서인지 잘도 넘어갔다.
취기가 오른 '무다헌' 주모 강고운 시인의 노래도 듣고,

유모러스한 넋두리도 들었다.

그날따라 오래 전 세상을 떠난 지아비,
서양화가 김진석씨가 그리웠던가보다.

 "예술가는 모두 사기꾼이야!" 라며 말을 꺼냈다.

 김진석씨가 첫 프로포즈 할 때, 구라를 좀 푼 모양이다.

 

시골에 땅도 방도 많다는데, 막상 가보니 산은 문중 땅이고
방은 달랑 두 갠데, 그것도 하나는 창고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저기 보이는 별도 모두 우리거라'고 너스레를 떨었단다.

그리고 시어머니께서 하신 하소연이 재밋다.
어렵게 사는 게 늘 안타까워,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단다.

"더러븐 기술은 배아가지고..."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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