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강민선생을 뵙기위해 인사동으로 나갔다.
일에 빠져 약속시간을 20분이나 늦어 송구스러웠다.

 

강 민, 김승환선생과 ‘포도나무집’에서 식사하며 딸기 술도 마셨다.

 

이차로 간 ‘유목민’에서는 이행자시인과 심우성선생,

장경호씨를 만났고, 늦게는 정기영, 허미자씨도 왔다.

 

해삼과 굴에다 밑반찬으로 더럽 까지 나와 술상이 그득했다.

낯 술에 약한데다 막걸리를 데워 먹었더니, 금세 올랐다.
술 취하면 돌아다니는 버릇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김주대시인의 문인화전과 조성제씨의 ‘우포늪’전에 들렸다.
인사동거리에서 김명성, 김주대 시인과 박진화 화백도 만났다.

늦게 간 ‘무다헌’에서는 너무 취해 모두 잊어버렸다.
얼마나 잤는지, 눈을 떠 보니 배성일씨가 와 있었고, 장경호씨는 취해 있었다.
주인장 강고운시인을 갑질 행세한다며 나무라고 있었다.

요즘은 갑의 수난시대다.
독수리도 까마귀 무리에 쫓기는 시대란다.
집에서도 갑보다 을이 더 편하던데, 왠 갑질 논쟁일까?

사진,글 / 조문호

 

 

 

 

 

 

 

 

 

 

 

 

 

 

 

 

 

 

 

 

 

 

 

 

 

 

 

 

 

인사동의 음유시인 송상욱선생께서 마련한 “반야월선생 추모가요제”가
지난 13일 오후4시부터 인사동 ‘무다헌’에서 열렸습니다.

이 날 행사장에는 반야월선생 유족을 비롯해 원로시인 김남조선생, 김영복, 김의권씨 등
30여명이 참석하여 ‘무다헌’의 좌석을 메웠습니다.
뒤늦게 온 김명성씨는 앉을 좌석마저 없었습니다.

‘무다헌’ 주모 강고운 시인의 사회와 징 울림으로 시작된 가요제에서
송상욱선생은 ‘반야월선생님’이란 제목의 헌정시를 낭송하였고, 추모 춤판도 벌어졌습니다.
송상욱선생께서는 ‘세세년년’을 비롯한 반야월선생의
주옥같은 노래 10여곡이 불러 참석한 분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답니다.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열린 구본주예술상 시상식에서 서양화가 신학철선생을 만났다.

 

그 상찬 뒤풀이에 어울려 기분 좋게 마셨건만, 뭔가 아쉬워 ‘무다헌’으로 자리를 옮기자는 것이다.

신학철선생을 비롯하여 서양화가 장경호, 시인 김정환, 송경동, ‘문학동네’ 강병선씨가 함께 갔으나

술집 문이 잠겨, 끝내고 들어간 주모 강고운 시인을 다시 불러내야만 했다.

 

인사동에서 담배 피며 술 마실 수 있는 집이 '유목민'과 '무다헌'외는 없는데다,

그 것도 숨은 듯 조용한 집이 바로 ‘무다헌’이기 때문이다.

자정이 가까워오자 김정환씨를 비롯한 나그네들이 한 사람 두 사람 빠져 나가고,

신학철선생과 장경호씨만 남아 쓰잘데 없는 이바구에 맥주를 말아먹었다.
문득 “오늘 강적에게 걸렸구나!”하는 생각이 스쳤으나 이미 빼도 박도 못할 형편이었다.

 

앵두나무 우물가의 바람난 처녀가 비내리는 호남선 타는 노래를 돌려 부르며 낄낄거렸으니 술 맛은 났다.

밤이 깊어가자 장경호씨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고, 주모는 설거지하느라 자리를 비워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그러나 신학철선생의 이런 저런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 것이다.

띄엄띄엄 말하는 진솔한 이야기 속에서 신학철선생의 또 다른 인간적 면모를 보게 되었는데,

한마디로 '된장 같은 사람'이란 생각이들었다. 
옆집 아저씨 같은 소탈한 모습처럼, 소박하게 살아가는 의리의 사나이란 것쯤은 알고 있었으나

가까이 지켜보니 마음이 너무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얼굴은 늘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안으로는 오랜 세월 병석에 누운 아내 걱정과 밖으로는 세월호에 희생된 어린이들을 비롯하여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가 그럴 수 밖에 없겠지만, 우울하다 못해 너무 슬퍼 보였다.

 

그동안 아내 간병하느라 그림도 제대로 그리지 못했으나, 이젠 요양원에 입원해 좀 여유가 생겼단다.

그러나 남의 아픈 일을 그냥 보지 못하는 성격이라 세월호 집회를 비롯한 각종 투쟁현장에 쫓아다니느라 더 바쁘다.

이제 칠순을 넘긴 노장이지만, 야전사령관 같은 투사로서의 기질은 여전하다. 

 

여지껏 몸으로 부딪히는 일 외에도 ‘민예총’ 살림이나 남을 돕는 모금에도 먼저 나섰다.

경제적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아픔 보다 남의 아픔에 못 견디는 태생적 천성 때문이리라.
도울 일만 있으면 만사를 제쳐놓고 그림을 그려서는 그 그림을 팔아 도움을 주는 식인데,

자신보다는 남을 위해 그림을 그린다는 말이 맞는 말일게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면 가정주부나 다름없다.

긴 세월 떠맡아 온 살림이긴 하지만 여인네들 빰 칠 정도로 세심하고, 음식 맛을 내는데도 일가견이 있단다.

그가 끓인 구수한 된장국 냄새가 인사동까지 번지는듯 하다.

 

젠가 신학철선생 댁을 급습하여 된장국을 안주로 소주한 잔 하고 싶다.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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